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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01

유원상/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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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06 시즌3.2. 2007 시즌3.3. 2008 시즌3.4. 2009 시즌
3.4.1. 2009 시즌 부록
3.5. 2010 시즌3.6. 2011 시즌
4. LG 트윈스 시절5. 2011 시즌6. 2012 시즌7. 2013 시즌8. 2014 시즌9. 2015 시즌10. 2016 시즌11. 2017 시즌
1. NC 다이노스 시절
1.1. 2018 시즌1.2. 2019 시즌
2. kt wiz 시절
2.1. 2020 시즌2.2. 2021 시즌
3. 은퇴

1. 개요

유원상의 KBO 리그 선수 경력을 다루는 문서다.

2. 아마추어 시절

잠신중학교를 다니다가 2001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2003년에 귀국하는 과정에서 1년을 유급하였다. 고1이던 2003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나지완, 임훈, 남윤희, 서동환이 활약하던 신일고에게 5-9로 석패하였고 본인은 감투상을 수상했다.# 이 당시 감독은 아버지 유승안의 빙그레 시절 후배 포수였던 김상국이었는데 유승안의 모교인 경동고와의 게임에 유원상이 등판하자 유승안이 김상국에게 "북일에는 투수가 유원상밖에 없냐?"고 따졌고[1] 이에 김상국은 "학부모가 감독의 작전 및 선수기용에 관여하는 겁니까?"하고 재치있게 받아쳤던 일화가 있다.

고3이던 2005년에는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8과 1/3이닝동안 1피안타 무실점으로 진흥고 타선을 봉쇄하며 1-0으로 승리를 거두고 MVP에 선정됐다. 북일고의 첫 무등기 우승이었고 당시 감독은 전대영이었다.#

3. 한화 이글스 시절

3.1.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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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기주, 나승현 등과 함께 고교 빅3로 불릴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하체를 제대로 쓰지 않으며 상체 힘으로만 던지는데도 시속 140km 후반대의 빠른 공을 쉽게 구사해 한기주의 바로 뒤 정도 드는 우완으로 꼽혔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한화 이글스는 1차 지명자를 유원상으로 지목했고, 아버지 유승안메이저리그 떡밥을 깔며 충돌했지만# 유원상은 결국 5억 5천만 원이라는 구단 내 최고 계약금을 받으면서 입단하였다. 게다가 등번호 18번[2]도 주고, 거기에 더해 10승 달성시 1억 5천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옵션을 걸기도 했다. 협상 과정에서 유승안이 좀 감정이 상해 있던 데다가, 메이저리그 떡밥 때문에 팍팍 치켜세워준 점도 있지만 당연히 제 1원인은 유원상 본인에 대한 기대였다. 이를 보고 한화팬들은 전 한화 감독으로 있었던 유원상의 아버지 유승안의 퇴직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팬들의 기대가 굉장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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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시범경기가 시작할 때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넘어 1군에 아예 오르지 못했다. 곧바로 1군에 올라와 엄청난 활약을 벌이는 류현진과 달리, 유원상은 시즌 내내 2군에 있어야만 했고 한화 팬들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계약금을 받고도 활약하지 못하는 유원상에게 많은 실망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몰랐다. 이게 시작이라는 것을.

3.2. 2007 시즌

유원상의 한 학년 후배이자 당시 천안북일고의 에이스로 김광현, 정영일과 함께 전국구 투수였던 장필준이 2007년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고도 상무에 입대했다. 한화 구단이 유원상보다 3억 이상 낮은 1억 8천만 원 ~ 2억 원 선의 계약금을 제시하여 계약이 틀어진 것이다[3].

후반기 엔트리 확장 때야 간신히 1군에 올라와 8경기(선발 2경기)에 등판했다. 가을야구에선 준플레이오프에서 2.1이닝 2실점으로 아쉬웠으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9.2이닝 2실점 1자책 0.93의 맹활약으로 내년을 크게 기대하게 만들었다.

의외로 1군에서 나름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KIA 타이거즈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첫 승리를 챙기기도 하는 등 어쨌든 가을 야구에도 참가하였다. 성적은 투고타저라 보기보단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젊은 선발 투수류현진 하나밖에 없었던 한화 팬들은 꽤나 가능성을 보였던 유원상에게 기대감을 다시금 가지게 된다. 특히 가을야구에서 크레이지 모드를 선보이며 가을전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한 것도 이 해.[4] 하지만 한화 이글스에서의 가을야구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5].

3.3. 2008 시즌

첫 선발 경기 때 히어로즈를 상대로 무참히 털리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등판 횟수가 적어졌다.

게다가 차라리 깔끔하게 안타를 맞으면 좀 나은데, 볼넷만 계속 내 주면서 장작만 쌓아놓는 경기 내용을 선보여 한화팬들의 울화통을 더 자극하게 되었다. 단, KIA하고 경기할 때 빼고. KIA전만큼은 정말 같은 투수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좋은 실력을 보여주었고, 덕분에 기록은 팀의 에이스인 류현진보다 더 좋았다.

하지만 KIA 타이거즈와 맞붙었던 경기 자체가 거의 없었고, KIA를 제외한 다른 팀과의 상대는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어서 팬들은 그에게 유화상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그래도 상반기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 전에도 그럭저럭 승이 많았고, 7월에는 선발로 나온 5경기를 다 승리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8월이 되자 선발출장 자체가 없었고, 중간계투로 나왔을 때도 털렸다.

그런데 9월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상대하는 모든 팀을 KIA 타이거즈로 만드는 놀라운 플레이를 보이며, 비록 팀은 타선의 침묵 속에 가을 야구에 실패했지만, 자신만은 가을 야구 모드를 발동하였다.[6]

9월에 31⅓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0.57. 이 기록으로 획득한 별명이 가을전어 '유전어'. 이 덕분에 2008년 신인왕 투표에서 96표 중에서 4표를 얻으며 3위를 했다. 신인왕은 최형우.

2008년은 32경기 21번의 선발 출장 123⅔이닝 5승 4패와 평균자책점 4.66을 기록했다. 볼질이 심하고 팬들의 기대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즌 마지막에 괜찮은 실력을 보여주며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다.

3.4. 2009 시즌

2008년 9월의 미친 듯한 활약에 한화팬들은 '올해는 뭔가 해주겠지' 라는 기대를 가졌으나, 결국 시범경기에서 신나게 맞아버렸고, 2선발에서 밀려버린 뒤에 팬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

일례로 5월 1일 군산 경기에서 KIA의 추격으로 승리투수 요건이 날아가서 실망해하며 라커룸을 빠져나가자 한화 팬들이 "그렇게 던져서 승리투수되면 말도 안 되지…."라면서 먼저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KIA만 만나면 날라다니는게 그나마의 존재 이유였으니. 한기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걸 유지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못하게 되면 입지가 매우 위태했다.

결국 5월 초 고질적인 제구력 난조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2군으로 추락. 그런데 2군에서 한용덕 코치의 조련(용덕매직)을 받아서 각성을 한 건지 같은달 26일 삼성 청주전에서 5⅓이닝 5피안타 3볼넷 1실점의 역투를 펼친데 이어 31일 두산전에서도 6이닝 5피안타 2볼넷 2실점의 시즌 첫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경기들은 한화 타선이 시망….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는데도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7].

6월에 들어서 간신히 첫 승을 따냇는데, 이날 성적이 6이닝 동안 3피안타 3볼넷 2탈삼진 1사구 무실점으로 말 그대로 호투였다. 게다가 한화라는 팀으로서도 한밭구장에서 SK에게 11개월만에 승을 따내는 값진 승리였다. 전 경기처럼 이날의 승리도 브래드 토마스의 불쇼로 날라갈 뻔 했지만 타선의 도움과 SK의 적절한 주루 플레이로 겨우겨우 승리를 따냈다.

그러나 6월 12일 표적선발로 등판한 광주 KIA전에서 주전들을 적절히 뺀 타이거즈 타선에 1회 말에만 7점을 내주며 떡실신. 유전어가 되면 KIA에는 약해지는 건가 하는 팬들은 좌절하였다.

그래도 7월 한 달 동안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두 번이나 찍는 호투를 보여주며 드디어 그동안 안 터졌던 포텐이 터지나!하고 한화팬들의 설레발을 모았다.

그런데 결국 8월에 미친듯이 털리며 10월 한 달 동안 평균자책점 10.89를 찍어서 다시 팬들을 좌절시켰다.

3.4.1. 2009 시즌 부록

2009년 9월에 국가대표로서 야구 월드컵에 출전[8]해 버려서 한화 팬들을 경악에 빠트렸다.

그리고 야구 월드컵 1라운드에서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를 상대로 유화상스러운 투구를 하면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어 2라운드 니카라과전에서도 여전한 투구를 보여주면서 조기 강판되었다.[9]

시뮬레이션 형식의 중계를 보던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팬들은 공이 담장을 넘어가자 홈런을 외치며 명불허전이라고 직접 이글스 갤러리를 털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원상이 야구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 투수 중에서 그래도 가장 실력이 좋았다는 거였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일본 피닉스 교육리그로 가게 됐는데, 10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 등판하여 털렸다. 그나마 2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는 2실점만 허용하는 호투를 했지만 불펜이 털려서 시망.

3.5. 2010 시즌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첫 출장. 아무도 기대를 안했던 첫 경기 출장에 SK타선을 잘 잡고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도 높아지면서 호투. 과연 이번에도 낚시인가 진짜로 포텐이 터진 것인가! 두산 베어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6이닝 2실점으로 호투. 특히 무사만루에서 무실점으로 두산 타선을 틀어막는 장면은 이날의 백미.

하지만 이게 전혀 긍정적인 현상이 아닌 게 변화구 제구력은 조금 올라왔지만 아직 창창한 20대 투수의 구위가 30대 중반 노장 투수 수준으로 추락했다. 속구가 140km 넘기기도 힘겨운 상태. 롯데 양상문과 자웅을 겨루는 KBO 리그 최악의 투수코치 이상군의 조련효과, 이른바 상군매직이 실현된 것. 상군매직이라 함은….

그래도 정민철 코치가 있어서 어느 정도 제구력이 올라가고 있지만...

어쨋든 3번째 등판에서 히어로즈와 상대를 하게 되는데 적절한 변화구로 승리. 그리고 다음 날 김혁민이 히어로즈에게 아주 시원하게 털리면서 둘이 합쳐서 한 세트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여전히 평가가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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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010년 4월 23일, LG 트윈스를 상대로 생애 첫 완봉승을 하게 된다. LG의 6연승을 끊은 것과 더불어서 비슷한 스타일인 심수창과의 맞대결에서 완승을 거두게 된다. 물론 호수비가 받쳐 줬던것도 있지만 그래도 경기질 자체로 보면 나쁜 질의 경기도 아니었다. 완봉을 했는데도 투구수가 102개밖에 안 되었다! 모 한화팬 왈, "2회말 보다가 잠깐 졸았는데 마운드 위에 유원상이 있어서 2~3분 졸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8회말이더라"라고.

시즌 초반이라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시즌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무기인 슬라이더가 효과가 점점 나오고 있는 중. 시즌 끝나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일단 점점 실력이 늘어나고는 있다. 힘을 빼서 그렇지 맘먹고 던지면 여전히 145 이상은 쉽게 던진다. 다만 제구력이 낮아질 뿐이지.

5월 15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는 꽤 잘 던져 줬는데 수비에서 몇번 구멍이 나면서 패전 위기에 몰렸다가 타선의 지원으로 패전을 모면했다. 그리고 한화는 역전승(!).

7월 4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는 5이닝 무실점으로 4승째를 거두었다.

그러나 7월 9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는 KIA의 16연패 탈출[10]에 일조했다. 공교롭게도 KIA 16연패의 앞과 뒤는 한화였으며 선발투수 또한 그였다.

털리는 경기와 잘 하는 경기의 기복이 매우 큰 편으로 못할 때는 신나게 털리지만 그래도 이닝은 꾸역꾸역 먹어주면서 선발로 활약중. 아까운 건 포텐 터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3년 내로 군대에 가야 한다.

9월 1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5회 등판해 2이닝 2실점 1자책의 투구를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날씨가 시원해져서인지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솎아내고 평소의 130중반대 직구와는 달리 전광판에 149km/h(!)이 찍히는 등 가을전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 덕분에 팬들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본인이 털린 경기도 꽤 있지만 생각보다는 적으며, 불펜의 뽜이어나 2010년 포풍 물타선으로 폭풍퇴화한 한화 이글스의 물타선도 그의 불운의 투수로 만들며 5승 본능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 평자가 0.2밖에 차이가 안 나는 임태훈은 9승 10패(5.30)이나 유원상은 5승 14패라는 데에서 한화 타선과 불펜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대강은 알 것이다. 그래서 2010 시즌은 그저 불운한 3선발이지, 포풍같이 까일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의견이 꽤 많이 있었다.

3.6.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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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듯 제 값을 하지 못하다가 7월 11일 양승진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면서 대를 이어서 아버지의 친정팀 유니폼을[11] 입게 되었다. 한화로 온 선수는 김광수. LG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어쩌다가 깜짝 호투를 보여줄 때도 있었으나 여전히 털릴 때가 더 많았다...

4.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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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트레이드 반응

한화 팬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저 놈 잘 갔다"였다. 유원상은 팀 내에서 몇 안 되는 유망주였던 관계로 수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그 많은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리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줬다. 게다가 유원상이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선발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만큼 다른 투수들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여기 똥차가 길을 막고 있어요

사실 유원상이 이토록 오랜 기간 기대를 받은 것은 어쨌든 자질은 있었기 때문. 문제는 자기 자신의 멘탈과 코칭이었다. 김혁민이 그냥 제구가 안 돼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볼질을 하는 것과는 달리, 유원상은 본인의 심적 동요가 그대로 볼넷으로 이어지는 타입이었다. 문제는 이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구속과 구위를 낮춰서 한가운데로 던졌고, 당연히 볼넷 대신 안타를 헌납하게 되어 이래도 점수 주고 저래도 점수 주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상군매직의 대표적인 희생자.

결국 2011년 시즌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화 구단과 코칭스태프는 유원상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접어 버린 상태였다. 아예 패전처리 투수로 돌려 버린 것.[12] 따라서 트레이드 소식이 들려왔을 때, 놀라거나 불만을 가진 한화 팬은 거의 없었다. 단지 그 상대가 김광수라는 점이 불만이었을 뿐.

LG 팬들은 그나마 약간 기대를 했었다. 어차피 김광수의 나이와 잠재력이야 뻔한 일이지만, 유원상은 아직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터질 포텐셜이 남아 있었기 때문.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5.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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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랬듯 별 활약을 하지 못하다가 7월 11일 양승진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한화로 온 선수는 김광수. LG로 트레이드 된 이후 어쩌다가 깜짝 호투를 보여줄 때도 있었으나 여전히 털릴 때가 더 많았다.

6.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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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눈여겨본 차명석 투수코치의 권유에 따라 중간계투로 완전히 전환했다.

리즈를 대신하여 마무리로 전향한 봉중근, 제대한 우규민과 함께 우-유-봉 트리오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12년에는 마구마구에서 레어카드가 발급될 정도로 확실히 포텐이 터진 모습을 보였고, 주키치-유원상-봉중근을 본뜬 주유봉 트리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LG 팬들은 "우리들도 드디어 제대로 된 필승조가 생기는구나!"라며 기뻐하였으나 이 해 이후로는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실 플루크 아니었냐는 말도 나왔다.

7. 2013 시즌

3월 30일 개막전에서 7회말 팀이 2: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 1사 만루에서 최정을 상대로 공 1개를 던져 병살타를 유도하여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8회초 팀이 역전하면서 역대 12번째 1구 투구 승리 투수가 됐다.

4월 18일 경기, 그러니까 이 경기에서는 최희섭에게 쓰리런을 맞고 거한 대작 집필에 힘을 보탰다.

이후 허벅지 부상으로 5월경 2군으로 내려갔고, 7월경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우완 불펜인 이동현정현욱이 과부하 상태라 유원상의 부활이 팀에게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7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전 11회 말, 5:3 2사 1루 상황에 정말 오랜만에 등판해 세이브를 올렸다.

8월 9일, 역시 롯데와의 경기에서, 호투하여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리즈에 이어서 등판햇으나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고 2타자 연속 안타를 내준 뒤 강판됐다. 작년과는 달리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가을야구를 위해 갈 길이 바쁜 LG에 우려를 주었다.

잠시 2군에 다녀왔다가 8월 22일 SK 와이번스전에서 팀이 1:4로 지던 8회말 등판하였으나 1이닝 3피안타 2실점 2자책점으로 부진했다. 그래도 구속이 어느정도 살아나면서 재기의 조짐이 싹텄다는 게 위안거리. 바로 다음날 이어진 경기에서 팀이 10:4로 이기던 8회말에 등판,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으로 8회말을 삼자범퇴로 틀어막아냈다.

8월 27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는 3⅓이닝 30구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에 10타자 연속 아웃처리라는 놀라운 피칭 내용을 선보였다! 하지만 타선의 침묵으로 팀은 1:0 패.

이후로도 제구는 조금 불안해도 살아난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누르며 필승조에 활기를 불어넣어줄 선수라고 생각되었다.

9월 19일 SK전에서 6회말 류택현에 이어 등판했지만 김강민을 볼넷으로 내주고 만루를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다음타자 박진만에게 싹쓸이 2루타를 맞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타자 정상호에게 투런 홈런을 맞으면서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5점을 헌납했다.

결국 최종 성적은 2승 1패 1세이브 8홀드의,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마감. 포스트시즌에서 잘하지 않으면 연봉 삭감이 유력한 상황이다.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도 말아먹었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2이닝 2피안타 1볼넷 1사구(死球)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13]

시즌 후 연봉협상에서도 1억2,500만 원에서 5,000만 원 삭감(40%)된 7,500만 원에 계약했다.

7.1.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시즌에 앞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대회 전 연습경기에서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인 탓에 정작 1라운드에선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고, 팀이 1라운드 광탈한 덕에 팝콘을 열심히 튀기셨던 어떤 분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8.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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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한국 나이 29세까지 미필이었던 탓에 하루빨리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라 시즌 후 군 입대가 예상되었으나 구단별 미필자 배려로 인해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선발되어 금메달을 따내며 군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9. 2015 시즌

시작부터 혼자 장작을 쌓고 불을 질러 대는 모습을 보여 주어 이 녀석 훈련 기간에 뭐 했냐는 소리가 나오게 했다.

3월 28일 개막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역투하던 소사의 뒤를 이어 등판했으나 그 뒤 최용규의 3루타와 김주찬의 희생플라이로 소사와 본인의 주자를 전부 불러들여 개막전 패배에 일조했으며, 3월 31일 홈 첫 경기에서는 위기에 몰린 선발 루카스 하렐의 뒤를 이어 등판하였으나, 이전 경기보다 한 술 더 떠서 루카스의 승계 주자만 귀신같이 불러들이는 분식회계의 끝장을 보여줬다.

결국 4월 1일 1군에서 말소됐다. 양상문 감독은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4월 17일 1군에 등록되었으며 대신 신재웅이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같은 날 SK와의 경기에서 8회에 나와 2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17일과 같은 피칭은 그 다음부터 볼 수 없었으며, 주로 지고있는 경기에 나오거나 조기 강판당한 선발 뒤 나오는 패전 처리조가 되었다.

5월 9일, 장진용과 함께 1군에서 말소되었다.

5월 9일 이후로 2군에 계속 있는가 싶었더니 알고보니 허벅지 내전근 부상이 있었다. 하지만 6월 16일 소프트뱅크와의 2군 경기에서 나온 것을 보면 심한 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6월 21일에 롯데와의 2군 경기에서, 이여상에게 홈런을 맞는등 2와 1/3이닝 10실점하며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이후에는 2군 경기에도 등판하지 않고 있는데, 양상문 감독의 말에 의하면 팔꿈치가 좋지 않다고 한다.

이후 1군 패전처리로 등판, 2이닝동안 5K를 잡기도 했다.

8월 11일에는 윤지웅 다음 투수로 등판, 공 1개로 나바로를 땅볼 처리하고 8회 1아웃까지 잡은 이후 이동현과 교체되어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승.[14]

8월 30일 대구 삼성전에는 선발 김광삼의 뒤를 이어 2번째 투수로 등판했으나, 1과 1/3이닝 동안 이승엽나바로에게 홈런 2개를 얻어맞은 것을 포함해 5피안타 5실점(5자책)으로 제대로 불을 지르며 패전의 멍에를 썼다. 수비 실책으로 박해민에게 농락당하며 뼈아픈 실점을 당한 후 크게 흔들리며 강판당했고, 이어서 등판한 윤지웅이승엽에게 볼넷을 내주고 박한이에게 안타를 얻어맞으며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9월 5일 롯데전에서는 올라오자마자 최준석에게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아 팀의 패배를 확정짓고 말았다. 결국 다음 날 또 1군에서 말소됐고, 그대로 시즌은 끝.

10.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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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17 시즌

8월 19일 삼성전에 앞서 1년만에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다. 그리고 이 날 경기에 나서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렀다. 하지만 이후 인상적인 활약은 보여주지 못한 채 6경기 7.1이닝 ERA 6.14의 성적만 기록한 채 시즌을 마치게 된다.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FA도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를 통해 NC 다이노스로 자리를 옮겼다. 공교롭게도 손시헌과 같이 개인 훈련을 하다가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날 동생kt wiz에서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1. NC 다이노스 시절

1.1.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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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에서의 첫 시즌. 초반에는 팀 투수진이 흔들리는 가운데 필승조를 맡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시즌 초의 잦은 등판 이후 구위는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8월 들어서는 분명 1군 엔트리에 등록되어 있음에도 2주, 한 달 간격으로 등판을 하는 등 감독투수코치의 비정상적인 투수 운용 때문에 팬들은 그의 존재 여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최종 성적은 41경기 47.1이닝 1승 4패 5홀드 63피안타 17볼넷 30K ERA 6.46.

1.2. 2019 시즌

이동욱 감독은 유원상을 5선발 후보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 정말 선발로 전환하게 된다면 2011 시즌 이후 무려 8년 만에 선발로 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막 엔트리에도 들지 못하다가 4월 22일이 되어서야 1군으로 콜업되었다. 그리고 24일 kt wiz전에서는 10-2로 앞선 9회 구원 등판해 1이닝을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5월 2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6으로 앞선 12회 구원 등판했다. 1군 콜업 이후 세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며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더니 이번 상황에서도 KKK로 상대를 틀어막으며 승리를 지켜냈다. 시즌 첫 세이브이자 2013년 7월 16일 이후 무려 2117일 만에 올린 세이브였다.공교롭게 그때도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할 때였다.

5월 3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7-2로 뒤진 5회부터 구원 등판해 2.2이닝을 35구 1피안타 1사구 1K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재학, 김영규가 모두 선발 로테이션에서 이탈하면서 5월 15일 SK 와이번스전에서 대체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 2792일 만에 선발 등판인데 그것도 크리스티안 베탄코트와 배터리를 이루게 되었다. 1회는 삼진 - 삼진 - 뜬공으로 단 10구만에 이닝을 끝냈으나 2회에는 제이미 로맥에게 2루타, 나주환에게 투런 홈런을 맞으며 2실점했다. 3회 들어서는 갑자기 제구가 되지 않으면서 볼넷 두 개와 안타로 1사 만루를 채웠다. 다행히 로맥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만 내주는 것에 그쳤다. 4회에는 볼넷 하나를 내줬으나 무실점. 총 4이닝 56구 3피안타 1피홈런 3볼넷 4K 3실점을 기록하면서 기대에 비하면 크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팀이 7-3으로 패배하면서 시즌 첫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2군으로 내려갔다가 6월 10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11일 키움 히어로즈전에서는 8-8 동점이던 10회에 구원 등판했으나 선두타자부터 2루타로 출루시키더니 땅볼로 1사 3루가 된 상황에서 제리 샌즈에게 역전 희생플라이를 허용했다. 결국 이 점수가 결승점이 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12일 경기에서도 연장 11회 4-4 동점 상황에서 구원 등판했다. 이번에도 1사 이후 안타를 맞더니 2사 이후 다시 안타와 1타점 2루타를 연속해서 맞으며 이틀 연속 역전을 내줬다. 결국 이번에도 타선이 이 점수를 따라붙지 못하면서 또다시 패전 투수가 되었다. 경기 직후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7일 다시 1군으로 올라왔다. 13일 kt wiz전에서는 7-1로 뒤진 7회 1사 2, 3루에서 구원 등판해 희생플라이와 적시타로 2점을 그대로 내줬다. 8회에는 볼넷과 안타를 내주고도 실점하지 않았으나 9회에는 안타 4개에 내야에서 실책만 3개가 쏟아지면서 4실점을 했다. 총 2.2이닝 43구 6피안타 1볼넷 4실점 1자책.

7월 17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14-1로 앞선 9회에 등판해 1이닝을 1피안타 1K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경기를 끝냈다.

7월 30일 두산 베어스전에서는 5-1로 뒤진 9회 1사 1, 2루에서 구원 등판했다. 이미 승부는 기운 상태였으나 볼넷으로 만루를 채운 후 땅볼로 1실점을 하더니 다시 볼넷으로 만루를 채우고선 싹쓸이 3루타를 맞으면서 스코어를 9-1까지 벌려놓고 말았다. 팀은 그대로 패배.

시즌 기록은 15경기 1선발 20.2이닝 3패 1세이브 21피안타 2피홈런 9볼넷 14K ERA 5.23.

시즌이 끝나자 엔갤엠엘비파크 등지에서는 윤지웅과 함께 방출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11월 30일, KBO 공시를 통해 방출되었다.

2. kt wiz 시절

NC 다이노스에서 공식적으로 방출을 당하기 전부터 NC에서 정리대상이 된 이후 kt wiz 마무리캠프에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12월 4일 KT 입단이 확정되었다. 실제로 KT의 마무리 훈련에 합류한 것은 맞지만 합류 이후 한 달 가량 테스트를 받은 것이었고,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동생인 유민상처럼 kt wiz에서의 경력이 생겼다.

2.1. 2020 시즌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였으며, 5월 21일까지 4경기에 불펜으로 등판하여 5이닝 ERA 5.40을 기록하였다.

5월 22일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왔다.

5월 26일 수원 KIA전에서 7회초 무사 1,3루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첫 등판을 가졌으며 결과는 1피안타 13구로 이닝을 마무리하였다. 동생은 5구 유격수플라이로 돌려보냈다. 첫 등판은 그럭저럭 무난했으니 김성훈, 이강준 등과 함께 나는 필승조다(…)를 찍을 전망이다. 이날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 형제 맞대결을 펼쳤다. 1995년 정명원 & 학원 형제 이후 두 번째로 펼쳐진 형제간의 대결에서는 원 스트라이크 쓰리볼에서 친 5구가 유격수 뜬공으로 잡히며 형인 유원상의 승리로 끝났다.

5월 29일 고척 키움전 6회말에 등판. 안타 하나만 맞고 7회에 다시 올라왔으나 선두타자 2루타 + 안타 + 희플 후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김민수와 교체되었다. 승계주자는 김민수가 모두 분식하며 1.1이닝 3자책이 되었다.

5월 31일 키움전에 다시 7회말에 등판했으나 선두타자 볼넷 + 진루타 + 안타로 1실점하며 주권을 또 소환했다.
이날 기록은 0.1이닝 1실점. 그 와중에 귀신같이 홀드를 기록했는데 이게 이적 후 첫 홀드였다.

6월 이후 죽어가는 KT 불펜진에서 나름 쏠쏠한 활약을 보여준다. 25일 기준 주권, 김재윤 등과 함께 열심히 구르고 있다.

6월 마지막 주에는 주 5경기 등판하며 3주 연속 주 4경기 등판중인 주권과 함께 빡세게 구르고 있다.

개막 엔트리에 들지도 못하고 한동안 존재감이 희미했으나 6월 한달동안만 28일 경기 종료 기준 무려 15경기 출장(더블헤더 모든 경기에 출장) 16.2이닝을 소화. 주권과 함께 원없이 던지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8월부터는 조현우이보근이 필승조로 자리매김하면서 추격조로 물러났다.

9월 6일 선발 하준호 다음으로 등판하여 승계주자 두명과 전병우에게 투런홈런을 헌납하면서 불안한 시작을 했으나 다음 타자를 땅볼로 처리하며 이닝을 끝냈다.

확실히 6월달의 필승조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좋은 각도의 슬라이더를 바탕으로 추격조나 승리조 역할로는 무리가 없는 투구를 보여주고 있다.

10월 13일 키움전에서 4:3으로 앞선 7회 2사에서 등판한 뒤 실점없이 2.1이닝을 막아내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10월 30일 한화전에서 2:3으로 뒤지는 7회초, 등판 도중 LG가 패배하면서 KT는 2위를 확정지은 가운데 1이닝을 무사히 삼자범퇴로 막았다.

시즌 성적 62G 64이닝 ERA 3.80으로 14년 이후의 부진을 딛어내고 완벽히 부활해냈다.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했지만 자신을 써준 팀에게 고맙다는 이유로 신청하지 않았다.

2021년 1월 12일 연봉 계약 금액이 공개되었는데 시즌동안 훌륭한 활약+주권과 더불어 혹독한 원맨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을 8000만원으로 후려쳐 같은 팀 불펜투수인 주권의 연봉협상과 함께 프런트의 일처리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있다. 팬들 여론은 대체로 이런 결과를 아쉬워하며 프런트를 욕하고 있고, 2021년에 더 좋은 활약을 펼쳐서 FA로 좋은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편이다.

2.2. 2021 시즌

시즌 개막 후 4월 24일까지 7경기에서 9⅓이닝 동안 무실점 행진을 펼쳤다. 그러나 4월 28일 SSG와의 경기에서 4실점하면서 시즌 평균자책점이 3.72로 상승했다.

이후 5월 3경기 동안 평균자책점 12.27를 기록,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시즌 평균자책점 또한 6.08로 대폭 상승하게 되었고 결국 5월 10일 2군으로 내려갔다.[15]

2군에서도 다소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며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당연히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시즌 종료 이후 10월 13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결국 유원상 입장에서는 전 해에 FA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이 악수로 돌아오게 되었다.[16] 이후 11월 경 동생도 KIA에서 방출되면서 형제가 모두 자유계약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둘 다 나이가 3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기량 하락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기 때문에 새로운 팀을 구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3. 은퇴

결국 운동 역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을 밝히며 은퇴가 확정되었다. 아내와 딸과 함께 3년간 미국에서 공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 그 이전 게임들에서도 유원상이 계속 등판했다. 당시 홍성용, 김회권 등 다른 투수들과 이닝을 분담했다.[2] 원년 에이스 이상군과 우승 시즌 때 활약했던 이상목이 달았던 등번호이다.[3] 장필준 측은 계약금으로 2억 5천만 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장필준은 상무 제대 후 2008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 계약금 55만 달러를 받고 입단하였으나 마이너리그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결국 2012년 4월 방출되었다. 그리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2015년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게 되어 입단했다.[4] 다만 07년은 가을에만 유원상이 1군에 있었으므로 제대로 가을전어 별명이 붙은 건 다음 해부터다.[5] 유원상 개인은 LG 트윈스에서 6년 만인 2013년에 다시 한 번 가을야구를 맛본다.[6] 정작 그 때 KIA한화와 예정되어있던 경기를 모두 치른 관계로 유원상과의 대결을 피했다.[7] 유원상뿐만 아니라 안영명 역시 그런 경기가 2개나 있다. 하긴 그건 마무리가 불을 질러서 그랬지만.[8] 사실 야구 월드컵은 아마추어 대회라서 KBO에서 담당하는 게 아니라 KBA(한국야구협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표 선수도 대학 팀 선수, 군 팀 선수, 4강 진출이 희박해진 팀의 2군 선수로 이루어진다. 대표팀 감독도 대학 팀 감독이다. 물론 병역 혜택 따위는 없고 TV 중계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 건 지금 유원상은 투수진이 붕괴된 한화의 붙박이 1군이라는 점이었다.[9] 2009년 야구 월드컵은 라운드별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체코유럽을 순회하며 진행됐다.[10] 이후 나지완스톡킹에서 푼 뒷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유원상은 7월 8일에 등판 예정이었는데, 한대화 감독의 생일[17] 때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류현진과 일정을 바꿨다고 한다.[11] 유승안은 LG의 전신인 MBC 청룡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서 전설의 원년 개막전 4번타자로 출전한 바 있다.[12] 한대화 감독이 2년차가 되어 선수단 상태를 파악하고 전력구상에서 유원상을 빼 버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13] 유원상 본인에게는 한화 시절이었던 2007년 이후 6년만에 맛보는 가을야구다.[14] 3:3 팽팽한 접전에서 등판, 당시 7회초였는데 7회말에 구자욱의 실책까지 겹쳐 팀이 4점을 내며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었고, 그대로 팀이 이기며 승리 투수가 된 것이다.[15] 당시 시즌 기록은 11경기에서 13⅓이닝 소화하는 동안 1승 1패 1홀드 (1블론SV) ERA 6.08이었다.[16] FA 신청을 하다 아예 미아가 된 사례도 있는 만큼 FA를 하면 더 손해였거나 해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던 것이 유원상은 C등급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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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만, 7월 8일은 한대화 감독의 음력 생일이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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