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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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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지
이희진
심은진
간미연
윤은혜


{{{-2 {{{#!folding [ 전 멤버 ]
[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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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EQUALIZEHER
1997.07.07
정규 2집

Baby V.O.X II
199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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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Come Come Baby
1999.07.21
정규 4집

Why
200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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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5집

Boyish Story
2001.06.14
스페셜 5.5집

Baby V.O.X Special Album
2002.04.24
정규 6집

Devotion
2003.04.03
정규 7집

Ride West
200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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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가이
Lee Gai
파일:이가이.png
본명 이희정(李熙正, Lee Hee Jung)
출생 1968년 7월 19일 ([age(1968-07-19)]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62cm[1], 41kg
가족 배우자, 딸 2명
학력 서울홍릉초등학교 (졸업)
동대문여자중학교 (졸업)
안양예술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경력 그룹 세또래 멤버 (1988년 ~ 1989년)
여성 듀오 탐탐 멤버 (1991년 ~ 1992년)
솔로 가수 (1993년 ~ 1994년)
베이비복스 2집 (1998년 ~ 1999년)
포지션[2] 서브보컬[3]
데뷔 1988년 세또래 1집 그대를 사랑해

1. 개요2. 데뷔 이전3. 활동
3.1. 데뷔와 세또래 시절 (1988~1989)3.2. 여성 댄스 듀오 탐탐 시절 (1991 ~ 1992)3.3. 솔로 가수 이지수로 데뷔하다 (1993~1994)3.4. 베이비복스 활동 시절 (1998~1999)3.5. 나이 탄로 사건 및 베이비복스 탈퇴, 그리고 잠적3.6. 근황
4. 평가5. 앨범
5.1. 세또래 1집 (1988)5.2. 세또래 2집 (1989)5.3. 탐탐 1집 (1991)5.4. 이지수 1집 (1993)5.5. 이지수 2집 (1994)5.6. 베이비복스 2집 (1998)

[clearfix]

1. 개요

1세대 아이돌 그룹 베이비복스의 전 멤버이며, 서브보컬을 맡았었다. 당시에는 1978년생으로 활동했다.

본명은 이희정이며, 정체는 1980년대의 한국 가요계의 시조격 걸그룹인 세또래의 멤버 이희정이랑 동일인물이다. 원래는 1968년생이며 데뷔만 무려 4번 한 연예계의 고무줄 나이를 비판할 때 제일 먼저 처음으로 언급되는 인물.

2. 데뷔 이전

어릴 때 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예쁜 구두도 신고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안 좋은 일이 닥쳐 가세가 기울고 있던 찰나에, 세또래라는 그룹으로 데뷔할 기회가 와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3. 활동

3.1. 데뷔와 세또래 시절 (1988~1989)

1988년 일본의 소년대, 일본의 걸그룹 소녀대를 벤치마케팅하여 당시에는 없었던 최초의 현대식 아이돌형 걸그룹인 세또래의 멤버로 데뷔했다.

하지만 당시 가요시장에 걸그룹이 활동하기 어려웠던 시기였던지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김완선이 밝힌 바로, 당시 세또래가 소방차(아이돌)와 합동무대 이후 세또래의 안티들에 의해 밴이 전파되는 사고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로 김완선도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 이후 1989년 2집 <요리조리 이리저리>를 발매했다.

방송 출연도 많이 했었고 회사의 푸시 역시 나쁘지 않았으나,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꽤나 강렬해서 세또래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결국 2집 활동을 끝으로 멤버 김정임이 "이대로는 못 견딘다"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그룹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3.2. 여성 댄스 듀오 탐탐 시절 (1991 ~ 1992)


세또래 해체 후 1991년, 같은 세또래 멤버였던 우윤아와 함께 시티뮤직으로 소속사를 옮기고 그 전과는 다른 성숙하고 여성스러운 컨셉을 내세워 이희정과 우윤아[4]는 이지수, 강현지로 예명을 바꾸고 김창남이 프로듀싱한 여성 댄스 듀오 탐탐으로 활동했으나 역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우윤아가 팀을 탈퇴함으로서 탐탐 역시 해체되었다.
앨범 링크

3.3. 솔로 가수 이지수로 데뷔하다 (1993~1994)

이희정의 재능을 아까워했던 언더그라운드 제작자 윤등룡이 자신의 소속사 등룡기획[5]으로 캐스팅 해서 탐탐 시절 사용했던 이지수라는 예명 그대로 1993년 1집 앨범 <날 잊었을 그대에게>를 발매했다.링크 뮤직비디오 참고로, 수록곡 중에 강수지가 작사한 곡이 있다. 1994년 2집 <너를 보내며...>를 발매했지만 솔로 데뷔 역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상링크

파일:이지수.jpg
파일:이지수1.jpg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이자 여담으로 솔로 가수 이지수로 활동할 당시에는 나이를 1969년 2월 20일생으로 속였었다. 1993년 솔로 데뷔 당시, 토토즐에 출연해 공개된 주민등록증 사진이 그 증거이다. 당시 미스 토토라는 코너에서 20여 명의 여성 연예인이 등장했고, 그 중 하나가 이가이였다. 이 당시에는 여자 가수들이 1살에서 2살 정도 낮춰서 프로필을 기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가이의 경우는 실제 나이인 1968년에서 1살을 줄인 것을 의식, 빠른년생으로 바꾸는 치밀함을 보였다. 다만 이 당시의 인지도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조용히 묻혔다. 또한 이희정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주민등록증 나이가 1년 늦은 경우가 흔해서 민증을 속였다는 인식도 드물었다.

그 밖에 높은음자리 멤버였던 김장수의 앨범에 코러스로 참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왔다. 그룹 11월의 2집과 라이브 앨범(Unplugged Music)이 웅산기획(등룡기획의 전신), 등룡기획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었다. 이희정, 즉 이가이가 같은 소속사였던 그룹 11월의 객원멤버로 김장수의 앨범에 참여한 것이다. 이 때는 이지수로 활동하기 전이었으므로 본명이 들어갔다. # 높은음자리 3집 앨범에 참여한 이희정은 이가이와 동명이인으로, 김장수의 아내다.

3.4. 베이비복스 활동 시절 (1998~1999)

1997년 베이비복스 1기 멤버로 합류해 데뷔 예정이었으나, 고난이도의 안무 연습 도중 골절상을 당하게 된다. 소속사 DR뮤직 대표 윤등룡은 이희정의 회복을 기다리기 보다 더 어린 친구들을 데려와 데뷔시키는 선택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베이비복스 1기. 결국, 이희정의 빈 자리에는 김이지가 합류하게 된다.

1997년 말 베이비복스의 1집의 실패로 먼저 탈퇴했던 차유미[6]의 자리에 간미연이 합류한 후 정시운정현전마저 탈퇴해버리고 빈자리에 이가이라는 예명으로 심은진과 함께 새 멤버로 합류하였다.[7] 당시 윤등룡 대표는 2집 앨범을 걸밴드 컨셉으로 구상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보컬과 키보드를 맡을 멤버가 필요했는데, 이미 가수 활동 경력도 있는 이가이는 이에 걸맞은 정말 적합한 멤버였다.[8] 당시 솔로앨범까지 냈었고 작곡도 할 줄 알았던 멤버였고, 음색도 괜찮았다.

하지만 합류 당시 그녀의 나이는 무려 31살이었으며[9], 10살을 줄인 1978년생(21살)으로 활동하게 된다. 뼈를 깎는 연습[10] 끝에 드디어 이가이는 1998년 베이비복스 2집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멤버들처럼 외모가 좋았으나 올드한 분위기 때문에 활동 초반 <야야야>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부터 색안경을 쓰고, 방송에서조차도 색안경을 쓰고 무대에 서는 모습이 많았다. 하지만 색안경을 써도 나이 들어보이는 얼굴[11]은 가릴 수가 없었다는 게 당시 대중들의 반응이었다.

사실 이희정이 합류하게 된 비하인드가 있는데, 원래 이희정은 "내 나이가 이렇게 적지 않은데, 어떻게 저 어린 친구들과 함께하냐?"며 반대했으나 소속사 DR뮤직 대표 윤등룡은 "절대 안 들킨다. 들킬 시 책임지겠다."고 회유했고[12], 당시 집안의 가세가 기울며 자신이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13] 이희정은 아버지의 병원비도 내야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일단 합류했으며, 활동명도 이가이로 바뀌게 된다.

<야야야> 활동 후반쯤부터 색안경을 조금씩 벗기 시작하더니, 후속곡 <Change> 활동부터는 색안경이 아닌 비니를 쓰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야야야> 때에 비해 급격히 격렬해진 안무를 겨우겨우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 그녀의 부족한 춤 실력과 나이에 대한 의심이 점점 도마 위로 올라오게 된 것. <야야야> 활동 시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안무를 잘 따라갔으나, <Change> 첫 방송부터 안무를 완전히 잊어버려 무대를 망쳐버릴 뻔한 것이다. 지금이야 카라박규리라든가, (여자)아이들우기처럼 안무 틀려도 그대로 추는 멤버도 많고 이게 걸그룹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경우는 많지만, 아직 이때는 "아이돌도 나름 프로 가수인데 안무를 잊어버리는 것이 말이 되냐?"는 인식이 많았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심각하게 떨어지는 춤 실력과 남발되는 안무 실수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그 후의 <Change> 무대들을 보면 안무를 안 틀린 무대를 찾는 게 힘들 정도로 계속해서 실수를 해 그녀에 대한 팬들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렇게 말도 많았던 베이비복스 2집 활동이 마무리 되어 갔다. 그래도 계속 추면서 적응이 되긴 했는지 2집 활동 후반기 영상을 보면 안 틀리고 곧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박은 있는데, 오히려 저 <야야야> 때 썼던 색안경하고 비니 때문에 더 내추럴하고 이질감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Change> 활동 때에 안경 벗고 비니까지 벗었던 버전이 존재했는데, 춤이야 그렇다 쳐도 비니까지 벗어 보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 비니가 나이를 들어보이게 한다는 건 이미 룰라가 보여줬다. 1집 후속곡 도중에 군대에 끌려간 신정환을 대신해 들어온 채리나는 고작 17살이었는데, 나이 들어보이게 하기 위해 비니와 선글라스[14]를 씌웠다고. 사실 다른 멤버들은 완전 맨얼굴인데, 혼자 비니를 썼으니 더 눈에 띄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가이는 이미 세또래 시절 큰 부상을 입었던 터라, 나이 이전에 춤을 역동적으로 추는 것이 무리인 상황이었다. 그것도 단순 부상이 아니라, 다리 쪽의 골절이었다는 모양이다.[15] 게다가 위에 언급했듯 베이비복스 1집을 준비하던 도중 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세또래 시절 이가이는 백덤블링까지 할 정도로 날아다니는 춤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연이은 부상으로 춤 실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3.5. 나이 탄로 사건 및 베이비복스 탈퇴, 그리고 잠적

2집 활동이 끝난 후 1999년 1월, 그녀의 실제 나이가 결국 들통나고 말았다.

그녀의 등장 시점부터 의심하고 있던 한 팬이 세또래 멤버 이희정과 생일, 학력, 생김새 등을 대조해 여러가지가 이가이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가이가 실제 나이를 속이고 연예 활동을 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AFC U-20 축구 선수권 대회 무렵 모 지상파 방송에서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1979년인 축구선수 이동국, 김은중[16]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애교부리는 모습까지 포착되었던 것. 당시에 유무선 초고속 인터넷, 스마트폰, SNS는 고사하고 국민PC를 통한 컴퓨터 보급화 이전이여서 컴퓨터가 없는 집이 여전히 많아 정보를 쉽게 알아내기 어려웠지만, 심지어 당시 알려진 1978년생이었어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그래도 이동국보다 1살 많아진다. 만일 같이 소집된 1977년 김남일, 1978년[17] 고종수에게 그랬다면 얼추 맞게는 할 수 있었겠지만. 물론 그래도 김남일이 이가이보다 9살이나 어렸기에 나중에 들켰어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가이가 당시 얼마나 나이가 많은 편이었냐면, 1968년생 황선홍 및 빠른 1969년생 홍명보과 동갑, 1969년신태용보다 1살 연상이었다.

아무튼 이 문제 때문에 PC통신에 "이가이가 나이를 속이고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것 같다."는 장문의 게시글까지 여러 커뮤니티에 올라오면서 그녀의 정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PC통신으로 시작해 신문 보도로 나오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문제의 방송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DR뮤직은 결국 PC통신 팬클럽에 사과문을 올리고 공식 입장을 밝힌다. "이가이는 1988년 데뷔한 세또래 멤버였던 이희정이 맞으며, 실제 출생년도인 1968년생에서 10살을 낮춘 1978년생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한다. 소속사는 "맏언니로서 팀을 이끌 리더 역할을 할 멤버가 필요했고, 아버지의 병간호로 인한 병원비를 벌기 위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밝혔다.

이렇게 이가이는 베이비복스에서 탈퇴했고,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18] 다만 나머지 멤버들인 김이지, 이희진, 심은진, 간미연"힘든 트레이닝 시절부터 어린 멤버들이 믿고 따르던 멤버가 맏언니 이가이였다." 라고 밝힌 적이 있어서 이가이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있었다. 그리고, 연습생 시절 부상을 입어서 데뷔하지 못한 멤버가 있었는데, 그게 이가이라는 게 정설이다. 세또래 활동 당시 멤버들과 함께 뒤에서 백덤블링같은 아크로바틱 댄스까지 추며 날라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못춘 거라면 부상을 당한 이유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가이가 팀에 남아있었다면 간미연후배 가수였던 디바선배 가수였던 DJ DOC이하늘한테 욕을 먹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2년 후인 2001년에 박준형의 사례[19]로 이와 같은 일이 한번 더 발생했으나, 박준형의 경우 되려 god의 팬들이 박준형을 감싸안았다. 게다가 나머지 멤버들인 데니 안, 손호영, 윤계상, 김태우는 박준형의 방출이 확정되자 숙소에서 짐보따리를 싸서 야반도주해버렸고, 박준형의 방출이 취소되어서야 비로소 이들 4명이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god 활동을 했을 정도였다. god 자체가 팬덤인 fangod와 멤버들 간에 의리가 어마어마했다. 박준형과는 굉장히 대조되는 결말인데, 이가이와 박준형의 실제 나이도 고작 1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 더 먼 훗날인 2009년에는 가희까지 등장했는데, 이때 애프터스쿨 팬덤인 Play Girlz에서는 아예 거론 조차 안했으며 셋 모두 30살에 아이돌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대로 10여 년 뒤에는 민티라는 래퍼한테 비슷한 케이스가 터졌는데, 이때는 욕을 좀 먹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고등래퍼에 지원하다 걸렸기 때문.[20]

사실 이건 나이가 당사자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갈리는 문제다. 만약 박준형이 10대 아이돌 그룹에 데뷔하여 막 어린 척, 귀여운 척하며 "누나~" 하며 애교를 부렸는데 알고 보니 30살이었다면 팬들이 멘붕에 빠졌을 수 있으나, 당시 god 자체가 그다지 어린 나이의 아이돌이 아니었고 좀 성숙하고 친근한 옆집 오빠 콘셉트였던 데다가 박준형 역시 꽤나 터프한 이미지였고 그 독특한 이미지로 팬들에게 어필하다보니 나이를 속였단 게 밝혀져도 팬들이 딱히 문제삼지 않았다. 가희 역시 독특한 캐릭터와 강한 맏언니 이미지로 팬덤을 만들었기에 나이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나이 많아도 당당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팬들도 많았다. 오히려 성숙미와 리더십과 파워풀한 춤실력으로 팬덤 내에서는 찬사를 받았었다.[21]

애프터스쿨의 경우도 컨셉 자체가 섹시걸 크러시가 주였기 때문에[22] 가희의 나이가 많은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록에서 오는 성숙미를 컨셉에 잘 녹아들 뿐만 아니라 서브 유닛 그룹마저 성공을 했다. 그렇게 애프터스쿨이 히트를 쳐서 명실공히 네임드 걸그룹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베이비복스 2집 활동 컨셉은 어리고 귀여운 이미지를 어필했다는 게 문제였다. 멤버들이 다 어리고 멤버 소개영상만 봐도 어린 나이니까 소화가능한 귀여움과 애교를 적극 내세우며 팬들에게 어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가이도 양갈래머리 등 소녀 이미지를 한껏 강조했었는데, 당시 이가이가 다른 멤버들에 비해 그다지 두드러지거나 인기있는 멤버가 아니었고, 오히려 춤을 자주 틀리며 전체적인 안무를 망치는 등의 행위로 다른 멤버 팬들에게 따갑게 눈총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나이를 속인 사실이 들통난 것이니 다른 멤버 팬들에게 집단 다굴당한 면이 있다.

사실 시대를 너무 일찍 탄 것일 수도 있다. 2020년대의 31살은 아직 사회에서는 초년생으로 여겨지는 나이이고 경력이 쌓인 30대 초반의 보이그룹은 물론 걸그룹들도 많고 완전히 청년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1990년대 당시의 31살은 중년기에 진입했다. 1992년 당시 서른한 살의 반란이라는 드라마는 제목만 봐도 31세의 삶을 대변한다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설정을 보면 주인공이 31살인데 결혼 7년차에 자녀가 둘이라는, 오늘날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설정을 내세웠다.[23] 오늘날의 31살이 이제 겨우 자리를 조금 잡는 나이거나 늦으면 이제 사회에 발을 내딛는 나이라면, 당시의 31살은 사회인으로서 이미 기반을 잡아야 함을 넘어 가정까지 이뤄야 하는 나이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는 대졸자 증가로 인한 사회진출 늦어짐, 평균 수명의 증가, 신체 건강의 증진, 훨씬 느려진 노화 속도[24], 사회 환경의 변화로 인한 차이인데, 당시의 31살은 2020년대 초반 기준으로는 40대 초반이라고 봐야 한다.[25]

기획사 입장에서는 결국 다 돈벌자고 하는 짓인데 만약 팬덤이 탈퇴반대를 적극 청원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면 여전히 상품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잠시 자숙시킨 뒤에 컴백시킬 수도 있었으나, 그다지 팬덤도 없고 비판여론만 있다보니[26] 컴백시키거나 계속 데리고 있어야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이가이가 자체 팬덤도 탄탄하고 인기가 많았다면 아마 어떤 식으로든 컴백시켰을 것이다.

이후 이가이의 빈자리를 대신해 그녀보다 16살 어린 당시 중3이었던 윤은혜가 합류했고, 윤은혜가 서브보컬 포지션을 잘 소화하면서 결국 이가이는 2집 이후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시대를 잘못 만난 보컬리스트였는데 원조 베이비복스와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이 당시 서브보컬인 윤은혜 못지 않게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고 회상하곤 한다.[27]

그 뒤 베이비복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줄줄이 히트곡을 내고 승승장구하면서, 결국 이 사건은 베이비복스 팬들에게 조차 거의 잊혀진 사실로 남게 되었다.

3.6. 근황

한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 2020년대 들어서야 근황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28] 탈퇴 이후, 3년 간 눈만 뜨고 숨만 쉬는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이 때 심장병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좋은 남자 만나 딸을 2명 낳고 잘 사나 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슬픔을 견뎌보고자 등산을 하며 어떻게든 버티다가 산악회에서 현 남편을 만나 재혼해 무탈하게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몸도 마음도 많이 다쳐서 현재는 걷기도 힘들어 하고 연예계 활동 당시보다 살도 쪘다고 하며, 최근엔 식당에 주 2회 정도 나가면서 아르바이트로 용돈 정도 벌어 쓰고 있다는 근황이 유튜브 댓글을 통해 전해졌다.

베이비복스 데뷔부터 퇴출까지 본인의 의지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는데, 베이비복스에 본인 욕심으로 들어가 그룹 망친거라고 오해받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고 그 기억이 한이 되었으며, 과거 네이버 지식in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부산에서 바를 운영했다느니 뉴질랜드에서 한국프로골퍼의 아내로 산다느니 그런 얘기들은 전부 루머고[29] 위에서 말했듯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현재는 너무 힘들었던 연예계 생활 때문에 남들에게 기억되기 보다는 차라리 조용히 잊혀져 평범한 주부로 살고싶다는 근황을 남기며 연예계 활동에 더이상 미련이 없다는 뜻을 비쳤다.

여담으로, 베이비복스 탈퇴 당시 나머지 멤버들이 울고 불고 난리났고 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다른 멤버들 중 가장 언니인 김이지도 이제 갓 성인이 되는 나이였고, 안 그래도 살벌했던 1990년대 연예계 생활에서 어린 멤버들끼리 버티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멤버들에게 연예계 생활이 매우 오래된 베테랑에 든든한 큰언니가 버팀목이 되어 줬으니 그럴 만도 하다.

4. 평가

연예계의 고무줄 나이를 비판할 때 제일 첫머리로 언급되는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초창기 아이돌 문화의 희생양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은 막 아이돌 가수들이 태동하던 시기여서 팬층의 연령대가 어린 10대, 못해도 20대 초반이다 보니까 아이돌들도 그와 비슷한 연령대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런 풍토 속에서 가요계에서 이미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이렇다할 실적이 없었던 이가이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자의든 타의든 나이를 속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비록 폭망의 연속이긴 했으나 꽤 오랫동안 가수 활동을 했던 경력들이 들통 나고 그녀의 실제 나이가 까발려지면서 쓸쓸하게 가요계에서 방출된 비운의 여가수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아이돌 문화의 희생양이라고 하기엔 아이돌 자체가 10대랑 비슷한 또래로서 10대의 문화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는 포지션이므로 굳이 30대의 나이에 10대 후반~20대 초반이 모인 아이돌 그룹에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들어간 것 자체가 잘못 됐다고 볼 수 있다. 아이돌 그룹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가수의 한 분야일 뿐 아이돌 그룹이 전부는 아니므로 30대라고 해서 가수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30대에 나이를 속이고 어린 친구들에게 꼽사리 꼈다는 사실에 대중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에 1968년생이면 김완선, 엄정화, 윤종신, 박준형보다도 1살 많고 김건모, 신해철, 탁재훈, 윤상과 동갑이다.

2020년대 현재에는 30대 초반은 사실상 20대같이 완전한 청년이었지만, 불과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0대는 중년으로 진입하는 시기로 여겨졌다.[30] 실제로 90년대 당시 30대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의 30대 연예인들과는 달리 매우 성숙한 스타일과 메이크업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당시 기준으로는 이가이가 실제 나이에 비해 심하게 나이가 들어보인다고 하기는 어렵다. 단지 베이비복스의 다른 멤버들과 같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위화감이 컸었을 뿐. 정리해보면 시대를 잘못탔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차라리 god의 박준형처럼 나이를 속이지 않고 그대로 계속 활동하거나 윤은혜가 새 멤버로 합류하는 대신, 본인은 객원멤버로 강등되어 팀에 잔류했다면 남들이 욕을 하던지 말던지 그럭저럭 넘어갔을 일이었을테니 말이다.[31]


1998년 베이비복스가 2집으로 컴백할 당시의 소개 영상. 피아노를 치는 분홍색 잠옷을 입은 사람이 이가이.

5. 앨범

5.1. 세또래 1집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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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또래 1집
1988. 06. / 한국음반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그대를 사랑해 03:06 이건우 김정택 김정택
2 우린 아직 어린가요 03:28 이건우 김정택 김정택
3 어떻게 잊을까 03:09 이건우 김정택 김정택
4 난 잊을 수 있어 (Over And Over) 03:20 한여임 Poul Chaman[32] 김정택
5 그대 여기에 (경음악) 03:04 - 김정택 김정택
6 그대 여기에 03:39 이수연 김정택 김정택
7 그대의 전화 03:28 임은희 김정택 김정택
8 행복해[33] 03:30 조영남 Mitchell Green and Catlin 김정택
9 숙녀처럼[34] 03:19 이건우 B.SteinBerg 김정택
10 건전가요 (너와 내가) 02:00 - - -

타이틀곡 '그대를 사랑해'는 전형적인 틴팝 장르의 곡으로 세또래의 데뷔곡.

이 앨범에는 총 3곡의 팝송 커버가 수록되어 있는데, 훗날 원더걸스의 'Tell Me'로 UCC 열풍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Stacy Q의 'Two of Hearts'를 커버한 '행복해', 마돈나를 스타덤에 오르게 해 준 'Like A Virgin'을 커버한 '숙녀처럼', 그리고 나나 무스쿠리의 'Over And Over'를 커버한 '난 잊을 수 있어'.
동료가수였던 높은음자리의 여성보컬 임은희가 '그대의 전화' 작사가로 참여하였다. 프로듀서는 오병화, 편곡 및 음악 프로듀서는 김정택.

5.2. 세또래 2집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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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TORAE 2
1989. 03. / 한국음반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요리 저리 이리 저리 02:20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2 시간이 흐르면 03:27 안진우 안진우 안진우
3 충격이었어 03:52 송재준 송재준 송재준
4 그대 나의 곁으로 03:55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5 생일 축하합니다 03:49 안진우 안진우 안진우
6 이 밤 가득히 03:16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7 어느 날 우연히 02:50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8 떠나는 거리에서 04:09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9 사랑하는 세상 02:52 안진우 안진우 안진우
10 사랑해요 02:59 이정각 김정택 김정택
1집에서 커버곡이 3곡 들어간 것에 비해, 2집에서는 모든 곡을 창작곡으로 채웠다. 타이틀곡은 '그대를 사랑해'를 만든 김정택이 작곡하였고, '그대를 사랑해'보다 짧은 활동을 하고 들어갔다. 이 앨범의 특징은, 훗날 작곡가이자 가수로 활약했던 송재준과 안진우의 초창기 작품이 들어있는 것인데 두 사람의 이후 음악적인 세계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어 중요한 앨범이다.

5.3. 탐탐 1집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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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 Wonderful Time With TAM TAM
1991. 04. / 시티뮤직, 도레미레코드사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얘기하지 그랬어 03:54 김창남 김창남 유영선
2 내가 선택한 고독 03:41 이건우 김창남 유영선
3 추워 03:36 김창남 김창남 유영선
4 하지만 03:21 이지연 김창남 유영선
5 얘기하지 그랬어 (반주용) 03:54 - 김창남 유영선
6 난 참 바보야 03:40 이건우 김창남 유영선
7 나의 사랑이야기 03:45 지평권 지평권 유영선
8 그렇게 그렇게 03:11 김창남 허건웅 유영선
9 숙녀 03:30 이건우 김창남 유영선
10 울지 마 바보야 03:05 김창남 김창남 유영선

김정임이 이민을 가는 바람에 세또래의 남은 두 멤버가 소속사를 옮기고 발매한 앨범이자 탐탐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탐탐이라는 팀 이름과 멤버들의 다른 이름에도 세또래 팬들은 대부분 탐탐의 멤버가 세또래 멤버임을 알았다고 한다. 도시아이들 멤버이자 작곡가와 키보디스트로 활약했던 김창남의 소속사 시티뮤직에서 발매한 만큼 김창남의 프로듀싱이 빛나는 앨범이다. 숙녀 컨셉, 인도 여인 컨셉 등등 다양한 컨셉을 무대에서 소화했으나 별 재미를 못 봤다. 편곡은 유영선이 모두 도맡아했으며, 이지연 3집 수록곡 '하지만'의 리바이벌 곡과 드라마와 영화 음악감독으로 훗날 유명해지는, '창가의 이별'의 신인가수 지평권이 준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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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커버와는 별개로, 속지의 컨셉 사진으로 홍보를 했으면 탐탐이 더 떴을 지 모를 만큼 소속사의 홍보가 아쉽다.

5.4. 이지수 1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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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잊었을 그대에게
1993. 03. / DR뮤직, 아세아레코드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날 잊었을 그대에게 03:38 안진우 안진우 안진우
2 날 기억해 줘 04:14 함경문 정성헌 정성헌
3 다시 만날꺼야[35] 03:36 함경문 정성헌 김효국
4 처음 본 그대 눈물 04:07 강은경 이희정 김효국
5 말해 줄 꺼야[36] 03:55 정성헌 정성헌 정성헌
6 너를 사랑해 04:17 김효국 김효국 김효국
7 그대는 두려워하지만 03:53 강은경 이희정 김효국
8 마음의 선물 03:50 함경문 정성헌 김효국

탐탐의 실패 이후 이지수는 당시 빛과 소금, 김태욱 등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를 매니지먼트하고 있던 윤등룡에게 픽업되어, DR뮤직[37]에서 솔로 앨범을 2장 발매하게 되었다. 세또래에서의 인연으로 솔로앨범의 타이틀곡을 안진우가 맡아주었으며, 그룹 11월의 키보디스트 김효국과 솔로가수/작곡가로 여러 가수들에게 인정받고 있던 정성헌과 그의 파트너인 작사가 함경문, 그리고 나중에 유명 히트곡 작사가로 유명해지는 작사가 강은경이 곡에 참여하였다.
이지수는 여기서 두 곡의 자작곡을 선보이며 싱어송라이터의 기질을 뽐내는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특기였던 피아노와 작곡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희정'이라는 본명으로 앨범에 수록하였다.

5.5. 이지수 2집 (1994)

파일:LJS2.jpg[38]
너를 보내며...
1994. 04. / DR뮤직, 아세아레코드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너를 보내며 04:26 강수지 박청귀 박청귀
2 이제는 지울래 - 장대성 이희정 박청귀
3 나는 못 속여 - 장대성 이희정 박청귀
4 너를 보내며 (연주곡) 04:26 - 박청귀 박청귀
5 너를 사랑해 04:17 김효국 김효국 김효국
6 날 잊었을 그대에게 03:38 안진우 안진우 안진우
7 날 기억해 줘 04:14 함경문 정성헌 정성헌
8 다시 만날 거야 03:36 함경문 정성헌 김효국

타이틀곡은 '너를 보내며'였고 동료가수 강수지가 오랜 인연으로 작사가로 참여하였다. 강수지는 친한 동료 연예인이 아니면 가사를 잘 안 주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39] 이 앨범에도 역시 이지수의 자작곡 2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훗날 유명 아이돌들의 노래에 예쁜 가사로 인기를 얻은 작사가 장대성[40]의 2작품도 주목할 만 하다. 신곡 모두를 기타리스트 박청귀(아라이)가 편곡하였다. 뒷면의 4곡은 모두 1집에서 발표했던 곡들이었다. 타이틀곡으로는 댄스팀 마이미를 결성해서 짧은 활동을 했다. 특이사항은, 94년 4월 제작된 앨범임에도 심의번호가 9303-3464~3471로 되어있는데 이것의 의미는 2집의 수록곡들이 원래 1집에 수록될 예정이었다가 탈락되고 신곡 4곡으로 앨범을 내긴 뭐해서 기존 곡들을 재탕한 것으로 보인다.

5.6. 베이비복스 2집 (1998)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Baby V.O.X II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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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이비복스 활동 당시 프로필 사이즈이며 세또래 활동 당시 프로필에는 멤버 전원이 159cm의 같은 키라고 소개되었다. 연예인들의 신체 사이즈 조작은 지금도 흔히 있는 일이고, 실제 키는 150cm 후반이나 세또래 때 프로필 상의 159cm 정도로 추정된다. 나머지 베이비복스 멤버들이 170cm를 전후하는 장신들인 것을 감안하면 많이 대조된다.[2] 베이비복스 활동 당시 포지션[3] 서브보컬로 활동했지만 2집 야야야, Break it up, Suger baby에서 사실상 메인보컬이라도 봐도 무관하다. 타이틀곡 야야야에서는 개인파트가 한 파트밖에 없었지만 후렴에서 단체로 부르는 파트는 이가이가 리드했다. Break it up에서도 맨앞 부분 후렴 빼고 단체로 부르는 후렴 파트는 이가이가 리드했으며, Suger baby에서는 간미연과 듀엣으로 대부분 파트를 불렀다. 패자부활전과 Change에서는 이희진이 후렴을 불러서 이희진이 메인이 되는 노래인데, 맡은 개인 파트가 다 고음이 있는 파트다. 패자부활전에서는 고음 파트밖에 없었고, Change에서는 노래 최고음이 있는 이희진 1절 파트를 이가이도 2절에 부른다.[4] 세또래로 데뷔 이전에 심형래 주연의 우뢰매에서 보미역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5] 참고로 이 회사가 후에 베이비복스를 제작한 DR뮤직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라니아의 소속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6] 못하겠다며 외국으로 날아가버렸다.[7] 그녀는 솔로활동이 끝난 후에도 DR뮤직 소속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8] 그러나 1집의 실패로 걸밴드 컨셉은 결국 무산 되고 정반대 노선인 틴팝으로 바꾸어버렸다. 당시 등룡기획은 2집마저 실패하면 걸그룹과 소속 회사의 존폐 자체가 위기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록 후발주자 소리를 듣더라도 검증된 방향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9] 당시 팀에서 이가이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김이지와도 11살이나 차이난다.[10] 안무 연습을 하다가 수술을 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해서 초기 멤버로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세또래 때는 백덤블링까지 했던 멤버였으니...[11] 당시 31살인 이희정은 당시의 외모로는 노안은 아니고 오히려 동안에 가까웠지만 10살 속인 21살의 외모라 하기에는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노안이다.[12] 하지만 기어이 들켰을때 윤등룡은 이가이의 탈퇴라는 수를 쓰면서 이가이의 뒤통수를 치게 된다. 다만 당시 팬들의 반발이 워낙 심해서 안고 가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13] 데뷔 당시에는 가세가 좋았는데 세또래가 잘되지 않고 이 뒤의 탐탐과 자신의 솔로 앨범도 망하면서 사실상 수입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14] 레옹에서 레옹이 쓰던 그 선글라스.[15] 이는 SUPER JUNIOR의 멤버인 희철이 교통사고로 분쇄골절을 당한 뒤로, 격한 춤을 추지 못하는 것으로 증명된다.[16] 1998~1999년 당시 이동국과 김은중은 U-20 대표팀의 투탑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다.[17] 다만 고종수는 실제로 1976년~1977년생이라는 말이 있었다.[18] 탈퇴 당시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회견이 있었는지는 어디에도 자료가 확실하게 남아있지 않다.[19] 당시 박준형은 한고은과 사귀고 있을 때였다.[20] 후술하겠지만 아예 미성년자 컨셉으로 로리타 이미지를 어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민티는 데뷔 시점에서 이미 다른 걸그룹 제작까지 맡고 있었다. 문서 참고.[21] 가희는 1980년생이라 아이돌 활동 당시 30대였음에도 그렇게까지 나이많다는 인식이 없었다. 가희가 워낙 동안이라... 그리고 같은 멤버인 유이도 나이에 비해서 좀 성숙한 느낌이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다는 느낌도 없었고 말이다.[22] 물론 2011년 정규 1집 타이틀곡 Shampoo와 같은 노래에서 청순 컨셉을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다.[23] 당시 31살은 1962년생이다.[24] 1990년대의 30살 = 2020년대의 40살, 1990년대의 40살 = 2020년대의 50살 이런 외모가 되었으며 평균수명 역시 1990년대는 65살인데 2020년대는 80살이다.[25] 오히려 2020년대는 20대 연예인보다 30대 연예인의 인지도가 더 높다. 옛날에는 여자같은 경우는 20대 초반~중반 연예인이 주연급을 했으나 요즘은 30대가 대다수다. 40대, 심지어 50대 여자 연예인들도 주연급 할 정도니 뭐...[26] 당시 베이비복스는 팬 빼고 다 안티라 할 정도로 유독 안티팬이 많았던 그룹이었다.[27] 오랜 기간 음반 활동으로 음색이 워낙 탁월해 이 당시 메인보컬이었던 간미연보다 나았다는 평가도 있었다.[28] 어떤 영상의 댓글 중 본인이 이가이의 지인이라고 주장한 사람의 댓글로 근황과 뒷이야기가 밝혀졌다. 전혀 관련 없어보이는 영상에 해당 댓글이 달린 이유는, 원래 해당 계정이 '이가이'라는 이름과 프사를 사용해 초기 이가이 관련 각종 희귀 자료들을 업로드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가이 소스가 떨어지자 다른 걸그룹의 영상을 주로 올리고 있고, 해당 영상도 그 중 하나이다. 현재는 해당 계정주가 이가이 관련 영상을 모두 내리고 계정 이름을 바꾼 상태.[29] 전자는 또 다른 원년 멤버인 정현전이 부산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후자는 또 다른 원년 멤버인 정시운이 뉴질랜드에서 교민 대상으로 K-POP 댄스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게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30] 그래도 1990년대 후반부터는 30대 초반까지는 젊다고 쳐주는 경우도 있다.[31] 사실 1990년대는 성숙한 메이크업을 했다. 김소연과 김희선의 1990년대를 보면 굉장히 성숙해보인다. 그 당시 김희선은 20대 초반, 김소연은 10대 후반이었다. 지금은 40대도 젊어보이는 편이다. 1990년대 40대였던 안성기, 유동근, 김영철과 지금 40대인 정우성, 소지섭, 이제훈, 지성을 비교해본다면 느낌이 확 다르다.[32] Paul Chapman의 오타이다.[33] Stacy Q의 Two of Hearts 커버곡. 해당 곡은 원더걸스Tell Me 샘플링으로 한 번 더 유명세를 탔다. 원곡 뿐만 아니라 세또래의 곡마저도.[34] 마돈나의 Like A Virgin 커버곡.[35] 맞춤법으로는 '다시 만날 거야'가 맞다[36] 맞춤법으로는 '말해 줄 거야'가 맞다[37] 당시에는 등룡기획이라는 이름이었다. 당연히 소속사 대표이사인 윤등룡의 이름을 땄다.[38] 1집 앨범의 뒷자켓 사진을 재탕하였다.[39] 앨범을 들어보면 창법이 강수지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40] 대표작으로 의 송인, 젝스키스기억해줄래, 커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