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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대 걸리버스와 전주 KCC 이지스의 레전드 이상민. 그러나 영원한 KCC의 전설이 될 줄 알았던 이상민은 이날 상대했던 팀으로 가고 그 팀의 감독이 된다. | 보상선수로 건너간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였을때 |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 |
이상민(李相敏) | |
생년월일 | 1972년 11월 11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학교 | 홍대부고 - 연세대학교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프로입단 | 1995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
소속팀 | 현대전자/대전 현대 다이넷/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 (1995~2007) 서울 삼성 썬더스 (2007~2010) |
지도자 | 서울 삼성 썬더스 코치 (2012~2014)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2014~) |
수상내역 | KBL 정규시즌 MVP 2회(1998, 1999)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3회(1998, 1999, 2004) KBL 파이널 MVP 1회(2004) KBL 베스트 5 4회(1998, 1999, 2002, 2004) KBL 어시스트상 1회(1999) KBL 스틸상 1회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97 ABC 선수권 대회 우승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
1997~1998,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 |||||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 → | 이상민 (대전 현대 다이넷) | → | 서장훈 (청주 SK 나이츠) |
2003~2004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 |||||
데이비드 잭슨 (원주 TG 엑서스) | → | 이상민 (전주 KCC 이지스) | → | 김주성 (원주 TG삼보 엑서스) |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
No. 11 |
1. 개요
자타공인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중 한 명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최고의 선수가 최고의 감독이라는 것이 아닐 사례에 속할지도 모르는 인물[1]
대전 현대 다이넷/걸리버스 - 전주 KCC 이지스 -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뛰었던 농구선수. 등번호는 11번으로 KCC 이지스의 영구결번이다. 현재는 서울 삼성 썬더스의 전 코치, 현 감독이다.
별명으로는 컴퓨터 가드, 헐리웃 리, 산소같은 남자 등이 있다.
훌륭했던 현역 시절과는 달리 감독으로 취임한 첫 시즌을 대차게 말아먹으며 농구팬들에게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허나 이 성적 부진에 대해 선수들의 역량 문제를 지적하는 쪽도 있기 때문에 대대적인 보강이 이루어진 15~16시즌 이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2. 기록
정규 시즌581경기 9.8점 3.4리바운드 6.2도움 1.5스틸 FG 44.6% 3P 35.4% FT 76.8% PER 14.1
플레이오프
51경기 10.7점 3.9리바운드 6.0도움 1.6스틸 FG 47.2% 3P 39.4% FT 82.8% PER 16.8
챔피언결정전
43경기 10.7점 4.5리바운드 5.0도움 1.4스틸 FG 43.0% 3P 34.9% FT 82.4% PER 13.4
3. 선수 생활
3.1. 농구대잔치 시절
홍대부고 시절에는 천재 가드라는 말을 들으며 동시기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다른 고교팀들을 원맨쇼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였다.대학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원래는 고려대 진학 예정이었지만, 고대의 구타 문화가 싫어서 고집을 부린 끝에 연세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고려대 박한 감독은 구타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
"외곽슛이 좋지 않고 드리블이 높고 파울관리를 못 한다." 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원 가드로 선배인 문경은, 후배인 우지원, 김훈, 서장훈을 이끌고 코트의 사령관으로서 연세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곱상한 얼굴 덕에
그런데 연세대 졸업시즌이었던 농구대잔치 1994~95시즌 풀리그 최종전 對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이상민은 후반 4~5분여를 남겼을 즈음 인사이드로 돌파해 오던 김병철의 레이업을 걷어내기 위해 같이 뜨다 착지할 때 선수생명이 위태할 수도 있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게 바로 그 부상장면. 무릎인대가 끊어져 버린 부상이었는데 이상민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그걸 보고 팬들이 울부짖는 모습까지 당시 뉴스를 탔다.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하나, 부상 치료도 시킬 겸 당장보다 프로화 이후를 노릴 겸 해서 현대는 이상민을 바로 상무로 입대시킨다. 이 때, 대전 현대의 전설을 같이 만들어 내는 조성원도 같이 입대시켰다.
입대 후 이상민은 그때까지는 잠재되어 있던 올라운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상무에서 본인의 기량이 만개했다기 보다는, 최희암의 손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농구를 추구한 감독이라 연세대 시절의 이상민은 자기가 할 수 있는걸 어느 정도 억제를 하면서 리딩에 신경써야 했다.[2] 거침 없이 득점을 하고 좋은 운동능력을 앞세워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적재적소에 패스를 찔러넣으며 허재 이래 최고의 올라운더 가드로 빛나는 활약을 펼쳤고, 그런 활약 속에 두 번이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했다.[3] 하지만 기아자동차와 연세대로 인해 농구대잔치 우승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상무에 있던 사이, 한국 농구는 프로화가 되며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했다.
3.2. 영광의 현대 - KCC 시절
제대 후 프로팀이 된 현대에 복귀하며 KBL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전년도 8개 팀 중에서 6강에도 못 드는 굴욕을 맛 본 현대를 일약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는 기염을 토하면서 1997-98 시즌 정규시즌 MVP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챔프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 때는 허재의 투혼이 더 빛나서 챔프전 MVP는 실패.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현대는 왕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정규리그 3연패와 두 번의 챔프전 우승이 바로 그것.
팀의 에이스 포인트가드로서 맹활약하며 추승균, 조성원, 조니 맥도웰과 함께 팀의 전성 시대를 이끈다. 다만, 1999-2000 시즌 청주 SK 나이츠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상민은 로데릭 하니발의 포스트업과 수비에 털리고, 맥도웰은 서장훈에게 잡히며,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괴랄한 전략을 들고 나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정말 팀의 대들보였다.
현대그룹이 흔들리고, 팀이 KCC로 팔리고 연고지가 변경되는 동안에도 이상민은 굳건하게 팀을 지켰다. 다시 돌아온 조성원, 기존에 함께 한 추승균과 함께 KCC 소속으로 또 다시 우승을 일궈낸 것.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올스타 투표에서는 무조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아니, 그가 하락세를 그리고 은퇴가 임박한 순간에도 올스타 투표에는 1위를 고수했다. 아마도 9년 연속 올스타전 투표 1위는 불멸의 기록이 될 듯 하다.
그러나 역시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03-04 시즌부터는 부상에 시달리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2003-04 시즌 원주 동부 프로미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챔프전 MVP가 되기도 했지만, 점차 하락세를 눈에 띄게 드러났다. 2004-05 시즌에는 챔프전에서 평소에는 본인이 바르고 다니던 신기성에게 털리며 별다른 활약을 못하여 동부에게 설욕당하는 팀을 눈뜨고 지켜보기도. 그래도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경기별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3.3. 이적과 마찰
누구나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요, 팀의 적장자로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상민은 KCC에서 은퇴하지 못한다. 서장훈이 FA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로서 이상민이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던 것이 원인인데 이 때문에 KCC는 큰 비판을 받았다.당시 FA 보상선수에서 제외되는 보호선수는 3명까지 지정할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FA로 이적해온 선수는 자동 보호선수로 지정되며, 보호선수 3명에 자동포함이 되었다. 즉, 당시 KCC가 FA로 데려온 서장훈, 임재현은 자동으로 보호선수가 되고, 나머지 보호선수로 선택할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뿐이라는 것. KCC엔 이상민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프랜차이즈스타이면서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이 있었기에 둘 중 하나는 보호선수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런데 추승균 역시 노장이라 볼 수 있지만 이상민보다 2살 어렸기에 효용가치는 추승균이 더 크다고 KCC쪽에서는 봤고, 그래서 이상민은 보호선수에서 제외되었는데, 당시 감독인 허재의 말에 따르면 '삼성이 설마 노장인 이상민을 고르겠어?' 라는 생각으로 보호지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삼성은 이상민보다 신인선수 지명권을 우선 요구했지만, KCC가 가지고 있던 신인선수 지명권은 하승진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지명권이었기에 그것을 거부[4], 결국 삼성은 이상민을 FA 보상선수로서 데려갔다.
이렇게 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KCC구단과 허재 감독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이상민의 빈자리를 채운 임재현은 임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이상민보다 못한 활약을 보인 데다 이적한 이상민이 선봉장으로 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격파하는 상황까지 오자 이상민을 떠나게 만든 KCC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5]
그런데 KCC 입장에서 보자면 보호선수로 이상민 대신 추승균을 지키고 신인선수 지명권도 지킨 건 결과적으로 대성공이 되긴 했다. 임재현은 FA로 이적한 첫해에 그야말로 임봉사 모드로 까였지만 이적 2년차부터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며 들개같이(...) 뛰어다니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상민 대신 지킨 추승균은 3년 동안 팀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며 결국 이 둘이 팀이 두 번의 우승을 거두게 만든 공신이 되었기 때문. 거기다 삼성이 이상민 대신 달라고 한 신인선수 지명권을 지킨 끝에 그걸로 하승진을 뽑으며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결국 이상민의 이적 문제는 팀의 입장과 선수의 입장이 갈리다보니, 생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KCC로 온 서장훈은 이상민과의 플레이를 원했다는 인터뷰를 해서[6] 주변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7]
한편으로 허재가 당시 팀 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이상민을 자신의 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낸 거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허재 본인은 일부러 이상민을 보낸 건 아니다라고 말을 했으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남아있다. 이 사태 이후부터 보호선수가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3.4.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이적한 이후, 첫 시즌에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자신의 최다득점을 깨고 35점을 넣어서 승리에 견인 하기도 했다. 결국 그시즌 많지 않은 시간을 뛰면서 9.8점 5.5어시스트 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썬더스를 두 번이나 챔피언결정전에 이끌고 가는 능력을 보였지만 두번 다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상민 개인의 인기는 여전했고 역시 이상민 소리가 나오는 활약을 보인 경기들도 있으나, 이상민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시즌 내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일 수는 없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삼성을 이끈 것은 안준호 감독의 팀 세팅과 테렌스 레더와 같은 좋은 외국인 선수의 힘이 더 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대신 삼성은 그 전까지는 그냥저냥 서울에 있는 팀 정도였는데, 이상민의 영입 이후, 인기팀으로 급부상하는 가외적인 소득은 얻기는 했다. 결국 2009~2010 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직전까지도 올스타 투표 1위는 이상민이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한국의 제이슨 키드.
전성기에는 183의 키[8][9]지만 덩크를 꽂아넣는 탁월한 운동능력을 자랑했고, 전성기가 좀 지난 무렵까지도 이에 근접하는 운동능력을 유지했다.[10] 이런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키에 걸맞지 않는 리바운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민이 운동능력에만 의존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다. 적재적소에 공을 배급하며 팀을 이끄는 포인트가드의 기본 덕목에 충실한 선수였고, 그래서 전성기가 지나 운동능력을 많이 잃은 삼성 썬더스 시절에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수비리바운드를 잡은 후 바로 달려나가며 앞선으로 던져주는 속공 패스는 특히 올라운드함과 패스 능력이 조화된 이상민의 특기.
포스트업 기술을 잘 썼고, 자신보다 키가 작고 힘이 약한 상대가 매치업되면 포스트업으로 상대를 눌러버리는 모습도 종종 선보였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이상민이 현역시절이던 90~2000년대까지 이상민보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국내 포인트가드는 없었다.[11] 그 키 덕에 언제나 국내리그에서 이상민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 1번을 찍어눌렀고, 이상민의 포스트업 플레이는 다른 올라운드 능력 있는 팀내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상대팀이 수비에서 여러 모로 골이 아파지는 상황을 자주 연출했다.
외곽슛은 대학 시절만 해도 좋지 않았으나 이후 발전해서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수준까지는 유지했다. 특히 영 안 들어간다 싶다가 중요 순간에 외곽슛을 터트리며 상대 팀을 울리는 일도 많았고, 3점슛 라인에서 한 발 이상 떨어진 곳에서 뜬금없이 슛을 성공시키는 일도 있었다. 2002 이사안게임 준결승 필리핀전에서 경기 전체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다 대표팀이 뒤지던 마지막 순간에 3점 버저비터로 대표팀을 승리로 이끈 게 이런 일의 예중 하나.
한편 삼성으로 가기 전 몸이 멀쩡하던 시절에는 수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탄탄한 몸과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큰 상대도 제법 수비해 냈으며, 이런 수비력은 특히 조성원과 함께 나왔을 때 조성원 대신 상대의 2번 또는 3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12]나 아시아권 대회에서 투 가드로 강 모 선수와 함께 나와 상대 2번 포지션 선수들을 수비할 때 더욱 빛이 났다. 훌륭한 바스켓 센스를 바탕으로 상대 패스의 맥을 끊으며 해내는 스틸도 일품이었다. 또는 힘들기는 하였지만 양경민이나 김영만 같이 3번 포지션 중에 공수에서 극강인 선수들도 잠깐잠깐씩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인 가드 선수들 중에선 최고 수준의 블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속공 레이업을 하는 상대를 쫒아가 블록해 내는 장면을 종종 연출했고, 김주성 데뷔 이전인 전성기에는 KBL 국내 선수 블록 순위에 서장훈 다음 자리 정도에 들어간 일까지도 있다. 심지어 서장훈이나 김주성을 블록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비록 나이와 부상이 쌓이면서 삼성 이적 후엔 수비에서 한창 때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턴오버를 남발하며, 구멍 소리 듣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수비가 뛰어난 편에 속하였으며, 삼성 시절에도 기본은 하였다.
포인트가드 치고는 드리블이 높고 불안정했다는 부분은 약점. 때문에 아시아권에서는 피지컬로 상대 1번을 압살했지만 세계무대에선 안정성이 떨어지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공 간수를 못해서 마구 털리거나 한 일은 없지만, 어쩌다 상대 수비수이게 분석당하며 제대로 공략당하면 턴오버를 남발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KBL 챔피언 결정전에서 SK 나이츠와와 대결한 경기. 당시 SK의 로데릭 하니발이 이상민보다 좋은 신체조건으로 압박을 하자 드리블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이런 약점을 노출했다.
여러 모로 올라운드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스타 가드란 점에서 허재를 잇는 존재였고, 이상민 이후로는 이런 올라운드하면서 기본에 충실한 가드가 한국 농구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5. 헐리웃 리
칭찬 가득 했지만 깔 건 까야 하는 법. 신문기사 링크
한국프로농구에서 헐리우드 액션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바로 이상민이다. 상대의 파울을 유도해내는 것은 선수의 능력에 해당하지만, 유독 이상민의 경우는 슬쩍 상대가 닿기만 해도 "악"소리와 함께 화려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유난히 자주 보였고, 거기에 이상민의 스타성으로 인한 심판보정 효과 의혹과 그런 이상민의 모습까지도 옹호하는 극렬 이상민 팬덤[13]으로 인해 빠가 까를 만드는 연쇄효과가 이어지면서, 농구팬 일각에서 헐리웃 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이상민과 같은 대학동문이자 인척관계에 있던 석주일 해설자도 한 몫 했다.
거기다 이상민은 수비시에도 헐리우드 액션으로 오펜스 파울을 유도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상대의 볼을 뺏으려다 외려 자기가 파울을 하는 일도 많았고, 그로 인해 파울 트러블에 빠지며 팀을 난관에 빠트리는 일도 많았다.
헐리우드 액션과 파울 트러블, 극렬 팬덤[14]은 이상민의 평가를 깎아먹는 3대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능력 면에서, 특히 인기 면에서 이상민 이후 이상민을 잇는 존재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KBL의 한계라면 한계고 문제라면 문제.
6. 지도자 생활
2010년 은퇴 후, 2년 동안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삼성의 차기 감독 후보로 점찍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단 2012년 김동광 감독 아래 코치로 임명되어 지도자로 데뷔하게 되었다.이후 2014년 시즌을 치루던 중 김동광 감독이 자진사퇴 되어, 김상식 대행 체제로 남은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6.1. 삼성 썬더스 감독
이제는 전설로 회자되는 희대의 실책. 2014년 12월 16일 전자랜드와의 홈경기에서 4쿼터 7분 25초를 남기고 이정석이 범한 패스미스다. 이런 정줄놓은 플레이가 나왔음에도 놀랍게도 75대 66으로 삼성이 이겼다.
2014-15 시즌부터 삼성의 새로운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코치 연수도 다녀왔기 때문에 감독이 될것이라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으나, 예상보다 빨리 감독을 맡게 되어 파격적인 선임이라는 의견이 많다.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과 신인 드래프트에서 리오 라이온스와 키스 클랜턴, 김준일을 영입하면서 어느 정도 해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무너진 팀을 일으키기는 역부족, 사람들의 예상대로 최하위를 전전하고 있다. 가드진의 이정석[15]과 박재현이 수준 이하의 플레이를 보여주고, 집중력이 결정적인 순간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이상민 입장에서도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특히 전자랜드와의 경기에서 100대 46으로 54점차 참패라는 역대 기록을 남기면서 흑역사를 썼는데 가뜩이나 팀이 최하위에서 좀처럼 올라올 줄을 모르자 이상민 감독의 경기 운용 등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 등을 비롯한 일부 극성팬들 사이에선 돌상민이라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데 심지어는 김상준 전 감독을 재평가해야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고 있다.
이날 엠스플에서 이 얼굴을 10번이나 틀어줬다고 한다(....)
그래도 유재학 감독에 의하면 첫시즌 성적은 운에 가깝다 했을 정도고 삼성은 1.5군이 출격한 D리그에서도 SK 2군에게 완전 가비지 패배를 했을만큼 신인 김준일 정도를 제외하면 국내선수진이 처참한 상황이다. 삼성 입장에서도 선수들 이상의 인기가 있는 이상민 감독에게 좀 더 기회를 줄 듯 싶다.
2015-16 시즌 FA로 문태영을 영입한 데 이어 주희정을 트레이드로 영입하였고 이정석, 이동준, 차재영 등 이상민 감독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던 선수들을 내보내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오프시즌에 한 노력들은 올스타 브레이크 돌입 시점에서 21승 17패의 성적을 거두며 3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며 실제로 플레이오프 진출과 5할 돌파를 이루어내며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략적인 부분만 개선한다면 실력있는 감독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2016년 2월 25일,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었다(...)[16] 게다가 각주의 장민국까지 합치면 전부 연대 출신의 작품이다. ㅎㄷㄷㄷㄷ
2월 25일 안양 KGC와의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삼성 선수들이 공수 양면에서 말그대로 최악, 아니 그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96-71, 25점차 대패를 당했다. 시즌 초 대학시절 한 불법 도박으로 인해 정규시즌 출장정지를 당한 후 플옵에 출전하게 된 KGC의 전성현에 대해 이상민 감독은 "우리로서는 나오면 좋을 것 같다. 큰 경기에서는 경험 많은 선수들이 무섭다.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바로 그 전성현에게 3점슛 4개 포함 16득점을 내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2월 27일 안양 KGC와의 6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또 다시 86:93으로 패하고 말았다. 1차전 경기력보다는 좋아진 모습이었고 전반까지 삼성이 근소한 우세로 마치면서 잘 경기를 끌고갔지만 이후 3쿼터부터 시작된 인삼공사의 외곽슛 폭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날 경기에서 삼성은 3점슛을 19번 시도해서 고작 3개 성공시켰고 반면 인삼공사는 28번 시도해서 무려 12개를 성공시키면서 외곽슛이 압도적으로 밀리면서 전반이후 더 달아나지도 못한채 속절없이 인삼공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울었다(...)
2월 29일 안양 KGC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92:88로 승리하면서 감독 데뷔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올리는것과 동시에 팀 통산 플레이오프 최다연패인 9연패도 끊어내면서 반격의 소중한 1승도 챙겼다. 하지만 4차전에서 마지막까지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상대팀 이정현의 결승 레이업득점이 터지면서 패배하였고 감독데뷔이후 첫 플레이오프는 1승3패로 아쉽게 6강에서 마무리되었다.
2016년 10월 3일 열린 신인 드래프트 지명 순번 지정 때에는 모비스, SK, 전자랜드에 이어 전체 4번 픽을 얻었다. 뒤이어 18일 열린 본 지명에서는 연세대 천기범을 1라운드에, 성기빈을 2라운드에 지명했다. 빅3로 꼽힌 이종현, 최준용, 강상재가 모두 앞에서 호명되었기에 그 다음 순번으로 꼽힌 천기범의 지명은 이해가 가지만 성기빈의 경우는 대학리그에서도 거의 출전 시간이 없다시피했던 선수라 대학 후배 챙기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사실 그 연도에는 1라운드를 빼면 2라운드에는 포워드 인재가 거의 없긴 하다만.....
라틀리프, 크레익, 김준일의 초강력 포스트가 가공할만한 파워를 자랑하고 있어, 1라운드 종료 시점에서 오리온, 동부와 함께 리그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3점슛 성공이 리그 꼴지이기 때문에 상위권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를 꼭 해결해야 할 것이다.
6.2. 감독으로서의 평가
작전 능력 및 선수 기용은 수준 이하, 선수단 영입 및 구성은 수준 이상어찌 보면 감독보단 프런트가 어울릴 수도..?
감독 부임 초기부터 계속 지적되어 온 단점은 떨어지는 작전 능력인데, 이에 대한 비난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이 삼성이 김상준 시대보다 더 최악의 성적을 찍었던 2014~15년 시즌이었다. 대표적인 삽질이 1라운드 용병인 리오 라이온스와 2픽 신인 김준일의 공존 실패인데, 이 둘에게 처음엔 센터와 파워 포워드 포지션을 맡겼다가 실패하자 나중엔 라이온스에게 스몰 포워드를, 김준일에게 센터를 맡겼다. 허나 그 결과는 수비 구멍의 극대화였고 결국 라이온스가 트레이드되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드진 또한 마찬가지로 기존의 이정석, 이시준을 중용하면서 전임 김동광 감독 시절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김태주나 최수현은 별로 기용하지 않으면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나마 선수층이 나아지면서 재기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15~16시즌 이후에도 간간히 작전 및 선수 기용에 관해서도 말이 좀 나왔는데, 이호현과 장민국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전자는 부족한 실력에 비해 넘칠 정도로 받은 기회 및 니갱망 모드였고, 후자는 나름 출전하면 쏠쏠한 활약을 보였음에도 경쟁자들 때문에 중용되지 못한 것.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가용 자원이 정말로 없었던 14~15시즌이나 간만에 찾아온 5할 및 플옵 진출이 걸린 15~16시즌에는 무리하더라도 주전들로 돌릴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주전 위주의 기용은 15~16시즌엔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선수 육성을 미룰 수 밖에 없었고 가드 라인의 에이스로 돌아온 주희정을 포함해 주전 멤버인 임동섭, 김준일, 라틀리프, 문태영에게 과부하가 걸렸고 결국 플옵에서 1승 3패로 탈락했다. 그래서 단점을 보완하고자 김태술을 영입하고, 천기범을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으면서 16~17시즌엔 선수 기용 면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선수단 영입 및 구성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15~16시즌의 꿀영입인 문태영과 에릭 와이즈인데, 확실한 전력 강화 카드인 문태영이 나오자 이상민 감독은 삼성 프런트에 문태영 영입을 요청했고, 프런트는 문태영을 영입하기 위해 잉여 로스터 대부분을 정리하면서 여유있는 샐캡을 확보해 영입에 성공했다. 문태영은 초반에 손발이 맞지 않아 고생했지만 이후에는 클라스를 보여주며 삼성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그리고 와이즈는 부진했던 론 하워드를 대신해 12월 중에 데려왔는데, 이 또한 이상민과 프런트가 언더 빅맨을 물색하다가 영입에 성공한 케이스로, 와이즈는 원래의 목적인 김준일의 체력 및 수비 보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적응을 마친 후반에 들어서는 득점도 잘 해주었다. 16~17시즌엔 김태술과 마이클 크레익이 대박을 쳐주고 있는데, KCC에서 심하게 망가지면서 영입 당시 무수한 비판을 받았던 김태술은 삼성에서 완전히 부활하면서 주희정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성공했고, 짧은 구력으로 인해 퇴출 1순위로 지목받던 크레익은 압도적인 피지컬과 미식축구 경력을 활용한 이타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부정적 평가를 불식시키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보자면 이상민의 감독 스타일은 일정 정도의 프런트 지원+자신이 원하는 선수 영입을 통한 리툴링 과정을 통한 전력 상승에 있어서는 중간 이상 가는 능력을 보여주지만, 이 반대의 상황에선 전략 부재의 단점이 도드라지는 막장으로 치닫는 상극의 케이스를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5~16시즌 이후엔 감독 능력애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만에 하나 14~15시즌에 보여준 무능과 부진이 시작되면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7. 기타
팬들의 스펙트럼 자체가 넓어 전성기 훨씬 지나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 A브랜드로 농구화가 바뀌자 '이상민 농구화 주세요' 요구가 빗발쳤다는 A브랜드 관계자의 인터뷰가 있었을 정도에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으며 이는 9년 연속 올스타전 투표 1위라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저 정도 인기를 누릴 선수가 또 나올지는 의문이다.특히 극성팬 중에 이상민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는데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이상민의 경기를 관전하시는 이가 있다.[17] 이상민이 대전 현대-전주KCC-서울 삼성을 거치면 이에 따라서 팬심을 옮기는(...) 정성을 보여준다. 늘 로얄석[18]에서 이상민을 응원하며, 구단차원에서 해당 팬에게 특별히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진정한 팬은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라며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민이 심판 판정에서 불이익을 당하면 그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반응하여 심판들에게 욕을 한사발 시전하기도 한다(...) 감독이 된 후에도 열렬히 응원 중인데, 이게 이상민 팬덤 관점에서 보면 '열정적인 팬'이지만 다른 팬들 시점에서보면 당연히 민폐이다. 멀리갈 것도 없이 농구판 보문산 호루라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농구팬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인사다.
헐리우드 액션의 경우에도 이상민의 경우는 유독 짜증을 심하게 내는 편이고, 항상 똥씹은듯한 짜증난 얼굴로 팬들이나 일반인들을 대한다는 카더라통신이 있다. 경기후 자기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그려 비싼 액자에 담아 전달해주는 여자팬한테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히고 쓰레기 들듯 액자 귀퉁이 들고 시크하게 걸어갔다고. 나이 들고서 올스타전에서는 장내 진행자가 '제발 덩크 한 번만 보여주세요' 애원하다시피해도 신경을 안 썼다는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때 온라인 게임인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을 했다고 한다. 렐름은 미드가드. 원정 경기 때는 노트북까지 써서 틈틈이 게임을 했다고. 당시 한국 서버를 운영 중이었던 Buff Entertainment를 수차례 방문하기도 할 정도였다.
한화 이글스 정민철 코치와 친해서 정민철 은퇴경기에서 23인의 지인에 선정되어 생애 처음으로 야구 그라운드를 밟았다고 한다.
과거 삼성에서 뛰던 시절 작전타임 도중 이규섭과 함께 안준호 감독에게 대들다시피하며 작전에 간섭하던 일들은 수 년이 지난 후에도 농구팬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다. 단순히 작전지시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면 베테랑으로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로 넘어갔겠지만, 지나치게 불손하게 행동했던 것이 문제.[19] 안준호 감독이 삼성을 KBL 우승으로 이끈 감독이기에 이때 일을 매우 불쾌히 여기는 팬들이 많다.
농구에 대한 안목을 의심케하는 농알못 발언을 몇 차례 한 적 있는데, "나라면 드래프트 1순위로 카이리 어빙 대신 지머 프레뎃[20]을 뽑겠다."[21][22]라든가, NCAA 디비전1 소속인 하버드대 농구팀을 "동아리 수준의 클럽"이라고 평가하는 등 해외농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제레미 린이 하버드 대학교 출신이다. [23]
2016년 11월 2일 오리온과의 홈경기에서 3쿼터 종료 1분 14초 정도를 남기고 마이클 크레익이 오리온의 김동욱을 상대로 2번째 U파울을 범해서 퇴장을 당했는데, 이에 이상민 감독은 "난 그런 규정이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라며 항의를 했다. 참고로 해당 시즌 KBL 경기규칙 37조에 U파울을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파울'의 한 유형으로 정의하고 있고 37.2.3조에 "선수가 2개의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파울을 받으면 경기 잔여 시간 동안 실격퇴장이 된다."라고 적혀있다. 즉 이상민 감독이 규정 숙지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1] 2014~15시즌 삼성의 부진에 대해 선수 구성의 문제다 vs 이상민 본인의 감독 역량 문제다의 대립이 심했기 때문.[2] 그래도 최희암은 이상민의 재능을 아껴서 그나마 이상민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둔 편이었다. 문경은이나 우지원은 거의 뭐 하루하루 슛 쏘는 기계(...)[3] 이상민의 트리플더블은 당시 한국 남자 농구선수 중에는 최초로 기록한 걸로 알려졌지만, 2012년 들어 이전 기록들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허재, 이원우, 서장훈이 이상민보다 앞서 트리플더블을 기록했음이 발견되었다[4] 실제로 1픽에 걸리면서 하승진을 지명한다.[5] 그리고 남의 레전드를 그냥 데려간 삼성 역시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그런데 사실 욕먹을 일이 아니긴 하다. 서장훈을 내주고 이상민을 가져간 것이니 그렇지만 삼성은 기존의 강혁-이정석에 이상민을 합해 3가드 라인을 구축하여 2년 연속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6] 둘은 연세대학교 선후배. 게다가 서장훈은 앞서 SK에서 FA 자격으로 삼성으로 옮길 당시 본의 아니게 선배 우지원을 날려버렸던 터라(삼성이 우지원을 보상선수로 SK에 넘겼고 그는 곧바로 김영만과 맞트레이드) 이상민이 자신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7] 결국 2년도 안 되어 허재 감독과의 마찰, 하승진 등장으로 인한 출전 시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된다.[8] 물론 그 시절의 포인트가드 중에서는 가장 큰 선수 중에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상민 정도의 키는 슈팅가드에 많았던 키였으니까... 보통 그 시절의 포인트가드들은 170(유도훈물론 자기 팀이지만)~180정도(신기성, 김승기 등등)였으니...[9] 조금 앞 세대이기도 하지만 슈팅가드였던 김현준과 이충희만 하더라도 이상민과 키가 같았다.[10] 몸이 말을 안듣던 은퇴하기 불과 몇년전이던 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경기 전 몸푸는 시간에 덩크를 심심치 않게 시전하였다.[11] 물론 키가 큰 선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인트가드 중에 키 190이 넘는 봉하민과 은희석 같은 선수가 있긴 하였지만 기본 기량 자체가 애초에 이상민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어정쩡한 트윈가드를 전전하게 된다.[12] 심지어 우지원이나 문경은 등 자신보다 7~8cm나 크면서 수비가 약한 상대편 3번 포지션[13] 보통 '이응사'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팬클럽을 지칭한다. 안티들은 이상민의 응가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까고 있다.[14] 후술할 이상민 아저씨와 '이응사'로 대표되는 여성팬들.[15] 앞에서 서술한 2014년 12월 16일의 나 이제 선수 아니야사건이 뇌리에 너무 깊게 박혀있다. 올해의 실수 1위에 뽑혔을 정도...[16] 사실 이거 전에 2탄으로 2015년 11월 11일 창원 LG와의 원정경기 4쿼터 또? 8분3초를 남기고 장민국이 패스미스를 저지른 적이 있다.[17] 대전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아저씨이다.[18] 경기장마다 임시구조물로 되어있는 선수단과 가장 가까운 좌석이 있다.[19] KCC 시절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그때 감독이 허재였던지라 허재가 크게 화를 낼 때 잠잠해졌던 일이 있다.[20] 10순위.[21] 이후 어빙은 NBA의 올스타 포인트가드로 대성한 반면, NCAA 최고의 득점 기계 프레뎃은 NBA 적응에 실패하고 몰락하게 된다. 훗날 이상민이 고백하길, 어빙의 경기는 1번 밖에 안 본 상태에서 그런 발언을 한 거라고 해명했다.[22] 몇 년 후 삼성 감독을 하고 있을 때 리카르도 라틀리프가 이 얘기를 전해듣고는 "우리 감독님이 술이 많이 취하셨었나보다ㅋㅋ"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이상민·프레뎃, 5년 만에 만난 묘한 인연?[23]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운동장학금을 주지 않기 때문에 하버드 농구부의 수준이 다른 대학 농구부보다 수준이 낮은 것은 맞다. 다만 제리미 린처럼 농구부 활동을 한 경우 입학 전형에서 특별활동으로 취급되어 가산점을 받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 입학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건 사실이다. 실제로 이런 한계 때문에 엘리트 선수들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서 하버드 출신 선수들은 역대 4명에 불과하며, 심지어 린 이전에 NBA 무대를 밟은 선수는 1954년에 데뷔한 선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동아리 수준이라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실제 린의 경우도 그렇고 하버드 출신 선수들이 NBA는 아니더라도 다른 프로리그에서 활약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 미국의 교육부 장관 아니 던컨의 경우도 하버드 농구부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호주 프로리그에서 선수로 뛰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