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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22:48:28

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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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 갑골문.png
상(商)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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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6350> 상(商) 제29대 왕
제신 | 帝辛
파일:주왕.jpg
왕호 제신 (帝辛)
시호 주왕 (紂王)[1]
자 (子)
수 (受) / 수덕 (受德)
아버지 제을 (帝乙) 선 (羡)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기원전 1046년
재위 기간 음력 갑골문: 기원전 ???년~기원전 ???년
사기: 기원전 1075년~기원전 1046년

1. 개요2. 세간의 인식3. 폭군이 맞나?4. 대중문화에서의 제신
4.1. 《봉신연의》의 등장인물4.2. 《봉신연의(만화)》의 등장인물

[clearfix]

1. 개요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국왕으로 왕호는 제신(帝辛), 휘는 수(受) 또는 수덕(受德)이다.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전하는 (桀)과 함께 걸주(桀紂)로 불린다.

선대 왕인 제을(帝乙)의 작은 아들로 형인 미자계(微子啓)가 서자라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기에 적자였던 제신이 왕위를 승계했다.[2]

2. 세간의 인식

사람들은 제신을 두고 (紂)라고 불렀다. 《사기집해》는 주(紂) 자에 대해 도리를 잃고 선을 해치는 것이라고 뜻풀이를 하였다.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그의 폭정으로 상나라 즉 은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고 기술하였다.

《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꽃미남인 데다가 머리가 총명했으며 말 재주에 능했고, 힘이 무척 장사였다고 한다. 자신의 명성이 천하의 누구보다도 더 높다고 생각하여 모든 사람들을 자기 아래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소홀히 여기고[3]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며 천하의 온갖 좋은 보물은 다 독차지했다고 한다.[4]

우혼이나 비중 같은 아첨을 잘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간신들을 등용하는가 하면 달기에게 푹빠진 나머지 달기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며 매일 호화판 파티를 열고 난교를 하였다. 심지어 달기의 말에 술로 호수를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어(주지육림) 진탕 놀기에만 정신이 팔렸다고 한다.

기자비간이 좋은 말로 간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기자는
상아[5] 젓가락을 쓰면 보통 그릇에 만족하지 못하고 옥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옥그릇을 만들면 거기에는 보통 음식은 담지 못하고 진수성찬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사치를 그만두라고 간언했지만, 주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해 미친 척하고 노예로 가장해 숨어버렸다고 한다.

비간도 잔혹한 형벌을 그만둘 것을 간언했다가 주왕이
듣자하니 성인심장에 구멍 7개가 있다[6]는데? 네 가슴팍을 갈라서 확인해봐야겠다.
하며 진짜로 비간의 심장을 갈라 죽였다고 한다.[7]

당시 상나라의 3공은 구후, 악공, 서백(西伯) 창 세 사람이었다.[8] 주왕은 구후의 딸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제로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구후가 악공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주왕을 죽이려고 했다가 음모가 들통나자 주왕은 구후와 악공을 붙잡아 구후는 젓갈로 담그는 사형에 처했고, 악공은 육포로 만드는 사형에 처했다.

간신배인 비중이 서백 희창도 반란에 가담한 혐의가 있다고 고하자 주왕은 서백을 유배시켰다가 그가 자신의 영지 일부와 보물을 바치자 풀어주었다. 이 일로 서백 창의 아들은 원한을 품고 주왕을 타도할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는데, 서백 창이 죽고 그 아들이 뒤를 이으니 이 사람이 바로 무왕 희발이었다. 무왕은 선대 문왕의 위패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천하의 제후들을 모두 모아 주왕과 결전을 치르려고 했으나, 하늘에서 무왕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 2년 동안 출전을 보류하다가 때가 되자 다시 은으로 쳐들어가 목야란 곳에 이르러 최후의 결전(목야대전)을 치렀다.

이때 주왕은 무려 70만 대군을 거느렸지만 병력 대부분이 노예들인 오합지졸들이었고, 제후들의 정예병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목야에서 대패한 주왕은 마지막에 스스로 수도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그 시체는 무왕이 찾아내서 목을 쳤다고 한다.[9]

온갖 안 좋은 이미지는 다 달고 있다 보니,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세트로 묶여 폭군의 대명사로 걸주 같다는 말을 만들었다. 주지육림, 포락지형도 인상이 세게 박혀서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3. 폭군이 맞나?

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자공이 말했다. "주왕의 선하지 못함이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니, 세상의 악한 것들이 모두 (그리로) 몰리기 때문이다.[10]"
사실 주왕 제신에 대한 평가는 춘추전국시대 때부터도 일각에서 너무 악행들만 달고 다닌다고 쓰여 있어,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하나 여러 사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고고학도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상 그러려니 하고 오랜 기간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다.

제신의 행적에 대해 어느 정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약 3천여년 후인 20세기 이후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나라의 군주 제신은 나름 천지신명에 충실하게 제사를 지냈고[11], 동쪽의 인방(人方)[12]을 평정해 오히려 상나라의 국세는 왕성했다고 한다. 이는 제신이 제사를 게을리하고 국정은 내팽개친 채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는 《사기》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방탕과 사치의 상징인 주지육림제사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13] 게다가 갑골문에 의하면 상나라 시대의 전통적인 제사 방법인 인신공양이 제신의 치세에 접어들자 없어진건 아니지만, 이전에 비해 오히려 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14] 이를 미루어 본다면 방탕하고 난폭한 인물이라는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신이 제사를 충실하게 지내는 것을, 주문왕주무왕 등의 상대 세력이 왜곡시켜서 술 연못과 고기 숲을 만들었다고 소문냈다는건데, 만약 그랬다면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을 깎아내리고 신 왕조를 개창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신이 사치하고 방탕했다는 기록은, 제신 개인에게 힘이 집중되었던(즉 왕권이 강화되었던)[15] 상황에 대한 소국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상나라의 초기에는 형제나 숙부 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부자 상속이 네 번에 걸쳐 연달아 나타나는 등 자성의 왕권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제신은 아예 서자인 이복형도 끌어내리고 부자 계승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적장자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제신의 부왕인 제을(帝乙) 시기부터는 아예 상나라의 조상신인 '제(帝)'를 왕의 이름으로 쓸 정도로 왕에 대한 신격화가 강화되었으니, 당연히 제신도 이를 이어받은 것이다.

즉, 왕권이 굳건하다는 것은 상나라가 초기의 소국 연합 체제에서, 한 일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허나 이는 반대로 말하면 자연스레 주변국이나 기존의 방계 왕족으로 구성된 제후와 귀족들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대한 불만이 주지육림 등의 설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갑골문을 연구한 학자들 중엔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패권이 넘어간 역성혁명의 실체는 주왕이 이전 대비 무슨 엄청난 폭정을 했다기보단[16] 상나라가 황하 유역 동쪽에 위치한 동이라고 불렀던 이민족을 상대로 동진 정책을 펴는 사이에 서쪽에 있었던 강력한 제후인 주나라가 상나라를 기습했고, 그걸 막아내지 못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7]

서주 무왕의 입성 당시 상나라 사람인 백이와 숙제가 이탈하는 등, 이 기습 공격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하늘의 뜻에 따라 폭군을 주살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한 내용이 《사기》에 나온 왜곡된 기록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천명사상 자체가 상주혁명 성공 이후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이에 따르면 상주혁명은 새로운 중앙권력에 맞는 체제를 위해 제신과 달기가 희생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상나라는 여타 부족과의 혼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힘을 얻어 나갔지만, 일정 이상으로 왕권이 커지려면 오히려 이들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태고(太古)의 상나라 시대의 체제로는 그것이 힘들었고, 이것이 설화상의 긴장 관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불균형이 상나라의 부족신인 (帝)를 넘어 보다 보편적인 천명론을 들고 나온 주나라에 의해 해소되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이 제신, 그리고 왕권 강화를 제약하던 주변 세력의 상징으로서 달기였다는 것이다.

사실 상나라는 항목에도 있듯 주변 민족을 앞서가는 첨단 문물의 상징인 청동기를 앞세워 허구한 날 주변을 족쳐가며 대대적인 인신공양과 식인을 저지른 나라였다. 제신이 저질렀다고 《사기》에 기록된 만행들도 사실 제신 이전부터 상나라에서 주변 방국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꽤 많이 행하던 것들이었으며, 거기다가 저 만행들은 춘추전국시대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애초에 상나라의 주특기가 전쟁과 제사였는데, 이 둘이 연결되다 보니 인신공양이 성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상나라가 유달리 심했다는 거지, 서주,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도 정도의 차이일 뿐 상당수 나라들이 태연히 인신공양과 식인, 순장을 행했다.[18] 그나마 사람 대신 인형을 순장시키는 식으로 순화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공자는 이것조차 인형 만든 애 대가 끊어질 것이라며 극혐했다. 이런 악습들이 중화권에서 본격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인(仁)을 내세운 유가제자백가들이 본격 발흥하면서부터 일어난다.

애초에 고대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희미했으니, 딱히 제신 개인이 당시 기준으로 특출나게 악한 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인습 자체가 아즈텍 제국만큼은 아니었을지언정 오만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산제물로 바치고 죽여댔으니[19], 제신 본인이 온건했다고 한들 주변국들이 상나라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원한이 사라질 턱은 없었다.[20]

따라서 《사기》에 기록된 제신의 일화들은 제신 개인의 악행이라기보다는 상나라가 다른 나라의 포로들에게 벌인 잔혹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주나라프로파간다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면 비록 제신이 《사기》 등의 문헌에 보이는 것처럼 세기말 폭군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결국 상나라가 본래부터 가진 문제점인 인신공양을 비롯한 특유의 잔혹한 문화와 정책이 상나라의 멸망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쉽게 말해, 상나라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바람 넣은 풍선마냥 부풀어오르다가 주나라에 의해 뻥 터졌다고 보면 된다.

4. 대중문화에서의 제신

보통은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그려지는 편으로, 특히 《고우영 십팔사략》에 그려진 제신은 신하들이 찍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데다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정도의 남자로 묘사되고 있다.[21] 외모도 거의 라오우를 연상케 한다. 문제는 너무나도 잘난 탓에 자기 밖에 모르는데다, 사람 목숨 알기를 파리 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극도의 소시오패스로 그려지며, 달기를 만난 뒤엔 이런 포악함이 한층 더 강화되는 등, 《십팔사략》 초반부에 등장하는 고대 군주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포스를 자랑한다. 특히나 어머니의 병을 고칠 영약으로 곰발바닥을 구하기 위해 왕의 동물원에 침입했다가 붙잡힌 청년을 맨손으로 단 일격에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켜 버리는 장면은 압권.[22] 나중에 주나라 군대에 쫒겨 불에 타 죽을 때도 "난 너희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불나라로 가는 것이니라"며 끝까지 정신승리로 일관하기도 한다.
채지충의 《봉신방》에서는 처음엔 의외로 상식인 포지션으로 나랏일에 열심히 임하며 내치를 잘 하는 군주의 면모를 보이나 점차 갈수록 달기의 청을 들어주면서 자신도 점점 타락해가는 면모를 보이고, 결국 나중엔 자신의 행적을 후회하며 궁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채지충 봉신방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렇듯 만화 특성상 개그스러운 면모를 중간중간 보인다. 일례로 신하가 주지육림을 만들자고 간언하는 장면에선 의외로 일갈하며 완강히 거절하는데 그 이유가 "몸무게를 감량하기에도 정신 없는데 주지육림이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라는 웃기는 이유로 나온다. 모습을 보지 못한 신하들의 걱정에 "거 참, 공문더미 속에 온종일 일하니까 안 보일 수 밖에."라고 하거나 간간히 예산을 들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는 개그도 보인다.

4.1.봉신연의》의 등장인물

모티브는 위 항목의 제신. 원래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도 무난하게 했지만 여와의 사주를 받은 달기 때문에 폭군으로 타락했다.

원래 선대 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날때부터 큰 지진에, 나무에서 새들이 떨어지고 짐승들이 울부짖는등 난리가 벌어지다가 이 셋째 아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지진도 멎고 난리를 피우던 짐승들이 조용해지는등 전대미문의 난리에 관리들은 점을치다 못해, 태사 문중에게까지 조언을 구한것. 그런데 문중도 점을 봐도 결과를 해석하기 힘들어서 천지의 영기를 품은 흑기린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흑기린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23] 이에 문중은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따라 달라질 것이라 해석하고, 길조로 대답했다. 이후 성년이 된 이후 장자와 차남도 있는데 셋째에게 왕위계승을 해야하냐면서 의견이 분분한적도 있는데, 이것을 종식시킨게 궁전의 대들보가 무너질 때 혼자 힘으로 그걸 받치는 괴력을 보여주어서 상용 등의 대신이 태자로 세울 것을 간언하여 태자가 된다. 힘만 센 것이 아니고, 훗날 운중자가 방문할 때 주왕이 총명하다는 언급도 있는 걸 보면 지능도 뛰어난 편이었다. 한마디로 자질만 따진다면 충분히 명군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

게다가 문중, 황비호와 같은 충성심 있고 능력도 뛰어난 대신들이 보필하고 왕후 강씨를 비롯한 세 후궁도 현숙한 인물이어서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승상 상용이 여와의 생신이 다가오니 여와에게 향을 피워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진언한 것이 화가 되었다. 여와의 조각상에 반하여 '이런 여자를 곁에 두고 시중들게 했으면 좋겠네'라는 내용의 시를 여와를 모신 궁전의 벽에 적은 것. 상용이 이건 여와에 대한 불경이라며 빨리 지워버리라지만 주왕은 난 그저 여와님의 미모를 찬양해서 널리 퍼뜨리고 싶었을 뿐인데 라며 거부하였고, 이는 여와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후에도 여와를 잊지 못해하다가 간신배인 비중, 유혼의 조언을 구했고, 이 둘은 동서남북 4대 제후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미녀들을 진상하게 명령을 내리라고 제안한다. 이후 주왕이 대신들에게 이 얘기를 꺼내자 승상 상용이 너무 여색에 탐하면 안된다며 간언하였고,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주왕은 받아들여 없던 일로 한다. 하지만 다음해에 천하의 제후들이 주왕을 알현하러 상경왔고, 주왕은 과거의 일이 생각나서 다시 비중, 유혼에게 얘기를 꺼낸다. 비중은 이미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였으니 번복하지 않는 게 좋다, 대신 기주의 제후인 소호의 딸이 절세미인이고 한 명만 진상하면 큰 문제도 되지 않을거라며 제안한다. 다른 제후들이 상경와서 모두 비중과 유혼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강직한 성품의 소호는 바치지 않아서 원한을 산 것. 이에 주왕이 소호에게 이야기를 꺼내지만 소호는 강경하게 거부하다 처형될 뻔하고, 영지로 돌아온 소호는 분노해서 주왕에게 반기를 든다. 주왕은 북백후 숭후호와 서백후 희창에게 토벌을 명령, 그러나 숭후호는 무능한 인물이라서 패배를 거듭했고[24] 희창은 평화주의자인데다 소호쪽에 잘못이 없는 걸 알았기 때문에 싸움을 피해서 정벌이 순탄치 않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평화주의자인 희창이 사신을 소호에게 보내서 딸을 진상하게 설득한다. 그리고 그 딸이 바로 달기였는데, 조가로 가는 도중에 여와의 파견을 받은 여우 요괴가 달기의 몸을 빼앗는다.

그 이후로는 아시다시피 달기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 바른말을 하는 충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정실 부인인 강씨를 고문치사시키며, 4대 제후에서 동백후와 남백후도 명분없이 제거한다.[25] 결국 악행이 점점 심해졌고, 강성해진 서주가 천하의 제후들을 규합하여 은나라를 토벌한다.

문중을 비롯한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대부분 전사하였는지라 조가에까지 쳐들어온 주나라군을 상대로 직접 출전한다. 수십 명의 제후들을 상대로 단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싸우며 남백후 악순[26]을 비롯한 몇 명을 참살하지만 결국은 중과부적으로 강환초의 아들인 강문환에게 한 대 맞고 퇴각, 부하들은 모두 전사한다. 달기 세 자매가 마지막으로 나서지만 상대의 도술을 당할 수가 없어서 패퇴, 주왕은 이젠 가망이 없으니 니들은 피신해라는 말을 남기고 적성루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에 과거 주왕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귀신들이 나타나지만 주왕이 두 눈을 크게 뜨자 양기가 나오면서 귀신들을 쫓아버린다. 적성루에 올라간 뒤, 그제서야 본인의 과오를 후회하고는 봉중관으로 근무하는 늙은 환관 주승에게 불을 지르라고 명령해서 불타죽은 뒤 천희성으로 봉신되고, 주승도 순국하며 과숙성으로 봉신된다.

4.2.봉신연의(만화)》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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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나라에서 붙인 악시(惡諡).[2]여씨춘추》 <당무>(當務)편에 의하면 '어미를 같이한 형제가 미자계(微子啓), 중연(中衍), 그 다음이 수덕(즉 주)이었다고 한다. 주의 어미가 계와 중연을 낳았을 당시 그녀는 첩이었고, 얼마 안 돼 본처가 되어 주를 낳았다. 미자계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더니 태사가 법을 내세우며 "본처의 소생이 있으면 첩의 소생을 세울 수 없다."라고 주장하여 주가 후계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편에서는 법조문에 얽매어 태자를 세웠으므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는 뜻으로 넣은 항목이다.[3] 상나라는 (帝)라는 신을 섬겼는데, 30대 왕 제을에 이르러서 '제(帝)'라는 이름을 씀으로써 신권 사상이 극을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천신(天神) 보기를 우습게 여긴 28대 왕 무을(武乙)은 사냥을 나갔다가 날벼락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선왕 제을은 덕왕으로 시호가 기록되었고, 적자이지만 차자인 제신을 총애하여 '제'(帝)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는 설이 있다. '신(辛)'이라는 이름에 관해서는 설화로는 당대에 동이가 은(상)나라의 최대 골칫거리로 전락했는데 제을의 치세 때까지 제압하지 못한 동이를 제신에 이르러서야 완벽하게 제압하여 정복했으므로 그가 무섭다는 의미로 '신'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 외에 자신을 신으로 격상하려는 의미로 '신'이라고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나라는 태어난 날에 해당하는 10간(천간)에서 이름을 따오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글자는 '여덟째 천간 신(辛)'자로서 이름에 사용된 것이다. 다른 별칭으로는 '주신'이 있다.[4] 이렇게 재물을 쌓아둔 누각이 있었는데 이를 '녹대'(鹿臺)라고 불렀다. 훗날 패망하여 자결할 때 여기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한다. 사방 1리에 높이가 1천 자였다고 하는데, 전한 시대 기준의 척관법으로도 거의 63빌딩 높이였다. 기와 하나 똑바로 못 만들던 기술 수준으로 현대에도 짓기 힘든 건물을 지을 수 있을 리 없으니 과장된 기록이다.[5] 고대 중원 지방은 밀림이 우거져 있었고 아시아코끼리가 살았으므로 상아를 구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코끼리는 군대를 동원해서야 겨우 몇 마리 잡을 수 있었으며, 몇 마리 잡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 기념할 정도로 잡기도 힘들었다. 상아도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6] 참고로 7개는 정상보다 하나가 적다. 정상인은 폐정맥 4개, 폐동맥 1개, 대동맥 1개, 대정맥 2개로 8개. 폐정맥 2개가 서로 붙어 있거나 한 경우에 7개가 가능하다.[7] 그런데 비간은 주왕과 친척간이라 주왕은 숙부를 죽인 셈이었다. 일부 어린이용 《만화 세계사》에서는 이런 지나친 패륜을 보여주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되었는지 달기가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 7개가 있다는데 확인해 보고 싶지 않냐고 주왕을 부추기고, 주왕이 비간에게 사실이냐고 묻자 정녕 보고 싶냐면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심장을 찌르고 자결하는 것으로 변경되기도 했다.[8] 다만 3공 드립은 주문왕 '창'을 높이기 위한 후대의 미화로 보기도 한다. 당시 정황상 창이 그정도 상나라 고위직에 오를 여건은 안되어보이기 때문.[9] 상나라인신공양을 중심으로 한 신정체제의 특성상 제신이 단순히 절망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현인신을 자처한 상나라 군주로서 스스로를 인신공양해 벌인 종교적 행위이자 주술이라는 설도 있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수단 중 하나가 불태워 죽이는 것이며() 분살 자체가 주는 비주얼적 쇼크까지 고려하면 귀신이 되어 저주하겠다는 의도였을 거라고. 상나라가 주나라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을 대상으로 수백 년에 걸쳐 광범위한 인신공양을 자행했고 이에 원한을 가진 서부 국가들이 제신이 동방 원정을 나간 사이 기습해 멸망시켰음을 고려하면 참으로 상나라다운 최후라 볼 수 있다.[10] 쉽게 말해 '그 많은 실정을 주왕 혼자 저질렀겠냐? 멸망할 나라의 대표였으니 걔가 모든 죄과를 몰아서 받은 거겠지'라는 뜻.[11] 물론 이 상나라 시절 제사라는게 인신공양이 동반된 것임을 감안하면 잔혹한 의식이긴 했다.[12] 상나라에서 方은 방향이라는 뜻도 있지만 복종하지 않는 나라를 뜻하기도 하므로 여기서 인방은 나라 이름이다. 사람 '인'(人)이 두 사람이 기대는 모습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옆 모습을 본뜬 글자이고 오랑캐 '이'(夷)와 뿌리가 같은 말이다. 그래서 동이의 원래 뜻이 바로 '인방'이다.[13] 당시 제사 의식은 상나라 조상신들에게 제수품을 바치고 왕은 일종의 접신해 점복을 받는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제사가 끝난 이후 상족들이 그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종의 축제기도 했다. 당연히 제사 규모가 커질수록 부산물도 많아질테고 그 모습을 본 피지배 이민족 계열 사람들이 이후 상나라의 주지육림 일화를 만든 것 아니겠냐는 추론도 있다.[14] 참고로 인신공양순장 등은 이후 주나라춘추전국시대 때도 정도의 차이일 뿐 여전히 횡행했다. 그래서 공자 등을 비롯한 여러 제자백가 지식인들이 전방위로 까대며 악습 퇴치에 나섰을 정도. 봉건제 특성상 각 지역마다 풍속이 다른 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5] 상나라의 구조는 왕으로 대표되는 상족과 점복을 도와주는 정인 및 복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세력이 연합한 구조였다. 초기에는 이들 간의 힘의 차이가 별로 없었으나 후기에 들어 권력 승계 구조가 형제 상속에서 적장자 상속으로 옮겨지자(힘이 집중되기에 용이함) 왕은 제사를 지낼 때 신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더불어 당시의 가치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했고, 이러한 추세는 주공 희단의 천명사상으로 완성되어 현대까지의 중국 역사의 큰 틀로 자리잡았다.[16] 다만 제신이 자제를 하게 했다고 한들, 상나라의 인신공양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상나라는 기본적인 인습 자체가 너무 잔인했고 주변에게 큰 민폐라서 원한이 철철 흘러넘칠 사유는 충분했다. 왜곡이 있었다한들 상나라라는 나라 자체에게 가지고 있었던 주변국들의 증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17] 서쪽에 있는 주나라 입장에서는 상나라도 동이로 취급되었지만.[18] 순장은 심지어 항목에도 있듯 명·청대까지도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중국도 수나라 때 이미 없어지긴 했는데, 이후 이민족 침입으로 다시 순장이 부활했다 금지했다 하는 사례긴 하다만. 여담으로 한반도는 불행 중 다행으로 대가야 멸망을 끝으로 6세기 이후 순장 풍습은 사라진다.[19] 물론 상나라 내부에서도 아예 개혁 움직임이 없는건 아니라 살생을 금하고 청동기 등으로만 의식을 지내는 일종의 종교 개혁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으나, 종국엔 실패해 반동 문화가 더 세졌다고 본다. 또 그 속에서도 예외는 있어서, 고고학상 주류 상족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장 등을 하지 않는 비교적 평화로운 풍습을 간직한 상족 집단도 소수 있었다.[20] 한자 피 혈, 백성 민, 고을 현, 붉을 적이 갑골문에서 발견된, 인신공양 및 처형과 관련 깊은 잔혹한 유래를 가진 한자로 이런 문자가 자주 쓰였다는 것부터 상나라의 인습을 엿볼 수 있다.[21] 사실 이는 실제 사서에도 말빨 좋고 힘도 쎄다는 식으로 적힌 부분이 있다.[22] 처음에는 그 청년한테 "네가 나의 동물원에 침입했느냐?"라고 묻자, 청년은 굶주린 터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제신은 잠시 말이 없었는데, 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신하들은 "왕께서 저 청년을 불쌍히 여기시어 목숨을 살려주시려나 보다!"라고 감탄을 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제신은 주먹으로 청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23] 주왕이 태어난 날 흑기린도 주왕의 고고지성에 맞춰 함께 울었는데 이를 들은 상나라 수뇌에서 예지를 부탁한 것.[24] 그나마 동생인 숭흑호가 도술을 알아서 소호의 아들인 소전충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나, 상대편에도 도술을 아는 인물이 나서서 숭흑호를 사로잡았다.[25] 동백후 강환초가 강씨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강씨가 죽은 뒤 강환초가 반발할 것이 두려워서 비중, 유혼과 의논한 뒤에 4대 제후를 조가에 불러들여 전부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 사실을 미리 전해들은 4대 제후가 상소서를 준비하여 이틑날 주왕이 강환초를 죽이려 할 때 올렸으나 오히려 더 분노를 사서 넷 모두 제거하려고 한다. 넷 중에서 북백후 숭후호는 비중, 유혼과 친해서 이 둘이 말린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고, 서백후 희창도 다른 충신들이 간언해서 살아남았으나 대신 7년동안 감금당한다.[26] 위에서 처형당한 남백후의 아들. 아버지가 살해당한 일로 은나라에 반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