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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1:53:08

장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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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2b9><colcolor=#fff> 장기범
張基範
파일:장기범 아나운서.jpg

1. 개요2. 현역 방송인 시절3. 은퇴 이후4. 약력5. 에피소드

1. 개요

張基範(1927.5.5~1988.3.18)

대한민국아나운서, 언론인. 호는 인천(仁泉).

2. 현역 방송인 시절

1927년 5월 5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1]에서 태어났다. 경성공립공업학교,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거쳐 1948년 12월 KBS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하였다. 그는 신입 아나운서의 몸으로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인 스무고개의 MC로 발탁되면서 일약 스타 아나운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6.25 전쟁이 발발하며 KBS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철수했고 장기범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방송활동을 계속했다.

휴전 후 서울에 환도한 KBS는 전쟁과 민생고에 상처입은 민심을 달래고자 기존에 장기범이 맡고 있던 스무고개 외에 임택근을 MC로 하는 노래자랑을 신설하면서 오락 프로그램을 확대하였다. 이 두 프로는 단박에 장안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떠올랐고, 정동의 좁은 공개홀이 감당 못하는 수많은 방청객 때문에 나중엔 동화백화점 6층 뮤직 홀[2]을 임대하여 공개방송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3] 당연히 MC를 맡고 있던 두 아나운서 또한 최고의 인기를 떠안아야 했는데 수려한 외모를 가진 임택근은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샤프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장기범은 중장년층에게 많은 호감을 샀다고 한다. 1957년에는 KBS 아나운서 실장으로 임명되어 아나운서들을 이끌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이던 1959년, 장기범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전담 아나운서로 미국으로 약 2년간 파견 근무를 나갔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민주당 내각제 정부가 박정희5.16 군사정변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평소 꼿꼿한 성격의 장기범은 미국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으면서 군인은 국가 방위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지 정치에 발을 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장기범은 그날 미국의 소리 뉴스에서 "박정희 장군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1961년 미국의 소리 파견을 마치고 KBS 방송과장으로 복귀한 장기범은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을 배당하는 임무를 맡아 이름값 보다는 실력 위주로 방송을 배당하는 파격을 행사하였다. 예를 들면 신입 아나운서에게 중요한 책무인 정오뉴스를 배당하고 당시 천하를 호령한다던 모 아나운서를 국내에선 들리지도 않는 해외뉴스 담당으로 전출시킨 것이었다. 이에 비위가 상한 모 아나운서는 공보처장을 찾아가서 "장기범 과장이 인사권을 함부로 남용하고 있다"라며 이의를 제기했고[4] 그 말에 공보처장은 장기범을 1966년에 춘천방송국장으로 좌천시켰다.[5] 장기범 방송 인생에서의 첫 번째 시련이었다.

이후 1967년 서울 본사로 돌아와서 TV, 라디오 제작과장을 거친 장기범은 1969년 부산방송국장으로 좌천 당했다가 1970년 10월 KBS 보도부장[6]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장기범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1971년 4월, 7대 대선을 앞두고 방송국 윗선에서 여당 후보인 박정희의 유세에 모인 군중수를 상향조정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방송으로 보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여파로 대선이 끝난 후 장기범은 대구방송국장으로 좌천당했고, 그를 존경하던 후배들의 눈물어린 전송을 받으며 대구로 떠났다.

그 후 1973년 한국방송공사가 출범하면서 장기범은 라디오국 국장으로 복귀하여 이후 방송연수원장, 방송위원, 부산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지만 대부분 한직에 불과했다. 그리고 1982년 방송심의위원을 끝으로 34년간 정들었던 방송 인생을 마감하고 정년 퇴임했다.

3. 은퇴 이후

파일:장기범_1988.jpg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찍은 생애 마지막 사진

방송계를 떠난 장기범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중, 1988년 3월 18일 공군사관학교 생도이던 아들의 소위 임관식에 참석한 후 귀가하여 그날 저녁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 은평구 대조동 자택 부근 구멍가게 앞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져 급서하였다. 향년 60세.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후배들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묻힌 그의 묘지 앞에 모두의 마음을 담은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 적힌 그의 추모문은 아래와 같다.
時代(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隱遁(은둔)의 志士(지사)
亂世(난세)를 鶴(학)처럼 사신 위대한 常識人(상식인)
放送(방송)의 한 時代(시대)를 風靡(풍미)하시며
모든 放送人(방송인)의 師表(사표)가 되신 峻嚴(준엄)한 선비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浪漫人(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永遠(영원)한 아나운서!

장기범을 존경하던 방송계의 후배들은 1989년 이후 장기범의 생일인 매년 5월 5일 그의 묘지에서 추모 행사를 개최해 왔으나, 이제 후배들 대부분이 70살을 넘겨 거동이 불편한 고령인 관계로 2013년 행사를 끝으로 공식적인 추모식은 종료하고 앞으로는 사전 공지 없이 원하는 이들만 조촐하게 모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4. 약력

5. 에피소드

미안합니다, 제가 청첩장 비용을 물어 드릴테니 다시 인쇄하시지요.
다만 장기범은 자신이 60살이 넘으면 그 때에는 인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니 주례를 서겠다며 약속했고, 그 약속은 칼같이 지켰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장기범은 세는 나이로 61세를 일기로 타계하는 바람에 그가 주례를 선 기간은 불과 1년 남짓 이었지만...
이렇게 한지붕 아래, 어디 가나 아나운서!
그래 한지붕 아래,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 몹쓸 놈들아!
직원: 국장님 조심하셔야 겠습니다.
장기범: 왜요?
직원: 지금 서울 본사에 국장님이 춘천에서 맨날 술만 마신다고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장기범: 아 그래요? 그럼 서울에 이렇게 보고하시오. 장기범은 술만 마시는게 아니라 도 마시고 낚시도 하고 방송도 한다고 말이오.
그는 더 이상의 성냄도, 원한도 없는 접시에 담긴 잔잔한 물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1] 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2] 1964년 12월 동양TV가 이곳에서 개국하여 이듬해인 1965년 중앙일보 서소문 통합 사옥으로 옮길 때 까지 전파를 내보낸 바 있다.[3] 나중에는 나름 신선함을 추구하려고 노래자랑을 장기범, 스무고개를 임택근으로 MC를 맞바꾸기도 했다.[4] 모함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연차와 직위 등 연공서열도 하나의 척도가 되는 아나운서들에게 나이가 젊다는 이유 만으로 중요한 책무를 맡기는 것은 인사권을 남용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5] 그 아나운서가 당대 인기를 양분하던 임택근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임택근은 이미 1964년 MBC로 이적한 상태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6] 지금으로 치면 보도본부장이다.[7] 당시 KBS는 공보실 산하 국영 방송국이었고 방송국 임직원들은 물론 아나운서까지 모두 공무원 신분이었다.[8] 주로 야구, 씨름 중계로 이름을 날린 원로 아나운서. 1968년 네잎 클로버 라는 곡으로 가수 데뷔 경력도 있다. 아들인 이상협도 아버지 뒤를 이어 KBS 아나운서로 활동 중이며 아버지처럼 아나운서는 물론 가수, 시인, 사진작가로 다재다능을 뽐내고 있다.[9] 그 후배 중 한명이 임택근이었다. 임택근은 1964년 MBC의 방송부장 직책을 제의받고 이적하여 1980년 신군부의 언론계 인사 숙청으로 퇴직할 때 까지 MBC의 이사, 상무이사, 전무이사로 승승장구 했다. 물론 임원으로 재직하며 임택근 모닝쇼 등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방송인으로서의 인기도 유지하였다.[10] 실제 장기범의 생일은 5월 5일이다.[11] 1995년 군산시에 흡수통합 되었다.[12] 因山, 왕의 장례[13] 취소선 처리된 이는 이계진 아나운서의 저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 실린 관련 에피소드에 덧붙인 한마디이다(...).[14] 실제로 장기범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아나운서 중 몇몇이 술 때문에 당일 또는 다음 날 방송을 망치는 실수를 저지르며 지방 방송국으로 좌천당하거나 아예 방송국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