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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표

전근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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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0 2003 2004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64번
조창훈
(1997~1999)
전근표
(2000~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 / [[서울 히어로즈|서울 히어로즈]] 등번호 31번}}}
팀 창단 전근표
(2008~2009)
김성태
(2010~2013)
한화 이글스 등번호 19번
윤경영
(2008~2009)
전근표
(2010)
정민혁
(2011)
}}} ||
파일:전근표.jpg
전근표
全根杓 | Jeon Keun-Pyo
출생 1977년 3월 5일 ([age(1977-03-05)]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화곡초 - 신일중 - 신일고 - 한양대
신체 185cm, 88kg
포지션 외야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96년 2차 5라운드 (전체 35번,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2000~2007)
우리-서울 히어로즈 (2008~2009)
한화 이글스 (2010)
지도자 세종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7)
경력 한국독립야구연맹 사무국장 (2019~)
응원가 The Searchers - Love Potion No.9[1]
가족 배우자 강난수(2003년 결혼)
장녀(2005년생)
장남 전재홍(2008년생)[2]
1. 개요2. 선수 경력3. 응원가4. 은퇴 이후5. 연도별 주요 성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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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 한화 이글스의 야구선수. 등번호는 64번(현대), 31번(히어로즈), 19번(한화).

2. 선수 경력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현대 유니콘스 시절
서울화곡초, 신일중, 신일고[3]를 졸업, 1996년 현대 유니콘스에 2차 5라운드 투수로 지명받고 이후 한양대학교에 진학했다. 한양대 2학년 재학 중 허리를 다쳐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했고 7경기 연속 홈런 신기록, 대학선수권에서 2차례 홈런왕(1997년, 1998년)과 최우수선수(MVP), 타격왕을 차지하고 당해 전체 신인 중 2위이자 야수 중 최고 수준인 계약금 3억원[4]을 받으며 2000년 입단했다.[5] 대학 4년 통산 성적은 34경기 117타수 47안타로 타율 0.402 12홈런 30타점[6].

파일:IMG_1886.jpg

그러나, 2000년대 초반의 현대 유니콘스박재홍. 심정수. 이숭용. 박경완 등 거포들이 즐비한 막강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팀이었기에 입단 이후 주로 대타 혹은 1루수, 우익수 대수비로 뛰며 활약했다.[7] 현대가 2003년 시즌을 앞두고 가장 취약지였던 3루를 보강하기 위해 박재홍을 KIA 타이거즈에 내주고 정성훈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8]하면서 박재홍이 빠진 중견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이러한 팀의 상황과 출전 기회를 이유로 2003년 시즌을 앞두고 1루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자청했다고[9] 알려진다. 대타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내며 다른 팀에서는 무조건 1루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평을 들었다.

입단 첫 해인 2000년을 시작으로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 팀이 2년 연속 정상에 오르며 총 3개의 우승반지를 거머쥐었다. 현대 김재박 감독은 시즌 대타타율 0.361(36타수 13안타)로 이 부문 1위에 자리했던 전근표를 한국시리즈에서 중용하였다.[10] 특히 잠실구장에서 열린 2004년 한국시리즈 8차전[11] 7회말 2-1로 뒤진 와중에 삼성 라이온즈배영수에게서 결승 역전 투런홈런을 작렬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배영수는 허탈감과 분노감에 글러브를 내팽개치기도 했다. 8차전 이후 기사

2005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 유니콘스는 우승 멤버 중 11명이 혹은 등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4강 후보에 꼽히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는 평을 들었는데, 외야에 공백[12]이 생기면서 동시에 전근표에겐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해 봄 KIA 타이거즈와의 2군 경기에서 상대 투수 방동민[13]이 던진 공에 턱을 맞아 턱뼈 접합 수술을 받는 불운이 겹치기도 하였다. 현대는 이 시즌 7위를 기록하면서 같은 그룹인 KIA 타이거즈도 최하위를 하는 등 안습의 행보를 보여준다. 다음시즌 두 팀은 나란히 포스트시즌 진출을 한다.

2.2.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시절

파일:IMG_2831.jpg
<colbgcolor=#820024> 히어로즈 초창기 시절
그의 소속팀인 현대 유니콘스는 재정난을 문제로 2007시즌을 끝으로 해체를 통보했다. 설상가상으로 현대 유니콘스 재창단을 노렸던 kt wiz마저 협상문제로 창단 백지화를 선언해버리는 바람에 자칫하단 7개구단 체제로 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왔었다. 당시 주장이었던 이숭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눈물을 흘리며 "8개 구단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해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2008년 2월 그렇게 어렵사리 팀은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에 인수되어 주인을 찾았고 이광환 감독 체제로 출두하였다.

이광환 감독은 당시 전근표가 팀에서 배트 스피드와 타구의 질이 가장 좋은 선수라며 노장 이숭용의 뒤를 이을 차세대 거포 1루수[14]로 키울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만으로 30세가 된 전근표에게는 더 이상 밀리면 팀에서 퇴출밖엔 없었다.

하지만 그 후 부상과 더불어[15] 1군에서 변변한 활약은 보이지 못했고 2009시즌 종료 후 웨이버공시가 되었다. 이후에 한화 이글스로 이적.

2.3. 한화 이글스 시절

타자 치고는 생소한 번호인 19번을 사용했다.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여 2010 시즌 주로 1루수 혹은 지명타자로 출전했는데, 시즌이 흐르면서 타격부진이 찾아왔고, 더불어 KIA 타이거즈에서 고참인 장성호김경언이 한화로 오면서 2군으로 밀려났다[16]. 결국 2010 시즌이 끝난 후 한화에서 방출되어 "섹시가이"는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은퇴를 선언했다.

3. 응원가

응원가가 상당히 유명하다. 한화의 섹시가이 전근표!라는 아무리 들어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가사와, 유독 높은 톤을 자랑하는 가수가 부른 탓인지 상당한 고음이기도 해서 2010 시즌 들어 응원가가 발표되자마자 KBO 레전드급 응원가로 등극했다. 이 곳에서 들을 수 있다. 참고로 뜬금없이 '섹시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건, 전근표가 옷을 잘 입는 패셔니스타여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원곡은 1964년 발표된 서쳐즈의 Love Potion No.9으로, 영화 태양은 없다의 OST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곡이다. 2000년대를 초등학생으로 보낸 1990년대 생들이라면 영어 교과서에 나와있는 She's tall이라는 노래의 원곡으로도 기억할 것이다.

전근표의 응원가가 나온 이후로 10년 뒤, 같은 팀에서 제 2대 섹시가이가 탄생한다.[17]

여하튼 응원가의 대단한 인기 때문인지 전근표가 타석에 들어서면 유독 응원가가 크게 들린다든가 응원가가 끝났는데도 계속 떼창하는 모습(특히 잠실)이 자주 보였다. 문제의 잠실야구장 한화의 섹시가이 전근표 라이브 버전 뿐만 아니라 홍창화 응원단장 부임 전후로 한화 이글스는 응원가를 상당히 중독성 있게 만들기로 유명한데, 전근표의 응원가와 더불어 윌리엄 텔 서곡에 가사를 붙인 정현석의 응원가와 빌리지 피플의 Macho Man을 개사한 신경현의 응원가는 이미 야구판에서 전설로 불린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스포츠 애널리스트,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사무국장, 스포츠분석협회 사무총장, 세종대 야구부 감독, 스포츠 매니지먼트 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습을 보이며, 세종대 야구부 감독으로서 대학야구대회 참가 승인에 박차를 가하는 등 야구부 발전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2019년 1월 17일 한국독립야구연맹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00 현대 20 43 .256 11 1 0 3 9 6 0 6 10 .347 .488
2001 71 142 .261 37 6 0 6 19 20 0 20 39 .348 .430
2002 11 17 .294 5 2 1 0 5 2 0 3 4 .400 .529
2003 61 156 .256 40 7 0 7 21 19 0 24 44 .356 .436
2004 79 108 .296 32 6 0 7 15 17 0 20 34 .406 .546
2005 37 96 .208 20 7 0 2 4 12 0 15 27 .315 .344
2006 51 57 .175 10 1 0 2 5 5 0 11 13 .309 .298
2007 4 3 .333 1 0 0 0 0 0 0 1 2 .500 .33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08 우리 32 49 .224 11 0 0 1 4 6 0 10 11 .356 .286
2009 히어로즈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2010 한화 40 88 .227 20 3 0 1 7 12 1 12 26 .320 .295
KBO 통산
(11시즌)
406 759 .246 187 33 1 29 89 99 1 122 210 .350 .407

6. 관련 문서




[1] 한화의 섹시가이 전근표 한화의 섹시가이 전근표 날려버려 날려버려 날려버려라 한화의 섹시가이 전!근표입니다X2[2] 현재 경동고 야구부 1학년이다.[3] 현재 키움 히어로즈 타격코치인 강병식, 심판 이계성, SDF투칸스 감독인 현재윤 등의 선수들과 고교 생활을 같이 했다.[4] 팀에서는 박재홍 이후 오랜만에 대졸 야수에게 큰 돈을 써서 데려왔다. 이후 2년뒤 후배 김민우가 4천만원을 더 받게되어 기록이 깨진다.[5] 당해 신인 투수 최고액은 3억 8천만원을 받고 LG 트윈스에 입단한 한양대 경헌호.[6] 이 시기까지 대학 야구 마지막으로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다. 2000년 부터 나무배트를 사용[7] 그의 포지션인 1루수의 주전은 이숭용.[8] 원래 3루수에는 채종국 이라는 선수가 있었으나 수비는 그럭저럭인데 타격이 영 좋지 않았다.[9] 그러나 1루수는 신인이던 이택근이 포수로서는 도저히 써먹을수 없다는 코치진들의 판단으로 외야와 1루와 3루수로 밀려나갔다. 그러다가 고참이던 이숭용이 뜬금없이 외야까지 알바를 겸입하는 사태가 되었다. 이숭용은 2003년 이후로는 외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10] 김재박식 작전야구의 상징이었다.[11] 당시 10시가 넘어갈 경우 9회 이상의 이닝을 치를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그 때문에 10시가 넘어갈 경우 연장전이고 뭐고 없이 그냥 무승부 처리. 이 제도의 폐해로 한국 야구 역사상 유례 없는 한국시리즈 3무승부가 나오며 7차전을 넘기게 되었고 이듬해 이 규칙은 없어졌다.[12] 그래도 전준호나 송지만 같은 선수들은 건재했었다. 거기다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에 몸 담던 래리 서튼이 영입되었고 그리고 젊은 야수들인 유한준, 조평호 등 2군 선수단들이 기량이 늘어나면서 경쟁이 더 심화 되었다.[13] 이 선수는 원래 김성근 감독 재임시절 LG에 있다가 김상현을 받는 조건으로 KIA로 트레이드 된 투수인데 부상을 숨기고 왔다는 점에 김성한 감독이 극대노 했다는 후문이 있다.[14] 한때 이광환 감독과 우리 히어로즈 선수들 몇몇 마찰이 컸는데 뜬금없이 이숭용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를 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SK 프런트는 이런 더러운 트레이드는 안하겠다고 선을 그으면서 트레이드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구단주가 추가 금액을 내놓으라는 양아치 같은 행보를 보인것이다. 더군다나 정성훈도 이 시기에 학을 때었는지 출전수가[15] 사구에 맞아 안면 부상을 당하는 등 안 좋은 일이 생기며 잡은 기회를 못 살렸다. 그 공백을 틈타 성장했던 선수가 이택근.[16] 거기다가 얄궃게도 두 선수 모두 1루수와 외야수까지 볼 수 있던 좌투좌타 라는것 까지 공통점이였다.[17] 전근표는 2010년에 1대 섹시가이면서 등번호는 10번대(19), 이해창은 2020년에 2대 섹시가이면서 등번호는 20번대(27)다. 그 사이에 한글자 차이의 섹시이가 있었다. 심지어 그 분의 등번호는 이해창의 등번호(27)를 전근표의 등번호(19)로 뺀 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