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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5:45:29

승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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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3. 중국4. 일본5. 태국6. 미얀마7. 대중 문화에서의 승병8. 기타

1. 개요

승병()은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를 말한다. 대개 사찰들이 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승려들이 무장을 하고 절을 지키게 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이 보다 조직화된 것이 승병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전란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산 속에 있는 절들은 많은 물자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어 도적의 습격에 비교적 쉽게 노출될 수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이 유럽가톨릭이나 정교회수도자들과도 비슷하다. 기독교수도원도 소장 가치가 높은 고서적이나, 신자들의 헌금으로 제작된 성유물 같은 값나가는 물건이 많다보니까 도둑들이나, 해적 및 외적의 약탈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수도자들이 자체적으로 검술을 익히거나, 아예 이런 무장한 수도자들로 구성된 기사단까지 결성될 정도였다. 중앙아메리카아즈텍 제국에서도 같은 이유로 사제들이 자기들만의 사병을 보유하기도 했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불교 사원세력은 그 자체로 일종의 봉건 영주 세력에 가까웠다. 단순히 사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오래된 사찰들은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으로 건립되어 산과 강을 경계로 막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고 수백명 이상의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고려 시대에는 사원들이 사실상의 사병들을 보유했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선종을 키우고 기존의 주류교단이었던 교종을 탄압했는데 그 때문에 특히 최씨 정권 시기에 교종 사원들의 반란이 상당히 잦았다. 사원들은 수백명씩의 군사를 동원한 반란을 계속 일으켰고 그 와중에 교종 사원들이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2. 한국

파일:external/hawkebackpacking.com/south_korea_seoul_war_memorial_07.jpg
전쟁기념관에 있는 승장 김윤후의 모습을 그린 처인성 전투 상상화.

2.1. 삼국시대~후삼국시대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남북국시대부터 국교로 지정돼 나라와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보위해야 한다'는 한국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인 '호국 신앙'[1]과 결부되었고, 이에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승려들은 살생을 금하는 교리를 어기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군대를 조직해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들 소수의 적을 격퇴하는 데에 힘을 보탰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승병은 고려사 최영전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당태종의 침공에 맞서 싸운 3만여 명의 승병들이다. 다만 최영이 승병(勝兵), 즉 승리한 병사들을 승려 병사(僧兵)로 착각하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현존하는 곳곳에 당시 승려로써 참전한 이들이 있기는 있었다고 암시는 되며, 고구려에서도 신성이라는 승려 장수가 있긴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제 멸망 당시 귀실복신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지휘했던 승려 도침.

신라화랑도는 승려가 교육을 담당했지만 승려는 교사 역할일 뿐 화랑도의 정식 구성원은 아니었고, 화랑도도 정식 승려 집단은 아니었으니, 화랑도는 승병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이름난 화랑은 수천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삼국통일전쟁이나 김헌창의 난 같은 국가적 위기에는 참전했으니 신라 한정으로는 화랑도가 고려-조선시대의 승병과 유사한 역할을 맡은 셈이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민란이 잦아지다 보니 사원을 지키기 위해 해인사의 경우처럼 사원에서 자체적으로 경비 목적으로 승병을 양성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출가하고 정식으로 구족계까지 받은 승려들을 무장 병력으로 동원했다기보다 사찰에 딸린 장원에서 소작하는 전호들을 무장시킨 일종의 민병대로써의 성격이 더 강했다. 최치원이 쓴 해인사 묘길상탑기는 889년895년 당시 해인사를 침입한 초적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치군(緇軍) 56명의 위령을 위해 세운 것. 신라 말기 해인사는 이미 2,500결의 토지를 장원으로 보유한 '대사찰'이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도 사원의 승병이 군벌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2. 고려 시대

파일:external/s10.postimg.org/a0053134_55c7d6a0ac815.jpg
123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백나한도 중 제329 원상주존자로 묘사된 고려시대 승병의 모습. 일본 이데미츠(出光) 미술관에 있었으나, 고려산업 신성수 회장이 매입하여 현재 부산 일암관에 소장돼있다.

고려 때엔 가정을 가진 동시에 토지가 있으면서 노역을 하며 승려로서의 생활을 이어가는 '수원승도', 또는 '만불향도'[2]라고 하는 평신도 집단의 승려들을 징발해 전쟁에 동원하는 '항마군'[3]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많은 승려들이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올 때 적장 살리타이를 전사시킨 김윤후도 승병이다. 이들 승병은 고려 초기 거란족여진족, 이후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활약을 펼쳤고, 그 후에 높아진 위세를 등에 업고 하나의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모한다. 그 외에 각지에 퍼져 있는 '원'[4]의 운영도 보통 승려들이 맡았다. 지방행정망이 발달한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운영하게 되지만.

묘청의 난의 진압에도 승병들이 동원됐는데, 이때 김부식의 휘하에 종군한 승병 관선은 아예 갑옷을 입고 큰 도끼를 들어 선봉으로 나가 십 수명의 적을 쳐죽였고, 관군이 그 기세를 타고 적을 크게 대파하여 3백 여명의 목을 벴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김부식이 승려 상숭에게 도끼를 들고 역습하게 했는데 십 여명을 죽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대한 사찰에서는 소유한 토지와 승병을 늘려가며 재물과 권력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았고,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된 승려들은 무신집권시기 이의방을 암살하기 위해 무려 2천여 명의 승려가 집결해 도성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였을 정도로 커다란 위세를 떨쳤다. 이때 수적 열세로 인해 불리해진 승병들은 이의방이 급히 불러모은 병사들을 상대로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이 대등한 싸움을 벌였고, 이의방의 휘하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끝내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홍화사 등 여러 절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이의방은 이들 승려세력을 없애기 위해 군사들을 동원해 모조리 싹쓸어버렸으며, 결국 승려 세력들이 이의방의 반대파와 결탁해 그를 암살하는 계기가 되었다.[5]

최씨 정권 시기에는 흥왕사를 비롯한 개성 인근 왕실 원찰의 승려들이 집결하여 최충헌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을 근왕세력의 친위 쿠데타로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문벌귀족들과 연결되어 있던 사찰 차원에서 직접 주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 후에 최씨 무신정권은 조계종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며 불교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고려 말기에 이르면 이렇게 재물과 승병을 비롯한 군사력을 갖춘 대사원이 난립하여, 대농장을 경영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 장사를 하고[6] 술을 빚거나 주색을 밝히며[7]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 개국 과정에서 불교를 만악의 근원으로 여기며 철저히 숭유억불 정책을 펴는 계기가 된다.

의외지만 고려 말기에 초기 화약을 다루던 병사들은 승려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화약이 지금처럼 안정된 물건이 아니라 불에 적당히 익으면 터지는 떡화약이라 종교적인 수양 없이는 다루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수양도 수양이지만 위험한데다 값비싸고, 한번 터지면 그걸로 끝인 만큼 반복훈련이 불가능해 매뉴얼로 익혀야 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한자로 된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화약무기를 다룰수 있기도 했다. 당시 화약무기는 지금처럼 화포를 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이너마이트마냥 화약에 불붙여 던지는 형태였기 때문에 화약에 불을 붙이고 적당히 익기를 기다려 던지는 모양새였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건이라 제정신으로는 쓸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2.3. 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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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 정책이 펼쳐진 조선 시대에는 불교가 이전의 시대에 비해 억압받았고 사원의 토지가 몰수당하는 등 이전과 같은 승병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영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임진왜란 당시 휴정대사(서산대사)유정대사(사명당) 같은 수많은 고승들이[8] 승병[9]을 조직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축성에도 종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승병이 지역 방어에 유용했던 점, 남초 직업군이며 인력과 경비를 자체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보부상처럼 유사시 즉시 동원가능한 상비전력으로 활용했다. 왕실에서 승려 중 도총섭을 임명하여 승병을 통제하는 동시에, 남한산성에 7개의 승영 사찰, 북한산성에 11개의 승영 사찰을 지어 승병을 주둔시키고 성을 유지시키는 한 축으로 삼고, 임진왜란 때처럼 축성에 계속 종사시키는 등 꾸준히 국왕 직속의 상비 전력으로 유지하기 시작한다.

승군이 하나의 요역으로 정착되었으나, 각 사찰에서 인원을 징발하는 '의승방번제' 로 유지하기엔 무리가 많아서 승병을 보낼 사찰에서 돈을 받는 '의승방번전'으로 바꾸게 된다. 물론 돈으로 때우기 시작하자 부정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하고, 승병 대장인 팔도도총섭은 막대한 비자금을 축적하기 시작한다.[10] 영조정조가 이를 막기 위해 손을 대보지만, 납부 금액만 약간 줄고 별 다른 성과 없이 계속 같은 모양새로 유지되다가 고종 때 되어서 갑오개혁으로 승병제가 폐지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2.4. 현대 한국

파일:0ㄱ8ㄱ74.png

한국에서 유신 독재정권 시절 사회별로 민방위대가 조직되면서 호국승군단이라는 유사 승병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당시 불교계에서 군대 가지 않고 수도생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11] 청와대에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논의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20세 이상, 70세 이하 승려들은 군대 안 가고 봄 가을 자체적으로 군사 훈련을 하며, 해인사통도사에 모여 사단장이 참관하고 훈련 상태를 체크했다고 한다. 특별한 사유 없이 훈련에 빠지면 승적이 박탈되었다고 하고, 호국승군단의 노래라는 군가도 따로 있었다.# 유신 독재정권 붕괴 후에 점차 사라지고, 승려들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족이나 옛날 애인들이 뻔질나게 면회와서[12] 환속하는 젊은 승려들도 꽤 많고, 어떤 승려는 자신이 승려임을 알리지 않고 티도 내지 않아서 제대할 때까지 부대원들이 몰랐다고 한다. 어떤 젊은 스님의 경우는 승복에 고무신 차림으로 훈련소에 갔더니 장교가 복장이 심히 불량하다며 꼬장을 부리고 연병장 뺑뺑이를 돌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안면 있는 신자를 만나 얼차려를 그만할 수 있었다. 그 신자는 사단장이었다고 하며, 그 스님은 자대 가기 전까지 그 장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나. 실제 입대한 스님과 훈련 받았던 이야기도 있다!# 스님도 군대 가나요...라는 책도 나왔다. 이 책을 쓴 스님은 출가했다가 공군에서 9년을 근무하셨다고 한다. 최근에는 군대까지 갔다 오고 정식 출가하는 스님들이 많아, 스님의 입대는 과거보다 줄어들고 있단다. 그래도 전원 스님이 비구니로만 구성된 종단인 보문종을 제외하고 태고종, 천태종, 화엄종 등 모든 종파의 스님이 병사로 입대시 불교 군종병으로 입대하거나 조계종 소속 스님들은 군종장교로 임관하는 경우가 많다.

군대에서 군종장교로 복무하는 군종 승려가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군은 전원 대한불교조계종 출신 승려만이 가능하고 다른나라 사례로 보면 중국은 전원 전투승 출신 승려들이다.

3. 중국

현대 중국에서는 자격을 취득하고 무술을 연마하는 무술승.무술 시범승들을 전투승이라고 하는데 술과 오신채는 그래도 금지하지만, 율장에 나온대로 삼정육.오정육.구정육에 해당하지 않는 육식은 언제든지 체력 유지를 위해서 가능하다. 이들은 중국 인민해방군군종 승려로 복무하기 위한 지원 자격이 생기는데 그 유명한 숭산 소림사 출신 전투승들 중 일부가 군종 승려 시험[13]에 통과해서 소위로 임관하여 군종 승려로 중국 인민해방군에 복무를 한다.

승병을 영어로 warrior monks라 하는데 이를 검색하면 백이면 칠십은 무술로 유명한 중국의 뤄양 소재 소림사가 나온다. 소림사는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권법 등 무술계에서 무술의 본산으로 취급이 되는데다가, 중국정부의 공인을 받아 소림사 소재 전투승 승려들이 군종 승려 지원 자격이 주어지며, 이 승려들이 명나라 때는 왜구를 상대로 승병을 조직하여 싸웠고, 항일전쟁 시기에는 승려들이 앞다투어 전투승 자격으로 군에 입대해 승려들로만 이루어진 부대인 승중중대[14]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등[15],의 군불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시대에는 만주족 정권에 맞서 반청 운동을 하다가 불타기도 하는 등의 이력을 갖고 있어 승병으로 볼 수도 있긴 하다.

4. 일본

파일:attachment/승병/7.jpg

僧兵을 일본식으로 음독하면 '소헤이'가 된다. 일종의 독립적인 무력 집단이었다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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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태국

태국에서 21세기 들어와 승병이 조직되었다. 사실 태국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 나라는 원래 군대 아니면 승려가 되는 나라이며,[16] 승려가 되었다가 군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인이었다가 승려가 되는 게 어렵지 않다.

또한 군대 추첨에서 합격한 승려는 태국군 군종장교 산하의 불교 군종병으로 바로 보직이 부여되고, 지원 자격이 있는 승려[17]가 현직 태국군 군종승려를 통한 면접과 시험을 통해 군종 승려로 복무하는 것도 가능하다.

승병이 조직된 곳이 바로 말레이시아 국경에 있는 빠타니·얄라·나라티왓 주이다. 이 3개 주는 원래 이슬람이 대다수인 곳인데, 과거 타이가 강제로 합병하며 이슬람 인구와 허구헌날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곳이라서 치안이 좋지못하다. 이때문에 이곳에 거주하는 승려들이 승병으로 조직되면서 M16이나 AK-47 같은 군용 소총으로 무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태국 내에서도 반발이 크다. 왜냐면 이 승병들이 말만 승려이지, 불교도 경호라는 명목으로 군인을 승려로 위장한 것이라는 비난에서부터 불교는 평화의 종교인데 이렇게 무장하여 비무장 무슬림을 정당방어 및 테러 진압이라며 사살하는 일이 벌어지다보니 태국 내 국민들과 승려들도 반발이 크다. 그러나, 이슬람 과격파에게 불자나 승려가 테러당해 죽거나 다치는 일도 있기에 태국군부 측은 반발에 이런 피해를 내세워 반론한다.

6. 미얀마

미얀마에서는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군부가 유혈진압 하면서 사실상 내전상태로 접어들자, 승려들이 무장을 하고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향신문 기사

7. 대중 문화에서의 승병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한 매체들에서 많이 등장하며, 기본적으로 성직자이기 때문에 서양 판타지물에서의 근접 전투원 클레릭, 팔라딘에 해당되며, 근접 전투원보다는 마법사 혹은 힐러 등 보조전력의 성격이 강하다. 한국권은 힐러, 일본권은 소헤이잇코잇키를 모티브로 한 반란군처럼 그려진다.

무협지에서의 구대문파(소림사, 아미파 등)의 무승들 또한 승병이라 할 수 있다.

7.1. 임진록(게임)

조선과 일본 모두 등장하는데, 사용 마법은 약간 다르다. 둘 다 공격력 게이지 = 마력이라 적을 너무 공격하다 보면 마력이 부족해 공격도 마법도 불가능해진다.

임진록2/조선의 반격에서는 조선군의 힐러로 등장. 초기에는 세 국가의 힐러 중 제일 마력이 적고 치료 마법밖에 없는 전형적인 힐러였으나, 후에 패치로 인해 2번째로 마력이 많은 힐러가 되어 조선 영웅들의 무한 마법 난타가 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용 마법은 치료 마법 뿐이다.

7.2. 천년의 신화

천년의 신화에서 신라의 힐러로 등장. 고구려백제는 각각 도인과 박사가 대체한다. 여기서는 삼국의 힐러 중 제일 좋다.

7.3. 라크무

트리거소프트에서 만들다 만 RTS게임 라크무의 종족 중 동양계인 위국군의 힐러로 등장. 여기서의 승병은 발해의 호국불교 사상에 기초하여 무술과 술법을 겸비한 배틀메이지라는 설정. 때문에 의외로 강한 체력에 근접전을 하며, 치료 마법과 디버프 해제 마법, 근처의 적에게 유도 화염 부적을 날리는 기술을 쓴다.

7.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탐험가로 수도승이 등장하며,[18] 중국와 일본 지형에서 교역소를 지어 동맹이 가능한 중립 종교 단체 중 소림사와 선불교 사원에서 각각 소림사 등패수 과 소헤이를 생산 가능하다. 성능은 둘 다 괜찮은 편. 이외에 고용 가능한 왜구 중에 장님 승병 궁사가 있다. 컨셉에 따르면 두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도력으로 물체를 맞춘다고 하는데, 사정 거리가 무려 18이나 된다.

7.4.1. 장님 수도승

파일:attachment/승병/장님.jpg
체력: 120
근접 공격력: 6(2.5x주민, 2x중보병, 0.75x기병 및 코요테 기동전사, 1.5초)
원거리 공격력: 13(2.5x주민, 2x중보병, 0.75x기병 및 코요테 기동전사, 사거리 18, 3초)
공성 공격력: 13(사거리 6, 3초)
속도: 4
방어력: 원거리 30%

인구수: 3
고용 비용: 금 120
생산 / 제거 경험치: 24
생산 시간: 33초

보물 감시자이자 수도원에서 고용 가능한 용병.

장님이라면서 사거리가 18이나 되는 을 쏘는 비범함을 보인다.

7.4.2. 소림사 등패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원주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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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장길산

7.6. 육룡이 나르샤

딱히 승병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비국사가 고려시대 승병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보상인으로 활동하며 돈을 밝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일종의 무력집단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7.7. 명량

혜희, 옥형을 비롯하여 승병들이 전투에 참전하는 모습이 나온다. 격군을 도와서 직접 노를 젓거나 백병전 때 전투원으로 참여한다. 격군들이 노를 저을 때 옆에서 염불을 읊어주다가 교대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8. 기타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warrior monks 이다. 소헤이 문서에 있는 사진에서는 Fighting Monk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다.

서양에서 비슷한 개념을 찾자면, 기사수도회[19]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승려는 그리스도교수도자에 대응되고, 이 수도자들이 전문적인 기사를 겸한 것이 기사수도회이기 때문이다.


[1] 이러한 호국 불교라는 이름의 불교와 정치의 결탁을 사상으로 뒷받침한 것이 흔히 호국삼부경이라고 불리는 금광명경, 인왕경 그리고 법화경이었다.[2] 이러한 조직에 편성된 평신도를 '재가화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재가화상은 불교 승려가 아니라 고려 영토 내에 사는 여진족 부족집단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여진족의 풍습인 머리를 거의 깎고 뒷머리 일부만 남겨 변발을 하는 것과 긴 염주를 목에 거는 풍습 탓에 이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일반 고려인들이 불교 승려와 혼동해서 인식했다는 것. 재가승 문서로.[3] 도를 얻는 데 해가 되는 마귀들을 굴복시키는 군대라는 뜻.[4] 현재 '조치원' 등 지명으로 남아있다.[5] 정균과 함께 이의방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승려 종참이라는 인물이다. 이 자는 후에 정균과 그의 아버지인 정중부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한 뒤, 권세를 탐했다는 죄목으로 외딴 섬으로의 유배형에 처해졌다.[6] 박종관의 역사 학습만화인 <태조 왕건과 고려왕조 1,000년>을 보면 고려 말 불교의 부패와 타락을 코믹하게 그린 장면이 있다. 한 돌팔이 땡중이 어느 집을 찾아가서 "시주 많이 안 하면 너희 집 3대 독자는 금방 죽어!"라고 구라를 치자 집 주인이 "우리 집엔 3대 독자가 없는데요(...)"라고 하는 장면과 바로 다음 컷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깡패 땡중이 무슨 사채업자마냥 백성의 멱살을 잡고 "야, 이 자식아! 너 돈 빌려가고 왜 빨랑 안 갚아!"하고 두들겨 패는 장면이 나온다.[7] 이와 관련하여 어느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한 승려가 사대부의 아내와 간통을 하다 들켜서 관아로 끌려왔는데, 겁을 먹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간통을 했다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나라 안의 모든 승려들을 간통죄로 처벌하라! 어느 승려가 나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겠는가?"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8] 이들은 문정왕후의 호불 활동으로 승과가 아주 잠깐 부활한 사이에 합격한 이들로, 이 때문에 조선 왕실과 작지만 기적적으로 연결점이 존재했다. 덕분에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엮일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작은 연결 고리를 기반으로 선조는 이들에게 조선 승병 통수권을 부여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괜히 조선 왕실에서 승려인 휴정이나 유정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아니다.[9] 이전 시대처럼 승려만으로 구성된 군대라기보다는 승려들이 주축이 된 의병에 가깝다.[10] 이 비자금이 숙종 때부터 왕실로 흘러들어 갔다는 추정도 있다. 팔도도총섭 임명도 왕실이 하고 승병이 국왕 직속인 점을 생각해보자.[11] 군대 가서 환속하거나 나쁜 행실배워 오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시절에 군대에 간 스님들은 대개 행정병이 되었는데, 글씨를 남들보다 참하게 잘 썼기 때문이란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한자와 한글을 동시에 쓰던 시절인지라 한자를 잘 아는 스님들이 행정에 있어서도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2] 특히 스님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하안거나 동안거 시즌에 공세를 펼친다.[13] 중국의 승군시험은 설법 등의 이론과 무술 등의 실기시험 모두 통과해야 한다.[14] 승중중대는 승려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승려가 아니면 승중중대에 소속이 될 수 없었다.[15] 실제로 이 사례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법당 법회의 군종 승려 설법에서도 자주 등장한다.[16] 물론 태국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불교가 실질적인 국교 역할을 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적용하고 있다[17] 태국에서 군종 승려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보면 승려대학인 마하출라롱콘대학이나 마하마존대학을 졸업한 승려가 승군시험에 응시하거나 승려 계급 6급을 가졌던 승려가 퇴속하여 승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야 한다.[18] 인도는 힌두교의 브라만이라 논외.[19] 튜튼 기사단,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등등 흔히 생각하는 '중세 기사단'은 모두 기사수도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