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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수근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OB/두산 베어스 시절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9) |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01) |
OB 베어스 시절(1995년)[1] |
본인의 최전성기 시절인 두산 베어스 시절 환호하는 모습. |
당시 두산 베어스의 두 오버맨 홍성흔과 정수근[2][3] |
아직까지도 베어스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로 "이종욱"과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선수이다. 리그 최고급의 중견수비, 주루센스를 지녔으며 타격도 2할8푼은 쉽게 칠 수 있는 베어스 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중견수 이다.
베어스 시절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의 엄청난 야구센스와 얼빠를 부르는 얼굴[4]을 가졌으며 파워를 제외한 공격, 수비, 주루, 삼박자를 두루 갖춘 호타준족[5]이였다. 특히 4년 연속(1998년~2001년) 도루왕을 할 만큼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분위기 메이커로 방송국에서도 탐낼 만한 쇼맨쉽을 갖추고 있는[6], 그야말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도루왕 제조기 김평호[7]가 주루코치로 바로 부임하면서부터 입단 2년차부터 주전 중견수로 자리잡기 시작, 도루 2위를 2번 기록하면서[8] 차세대 대도로 주목받았고, 이종범이 일본으로 이적한 98년부터 도루왕 4연패[9]를 하면서 일약 스타로 등극. 이병규, 박재홍[10], 제이 데이비스등과 함께 리그의 대표적인 중견수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동메달의 주역[11]이 되었다. 허나 2002시즌을 정점으로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타력이 떨어지는 등 불안요소도 안고 있었다. 다만, 타격이 들쑥날쑥한건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최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8~2001년에 최소 0.280 이상의 타율은 찍어 주었다.
그리고 베어스 시절 팀에서 도루하는 선수라고 하면 정수근이 거의 모든 지분을 먹고 있었다. 그나마 김상호는 주루가 좋았지만 정수근이 데뷔할 즈음엔 클린업 타선으로 가면서 주루 능력이 감퇴했고, 1995년 당시 1번 타자였던 김민호는 타격이 좋지 않았던 데다 9번 타순으로 이동하면서 도루에서 돋보이는 성적을 보이자 못했다. 1999년에 한화에서 건너 온 전상렬은 백업이었기 때문에 주루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하지만 워낙 개구쟁이였던 성격탓에 2003년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는 팀 동료 한태균과 같이 폭력 사고에 휘말리기도 했고[12] 그리고 시즌 중엔 경기 중 멋대로 짬뽕 시켜먹다가 이를 아니꼽게 본 심재학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루머도 있었는데 정수근이 직접 부인했다. 시합 전에 짜장면이나 짬뽕을
이후 두산의 중견수 자리는 KIA 타이거즈에서 트레이드 해 온 김창희-이종욱[15]-민병헌-정수빈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3. 롯데 자이언츠 시절
이상목(11번)과 함께 롯데 입단 기자회견에서.
2003년 시즌 종료 후 FA 시장에서 해외 진출을 선언한 이승엽을 제외하면 진필중[16], 마해영 등과 함께 자연스레 그해 FA 시장의 최대어로 떠오르면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았다.
원 소속팀과 우선 협상 기간이 지난 후 정수근은 "구도" 부산의 야구 열기에 끌려[17]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를 희망했으나 먼저 삼성 라이온즈에게 옵션 포함 최대 60억의 오퍼[18]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롯데 측에서 전화가 왔으나 대뜸 "우리 구단이랑 계약하실 마음 없으시죠?"라는 말을 해서 정수근은 황당해 했으나 그래도 롯데 이적을 희망했던지라 협상 테이블에 앉았는데, 삼성에 비해 적은 40억을 제시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수근은 당시 삼성 감독인 코끼리 김응용 감독을 워낙에 무서워[19]했던 것도 있어[20], 롯데 쪽과 계속 협상을 진행했고, 정수근은 롯데 측에 FA 계약을 하면 좋은 곳에 기부를 하고 싶다며 6천만 원만 더 얹어주면 롯데로 가겠다고 제안, 결국 롯데와 6년 40억 6천만 원에 계약하며 FA 대박을 터뜨렸다.[21][22] 보상선수로는 투수 문동환이 지명되었다.[23] 정수근 본인은 롯데와 계약하며 "한국 최고의 야구 열기를 지니고 있는 구도 부산에서 한국 야구의 부흥을 이끌고 싶다"면서 부산 야구팬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과 함께 롯데에 입단하게 되지만 이때부터 그는 날개 없는 추락을 겪게 된다.
대도 전준호를 연봉과 문동환 위약금 문제로[24][25] 뻥 차버린 다음에 어정쩡했던 1번 타자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26] 데리고 왔지만, 롯데 시절 커리어를 보면 비율 스탯은 두산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평균 40개 이상 하던 도루는 겨우 20개 남짓으로 줄었으며, 수비 범위마저 급격히 좁아지며 포지션을 좌익수로 변경해야만 했다. 급기야 이적 첫 해에 음주운전 및 폭행사고까지 저질러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중징계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게 방황하다 한창 유행하던 바다이야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07년도엔 이혼까지 당하며 온갖 고난과 악재를 다 당하게 된다.
전술했듯이 이적 첫해인 양상문 감독이 부임하면서 2004년 시즌 초반에는 붙박이 1번타자 중견수로 3할 이상의 타율[30]과 안정된 수비로 팀의 활력소가 되었고 그 시즌 올스타전 MVP에 뽑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6월 말 경부터 갑작스런 잔부상이 다시 도지면서 타격감이 확 떨어지더니 7월에도 도통 타격감을 못 끌어올리면서 시즌이 갈수록 타율이 점점 하락하는 등[31] 성적도 좋지 않은 와중, 7월 24일 새벽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음주 폭행 사건에 휘말려 입건되었다. 결국 무기한 실격 처분을 받았다가 한 달 후에 실격 처분이 해제되어 9월 8일 전격 1군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 사건은 롯데 정수근의 잔혹사를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2005년에는 조용하게 야구한 것을 보니 별다른 기사가 없었다. 다만, 팀이 여름 중반부터 쳐지는 바람에 포스트시즌 진출은 실패했다. 2006~2007년까지는 정수근이 다시 방황하는데 이건 2년간 다시 롯데 감독을 맡았던 강병철 감독과의 심각한 불화도 한 몫 했다. 강병철 감독은 당시 상대 선발이 좌완이면 좌타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9번에 박아넣는 등[32] 이렇듯 강 감독은 정수근의 자존심을 긁어놨고, 정수근의 평소 행색에 대해서도 자주 지적을 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헤어스타일이나 귀걸이 등을 지적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귀걸이 등을 하고 다니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아프리카 방송에서 증언했다. 귀걸이 지적을 시작으로 한번은 정수근이 강병철 감독의 혹독한 훈련에 학을 떼서 꾀병을 부렸는데 피칭머신에 공을 넣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정수근이 밝힌 일화중 하나가 전지훈련지에서 어느날 미팅 전 노장진이 갑자기 사라진 일이 있었는데 강병철 감독이 정수근에게 '너는 오늘 훈련하지 말고 노장진 선수를 찾아와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린 게 밝혀졌다.[33]
또한 시즌 중 이동을 할때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쉬어가는데 강병철 감독은 정수근이 버스에 탑승을 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출발을 해버린 사실 또한 밝혀져 정수근이 심적으로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당시 버스에 있었던 이인구에 따르면 누군가가 정수근이 안 탔다고 말을 하는데도 그냥 가버렸다고 하니 앙심이 있었던 듯하다. 결국 정수근은 휴게소 차량 중 방향이 같은 사람에게 부탁해서 버스를 쫓아갔다고.
거기에 정수근은 1번 타자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던 선수라서 9번 타자 타순을 매우 싫어했으며 실제로 성적도 1번타자일 때 월등히 좋았다. 거기다 강병철 감독이 정수근에게 별로 "도루"를 시킬 의사가 없는 터라[34] 인터뷰 중 수차례 강병철 감독을 직접적으로 까기도 했다. 정수근은 2007년 말 강병철 감독이 물러나고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언플을 하며 강병철 감독을 깠다. 그 백미는 "삐꾸 발언".[35] 결국 강병철 감독과 친구였던 한화 김인식 감독에게 자중하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롯데 정수근이 10일 옛 은사인 한화 김인식 감독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고 언급. 최근 소속팀의 로이스터 감독을 예찬하는 과정에서 몇몇 표현들이 김인식 감독에게 롯데의 전임 강병철 감독을 깎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 것과 관련해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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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김인식은 두산 감독 재임 시절 내내 정수근과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실제로도 지금도 꽤나 가까운 사이다. 정수근도 수차례 인터뷰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김인식 감독을 가장 존경한다고[36]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일찍이 김성근 감독을 포함해서 많은 야구계 선배들이 지적했듯이 자신의 나태와 게으름이었다. 그리고 양상문 때부터 풀어지기 시작한[37] 롯데의 팀 분위기를 완전히 술먹고 놀자판으로 만든 일등공신. 본인은 야구를 하는 내내 김성근 감독을 만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고 했을 정도.
처음에 올 때는 롯데의 부활을 이끌 선봉장으로 믿어 의심치 않던 팬들도 계속 추락하는 그를 보면서 먹튀, 또는 40억짜리 마스코트라고 욕하기 시작, 정수근은 야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창 전성기를 달렸어야 할 시기에 잘못된 지도자와 자신의 나태한 멘탈로 인해 기록에서 손해를 본 건 덤.
사실 롯데에서 두산에 비해서 부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두산에서 평균적으로 타율 0.280 출루율 0.356 장타율 0.355 OPS 0.711 wRC+ 96.7 을 기록했는데 롯데에서 평균적으로 타율 0.282 출루율 0.364 장타율 0.358 OPS 0.722 wRC+ 100.8 을 기록해서 타격 스탯만 보면 성적은 오히려 더 올랐다. 클래식 스탯이야 사직이 잠실보다 상대적으로 타고 구장이기에 올랐을 수 있지만 파크팩터를 감안한 세이버매트릭스 자체가 더 올랐다. 더군다나 두산시절은 상대적으로 타고 시즌이 많았고 롯데에선 투고 시즌이었으며 정수근 처럼 장타툴이 없고 주루툴만 높은 타입은 잠실처럼 넓은 구장에서 타격 성적도 더 높게 나올 수 있다. 어차피 홈런은 못치니까...
다만 이건 비율스탯이 그렇다는 말이고 누적에서는 분명 줄어든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정수근이 감독과의 불화, 각종 사건 사고나 부상 등으로 출장 자체가 줄어든 탓이 컸다. 두산에서 연평균 467타석 그것도 고졸 1년차때 대수비 대주자로 뛴걸 포함해서 467타석을 소화했는데 롯데에서는 연평균 322타석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안타나 도루 갯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것. 단 도루의 경우 롯데에서는 두산처럼 도루를 많이 지시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 그리고 애초에 기량 자체도 타격 성적에서만, 그 마저도 극히 미미한 수준의 상승만을 겪었던 반면에 수비력과 스피드 부분에서는 두산 시절에 비해 확실하게 퇴보[38][39]한 모습을 보였다.
2007년에 들어 그는 데뷔 1년차 이후 사상 최악의 모습[40]을 보이며 이대로 다시 올라가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극성스런 롯데팬들에 의해 그는 KBO 올스타전에 뽑히게 되었고, 그 경기에서 역전 홈런을 뽑아내며 미스터 올스타에 뽑히게[41] 된다. 그 때 인터뷰에서 정수근은 "힘든 일로 인해 야구가 싫어지게 되었지만 오늘 다시 야구가 좋아지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멘트를 날렸고 그 이후로 그는 기적같이 부활[42]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게 된다. 전성기 때보다 발도 느려졌고 수비력도 떨어졌으나 전반기까지 시즌 타율 0.253에 불과하던 것을 시즌 최종 0.293까지 끌어올렸으며[43] 시즌, 느려진 발을 대신해 어퍼스윙으로 장타율을 올리는 등[44] 정말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여담으로 2007년 시즌 중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될 뻔했다고 한다. 이영우+안영명과 정수근의 2:1 트레이드에 대해 당시 한화 감독이었던 김인식과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사이에서 얘기가 나왔고,[45]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한화와의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치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자 롯데 구단 측에서 트레이드를 파토내는 바람에 결국 트레이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6] 실제로도 정수근이 훗날 김인식 감독에게 이때의 이야기를 하자 김인식 감독이 왜 그때 갑자기 잘쳐가지고... 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참조
3.1. 술로 끝난 선수생활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롯데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전년도인 2007년 후반기의 좋았던 폼과 더불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제리 로이스터와도 좋은 캐미를 보이며 팀 상승세의 한 축을 담당했다. 심지어 도루 실패를 하고 덕아웃으로 뛰어 돌아오는데 로이스터 감독이 먼저 하이파이브를 권하며 손을 내밀었을 정도. 방망이에서도 오랜만에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고 주력 역시 전반기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무려 24도루를 기록하며 전성기 못지 않은 부활을 알리는 줄 알았는데...사직에서 4연패한 2008년 7월 16일, 만취 후 새벽 3시 경에 건물관리원과 경찰관을 폭행하여 유치장[47]에 입감되었다. 거기에 당일에 술자리에 늦게 나타난 후배 투수 송승준을 두들겨 팼다는 소리도 나왔다. 송승준은 오해라고 했지만, 망신스러운 얘기다 보니 본인의 부정에도 팬들은 믿지 않는다.
덕분에 연패 중에 역시 술 먹었던 강민호는 묻혔다. 박명환TV에서 이 일화를 박명환이 물었지만, 다른건 몰라도 이건 정말 헛소문이라고 억울해 했다. 술로 인한 음주운전이나, 클럽에서 여자 꼬시는 썰, 강병철 감독 차 부순 썰 등은 이야기 해도 송승준 머리를 소주병으로 때렸다는 것과, 강원랜드에서 시계 담보로 잡고 도박했다는 두 소문만은 정말 아니라고...[48]
하여간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롯데에 있어서 사실상 최악의 악재. 심지어 정수근은 이 당시 팀의 주장이었다. 주장이 연패중에 대놓고 술 마신것도 모자라 사고까지 쳤으니 당연히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은 물론이고 결국 08년 KBO 올스타전 선발에서 탈락하였다.[49] 이후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되었지만, KBO에서는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정수근의 공백으로 인해 비게 된 주장 자리는 조성환이 맡게 된다.
이 기간동안 KBS에서 찍은 올림픽 응원 광고에 출연하여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명대사는 "대호랑 민한이형… 나가?" 하지만 최종 엔트리에선 송승준이 뽑혔다.
2009년 스토브리그 즈음 해서 그라운드로 복귀하고 싶다는 떡밥을 던지는 언론플레이도 해봤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정수근의 징계가 장기화되자 KBO 내에서도 멀쩡한 선수를 죽여선 안된다는 의견이 우세해 복귀를 허락했고,[50][51] 롯데 측도 조성환의 부상과 팀의 부진으로 복귀를 타진하여 2009년 8월 12일부로 KIA전 원정경기 선발투수 윤석민이 등판하는 날 1군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복귀일 당일에 바로 2번 타자로 출장해 첫타석에서 안타와 도루를 성공시키며 기대감을 높이더니, 8월 13일 역시 선발 2번타자로 출장, 5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 및 7회말 기아 공격시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이종범의 안타성 타구를 점프하여 잡아내는 등, 대활약을 펼쳐 기아의 12연승 도전을 중요 기점에서 차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삼성의 패배와 함께 하루만에 4데로 복귀, 정수근 본인은 복귀 2경기만에 히어로 인터뷰를 하였다. 이에 롯갤러들은 "클래스는 영원하다"며 기쁨의 꼴레발을 떨었다. 하지만 복귀 효과는 반짝이었고, 한 달도 되지 않은 2009년 8월 31일 밤, 또 술 난동 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신고자는 정수근이 술을 마시고 있던 해운대구 재송동의 한 호프집 종업원이었는데, 정수근이 난동 피운 적은 없고, 팀이 포스트시즌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에 한가로이 술 먹고 있는 정수근을 보고 순간 화가 나 허위 신고를 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이상한 점이 무척 많다는 등 의심을 표하는 여론도 있었으나, 은퇴 후 정수근 본인이 개인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 고소를 하려고 신고자의 신원을 확보하여 만났으나 신고자의 개인적인 사정이 좋지 않았고, 신고자가 자신을 만난 후 진심어린 사과를 하였고[52] 당시 힘들게 복귀를 했으나 이런식으로 다시 꼬여버려서 야구에 대해 흥미를 아예 잃어버린 탓에[53] 법적절차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어쨋든 이 당시 롯데는 이미 정수근에게 연봉 1억을 지급한 상태...
어찌어찌 욕 먹어가며 정수근을 복귀시켰던 롯데 구단은 정수근이 마음만 먹으면 다른 팀에서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해버렸다. KBO는 당초 정수근을 영구제명할 분위기였으나 정수근은 얼마 뒤인 2009년 9월 15일부로 선수협을 통해 은퇴를 선언한다. 본인 이야기로는 '다른데서 하려면 롯데에서 풀어 줄 수도 있었지만 더러워서 안한다' 였다고.
결국 롯데에 남긴 유일한 긍정적인 요인은 사직야구장의 인조잔디를 천연잔디로 바꿔달라고 탄원한 것밖에 거의 없다는게 대다수 롯데팬들의 의견이다.[55]
그리고 10년 뒤 고교와 팀 직속 후배가 롯데로 오게 된다.
은퇴 이후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으로 폭음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남들이 자신을 볼때 취한 모습을 볼때 굉장히 꼴불견이라는 것을 깨닫고 점점 줄여나갔다고 하나 아직도 소주 두병은 마신다고.[57]
[1] 선수 본인은 이 사진이 당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연습경기에서 맹타를 휘둘러서 찍혔던 사진으로 기억난다고 했으나, 해당 사진 뒤의 덕아웃에 나오는 선수들의 유니폼 배색(빨간색+파란색)으로 보아 다이에가 아닌 데뷔 시즌 당시 태평양 돌핀스와의 경기에서 찍힌 사진으로 보인다.[2] 이 사진을 본 정수근은 홍성흔을 보더니 일본의 포수 조지마 겐지를 닮았다고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3] 뒤에 유니폼을 입은 선수는 롯데 자이언츠의 96년도~2002년의 유니폼인데 누군지 알 수 없다. 사진속의 구장은 1999년 올스타전이 열린 수원 야구장이다.[4] 여담으로 이 항목을 읽던 최광원 캐스터가 얼굴, 파워를 제외한을 얼굴과 파워를 제외한으로 읽어서 정수근이 나름 그때 시절은 얼굴이 잘생긴 편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5] 게다가 베어스 자체가 거포와 교타자는 많은 반면에 호타준족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어스 내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이기도 했다. 이 호타준족 계보의 뒤를 이은 게 베어스 최초로 20-20 클럽에 들어간 박건우.[6] 역시 분위기 메이커로 유명한 강병규, 홍성흔 등과 함께 출발 드림팀에도 출연했었다. 해당 방영분. 앞부분만 올라와 있다. 당시 같은 팀 소속이었던 심정수와 진필중도 보인다. 강병규는 이 일을 계기로 은퇴한 후 아예 연예계로 진출했다. 이후의 행적은 강병규 항목 참조.[7] 2022년 롯데 자이언츠 주루코치[8] 1996년과 1997년의 도루 1위는 이종범이었다.[9] 이후 2007~2010시즌의 이대형과 2015~2018시즌의 박해민이 타이기록을 세웠다.[10] 박재홍 만큼은 애매한게 주 포지션이 중견수 였다가 우익수 였다가 바뀌기도 한다.[11] 이병규랑 함께 발야구가 뭔지 알려준 대회였다. 포지션은 좌익수 이병규, 중견수 정수근, 우익수 박재홍으로 대회를 시작했는데, 예선 일본전에서 박재홍이 부상으로 대회 아웃된 이후에도 정수근 본인은 계속 중견수 자리를 지켰다. 대신 좌익수 자리에는 벤치멤버였던 장성호가 투입, 기존 좌익수였던 이병규는 우익수로 이동하였다. 동메달결정전 일본전에서도 좌익수 장성호, 중견수 정수근, 우익수 이병규 조합을 확인할 수 있다.[12] 물론 이 사건은 한태균측이 먼저 폭행을 당해 정수근이 지켜주려다가 같이 휘말린 케이스로 이 항목을 읽던 정수근도 이에 대해 무단 이탈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했다.그리고 그자리에 있었다가 먼저 도망간 선배들을 디스했다.[13]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의 두산 베어스는 김동주 정도를 제외하면 내부 FA도 잘 잡지 않는 편이었다. 동시대 뛰었던 박명환에 따르면 주류 사업 등이 메인이었던 당시 모기업 특성상 요즘 같은 FA 대박은커녕 연봉 인상 협상조차 매우 지지부진했고 본인이 14승(다승 5위, 탈삼진 2위, 이닝 2위)을 하고 정수근이 2할 8푼 8리를 치고 도루왕먹은 해에 박명환은 1600만원 인상, 정수근은 2000만원 인상 협상안이 나와 서운했을 정도로[58] 야구단에 많은 금액을 투자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 잠실을 쓰는 라이벌 구단 LG 선수들은 성적이 비슷하면 연봉이 확확 뛰는데다가 FA 영입에 많은 돈을 쓰는 등 한번에 봐도 비교될 정도였다고 한다. 응? 이거 어디서 많이 본거 같은데...[14] 현대 역시 정수성의 실력을 보고 하위 픽으로 했다. 이정도면 정수성은 운이 그나마 따른 것도 다행이다.[15] 현대 유니콘스에서 99년도 이택근과 함께지명 된 선수 였으나 신인 첫해는 2군에서 경력을 쌓고 군 복무 이후 팀으로 돌아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수근의 동생 정수성의 전년도 활약으로 마침 돈 없던 구단에게 방출을 당했다. 그렇게 친구에게 바로 연락하여 두산으로 신고선수 계약을 맺고 정식 선수로 입단했다.[16] 위에 언급 된 김창희의 트레이드로 KIA에 넘어갔었다.[17] 정수근이 맹활약 하던 99년~2001년 사이 까지는 사직야구장이나 마산구장에 롯데 관중들이 많이 왔다. 문제는 그 뒤 2년간(2002~03) 암흑기가 발동 된 최하위를 하면서 그야말로 관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현대 유니콘스는 임시 연고지 라서 롯데 보다는 뒤에서 1등 또는 2등이였다. 대등한 상대는 당시 야알못 구단 이라 불리던 한화랑 쌍방울을 대신하여 들어온 신생팀인 SK 밖에 없었다.[18] 만약 삼성에 먼저 60억 계약을 먼저했다면 2000년대 당시 최고가 FA 계약은 당연히 정수근이 차지 할뻔 했다는거. 하지만 본인의 판단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본인보다 한 살 연상이자 베어스에 몸담던 선배 심정수가 그 기록을 세운다.[19] 2004년 결국 우려했던 것이 정수근 말대로 왔다. 하나는 덕아웃에서 포수 였던 신예 현재윤에게 원산폭격을 시킨것과 SK와 벤치 클리어링때 호세 카브레라를 헤드락으로 철저하게 봉쇄한 것이 포인트. 정수근은 2000년 올림픽 대표팀에서 김응용 감독을 겪어본 적도 있었다.[20] 그도 그럴 게 김응용 감독은 당시 기준으로 정수근이 선수생활 내내 함께했던 김인식 감독과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훈련은 자유롭게 했지만, 선수들과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던 스타일은 아니었다. 또한 실수하면 질책하거나 화풀이(쓰레기통을 걷어차거나 혼자 뭔가 집어던지는 등)를 했으니 올림픽 대표팀 시절 잠깐 함께했던 정수근의 입장에선 결코 김응용 감독과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였을 것이었다.[21] 6천만원은 실제 야구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였다. 6천만 원과 별개로 1천만 원을 4년간 의식없이 누워있던 임수혁 선수 치료비로 지급하였다.[22] 다만 성적 부진에 따른 마이너스 옵션 발동, 그리고 2군에 내려가거나 출장정지 징계를 받아 연봉이 추가로 삭감되는 바람에 실수령액은 22억 8000만 원. 여기서 세금까지 제하면 최종 실수령액은 20억대 아래로 떨어진다.[23] 두산은 이 당시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문동환을 지명한 뒤 곧바로 한화 포수 채상병과 맞트레이드했다. 두산 입장에서는 홍성흔의 백업으로 쓰기 위해 장기적으로 키울 포수 유망주가 필요했기 때문.[24]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 문동환을 데려오기 위해서 현금과 전준호를 반대 급부로 내놓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25] 아이러니하게도 롯데는 톱타자를 버려가면서까지 투수를 데려왔지만, 다시 또 다른 톱타자를 영입하겠다고 그 투수를 내줬다. 결국 문동환이 한화에서 재기에 성공하고 정수근이 FA 계약 이후 기대와 다르게 부진한데다 사고까지 쳤으니 롯데 입장에서는 상당히 뼈아픈 상황이었다.[26] 그나마 김대익이나 김응국이 1번타자로 있었지만 주루능력은 1번타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27] 실제로 그 시절 삼성은 메리트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신인급 선수들이 1군에서 뛰다보면 본봉보다 보너스가 더 많은 지경이었다.[28] 본인에 말에 따르면 경성대 야구장에서 자주 개인연습을 했으며, 수영 롯데캐슬에 거주했다고 한다.[29] 사건 사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롯데 이적 초기에 부산지방법원 근처에 거주했었다고 밝혔다. 법조단지가 있는 거제동이 사직 야구장이 있는 사직동과 바로 붙어 있기 때문에, 야구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는 뜻.[30] 4~5월 월간 타율이 각각 0.333, 0.344였다. 6월 들어 다소 타격에서 부침이 있긴 했어도 시즌 타율은 3할 언저리에 눈야구가 발동 되면서 6월 월간 사사구가 12개로 좋은 선구안을 과시하기도 했다.[31] 3할 이상 기록하던 시즌 타율이 전반기 막판에는 0.274까지 떨어져 있었다.[32] 사실 야구 내적으로 봤을 때 위의 바다이야기보다 강병철 감독과의 이런 불협화음이 정수근을 더 엇나가게 만들었다. 강 감독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이 기계적인 좌우놀이 탓에 정수근은 다음 날 매치업에 좌투수가 나올 것 같으면 아예 대놓고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33] 더군다나 그 자리에 코칭 스탭, 구단 직원들도 있었으나 그런 말도 안되는 지시를 듣고도 만류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34] 롯데로 이적했는데 30도루는 고사하고 20도루 남짓한게 끝이다. 최종적으로는 롯데 재적중 한시즌 최다 도루는 24개인 2004년과 시즌 도중 사고쳐서 선수자격 정지를 먹은 2008년이다. 만약이라면 모를까 2008년 어떠한 사고없이 야구만 잘했다면 30도루 이상은 물론이요 롯데가 3위 보다는 2위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수긍한다.[35] 2008년 4월 8일, 삼성 라이온즈 원정 경기 직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감독님(제리 로이스터)은 선수들을 삐꾸로 만들지 않는 분이다. 선수들이 신나니까 좋은 성적이 나온다."라는 발언을 했다.[36] 아버지 같은 분 이라고도 언급했었다.[37] 양상문 감독 시절 2004년까지 롯데는 답이 없었지만, 이후 이대호의 각성 및 선수들의 동기부여가 확실한 가운데 가을야구 까지 노려봤으나 김재박 감독의 저주로 그만 아쉽게 5위로 마감하였다.[38] 수비 범위가 줄어서 그놈의 술 땜에 주제도 못하고 좌익수로 가기도 했다. 알다시피 두산 시절에 그는 붙박이 중견수로서 넓은 잠실의 외야를 전부 커버하고도 남는 대단한 수비력을 선보였다.[39] 추가로 다이빙캐치의 성공율 자체가 두산 베어스에서의 뛰던 전성기보다 저하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외야는 내야랑 달리 다이빙캐치가 실패하면 공이 빠져서 모든 주자들이 1루 이상을 더 추가로 진루하는 대형참사가 일어난다.[40] 4월에는 월간 타율 0.290에 타석 및 안타 수 대비 클러치 능력을 갑자기 보이며 단 8경기 만에 7타점을 뽑기도 했었으나, 5월 들어 선구안도 무너지고 컨택트도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모이며 시즌 타율이 한 때 0.208까지 떨어진 적도 있었다.[41] 다만 부상으로 받은 물품은 동생에게 전부 줬다고 유튜브에서 언급했다. 이 형 정말로 야구만 잘하면 됐는데....[42] 올스타전 직후 7월 말 8경기 동안 28타수 12안타 타율 0.429에 4경기 연속 도루와 26일 기아전에서는 한 경기 2홈런을 쳐내는 등 그야말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다.[43] 심지어 8월에는 타격감이 제대로 불붙으면서 시즌 타율이 한 때 3할도 찍었었다. 그 이후에도 꾸준하게 활약하며 2할 9푼대를 유지했고 최종 0.293으로 마무리.[44] 특히 8월 한달간 81타수 26안타를 때리면서 2루타가 무려 13개라는 믿기 힘든 장타 본능을 보여주었다. 8월 월간 타율도 0.321로 준수했으나 장타율이 무려 0.506으로 올드 야구팬들이 보면 이게 정수근의 장타율이 맞냐고 했을 정도로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45] 참고로 정수근은 신인 시절 당시 OB 감독이던 김인식에 의해, 반대로 이영우는 신인 시절 당시 한화 감독 강병철에 의해 데뷔 첫 해부터 주전으로 기용되었던 인연이 있다.[46] 이에 대해 정수근 본인은 이 사실을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심정으로 배트를 휘둘렀는데 엄청나게 잘맞았다고 은퇴 후에 밝혔다.[47] 훗날 본인이 밝히기로는 뽕쟁이들과 같은 방에 입감되어 30분 동안 대가리 박고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48] 당시 정수근이 유튜브 방송을 하며, 나무위키에서 자신의 문서를 읽을때, 이걸 언급하며 그때는 얼굴이 명함이던 시절이라, 내 얼굴 보고 그냥 돈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돈이 없었던 시절도 아니고...라면서 저 두 루머에 대해서는 격하게 부정한다.[49] 덕분에(?) 이종욱이 대신 선발되어 롯데 VS 서군의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2012년에 기어이 꼴스타전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LG도 롯데따라 2013년에 기어이 쥐스타전이 열린건 안비밀[50] 사실 롯데팬들 중에도 정수근 야구인생이 그렇게 끝날 거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수근의 모교인 덕수고는 한국야구계에 상당히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다...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사실 덕수고 야구부는 1980년에 창단한, 서울에 있는 고교 팀 중 가장 역사가 짧은 팀이었다.(원래 덕수고의 뒤에 1987년 창단한 한서고가 있었으나 2005년을 끝으로 해체. 2014년에 서울디자인고가 새로 창단했다.) 주말리그 시행 전 전국대회에서 덕수고가 유난히 저녁 시간대의 경기에 많이 배정되는 바람에 여러 말이 오갔지만 이걸 갖고 영향력 운운하는 건 무리다. 이 부분은 한화의 북일파 VS 비북일파 떡밥과 함께 다소 부풀려진 감이 있다.[51] 여담으로 이 기간 동안 남천동에서 생계 유지 차원에서 야구 용품점을 운영한 적이 있다.[52] 정수근 입장에서는 어이없어서 화가날 지경은 맞다.[53] 이때 당시 처음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렸는데 KBO측에서 고용해준 선수 변호사가 본인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징계위원회측에게 사과를 강요하자 개같아서 때려친다고 선언하고 징계위원회를 나갔다고 밝혔다...[54] 정수근이 아웃되어버린 2009년 9월 당시 롯데의 외야진은 외국인 타자 카림 가르시아를 필두로 나머지 자리에 정보명, 이인구, 황성용을 돌려쓰던 상황이었다. 김주찬의 경우 외야 겸 1루수를 겸업했었고 손아섭과 전준우는 포텐이 터지기 전이었다. 다만, 손아섭은 징크스를 겪고 있어서 유일하게 롯데 재적년도 중에 활약을 못했다.[55] 해당 건으로 인해 정수근은 잔디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참조[56] 다만 민병헌 본인도 정수근처럼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인데, 되려 이것이 2019년 이후의 부진과 기록저하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습도 연습이었지만 뇌동맥류라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과, 뇌동맥류가 본격적으로 발견된 시점에서 당시 롯데 감독인 허문회의 민병헌 혹사로 인해 완전히 몸이 망가져버린 것이 결정타를 날렸던 것이었다. 결국 이것으로 더 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민병헌은 롯데와의 4년 계약이 끝나던 2021년, 뇌동맥류 수술을 위해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57] 결국, 정수근은 구속 기소가 되자마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