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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辛帝) 제곡씨 帝嚳氏 | ||
시호 | 제곡 고신씨(帝嚳 高辛氏) | |
제호 | 신제(辛帝) | |
성 | 공손(公孫), 희(姬)[1] | |
씨 | 고신씨(高辛氏) | |
휘 | 준(俊) | |
증조부 | 황제(黃帝) | |
조부 | 소호(少昊) | |
아버지 | 교극(蟜極) | |
고향 | 고신(高辛)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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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고대 신화 속의 군주이다. 오제 중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는 교극(蟜極)이었고, 조부는 소호 금천씨 현효(玄囂)였으며, 증조부는 황제 헌원씨였다.제신(帝辛), 고신(高辛), 신제(辛帝), 제준(帝俊)[2] 등으로 불린다.
2. 기록
제곡 고신씨는 제4비인 상의(추자씨의 딸)와의 사이에서 제지(帝摯) 청양씨를 낳았다고 전해지는데, 《사기》 <오제본기>에서는 제지가 왕의 자질을 갖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왕위를 이어 받아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제곡 고신씨는 제3비 경도(진봉씨의 딸)와의 사이에서는 '요순지치'로 유명한 제요 도당씨를 낳았다.《사기》 <은본기>에서는 상나라의 개국 군주인 탕왕이 제곡 고신씨의 아들인 설(契)의 13세손으로 되어 있다. 제곡의 제2비 간적(유융씨의 딸)이 목욕중에 제비알을 먹고 설을 임신했다고 한다. 또한 역성혁명의 성공으로 상나라의 뒤를 이어 천하의 패권을 쥔 주나라의 왕성인 희씨의 조상 후직도 제곡과 관련있는데 《사기》에 의하면 제곡의 제1비, 즉 정비인 강원(유태씨의 딸)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해서 후직을 낳았다고 한다. 즉 제곡 고신씨는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상•주 양대 왕조의 공통 시조였다.
출토된 상나라의 갑골문에서도 상나라의 시조가 제곡이라고 되어 있어 실제로 제곡과 탕왕이 혈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단순한 조상신 신앙이었든 제곡이 실존인물이었든, 상나라 사람이 조상신으로 제곡을 믿은 건 확실해보인다.
중국 신화에서 보면 아내가 엄청 많았다.
3. 대중매체에서
3.1. 만화 《천국의 신화》
용족의 후예인 유웅국의 황제로 권모술수에 뛰어난 지략가로 알려져있다.옥서하가 배달국을 유웅국에 바친 이후로 국호를 '하'로 고쳤다.
불임인지 나이에 비해 자식이 없어서 현무를 양아들로 맞아들였지만 놀 때 빼고 딱히 마음맞는 구석은 없어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3]
황태자비가 되어야할 경도를 먼저 만나보고 한눈에 반해서 홍불을 이용해 서로 쟁탈하려고 옥신각신하다 현무와 진흙탕 싸움까지 가게된다. 극중 대사 그대로 이전투구. 이후 두자성에게 금군의 권한을 이양하고 두자성의 의견대로 월성국을 하나라에 병합한 후 현무를 쥐도새도 모르게 지하에 가둬버렸다.[4]
두자성도 마찬가지로 경계하고 있었고, 권한을 빼앗는 등 잦은 견제를 시도했지만 그와 별개로 장수로서의 두자성에 대해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능한 장수인 진대표가 두자성을 깔 때는 쉴드도 쳐 주기도 한다. 경도에게서 당요가 태어났으나 당요가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친자여부를 의심하고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야 홍불의 뻐꾸기에 '그래도 발이 날 닮았네'하고 만족했으나, 점점 커 갈수록 자신하고 닮지 않은 외양에 멀리했다. 당요가 신세를 한탄할 정도면 상당히 차갑게 대한 모양.
이후 고신성 전투에서 두자성에게 공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무리하게 참전했다가 희강의 태극진법에 말려드는 바람에[5] 화살을 맞고 중태에 빠졌는데 죽기 전에 두자성에 대한 미안했던 감정을 고백하고, 당요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이며 당요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도하려고 했다가 황제 자리를 가로채려고 하는 진대표에게 목이 꺾여 사망한다.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고 가끔 막장 행각도 저질렀으나 개인적인 경계심과는 별개로 능력에 따라 인재를 활용하는 등 군주로서는 좋은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현무와, 이후에는 당요와의 부자간 대립과 모략으로 얼룩지고 있던 전개 와중에 보통은 악역포지션에 가까운 편이었던 용족 내에서 인간적인 최후를 보여주는 것도 인상깊다.[6]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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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나라 왕실과 동성의 종친 제후들은 황제 헌원씨의 직계 후손인 상나라 자성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자신들도 황제의 후손이라 여겼다. 주나라 왕족의 족보를 기록할 때 상나라 공주인 천자의 딸을 뜻하는 '희'(姬)로 기록하며 황제의 후손을 가탁했다. 상 왕실과 주 왕실간의 혈연 관계는 맞지만 <오제본기>에 기록된 공손(公孫)성 외에는 성이라고 할만한 건 없고, 굳이 한 가지 더 넣는다면 <오제본기>가 상나라 왕실 계보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상나라의 국성(國姓)인 자성(子姓)이라고 봐야 한다.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이다. 殷(상나라) 탕왕은 제곡의 후손이며 제곡은 황제의 증손이다. -《사기》(史記)-[2] 《산해경》에서 후직이 제곡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나온 추측이다. 한편 제준은 순이라는 추측도 있고, 제곡, 제준, 순이 모두 동일인물이라는 추측도 있다.[3] 애초에 현무를 양자로 들여야했던 이유가 항복회담 장소가 배달국이다 보니 당시 배달국 군권을 쥐고 있었던 현무에 의해 반협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4] 현무는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유폐에서 풀려난 어머니 옥서하에게 기를 빨려 죽게 된다.[5] 처음 제곡은 후퇴하는 구려군을 보고 두자성의 조언대로 놔두려 했으나, 진대표가 '두자성을 일등공신으로 만들거냐'라는 말에 추격을 했던 것.[6] 자기 친아들이 아니라는 게 파악되자마자 오랫동안 직녀의 빈자리를 채워줬던 어린 태자에게 화살부터 날렸던 혁다세 같은 인간을 떠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