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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범민족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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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남측본부 의장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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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 문익환 목사 등 한국의 통일 운동가들과 북한의 명목상 통일운동 세력(사실상 북한 정권과 동일)이 함께 조직한 통일운동 단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의 의견을 남측에 관철시키려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어왔고, 이에 반대한 문익환 목사와 지지 세력이 1993년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고 나가면서 사실상 종북성향을 지닌 단체가 되었다.

1997년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지정되었으며, 남북관계가 경색되던 2024년 김정은의 대남 기구 해산 지침의 영향으로 해산되었다.

2. 역사

한민족의 통일방안과 통일실천에 대해 논의하자는 목적으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남한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1회 범민족대회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범민족적 통일운동체를 결성하기로 결정해 1990년 11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한·해외동포 3자 회담을 개최, 범민련을 결성했으며 1990년 12월 범민련 해외본부[1], 1991년 1월23일 범민련 남측본부, 1991년 1월 25일 범민련 북측본부가 탄생했다. 북한의 범민련 북측 본부는 김일성이 직접 자신의 항일 빨치산 전통을 이어받은 통일조직이라 칭송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으며 당비서 겸 조평통 부위원장 윤기복이 초대 의장, 문예총위원장 백인준이 2대 의장, 통전부 부부장 겸 조평통 서기국장인 안경호가 3대 의장을 맡았다. 이렇듯 김일성이 직접 범민련의 존재를 강조하는 한편 북한의 고위급 대남공작기구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단체의 정체성은 뻔할 뻔자다. 범민련은 남, 북, 해외동포에 각각 본부를 구성하는 한편 따로 중앙본부를 꾸리고 남북한, 해외에서 공동의장 1명을 각각 선출하며 부의장과 중앙위원을 따로 선출했다.

1990년 범민련의 창립은 국제적으론 냉전 종식, 국내적으론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민간통일운동을 활성화해보자는 측면에서 당대의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들이 총결집한 결과물이었다. 당시의 노태우 정부도 이런 흐름 속에서 "북한 및 공산권과 조건없이 대화하겠다"는 7.7선언을 내놓고 남북고위급회담, 총리회담을 연달아 개최하는 등 남북대화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범민련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이때문에 범민련이 남/북/해외 공동으로 8.15기념행사로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호의적으로 반응하였다. 하지만 남과 북 그리고 민/관 공동행사로 기획되던 범민족대회는 결국 정부와 범민련간의 의견불일치로 민간행사로만 진행되었다. 그마저도 범민련 내외부의 운동권 정파들의 개입으로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축제를 만들겠다는 애초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나서 사실상 운동권들만의 행사로 전락했다.

범민련은 1992년 창설한 산하 학생기구인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과 함께 매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통일대축전을 개최했지만, 원천봉쇄 초동진압을 외치는 정권과의 격렬한 충돌로 서울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시가전이 되고 말았다. 1992년 범민족대회에선 전경 만여명이 행사 장소인 중앙대 흑석캠퍼스를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학교 뒷산을 넘어서 탈출에 성공한 수 천여 명의 참가자(대부분 대학생)들이 관악산 자락을 타고 이동해서 서울대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매년 이런 일이 반복되었으며 1994년에 서울대에서 열린 제5차 범민족대회 당시 경찰 헬기에서 뿌려대는 최루액 속에서도 대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범민련 창립을 주도했던 문익환 목사가 1994년 범민련이 북한의 대남공작도구로 전락했다면서 범민련을 해산하고 '새로운통일운동단체'(새통체)를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당시 북한에서는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문익환이 심장마비로 별세하자 북측에서 일단 애도를 표하기는 했다.

문익환에 따르면 범민련은 북한 정권의 공작으로 순수한 민간통일운동이라는 창립 초기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친북성과 폭력성만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일반인들한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통일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두고 새로운통일운동체 논쟁이 격렬해졌지만 문제를 제기했던 문익환 목사가 사망하면서 논쟁은 스리슬쩍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북한에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북한 붕괴론이 득세하면서 민간통일운동도 위축되었다.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나설때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식 사회주의라며 북한을 찬양하던 NL 그룹 내에서 자신들의 이념에 의문이 제기된게 이때이다. 문민정부의 출범, 평화적인 시민사회운동의 급성장,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 문익환 목사의 문제제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시기에 NL 운동내에서 급격한 노선 분화가 이루어진다.

주체사상을 따르지 않던 비주사 NL(NL 좌파) 그룹은 PD 온건파와 통합해서 사민주의 성향의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형성했고, NL온건파들중에 상당수는 아예 시민운동이나 제도정치권쪽으로 건너갔다. 심지어는 주사파의 대부라던 김영환(1963)조차 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의 수령론을 비판하고 이후 북한민주화운동가로 전향한다. 주체사상을 고수한 이들도 기존의 종북노선, 강경폭력투쟁을 고수하는 강경파와 이들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온건파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강경파들이 범민련과 한총련을 장악하고 터트린게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와중에 벌어진 이석 치사 사건이다. 온건파들은 학생운동권에선 '사람사랑'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드는데 대표적인 그룹이 경기동부연합이다.

문익환 목사는 사망했지만, 그의 문제제기에 공감했던 인사들은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라는 새로운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민족회의도 역시 NL계가 주도한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범민련과 민족회의의 대립을 북한을 둘러싼 NL계의 분화로 해석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즉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NL강경파와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할뿐 독자적인 통일운동을 지향하는 NL온건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다.

민족회의도 남-북-해외 3자연대식의 통일운동에는 긍정적이었으나, 북한은 일방적으로 범민련만을 지지하면서 민족회의를 외면했다. 범민련 창립과 범민족대회의 뒷배경 그리고 통일운동 진영과 정부의 갈등, 문익환 목사와 북한의 갈등에 대해선 한겨레신문의 기획연재 <박찬수의 NL 현대사>를 참조할만하다. NL의 분화-통일운동 1편, 2편, 3편

이후로 범민련은 NL 계열 중에서도 강경 주체사상파들이 장악한 운동권내 한개 분파로 전락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이후에도 매년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고 북한에 사람을 보내는 등 활동을 지속했지만, 일반인들에겐 큰 영향이 없었다. 1996년 8월 범청학련과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범민족대회/통일대축전을 개최하고 한총련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촉발된게 바로 연세대 사태이다. 정권이 행사시작때는 내버려뒀다가, 행사가 끝나갈때에 원천봉쇄를 실행해서 일부러 폭력투쟁을 유도했다는 설이 팽배하지만, 하여튼 오랜시간 서울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학생운동, 통일운동 세력이 일반인들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연세대 사태 때도 참여단체에 불과한 한총련만 욕을 먹었고, 정작 행사를 주최한 범민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후에는 NL 내부의 노선분화가 가속화되면서 범민련은 그쪽에서도 그냥 별 영향력 없는 이름뿐인 조직이 되었다. 범민족대회가 쪼개져서 열릴 때도 있을 정도. 이후 범민족대회는 1999년 제10회까지 해오다가 2000년에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고려하여 범민족대회를 열지 않겠다는 서한을 보내면서 막을 내렸다.

더 나아가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발족 이후 정부 주도의 통일운동은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이때가 되면 극심한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에 시달리던 북한 입장에선 북미협상, 남북대화를 통해서 고립에서 탈출하고 남한 재벌들을 북에 유치해서 경제를 재건하는게 훨씬 중요하지 남한의 주사파들은 더이상 아무 쓸모가 없는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범민련이나 남쪽 주사파들하고 소위 민간교류, 통일운동 백날 해봤자 쌀 한톨도 안나오니 그냥 팽한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남한 주사파의 북에 대한 짝사랑은 애처로울 정도로 계속 이어진다.

금강산 통일기행을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한반도기태극기 대신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반전, 반핵을 주 테마로 삼고 있다. (단, 북한은 빼고 남한과 미국만). 이 시기는 아직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맘놓고 반핵을 주장했다. 당시 세계 반핵회의도 평양에서 수차례 열렸다. 물론 들어올때와 나갈때 다르다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 되자 순식간에 입을 싹 닦았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윤석열 정부 취임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계속 경색되자, 2023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김정은은 남북관계가 같은 민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는 대남정책 전환을 주장하며 범민련을 비롯한 통일 관련 조직들의 해체가 결정되었다. 이는 2024년 1월 13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당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전원회의에서 제시된 대남정책전환방침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대적부문 일군들의 궐기모임 진행"에서 확인되었다. 이로써 민간 부분의 남북 통일운동도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 되었으나 범민련의 북측은 당연히 '민간'이 아닌데다,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해체되면서도 당연하게도(?) 남측 인사들 사이의 반발은 전혀 없다는 것이 이 단체의 본질을 말해준다.

2024년 2월 17일, 범민련의 남측 인사들도 해산총회를 열고 새로운 전국적 반제자주운동연합체(가칭 한국자주화운동연합)를 결성하면서 한미일 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반제국주의 투쟁을 계속 주장해 나가기로 하였다. #

3. 역대 남측본부 의장

4. 여담

범민련은 남측 본부북측 본부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이들끼리 자료들을 주고 받다가 처벌 받는 경우도 잦았다.

이를 사이버 안보단체를 표방하는 우익 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고발했으며 검찰측은 “위법사실이 밝혀질 경우 법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하겠다”며 수사의지를 천명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다양한 통일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이 결집해서 만들었던 초기의 범민련과 문익환 목사 사후 특히 2000년대 이후의 범민련은 사실상 다른 단체가 되어 버렸다는 평가가 많다.

2012년 야권연대 당시 부의장 노수희가 연관되어 있다. 노수희는 1998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부회장 직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야권연대 창단식에 얼마 안 있다 바로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 김정일을 참배하고 판문점으로 돌아오자마자 체포되어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하태경이 주사파에 의문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문 목사의 범민련 북한 대남기구화 주장 사건이라고 한다. 김정은의 남북은 남남으로 살자는 발언 이후 범민련이 해산 수순을 밟자 하태경이 이 일을 회상하며 글을 올렸다. # 1995년부터 10년 동안 사무처장을 맡았던 민경우도 2009년 <진보의 재구성>을 낸 후 NL 사상에서 벗어나 전향했다.

주요 단체가로는 <범민련 진군가>와 <범민련 찬가>가 있다.

5. 관련 문서


[1]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