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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퀸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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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파일:lossy-page1-1712px-JQA_Photo.tif.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67년 7월 11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매사추세츠 식민지 브레인트리
(現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레인트리)
사망 1848년 2월 23일 (향년 80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제6대 대통령
1825년 3월 4일 ~ 1829년 3월 4일
서명 파일:존 Q. 애덤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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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존 애덤스
어머니 아비게일 스미스
배우자 루이사 캐서린 존슨[1]
자녀 조지, 존 애덤스 2세 , 찰스, 루이사
학력 하버드 대학교 (B.A.)
하버드 대학교 (M.A.)
종교 유니테리언[2]
신장 171cm
소속 정당 [[연방당|
연방당
]]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문장 파일:Coat_of_Arms_of_John_Quincy_Adams.png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_P.A._Healy_-_John_Quincy_Adams_-_Google_Art_Projec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
2.1.1. 1824년 대통령 선거와 당선
2.2. 대통령 당선 후2.3. 퇴임 후
3. 여담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This is the end of Earth. I am content.
이승도 끝이구만. 난 만족한다.
애덤스의 유언.

미국의 제6대 대통령.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장남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다.[3] 정계 활동 당시 민주공화당내 계파 싸움으로 인해 결국 당을 쪼개지게 만들었다.[4] 퇴임 후 노예제 폐지 등에 힘써 지미 카터와 더불어 퇴임 후의 업적이 임기 중의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줄여서 JQA라고도 하며 나무위키에선 저 단어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2. 생애

2.1. 대통령 당선 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6px-John_Quincy_Adams_by_Gilbert_Stuart%2C_1818.jpg
1818년의 애덤스.

매사추세츠에서 존 애덤스와 애비게일 퀸시 애덤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가인 애덤스 가문과 외가인 퀸시 가문은 보스턴의 명문가이자 보스턴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들이다.[5] 유년기부터 외교 업무로 유럽에 출장을 다닌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가정 교육을 받는데 유년기의 경험은 애덤스의 국제적 안목과 외국어 학습에 큰 도움이 준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1791년에 유럽 각지를 다니며 외교 사절로 근무한다. 이후 귀국하여 여러 공직을 거치다가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프로이센 대사와 영국 대사를 지내며 미영전쟁 종전 협상인 겐트 조약에도 참석하며 외교 분야에서 명석함을 발휘한다.[6]

제임스 먼로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는데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교섭을 맡았고 매입을 성사시킨다. 매입 성공으로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사람 역시 애덤스이다. 먼로 행정부 8년을 국무장관으로 일하였는데 업적이 매우 커서 현대에도 유능한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상위권을 기록한다. 화려한 언변과 뛰어난 외교 능력 덕분에 애덤스에게는 '노련한 능변가(Old Man Eloquent)'라는 별명이 붙는다.

2.1.1. 1824년 대통령 선거와 당선

미국사의 3대 부패한 거래
Corrupted bargain
1824년
애덤스와 클레이의 거래
1877년
1876년의 타협
19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령 사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ElectoralCollege1824.svg.png
애덤스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 결과.

화려한 가문과 출중한 능력을 검증받은 애덤스는 1824년에서 먼로의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지만 미영전쟁 당시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하여 유력한 영웅으로 부상한 앤드루 잭슨도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이 시기 야당인 연방당은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없는 것에 가까워져서 사실상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윌리엄 크로퍼드 재무장관이 대통령 후보, 앨버트 갤러틴이 부통령 후보로 당의 지명을 받았지만 일부 당원 위주의 폐쇄적인 전당대회 방식에 불복하여, 다수의 후보가 비공식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난립한다.

결국 애덤스와 잭슨을 비롯하여 헨리 클레이나 윌리엄 크로퍼드가 후보로 떠올라 각자 선거운동을 한다. 아무래도 인기는 미영전쟁의 영웅인 잭슨이 우세했기 때문에 득표 수에서는 41.3%로 1위를 차지하고 선거인단에서도 반란표가 등장하면서 선거인단 역시 1위를 차지한다. 뒤를 이은 2등인 애덤스는 30.9%를 얻는 선에 그쳤다.

하지만 4명의 후보 모두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정헌법 12조에 의해 의회에 대통령 결정이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연방 하원의원으로 다시 선거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대략 얻은 선거인단이 애덤스가 84, 잭슨이 99, 크로퍼드가 41, 클레이가 37이었는데 애덤스와 클레이가 서로 협상해 일종의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클레이를 지지하던 서부의 4개 주가 애덤스 지지로 돌아선 것.

연방 하원의원을 통한 선거는 '주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7] 13개주에서 앞선 애덤스가 7개주에서 앞선 잭슨에게 승리, 제6대 대통령은 애덤스가 차지한다. 2등과 4등의 연대가 1등을 이긴 것이다. 참고로 애덤스의 득표율은 역대 당선자 중 득표율이 가장 낮았다. 그 다음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39%.

아이러니한 사실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의회가 결정한다는 수정헌법 12조가 채택될 당시 애덤스는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자신이 반대한 법안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헨리 클레이와의 타협으로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취임하자마자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고 라이벌인 잭슨은 당연히 클레이를 이스카리옷 유다라고 조롱하며 애덤스와 같이 싫어하였다. 국무장관이 될 당시 40대였던 클레이는 이후로도 상원의원을 역임하며 1850년대까지 미국 역사의 한 폭을 장식한다.

부통령 선거는 갤러틴이 마틴 밴 뷰런의 설득으로 출마하지 않으면서[8] 민주공화당 후보들의 난립 속에 존 C. 칼훈이 260명 중 182명을 확보하면서 당선된다. 잭슨과 애덤스 모두 부통령으로 칼훈을 지명하였는데 애덤스가 승리하면서 칼훈은 애덤스 정부의 부통령이 된다. 다음 대선에서 칼훈은 잭슨과 손을 잡고 재선 부통령이 되었으나, 다시 잭슨과 갈라지면서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2.2. 대통령 당선 후

제임스 먼로의 임기 중반부터 나타난 경기침체가 조금씩 호전되고 나라가 안정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애덤스의 임기는 대형 사건이나 눈에 띄는 업적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연방파가 정계에서 소멸된 상황이었지만 애덤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강한 연방주의를 신봉하였다.

매디슨과 먼로는 각 주의 도로나 운하 건설에 연방 정부가 개입하는 건 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애덤스는 연방 정부가 중심이 되어 도로나 운하 건설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박식한 지도자답게 교육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워싱턴에 국립대학과 천문관측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미국은행의 허가를 유지하는 것도 찬성하였고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집중된 미국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겼지만 남부와 서부 지역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이는 남부에서 증오스러운 관세법이라고 비판받았다. 주특기인 외교에서도 국무장관 시절과 달리 이렇다할 성과가 나지 않았다. 1826년 파나마 국제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 회의에 미국 대표를 참석시키자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시몬 볼리바르가 서구 국가들의 협력을 증진시키자는 의도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이 중심이었던 연방의회는 미국에서 실시하는 노예제가 국제회의에서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서 국제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의 인준을 늦게 가결한다.[9] 뒤늦게 대표단은 파나마로 출국했지만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회의는 종료되었다.

애덤스 본인도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에, 융통성도 없어 전임자인 먼로와 달리 연방 의원들을 소집하여 설득할 수완과 대화를 이끄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애덤스의 정치적 기반이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한정된 점도 새로운 정책을 발의해도 국민들에게 지지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임기 말인 1828년에 애덤스는 재선을 노렸고 경쟁자는 4년 전 애덤스에게 대통령 자리를 빼앗겨 설욕을 다짐하던 잭슨이었다. 이 시기 민주공화당도 잭슨을 지지하는 일파와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로 분열되는데 잭슨을 지지하는 파벌이 현재의 민주당을 창당하고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이 국민공화당을 창당한다.

국민공화당은 훗날 휘그당의 전신이 되는데, 휘그당이 정식으로 출범한 해는 1834년이지만 애덤스를 지지하고 잭슨을 반대한 세력들이 모여서 창당한 당이므로 이들이 휘그당의 전신이다.[10] 잭슨은 자신의 인기를 십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애덤스를 귀족들과 부유층의 대통령이라고 대대적으로 힐난하는데, 애덤스는 잭슨의 선전에 대해 크게 방어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잭슨에게 참패한다.[11]

2.3. 퇴임 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의 농장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1830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치 경력을 이어간다. 그리고 애덤스는 원로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예제 폐지의 선봉장이 되어 노예제를 강하게 비판했다.[12] 1830년 하원에서 노예제 반대의 청원이 토론이나 행동을 비롯한 어떤 형태로도 거론되면 안 된다는 내용의 법안이 채택되자 폐지하기 위해 수 년을 투쟁하였다. 결국 미국 헌법을 거론하며 이 법안이 위헌이라는 투쟁을 벌인 끝에 1844년에 이 법안은 폐지된다. 1843년에는 "만약 노예제가 피와 전쟁을 통해야만 없어질 수 있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라고 발언하였다.

천문 관측소를 임기 도중 설치하지 못하였으나, 1843년에 신시내티 천문관측소가 설립되자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 기쁨을 누렸다. 천문 관측소는 거의 20년만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리고 쿠바에서 도망쳐 미국 해안에 잠입한 후 스페인 함선에서 일어난 반란인 아미스타드 호 사건의 주범인 흑인들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연방 대법원에서 이들을 변호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스미스소니언 재단 설립을 주도하였고 결국 1846년 재단 설립법이 통과되는 데 기여했다.

1848년 제임스 포크멕시코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도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그로부터 2일 뒤인 1848년 2월 23일에 사망한다.

3. 여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33px-John_Quincy_Adams_-_copy_of_1843_Philip_Haas_Daguerreotype.jpg
1843년 3월 16일에 촬영한 사진.[13]
파일:lossy-page1-1712px-JQA_Photo.tif.jpg
1846년에 촬영한 사진.
아니오. 난 영국이 달에 대해 독점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소.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이 지구에는 영국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곳이 없지 않소?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80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제1구 [[연방당|
연방당
]]
1,839 (49.21%) 낙선 (2위)
1803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86 (50.29%) 당선 (1위) 초선[결]
180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213 (46.10%) 낙선 (2위)
1820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0 (0%, 1명) [22]
1824 미국 대통령 선거 116,296 (31.95%, 84명) 당선 (1위) 초선[23]
1828 미국 대통령 선거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500,897 (43.63%, 83명) 낙선 (2위)
183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제11구 1,811 (74.77%) 당선 (1위) 초선
183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제12구 2,592 (78.40%) 재선
1833 미국 주지사 선거 매사추세츠 [[반메이슨당|
반메이슨당
]]
18,274 (29.14%) 낙선 (2위)
183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제12구 [[국민공화당|
국민공화당
]]
3,234 (86.29%) 당선 (1위) 3선
183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3,125 (83.31%) 4선
183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4,100 (59.23%) 5선
184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5,948 (54.60%) 6선
1841 미국 연방상원의원 보궐선거 매사추세츠 3 (0.74%) 낙선 (3위)
184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제8구 5,996 (51.86%) 당선 (1위) 7선
184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089 (57.12%) 8선
18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5,765 (62.23%) 9선[24]


[1] 1775년 ~ 1852년, 런던 출신으로 첫 외국 출신 영부인이다.[2] 아버지를 따라 개신교나 가톨릭을 믿지 않고 유니테리언을 믿었다.[3] 다음으로 부자 대통령 기록을 세운 사람은 조지 H. W. 부시조지 W. 부시.[4] 이때 찢어진 세력이 여차저차해서 지금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된다.[5] 이들은 보스턴의 상류사회를 형성하면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줄을 만들고 메사추세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연방 정치권에도 많이 진출하였다.[6] 기나긴 외교관 생활을 통해서 애덤스가 구사할 수 있던 외국어는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스웨덴어로 6개 국어였다.[7] 예를 들어서 A주의 연방 하원의원이 총 11명, B주의 연방 하원이 8명이고 A주에서 애덤스가 6명, 잭슨이 5명 / B주에서 애덤스가 0명, 잭슨이 8명의 표를 얻었다고 가정하다. 이렇게 되면 단순 지지 의원수 합계로는 6:13으로 잭슨이 승리하지만, 주 단위로는 A주에서는 애덤스가 B주에서는 잭슨이 이겼기 때문에 실제로는 1:1로 무승부가 되는 형태다.[8] 결국 크로퍼드 측의 부통령 후보는 노스캐롤라이나 연방상원의원 나다니엘 메이컨으로 교체되었다.[9] 미국 외교에서는 정부보다 의회의 권한이 더 크기 때문에 애덤스는 이 안건에 지시를 내릴 파워가 부족하였다.[10] 후일 휘그당은 공화당의 전신이 된다.[11] 1824년 선거의 투표자는 36만명이었는데, 1828년에 모든 주에서 재산권과 상관없는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115만명이 투표에 참여하면서 애덤스를 반대하던 유권자가 늘었다.[12] 상당수 전임 대통령들도 노예제도는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에 비해, 애덤스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였다.[13] 이 사진의 컬러 복원본이다. 파일:JQA color.jpg[14] 당장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애덤스의 집권 초기인 1826년이었다. 이 당시에는 촬영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풍경 사진밖에 촬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15] Horace Everett, 1779~1851, 1829년부터 1843년까지 버몬트 주 하원의원을 역임했다.[16] 즉 단순한 전직 대통령 2명의 장례식이 아니라 부친상을 같이 당한것이다.[17] 반대로 이 일을 운 좋게 면한 당시 현직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대표적이다(21세기 기준 최초). 그리고 리처드 닉슨 또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당시 남은 전직 대통령이었던 트루먼과 존슨이 각각 1달 간격(트루먼은 1972년 12월 28일, 존슨은 1973년 1월 22일)으로 사망한 터라 연속적으로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했다.[18] 이후 21세기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중 조 바이든이 전임 대통령의 장례식을 주관하지 않게 되었다(오바마 이후 2번째). 본인의 전임자인 오바마와 그 이전 전직 대통령인 아들 부시, 클린턴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면서도 건강을 유지한 데다 지미 카터가 100세를 달성하고도 최소 바이든의 퇴임일까지는 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트럼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임자였지만, 2025년 기준 바이든의 후임자가 됐기에 제외).[19] 해당 조사에서 IQ가 낮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율리시스 S. 그랜트(120), 제임스 먼로(124.125), 워런 G. 하딩(124.3), 조지 W. 부시(124.875) 등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평균 IQ는 128로, 일반인 평균(100)이나 미국 대졸자 평균(118)보다 높았으며 고지능자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IQ 130 이상은 전체 42명(조지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까지) 중 28명으로 65%에 달했다. 주요 대통령들의 IQ를 보면 조지 워싱턴 132.5, 에이브러햄 링컨 140, 우드로 윌슨 145.1,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39.625, 빌 클린턴 148.8 등으로 추정되었다.[20]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출신이다.[결] 결선투표 당선[22] 존 퀸시 애덤스 본인은 18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하진 않았지만 미시시피 주 선거인단 중 1명인 윌리엄 플러머가 멋대로 던진 표를 받아 선거인단 1명을 얻었다.[23] 182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 모두 선거인단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하원에서 당선자를 결정하였다. 하원에서 존 퀸시 애덤스는 87표를 얻어 당선되었다.[24] 1848.2.23.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