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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56:19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colcolor=#000000,#dcdcdc> 발생일 1983년 5월 5일[1]
유형 하이재킹, 연료 부족
발생 위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춘천비행장 (캠프 페이지)
기종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2E
운영사 중국민항[2]
기체 등록번호 B-296
출발지
[[중국|]][[틀:국기|]][[틀:국기|]] 선양 동탑 공항
도착지
[[중국|]][[틀:국기|]][[틀:국기|]]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
탑승인원 승객: 91명
승무원: 9명
부상자 승무원: 2명
생존자 탑승객 100명 전원 생존
中国民航296号航班劫机事件(간체자)
中國民航296號航班劫機事件(번체자)
CAAC Flight 296
파일:20221026_174941.png
사건 4년 뒤,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사고기.[3]
1. 개요2. 경위
2.1. 발단2.2. 협상 과정2.3. 결과
3. 후일담4. 의의와 영향5. 그 외

[clearfix]

1. 개요

1983년 5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소속 호커 트라이던트 2E 여객기(기번 CAAC 296)가 중화민국으로의 망명을 기도하는 6인의 납치범에게 하이재킹되어 춘천시주한미군의 육군 항공기지였던 캠프 페이지(Camp Page)[4]에 비상착륙했던 사건.

2. 경위

※ 일러두기: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 상황에 따라 대만중화민국으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구분하여 표기합니다.

2.1. 발단

춘천MBC 기록영상
1988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대륙'을 통치할 정통성이 중화민국(대만)에 있다고 보아, 중화민국을 '자유중국'으로 부르는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국가 유일정당인 중국공산당을 줄여 '중공'이라고 불렀다. 나라도 아니고 그저 정당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1970년대 들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또한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수많은 서방기업들이나 홍콩기업들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기에는 북한의 존재감이 매우 컸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도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는 커녕 교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3년 5월 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민항총국 소속 영국제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Hawker Siddeley Trident) 여객기[5]랴오닝성 선양 공항을 출발하여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영공에서 비행 도중 여객기는 하이재킹당했고, 비행기를 납치한 여성을 포함한 6명의 납치범들은 중화민국으로 망명을 꿈꾸며 권총을 이용하여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간 뒤 비행기 기장에게 중화민국으로 가라고 협박하였다.[6] 그러나 기장이 평양국제비행장으로 비행기를 돌렸고 평양 상공에서 기체를 선회시키며 기장은 여기가 서울이니 착륙하자고 블러핑을 시도했으나 납치범들이 서울이 아님을 알아채고 다시 기장에게 협박을 가했다. 결국 납치범에 의해 점령된 비행기는 당시 미수교 적성국이었던 대한민국으로 방향을 돌렸고, 한국군 측에서는 이 시점부터 수상한 비행기가 북한 쪽 상공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는 것을 레이더로 탐지하였고 휴전선으로 접근해오자 F-5와 F-4전투기를 내보냈다. 여객기전투기들의 유도하에, 현재는 반환되어 시민공원이 조성된 춘천시 미군기지 캠프 페이지(Camp Page)의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그 날이 공교롭게도 제61주년 어린이날이었는데, 당시 오후 2시 즈음하여 전국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발령되었다. 동시에 MBC, KBS 등 각 방송사의 TV하고 라디오들은 정규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뉴스속보를 내보냈었으며,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각 신문사들은 모두 호외를 발행할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미수교 적국이던 중화인민공화국의 비행기가 북쪽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긴급한 상황이다보니 서울, 경기, 강원 지역에 어린이날 휴일에 난데없이 공습경보가 울리고, 라디오에서 지금 상황은 실제 상황이라고 연신 방송이 나왔다. 초계 중이던 F-5 전투기 2대가 춘천 시내 바로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등 전쟁이 다시 터진 줄 알고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현장에서 F-5기를 몰던 임종국 대령이 회고록 <하늘에 새긴 신념>에 의하면 청주공항으로 유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중공기는 통신을 거부한채 캠프 페이지에 냅다 착륙했다. 오히려 착륙 못하게 막으려고 중공기 아래에서 위협 비행 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중공기의 연료가 거의 바닥났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시 10분경 활주로를 50여 미터나 지나 가까스로 멈췄을 만큼 꽤 위험했던 불시착이었고, 이는 비행기의 수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협상을 지연시킨 대한민국의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다만 캠프 페이지는 사실상 미국 땅이다 보니 춘천을 관할하는 김응렬 제2군단장이 위병소에서 제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대한뉴스
무장 납치범들은 서울지방검찰청[7] 공안부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승객들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숙박하면서 서울 시내와 남산서울타워, 자연농원, 수원 삼성전자 등을 관광하고, 출국할 때 컬러 TV[8]까지 선물로 받는 등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대한민국발전상을 공산 국가에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원했던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 물론 당시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항공 여행을 할 정도라면 상당한 고위직 내지는 특권층이니만큼[9] 한국의 사정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이를 직접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전략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10][11] 다만 당시에는 6.25 때 엄연히 적으로 온 중공에 저자세 외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6.25 전쟁 중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정일권의 비판이 특히 거셌다.

2.2. 협상 과정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은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전무한 적성국이었다. 따라서 1961년부터 첫 귀순사건을 비롯해 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조종사가 군용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사건이 6차례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섭대표를 대한민국에 딱히 파견한 적이 없으며, 문제 해결을 서두른 적 없이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불과 몇달 전에 일어난 군용기 귀순 사태 때도 전두환 정부에서 군용기를 반납하고 싶다고 교섭을 시도했음에도 중국은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대한민국 측에 자신들과 교섭하고 싶으면 대만과 단교하는 성의를 보일 것을 요구했고 박정희 정부는 이를 황당한 요구로 받아들여서[12] 거절하고 차라리 소련과의 수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

그러나 1983년 불시착 사건 때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대단히 이례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다. 국무원은 즉시 공안부, 외교부, 민항총국, 신화통신의 간부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하였고 민항총국은 1. 남조선과 직접 교섭한다. 2. 미국, 일본을 통해 간접교섭한다. 3. 국제민항기구를 통해 간접교섭한다는 3가지 방안을 제의하였다. 사태가 워낙 긴급하였기에 중공중앙 서기처의 후치리(胡啟立/胡启立[Hú Qǐlì]) 서기는 남조선과 직접 교섭하는 안을 비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측에 교섭을 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야 했는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남한 당국자와 연락이 닿는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과 모두 수교를 맺고 있는 나라를 통해 접촉을 하는 방법밖에 없었고 이에 민항총국은 남한 당국자와 연락이 닿는 인물이 없는지 물색하였고 민항총국 국제부 부국장 루루이링(盧瑞齡/卢瑞龄[Lú Ruìlíng])이 1983년 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2차 아태지역 항공회의에서 대한민국 교통부 교통국장 김철용의 명함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그날 오후 바로 민항국장 명의로 교섭 대표단을 파견할 테니 착륙을 승인해 달라는 전문을 중국민항 일본지사를 경유해 김철용 국장에게 팩스로 발송하였다.[14] 이는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발송된 외교 전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이전과 달리 빠르게 대응에 나선 이유는, 후일 박춘호 판사[15]가 중화인민공화국의 리스광 박사를 만나 사석에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해당 항공기 탑승자 중 한 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방 최고 기밀을 안고 있는 거물 유도탄 학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6]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다음 날인 5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남조선 당국과 직접 교섭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웃긴 것은 당시 외무부의 중국 라인들은 죄다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연락이 닿지 않아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을 담당하면서 아주국 주무과인 동북아 1과가 대신 협상에 나서야 했다. 일본에서도 피해 승객 중에 일본인들이 있다는 이유로 주한 일본 대사관 정부공사 야나이 슌지를 통해서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해왔다. 5월 6일, 12시에 김철용 국장이 중공 대표단의 접수를 승인하며 고급 관리를 보내달라고 매우 즉각적으로 답신하였다. 이후 외무부도 답신을 보냈는데, 내용은 5월 7일[17] 12시 30분에 김포국제공항으로 대표단을 착륙시킬 것과, 대한민국에서는 이번 일을 외무부에서 전담한다는 것이었다. 5월 6일 오후, 국무원 회의는 선투[18][19] 국장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신화통신이 이를 보도하였다. 5월 7일, 오전 10시 정부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중국 측의 방한 요청을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는데 한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 측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하였다.
사흘 후인 5월 7일, 33명의 대규모 교섭 대표단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파견됐다. 대표단원들의 신분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인 '민항국 직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와 정보기관의 부국장급 인사, 관영언론 신화통신 간부를 포함한 고위급 실무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상황이 수습된 이후부터 중국 담당 아주국 동북아 2과와 국제기구과가 주무과로 협상을 담당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 측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5월 6일부터 회담을 진행하였고, 같은 날 3명의 일본인 승객은 일단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쌍방의 대표 자격, 남조선중공이라는 상호간 국호 문제, 국기 사용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였다. 오로지 북한만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던 중화인민공화국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였지만, 대한민국 측 교섭 대표단은 '남의 안방에 들어와서 안방 주인에게 인사도 안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국 본 협상에 앞서서 양국의 정식 국호와 국기를 사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서, 회담장 테이블에는 태극기오성홍기가 장식되었고 협상 내내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하였다.
3일간의 협상 끝에 5월 10일, 대한민국 측 대표 공노명[20] 외무부 제1차관보와 중화인민공화국 측 대표 선투 민항총국 국장은 피랍 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를 조속히 송환하며, 당장 이동이 어려운 부상자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은 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다음 바로 출국시킬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특히 무장 납치범들은 대한민국 법에 따라 처벌하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과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란 공식 국호가 표기된 최종합의문에 서명했으며, 협상 결과에 따라 대부분의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승객들은 5월 16일에 귀국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의 요구를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이 대부분 수용한 것이었다.

2.3. 결과

무장 납치범들은 대한민국에서 재판을 받고 각각 4~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약 1년을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으로 추방 후 망명하였다.

원래 하이재킹 억제를 위한 협약(헤이그 협약)에 따라 항공기 납치는 엄벌에 처해야 할 중범죄이다. 헤이그 협약 제2조에는 '각 체약국은 범죄를 엄중한 형벌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진다.'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국내법으로도 항공기 납치는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사망자나 부상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법정 형량은 같다.

이때 한국의 몇몇 국회의원들이 그들을 자유의 투사로 보아 재판 없이 중화민국에 송환하자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렇게 놔주기 시작하면 일 벌이고 정치적 이유 운운하면서 악용될 소지는 충분하고 파급력이 커지게 된다. 당시 전두환 치하 철저한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심정적으로 저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혈맹이나 다름없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감안하여 이 정도 선에서 절충한 것이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군을 지휘하도록 지시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춘천 지역을 관할하는 김응렬 제2군단장이 캠프 페이지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주한미군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과의 외교 문제도 걸려 있으니 외무부장관 출신으로 외교 문제 처리에 능통한 노신영 안기부장이 군을 지휘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은 군의 사기가 걸려 있어서 안 된다[21]고 만류하였고, 실제로 합참의장김윤호 장군 등의 군 수뇌부도 반발하였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강행하였다. 결국 노신영 안기부장은 박세직 제2차장과 군을 지휘하여 사건을 해결하게 하였다. 현재의 안보실장에 해당하는 민군간 컨트롤타워 직위가 없다보니 생긴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지휘 사건으로 인해 그 동안 전두환과 정치적 동반자의 위치에 있던 신군부 주요 인사들이 주군가신의 관계로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중심의 정권이 됐다는 점에서 정치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또한 당시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여객기 기체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라이던트 기종은 이륙 성능이 원체 나빴고 활주로가 군용 헬기 활주로라 민항기가 이륙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때문에 중량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비행기를 띄워 김포국제공항으로 날아간 후 거기서 재정비하여 본국을 향해 다시 이륙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객실 의자, 주방, 화장실 설비 등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장비는 모두 떼어내 트럭에 실어 육로로 김포공항으로 수송했다. 항공유도 김포까지만 비행할 만큼 아주 조금 넣었다. 또 이륙 거리를 줄이기 위해 이륙 시간을 이른 아침 시간으로 잡았으며[22] 혹시 모를 추락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활주로 앞 근화동 일대 주민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이것이 어느 정도 호재로 작용한 것도 있는데, 이러한 재정비 과정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번 시간에 중공 승객들을 대거 서울 관광에 동원할 수 있었다.

드디어 사건 발생 10일이 경과한 5월 15일 오전 7시 30분 민항기를 띄워 김포국제공항으로 보냈다. 26분 후 김포공항에 도착하였고, 이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해당 여객기는 정비를 거쳐 사흘이 지난 18일 김포공항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고 잘 운행하였다.

3. 후일담

당시 비행기를 납치한 6명은 줘창런 (卓長仁, 탁장인), 장훙쥔 (姜洪軍, 강홍군), 가오둥핑 (高東萍, 고동평)[23], 왕옌다이 (王豔大, 왕염대), 안웨이젠 (安偉建, 안위건), 우윈페이 (吳雲飛, 오운비)로, 중화민국에서는 반공의사(反共義士)[24]의 귀순이라며 대대적인 환영 + 막대한 정착금을 받았고 '6의사'라고 불렸고, 줘창런과 가오둥핑은 서로 결혼까지 했다. 이후의 행보는 아래와 같다.여객기가 불시착한 활주로 지역은 캠프 페이지가 춘천시 및 대한민국에 반환, 어느 정도 재개발 되고 난 후, 2018년 춘천시 측에서 꿈 자람 관련 시설물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도 공원화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공원화 구획 안 중 불시착 지역 근처를 '중국 민항기 불시착 광장'이라는 이름의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 있다는 듯하다. #

이 사건 이후 대만에서는 계엄령 해제 전까지 중국 본토에서 무기군용기 등을 가지고 귀순을 하면 받아줬지만, 민항기 하이재킹으로 귀순을 시도하면 체포해서 처벌한 뒤 본토로 송환시켜 버렸다.

4. 의의와 영향

이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한중 양국이 최초로 공식적인 외교적 접촉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중국 대륙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고,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간주하고 있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북한의 요청으로 남한산 면직물에 대해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여 대한민국 면직물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었는데, 민항기 사건 이후 더 이상 원산지 증명 요구를 하지 않았다. 민항기 사건 후 대한민국의 대(對) 중화인민공화국 수출총액은 1983년 484만 달러에서 1984년 1,694만 달러로 급증했다.

사건 다음 해인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언을 하게 되었고, 특히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하게 참가했다. 반둥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이세기 국토통일원 장관은 중국 외교부장 우쉐첸에게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을 이길 자신이 있냐고 참석 의사가 있는지 돌려서 물었고, 우쉐첸은 심판만 잘 봐주면 문제 없다고 참석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 우쉐첸은 이세기가 중공 여객기 승객들을 자신의 지역구에서 먹이고 재웠다고 하자 크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역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우쉐첸은 이세기에게 한국에선 아직 한자를 교육하는가? 라고 물었고 이세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쉐첸은 한국의 학생들은 삼국지수호전을 읽는가? 라고 물었고 이세기가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쉐첸은 표정이 묘해지더니 소위 동맹이라는 북조선 친구들은 한자를 완전히 없애버렸고 중국 고전도 읽지 않는다고 대답했다.[27][28]

당시 승객 및 승무원들이 서울에 머물면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중 교류가 약 30년간 끊어진 상태라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북한의 선전물이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서울)은 전깃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고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더라'라는 수준의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서울은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어느 대도시에 비해 크게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이었으며, 특히 엄연한 적성국가 국민이었음에도 가는 곳마다 미소 띤 얼굴로 극진하게 환대해주는 한국인들을 보고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21세기 초반에 중국에 엄청난 건설붐이 볼면서 대도시 지역은 물론 중소도시에까지 마천루 시설을 건설하였고, 대도시는 물론 지방중심도시에서도 지하철과 전철망도 엄청나게 깔아댔기 때문에, 한국 대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경외감이 든다는것은 옛말이 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에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경제 수준이 북한보다 훨씬 못했던 시절인지라 이러한 인프라 시설도 낙후될수밖에 없었다. 지하철베이징에만 개통되었던 상태였고, 21세기 이후로 야경으로 이름을 날리는 상하이 푸동지구도 당시에는 시골 벽촌에 불과해있었으며, 조금만 외곽지대만 가도 전기같은 기초적인 인프라 시설도 깔려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방문했던 중국 간부들도 대단한 충격을 받았으며 이들은 동유럽 외교관들과의 대화에서 서울은 평양에서 선전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현대적이고 깨끗한 도시였다고[29] 충격과 호의를 표시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은 상류층들이므로 정보의 접촉면에서 일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상류사회에서 이들의 한국 경험담은 꽤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30]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한(對韓) 외교정책 전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속히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고 한국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92년에 한중수교를 이끌어 낸다. 물론 이에 반비례하여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나빠졌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과의 외교 정상화의 선제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자신들만을 중국 대륙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대한민국도 실리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는 단교했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상협 국무총리의 첫마디는 '봉황이 날아들었다'로, 고려대학교에서 마오쩌둥을 강의하기도 한 중국 전문학자 답게 한방에 불시착 사건의 의미를 간파하였다. 양국 간 외교 관계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5. 그 외

<외교열전> "불시착機에 中 미사일 전문가 탔었다"

방송인 출신 정치인 이계진이 방송인 시절 썼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이때 북한이 공습을 한 줄 알고 민방위 사이렌이 울려대면서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고 외쳐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하필 저 때 미그기 귀순이 많았기도 했고 하필 사건이 일어난 날이 빨간 날이라서 일요일 새벽에 6.25 기습 남침을 겪은 트라우마도 되살아나고, 한편 IPU 서울총회를 방해하려는 북한의 공작이 실패한 후 실제 무력 행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여러 경로로 입수되는 소문[31] 등 때문에 더더욱 난리가 났었다. 또한 5월 9일부터는 대규모 멸공훈련 '멸공83훈련'을 실시하기로 계획[32]이 되었기 때문에 군의 긴장감 자체도 높아진 상황이었다.

납치항로를 보면 대한민국 쪽으로 올 때 서해상의 공해를 이용해서 넘어온 게 아니라 북한 땅을 평양까지 가로질러서 왔는데, 어이없게도 북한 쪽에서는 자국의 수도인 평양 위에서 세 차례나 선회하고 있는 이 비행기를 전혀 눈치채지를 못했다! 레이더 성능과 관리상태가 그만큼 부실했었단 말. 평양의 방공망이 밀도가 높다고 해봐야 납치 부호까지 달고 있는 미확인기 탐지도 못할 지경이니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다. 오히려 당시 한국군이 이 시점에 벌써 비행기를 탐지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 반공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평양으로 오던 중국 여객기가 방향을 틀어 한국으로 가버리자 김정일이 손수 오진우 등 군 고위층을 두들겨패는 묘사가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

불시착한 당일에는 춘천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춘천에 있는 중국집이 총동원 돼서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기부에서 직접 통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춘천시민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고. 당시 갖다준 메뉴는 군만두로 120인분, 1200개를 준비해서 비행기 안으로 들여보냈다. 춘천시 세종호텔로 이동한 후에는 야채샌드위치를 50인분 만들어 대접했는데, 이 과정에서 춘천시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화교들이 통역을 맡았다. 이때 비행기 안에서 챙겨온 흑빵과 흑맥주 등도 있어서 한국측이 제공한 음식이 아니라 그걸 먹는 승객들도 있었다. 이후 서울로 이동하면서 휴게소에서는 햄버거, 만두, 우유 등을 대접받았다.

그 엄혹한 시절에 비행기 여행을 했으면 중국의 상류층이었을 텐데 옷차림새를 보면 영세민급이어서 방송을 보던 한국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33]

이 사건을 계기로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해 1983년 8월 15일 KBS 제1라디오의 24시간 방송을 시작하였다.

일본 항공기를 납치한 적군파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과 여러가지로 비슷하면서도 뭔가 리버스 버전 같은 사건이다. 둘 다 민항기를 이용하여 망명을 시도했으며 적군파는 자본주의 일본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으로, 이쪽은 사회주의 중공에서 자본주의 대만으로 가려고 했다. 일본항공 351편 사건 때는 여기가 평양이라며 서울에 내리는 블러핑이 통했지만, 이쪽은 반대로 여기가 서울이라며 평양에 내리려던 블러핑이 실패했다. 둘 다 모두 한국에 불시착하게 되었고, 한국정부의 현명한 대처로 승객들 대부분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각각 중공, 일본에 좋은 이미지를 주었다. 하이재킹을 시도한 자들은 모두 원하던 국가로 망명했다.


[1] 그 날이 공교롭게도 61주년 어린이날이었다.[2] 1983년 당시, 한국과 중국은 정식 국교관계를 맺지 않고 대만을 '자유중국'이라 부르고 중국은 중국의 공산주의 형태, 또는 중국공산당의 약어인 중공이라 불렸다. 때문에, '중공민항'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당시엔 주류였다. 6.25전쟁 당시의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라 부르는 이유기도 하다.[3] 사고기의 등록번호는 1987년 B-2220으로 바뀌었다. 이 사고가 있은지 10년 뒤인 1993년까지 운행되다가 퇴역하였다.[4] 현재는 춘천시에 반환되어 매장문화재 발굴 조사중[5] 이 여객기는 1960년대 초반 미국보잉 727에 대항하여 영국호커 시들리사가 개발한 중형 삼발 여객기이다. 그러나 낮은 인지도에다 엔진 문제로 인해 보잉 727은 물론 후에 나오는 소련제 삼발기인 Tu-154하고도 제대로 경쟁해 보지 못한 채 110여 대 정도만 생산되고 단종되었으며, 호커 시들리는 이후 여러 회사들과 합쳐져서 현재의 BAE 시스템스가 됐다.[6] 조종실 승무원 2명은 실제로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7]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다.[8] 한국에서도 컬러TV 방송 시작이 2년하고도 반밖에 안지났던 시점이었고 흑백TV보다 시청료가 3배 이상 비싼 2500원이였기에 아직 대중적인 가전제품은 아니었던 시대였으며, 대륙에서도 이제 막 전국적인 TV 보급이 진행되고 있던 시절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컬러방송을 한국보다 훨씬 일찍인 1973년에 시작했지만 경제발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것이 1970년대 말부터인 관계로 1983년 시점으로는 컬러 TV는 1대에 일반직장인 몇년치 봉급에 해당될 정도로 비싼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컬러TV가 있다하면 동네 자랑거리로 소문났고, 하교시간, 퇴근시간 이후에는 동네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같이 컬러TV를 봤던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컬러TV가 시골 벽지에까지 널리 보급될 정도로 대중화된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9] 일반 중산층들도 거리낌 없이 비행기를 이용하는것은 2000년대 중반에서야 가능했다.[10] 한국은 북한 대상으로도 이 전술을 사용했고 1984년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당시 수해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북한 인사들에게 라디오를 비롯해서 남한의 공업 수준을 자랑할 수 있는 물건을 한 박스씩 주었다. 그런데 김정일이 남한의 공업 수준이 북한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모조리 압수하고는 자기네가 다 꿀꺽해버려서 남한에 왔던 북한 관계자들은 일제서독제로 줬으면 안 뺏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남조선 애들이 눈치가 없다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11] 역으로 이후락 등 고위 사절들이 북한에 갔을 때는 북한의 경공업 상황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가져가고 이것저것 요구도 많이 했고,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북측 인사들이 나중에 납북된 신상옥 감독에게 남조선 당국자들이 배포가 작다고 낄낄 웃었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도 북한에서 제공한 과자류를 먹어보고 북한 경공업 상태가 형편없음을 짐작했다고 한다.[12] 대만과 단교하면 즉시 수교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교해보면 생각이나 해보겠다는 태도니 박정희 정부에서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그리고 2000년대까지만해도 소위 항미원조 인맥으로 인해서 정부 대 정부 차원의 관계는 오르내려도 인민해방군 내부에는 북한을 혈맹으로 각별히 여기는 원로들이 많아서 한국 입장에선 골치 아플 정도였는데 이들이 팔팔한 현역으로 중국의 당, 정, 군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70-80년대에 중국과 접촉이 얼마나 까다로웠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13] 대소 접촉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한국 대사관 행사에 소련 무관이나 하급 외교관들이 참석하여 한국 외교관들과 같이 사이좋게 북한 뒷담을 까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얼마 전까지도 남조선 당국자와 절대 접촉하지도, 명함 따위도 주고받지 말라고 엄격한 훈령을 내린 상태였고 이는 개혁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외교부의 주도로 겨우 완화된 상태였다.[14]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은 닉슨 독트린의 영향으로 1972년 이미 수교를 한 상태였다.[15] 국제해양법재판소의 재판관을 지낸 바 있다.[16] 리 박사의 말로는 미국에서 와 유도탄을 개발했다고 하는 첸쉐썬 박사보다도 뛰어난 학자라고 하나, 기밀사항이라서 그렇게 얼버무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학자가 누구인지 진실은 저 너머에.[17] 사건 다음날이 아닌 이틀 후를 기일로 정했고 기상악화와 항공편을 이유로 삼았다. 협상 전략을 세우고 불시착한 비행기와 승객들에 관한 일을 처리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18] 1918~1993. 저장성 사람으로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을 나온 항일 혁명가 출신이며, 1977년에 민항국장에 임명되었다.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여객기 사건 4년 후인 1987년 10월, 12기 7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고 은퇴했다.[19] 예전 언론 기사에 '쉔투', '센투'라는 표기가 자주 보인다.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에 의하면 '沈圖/沈图[Shěn Tú\]'는 '선투'로 표기하는 게 옳다. 한편 당시는 중화권 인명이나 지명을 중국음이 아니라 한국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읽던 시기라, '沈圖'를 '심도'로 읽었을 법도 하나, 아마도 병음 표기인 'Shěn Tú'만 전해진 상황에서 중국어 한글 표기법도 정비되지 않았던지라 적당히 '쉔투', '센투' 등으로 표기한 듯하다.[20]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주소련 대사와 일본 대사를 거친 뒤에 김영삼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특히 최초의 모스크바 주재 한국 외교관으로 한소 수교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21] 간단히 말해 군인이 아닌 문민 안기부장 밑에서 일하기는 싫다는 뜻이다. 노신영 안기부장은 중정-안기부-국정원 역사상 최초의 문민 안기부장이자 전두환 정부의 유일한 문민 안기부장이었다. 즉 그전까지 고위 장성이 오던 안기부장에 웬 '외교쟁이 민간인'이 오는 꼴은 못 보겠다는 속내로, 명백히 항명이었다.[22] 기온이 낮으면 공기 밀도가 높아져 양력 확보에 용이하다.[23] 6인방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24] 이 6명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무기를 싣거나 군용기 같은 것을 타고 한국을 경유한 대만행이나 직접 대만으로 망명을 시도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렇게 군용기나 무기를 가지고 귀순하는 이들을 이렇게 지칭하며 정착금 등을 주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이는 계엄령이 해제된 1991년 5월 1일까지 지속되었다.[25] 1985년 9월 30일에 대륙에서 무기를 배에 싣고 중화민국으로 귀순. 그도 이 살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 타이베이 감옥에서 수감중에 있다.[26] 1948년부터 1991년까지 입법위원을 맡았으며, 1990년에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 한국을 찾아가기도 했다. 2004년에 심부전으로 사망.[27] 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신문과 시사잡지에서 한자를 여전히 섞어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겨레 신문 창간 이전에는 신문 하나 읽을려면 기초적인 한자 수백자 정도는 알아야 했다. 특히 보고 문건과 같은 공문서는 한글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자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28] 북한은 실제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문맹을 빠르게 퇴치한답시고 일찍이 한자 교육 폐지와 순한글 정책을 단행했고, 1960년대에 한자교육을 재개한 이후로도 식자층들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한자어 동음이의어인 원수도 '자기들이 경애하는 수령 동지'라는 뜻의 원수를 '원수', '미제, 남조선 역적패당'을 일컫는 원수를 '원쑤'로 구별해 표기한다. 이것 때문에 행여나 오타 잘못 냈다가는 그대로 아오지행이 될 수도 있다. 북한에서도 삼국지수호전 같은 책은 인기가 있는 책이지만,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마뜩치 않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29] 물론 당대에는 서울도 화장실 시설이 엉망인 경우가 허다하다거나 한강물이 각종 생활하수와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폐수로 똥물화가 진행되는 등 환경이 썩 좋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개최를 기점으로 보여주기식이라도 시설개선에 총력을 쏟았던 시절이라서 한강정화사업을 벌이던가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 화장실로 활발히 교체하고 시민들의 의석개선 운동도 같이 벌였다. 이 당시 중국 화장실은 시설 관리가 엉망인 수준을 넘어 재래식이거나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이런 상태는 대략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고위급 인사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을만 했다.[30] 당장 88 올림픽을 통해 해외에 소개된 한국의 모습은 공산권뿐만 아니라 같은 서방 사회에조차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31] 1983년 5월 6일 경향신문 기사 내용 중. 실제로 5개월 후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32] 1983년 5월 6일 매일경제 기사 내용 중[33] 아무리 당시 중국이 오늘날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에 견줄만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으며, 하루에 밥 한끼도 못먹는 사람이 매우 많았던 시절이라고 해도, 비행기 여행을 할 정도면 공산당 지도층이거나 특권층이라 호의호식하던 자들임이 틀림 없다. 또한 1970년대 말 기점으로 복장자유화가 진행되었다해도 젊은층들이나 서양옷을 입던 수준이었고, 중장년층 이상에서는 서방옷의 가격이 너무 비싸고 보기 안 좋아보인다는 이유로(청바지 한벌가격이 당시 중국에서는 1달치 급여수준에 해당되는 고가였다.) 여전히 인민복이나 군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서양식 복장을 하고다니던 젊은층들을 돈 번 날라리로 취급하는 경우도 많았다. 저 시절까지만 해도 해외 영화제에 나가는 중국 배우들도 인민복 입고 허름하게 출국하던 판이었다. 당장 중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공리도 1988년 출세작인 붉은 수수밭의 개봉 이후 해외언론과의 기자회견장에 인민복을 입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