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로 경력2. 국가대표 경력
2.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2.2.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3.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4.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국가대표2.5. 2008 베이징 올림픽2.6.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 연도별 성적1. 프로 경력
1.1. OB-두산 베어스 시절
하단초, 초량중, 부산고-고려대 체육교육학과(93학번) 당시 "2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포수"라는 찬사를 받으며 대형 유망주로 기대를 받았고,[1] 특히 고려대 시절 조두복 감독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연고 구단이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일찌감치 진갑용의 부산고-고려대 체육교육학과 93학번 동기인 손민한[2]을 1차 지명감으로 지목했기 때문에[3] 진갑용은 2차 지명에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1996년 최하위를 기록하는 팀이 그를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최하위권에 있었던 LG 트윈스와 OB 베어스가 서로 대놓고 꼴찌 경쟁을 했을 정도의 유망주였다.[4] 게다가 1997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때 최하위 팀은 지명권 2장이었다. 이 때 OB 베어스에서 진갑용과 함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던 선수는 애틀랜타 올림픽 때 국가대표 선수로 함께하였던 좌완 투수 김영수였다.
1997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데뷔했다. 하지만 아마추어 시절의 맹활약과 달리 평균 성적을 내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롯데 강민호가 완전체로 격상되기 전까지 지적받았던 문제점들이 모두 젊은 시절 진갑용이 갖고 있던 단점들이었다.
1999년에는 그래도 괜찮은 성적을 올리나 싶었지만 갑자기 등장한 홍성흔[5]의 활약으로 주전 경쟁에서 탈락했고, 결국 그 해 트레이드 마감일인 7월 31일 삼성의 우완투수 이상훈을 상대로 4억 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어 삼성으로 이적했다.
1.2. 삼성 라이온즈 시절
1.2.1. 1999~2007년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수상자 (2002, 2005, 2006) |
1999년 7월 31일 트레이드로 삼성으로 이적했다. 이로써 이만수의 노쇠화 이후, 구멍이었던 삼성의 포수는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6] 2000년 김동수가 FA로 삼성으로 합류하여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되나 김동수가 생각 외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진갑용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이 진갑용의 손을 들어주고, 실제로 조범현의 지도 아래 진갑용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김동수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삼성으로서의 이적 이후에도 처음에는 신통치 않았다. 결정적인 이유가 1999년, 2000년 플레이오프,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일이었다. 당시 삼성 팬들은 진갑용을 보면서 김동수와 포지션이 겹치는데 왜 계속 진갑용을 기용하느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갑용은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고, 2001년 시즌 후 경쟁자였던 김동수가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 포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 이후 수비는 물론 공격도 각성,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해줄 정도로 뛰어난 장타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곧 프로선수라면 해서는 안 될 부정행위가 뒷받침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당시 진갑용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선발되었는데, 대회 전에 대한야구협회에서 실시한 도핑에서 근육강화제인 테스토스테론 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그런데 진갑용이 이를 두고 "대학 후배인 김상훈을 대표선수로 만들어서 군 면제를 시켜주고 싶어서 일부러 소변에 금지약물을 넣었다." 라고 변명을 했는데 이에 대해 도핑 기술진이 거짓말이라고 반박을 한 것이다. 한편 김상훈은 진갑용의 이런 변명에 잘 모르는 선배라 했다. 결국 진갑용은 도핑 결과가 나오자 빠져나가기 위해 후배 핑계를 댄 것이었다. 결국 진갑용은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시즌부터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단백질, 근육강화제, 비타민, 종합영양제 등을 복용해 왔다." 라고 시인을 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당연히 대표팀에서도 탈락하게 되었다. 김상훈은 저 이야기를 듣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실이라면 감사하다.라는 희대의 드립을 남겼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당시 KBO에는 도핑에 대한 징계규정조차 없었다는 거다. 그때까지 KBO는 단 한번도 도핑검사를 실시한 적이 없었고, 진갑용이 걸린 도핑도 대한야구협회에서 아시안게임 나가기 전에 최초로 실시한 것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약물의 심각성을 아직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에 나타났던 촌극이었다. 결국 삼성 구단 내규에 의해 벌금 200만원 및 개인적으로 300만원을 수재의연금으로 기탁하는 것으로 사건은 유야무야 묻혔고 진갑용은 어찌됐건 계속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었고 심지어 2002년 당해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다. 하여간 이 오점은 이후로 계속 진갑용의 그림자로 따라다니게 된다.
2003년에는 주로 7번~8번타순에 나와 타율 .290/21홈런/53타점으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기록하게 된다. 홈런 개수에 비해 타점이 적어 보일수도 있지만 알다시피 이해 삼성타순은 엄청난 걸 감안해야 된다.
2004년에는 전년도를 끝으로 해외로 이적한 이승엽과 FA 자격을 얻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마해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팀의 4번 타자로 활동한 바 있지만 후반기에는 김한수에게 넘겨주었다.[7] 또한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현재윤이 포수 자리를 차지하자 1루수나 지명타자로 나오기도 했으나, 시즌 막판 현재윤이 병역 비리로 인해 구속되자 다시 포수로 돌아왔다.
2004년부터 김한수를 이을 주장감으로 지목되었고, 함께 팀내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가며 활약했다. 2005년 입단한 오승환과는 최고의 콤비로 자리잡았으며, 팀에 한국시리즈 3번의 우승을 안겨 주었다.
1.2.2. 2008년
2008 시즌 준플레이오프에서는 4번 타자에까지 기용이 돼서 롯데 자이언츠를 흔드는 모습을 보여줬다.2008 시즌을 끝으로 주장자리를 박진만에게 내주게 되었다.[8]
1.2.3. 2009년
2009년에는 나이와, 결정적으로 손목에 공을 맞아 시즌 아웃. 현재윤에게 안방을 내주고 재활하게 되었다. 이때 심광호마저 부상이라 지승민을 주고 두산에서 채상병을 데려왔다.1.2.4. 2010년
2010년 다시 안방마님으로 복귀해 팀의 정규시즌 2위에 일조했다. 선동열 감독도 팀내 MVP로 안지만과 진갑용을 꼽았다.진갑용은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 3, 4, 5차전은 선발 포수, 2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11타수 3안타 3볼넷 1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 .273, 출루율 .429를 기록했다.
진갑용은 SK 와이번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 2, 4차전은 선발 포수, 3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7타수 무안타 2볼넷 2득점, 출루율 .222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진갑용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18타수 3안타 5볼넷 1타점 3득점, 타율&장타율 .167, 출루율 .348을 기록했다.
1.2.5. 2011년
SK 박경완이 수술로 나오지 못하며 8개구단 중 최고령 주전포수가 됨과 동시에 3년만에 다시 팀의 주장을 맡아 팀의 페넌트 레이스 우승과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의 4승 1패 우승에 기여했다.이 해 리그가 투고타저의 흐름이었음에도 정규시즌 총 112경기에 313타수 78안타 10홈런 42타점 1도루[9]을 기록, 타율 .273, 출루율 .357, 장타율 .402로 공격력에서도 작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성적은 17타수 5안타 2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294, 장타율 .294, 출루율 .368 이었으며 특히 노련한 리드로 팀의 우승에 제법 기여했다.
그리고 2011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1.2.6. 2012년
삼성의 주장이자 최고참 선수로서 그에 걸맞게 활약했다. 통산 두 번째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또한 SK 상대로 타율이 무려 0.405이다.다만 시즌 초에는 팀이 부진에 빠져 있었던데다 백업 포수들의 능력치도 기대 이하여서 은근히 까이기도 했다. 그러나 웬만한 경기에서 역전타나 동점타 쐐기타를 꽂아넣는 해결사 면모를 보이기도.
6월 이후에는 이지영의 발견으로 체력부담도 많이 줄어든 상태이다. 실제로 이지영은 2012 시즌 종료 후 진갑용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2012년 7월 12일 경기 후에 승리 세리머니로 이런 짓을 해서 삼성 라이온즈 주장임을 몸소 증명하였다.
7월 15일 KIA 타이거즈와의 홈 경기에서 4회초 2사 1루 상황에서 안치홍의 2루타에 홈으로 들어오던 김선빈을 블로킹하여 아웃시켰는데, 이 상황에서 김선빈이 얼굴 부상을 당하였다. 이후 7회말 무사에 타석에 들어섰다가 상대 투수 박지훈의 투구에 공을 맞았고, 양 팀은 벤치클리어링을 하였다.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 5차전은 대수비, 2, 3, 4, 6차전은 선발 포수 겸 8번타자로 출장하여 10타수 2안타 1볼넷 2득점, 타율 .200, 장타율 .300, 출루율 .27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2.7. 2013년
자세한 내용은 진갑용/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전반적으로 보면 포수로서의 수명은 사실상 다한 것으로 여겨졌다. 피치아웃을 제외하면 도루저지는커녕 동타이밍조차 기대할 수 없고, 포수 리드도 스트라이크 잡아놓고 대놓고 바깥쪽으로 볼 두개 빼기 등 뻔한 패턴으로 일관하며 위기를 자초하기도 하는 등 사실상 팀 내 주전 포수로서의 역량이 다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다만 타격은 낙폭이 덜해서, 지명타자로서는 쓸 수 있지 않겠냐는 평이었다.
1.2.8. 2014년
난데없이 신생팀 kt wiz로의 이적설이 불거졌다. 14시즌 후 9개 구단은 신생 팀 지원책으로 20명의 보호선수를 제외한 한 명의 선수를 kt에 넘겨줘야 하는데, 좋은 선수가 많은 삼성에서 나이들고 기량도 떨어진 진갑용이 20인 명단에 들어갈 확률은 희박하다. 진갑용의 기량이 돌아오고 kt의 포수 육성이 더뎌진다면 진갑용을 지명하지 말란 법이 없는것. 게다가 kt의 감독인 조범현 감독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삼성의 배터리코치로 있으면서 미완의 대기였던 진갑용을 주전 포수로 키워낸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데다가, 삼성에서 주장까지 다년간 역임한 진갑용이라면 선수단의 맏형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인은 kt가 자신을 지명한다면 일단 구단과 상의해봐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일단 조범현 감독 자신이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고, 포수 조련은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자신이 인스트럭터로 있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포수 유망주로 손꼽혔던 김동명을 데려왔다. 사실 최재훈이나 정상호, 장성우 정도라면 몰라도 용덕한 급은 보호명단에 포함될 확률이 희박하다. 귀중한 특별지명선수를 진갑용이나 용덕한에 쓰는 게 아까울 수 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준급 포수는 강팀의 방정식에도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실제로 선배 NC 김경문 감독은 주전포수를 LG에서 특별지명한 김태군을 기용하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내야수 정현이 지명되었고, 때문에 진갑용은 보호선수 20명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이적설과는 별개로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하게 되면서 3~4개월여동안 출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시즌의 대부분을 날리고 10월 1일에야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다. 이 시간 동안 이지영과 이흥련이 잘해줘서 팀에는 큰 문제가 없는 상황.
2014년 10월 1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경기가 연장으로 가며 주전 포수 자원을 다 써서 10회초에 포수로 처음 출장하였다.
남은 정규시즌 경기동안 대타로도 나오고 대수비로도 나오고 가끔 선발로도 나오면서 경기 감각을 조율하더니, 2014년 한국시리즈에 이지영, 이흥련과 함께 포수로서 승선했다. 그리고 3차전에서 임창용을 리드하여 임창용이 왕년의 모습을 찾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며 찬양받았다. 그리고 6차전때 넥센을 상대로 깨알같은 주루개그로 능욕시전했다.
1.2.9. 2015년
2014 시즌을 끝으로 류택현, 송지만이 은퇴함에 따라 KBO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참고로 차고령 선수는 진갑용보다 불과 5일 늦게 태어난 최영필이며, 포지션으로 나누자면 진갑용이 최고령 타자, 최영필이 최고령 투수다.일본 오키나와에서의 개인훈련 중 입은 허리 부상으로 경산에서 재활 훈련을 하느라 1차 괌 스프링캠프는 뒤늦게 2015년 1월 26일에야 합류했다.
개막 엔트리에도 포함되었고, 선발 투수가 우완인 날은 이지영이, 선발 투수가 좌완인 날은 진갑용이 선발포수로 출장하면서 시즌 초반에는 그럭저럭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끔 뜬금 홈런포를 때리기도 했다. 5월 10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친 홈런은 국내선수 한정 KBO 리그 최고령(41세 2일)[10]홈런이었다. 이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다름아닌 채병용이다. 5월 14일에도 홈런을 치며 그 기록을 41세 6일로 다시 경신했다.[11]
하지만 5월 들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는지 도루저지나 블로킹 등에서 예전과는 달리 아쉬운 모습을 보여 준 데다 좌완 선발 장원삼과 차우찬이 모두 부진하여 결국 5월 19일 이흥련이 올라왔다. 이흥련이 작년에 비해 타율을 끌어올린 데다가 차우찬이 이흥련과 호흡을 맞춘 후에 호투를 이어가며 진갑용은 대타 겸 임창용 전담 포수로 밀려났다. 삼성에 마땅한 우타 대타 자원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대타 자원이 되고는 안타를 치지 못했다.
결국 6월 8일 야수진 강화 차원에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두 번 다시 1군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2군에서 조용히 있다가 2015년 8월 6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5월 16일 대구 NC전에서 마지막 안타와 타점을 기록, 6월 4일 포항 롯데전에서 오승택의 실책으로 인한 출루가 마지막 출루였고, 이날 임창용과 호흡을 맞춘 것이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쓴 모습이 되었다. 6월 6일 마산 NC전에서 대타로 들어서 삼진을 당한 것이 마지막 타석이자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015 시즌까지는 등록선수 신분을 유지하되 남은 기간 동안 팀에서 전력분석원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공식 은퇴 및 지도자 연수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12] (진갑용 선수가 한국시리즈 참가해서 두산의 해외원정도박으로 휘말려서 통합 5연패 좌절로 준우승 당시 만 41세로 현역에서 은퇴 했다.)
2. 국가대표 경력
오랫동안 대표팀의 주전 포수로 활동했다.2.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2.2.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3.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4.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국가대표
2.5. 2008 베이징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참가. 아쉽게도 예선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서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하나 싶었지만, 결승 쿠바전에서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강민호의 퇴장 이후 잠시 올라가서 정대현과 배터리를 이뤄 쿠바 타자 구리엘의 병살을 얻어내며 금메달을 이끌어냈다. 이 때 그는 사형장으로 가는 기분같았다고....2.6.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 연도별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10위 내 기록.
역대 성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7 | OB | 95 | 281 | .242 | 68 | 7 | 0 | 4 | 20 | 21 | 2 | 26 | .310 | .306 |
1998 | 88 | 253 | .269 | 68 | 14 | 1 | 2 | 22 | 12 | 1 | 14 | .356 | .306 | |
1999 | 두산 / 삼성 | 68 | 156 | .212 | 33 | 3 | 0 | 4 | 17 | 13 | 0 | 12 | .308 | .265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0 | 삼성 | 114 | 297 | .273 | 81 | 14 | 0 | 8 | 58 | 30 | 2 | 29 | .401 | .333 |
2001 | 89 | 314 | .306 | 96 | 25 | 2 | 7 | 57 | 54 | 2 | 30 | .465 | .361 | |
2002 | 133 (1위) | 462 | .281 | 130 | 29 (3위) | 1 | 18 | 86 | 58 | 0 | 49 | .465 | .347 | |
2003 | 126 | 435 | .290 | 126 | 20 | 2 | 21 | 53 | 64 | 1 | 46 | .490 | .356 | |
2004 | 129 | 430 | .278 | 122 | 20 | 0 | 24 (5위) | 71 | 60 | 0 | 46 | .487 | .344 | |
2005 | 110 | 347 | .288 | 100 | 17 | 0 | 6 | 41 | 34 | 1 | 44 | .389 | .365 | |
2006 | 110 | 358 | .288 | 103 | 22 | 0 | 6 | 47 | 28 | 1 | 34 | .399 | .343 | |
2007 | 122 | 362 | .246 | 89 | 12 | 0 | 5 | 39 | 28 | 0 | 56 | .320 | .344 | |
2008 | 105 | 272 | .279 | 76 | 7 | 0 | 11 | 45 | 34 | 1 | 31 | .426 | .349 | |
2009 | 57 | 142 | .232 | 33 | 3 | 1 | 3 | 20 | 10 | 1 | 19 | .331 | .321 | |
2010 | 100 | 259 | .263 | 68 | 8 | 0 | 10 | 28 | 36 | 0 | 47 | .409 | .375 | |
2011 | 112 | 286 | .273 | 78 | 7 | 0 | 10 | 42 | 26 | 1 | 38 | .402 | .357 | |
2012 | 114 | 313 | .307 | 96 | 15 | 1 | 6 | 57 | 27 | 0 | 24 | .419 | .354 | |
2013 | 101 | 181 | .271 | 49 | 9 | 0 | 6 | 36 | 22 | 0 | 17 | .420 | .330 | |
2014 | 11 | 17 | .412 | 7 | 0 | 0 | 0 | 4 | 2 | 0 | 0 | .412 | .412 | |
2015 | 39 | 68 | .324 | 22 | 2 | 0 | 3 | 10 | 8 | 0 | 4 | .485 | .356 | |
KBO 리그 통산 (19시즌) | 1823 | 5242 | .276 | 1445 | 234 | 8 | 154 | 753 | 567 | 13 | 566 | .411 | .343 |
[1] 참고로 부산고 시절 1990년대 부산고 출신 에이스들이 대거 나타나는데 염종석-주형광-손민한 그 중에서 주형광과는 1992년 대통령배 우승, 황금사자기 준우승, 1993년 봉황대기 우승. 손민한과는 1992년 대통령배 우승과 황금사자기 우승을 했다. 이 때 그들의 볼을 받아 낸 선수가 바로 진갑용이었다.[2] 손민한과는 부산고부터 고려대까지 7년간 배터리를 했었다.[3] 원래는 롯데가 진갑용을 1997년 1차로 염두에 두고 1996년 드래프트 당시 한양대학교의 좌완 투수 차명주를 영입했다. 그렇지만 계약금 5억이나 받은 차명주는 선천적인 문제로 먹튀가 되었으며, 결국 다음 해인 1997년 드래프트 때 진갑용을 포기하고 손민한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4] 사실 이해는 이만수의 노쇠화로 포수난에 시달리고 있던 삼성도 대놓고 꼴찌 싸움에 가세할 정도로 막장의 정점을 찍는 중이었다. 물론 군기반장이었던 양준혁이 넌씨눈모드로 활약해서 6위로 마감했다.[5] 만약 홍성흔이 처음부터 지명타자였다면 두산과 삼성의 포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현재윤이나 최형우가 주전 포수를 맡았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6] 이만수 이후 삼성의 주전 포수 자리는 김성현, 박선일이 플레툰으로 뛰었는데, 둘 다 공수 모두 봐줄 만했지만 이만수보다 떨어졌다. 거기에 1996년 이후 세대교체 목적으로 김영진이 주전 포수가 되고서는 말 그대로 망했다. 결국 OB에서 김광현, 김지훈을 사오고,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영입하고, 김동수까지 FA로 질러야 할 정도로 포수진이 심각했던 상황.[7] 참고로 전년도인 2003년에 진갑용은 주로 8번 타자로 나왔다. 참고로 2003년 진갑용은 중심 타선이 아닌 7번~8번 타자로 활동했는데도 불구하고 홈런을 21개나 쳐냈던 바 있다.[8] 2011 시즌에는 다시 주장직에 복귀했다. 사실 2010 시즌 새로 주장을 맡은 강봉규가 부진해 2군에 내려갔을 때 진갑용이 임시 주장을 맡기도 했었다.[9] 당시에는 좋은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은 썩 좋지 않았던 양의지를 흔드는 3루 도루였다.[10] 외국인 선수까지 포함한 리그 전체로는 2007년 5월 10일 펠릭스 호세의 42세 8일이 최고령 홈런 기록이다.[11] 한화 이글스의 포수 조인성이 1년 남짓 후인 2016년 7월 7일(41세 1개월 12일) 홈런을 치면서 이 기록을 넘어섰고, FA계약 마지막 해인 2017년 6월 3일 이후로 홈런을 친다면 호세의 기록까지 넘을 수 있다. 이승엽이 만 42세 이전에 은퇴할 계획이기 때문에 이 부문 기록 경신 가능자는 가까운 시일 내에는 조인성 한 사람 뿐이다.[12] 그런데 은퇴할 당시에는 은퇴식까지도 당연히 한다고 봤는데, 어찌된 일인지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넘어가버렸다. 도핑 논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팀이 2015년 정규시즌 이후 초유의 사태로 인해 은퇴식을 해줄 분위기가 아니어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