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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0:16:19

칼 라거펠트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
파일:칼 라거펠트.프로필.jpg
출생 1933년 9월 10일
나치 독일 함부르크
사망 2019년 2월 19일 (향년 85세)
프랑스 파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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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8cm
직업 패션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학력 파리 의상조합학교
경력 1964년 끌로에 수석 디자이너
1998년 칼 라거펠트 갤러리 설립
수상 201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브랜드 칼 라거펠트 (설립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1984-2019)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1983-2019)
펜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1965-2019)

1. 개요2. 위상3. 생애4. 디자인 특징5. 어록6. 기타7.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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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fashiondesigner_lagerfeld_logo.png
파일:Karl Lagerfeld.jpg

독일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그의 디자이너 레이블의 이름.[1]

2. 위상

일명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였으며, 현대 하이패션아이콘 격인 인물이었다. 2~3년을 버티기 힘든 패션 디자이너 업계에서 54년간 펜디의 수장으로 있었고 동시에 80년대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2] 브랜드를 부활시키고 37년간 이끌었다. 오랜 기간 두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있으며 전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이끈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3]

3. 생애

1933년 9월 10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 오토 라거펠트는 함부르크에서 커다란 연유제조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라거펠트의 재능은 놀라워서, 3살 때 이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언제 만들어진 옷감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살 때인 1953년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파리 패션계에서 처음에는 삽화가로 일했다. 21살 때인 1954년에는 프랑스의 명문 패션 학교인 파리 의상조합학교로 입학했고, 같은 해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서 울코트 부문 1등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5]

그 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발망을 시작한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 밑에서 3년 반 동안 조수로서 일했고, 1958년부터는 쟝 파투를 사사하였다. 그보다 3살 어린 이브 생 로랑과 함께 파리에서 수많은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면서 젊고 전도유망한 디자이너로서 강력한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1963년부터는 쟝 파투에게서 독립하면서 마리오 발렌티노 등의 회사에서 자유롭게 일했다. 1964년 프랑스 브랜드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1965년부터는 이태리로 가서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에프’(F) 두개를 겹쳐 만든 펜디의 로고는 그와 펜디 가문의 운영진이 함께 만든 것.

1974년에는 독일에 자기 이름으로 칼 라거펠트 임프레션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 샤넬의 아트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1971년 사망한 뒤 침체를 겪던 브랜드 샤넬이었지만, 1983년 라거펠트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한 뒤부터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 라거펠트의 손을 통해 샤넬의 상징과도 같던 우아한 트위드 재킷은 젊은층까지 사로잡는 경쾌한 스타일로 변신했고, 하위문화의 상징이던 데님, 가죽 등의 소재로 만든 재킷 등도 인기를 끌었다. ‘C’ 두 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 마크를 의상이나 가방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라거펠트였다.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6], 그 후 37년 동안 샤넬=칼 라거펠트로 통할 만큼 롱런하며 샤넬을 이끌었다. 타임지는 2012년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명의 패션 아이콘들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2019년 2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으로 밝혀졌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그는 파리를 세계 패션의 수도로, 펜디를 가장 혁신적인 이탈리아 브랜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공헌을 한 창조적 천재였다'고 하며 그를 추모했다. 유산 상속자 중 하나로 반려묘를 지목했다.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칼 라거펠트가 죽은 해당 연도의 멧 갈라에서 칼 라거펠트의 유작인 핑크색의 샤넬 드레스를 입으며 그를 기리기도 했다.

4. 디자인 특징

CHANEL Fall-Winter 2019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샤넬 컬렉션

그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던 브랜드는 유명 명품 브랜드인 펜디샤넬, 그리고 자신의 디자이너 브랜드인 칼 라거펠트 3개이다. 가장 유명하면서 그의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샤넬. 코코 샤넬에 이어서 몇 십년째 계속 디자인을 맡았으며 샤넬하면 칼 라거펠트, 칼 라거펠트 하면 샤넬이라고 할 정도로 샤넬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군림했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샤넬의 집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샤넬에 내놓은 제품들은 상상 이상으로 기발한 것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옷을 만들 때 콘크리트를 박아넣어 예상치 못한 패턴을 짜넣는다든지, 14FW 컬렉션에는 종이용기에 가방을 넣고 랩핑을 해서 마트 정육점에서 산 고기 1팩을 연상시키는 가방까지 내놓거나, 레스토랑 메뉴판을 클러치백으로 내놓은 것 등이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다. 고령[7]에도 샤넬의 광고 캠페인은 본인이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하도 사진들을 뭐같이 찍는 데 분통이 터져서 직접 찍게 된 것이 프로가 되었다. 그래서 LVMH사 아르노 회장의 딸이 결혼할 때 사진사로 참여하기도.
파일:Chanel+SS+2019+Ad+Campaign+.jpg
칼 라거펠트가 직접 촬영한 샤넬 S/S19 광고

샤넬, 펜디에서 절정의 감각을 뽐내며 '역시 칼 라거펠트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옷들을 뽐낸 반면, 자신의 브랜드인 칼 라거펠트에서는 별로 힘을 못 써 여러 가지로 혹평을 많이 들었다. 역시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었다기 보다는 자기 레이블보다 샤넬이나 펜디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고 봐야 할지도. 원래 다른 디자이너들도 자기 브랜드보다는 고용되어 있는 브랜드에 신경을 많이 쓴다.

2004년H&M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한 바 있다. 2011년 s/s 시즌에는 토즈와 콜라보레이션한 상품을 토즈 브랜드로 내놓았다.

5. 어록

제가 말한 것들은, 제가 말한 그때에만 유효합니다.
제가 말한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지금 제가 말하는 것도, 내일이 되면 아마 기억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저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있을 테니까요!
엘레강스는 패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늙은이들은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패션의 독재자들입니다.
섹스는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장난감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진부한 소비상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디자이너의 옷으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도배를 하는 여자보다 패션테러리스트인 사람은 없습니다.
유행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합니다.
스트레스를 가지고 일을 하는 자는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일을 즐기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츄리닝을 입는다면, 삶의 통제를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는 인생이 경쟁이 되는 것과 그 경쟁의 결과물이 불공평인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육식을 하는 동안에는, 모피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마른 모델을 기용하는 이유는 고객이 마른 모델이 걸친 옷을 더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마른 모델을 욕하는 여자들은 소파에서 감자칩이나 먹으면서 투덜대는 뚱뚱한 여자들 뿐입니다.[8]
인생은 미인대회가 아니라서, 못생긴 이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은 있습니다. 내가 혐오하는 건 못생겼으면서 추잡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에요. 그중에서도 최악은 못생기고 키도 작은 남자입니다. 여자는 키가 작아도 괜찮지만 남자들은 안된단 말이죠. 키 작은 남자들은 키가 작다는 사실을 평생 떨쳐내지 못합니다... 전 제 평생에 키 작은 남자를 친구로 둔 적이 없습니다. 그들을 믿지 마세요. 비열한 데다, 당신들을 죽이고 싶어할 겁니다.[9]
열한 살 때, 어머니한테 동성애가 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답하셨다. 그건 결코 중요하지 않단다. 그냥 머리카락 색깔 같은거야. 금발이 있는가 하면 갈색 머리카락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지.
옷이 당신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기 전에, 당신이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먼저 고민하십시오.[10]

6. 기타

7. 미디어에서



[1] 부드러운 이미지를 위해서 '라거펠드'로 바꿨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독일어로 라거펠트, 영어로는 라거펠드가 되는 것뿐이다.[2] 오죽하면 패션업계에서는 그를 '샤넬의 황제'라고 부를 정도였다.[3] 실제로 동시대에 데뷔한 다른 디자이너들이 죽었거나 활동을 관뒀지만 늦은 나이까지 일한 것 자체가 놀랍다는 평가를 받았다.[4] 1938년생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나이를 낮추기 위해 한 얘기다.[5] 같은 대회에서 그의 경쟁자 이브 생 로랑은 이브닝드레스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6] '라거펠트 콘피덴셜'이라는 2007년작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 샤넬에 왔을 때를 회고했는데, '제가 샤넬을 맡았을 때 샤넬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았어요.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지요. 그녀는 코를 골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죽은 여인을 되살려야만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7] 앙드레 김보다 2살 많은 1933년생.[8] 이 발언을 하고 난 뒤, "아델이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너무 뚱뚱하다" 발언도 하는 바람에 논란이 되자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9] 2003년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Vogue | Keep it short[10] 이 발언은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 취임 선언을 패러디한 것이다.[11] 본인이 스키니진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인지 "패션은 다이어트의 가장 강력한 동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체중 감량이 점점 더 어려운데 엄청난 자기관리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