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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03:48

쿠로야나기 테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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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ness World Records
Most TV talk show episodes hosted by the same presenter
(같은 사회자가 진행한 가장 많은 TV 토크 쇼 에피소드)
대상 기록 장소 등재 시일
쿠로야나기 테츠코
10000회
도쿄
기네스 등재 기록 링크


<colbgcolor=#000><colcolor=#fff> 쿠로야나기 테츠코
[ruby(黒柳, ruby=くろやなぎ)] [ruby(徹子, ruby=てつこ)] | Tetsuko Kuroyanagi
파일:kuroyanagitetsuko_art.jpg
출생 1933년 8월 9일 ([age(1933-08-09)]세)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아카사카구 노기자카
(現 도쿄도[1] 미나토구 노기자카)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방송인, 배우, 작가, 사회운동가
수훈 서보중수장 (2003년)
문화공로자 (2015년)
현직 유니세프 국제친선대사 (1984~)
세계자연기금 일본 고문
서명 파일:쿠로야나기 테츠코 서명.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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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동양음악학원[2] (성악과 / 졸업)
데뷔 NHK 방송 극단 (1953년)
활동 기간 1953년 – 현재
장르 라디오 드라마, 드라마, 연극, 영화
혈액형 A형
가족 아버지 쿠로야나기 모리츠나[3] (1908년 6월 20일~1983년 4월 30일)
어머니 쿠로야나기 죠[4] (1910년 9월 6일~2006년 8월 16일)
남동생 쿠로야나기 노리아키[5]
여동생 쿠로야나기 마리[6]
큰아버지 타구치 슈지[7][8]
소속사 요시다 나오미 사무소
애칭 토토짱(トットちゃん)[9]
역임 직위 팬더보호협회 명예회장
사회복지법인 아유미상자 이사
일본펜클럽 회원
치히로미술관 도쿄 관장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 부이사장
일본채플린협회 명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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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등학생 시절2.2. 데뷔 이전까지의 행보2.3. 일 중독 배우2.4. 연기 유학2.5. 테츠코의 방, 그리고 지금까지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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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여성.
— 도널드 리치 (미국의 일본 연구가)출처
일본배우, MC, 수필가, 평화운동가. 일본의 1세대 원로 TV 연예인이다.

일본 탤런트선구자적인 존재로 오랜 세월 동안 현역으로서 방송계 최정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원로급 MC 및 여배우로 대접받고 있으며, 반전 운동과 유니세프 친선대사와 팬더 보호활동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기도 하다. 테츠코 본인이 유니세프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것들을 적은 수필을 모은 《토토의 눈물》이란 책도 있다. 일본의 연기자 및 예능계 인사들 중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1933년생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재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프로그램은 1954년 처음 주연을 맡았던 얀보, 닌보, 톰보1961년부터 1967년까지 방송했던 《꿈에서 만납시다(夢であいましょう)》, 1971년 방송된 드라마 《마유코 혼자서(繭子ひとり)》, 1976년부터 지금까지 [age(1976-01-01)]년째 방송되고 있는 테레비 아사히의 토크 프로그램 《테츠코의 방》[10][11]1978년부터 1989년까지 쿠메 히로시 등과 진행한 TBS 테레비의 《더 베스트 텐》이다. 《테츠코의 방》은 매 회 여러 분야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하여 대화하는 구성의 프로그램으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진짜 유명인이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존재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2. 생애

2.1. 초등학생 시절

※ 이 문단은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어린 시절을 그린 책 《창가의 토토[12]를 참고해 작성되었다.

1933년 도쿄도 미나토구 출생으로, 아버지는 NHK 교향악단의 악장을 역임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성악가이자 수필가로 활동하였다. 여동생 마리도 발레리나와 수필가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는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와 학습장애 등 온갖 안 좋은 수식어가 따라붙은 문제아였다.[13][14] 이러한 점 때문에 학교의 단체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테츠코는 7살의 나이에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퇴학을 당했고, 이후 당시 지유가오카역 근처에 있던 토모에 학원[15]이라는 일종의 대안학교에 입학한다.

폐차 직전의 전철 차량을 개조[16]해서 학교 교실 대용으로 쓰고 있던 토모에 학원은 전교생 50명 정도의 작은 학교였지만, 태평양 전쟁 열기로 미쳐 있었던 일본에서 군국주의, 전체주의 교육과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수업을 추구하고 있었다.[17] 테츠코 또한 토모에 학원의 자유로운 수업 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며, 《창가의 토토》에서 나오는 몇 가지 일화를 통해 토모에 학원의 교육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 어떻게 이런 학교를 그냥 놔뒀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나중에 테츠코는 토모에 학원의 교장 코바야시가 매스컴을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학교의 인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학교가 유지될 수 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과정에서 토모에 학원은 도쿄 대공습 때 폭격으로 불타버렸고,[20] 자기 학교가 불타는 것을 아들과 함께 목격한 코바야시 교장은 "얘야, 다음엔 어떤 학교를 만들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바야시 교장은 전쟁 이후 그의 교육 방식을 실현할 학교를 다시 세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69세였다. 사후 그의 자녀들 중 막내딸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그렇지만 토모에 학원은 테츠코를 포함한 다른 졸업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창가의 토토》의 작가 후기에 따르면 토모에 학원의 졸업생들[21]은 졸업 이후에도 매년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 《창가의 토토》는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된 책이므로 현재까지도 원년 멤버들이 모두 모일 지는 불명이다. 작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배우 이케우치 준코가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동급생이었지만 2010년에 사망했다.

토모에 학원이 폭격으로 사라진 이후 테츠코는 가족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오모리현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 때 생긴 버릇이 밥을 빨리 먹는 것이라고 한다.

2.2. 데뷔 이전까지의 행보

토모에 학원 이후에는 고란 여학교를 거쳐서 1952년 도요 음악학교 성악을 전공했으며,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의 청강생으로 수강한 이력도 있다. 당초에는 오페라 배우를 꿈꿨지만 이루지 못했고 NHK 방송극단과 분가쿠지를 거쳐 1953년 배우로 데뷔하였다. 아이들에게 책을 잘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 때문에 배우로 데뷔했다고 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NHK 방송극단의 면접을 볼 때 일화가 있는데, 면접을 보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실언[22]을 했지만, 당당하게 합격했다.

배우로써는 일본 최초로 TV 방송에서 얼굴을 비춘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NHK의 시험방송을 촬영할 때는 얼굴의 양쪽을 청백색으로 나눠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23] 그러나, 신인들이 거의 그렇듯이 당시의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그저 갓 데뷔한 무명 신인 연기자였다.

이 부분은 2023년 발매된 속 창가의 토토에서 다뤄진다.

2.3. 일 중독 배우

상술된 바와 같이 라디오, TV 프로그램의 눈에 띄지도 않는 조연으로 무명 생활을 지내다가 정식으로 그녀가 방송에 이름을 드러낸 건 다름아닌 성우로서였다. 바로 1954년 4월부터 방송된 NHK 라디오 드라마 얀보, 닌보, 톰보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된 것이다. 거기서 처음으로 주연인 톰보라는 어린 원숭이 캐릭터를 맡게 되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성우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성인 여성이 최초로 아역을 연기한 케이스라는 것이다![24] 이는 당시 이 방송의 작가였던 이이자와 타다스[25]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성인인 성우가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제작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26][27]

이후 주로 어린이 프로그램과 젊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 쇼 프로그램에 간판 연기자로써 매일 방송[28]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1958년에는 제 9회 홍백가합전의 '아카구미'(홍조) 사회자가 된다.[29] 또한, 1961년 일본 방송작가협회의 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TV 프로그램에 빠져서는 안 될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더욱이, 1950년대부터 일본의 민영방송들이 속속 개국하면서 드라마를 비롯해 예능프로그램의 진행자 또는 출연자로써 바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2.4. 연기 유학

이렇게 배우와 사회자로써 15년이 넘게 큰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1971년 4월부터 방송되었던 NHK 아침연속극 '마유코 혼자서'(繭子ひとり)에 시골 출신 가정부 '타구치 케이' 역을 맡아 초반 6개월 동안 출연해 연기를 한다.[30]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하얗게 머리가 센, 두꺼운 안경을 낀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출신 가정부로 분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이 휴식을 강하게 원해 이 드라마를 끝으로 돌연 미국 뉴욕으로 1년간 연기유학을 떠난다.

이 때 '마유코 혼자서'의 반응이 너무 뜨거워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자 '타구치 케이는 어디로 갔냐'는 문의가 빗발쳐 '도쿄에 사는 의사가 그녀를 데리고 뉴욕으로 갔다'는 설정이 추가되었으며, 1971년 12월 '타구치 케이'가 뉴욕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시청자들의 요청에 의해 그녀의 뉴욕 생활을 담은 영상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 때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똑같은 가정부 분장을 하고 영상을 찍어 보냈다고.[31]

2.5. 테츠코의 방, 그리고 지금까지

유학 이후, 드라마에 다시 복귀한 그녀는 1976년 그 유명한 테츠코의 방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배우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본인 스스로 테츠코의 방을 오랜동안 진행하면서 얻은 진행자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그녀 특유의 양파 모양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지금까지 늘 같은 시간에 같은 헤어스타일로[32] 방송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27일 1만회 방송[33]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기네스에 오른 뒤에도 자신이 세운 기록을 계속 경신중이다.

테츠코의 방 제 1회 출연자는 '시레토코 여정'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겸 연기자인 모리시게 히사야였는데, 방송 중간에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가슴을 만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외국인 출연자로는 장근석, 레이디 가가 등이 있으며, 성우는 1979년 야마다 야스오가, 1986년 히로카와 타이치로, 1997년에는 하야시바라 메구미가 출연했다.#

이후로도 더 베스트 텐과 세계 불가사의 발견 등 굵직굵직한 방송에 출연하며 2021년 현재 만 88세의 나이에도 현역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국민적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에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은 사람은 아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담아 대안교육에 대해서 다룬 책인 창가의 토토[34]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베스트셀러인데 정작 책의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방송인으로서 그녀의 독보적인 입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

토크쇼 예능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사전에 출연자가 방송 작가와 협의해 대본을 만들고 찍는 경우가 많은데 테츠코의 방은 출연자 대본이 없다. 테츠코가 작가들과 협의해서 사전에 할 질문 같은 걸 메모해 놓고 테츠코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 붙여놓으며 그걸 보고 진행한다.[35] 그래서 일본 최고 경력의 진행자의 방송치고 토크가 이상하게 진행되기도 하고[36], 테츠코가 출연자의 발언에 당황하기도 하며, 방송 사고 수준의 화면[37] 이나 발언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자연스러운 대화를 즐기는 토크 쇼이다. 출연자의 반응은 제각각인데 대본이 없어 힘들었다는 출연자도 있고 친할머니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아 편하고 좋았다는 출연자도 있다.

3. 여담

벤츠를 몰 때는 조용히 가더니 이제는 횡~ 하고 지나가더라고요.
쿠로야나기 테츠코, MBC 스페셜 '당신의 다음 차는 무엇입니까 중에서

[1] 2017년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도민에 임명됐다.[2] 현 도쿄음악대학[3] 黒柳守綱, NHK 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를 역임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4] 黒柳朝, 수필가였다.[5] 黒柳紀明, 바이올리니스트. 1940년생.[6] 黒柳眞理, 발레리나이며 수필가. 1944년 4월 19일생.[7] 田口修治, 니혼 뉴스의 뉴욕 지사장과 아메리카 메트로 뉴스의 극동대표를 역임했었다. 1905년 출생, 1956년 사망.[8] 토토 아버지의 바로 윗형이다. 친형제인데도 성이 다른 이유는 토토 아버지만 자신의 어머니(토토의 할머니)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9] 이는 어린 시절 본인이 스스로 만든 별명으로 '테츠코'라는 자기 이름을 어린 나이에 발음하기 힘들어 만든 애칭인 듯하다.[10] 특유의 오프닝 사운드가 엄청난 중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 애니메이션 쓰리몬에서는 일종의 막간 코너인 《야벳치의 방》으로 패러디 되었는데, 심지어 오프닝 사운드마저 깨알같이 패러디했다.[11] 간혹 외국 연예인들도 초청되기도 한다. 한류 열풍이 일본에서 뜨거울 때는 장근석배용준, 레이디 가가(!)가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배용준이 출연할 때는 간단한 한국어로 인사까지 했다.[12] 1992년 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현 효리원)을 통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학교》란 제목으로 처음 나왔으며,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전부 한국식으로 수정됐다. 80년대 중반에 이미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식 계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13] 책상 뚜껑을 신기해 해서 수시로 쾅쾅 여닫거나(당시 책상은 서랍식이 아니라 책상 윗부분을 들어올려서 물건을 꺼내는 방식이었다.) 수업을 듣다 말고 창가에 서서 바깥에 있는 사람 또는 나무 위의 새에게 말을 걸거나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서 깃발의 술을 표현한다고 도화지에 색을 다 칠하고 책상 면 위로 술 부분을 직직 긋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14] 그녀의 특이행동은 일부 현재 진행중이라 쟈니스의 콘도 마사히코의 증언에 따르면 같이 쇼핑을 하러 갔을 때 가게에 있는 모든 인형에게 말을 걸어 시간이 장난 아니게 걸려서 곤란했다고 한다.[15] 학원의 이름에 붙은 '토모에'는 세 가지 무늬가 한데 어우러진 형태의 문양이며,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임을 상징한다. 《창가의 토토》의 작가 후기에 따르면 역 근처에 있는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점(2021년 폐점)이 토모에 학원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88년에는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점 앞에 과거 이 곳이 토모에 학원이 있던 곳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관련 기사[16] 학부모 중 전철 회사의 중역이 있었는데, 이 학부모의 도움으로 폐차 예정이던 전철 6량을 가져와 교실로 썼다고 한다.[17] 수업방식부터가 특이했다. 보통 학교에서는 과목별로 수업시간을 나눠서 공부를 하는데, 담임이 칠판에 과목 상관 없이 그 날 배울 내용으로 여러 주제나 문제를 적어내고는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골라서 공부하도록 했다.[18] 소아마비 학생은 졸업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다. 더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지병이 있었던 모양. 창가의 토토에 나온 이름에 따르면 해당 학생의 이름은 야스아키.[19] 여담으로 이전까지 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군인들이 토토의 노래를 들은 후 울었다는데, 전쟁으로 먹을 것이 줄어드는 등 삭막해지는 와중에도 천진난만하게(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식사 노래를 부르는 토토가 인상깊었던 듯하다.[20] B-29 폭격기가 학원 건물 상공에 잠시 머물러서 폭격을 했다는 묘사가 있다. 토모에 학원은 전철 차량을 건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을 차량기지로 오인하여 폭격한 것으로 보인다.[21] 후기에 나온 테츠코의 동창생들은 평범한 가정주부부터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근무하는 물리학 교수까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리학 교수가 된 야마노우치 타이치(山内泰二)는 토토의 첫 사랑이라서 창가의 토토에서도 자주 출연했다.[22] "부모님께 이 일(면접)을 말씀드리면 꼴불견이라고 말할 것."이라던지, "어머니가 이 세상엔 사기꾼들이 많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말했다."는 둥, 면접관 앞에서 면접관을 까는 ...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23] 이 모습은 사이토 유키가 주연한 영화 《토토 채널》(トットチャンネル, 1987년)에서도 재현되었다.[24] 즉, 이 분을 시작으로 여성 성우가 아역 연기도 가능하다는 걸 입증이 되어서 그 이후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아역 담당 성우는 여성을 세우고 있다. 물론 예외인 남성 성우들도 여럿 있지만...[25]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스승으로 모신 작가다.[26] 이 방송은 1957년 3월 31일까지 방송되었고, 마지막회의 방송 녹음본이 현존하며, 1995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송된 적이 있다.[27] 이 때 쿠로야나기 테츠코 이외에도 주인공 역을 맡았던 사토미 쿄코, 요코야마 미치요와 함께 'NHK 세 자매'라고 불리우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28] 정말 매일 출연했다. 당시 NHK에서 방송하던 월요 드라마부터 일요일 밤 음악 프로그램까지 매일 방송에 나왔으며, 본인의 회상으로는 메이크업과 분장도 자신이 스스로 해야 했고 심한 경우 6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방송에 출연해 과로로 쓰러진 적까지 있다고 한다. 당시 방송 환경이 열악하여 대본도 늦게 나오고쪽대본? 리허설에 방송 한 편 내 보내면 거의 하루 일과 시간을 다 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29] 이후 1980년부터 1983년까지 4회 연속 홍백가합전의 사회를 보게 되며, 2015년에는 종합사회자로 활약한다. 총 6회 출장.[30] 이 때 아오모리에서 겪었던 피난생활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역할을 맡았던 타구치 케이의 고향이 아오모리로 설정되었다.[31] 검색해 보면 잡지에 실린 사진이 남아 있다.[32] 물론 의상은 늘 바뀐다. 몇 년 전까지는 자신이 직접 의상을 골라 입었으나, 최근에는 코디네이터가 의상을 골라준다고.[33] 이는 지난 2011년 8961회 때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엎은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34] 1981년 발행된 책으로 세계 35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누적 판매부수 800만부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이다. 후속작으로 토토의 눈물, 토토의 창, 토토의 친구들, 어른이 된 토토쨩, 이상한 나라의 토토 등이 있고 모두 명작으로 인정받는 에세이들.[35] 테츠코가 질문을 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이걸 읽으므로 방송에선 테츠코가 질문하는 화면은 잘 보여주지 않고 질문을 듣는 출연자의 모습을 비춘다. 테츠코가 질문할 때 테츠코가 화면에 잡히면 그 질문은 테츠코의 애드립이다.[36] 테츠코의 나이가 나이라 방송 중간에 자신의 발언을 잊고 딴 소리를 하기도 한다.[37] 마츠다 유사쿠, 이시하라 유지로는 테츠코의 면전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토크를 하기도 했다. 당시엔 TV에서 흡연 장면이 나오는 걸 금기시하지 않았고 테츠코가 평소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해서 한 것이므로 무례한 것은 아니다.[38] 서브컬처에서는 토오루라는 이름의 여자 캐릭터가 꽤 많아 헷갈릴 수 있으나, 현실에서 토오루는 거의 남성에게만 쓰이는 이름이다. 그나마도 徹는 거의 쓰지 않고 透가 많이 쓰이는 편.[39] 쿠로야나기 테츠코 본인이 이야기한 것.[40] 1979년 아츠미 키요시가 테츠코의 방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후 여러차례 출연을 요청해도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41] 마침 아츠미 키요시의 사망 발표일이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생일인 8월 9일이어서 엄청 슬퍼했다고 한다.[42] 이렇게 에이 로쿠스케의 방송을 출연하며 알게 된 아나운서가 이후 더 베스트 텐의 파트너가 되는 쿠메 히로시이다.[43] 이 방송에는 역시 명 MC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오하시 쿄센도 출연했다. 안타까운 것은 에이 로쿠스케도, 오오하시 쿄센도 지난 2016년 7월 세상을 떠났다는 것.[44] 테츠코의 방 이외의 방송에서는 간혹 바뀐 헤어스타일이 나오지만... 기본형은 역시 양파.[45] @tetsukokuroyanagi[46] 자신이 100세가 되면 정치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47] 위에서 설명한 토모에 학원에서의 자유분방한 교육과 진보적인 성향이였던 부모(《창가의 토토》에서 토토의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을 동정하는 장면이나,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토토의 아버지가 군국주의 관련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의 영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48] 1980년 데뷔한 밴드로, 1983년 '랫츠 & 스타'로 밴드명을 개명했다. 데뷔 당시 밴드의 멤버들 모두 얼굴을 검게 칠하고 활동을 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49]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첫 해외 한복 패션쇼를 열었고, 1993년부터 12년 동안 파리 컬렉션에 진출해 한복을 알린 세계적인 디자이너이다.[50]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탄생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집 근처에 조선인 마을도 있었다. 《창가의 토토》를 보면 그녀의 어머니가 차별당하는 조선인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묘사가 있으며 그녀 본인도 어머니에게 '조선인 아이든 일본인 아이든 다 같은 어린이니까 차별해선 안된다'고 가르침 받은 듯하다.[51] NHK 종합에서 7주간 토요일 8시 15분부터 방영[52] 제 아무리 방송에서 쓴 소리를 쏟아내고 사과를 잘 안 하고 간사이 라디오에서 싫어하는 사람을 씹는 카미누마라도 쿠로야나기 앞에서는 아예 그럴 수가 없다. 심지어 카미누마는 20년간 한 뒷프로그램 MC다. 쿠로야나기는 44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