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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만화)/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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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과거3. 기원전 245년(시황제 2년, 1권 ~ 10권)4. 기원전 244년(시황제 3년, 11권 ~ 16권)5. 기원전 243년(시황제 4년, 17권 ~ 18권)6. 기원전 242년(시황제 5년, 18권 ~ 24권)7. 기원전 241년(시황제 6년, 24권 ~ 33권)8. 기원전 240년(시황제 7년, 34권)9. 기원전 239년(시황제 8년, 34권 ~ 38권)10. 기원전 238년(시황제 9년, 38권 ~ 41권)11. 기원전 237년(시황제 10년, 41권 ~ 46권)12. 기원전 236년(시황제 11년, 46권 ~ 60권)13. 기원전 235년(시황제 12년, 60권 ~ 62권)14. 기원전 234년(시황제 13년, 62권 ~ )15. 기원전 233년(시황제 14년, )16. 기원전 232년(시황제 15년, )

1. 개요

킹덤의 줄거리를 정리한 문서.

하단 줄거리의 연표는 실제 역사가 아닌 킹덤의 진행 상황에 따라 서술한 것임을 밝힌다.(괄호 안은 해당 권 및 화)
실제 역사서(《사기》)에서도 당시의 기록에는 각 나라마다 충돌이 많으며, 1년 정도의 일은 앞과 뒤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실제 역사와의 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 각 문단에서 굵은 글씨는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작품이 현재까지 연재 중이기 때문에, 내용 입력이나 수정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단행본 발행이 아직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곳도 있으므로 문서 작성 시 유의해주길 바란다.

2. 과거

기원전 262년: 진나라와 조나라의 전쟁 발발.

기원전 260년: 진나라 육대장군 백기가 조나라 포로 40만명을 산 채로 파묻어버리는 것으로 2년 동안 이어졌던 장평대전이 끝나다.[1]

기원전 259년: 조나라 도성 한단에서 진나라 왕족인 영정이 탄생했는데, 장평대전의 원한으로 인해 어머니와 함께 조나라 백성들에게 갖은 박해를 받으며 성장하다.

기원전 252년: 전신(戰神)이라 불리던 진나라 소왕 사망.

기원전 251년: 여불위의 의뢰를 받은 상인 시카 일당에 의해 영정의 구출 작전이 시행되고, 관계자 전원의 목숨을 댓가로 영정은 살아남았으며, 지원을 나왔던 창문군, 벽 일행과 함께 함양에 도착하였다.(7권 74화 ~ 8권 82화 앞 부분)

기원전 246년: 영정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르다.

3. 기원전 245년(시황제 2년, 1권 ~ 10권)

춘추전국시대 중원 서쪽의 진나라의 어느 시골에서 노비 신분인 신과 표가 대장군이 되기 위한 무예를 닦고 있었다. 그러던 중, 표는 진왕 영정과 닮은 외모로 인해 창문군을 통해 궁으로 불려갔다. 한 달 뒤, 표가 왕제 성교의 반란[2]에 휘말려 사망하게 되고, 신은 표의 유지를 잇기 위해 영정의 암살을 막으려 뛰어든다. 영정과 그의 측근인 창문군, 그리고 무법지대였던 흑비촌의 소녀 하료초와 함께 신은 자객들과 추격군을 따돌리고, 승상 갈 씨와 손을 잡고 함양을 장악한 왕제 성교에 대항하기 위해 산계로 가서 산민족의 왕 양단화를 설득을 하는 데 성공하게 되며, 이들과 함께 함양으로 돌아온 영정과 신 일행은 수많은 자객 집단과의 악전고투 끝에 왕제와 갈 승상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고, 신과 하료초[3]는 그 보답으로 풍리라는 곳에 집이라 하고 오두막과 땅을 얻게 되었다.(1권 ~ 5권 47화)

반란 진압 이후, 위나라의 형양을 차지하기 위한 군대 모집에 신은 지원하게 되었고[4], 미덥지 못하지만 경험이 많은 오장 택규을 중심으로 같은 마을 출신인 미평, 미도 형제, 수수께끼의 인물인 강외와 함께 오(伍)를 이루어 참전하게 되었다. 진의 대장군 급의 인물 중 하나인 표공 장군 휘하 제4군에 배속되어 사감평원에서의 전투에 참여[5]하게 된 신은 위나라의 강력한 전차 군단과 '전국사공자' 중 한 사람인 신릉군의 식객장이던 위의 대장군 오경의 지략에 고전하게 되지만, 자신의 기지와 신기에 가까운 강외의 검술을 조력 삼아 천인장 박호신과 함께 적장 궁원을 죽이고, 그가 지키던 요지를 함락시키는 대공을 세우게 된다. 이후 전장에 나타난 전(前) 육대장군 왕기[6]에게서 전쟁에 대한 조언을 받고, 이후에 다시 벽과 함께 다시 전장 한복판으로 나가 표공을 처단하려던 오경의 측근 주귀를 베게 된다. 표공이 오경을 무찌르긴 했지만, 많은 피해를 입은 탓에 물러난 이 전투의 결과로 신은 단번에 백인장으로 승격이 되면서, 마을의 자랑[7]이 되었다.(5권 48화 ~ 7권 73화, 8권 82화(앞 부분과 뒷 부분 제외))

승상 여불위에 의한 영정 암살 계획이 발동되어 영정 휘하의 다수의 신료들[8]이 수 많은 암살 조직들에 살해된 가운데 강외가 천 년 전부터 내려온 어둠의 정점인 치우로 밝혀졌다. 영정의 암살을 막기 위해 사 씨의 연락을 받고 궁궐에 들어와서 다시 암살 조직들과 싸우는 신이었지만, 암살자들 중에 하나였던 강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다른 암살 조직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둘 다 사력을 다해서 힘을 합치면서 암살 시도를 막았다.[9] 하지만, 압도적인 세력 차이로 인해서 암살 배후였던 여불위가 자백함에도 불구하고 농담이라며 받아 넘기고 방면하게 되었다. 이에 영정은 압도적인 세력 차를 줄이기 위해서 원한을 잊고 과거 갈 씨 휘하에 있으면서 왕제의 반란에도 가담했던 사 씨를 영입해 세력을 키울 준비에 들어갔고, 군대에서의 승진[10]을 열망하게 된 신은 왕기 장군을 찾아가 휘하에 들기를 원했지만, 무국적 지대의 평정이라는 임무를 받고 소수민족의 치외법권 지대에 씨와 함께 버려지게 되고, 하료초는 강외의 추천으로 창평군의 군사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8권 82화 뒷 부분 ~ 10권)

4. 기원전 244년(시황제 3년, 11권 ~ 16권)

2월, 진나라의 대장군 몽오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전국칠웅 중 약소국이던 한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 진나라의 요충지 마양을 조나라가 방난을 총대장으로 삼아 12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게 된다. 이에 진나라는 작년 위와의 형양 전투 당시 징병해 싸웠던 농민들[11]을 포함해서 전 지역의 장병이라 쓰고, 농민들을 동원해 10만 명을 모아서 왕기를 총대장으로 몽무를 부장으로 삼아서 수비군을 편성해 마양으로 파견한다. 4달 만에 무국적 지대를 평정한 신도 이 대열에 합류해 미평, 미도, 택규, 전유 등을 오장으로 하는 백인대의 장으로써 참전하게 되었고, 영정 암살 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던 강외도 원수(유련)가 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합류하게 된다. 출전에 앞서 왕기는 영정에게 소왕의 전언을 전하고, 창문군과는 과거사를 털어놓으면서 자신이 왜 마양으로 가는지를 알려줬다. 그리고, 왕기가 출전한 이후, 조군 총대장이 방난이란 걸 안 이후에 놀란 창문군은 영정과 여불위를 비롯한 모두에게 지난 일[12]을 알려주자 영정은 방난과 왕기 둘 다 마양 전투에서 상대방을 없애기 위해서 나서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낸다.(11권 108화 ~ 117화)

마양에 도착해 근처 건원에 진을 친 양군은 배치를 마친 상태[13]에서, 진군 중앙의 몽무와 조군 좌군의 섭맹이 앞장서서 공격하고, 그 와중에 신이 이끄는 백인대는 왕기 장군에게서 비신대라는 부대명을 받고 그의 특명으로 백인대가 소수라는 점을 이용해서 큰 희생[14]을 치르면서도 조나라 장군 풍기를 베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튿날 이후부터는 몽무의 예상을 뛰어넘는 위력으로 조 중앙군을 격퇴할 뿐만 아니라, 왕기의 작전까지 더해져 조군의 본진이 뒤로 후퇴했다.(11권 118화 ~ 13권 134화)

하지만, 이는 조군의 함정이었고, 이후, 조나라 삼대천이자 총대장인 방난이 등장해 무위를 떨치면서 비신대는 미도를 포함해 일부 병력들을 잃게 되었고, 또 다른 삼대천 이목까지 참전하면서 궁지에 몰린 왕기는 결국 방난과의 일기토 와중에 치명상을 입고, 구원해준 신에게 자신의 창을 물려주고 사망한다. 왕기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이목은 주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후퇴, 조나라는 마양의 포위를 풀고 회군했으며, 왕기의 죽음을 전해들은 진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영정은 창문군에게 출진 전 자신에게 전한 왕기의 말을 전하며 흐느겼으며, 한 달 후에 복귀한 신 역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13권 135화 ~ 16권)[15]

5. 기원전 243년(시황제 4년, 17권 ~ 18권)

마양 전투의 공적으로 삼백인대가 된 비신대는 특수 부대로서 주변에 쳐들어오는 소규모 적군들을 격퇴하면서 명성을 차츰 얻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연나라와 조나라의 전쟁이 발발했고, 그 와중에 승상 여불위의 계략[16]으로 인해서 조나라 재상 이목이 진나라 수도 함양을 방문. 여불위와 대면하게 되었다. 결국 진나라는 위나라와, 조나라는 연나라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한 상호 간의 불가침 조약인 진조동맹이 맺어진다.[17] 이후 연회장에서 이목과 대면한 신은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18], 이내 이목에게 "당신을 쓰러뜨리는 것은 바로 나야!"라는 좌중을 떼굴멍하게 만든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창문군에게 질질질 이후, 영정과 만난 신과 하료초는 각자가 진행하고 있는 상황을 털어놓는데, 영정은 그 자리에서 5년[19]안에 여불위를 제압할 것이며, 그 때 신은 자신의 호령을 받는 장군이 될 수 있냐고 묻는다.(17권 174화 ~ 179화)

이후, 비신대는 좀 더 맹위를 떨치면서 위나라 공략에 나서고[20], 그 과정 속에서 신의 비신대와 함께 왕분이 이끄는 옥봉대와 몽염이 이끄는 낙화대가 등장하면서 진군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함양에서는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후궁 세력이 등장하면서 대왕(영정) 진영과 여불위 진영의 신경전이 펼쳐진 가운데, 후궁 쪽에서 사 씨에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두루마리[21]를 전하면서 대왕 진영에는 의도가 무엇인지 전전긍긍하는 사이, 홀로 태후에게 간 영정은[22] 태후에게 요청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태후 세력은 여불위 진영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처럼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대왕 진영이지만 영정은 여불위와 태후, 두 사람의 간통을 빌미[23]로 정치적 공세에 나서게 되었고, 위기 속에서 여불위는 태후와 밀회를 하며 진의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야망을 품게 된다.(17권 180화 ~ 18권 188화의 ⅔)

6. 기원전 242년(시황제 5년, 18권 ~ 24권)

본격적으로 시작된 위나라의 산양성 공략에서 진나라는 몽오를 대장군으로 하여 왕전환기라는 두 부장과 함께 공격해갔으며, 비신대와 옥봉대, 낙화대는 몽오가 이끄는 본진에 같은 예비군에 소속되었다. 첫 전투인 고량성에서는 정란차를 동원한 옥봉대와 빠른 기습을 감행한 낙화대가 차지했으며, 아무 전공이 없던 비신대는 그 곳에서 민간인 약탈을 하던 다른 부대를 제압하면서 "자신들은 민간인들을 괴롭히지 않겠다." 라고 선언함으로서 진군 내부와 위나라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24] 그리고 이러한 진나라의 공세에 맞서 위나라에서는 망명해 있던 전(前) 조나라 삼대천 염파가 출전하게 되었고[25], 그의 최측근 즉, 염파 사천왕 중 하나인 윤호에 의해 근리관에서 진군은 천인장 곽비, 장군 나원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장교들을 잃었다. 과거 진의 육대장군과 함께 중화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염파가 위군의 장수로 나선다는 소식[26]에 그에게 수 십 년간 패배해왔던 몽오는 우연히 만난 신에게[27] 일발역전의 기회라는 격려를 받게 되고, 다음 날 공석의 된 천인장들을 대신해 왕분, 몽염, 신을 임시로 천인장으로 발탁하게 된다.[28](18권 188화의 후반 ⅓ ~ 19권 200화)

임시나마 천인대가 된 비신대는 초수를 중심으로 한 옛 곽비대 700명을 편입했으며, 역시 천인대가 된 낙화대, 옥봉대와 함께 산양 근처에서 염파가 이끄는 위군과 맞서게 되었다. 그 와중에 강외는 신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상 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번 전투 이후에 잠시 떠나있겠다고 말한다. 이윽고 전장인 산양 인근인 유윤 평야에 도착해서 몽오의 부장인 왕전과 환기를 본 신은 근처에 있던 몽념에게서 이 둘이 왜 이름이 널리 알리지 않았는지[29] 알게 되었다. 전투 초반에는 윤호의 무위와 현봉의 지략에 중앙군의 상당수 부대들이 궤멸 직전까지 왔지만, 이후에는 중앙보다는 진은 왕전과 환기, 위는 강연과 개자방이라는 두 부장의 군대가 서로의 본진을 노리는 전개가 되었다. 우측에서는 시체 훼손과 위나라 병사로 위장하여 본진을 급습, 위나라 군사 현봉의 목을 따는 환기의 변화무쌍한 전법이, 좌측에서는 결전을 회피하면서 아예 산성을 쌓아버려 염파조차 놀라게 만든 왕전에 의해 전선이 교착된 상황이었으며, 중앙을 맡은 윤호를 잡기 위해, 신, 왕분, 몽념 세 임시 천인장이 연합하여 협공하지만, 윤호의 압도적인 무위에 의해 실패하지만, 신에 의해 윤호가 부상을 입기는 했다.(19권 201화 ~ 21권 223화)

이후 최종 결전에서 윤동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돌파해 오는 윤호를 신이 막아서고, 결국 장군의 무에 대해 어렴풋이 각성한 신은 사투 끝에 윤호를 처치하는데 성공한다. 그 와중에 강외는 심각한 부상[30]을 입었고, 여기에 강연으로 하여금 왕전을 포위하게 하고 후방으로 돌아간 염파가 산성과 함정으로 무장한 몽오의 본진을 공략하고 몽오와 일기토를 벌이게 되자 신은 몽념과 함께 본진으로 올라와 몽오를 지키기 위해 염파와의 일전을 벌이지만, 압도적인 힘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윤호의 사망으로 중앙군이 막혔으며, 현봉을 제거한 이후에 사라졌던 환기의 부대에 의해 위군의 본진이 함락되었으며, 벽의 지원[31]과 함께 왕전의 부대가 건재한 것을 파악한 염파는 개자방이 지원해 진나라 본진을 파하더라도 결국 전쟁 자체의 승기는 넘어간 것을 깨닫고 위나라 병사들을 더 살리기 위해 몽오와 종전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몽오에게서 신이 왕기의 최후를 보고 그의 창을 물러받았다는 말을 들은 염파는 신에게 왕기의 최후가 어땠는지 물어보고 나서 윤호의 검과 함께 천하대장군이 가야할 길 즉, 중화의 통일에 대한 얘기를 신에게 알려준 이후, 전장을 떠난다. 이후 진군은 위나라로부터 빼앗은 산양 지역을 평정하게 되었고, 비신대는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중간에서 강외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이탈한다.(21권 224화 ~ 23권 242화)

염파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위나라에서 추방당하여 초나라로 망명하고[32], 진나라에서는 산양 전투의 논공행상을 벌여 신은 정식으로 천인장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신은 영정에게 염파하고 있었던 일을 들려주면서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다짐한다. 이후, 위와의 전장에 복귀했지만, 과거의 원한을 갚기 위해 강외가 이탈하는 바람에 전술의 부재[33]로 연전연패하던 비신대는 몽념의 도움으로 그의 동생 몽의를 군사를 들어오게 되는데, 정작 몽의 대신 비신대의 군사로 온 인물은 창평군에게 수업을 받고 신에게 돌아온 하료초였다. 처음에는 '굴러 들어온 돌'에다가 여자라서 신뿐만 아니라 일부에서 하료초를 못마땅하던 비신대였지만, 군사 빙귀를 위시한 위군에 의해 와해되기 일보 직전이던 위기의 순간에 하료초에게 작전을 넘기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후 하료초의 재능을 모두가 인정하고, 그 계기로 잃었던 지역들을 되찾으면서 재기에 성공한다.(23권 243화 ~ 249화)

이후, 진나라 조정은 창평군과 이사를 산양에 파견해, 그 곳을 동군(東郡)이라 명명하고 확고한 진나라의 영토로 삼겠다는 선언을 하며 진나라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친다.[34] 이후 비신대와 낙화대는 명을 받고 남쪽의 초나라 전선으로 떠나는데, 그 전에 신과 몽념, 그리고 왕분[35]은 서로 만나서 동군 선언의 의미를 생각해내면서 곧 닥쳐올 회오리를 예상하는데, 그러면서 초나 위가 아닌 조의 이목이 먼저 움직일거라고 신은 밝혔다. 한편, 이목 역시 동군 선언이 중화 통일을 향한 치명적인 한 수인 것을 간파하고 사전 작업으로 방난을 대장으로 십만 군대를 움직여 연나라를 공격한다. 초(楚)와의 전선에서 조와 연이 전쟁을 치른다는 소식을 들인 신은 하료초에게 연이 어떤 나라인지 듣게 된다.[36] 극신과 상대하던 이목은 자신의 지략을 역이용해 몸소 공격해 나선 극신에게 위기를 당하지만, 방난을 이용해 극신을 제거하고 하루만에 승리한다. 남쪽 전선에서 그 소식을 들은 진·초 양군은 이목에 대한 평가와 함께 서로 대치를 하고 있었다. 초군 천인장 항익의 도발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일기토를 벌인 신은 중화십궁 중 하나인 백려가 항익을 지원하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천인장들이 초나라에 있다는 것에 생각하면서 하료초에게서 초나라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다.(23권 250화 ~ 24권 253화)

한편, 진나라 함양에서는 후궁에 환관으로 분장한 노애가 태후의 밤 상대로 보내지면서 여불위와 태후의 음란한 소문이 사라지고[37], 소문에서 벗어난 여불위는 세력 균형을 역전시킨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 상국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세를 이어가려고 한다. 이에 영정은 그동안 감금되었던 동생 성교와 그 일파를 풀어주면서 세력을 결집해 갈 씨의 사망과 여불위의 상국 임명으로 비어 있던 두 명의 승상직 중 한 자리에 창문군을 넣게 된다.[38](24권 254화 ~ 256화)

계속해서 초나라와의 전선을 지키고 있던 비신대는 상부의 명으로 동금성으로 이동[39]하던 중에 조의 이목과 초의 춘신군의 만남을 확인하였고, 이목과의 대련을 통해 그가 지략뿐만 아니라 무력까지 지닌 인물이란 걸 알게 된 신은 이들의 만남에 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40] 그리고 신의 예상대로 이목은 초의 춘신군에 이어서 위나라의 경민왕을 만나며 진나라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후, 동금성에서 신은 몽념에게서 '조초동맹'과 함께 다른 소식[41]을 듣고, 이를 하료초와 같이 나누던 중에 수상한 부대가 있다는 정보에 성 밖으로 나와보니, 왕기의 옛 부하로 지금은 과 함께 있는 녹오미와 간앙이었다. 조, 초, 위 일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이들에게서 "장군(왕기)를 잃었던 마양 때보다 더 큰 폭풍이 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인 신은 놀라 점점 다가오는 폭풍을 느끼고 있었다.(24권 257화 ~ 261화의 ¾)[42]

7. 기원전 241년(시황제 6년, 24권 ~ 33권)

초나라의 재상 춘신군을 총대장으로 하고 이목이 군략을 맡은 6개국의 합종군이 진나라를 공략에 나선다. 남쪽에서 초군이 오는 것을 시작으로 북쪽의 조, 뒤이어 위, 한, 연, 제가 오는 것을 안 진 조정과 군대들은 패닉에 빠지게 되었다. 남쪽의 초군 방어를 지원하러 가려던 비신대 역시 이 광경에 자신들의 나라가 침략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패닉에 빠져 포기하고 있던 조정은 포기하지 말고 대처하고 싸울 것이다는 영정의 외침으로 진영과 관계 없이 각성해서 대책을 마련해갔으며, 창평군의 책략으로 아직 동쪽에 머물고 있던 채택의 외교술로 가장 멀리 떨어져 진나라로 오지 않던 제나라를 이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다른 5개국[43]의 연합과 이들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진나라 본영은 나라의 국문이라 불리는 함곡관에 몽무, 등, 몽오, 장당, 환기, 표공, 왕전 등의 장군들과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방어전을 치를 것을 결의한다. 한편, 신을 비롯한 비신대는 이들을 쫓아서 가던 중, 뇌원 부근에서 오봉명(오경의 아들)의 위군과 단독으로 싸우던 표공 장군을 지원하면서 4일 동안 위군의 발목을 잡아놨으며, 함곡관 방어전에서도 표공 장군의 휘하에서 조나라와 맞선다.(24권 261화의 ¼ ~ 25권 270화)

본능형 장군인 표공이 먼저 공격[44]했지만, 다른 형태의 본능형 장군인 경사[45]의 함정에 걸려서 궤멸되려는 찰나, 표공을 쫓아가던 신은 후방의 위기를 미리 깨닫고 돌진하는 표공군을 역행해, 후방의 표공군 1만명을 지휘하여 참패를 막고 장평대전의 원한에 사로잡혀 있던 적장 만극을 베는 활약을 펼친다. 초강대국 초군을 상대하는 등과 몽무 연합군[46]은 등이 초나라 1진의 장군인 임무군을 베는데 성공하고, 함곡관을 지키는 장당, 환기, 몽오는 정란차 등을 앞세운 한나라와 위나라의 공격을 막는데 성공한다. 또한, 연나라의 산민족을 상대하는 왕전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으로 연의 대장군 오르도를 농락한다.(25권 271화 ~ 27권 289화)

압도적인 열세에서도 선전하는 진군이었으나 임무군이 전사한 뒤에 등장한 초나라의 2군 장군인 와린은 15일째가 함곡관이 떨어지는 날이라고 선언하면서 이후로는 소모전에 돌입하다가, 전투 15일째, 초군의 대장군이며 중화 최강의 남자라 불리는 한명이 전선에 등장하게 된다. 전장을 뒤흔드는 한명이지만 진군 측에서도 중화 최강을 자부하는 몽무가 나서고, 대격전 끝에 몽무가 한명을 무찌르는데 성공하였으며, 함곡관에서도 한나라 군의 독 공격을 당한 장당이 환기의 도움으로 한군 진영으로 잠입, 사력을 다해 한군 총대장 성회를 베게 되자[47], 함곡관 방어전의 추가 크게 진나라로 기우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15일간 함곡관 옆 산맥을 넘어서 대기중이던 와린의 군세에 의해 함곡관의 성문이 노출되고 성문이 뚫리려는 찰나, 반대편 전장에서 오르도의 군세를 격멸한 뒤 사라졌던 왕전군이 나타나 성문을 사수하면서 와린의 전략을 무너뜨린다.(27권 290화 ~ 30권 319화)

함곡관 공략이 어려워지자 이목은 미리 빼두어 산맥을 넘게 했던 조군을 이용하여 진나라 수도 함양을 직접 타격하기 위해 나선다. 이를 감지한 표공과 비신대는 추격을 시작하지만 병력의 열세와 방난의 등장으로 표공이 전사한다. 화염을 꺼뜨리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표공의 방패를 받은 신이었으나 표공을 잃은 절망감. 그리고 차례대로 작은 성들을 함락시키며 함양에 다가오는 조군으로 인해 상황은 절망적. 하지만 마지막 관문인 최라고 하는 성에서 직접 출전한 영정을 만나게 된다.[48] 최 성의 주민 2만 명을 봉기시켜 공성전을 준비하는 진군. 영정의 격려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이목조차 놀랄 정도의 저력을 발휘한 진군과 최의 백성들이었지만, 7일간의 공성전 끝에 성문이 뚫리며 함락을 목전에 두게 된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 양단화가 이끄는 산민족의 군세.[49] 조군을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방난이 등장하고, 왕기와 표공이라는 두 스승을 방난에게 잃었던 신은 마침내 방난과 맞서고 그를 찔러 중상을 입히는데 성공한다. 결국 이목은 미련을 버리고 후퇴를 결정하고, 합종군은 진 공략을 포기하고 회군하기에 이른다.[50] 합종군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신은 삼천장으로 승격했고, 새로 합류한 옛 표공병들과 함께 폐허가 된 진나라 곳곳을 다니면서 재건 작업을 펼쳤다.(30권 319화 ~ 33권 356화)

한편, 비신대를 잠시 떠나 원수를 찾아서 조나라 곳곳을 다녔던 강외는 새로운 치우였던 유련을 만나 대결, 사투 끝에 원수를 갚았고, 강명에게 부탁[51]하고 난 후, 비신대에서 떠난 지 392일(약 1년 25일)만에 복귀해 부대를 더욱 약진하면서 본인의 무공을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33권 357화 ~ 34권 364화의 ⅔)[52]

8. 기원전 240년(시황제 7년, 34권)

작년에 벌어졌던 합종군의 여파로 인해서 각 국가들마다 대규모의 전투가 없던 시기였다.[53] 장군 몽오가 위독해 문병차 온 신과 몽념은 그의 최후를 지켜보았고,[54] 영정은 각기 다른 두 궁녀에게서 아들 부소와 딸 려를 얻었고, 왕전은 위의 경도성을, 환기는 위의 급성을 함락했다.[55] 한편, 합종군을 주도했던 춘신군과 이목은 책임을 지고 쫓겨났는데, 측근들에게 보고를 받은 이목은 각 국이 내란기이며 특히, 권력을 틀어 쥔 여불위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영정이 있는 진이 가장 격렬한 내란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34권 364화의 ⅓ ~ 34권 366화)

한편, 합종군을 수습하였지만, 나라가 빈궁해진 탓에 절제된 생활을 해야 했고, 정치적으로 극한 대립이 오고 있던 함양에서 여불위는 자신의 재산으로 주지육림을 벌이면서 찬탈 음모에 서서히 시동을 걸었고, 영정의 동생 성교는 그 가운데에서도 세력 확장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영정 진영에서는 이를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성교의 부인인 유의의 말[56]을 듣고 성교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34권 367화 ~ 368화)

9. 기원전 239년(시황제 8년, 34권 ~ 38권)

이목을 내친 후 조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곽개에 의해 조군 2만이 진나라를 침공하자 이에 대응하여 둔류를 방어하기 위해 왕제 성교가 출전하였다.[57] 하지만 둔류에서 여불위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게 억류당하고, 조나라와 내통한 반란군의 주모자로 선언된다. 이에 놀란 영정을 사천인장에 오른 신과 더불어 천인장으로 오른 강외를 더해 오천인대가 된 비신대와 벽 장군이 함께 반란 진압과 성교의 구출을 위해 둔류로 출격하도록 했지만, 끝내 성교는 사망하게 되었다. 죽은 후, 다수가 살아남은 성교의 세력들은 유의가 이끌면서 영정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지만, 성교는 결국 반란의 주모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후 신은 웃으면서 지나가는 여불위 앞을 막아서면서, "여불위 당신은 정의가 없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라고 경고를 보내지만, 오히려 "정의는 인품이 아닌, 이기는 자에게 깃드는 것이다!"라면서 지나가는 여불위를 보면서 '아직도 크게 보인다.'라고 느낀다.[58] (34권 369화 ~ 35권 378화)

합종군 이후 진나라는 산양을 발판으로 중원으로 나가기 위한 교두보인 저옹을 두고 위나라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진나라 장군 등과 위나라 대장군 오봉명이 대치하는 가운데 전 시대(오봉명의 부친인 오경과 같은 세대)의 위의 명장들인 화룡칠사 중 3인[59]이 참전한다. 서로 긴밀하게 짜여져 있는 위군의 포진을 깨기 위해 옥봉, 비신, 녹오미 3대로 갈라져서 적의 3개 진영을 격파하고 본군을 치는 전략을 세운다. 왕분은 자백, 신은 개맹을 상대로 고전하지만, 결국 그들의 진을 격파하면서 왕분은 자백을 처치하고, 강외는 위군의 본진을 점령한다. 뒤늦게 추격한 신은 본진의 대장군 오봉명을 치려 했지만, 오봉명의 기책으로 화룡 중 한 명인 영황을 베는데 그친다. 물론 영황 역시 전 시대부터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기에 그 공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옹을 차지한 진나라는 동군(산양)처럼 저옹을 요새화하면서 서서히 중화통일의 움직임을 시작하였다.(35권 379화 ~ 37권 401화)

산양과 저옹의 요새화를 두고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그 여파로 함양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완성하였고, 태후와 노애가 후궁가의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진나라 북부 태원에 '애국'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환관 조고의 행정능력으로 애국은 중화 전토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초에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몽무와 몽념이 방어하게 된다. 등이 몽무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두 번째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신과 왕분이 오천인장, 강외는 삼천인장으로 승격되다.[60] 이후 옥봉대는 녹오미군과 함께 초 방어전에 나서는 몽무와 몽념을 지원하고, 비신대는 융국과 함께 저옹 방어전을 지속적으로 펼친다. 한편,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애국을 바라보며, 영정은 여불위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싸워야 한다는 단호한 생각을 하였다.(37권 402화 ~ 38권 407화)

10. 기원전 238년(시황제 9년, 38권 ~ 41권)

진왕 영정의 가관 의식에 맞추어 태후의 애국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뒤에서 사주한 여불위 역시 애국의 반란을 이용하여 진 왕족을 멸하고 자신이 왕이 될 계획을 꾸민다. 반란군의 수장 번오기[61] 부자는 위조된 옥새가 찍힌 문서를 활용해 함곡관을 넘었고, 수비가 약해진 함양을 공략하지만, 여불위에게서 등을 돌린 창평군의 연락을 받고 전선에서 출격한 비신대는 상록군과 최의 병사들과 함께 영정의 가족들을 구하고 반란을 제압하는데 성공한다.[62] 이 혼란의 와중에 무사히 가관식을 마친 영정은 여불위와 천하를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대해 담판을 벌여 제압을 하였다.(38권 408화 ~ 40권 433화)

패주했던 반란군들은 함국관 부근에서 창평군의 지시를 받고 혼 환기군에게 괴멸당했고[63], 이들과 함께 진을 공격하려던 초군 역시 철수하였다. 체포된 주모자 노애와 번오기의 아들 번유기는 많은 이들의 분노 속에서 참형[64]에 처해지고, 조고를 비롯한 다수의 애국 사람들은 촉으로 쫓겨났다. 노애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라도 살리려고 아들 앞에서 절까지 했던 태후는 끝내 아들에게 버림을 받고, 탑에 감금되었는데, 몰래 들어온 영정은 노애와 태후 사이의 두 아이를 살려내 성 밖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고 귓속말로 전했다.[65][66] 탑에서 나온 영정은 신[67]에게 앞으로의 해야 할 일(여불위 세력의 처리 및 중화 통일 구상 등)을 설명하고, 그 자리에서 '육대장군'의 부활을 선언했다.(40권 434화 ~ 41권 438화)

신은 정의 그 발언을 이후, 조와의 전선에서 몽념, 왕분과 얘기하면서 가능할 만한 후보 군들을 추렸으며, 그로부터 5일 후에 양단화가 위나라의 요충지 연지성을 점령해 열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에 초나라의 효열왕이 죽고, 재상인 춘신군이 암살당했는데, 초에 망명와 있던 염파의 주선으로 만난 와린이원이 초의 재상에 올랐다. 이로 인해 진은 초나라 공격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조의 흑양 언덕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 임한다.(41권 439화 ~ 441화 중반까지)

11. 기원전 237년(시황제 10년, 41권 ~ 46권)

비신대는 환기군 휘하에서 조나라의 흑양 언덕 공략을 위해 나선다. 이에 조나라에서는 경사를 대장군으로 하여 이안의 성주 기혜군을 더해 반격에 나선다. 밀림인 흑양 지대를 손에 넣기 위해 요지인 5개의 언덕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와중에 신은 사투 끝에 조의 총대장 경사를 베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총대장의 죽음을 숨기고 전투를 계속한 기혜군은 결국 중앙 언덕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당초 기본 전략이 언덕 쟁탈전이라던 환기는 절호의 기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가, 포로를 고문하면서 알아낸 기혜의 약점인 이안성을 목표로 삼고, 조나라 포로와 주변의 백성들로 시체의 탑을 쌓으며 기혜가 지키던 이안성을 공략하겠다 협박한 환기의 계략에 대 참사를 막기 위해 결국 기혜는 이안으로 병력을 물리고, 진군은 기혜가 방어 설비를 만들고 있던 흑양 언덕을 여유롭게 취하며 승리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환기군의 약탈을 본 비신대는 이에 대항하다가 싸움까지 나서, 결국, 경사를 벤 공적이 상쇄된 채 언덕을 요새화하고 주변 지역 순찰에 들어갔지만, 이런 비신대의 모습에 반한 나귀가 비신대에 합류하면서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68] 그리고 숨어서 전황을 살펴 본 이목 또한 환기의 약점과 기혜의 발견이라는 소득을 얻은 채 경사의 복수를 다짐했다.(41권 441화 뒷부분 ~ 45권 484화)

한편, 제나라 왕 건과 조나라 재상 이목이 채택과 함께 진의 수도 함양을 방문한다. 먼저 담화를 가진 제왕은 진왕 영정에게 천하통일의 명분을 묻고 영정의 목표가 정복이 아닌 새로운 법치국가를 만든다는 것임을 알고 그때가 되면 진에 항복할 것임을 밝힌다.[69] 한편, 이목은 현 시대의 평화를 위해 전국칠웅 모두가 동참하는 동맹을 제안하지만, 영정은 일시적인 평화일 뿐, 하나된 중화를 만들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겠다 선언하고 이에 이목 역시 진 조정에 "누가 와도 나한테 이길 수 없다! 올테면 와라!"라면서 전쟁을 선포하고 귀국한다. 한편, 흑양 전투 이후, 낙화대와 인수인계를 한 비신대는 후방으로 이동해 신병 보충 및 훈련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표공군 휘하에 있던 중화십궁 창원의 두 아들인 인, 담 형제와 간두를 비롯한 신병들을 모집하였다.(45권 485화 ~ 46권 493화)

한편, 여불위는 노애의 반란에 연루되어 실각하고, 유폐되어 있던 태후가 궁궐로 돌아왔다. 여씨 사주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있던 이사가 법을 다루기 위해 영정에게 재등용되는 등 진나라 내부에서는 작년 노애의 반란 사건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와중에 이목에 의해 조 서부 공략이 쉽지 않다는 걸 안 창평군[70]은 영정과의 독대에서 무리이긴 하지만, 한단 아래의 업을 공격하는 것이 어떤지 알려준다.[71](45권 494화 ~ 46권 496화의 ¼)

12. 기원전 236년(시황제 11년, 46권 ~ 60권)[72]

중화통일을 위한 첫 단계인 조나라 정벌을 위해 조나라 제 2의 도시인 업을 공략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73] 모든 이들이 궁금해 할 이 공략전을 실행하기 위해서 진은 왕전을 총대장으로 하여, 양단화와, 환기의 대장군 급의 장수들과 비신대, 옥봉대, 낙화대까지 합해 총 20만에 가까운 부대를 조나라 전선으로 보냈고, 출정식 이후 진군하던 통로에서 신은 그 동안 영정에게 보관하고 있던 前 육대장군 왕기의 창을 받았다.[74](46권 496화의 ¾ ~ 46권 499화)

함양을 출발한 진군은 이목은 물론 그가 파견한 조의 첩자들을 속이면서[75], 중간 기착지인 금안성을 기점으로 부대가 흑양에서 조나라 서부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업으로 우회하는 전락으로 조, 정확히는 이목을 속였다.[76] 이후 진군은 최고 속도로 진군하면서 열미에 당도해 비신대와 양단화의 부대를 이용해 반나절에 성을 함락했지만[77], 사실 열미는 일부러 적을 끌어들이고 포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술한 성임을 드러나 창평군이 세운 모든 전략의 토대가 무너졌다. 이에 여러 방안들을 내놓긴 했지만, 미리 정찰을 나갔던 왕전은 회군 대신 업성 주변의 조나라 성들을 모두 함락시키고는 그 백성을 업으로 몰아넣어 업 성내의 식량을 소모시키는 작전으로 맞선다. 결국, 업성과 진군 중 어느 쪽이 먼저 군량이 떨어지는가에 달린 군량전이 벌어진 가운데에서 환기군 6만은 업을 포위하고, 양단화군 5만에 추가로 휘하의 8천에 환기군 2천을 추가해 요양에 있는 견융족과 순수수 연합군와의 전투에 나서고, 나머지 즉, 왕전군 7만에 비신대 8천, 낙화대와 옥봉대 각 5천(도합 8만 8천)은 알여로 이동해 이목군과의 전투에 나서게 되었다.(46권 500화 ~ 48권 517화)

업성을 포위한 환기군이 밀려오는 조나라 지원군들과 대치를 벌이는 동안, 벽의 지원군과 합세한 양단화의 산민족 연합군은 견융족과 이목군 휘하의 순수수 연합과 대치에 나서면서 고전[78]을 면치 못하였고, 이목군과 주해평원에서 대치한 왕전군과 휘하의 비신대, 낙화대, 옥봉대 역시 전투 첫 날에는 조군 우익의 기혜군의 공세와 이목의 마광 처치[79]로 사기가 떨어진 진군 좌익을 몽념의 낙화대와 지원을 온 비신대의 도움으로 되살렸고[80],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조군 좌익의 마남자와 악영, 그리고 과거 조 삼대천 중 한 사람인 인상여의 휘하였던 요운조아룡에 대항해 아광군과 더불어 왕분의 옥봉대와 신의 비신대가 사투를 벌이면서 지루한 싸움을 이어나갔다.[81] (48권 518화 ~ 51권 550화의 ¾)

하지만, 난민이 다 들어간 업성에 군량의 기한이 '20일분'이라는 전갈을 받은 이목은 장기전으로 돌입한 반면[82], 진군은 군량이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심각해질뿐더러 피폐해있었고, 게다가 군량의 절반이 탄 벽·양단화 진영은 3일치밖에 남지 않아 상대 부족의 말을 훔치려고 내분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이에 양단화견융의 핵심 장수인 고바, 부넨, 토하쿠를 치고 식량을 뺏어오겠다는 작전[83]을 수립한다. 허나 이 작전은 순수수에게 간파되어 오히려 양단화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84], 여기에 핵심 장수 중 부넨을 맡았던 메라족 족장 카타리는 전사까지 하였다. 하지만, 메라족과 함께 있던 벽과 메라족 족장 카타리의 여동생 키타리의 각성으로 두 사람이 부넨과 로조를 끝끝내 처단을 하였고, 여기에 별동대와 살아남은 군대의 활약으로 10일만에 요양성을 함락하고, 견융족을 포섭해 동료로 받아들이면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85](51권 550화의 잔여분 ~ 555화/52권 561화의 ⅔ ~ 53권 575화의 ⅓)

한편, 주해평원에서 싸우던 왕전군과 이목군은 중앙군을 제외한 양 측면, 특히 진 우익과 조 좌익에서 격렬한 전투들이 벌어지면서 장수부터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내고 있었다.[86] 다만, 전투 12일차에 비신대와 옥봉대의 각성으로 중앙군이 진군을 하면서 결전이 가까워졌고, 왕전의 계략[87]에 의해 업성의 큰 식량 창고를 태운 왕전은 전투 15일째에 이목과 본격적으로 맞붙게 되었다.(51권 555화 ~ 52권 561화의 ⅓/53권 575화의 ⅔ ~ 56권 603화)

이 전투 15일차의 결전에서 진 우익은 마남자를 제외한 조 좌익의 마지막 장수 요운을 왕분이 사투 끝에 무찌르고, 지원 나온 조장 금모를 신병인 창담이 저격한 이후에 중앙의 이목을 요격하다가 방난과 대치하였다. 선두로 나선 거해가 그 과정에서 죽고, 뒤를 이은 강외가 방난의 손가락을 자르긴 했지만 역시 패했고, 뒤이어 온 신이 사투 끝에 방난을 처단하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잠시 의식을 잃게 되었다. 이 과정을 아주 근접거리에서 지켜본 이목은 전 부대를 후퇴시켜 환기가 포위하고 있던 업을 구하러 가게 되었고[88], 왕전군은 모든 부대의 10분의 8정도를 주해평원에 남기고, 나머지(10분의 2) 정예병들을 이끌고 이목군의 뒤를 치기 위해 진군했으며, 방난을 처치한 후 잠시 의식을 잃었던 신도 강외의 노력으로 회복해 왕전과 몽념, 왕분 등과 함께 이목을 치러 갔다. 이틀 정도 두 군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진 업성은 난민들의 저항에 부딫히면서 결국 안에서 성문이 열리면서 함락되었다.(56권 604화 ~ 58권 635화 전반부)

하지만, 성 안에는 이미 식량이 없어진 상황[89]이고, 여기에 외곽에서 완벽에 가까운 포위망을 갖춘 이목군과 열미에 있던 순수수와 호첩, 그리고 수군에 의해 요양이나 황하를 통한 병량 지원이 사실상 어러워지면서 업성에 갇힌 진군은 절망적인 상화잉었으나, 이목이 갑자기 왕도(한단)으로 소환[90]되었고, 조의 수군이 남은 진의 수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포위를 풀어버리자, 왕전은 제에서 군량을 들여와 군대를 먹이기 시작해 회복하였고, 일부를 열미로 보내면서 위와의 전선에 있던 부대와 함께 열미를 압박함으로서 진은 요양, 열미, 업을 비롯한 조의 왕도권 남부를 모두 장악하였다.[91] 이후에 함양으로 돌아와서 성대한 귀환식을 마친 비신대는 풍리에 있던 신의 크고 새로운 집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었고[92], 이후 궁궐에 가서 자신이 아직 이름(정확히는 성씨(姓氏))이 없어서 아직 장군이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과거 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듣고, 표를 따라서 자신도 '이신(李信)'이라는 이름을 정했다.[93](58권 635화 후반부 ~ 59권 641화)[94]

업 공략 이후에 진은 군대와 백성들을 대거 업을 비롯한 옛 조나라 왕도 남부권으로 이주했으며, 아직 진·조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미뤄졌던 논공행상을 진행하였다.[95][96] 이 자리에서 이신은 낙화대 몽염, 옥봉대 왕분과 함께 제1등의 특별공으로 장군의 직함을 받게 되었다.[97] 이후, 부대를 재편성해 15,000명의 군(軍)으로 재탄생한 비신대는 훈련을 거친 후 다시 조와의 업 전선으로 향하게 되고, 이 와중에 조의 수도 한단에서는 카이네와 순수수가 이목을 구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기던 중, 이목의 처형을 앞두고 도양왕이 갑자기 죽었다. 조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태자 가는 미리 앞질러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이목을 비롯해 도양왕이 옥에 가둔 인사들을 석방해 진군의 침입을 대비하려고 했지만, 도양왕이 죽기 전, 남긴 유언을 통해서 조나라 왕위는 막내인 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천을 비롯한 곽개 진영은 가와 이목 진영을 초토화 시키면서 태자 가와 이목은 한단 북쪽의 작은 성으로 쫓겨났다. 이목은 약간 지치긴 했지만, 카이네 등 주변 측근들의 격려에 기운을 다시 차리고, 이들과 함께 사마상이 있는 청가로 이동했으며, 진과 조와의 전황은 일찍이 이목의 전언을 들었던 곽개가 마치 자신이 하는 것처럼 휘두르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59권 642화 ~ 60권 647화의 ½)

13. 기원전 235년(시황제 12년, 60권 ~ 62권)

함양의 궁전에서 교착 상태인 진·조 전선을 타개하기 위한 논의 중 늦게 입궐한 사씨가 영정에게 3년 전 노애사건의 연좌로 실각한 후, 봉지였던 하남에 있던 여불위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노력하긴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여불위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자[98], 뜻을 알겠다면서 영정은 여불위와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고, 이후에 직접 하남으로 가서 여불위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99] 이후 한 달이 지나서, 여불위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식이 들려왔다.[100](60권 647화의 나머지 ½ ~ 648화)

한편, 업과 한단 사이의 진·조 전선은 아직 교착 중인 상황에서 창평군은 초나라의 십호성을 위에 넘기는 조건으로 위와 3년 동안의 동맹을 제안했고, 초나라 전선에 있던 몽무가 위군이나 등 부대보다 먼저 초의 십호성을 치기 위해 출전을 했고, 이에 십호성의 장수들도 성에서 나와 싸우게 되었고, 이후에 진에서는 등과 녹오미, 초에서는 항익과 백려까지 나오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졌고, 최종적으로 오봉명이 이끄는 위군까지 도착해, 초군 11만 vs 진군 5만 + 위군 7만의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과거 초에 멸망당했지만, 초군과 대등한 경기력으로 생존했던 십호성의 장수들과 그 친위부대들에 의해 위군의 장수 마개가 죽는 등 전황은 전혀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60권 649화 ~ 654화)

이에 오봉명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위군을 '조공', 몽무와 등의 진군을 '주공'으로 삼는 계책[101]과 동시에 장수들이 가고 없는 십호성에 정란차를 비롯한 대군을 보내 성을 함락시겼고, 주공으로 나선 에 의해 수호왕이 생포되면서 십호성 전투는 진과 위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다만, 사로잡힌 수호왕은 '십호성의 비밀'을 알고 싶다는 등과 녹오미에게 자신들 특히, 만우의 비밀을 말할 테니 몽무를 불러오면서 그들에게 자신들 특히 만우의 과거와 변화를 말하면서 "사람의 어리석음 그 너머에 뭔가가 있다."면서, 이제 다 얘기했으니 자신의 목을 치라고 했지만, 오히려 등은 추후, 초나라와의 전쟁에 있어서의 정보와 만우의 결말을 직접 보라며, 수호왕을 포로로서 데리고 갔다. 십호성이 함락된 소식을 접한 초에서는 와린이 진·위 동맹에 대해 상대에게 역효과라면서 만우와 만나겠다면서 움직였고[102], 진에서는 동맹에 대한 양쪽의 이익을 논하면서 다시 조나라 전선에 집중하기로 하지만, 십호성에 입성한 등과 몽무 앞에서[103]오봉명은 "우리에게는 이익이지만 당신들에게는 대실패!"라면서, 지금 사마상이 있는 청가에 있는 이목이 있는 한, 진은 3년 안에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등과 대치했다.(60권 655화 ~ 61권 661화)

십호성을 함락한 후, 위는 을 침공하고, 진은 다시 조와의 전선으로 모든 부대를 집결해 한단 공략에 나섰다. 낙화대와 옥봉대의 맹활약하는 반면, 비신대는 조군에 밀리면서 나아가질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04] 이에 신이 직접 강외대에 가서 상태와 이유를 물어보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진군에서는 강외로 보이는 인물이 조나라 병사들을 쓸어버린다는 소문을 접했지만, 현실과 맞지 않는 탓에 넘어갔지만, 이후 미평대가 조군에 밀리던 와중에 치우가 와서 전멸을 시키는데, 그 치우는 소문으로 접했던 강외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였던 강례였다. 이에 비신대에 들어온 강례는 보탬이 되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잔학성에 비신대 곳곳에서는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강례는 이들과 대치 중에 강외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강외가 신을 살리기 위해 금술을 사용함을 알게 되었고, 이에 3일 후에 강외와 비신대를 없애겠다고 하면서 잠시 물러났다. 3일 후, 나름 회복을 한 이후에 강례와 무무를 발동해가면서 싸운 강외는 강례의 과거를 알게 되고, 그녀를 일깨우면서 치우에서 해방을 시키는 데 어렵게 성공[105]을 하였고, 이후, 강례는 제대로 비신대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녀의 활약으로 비신대는 예전의 기세를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61권 662화 ~ 62권 670화의 ⅔)

14. 기원전 234년(시황제 13년, 62권 ~ )[단행본]

전 해(기원전 235년)의 말부터 시작된 육대장군의 부활이 마침내 본격화가 되면서 새해가 되고 난 후에 함양의 궁전 본전으로 새로 임명된 육대장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107] 그 해에 임명된 육대장군은 5인으로 1장(將) 몽무부터 , , 왕전, 양단화, 환기 순으로 임명이 되었고, 마지막 6번째는 공석으로 남겨뒀다.과 녹오미가 나온 건 낚시. 영정은 왜 6번째 '육대장군'을 공석으로 남겨뒀는지와 함께 이들 5인에게 "전쟁의 자유가 허락되더라도 적국의 백성이라도 일반인들의 학살이나 폭거는 금하며,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108][109] 그리고 이들에게 '여섯 날개를 가진 새의 조각상'의 날개를 '맡긴다'고 말하면서 나눠줬다.[110](62권 670화의 ⅓ ~ 62권 672화)

이러한 '육대장군'의 부활은 곧장 다른 열국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안겨주었고, 각 국가별로 나름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다.[111] 사마상이 있던 조의 청가에 머물던 이목은 "중화통일의 '시비'를 가를 전쟁이 시작되었다."면서, 자신 대신 총사령이 된 호첩을 믿고 기다리자고 하였다. 이후, 육대장군 왕전, 양단화, 환기는 다시 조 전선으로 돌아오면서 이전과 다른 양상의 공기를 보이면서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112] 이후, 비신대는 왕전군과 환기군의 중간지대에서 조의 한단 쪽으로 북상[113]하다가 먼저 간 옥봉대가 '영구'라는 험지로 간 사실을 알고 놀라게 된다. 실제로 환기군은 평양으로 진격하면서 좌익은 그들의 직속 병사들이 아닌 다른 진군들이 공격하다가 전멸이 되어가고 있던 상황이다. 결국 주력이 된 옥봉대에서는 왕분이나 관상, 변양 등이 공격이 불가하거나 공격하려면 환기 직속 병사들을 보내달라고 했지만, 작전을 전달하러 온 마론에게 모두 기각당한 채 영구 공격에 나선다. 이 와중에 상관 없다는 아화금에게 관상은 "닥치고 있어."라고... 북상하던 비신대는 이후 왕전군과 환기군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황에서[114], 조군 총사령 호첩이 본진 정규군 15만을 이끌고 환기에게 향했고, 이에 환기는 우려된다는 마론의 의견[115]을 무시하고, 그대로 전진하도록 했다.(62권 673화 ~ 62권 675화)

다른 진군과 조군 양 측 모두 관망이나 지원을 하는 중에 환기의 진군 8만과 호첩의 조군 24만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8일 가까이 전개되면서 진군이 최대 열세를 보이고 있었고, 대기하고 있던 비신대는 마침내 환기군의 좌익으로 이동하게 되었다.[116] 마침내 비신대와 함께 영구에 도착한 이신은[117] 상당수 전멸을 한 상황 속에서 직감을 발휘해 아직 생존 중인 왕분을 구해내게 되었고[118], 보병이 도착하면서 재배치에 들어감과 동시에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적의 본진이 있는 절벽 우측의 완사지(낮은 언덕)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이전에 공격했다가 전멸을 당한 왕분이 빈사의 상태에서 자세한 공격 루트[119]를 듣고, 영구 공격에 나서 간두, 숭원, 미평 등 보병단의 활약으로 단애절벽에 도달했다.(62권 676화 ~ 682화의 ⅔)

한편, 다른 진영들도 사실상 와해가 되는 아수라장 속에서 우익에서 적의 좌익과 대치하던 뇌토는 오기코로부터 환기의 전언을 듣고 나서 적의 부장급 인사[120]를 생포해 그를 이용해 용백공을 유인해 공격에 들어가 처치했지만, 이후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 호첩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부대원들과 단애절벽에 올라 대치하던 이신은 조나라 우익의 대장인 악백공과 혈투를 벌인다. 엄청난 힘은 물론 체술까지 겸비한 악백공에 처음에는 밀렸지만, 이내 무기를 바꾸면서 마침내 악백공을 처치했다.[121] 악백공의 본진도 후방에 있던 아화금의 활약[122]으로 와해되면서 비신대는 영구를 점령함과 동시에 바로 호첩군의 본진을 급습하기 위해 이동했고, 이 소식을 들은 호첩은 중앙으로 가던 호백군의 부대 일부를 비신대 쪽으로 틀어 막기로 했다.(680화의 일부, 682화의 ⅓ ~ 690화)

하지만, 오히러 약점이 되어 다른 부대들인 중앙의 호백군과 좌측의 용백군[123]은 남은 환기군을 섬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는데, 호첩이 있는 본진은 갑자기 들이닥친 환기군에 의해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 상황에서 마릉 전투손빈을 생각하면서[124] 환기가 이를 어떻게 응용했는지 생각하고 말한 호첩은 이후 친위대를 이끌고 본진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환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환기의 측근 부대들에 의해 본인을 제외한 부장들과 부대가 궤멸당한 상태에서 호첩은 환기를 향해 "(환기 네가 아군을 대량으로 희생시키면서 한 이 전술을 보니) 네놈은 적과 아군은 물론 중립에 있는 자의 구분도 없이 대량으로 죽이는 학살자다!"라고 극도로 혐오하는 말을 내벹으면서[125], "언젠가 그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내벹으면서 환기와 고통에 대한 짧은 토론 이후, 목에 칼을 찔려서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자신을 건드리려는 환기의 부하들을 몇 명 죽인 후 끝내 전사하였다.[126] 직후 전세는 역전되어 도망쳤던 환기군의 병력들이 돌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조군들이 항복을 했지만, 환기는 남은 포로들의 처리와 함께 무참하게 죽은 뇌토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함양과 한단이 전투 결과에 엇갈린 반응을 보인 사이에 환기는 마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아 몇 군데의 수용소로 분산한[127] 조나라 포로 수만 명의 목을 모두 베고 그 목들을 태워버리고 말았다.[128](691화 ~ 696화)

곧바로 대량 살육의 소식은 한단과 함양, 비신대 주둔지에 전해져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으며, 주둔지에 있던 이신은 과거 흑양 때처럼 환기에게 따지려 가려고 했지만, 하료초에 의해 제지당했다.[129] 한편 함양에서 이사"중화 통일의 길은 나라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진과 그 지역의 국민(백성)들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데, 이번 일로 인해서 중화 통일의 길이 어려워졌다! 왜 그런 자를 대장으로 삼은 거냐?"면서 창문군을 다그치자, 영정은 이사의 발언에 인정함과 동시에 창문군과 창평군 휘하의 황룡이 이끄는 병단도, 표사아의 부대와 함께 환기에게 향했다. 이 소식을 전령에게서 들은 마론은 즉시 환기와 다른 지도부들을 얼른 모이라고 했고, 드디어 만난 양 측은 약간의 신경전[130] 이후에 "왜 포로들을 학살했나?"는 왕의 질책에 "딱히 그냥 죽이고 싶었으니까 죽였어. 그것 뿐이야."라는 말에 하마터면 사형까지 당할 뻔 했는데[131], 환기는 영정에게 "침략을 먼저 한 건 너였다. 즉,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람을 죽인 건 당신이야."라는 주장을 펴지만, 영정은 "억지 이론에 어울릴 생각을 하지 마라. 더군더나 포로를 학살하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라면서 책임질 건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이후 학살 문제를 넘어 '중화 통일'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132] 결론적으로 영정은 환기를 참수하려고 했지만, 마론의 설명과 조군 총대장 호첩 처치의 공을 인정하고 목숨을 살려주고 돌아갔다.[133] 이후 해골만 남은 학살당한 포로들의 머리를 쳐다보다가 주저 앉은 영정의 옆에 이신이 다가왔다. 이후 이신의 말을 함께 타면서 그간의 상황들과 앞으로의 목표 등에 대해 터놓고 말하였고, 나귀는 그날 밤에 옛 진영에 가서 마론, 흑앵, 이옥 등과 함께 그간 벌어진 일에 대해 얘기를 시도했다.[134] 그리고 영정은 한동안 군영을 돌면서 장병들을 위로한 후 데리고 온 병력들을 전선에 남기고 함양으로 돌아갔다.(697화~700화의 ⅞)

한편, 환기의 참수 소식을 접한 조나라는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곽개를 비롯한 신료들은 호첩 대신 총대장을 맡길 만한 장수를 물색하다가 초에서 아직 건재하고 있던 염파가 조로 복귀하겠다고 하는 연락을 보냈지만, 곽개와 신료들은 회의 끝에 이를 거절했고[135], 결국 곽개는 껄끄럽지만 '청가'로 사람을 보내 이목을 불러들였으며, 주해평원 전투와 이후 정쟁으로 인해 청가로 쫓겨났던 이목은 마침내 3년만에 부활해 청가의 장수들과 함께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의안'에서 진군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700화의 ⅛(해당 화 마지막의 두 장)~702화의 ¼)

15. 기원전 233년(시황제 14년, )[단행본]

연초부터 진군은 평양과 무성을 공격해 겨우 함락을 시켰지만, 이목이 이미 그 기간 동안 두 성의 뒤쪽으로 장성을 축성[137]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격이 어려워졌다. 결국 왕전은 한단의 북쪽에 자리한 '의안'을 공격하기로 했고, 함양 또안 같은 준비를 하게 되었다.[138] 그리고 두 달이 흐른 뒤, 환기군과 왕전군, 이신의 비신대와 몽념의 낙화대, 그리고 군은 의안을 향해 진군하게 되었다.[139] 한편 이목도 이에 대비해 청가의 일부 성을 낭맹으로 보내 몰래 강화를 하고 한단에서 계획을 수립했는데, 그 계획은 의안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알여에서 진군의 절반을 줄이겠다는 전략이다.(702화의 ¾~704화)

왕전은 알여에 도착하자마자 병력 감소를 줄이기 위해서 자신의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을 외곽에 배치해뒀는데, 이미 환기의 조군 참수의 여파[140]+알여성에 있던 옛 호첩군의 잔당+이목이 파견한 순수수의 전략[141]으로 인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순수수는 옛 호첩군의 잔당인 '호백공'과 젊은 '용백공'의 결사대로 하여금 왕전군의 전략을 담당하는 전리미를 노렸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을 본 왕전이 직접 지원에 나서 실패했고, 도리어 왕전군의 방어선을 뚫고 환기에게 가려고 했지만, 비신대에 의해 막혀 젊은 '용백공'은 이신이 직접 제거했다.[142] 결국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안 '호백공'과 순수수는 전장을 이탈하면서 알여는 함락되었지만, 왕전군은 무성을 함락할 때보다 3배의 손해를 입게 되었다.(705화~708화)

결국 왕전군은 알여에 남기로 하고, 환기군과 벽군, 낙화대와 비신대가 의안을 향해 진군하게 되었는데, 태원에서 합류해 의안을 향해 진군하던 20만의 진군은 낭맹에서 조군에 의해 대부분이 괴멸되었고, 앞에 있던 5만의 군대만 겨우 합류했다. 그리고 이 5만과 환기군과 벽군, 비신대와 낙화대를 합쳐 14만에 달하는 군대는 논의 끝에 예정대로 의안으로 진격하는데, 아무련 저항 없이 의안의 앞에 있는 적려까지 왔고, 그 곳에서 벽군이 공격을 준비했는데, 정작 공격 직전에 항복한 적려성에는 몇몇 노인들과 환자들뿐인 텅 빈 성이었다.[143] 여기에 나갔던 척후들은 상당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진군 14만은 의안을 향해 진격하는데, 의안을 앞두고 마주한 건 이미 지난 반 년동안 아무도 모르게 조나라 북부 일대의 병력 31만을 모아 진군의 주변을 포위한 이목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이신의 비신대가 우익을 버리고 좌익으로 합세하는 기책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동안 환기는 이목조차 놀란 이상한 십자진형을 선보이고, 조군이 이에대한 대응에 고심하여 환기의 진짜 목적인 "시간을 허비하며 해가 저물때까지 그냥 기다린다" 하는 계책이 성공, 결국 산적출신답게 사방으로 흩어져 탈출을 모색하게 된다.

한편,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조군의 포위망속에 환기와 몇몇 간부를 포함한 500여명 만이 숲속을 헤메는동안, 먼저 탈출했던 비신대화 낙화군은 양군 도합 1만의 패잔병으로 가까운 의안을 공략한다는 발상전환을 하여 결국 함락시키게 된다. 그러나 의안의 방어는 지나치게 허술했고 이미 주민과 병사의 대부분이 미리 소개된걸 알아차리게 되며, 의안공격-농성계획의 근간이 되는 적려성이 이목과 주민들의 계략으로 벽을 비롯한 군사 대부분이 중독돼 죽어나가면서[144] 심지어 의안을 공략하고 농성하는것 조차 이목의 계획속에 있었단것을 알게된다.

뒤늦에 의안에 도착한 환기는 이미 의안방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잔존 1만군을 지휘하여 대부분의 난민이 피난했다는 비하를 공격하는 계책을 세운다. 이때 이목은 그 잔인한 환기군이 비하를 함락 시키면 큰일난다고 생각, 평소답지않게 서두르며 비하를 향해 전군을 이동시키지만, 환기의 계획은 숲속에 숨어있다가 조의 주력군이 통과한 후 본군인 이목 본대를 친다는것 이었고, 이신 - 환기 - 몽념 세군데로 나뉘어진 매복군중 환기의 매복군에 이목이 걸려들면서 양쪽이 수없이 죽어나가는 치열한 전투를 벌여 환기의 칼이 이목의 이마를 찢는 등 절체절명의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부저 등이 버티고 버텨 결국 조군 상화룡의 강력한 기마대가 돌아와 환기의 매복군을 무찌르면서 승패가 나고 환기와 그 부장들이 모두 전사한다.

환기가 죽은후 패잔병이 된 비신대와 낙화군은 쫒기고 또 쫒기면서 마지막에서야 겨우 창앙군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생환하지만, 애초에 끌고갔던 14만중 겨우 1~2만 만 생환했다고 하는 참담한 결과로 나타난다. 환기군은 전멸했으며 겨우 마론이 수천을 수습, 그나마도 진을 떠나 용병단이 되겠다고 하며 이탈하게되고 낙화군이나 비신대역시 강외대 포함 겨우 1~2천명 만 남은 상태로 고향으로 돌아간다.[145]

16. 기원전 232년(시황제 15년, )


비신대가 고향에서 휴식하며 미평의 결혼식과 이신의 강외에 대한 청혼 등등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동안, 창평군과 진왕 정은 다시한번 조나라 북부 공략을 계획하게 되고,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하여야 하는 부담감속에 몽무-등을 제외한 남은 전력을 총동원하여 의안 옆 번오를 칠 계획을 세운다.

그를위해 왕전을 대장으로, 양단화를 부장으로 하는 25만 대군을 일으키며, 수하 장수로 전리미, 창앙, 아광, 이신, 왕분을 데리고 조 북부군 15만과 함께 먼저 낭맹을 치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병력낭비를 피하기 위해 이신의 8천군에 북부군을 더해 3만으로 만들고 거기에 2만의 북부군을 더 포함해서 5만병력으로 하루만에 낭맹을 함락시켜 공략전의 발판으로 삼게된다.

이번엔 기습을 당하지않아 사기와 병력이 온전한 북부군포함 25만이 번오로 진격하자 이목은 1년전부터 대비해둔 북부방어 계획을 발동시키고, 항상 그렇듯이 더 많은 병력으로 번오성 앞 평원에서 진군과 마주하는데, 이때 조군에 사마상의 청가군이 전부 포함되 있다는 정보는 왕전이 개전 전 까지 알수없을정도로 정보공작으로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왕전은 양단화의 산민족군 6만을 좌익으로 삼고 비신대 3만을 우익으로 삼으며 그 뒤에 옥봉군 3만을 유격대로 만들어 유사시에 대비하고 왕전 본군은 북부군을 포함안 13만으로 아광-창앙을 내세웠으나 전투 시작부터 이목의 계략이 발동, 진격하던 아광이 오른쪽에 나타난 이목을 보고 동쪽으로 기마대를 이끌고 간 덕분에 시작부터 대세를 그르친다.

중앙에서 칸사로와 지아가가 이끄는 조군과 대치하는 사이 아광이 부상당하고 그 아광이 이목을 쫒아달라고 비신대에 요청하는 바람에 조군 7만과 싸우며 버티던 비신대중 무려 1만의 주력[146]이 이목을 쫒아 북동부로 가면서 전선을 이탈하게 되고, 나머지 비신대 2만을 구하기 위해 왕분이 1만을 이끌고 와서 그자리에 버티게 되면서 애초에 왕전이 획책했던 전략이 완전히 망가지고 원래는 가장 강력한 철퇴가 되야했을 우익과 유격대가 동시에 아무힘도 못쓰고 자리만 겨우 지키는 유군[147]화 되어 전체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

한편, 이신과 비신대 1만이 이목을 추격하지만 쫒아간 끝에 발견한건 이목이 도망쳐들어간 작은 토루로 만들어진 요새였고, 그안에 이목을 가뒀다고 확신한 비신대는 하료초까지 불러와서 철저하게 포위하고 공성전에 들어간다. 성벽이 높지않아 무난하게 성문을 열고 이목을 찾아다니지만, 그 토루 요새는 1년전부터 준비된 탈출로 땅굴이 있는 함정이었고, 결국 이목은 이목대로 놓치고 주 전장에서 완전히 소외된채로 빈성이나 공략하고 있었단걸 깨닫게 된다. [148]

비신대가 삽질하고 있는동안 드디어 나타난 사마상이 본격적으로 돌격을 시작, 결국 왕전의 중앙군은 허무하게 그 힘앞에 뚫리고 아광이 전사하고 전리미가 부상끝에 죽는등 중앙 본진까지 완벽하게 털리면서 창앙의 표현대로 패배자가 보는 풍경을 바라보며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전체 진군이 퇴각한다. 이때 북부군+중앙 왕전군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옥봉과 비신대또한 타격을 입어 그런대로 비교적 전력을 유지한 양단화군을 제외하면 약 20만의 군사를 잃은걸로 묘사된다.

그나마 카타리가 번오로 무모하게 들어가서 포로였던 자기서방 벽을 구해낸것이 위안거리.

창평군은 먼저번 의안전투 패배와 번오전투 패배의 연패에 큰 충격을 받고 진왕 정에게 자신을 참수 해 달라고 요청하며 진왕 역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어찌할바를 모르게 된다. 그리고 진나라의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중화통일의 길은 끊겼으니 그냥 춘추5패처럼 7국중 가장 센 패자로의 길이나 추구하는게 어떤가 하는 의견이 대두된다.


[1] 이 생매장 장면은 합종군 편 함곡관 전투 첫 날 당시 만극이 비신대 앞에서 밝혔다.(27권 285화)[2] 실제 역사보다 몇 년 앞서 일어났지만, 진압 후 기록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역사와 보조를 맞춘다.[3] 본래 산족 출신이던 하료초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잠시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고, 그녀를 보살피려던 벽이 정체를 알게 되면서 협의하에 양단화의 산민족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거절하고 신과 함께 머물렸다.[4] 벽은 이 때 천인장으로 전투에 나선다. 다만, 신과 벽은 같은 부대는 아니다. 53화에서 군을 편성할 때, 신이 속한 오는 박호신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5] 원래 목표는 형양이기 때문에 신이 속한 제4군은 흑강이라는 장군 휘하에서 환성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경의 선제공격으로 흑강이 죽은 건 물론 환성이 함락되면서 제4군은 아수로 이동하게 되었다가, 오경이 형양의 전군을 이끌고 진격하자, 표공의 판단으로 인해 1,2,4군을 사감평원으로 모이게 했다.[6] 뒤에 나오지만, 당시 왕기는 염파이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 부장들을 이끌고 가던 중이었다.[7] 자랑... 이라기보다는 사실, 갑옷을 사기 위해 근처 마을 시장에 들렸는데, 만나는 상점마다 '아버지 입을 거? 어린애들은 안 판다.'는 식으로 퇴짜를 놨을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조차 무시를 당하던 중에 우연히 식당에 들른 전유가 신의 활약과 백장이 된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함과 동시에 갑옷을 살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8] 처음에는 창문군 휘하였지만, 사 씨가 찾아와 암살 당한 이들 중에서 왕궁과 관된 이들이 암살당했다는 걸 알려주었다.[9] 이후에 강외를 묶긴 했지만, 이내 탈출했다. 그 과정 속에서 신과 영정, 하료초는 강외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9권 94화부터 96화의 앞 부분까지는 강외의 과거가 나왔다. 여담으로, 해당 스토리는 애니 1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10] 신이 여불위를 처음 봤을 당시, 동석했던 몽무가 영정에게 '육대장군'을 부활해달라는 상주를 한 적이 있었는데(물론, 거절되긴 했지만...), 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신은 육대장군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11] 이들은 몽오의 한나라 공격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2] 9년 전(대략 기원전 254년경) 창문군, 왕기, 가 당시 조의 영토였던 마양을 공격하고 있을 때, 방난이 단기로 규의 진영을 휩쓴 것도 모자라서 규를 죽인 일로 그 소식을 들은 왕기에 의해 방난은 얼굴에 상처를 입었으며, 창문군과 왕기는 규를 병사(病死)로 방난은 왕기에서 죽인 것로 꾸몄다. 그런 방난이 살아서 총대장으로 왔으니, 그런 보고를 들은 창문군으로서는 당황스러웠을 듯. 자세한 건 왕기, 의 1.2 문단, 방난 문서 참조.[13] 창평군의 허락을 받은 몽의와 하료초도 근처 고성에서 전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원래, 몽의는 진군의 한나라 공격 때 따라가기로 했는데, 총대장이자 할아버지인 몽오가 막았다고 하였다.[14] 서전 이후 연이 신에게 패랑의 오에 있던 절이 절명했다고 하자, 신이 열일곱 명째라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웃으면서 보내주라."면서 대인배 모습을 보인 패랑과 갑툭튀한 왕기 덕에 분위기가 달라졌지만...[15] 여기까지가 킹덤(만화)/애니메이션1기에 해당되는데, 원작에는 들어가 있던 영정의 과거사와 암살단의 영정 암살 시도 장면은 빠져있다.[16] 조나라 왕이 총애하는 춘평군이란 신하를 납치하면서 춘평군을 데리고 오고 싶으면 조의 재상이 함양으로 오라는... 하필 그 시점 조의 재상이 이목이라는 점.[17] 조건으로 이목이 심혈을 기울여 개조한 한고성을 진에게 주는 조건이었으며, 조에서는 춘평군 대신 평도후라는 대신이 진에 남기로 했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진과 조의 관리들은 아연실색과 놀람 그 자체였으며, 이는 창평군의 호출로 강외와 함께 함양의 대전에 온 신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창평군이 신을 부른 목적은 기회를 봐서 이목을 처단하는 것.[18] 그 와중에 거센 비판을 하면서 반박하는 문신 하나를 엎어치기 한 녹오미와 큰 항아리의 술을 다 마시고 동강내면서 술이 떨어졌다면서 돌아간 몽무는 덤.[19] 5년 뒤면 영정의 나이가 22세가 되는데, 이 때 가관식을 진행한다. 참고로 다른 육국에서는 20세에 가관식을 진행하는데, 진은 22세에 가관식을 진행한다.[20] 이는 강탄을 처치하고 난 후, 표공이 있던 아수성으로 심부름 가던 벽이 알려주었다.[21] 심지어 두루마리 겉면에 찍힌 인은 과거 왕제의 난 당시, 숨겨두었던 옥새인데, 그걸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22] 이 사실은 최측근인 창문군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자 사이의 관계가 궁금했던 벽에게 창문군은 지난 일들을 알려주면서 둘 사이에는 ‘어둠’만이 있었다.는 서슬퍼런 평가를 내렸다.[23] 이는 후궁에서 목간 정리를 하던 중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을 훔쳐본 궁녀 향이 목숨을 걸고 영정에게 알려주었다.[24] 이 일은 그 광경을 목격했던 몽념이 배후에서 정리한 탓에 크게 번지진 않았다.[25] 사실 이는 3년 전, 염파가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망명할 때, 왕기가 그 소식을 듣고 불쑥 찾아와, 만약 따분하게 되면 몽오와 붙으라고 언질을 주었다.[26] 창평군의 전령 대신 나선 몽무가 알려주었다. 그 이전 몽무와 몽념 부자를 보고 전혀 닮지 않았다면서 놀란 신은 덤.[27] 사실 몽오는 커다란 압박감을 느끼면, 일부러 노병으로 변장하고 진지를 돌아다니다가 풀밭에 눕는 버릇이 있고, 이 때가 그러했는데, 우연히 사냥감을 들고 돌아가던 신에게 얼굴을 밟혔다. 당연히 신은 그 노병이 자신의 상관들 중에서도 대장군이자 총대장이란 것을 임시 천인장 임명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28] 그 중 신에게는 조건으로 천인장 세 명 이상, 장군은 하나. 만약 실패할 경우, 오장으로 강등한다는 그야말로 가혹한 조건을 걸었는데, 신은 만약 실패하면 병졸로 가겠다면서 자신이 노리는 건 염파의 목이라고 호언장담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 본 몽무는 자신들의 부장들에게 "아버지(몽오)는 군재(軍才)는 떨어지지만, 사람 보는 눈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다. 아버님이 천거했다면 문제없을 것이다."라고 부친의 사람 보는 눈을 높게 평가했다.[29] 환기는 잔인한 산적 출신, 왕전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이 있어서 소왕 시절부터 음지에 머물렸다는...[30] 사실, 신이 윤호를 부상을 입혔을 때, 초수를 돕던 강외도 부상을 입었지만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 날 아침, 강외와 같이 누워있던 신은 그가 누웠던 자리에 묻은 피를 보고 직감하였다. 따라서 윤호가 윤동을 펼치며 오자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할 때, 부상병 200명과 강외를 남겼는데, 그 쪽을 윤호를 지원하려 온 개자방군이 공격해오니, 부상을 입었던 강외가 사투를 벌인 것이다. 그로 인해서 비신대는 강외가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되고, 적병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지키자는 결의를 한다.[31] 사실, 좌측의 왕전 휘하에 있었던 벽은 전투 도중에 길을 잃고 흩어진 아군들을 수습하던 중, 본진에 이상을 느끼고 추스려 지원해 온 것이었다.[32] 나레이션을 통해 그의 말년이 잠시 소개 된다. 하지만, 그는 이후 초나라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자세한 건 염파(킹덤) 문서 참조.[33] 강외 문서에도 나오지만, 그 동안 비신대의 모든 작전은 강외가 혼자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도 전략의 짜는 그녀의 모습에 비신대에 편입했던 전 곽비대 부장 출신인 초수마저 놀랬을 정도. 참고로 정규 전략 교육을 받았던 초수도 그 동안 보급 등의 이유로 자리에 이탈했던 날이 많았다. 즉, 강외와 초수 없이 작전을 신과 연 부장이 맡았으니... 약하기만 한 위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던 것은 당연지사...[34] 당시는 영토를 뺏고 빼앗는 일이 끊임없이 벌여졌고 빼앗은 땅은 얼마 안 가서 뺏기는 게 상식이기 때문에, 그 땅에 백성을 이주시키고 군(郡)으로 삼는 이 이례적 행위는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며, 국책으로 삼는다는 건 뒤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 즉, 이 선언은 진이 본격적인 영토 확장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라고 이후 나레이션을 통해 드러났다.[35] 두 부대와는 달리 왕분의 옥봉대는 산양 수비를 맡았다.[36] 하료초 설명 직후에 극신채택이 대화에 나서는데, 자세한 건 두 사람 항목을 참조.[37] 이에 대해선 대왕(영정) 진영뿐만 아니라 여불위 진영에서도 일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있나 보다. 사태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이사에게 어느 신하가 진실을 알려드렸다. 그리고 그 신하는 그날 밤에...[38] 창문군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고, 다른 한 자리(우승상)은 창평군이 임명된다. 그리고 승상 임명 이후, 영정은 여불위에게 "누가 마신 독(영정은 성교, 여불위는 태후(후궁))이 센 게 아니라 자신과 당신(여불위) 중에 누가 더 센가."라며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였다.[39] 다만, 중간 지점에서 길이 없어서 난감하던 중, 한나라의 공격을 받던 서(徐)라는 소국을 구하고, 동금으로 가는 지도를 얻게 되었다.[40] 헤어지면서 이목은 신과 하료초에게 "전력(戰歷)을 쌓아가고 있는 당신들이라도 실제로는 전쟁의 진짜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는 냉혹한 말을 남겼다. 이에 신도 "네가 우리(진)에게 어떤 책략을 쓰든 우린 정면에서 날려버리겠다!"라고 선전포고를 날렸다.[41] 왕분의 이천인장 승격과 영정의 총애를 받은 궁녀 향의 회임(향 외에 다른 궁녀 한 명도 회임했다고 한다.)[42] 여기까지가 킹덤(만화)/애니메이션2기에 해당된다. 2기에는 1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영정의 과거사 내용이 들어가 있다.[43] 조, 초, 위, 한, 연[44] 본래 초군(한명임무군)이 개전의 호령을 하면서 선수를 하려고 했지만, 기다리다 지쳤는지... 표공이 먼저 선공을 날렸다. 이를 지켜본 왕분의 평이 그대로.[45] 이목 曰, "표공은 사자처럼 덤벼들지만, 경사는 거미처럼 함정을 쳐 놓고 먹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침묵의 사냥꾼으로 (이목) 자신도 두려워 하는 존재이다."[46] 몽념의 낙화대와 왕분의 옥봉대는 등 장군 휘하로 참전.[47] 적장을 벤 후, 장당은 그대로 숨을 거뒀고, 낙마하려던 그의 시신을 환기가 잡는다. 자세한 건 장당 문서 참조[48] 여담으로 그 동안 신의 입에서 '정' 또는 '영정'에 대해 모르던 비신대 일원들은 이 곳에서 정체를 알아내고 모두 경악했다(...).[49] 사실, 이 시점에서 산민족은 다른 부족과 전투 중이라 합류 할 수 없었지만, 소식을 듣고 양단화는 7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합류해왔다. 더불어 진과 산민족과의 연합을 눈치채지 못한 이목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50] 회군하면서 합종을 이탈했던 제를 치려고 했지만, 한명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은 몽무가 회복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기습을 하면서 이렇다 할 전공을 얻지 못했다.[51] 유련의 시체를 감춰 다음 번 '축제'가 열리지 않게 해서 강족 내 강식과 강례를 살리고자 했으며, 빠져 나온 뒤에는 마을의 할멈에게만 유련을 죽였다는 사실을 보고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단행본 56권(603화부터 613화까지)의 부록 만화에 따르면, 유련의 죽음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축제가 벌어질 예정이었으며, 이후에 실제로 진행되었다.[52] 여기까지가 킹덤(만화)/애니메이션3기에 해당된다.[53]사기》에는 그 해 초반에 혜성이 지나갔다고 기록되고 있다.[54] 당시 몽무는 전선에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당 화 말미에 술잔을 놓아 부친을 그리워하는 몽무의 모습이 그려졌다.[55] 유이한 전투였지만, 함락 직후의 행동은 달랐다. 왕전은 포로로 잡은 병사들을 복종시킨 반면, 환기는 백로(몽오)에게 바치는 예물이라면서 포로들을 화형시켰다.[56] 옥좌가 아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을 모색하고 있으며, 만약 영정을 토벌한다면 여불위를 먼저 친 후에 정면에서 당당하게 나설 것이라면서, 형제가 힘을 모아 실권을 왕족의 손으로 되돌리고, 나라의 번영이 이어지기를 빈다고 밝혔다.[57] 사실 곽개는 조나라 조정에서 그 일을 은밀히 요가(창문군의 스파이)라는 인물에게 알려주었고, 당시 몽무, 왕전, 환기 등 주요 장수들이 다른 전선 쪽에 있는 상황이라서 여불위는 친정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로 건드렸지만, 여불위의 의도를 알아챌 뿐만 아니라 둔류에 처가가 있던 성교가 자청해서 출전한 것이다.[58] 이후 나레이션으로 '영정과 여불위의 싸움의 결판까지 앞으로 1년'이라면서 다가올 최종전을 예고하고 있었다.[59] 자백, 영황, 개맹으로 화룡칠사 문서에도 나오지만, 14년 전의 사사로운 일로 인해 오경을 제외한 나머지 6인이 서로 대립. 그리고 자백이 반대편의 3인을 직접 제거했다.[60] 단, 신과 왕분과는 다르게 강외는 이후 408화에서 저옹 토루 위에서 신과의 대화에서 삼천인장 승급을 받은 것으로 짧게 나온다.[61] 실제 역사에서는 진왕의 군제 개편을 반대하다가 실각하고 연나라로 망명한다. 이후 역사서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왕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 형가에게 진왕에게 접근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자결하여 자신의 목을 내어준다는 것은 후대의 창작.[62] 초반에는 비신대와 상록군, 최성의 병사들이 같이 반란을 진압했으며, 최종에는 옹에서 온 창평군과 창문군 일행과 합세해 반란군을 이끌던 융적공을 창평군이 해치우면서 마무리되었다.[63] 환기는 모든 걸 도려내라고 했지만, 그러지 말라는 창평군의 지시가 이미 있었다.[64] 노애는 차열형에, 번유기는 참형에 처해진 것으로 그러졌다. 번오기는 변장한 채 아들이 참수당하는 걸 본 후에는 작중에서 퇴장.[65] 만화에 참고하는 《사기》의 '여불위 열전'에는 반란 진압 이후 두 아이를 자루에 담아 때려 죽였다고 한다.[66] 저자인 하라 야스히사는 40권 말미 후기에 '1화 정도 남아있지만, 이야기의 전반부(국내통일)이 끝났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즉, 40권까지가 대략적으로 킹덤의 1부였던 셈 그런데 너무나 길었다. 작가 말로는 10년이 걸렸다 하니...[67] 당시 신은 애국 반란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터라 치료차 잠시 머물렸다. 그 외 비신대는 하료초가 이끌고 다시 돌아왔는데, 융국의 바가지를 긁게 했다.[68]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이유라도 묻자는 환기의 말에 나귀의 답은 "의외로 비신대의 밥이 맛있다."라는 단순한 이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신대로 올 때, 나귀와 그 일행들은 얻어 터지게 맞은 채로 왔다.[69] 이 때 동석했던 채택은 진왕과 제왕의 회담을 마친 후에 숨을 거둔다. 자세한 건 채택 문서 참조.[70] 이목이 일찍부터 흑양에서 태행산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성을 쌓고 방어진을 형성해 조 서부 공략 자체가 10년 정도의 장기전으로 예상한다고 창평군은 보았다. 대관식 이후, 영정이 신에게 15년 이내 중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선포한 것과 비교하면... 15년(참고로 그 기간이 진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라고 한다.) 안에 육국을 멸망시킬 수 없다![71] 업을 공격하면 3년 안에 조의 왕도(수도)인 한단을 점령함은 물론, 조를 멸할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전멸'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가까운 전략이다.[72] 권 수로 보면 알겠지만, 산양 전투나 합종군 편 이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이 만화에 대한 비판도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73] 상술했듯이, 이목이 미리 건설한 태행산맥 서부의 조나라 방어기지들을 무시하고, 업을 공략하는 나름 무모한 전략으로, 이를 위해 창평군창문군, 몽의, 개억이 비밀리에 전략을 짰지만,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비밀리에 왕분몽염, 하료초를 불려서 작전에 대한 평가와 세 부대의 목적을 말하기도 하였다.[74] 왕기와 표공이 각각 마양 전투와 합종군 전투에서 방난에게 당한 후, 그들이 각각 들고 있었다가 죽기 전에 신에게 던진 창과 방패는 신이 바로 들고 싸우기보다는 영정에게 맡겼었다.(이 내용은 356화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악뢰의 발언에 신이 답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 초창기부터 표가 들고 있던 검으로 싸우던 신은 둔류 전투 이후부터는 왕기의 창을 들고 싸울 수 있게 그와 비슷한 창을 들고 여러 전장에서 싸웠다. 여담으로, 왕기의 창을 받기 위해 신과 영정이 대면할 때, 영정이 누군지 몰랐던 신병들(간두 일행)에게 숭원과 송좌를 비롯한 고참들은 신입들을 다그치면서 그 자리에서 예를 표했고, 신이 왕기의 창을 받을 때, 창 자체가 얼마나 무겁고, 위압감이 있던지 들고 오던 덩치 큰 병사도 낑낑거렸고, 그 광경을 본 비신대 고참들과 강외가 놀랐으며, 신 본인도 받을 때 잠깐 휘청거렸다.[75] 500화에서 하료초와 얘기하던 중 긴장을 풀라면서 양단화가 한 말 중에 "초반전은 어디까지나 이목을 속이고 업을 공격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그 때까지는 긴장감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라면서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조의 첩자가 군량 운반 과정에 끼어 있지만, 이미 왕전은 비밀리에 군량을 금안에 숨기면서 가짜 군량을 금안에서 흑양으로 옮기고 있었다. 실제로 행군하던 진군의 주축은 평소대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이동하였으며, 금안성을 이틀 거리를 앞두고는 체력 안배를 위해서 비를 피하기도 하였다.[76] 조군 최전선에서 진군의 동향을 파악해 이목에게 보고하던 순수수는 진군이 금안까지 이틀 남았고, 흑양으로 간다는 것을 이목에게 보고하러 가려던 중에 금안에 파견 나간 첩자들이 소식이 없다는 전령의 보고를 듣고,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채고 그 사실을 이목에게 전령을 보내지만, 그 전에 연의 오르도군이 조의 동부를 공략한다는 소식이 진군과 조군 양 측에 하달되어 이목의 관심은 서부 대신 동부로 한참 동안 향해 있었고, 그 사이에 금안성 인근에 도착한 진군은 곧바로 방향을 업으로 돌리고 준비해 둔 군량과 함께 출발하였다. 이목이 이를 알았을 때에는 조 동부를 공략하던 오르도군이 삼대천 후보 중 하나이던 사마상이 있는 청가를 노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뒤늦게 순수수가 보낸 전령의 소식을 듣고 난 뒤였다. 지도를 보고 손으로 업을 짚이고 나서, 측근들을 놀라게 책상을 치고 "제정신인가, 진군은!"하는 이목의 분노는 덤.[77] 중간마다 기습하던 조군은 환기군이나 옥봉대 등 몇몇 부대가 견제하였다.[78] 로조 휘하의 견융족이 용맹했는지, 산민족 다수가 전사를 해 535화 앞부분에서 산민족의 시체를 바라본 양단화는 화가 난다면서 피고족의 왕 단토를 약간 무시할 정도였다. 여기에 사흘째(작중에서는 540화 초중반)에는 순수수의 계략으로 인해 벽 군이 보관하고 있던 진군과 양단화의 산민족 연합군의 군량 절반이 불에 탔다. 551화에서 그 얘기를 절명 직전의 벽 휘하의 전령의 소식을 가지고 마지막에 보고한 왕전군 휘하의 전령의 말을 들은 함양의 왕궁은 충격으로(...).[79] 530화와 531화에서 보여주었다. 총대장이 자객처럼 잠입을 해 적장의 목을 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이후에 퇴각하던 중 비신대의 신과 대치까지 오게 되었다.[80] 그로 인해 535화에서 총대장의 권한으로 몽념의 임시로 '장군'이 되어 마광군의 잔여 병력을 포함해 좌익의 전권을 담당했다. 그 충격으로 의자째로 쓰러진 신은 덤.[81] 둘째 날은 옥봉대와 아광군 휘하의 천인장 아화금이 조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셋째 날에는 조군에서 요운의 1만에 맞서 강외대를 포함한 비신대 8천이 출격했는데, 지략과 본능 모두를 갖춘 요운에 맞서 하료초가 고전했다가 545화 막판부터 하료초 대신 이 직접 지휘를 맡아 서툴렸지만, 강외와 함께 요운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잘 맞서 싸웠다. 오윤이 그 날의 전투를 치르면서 자신이 '세 가지 오산'을 했다라는 사실을 알 정도로. 물론, 이게 얼마나 심했는지, 비신대에서도 많은 전사자가 나오기도 하였다.[82] 550화 마지막 부분에 나온 카이네부저, 금모의 대화와 551화에서 진군의 군량 상황이 드러나는데, 열미에서 출발할 때에 15일분이었던 것이 이후에 진군이 삼군으로 나누고, 그 중 왕전군이 주해평원에 입성해 사흘째 전투까지 다 치른 무렵에는 10일분이 남았으며, 그 소식을 품은 채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전령이 온 날짜(5일)을 보면, 551화 당시 왕전군의 남은 군량은 5일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아껴서 먹어야 할 정도로...[83]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적을 유인하는 사이 별동대가 요양성을 점령하는 작전으로 별동대를 이끈 원수족(절벽이나 벽을 타는데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의 족장 엔포로 하여금 요양성을 함락하라고 함은 물론, 본군에도 "적에게 쫓기다가 살아남게 되면 자신을 구원하러 오지 말고 요양성 앞으로 집결하라"는 지령을 내려 적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에 한시라도 빨리 요양성을 점령하려고 한 무모하다시피 한 작전이다. 여담으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절벽을 걸어서 올라가는 묘기를 선보인 원수족 족장 엔포는 양단화를 '망단와'라고 하고 말한다.[84] 본인이 직접 적장 고바의 목을 베었지만, 톳지가 전사하고, 본인도 적에게 포로로 잡힐 뻔 했으며, 바지오도 양단화를 구하는 와중에 중상을 입기까지 하였다.[85] 574화 중반에 요양성을 구하러 떠난 순수수 앞을 이미 점령한 성에 있던 엔포를 비롯한 산민족 연합군이 대치하였고, 순수수 뒤로 양단화와 그녀가 포섭한 견융군이 오고 있었다. 그 중 견융족의 애꾸 노병이 순수수에게 다가와 '요양성은 함락되었고, 그 동안 로조의 폭정에도 조나라가 침묵하였으며, 양단화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다양한 산민족을 포섭함은 물론 자신들의 가족들을 살려준다.'고 말했다. 순수수의 반박에도 그 노병은 '양단화는 해방자이고 왕중의 왕이다. 어찌되었든 당신들이 패했으니, 업이 아닌 곳으로 가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공격하겠다.'면서 조군을 철수하게 하였다. 이후, 견융군은 일부만 입성하도록 해, 로조에게 인질로 잡힌 가족들을 석방하는 모습을 보였다.[86] 날짜별로 열거하자면, 주해평원 전투 9일째에 조군에서는 악영이 신에 의해 전사하고, 진군에서는 아광의 부장인 우녕이 전사하고, 아광 또한 중상을 입었다. 이후 군량이 다 떨어진 전투 13일째에는 옥봉대의 궁강이 전사하고, 왕분이 부상(물론 심각한 건 아니다.)을 입었지만, 요운을 다치게 해 뒤로 물러나게 했으며, 이후에 우익 지휘를 비신대가 맡은 14일에는 송좌가 전사한 대가로 신이 직접 조아룡을 무찔렀다. 게다가 14일차 밤에는 갑자기 방난이 난입하면서 진군 좌익에 있던 몽념의 부장 호점이 전사하였다.[87] 열미를 지나 업성을 포위하기 전에 9개의 소성(小城)을 공격하면서 그 성의 백성들을 난민으로 하여 업성에 몰아넣었는데, 그런 난민들 속에 자신의 병사 일부를 숨겨 들어가게 했다. 그동안 장기전에만 몰두하던 이목도 전투 15일째인 결전 와중에 업에서 온 급보를 듣고, 그 동안 하지 않았던 총공격진으로 전환할 정도로 말이다.[88] 이에 진군은 뒤쫓아야 하지만 그러지 못햇는데, 자세한 건 비신대 문서의 '특징'문단의 맨 마지막 내용 참조.[89] 636화에서 환기군과 왕전군의 지도부 회의에서 드러났지만, 업의 성주 조계백(도양왕의 백부)이 비밀창고까지 다 풀었던 것이다. 먼저 들어간 환기군이 일부 식량을 찾아냈지만, 주해평원에 머물던 잔여부대들까지 오고 나서는 다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90] 주해평원 전투의 패전 책임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아마도 그간 쌓였던 도양왕의 질투와 이를 악용한 곽개의 모함이 아닐까 싶다.[91] 압 공략이 성공한 직후에 창평군에 의해 등 부대가 올라오고, 업성에서는 아광이 깨어나 부대를 재편성해 열미를 양쪽에서 압박하던 중에 마남자에게서 그간의 소식들을 접한 순수수와 호첩은 열미와 업, 요양을 포위하던 모든 부대를 북쪽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순수수와 호첩이 자신들의 왕에게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쪽 왕 자체가 문제긴 했지만...[92] 귀환식 당시 신이 그 동안 들고 있었던 왕기의 창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후 649화에서 다시 사용하는 모습이 보였고, 부하들과 함께 집으로 갈 때, 전유의 부하가 화려하게 지은 바람에 모두가 놀랐고, 연회 때에는 가족들까지 데리고 온 부하들이 있었다.[93] 처음 성씨 이야기를 할 때, 진시왕의 성인 '영(嬴)'을 신이 꺼냈지만, 영정 옆에 있던 창문군이 반대하면서 영정이 떠올리려고 햇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그러다가 영정이 표 이야기를 해줬는데, 당시 영정의 대역이란 중임을 받았던 표도 성씨를 무엇으로 할 지 고민을 했다가 최종적으로 당시 영정이 먹고 있던 과일(복숭아(李))를 보고 그걸로 성씨를 정했으며, 그걸 들은 신 역시 자신을 ''이신(李信)'이라고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주변에 있던 하료초와 창문군은 대사가 나가긴 했지만, 상당 부분은 리액션으로 처리했고(...).[94] 641화 마지막 페이지 세로줄과 맨 하단에 "진조연합군 편 종결! 다음 시리즈 설계를 위해 킹덤은 3화분 휴재합니다." "다음화는 6/4일에 재개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어서 이후 그 동안 연재를 쉬게 되었다.[95] 하료초몽의가 함양에서 그간의 전황을 의논하면서 여러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주하면서 생길 불안함을 막기 위해 조정에서는 이사를 파견해 일대 지역을 진나라화를 시키고 있으며, 산양 부근까지 들어온 위의 오봉명군 관련 소식과 진·조 양군의 대치 상황과 함께 한단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목의 모습이 비춰졌다.[96] 아직 대치 중이기 때문에, 제1공의 특별대공을 받은 3인 중 총대장인 왕전만 직접 와서 받았으며, 환기와 양단화는 대리인들을 보내 대신 받도록 하였다.[97] 영정 옆에 있던 신하가 이신의 공적을 말할 때에 방난을 처단한 부분에서 얼마나 떨던지 말을 더듬고 눈물까지 났었으며, 장군으로 임명한다는 발표 직후에 본전에 있던 하료초와 연, 초수, 중계역들을 통해 궁전 근처에서 지켜보던 미평과 전유 등 비신대 일부도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면서 환호하였다. 중간에 들어간 울먹인 모습의 번양 부장은 덤. 그리고 이 다음 화 첫 장에 또다시 신의 집에서 3일동안 파티를 벌였었다.[98] 이 때, 영정뿐만 아니라 창문군도 (그냥) 따라와서 사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사씨는 이사나 창평군보다 창문군에게 들려주는 것이 낫다고 해서 같이 듣기는 하였다.[99] 그 자리에서 여불위는 영정에게 "함양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여긴 꽤나 억누르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불러 그 동안 감추던 원념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끔임없이 반란의 무리가 나오는 원인은 가 아니라 대왕이시다. 노애 반란 당시 자신을 사형시켰으면 했는데, 너무 다정하다. 그 다정함이 나중에 약점이 된다."고 밝혔다. 또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진언이라면서 여불위는 지난 날 가관식 당시 자신과 영정의 대담에서 영정이 밝혔던 것이 아직 유효함을 알고 그의 무운을 빌면서 영정의 천하통일 과정과 이후의 세상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 물러갔다. 여담으로, 이를 막고자 창문군과 사씨가 궁전의 본전으로 들어왔을 때, 영정은 보이지 않아 이들을 놀라게 했다.[100] 물론, 이는 대역이었고, 여불위 본인은 소수의 측근들(혹은 647화에서 나온 세 여인들)과 함께 하남을 탈출해 중화 유람에 나섰다.[101] 천두운과 맞붙던 란미박을 진군 방향으로 가게 해 싸우게 하고, 그 곳에 있던 등과 몽무로 하여금 수호왕이 있는 본진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 사실 몽의는 이 때, 거의 리엑션 캐릭터로 거의 공기화 수준이었다. 그래도 명색히 창평군 휘하에서 공부한 군사인데도...[102] 십호성이 함락된 소식을 듣고, 만우와 다른 장수들은 성을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수도인 '영'으로 이동하고 있던 중이었다.[103] 물론, 몽무는 상대 즉, 위군을 보자마자 그냥 등을 돌렸다. 물론, 란미박도 마찬가지였고...[104] 두 부대 모두 지휘관인 몽념왕분의 능력이 장군이 되면서 더욱 증가하였고, 두 부대 모두 새로 합류한 애섬(낙화대)과 아화금(옥봉대)의 활약까지 더하면서 상승하고 있었다. 반면, 비신대는 이후 지휘부들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뒤쳐진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주해평원 전투에서 전사했던 前 부보병장 송좌의 빈 자리가 후임인 패랑과 간두 등 신병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매우 컸던 것이며, 둘째는 아려가 진단한 것인데, 주해평원에서 강외가 신을 구한 이후 움직이지 못하면서 그가 이끄는 강외대 5천이 평범하게 변한 것이었다.[105] 잘 알다시피 강외가 치우였던 유련을 죽인 이후에 다시 '축제'가 열리면서 사투가 벌여졌는데, 최후까지 남은 것이 강례와 강식이었다. 정정당당하게 하기 위해 마지막 승부를 하려는데, 강례의 칼에 강식이 찔려 죽은 것이다. 강외를 밀어붙이면서 강례는 강식이 배신했다면서 동료라는 건 그저 '양식'일 뿐이라고 말해 이신과 하료초, 싸우는 모습을 보고 달려온 비신대 일원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를 듣고 강외는 심연의 어둠 속에서 돌아오라면서 강식의 유언을 떠올리라고 했다. 이 순간, 화면이 축제 당시로 넘어가면서 강례의 칼에 찔려 죽어가던 강식이 자신을 자책하면서 강례한테 자신의 몫까지 살아남아달라고 말하는 장면과 함께 현실로 돌아와 주저앉고 이후에는 강외에게 안기면서 흐느끼는 강례의 모습들이 비췄다. 이후 670화 상단은 비신대 곳곳을 다니면서 사죄를 하는 강례의 모습이 담겨졌다.[단행본] 단행본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못함.[107] 조와의 전선에서 그 소식을 몽념에게 들은 이신은 의자에서 넘어졌고, 뭐가 뭔지 모르는 강례바보 때문에 육대장군의 내용과 장단점에 대해 비신대와 몽념이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108] 해당 내용은 영정 대신 창문군이 알려주었다. 그것도 환기와 왕전 앞에서... 심지어 환기는 '6번째는 공석'이라고 밝힌 영정에게 이런저런 발언을 하면서 창문군의 심기를 다소 버럭하게 했다.[109] 이와 관련해서 등은 "만약 저희들 중 한 명에게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하겠다."고 밝혔다.[110] 671화 앞부분에 영정이 창문군에게 미리 부탁한 조각상으로 여겨지며, 조각상을 든 함이 등장할 때, 영정은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발언해 주위의 신료들을 놀라게 했다.[111] 에서는 오봉명이 십호성으로 군사를 이끌면서 이전처럼 공격에 나서고, 한에서는 로 장군 장인을 사신으로 보내지만 초에서는 거절당했고, 왕건왕은 사태를 관망하고 있고, 금왕희오르도를 부르면서 영정과 인연이 있는 '태자 단'을 부르려 하고 있으며, 는 혼란 속에서 곽개마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 상황에서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와중에 조의 유목왕의 행동은(...).[112] 이는 전선에서 자리를 같이 한 이신과 강외는 물론 이후에는 강례도 느낄 정도였고, 이신과의 자리에서 강외는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 자리는 이전에 진창 마시다가 뻗었던 미평과 연 부장 등에 의해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674화에서 강외가 머리카락을 자른 모습을 보고, 신을 비롯한 비신대 간부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물론 좋은 쪽으로...[113] 그 와중에 왕전군으로 향하던 몽념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 중에 왕분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몽념에게 듣고 나서 이신이 보인 반응들이 개그 포인트. 다만, 옥봉대는 같이 가진 않았고, 두 부대보다 먼저 갔다.[114] 전영이나 미평이 나름 의견으로 우리들끼리 밀고 나가거나 왕전군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비신대만 밀고 나가기에는 위치가 조 방어선의 중추라 힘이 든다고 아려가 말렸고, 왕전군으로 가는 것도 하료초가 그 쪽에서 현 위치에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일축했다.[115] 다른 군에 비해 자신들이 너무 앞으로 와 적의 본진을 움직이게 했을 뿐더러 이 일로 인해 비어있는 중앙부를 왕전군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16] 중간에 왕전군 진영에 있던 몽념이 왕전에게 진언을 올렸지만, 이미 환기에게서 그러한 연락을 받았다는 왕전의 발언에 놀란 모습을 보였고, 이후에 비신대의 이동과 좌익의 괴멸 소식을 접한 몽념은 왕전과 휘하 장수들을 다그치는 장면도 보여주었다.[117] 이 쪽도 이동하는 중에 환기군의 전령으로부터 전황에 대해 들었다.[118] 부대가 아직 도착하기 전이라 일단 기마대와 강외대로만 어렵게 뚷었으며, 왕분은 강례가 구하게 되었다. 다만, 그녀의 언행에 부상을 입었던 변양 부장마저 흥분을 할 정도면...[119] 본진 가운데와 좌측에도 우측과 마찬가지로 낮은 언덕이 있지만, 그 곳은 적의 사냥터가 된 상태인 반면, 왼쪽 완사지보다 더 좌측이면서 수풀이 무성해 적조차 진을 설치하지 않은 단애절벽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120] 붙잡힐 때, 다른 조나라 병사들이 '도련님'이라 했는데, 이후 진행 상황에서 확인된 바로는 좌익의 주장인 용백공의 차남 '조환'이었다.[121] 주해평원에서부터 들고 있던 왕기의 창을 미평에게 맡기고, 그 전부터 계속 들고 다녔던 표의 칼로 싸우면서 어느 정도 상처를 입혔다. 그러다가 악백공도 무기를 바꾸면서 다시 밀리니까 움직임을 봉쇄하면서 다시 왕기의 창으로 베었다.[122] 아화금은 사실 옥봉이 처음 영구에 당도해 악백공과 대치할 때, 3일에 걸쳐서 절벽 뒤편으로 들어와 살피다가 비신대가 단애절벽에 오르고 나서 후방을 교란하였고, 막판에는 아예 본진으로 기습해 남은 간부들을 전멸시켰다.[123] 683화에서 이미 용백공이 뇌토에 의해 전사한 후, 그의 장남이 새로운 '용백'이 되어 군을 지휘하고 있다.[124] 호첩뿐만 아니라 691화 중간에 전황 모형을 바라보면서 '환기는 그냥 호첩의 목을 따러 갈 생각일거야.'는 몽염의 말을 생각하던 왕전도 전리미와 창앙 앞에서 '손빈인가?', '딱 하나 환기가 쓸 수 있는 작전이 있었다. 허나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역시 그 녀석은 미쳤다. 이런(이건) 나라도 그런 수는 안 쓴다.'라도 딱 잘라 말했다. 직후 마릉 전투에 대한 나레이션은 덤.[125] 사실 호첩은 본인의 상관한테도 이라고 할 정도로 경멸하게 표현을 하는 인물이다. 천하의 이목조차 반어법이나 예를 들면서 독백을 하던가 우회적으로 비난을 하지, 저렇게 직설적으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126] 693화 마지막에 목에 칼을 갖다 대면서, "먼저 가서 뇌토와 술이라도 마시며 기다리마."라고 표현해 환기를 움찔하게 만들었고 이후 695화에서 호첩과 그가 거느린 고문관들에 의해 무참히 잘려나간 뇌토의 모습이 공개되었다.[127] 695화의 중간에 한창 싸우던 중에 적이 물러가고 마론의 전령(마인)에게서 소식을 들은 비신대의 반응을 보여줬고, 그 자리에서 나귀가 "고전했다고 들었는데, 다른 녀석들은 무사하냐?"라고 물을 때, 마인이 "배신자인 댁에게 알려줄 건 없지만, 두목과 마론, 흑앵은 무사하고 나머지는 잘 모른다."라는 식으로 말했고, 이들의 대화를 초수가 듣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696화에서 비신대는 환기의 본대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치되어 환기가 살육을 벌이는 동안 조군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되고 말았다.[128] 696화 마지막에 나온 《사기》의 기록은 사기 번역본(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을 참조하기 바란다.[129] 이신이 따지려고 하기 전에 주둔지에서 강례가 구토하는 걸 앙이 챙겨주면서 소식을 전하는데, 강례가 '강식이 꿈에서 말했던 게 이건가?'라는 장면이 나왔다.[130] 왕이 다가오는데도 환기가 거만하게 맞이하자 창문군이 질색하는데, 영정은 "원래 그런 자"라면서 그냥 앉았다.[131] 영정이 다시 묻자, 환기는 "잊었다."라고 능청맞게 대하자 결국 영정은 표사아한테 환기를 참하라 하고, 환기 측에서는 흑앵이 막아서보지만, 본인의 칼만 부러졌고, 마론이 끼어들어 해명을 하긴 했지만, 영정의 반박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132] 이 부분에 대해 정리하면, 환기는 영정이 "너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기대를 하고 있어."라면서 남의 땅을 침략하고 죽이고 빼앗은 후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 영정은 "(사람을) '기대'하고 믿고 있기 때문에 고난하면서도 최대의 길을 강압적으로 달려나가서 뚫으려고 한다면서 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전황을 털어놓으면서 화의의 주장에 동조하는 흑앵은 덤.[133] 물론, 가면서 "다음에도 이런 폭거를 할 시 용서치 않겠다!"라고 했다. 덤으로 다음 번에도 다리를 올릴 시 다리를 베어버리겠다는 창문군의 말도 덤.[134] '시도했다'라는 말로 보아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흑앵으로부터 '배신자','꺼져'가 반복되었는데, 길게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135] 염파 문서에도 나오지만, 그 과정이 처절하다.[단행본] 단행본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못함.[137] 물론, 이는 만리장성은 아니고, 한단을 방어하기 위해서 이목이 지난 3년 동안 쌓은 성으로 볼 수 있다. 702화의 하단부터 언급이 되는데, 그 길이가 250리(약 100km)가 되며, 이목이 조정을 떠난 이후 곽개가 그걸 마무리했다고 한다.[138] 703화 초반에 함양 왕궁에서도 왕전이 보내온 이 소식으로 인해 나름 여러 해석을 하였고 그 결론은 왕전의 생각과 같았다. 아래에서 왕전과 환기의 부대가 올라오면서 서쪽에서 대규모의 부대를 보내 합류한 후, 의안을 공격하는 것이다.[139] 평양과 무성 지역은 양단화군이 인계받았고, 양단화군에 들어가 있던 벽이 휘하 병력 1만과 키타리가 지원해 준 나쟈라족과 함께 진군하게 되었다.[140] 사실 703화에서 왕전이 함락한 무성에 비해 환기군이 평양을 함락한 것이 10일이나 더 걸렸는데, 위의 참수의 여파로 인해 평양성의 병사들이 최후까지 항전한 이유도 있었다. 환기도 그걸 알았는지 평양성의 포로들은 비신대에게 맡겻다고 한다.[141] 705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알여를 방어하고 있던 병력들은 작년에 환기에게 참수당했던 병사들의 유족이라서 진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서 '동귀어진' 식의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142] 물론 환기군은 그 자를 잡아 고문을 하려고 했지만, 이신은 환기군의 저지른 지난 날을 상기시키며 용서하지 않겠다는 사자후에 할 말을 잃긴 했고, 이신은 살아남은 결사대에게 자신이 벤 젊은 '용백공'의 시신을 가저가라고 했지만, 역시 원한에 사로잡힌 자들이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해치우려고 했다만, 따라온 강외와 강례에 의해 처단되었다.[143] 이신은 이 때 "나쟈라족 퇴마의 힘..."이라고 드립을 쳤지만, 바로 이어서 하료쵸는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라고 맞받아쳤다. 사실 712화 마지막에 적려성을 공격하기 전부터 강례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144] 우물에 독을 탔는데, 물을 그나마 적게마신 벽과 일부 병사는 결국 살아남아 포로가 된다[145] 환기군의 그 오기코가 끝까지 살아남았다![146] 대장 신과 초수, 아려등 기마대와 강력한 보병들[147] 노는군대란 뜻이지만 여기선 그냥 자기자리만 겨우 버티는 부대[148] 애초부터 이목의 전략은 항상 뭔가 특별한 활약을 하는 이신과 그의 비신대를 우선적으로 전장에서 떼어놓자는 것 이었고, 그 계략이 완벽하게 성공하여 번오전투가 완전히 끝날때 까지도 이신은 거의 활약을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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