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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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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보3. 유년기4. 청년기5. 처형 사건6. 중후반기7. 사망

1. 개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연보

년도 사건
<colbgcolor=#fff,#1f2023> 1821년 <colbgcolor=#fff,#1f2023> 러시아력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등군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1831년 양친이 툴라현에다 영지를 사들이자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다.
1834년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1836년 문학사(文學史)를 가르치는 교사의 감화를 받아 푸시킨에 열중하다.
1837년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도스토옙스키야가 죽다. 5월, 형과 함께 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코스트바로프 기숙학교에 입학, 공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7월, 군무에서 아버지가 제대하다. 9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다.
1838년 1월 16일, 공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이때부터 발자크, 위고, 호프만 등의 소설을 탐독하다. 가을 진급시험에 낙제하다.
1839년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서 아버지가 피살당하다.
1840년 호메로스, 실러, 프랑스 고전 비극을 탐독하다. 11월 29일에 하사관, 12월 27일에는 견습사관이 되다.
1841년 이해가 시작될 무렵 <보리스 고두노프>, <마리야 스추아르트>의 극작을 시도했으나 둘 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8월 5일, 공병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특별연구를 위해 공병학교에 남다.
1842년 8월 11일, 중위로 진급하다.
1843년 8월 21일, 공병학교를 졸업, 페테르부르크 공병대에 편입되다. 23일, 제도과에 지원하여 근무하다.
1844년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번역하다. 조르주 상드의 번역도 시도하다. 10월 19일, 중위로 진급함으로써 제대가 허락되다. <가난한 사람들> 쓰기 시작하다.
1845년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하다. 네크라소프,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다. 여름에 <분신>을 쓰기 시작하다. 가을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 쓰다. 풍자 신문 ≪즈브스칼≫의 발행을 계획하다.
1846년 1월 15일, <가난한 사람들>을 네크라소프가 편집하는 ≪페테르부르크 문집≫에 발표하다. 2월 1일 <분신>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봄, 페트라세프스키와 알게 되다. 10월에 <프로하르친씨> 발표하다. 12월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쓰기 시작하다.
1847년 이해 첫무렵 벨린스키와 사이가 나빠져 페트라세프스키와 가까워지다.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을 ≪현대인≫ 1월호에 발표하다. <여주인>, <조국의 기록> 10,11 월호에 발표하다. <가난한 살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48년 <폴준코프> 발표하다. <약한 마음>, <유부녀>,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와 결혼식>, <백야>를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1849년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를 ≪조국의 기록≫ 1,2,5,6 월호에 발표하다. 3월, 페트라세프스키 집에서의 회합에서 벨린스키의 고골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다. 4월 23일 페트라세프스키 회의 검거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붙들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감옥에 감금되다. 감금된 동안 <작은 영웅>, <첫 사랑> 쓰다. 12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의 병역근무를 선고받고 24일 밤에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다.
1850년 유형지인 옴스크 감옥에서 복역하다.
1854년 2월 15일 형기가 만료되어 3월 2일 일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수비연대 제 7 대대에 편입되다. 가을부터 그 마을의 세무관리의 아내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하다.
1855년 <죽음의 집의 기록> 쓰기 시작하다.
1856년 2월 15일, 근무 성적이 좋아 하사관으로 진급되다. 3월 24일, 황제에게 사면 탄원서를 내다. 10월 1일, 척명으로 대대의 기수(旗手)가 되다.
1857년 2월 6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크즈네츠크에서 결혼하다. 4월 18일, 옛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척명이 내리다. 8월, <작은 영웅>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이해 말 사표를 제출하고 모스크바에서의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다.
1859년 3월 18일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편, 거주지는 트베리로 한정되다. 7월 2일 트베리에 도착, 가을에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황제에게 내다. 12월 27일, 페테르부르크에의 거주허가가 내려 트베리를 떠나다.
1861년 형과 함께 ≪시대≫를 창간, <학대받은 사람들>을 1월호부터 연재하다. 연재가 끝나자 단행본으로 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1월부터 ≪러시아 세계≫에 연재했으나 4월부터는 이 작품을 ≪시대≫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게재, 이듬해 완결하다.
1861년 6월 7일 출발하여 파리, 런던, 제네바를 여행하다. 8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다. 이해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3년 5월 폴란드 문제에 관한 스트라호프의 논문 <운명적인 문제>(4월 호) 때문에 ≪시대≫가 발행정지처분을 받다. 여름에 연인 수술로바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다. 여행중에 도박에 열중, 경제적인 궁핍으로 <도박자>를 구성하다. 수슬로바와의 사랑에 파탄이 일어, 10월 모스크바의 아내에게로 돌아오다. 겨울, 아내의 병이 악화, 병석을 떠나지 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1864년 3월 24일, ≪시대≫를 계승한 새로운 잡지 ≪세기≫ 창간호를 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창간호에 게재하다. 4월 16일,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다. 6월 10일, 형 미하일 죽다. 12월 25일, 친구 그리고리예프 죽다. 이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마르타 브라운과의 연애사건 일어나다.
1865년 안나 그로코프스카야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하다. 4월 ≪세기≫ 폐간되다. 7월에 세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다. 다시 수슬로바와 사랑을 속삭이며 도박에 열중, 궁핍하여 <죄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다시 사랑에 실패, 11월 러시아에 돌아오다.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팔아 버리고, 이듬해에 걸쳐 전집 3권을 출간하다.
1866년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 1, 2, 4, 6, 8, 11,12 월호에 연재 발표하다. 여름에 모스크바 근교 류플리노에 머물다. 10월, <도박자>를 여자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에게 구술하여 탈고하자마자 전집 3권 속에 수록하고 곧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7년 2월 15일, 스니트키나(20 세)와 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하다. 4월 14일, 그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4년간 머물다. 6월, 드레스덴에서 투르게네프와 말다툼하다. 8월, 제네바로 옮겨가다. 9월 <작가의 일기>를 계획, 연말에 <백치>를 쓰기 시작하다. 이해에 <죄와 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8년 <백치>를 ≪러시아 통보≫ 1, 2, 4~12 월호에 연재,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2월 22일, 제네바에서 맏딸 소피야가 태어났으나 5월에 폐렴으로 죽다.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옮겨 12월 피렌체에 도착, 연말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하다.
1869년 7월 말까지 피렌체에 머물다. 스트라호프가 편집하는 ≪여명≫에 관계하다. 8월, 이탈리아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다시 드레스덴에 머물다. 9월 14일, 둘째딸 류보피(에메) 태어나다. 생활이 궁핍하여 <영원한 남편>을 쓰기 시작, 12월 초에 탈고하다.
1870년 <영원한 남편>을 ≪여명≫ 1, 2 월호에 연재. 1월부터 <악령>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탈고. <죄와 벌> 제 4판이 나오다.
1871년 <악령>을 ≪러시아 통보≫ 1, 2, 4, 7, 9, 11 월호에 연재, 제 2편까지 완결했으나 그 후 1년간 중단하다. 7월 8일, <영원한 남편>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72년 근동 지방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악령> 제 3 편을 ≪러시아 통보≫ 11, 12 월호에 발표하여 완결하다. 주간지 ≪시민≫의 편집국에 입사하다.
1873년 <작가의 일기>를 ≪시민≫ 1 호에 50 호까지 1년에 걸쳐 연재하다. <악령>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4년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시민 편집자≫가 되다. 3월 말 검열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가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남쪽 지방 온천장으로 옮기다. <미성년>을 쓰기 시작하다.
1875년 네크라소프의 요청으로, 그가 편집하는 잡지 ≪조국의 기록≫에 <미성년>을 발표하다. 1, 2, 4, 5, 9, 11, 12 월 호에 연재하여 완결하다. 여름에 서부 독일에 머물다. 8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태어나다. <죽음의 집의 기록> 제 4판 나오다.
1876년 1월부터 <작가의 일기>를 원간으로 게재하다. <미성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7년 5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죽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 제 5판이 나오다.
1878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2, 4, 5, 6, 8, 9, 10, 11 월호에 연재하다. 이해 <작가의 일기> 재판 발행하다. <학대받은 사람들> 제 5판이 나오다.
1880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4, 7, 8, 9, 10, 11 월호에 계속 연재하다. 5월 25일 모스크바의 작가, 저널리스트가 주최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축하회가 베풀어지다. 8월, <작가의 일기>를 복간하다. 푸시킨제(祭)에서 연설하다.
1881년 2월 9일 오후 8시 30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면하다. 향년 59세. 2월 12일, 페테르부르크 대사원 묘지에 묻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3. 유년기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와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쪽은 상인의 딸인 러시아인이지만 아버지 쪽은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직업은 의사였다.

도스토옙스키의 가계는 핀스크 소택지에 있는 도스토이예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유래되는데 그의 성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서러시아에서도 가장 황량한 지방으로 인종적으로도 다채로워서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이 잡다하게 섞여 있는 곳이다.

그의 선조 중의 누군가가 핀스크 소택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했으며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인종적인 원류에 대해서는 추측의 범위 이상을 넘을 수는 없다. 시베리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알게 된 폴란드 정치 망명가는 "그의 성이나 용모를 봐서 폴란드 출신임에 틀림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19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로 나왔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1812년 전쟁[1]에서는 군의관이 되었다. 1819년 모스크바의 한 상인의 딸과 결혼하고서 군적을 떠나 마린스키 병원의 상근 의사로 임명되었고 근무 시간 이외에는 파트타임 진료에도 종사했다.

그의 형 미하일은 1820년에 태어났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에 출생했다. 이 생년월일은 교회의 기록에 의한 것인데, 묘하게도 우연이든 고의든 도스토옙스키는 후년에 자신의 나이를 한 살 낮추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뒤에 바르바라와 안드레이,약간의 간격을 두고서 베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라가 출생함으로써 완전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년시절 집은 병원 부속의 아파트로서, 현관, 식당, 응접실, 부엌으로 이뤄졌다. 현관의 창이 없는 구석 쪽을 판자로 막아서 큰 아이 두 명의 침실로 쓰고 식당은 놀이터 겸 공부방으로 썼다. 저녁에는 일가가 응접실에 모여서, 아버지가 처방전을 쓰는 데 바쁘지 않을 때는 러시아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란한 분위기였고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했다고 한다. 응접실 끝 쪽의 구석은 부모님과 어린아이들의 침실이 되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아이가 생겼을 때는 방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여름이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병원 뜰에 회복기의 환자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 중에서 특히 나이 어린 환자들과 애기하기를 좋아했다.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이때부터 다듬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사귐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아이들에게는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가족들은 모스크바에서 80km 떨어진 세르게이 트로이츠기 수도원을 해마다 한 번씩 참례했는데, 이를 포함한 한두 번의 외출 외에 10살이 될 때까지 도스토옙스키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과 똑같은 흔적은 그의 생활이나 작품 속에 분명히 남아 있다. 세 칸짜리 집에서 여6명의 형제들과 자라난 그가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면 매우 모순에 찬 것 같이 느껴지지만, 도스토옙스키 일가는 독립되어 사회생활이란 것이 없고 대외적인 일이 없는 가정이었다.

이와 같이 묘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사교활동에 익숙지 못했고 긴밀하지 않은 가벼운 인간관계를 맺기도 하며 삶을 즐기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0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60km 떨어진 툴라 시의 다로보예에 있는 조그만 농장을 샀다. 그해부터 어머니와 아이들은 거기서 여름을 보내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여름 중의 한두 주는 병원을 떠나 이곳으로 오곤 했다. 그 여행은 마차로 이틀이 걸렸다. 아이들에게는 이 여행이야말로 모스크바의 닫힌 세계로부터 벗어난 해방이었고, 아버지의 엄격한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형제들은 말을 탈 수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농부[2]들도 있었지만 여기서도 또래 아이들과의 이야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독서를 하게 된다. 12살이 되던 해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이 곳에서 월터 스콧[3] 전집을 읽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 부모님의 농장에서 보낸 여름을 회고하며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깊고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들이 자라면서 교육다운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해 최초의 전원 방문이 있었을 때부터였다. 원래는 어머니가 알파벳을 가르쳤고 저녁에 일가의 독서회에서 성경과 카람진의 역사책에 나오는 주요한 에피소드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승려와 프랑스인 2명의 가정 교사에게 배우게 된다. 이들 교사 중 수샤르라고 하는 인물은 러시아로 귀화해 자신의 이름을 드라슈소프라는 러시아풍의 이름으로 바꿔 조그마한 사설 학교를 열게 되는데 1813년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형은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

1814년, 형제는 체르마크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사립기숙학교에 들어가 3년을 지내게 된다. 학과목은 당시 유행하던 일반적인 것이었고 준비 시간 없이 하루 8시간의 수업이었다. 이 학교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학교였으나 도스토옙스키는 학우들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의 작품 중 이때의 학교생활에 관해 쓴 내용이라고 추측하는 부분이 있다. 미성년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사교에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나는 나 혼자만의 구석을 만들어 그 속에서 지냈다.

특히 부모의 성격이 이와 같은 비사교적인 성격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급우가 도스토옙스키 집의 담장 안으로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형제는 혼자서 외출을 한 적이 없었고 용돈이 뭔지를 몰랐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점,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점, 자신이 죽으면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는 등의 말을 자주 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1837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때 도스토옙스키는 15살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말을 할 때 경의를 표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크게 두드러진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 이미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이 학교의 급비생으로 만들어 놓았다. 5월, 아버지와 도스토옙스키는 육로 여행에 오른다. 두 도시를 잇는 철도는 10월에야 개통되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난생 처음으로 홀로 있게 된 두 형제는 코스토마로프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 공과 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게 된다.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돌아갔으며 그 후 형제는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9월에 입학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1838년 1월 공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형 미하일은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거부되어 수 개월 후 레발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형제간의 이별로 서신 왕래를 하게 되었고 여기서 남은 얼마 안 되는 편지는 이후 수년간의 도스토옙스키의 중요한 전기 자료가 된다.

학교에 들어간 첫해에 16살의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유심히 그를 살핀 사람들의 얘기로는, 서투른 동작에다 작달막한 금발의 이상하리만치 푸른 눈을 지닌 젊은이였다고 한다. 댄스 시간이나 그 외 학교생활의 밝은 면을 피해, 어둡고 통풍이 나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양초 불빛 아래 책을 읽거나 무엇인지를 쓰거나 또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의기투합하는 한두 명의 친구들과 인생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50년 후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한 뒤에 공식 전기에 쓰인 것이다.

이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월터 스콧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또한 프리드리히 실러, E. T. A. 호프만, 오노레 드 발자크의 책도 좋아했다. 이때 젊은 자기 자신을 '몽상가'로 표현하며 낭만적 와 극을 소수 쓰기도 했다. 이 시절에 읽은 통속 소설들이 그의 취향을 형성하는데 주효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면서부터 공과 학교의 따분한 학과목에 대해 창작으로 스스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이때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시들로프스키다. 그는 25살의 하급관리로서 낭만파 시인이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여서 자연스레 도스토옙스키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만년의 도스토옙스키는 친구인 솔로비요프에게 자신의 생애에서 기억할 만한 영향을 준 사람으로 시들로프스키를 꼽았다. 그러나 1838년 시들로프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게 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생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모스크바로부터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경위에 대해서 도스토옙스키 일가는 80년 동안 침묵했으며 도스토옙스키 공식 전기는 이 사건을 전혀 다루지 않았고 현존하는 편지 어느 곳에서도 그 사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해에 그와 형 미하일 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1통의 예외를 빼고는 모두 소멸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딸이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밝혔지만 이 딸이 꼭 믿을만한 증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신빙성은 적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아내의 사망으로 생각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고 큰 아이 2명은 학교로 보내고, 다음의 세 아이들[4]은 모스크바에 두고서 끝의 두 딸을 데리고 조그만 시골 농장으로 은퇴해 버렸다. 여기서 그는 고독한 생활을 보냈는데 그의 원래도 특이했던 성격과 행동은 점점 더 기묘하게 변했고 농노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미하일과 표도르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낸 2년 후 1839년 여름 어느 날 그는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범죄는 의심할 나위도 없도 원한 관계였고 그가 소유한 농노의 소행이었다. 이 때의 도스토옙스키의 나이가 18살이었다. 이 당시의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보낸다.
형님, 아버지의 죽음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입장은 더욱 두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우리 가족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4. 청년기

학교를 마친 후 번역 작업을 하다가 1845년에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본 평론가 벨린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극찬을 받았으며 아직 24세인 도스토옙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갑작스러운 인기와 관심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 사회주의나 급진파 모임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데뷔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초고를 편집장에게 넘겨주고 나서 잠자던 중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네크라소프와 잡지 편집장이 당일 새벽에 "지금 잠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잠을 깨웠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5. 처형 사건

이런 식으로 지내던 중 1848년에 유럽 전체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도스토옙스키가 몸담고 있던 페트라솁스키 클럽이 주민 봉기를 계획했으며 도스토옙스키도 농노들의 자유를 위해 가담했으나, 그 독선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곧 모임에서 왕따당하고 빚은 빚대로 늘어날 뿐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여러 스파이를 두고 있었는데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가담한 그룹 23명이 체포된다.[5]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형 선고를 받기 위해 꺼내졌으며, 이전에는 보통 이 정도 죄는 몇 개월 간 유배가 고작이었으므로 이들은 '이제야 끝나는구나'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부, 수십 명의 병사들과 수천 명의 군중, 그리고 관들이었다.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으며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자기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 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1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1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6]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후, 첫렬 죄수들의 머리에 두건이 덮이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 사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정말로 이들을 처형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혁명 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 쇼를 한 거였다.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강 잡기' 차원에서 이런 처형 연극을 즐겼고,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때의 경험을 '죽음의 집에서의 기록'이라는 소설에서 풀어놓고 있다. 이런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정신질환을 얻어 사형대에서 풀려났음에도 이후의 삶을 망치는 불행한 케이스도 있었으나, 도스토옙스키는 반대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 비록 도박 중독은 그 후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사형대에서 극적으로 풀려나긴 했으나 감형된 것이지 사면된 것은 아니었고,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혁명 동지들은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7] 중노동 후, 형벌의 연장으로 강제로 군 입대를 하게 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1844년 중위로 제대한 상태였기에 재입대나 마찬가지였는데, 일종의 가석방된 죄수 신분이라서인지 이번엔 사병으로 재입대하게 되었다. 그래도 군 복무 중 평이 좋았는지 짧은 군 복무 기간 동안 하사관으로 진급하기도 했다.

1854년 석방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5년 뒤인 1859년 해배령이 내려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6. 중후반기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이 바뀌어 4년간 최악의 환경을 견디면서 머릿속에 글을 썼다고 하며, 군에 들어가게 된 후 출판하는 것을 허가받게 된다. 근데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 성격을 못 죽이고 따돌림당했다. 위에 언급된 책에서는 "동료들은 내가 너무 잘난 집안 출신이라서 날 왕따시킴"이라고 정신승리했지만.

이후의 그는 죽는 날까지 마치 페이지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연달아서 내게 된다. 그 전에는 글자 하나마다, 한장마다 시간을 들이며 하루 종일 망상을 하던 그였지만 이후로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쓸 내용을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그의 작품들은 거의 극도로 세밀하고,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실제 이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의 저작 백치에도 주인공 미쉬킨이 말하는 삽화로서 등장한다. 시간을 낭비하던 한 남자가, 사형대 앞에 서고 나서야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스포일러]

사형 사건 이후 그의 글은 어둡고 현실적으로 바뀌게 되지만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로부터는 탈피하지 못했다. 오죽이면 문학계에서 도스토옙스키 안티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랬을까.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서유럽자유주의 사상을 멀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강경 국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의 전기 저자에 따르면, 황태후나 차르에 대한 탄원서와 징징거리는 편지를 수도 없이 썼다고 한다. 또한 누군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면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그 경험에 고마워했다. 자유주의에 관해서 고생을 좀 한 만큼 멀리하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시베리아 유배 생활이 끝나고 1857년에 유부녀였던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Мария Дмитриевна Исаева)와 결혼한다. 유부녀와 바람이 난 것은 아니고, 이사예바의 남편이 죽자 원래부터 이사예바를 사랑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적극적으로 청혼한 것. 그러나 결혼 이후에는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하필 이 시기에 간질 발작을 일으킨데다 생활고가 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9]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1864년에 사망한다. 소설 죄와 벌의 등장 인물인 카쩨리나 이바노브나 마르멜라도바는 바로 이 이사예바를 모델로 완성된 캐릭터다.

도스토옙스키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 살았으며, 이 때문에 그의 후기 소설들은 굉장히 길다. 왜냐하면 그 시절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책정했고, 따라서 소설의 길이가 늘어나면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나마 돈이 남더라도 도박장에서 날리고 빚만 더 벌어왔다. 이렇게 돈에 쪼들리다 보니 쓰고 있던 <죄와 벌>을 급하게 완성했으며 <노름꾼>은 26일 만에, 그것도 <죄와 벌>을 쓰는 중에 구두로 완성했다.

이 때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Анна Сниткин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애독자였던 가정에서 자라나 본인도 그 애독자였던 스니트키나는, 사실상 지금의 작가 도스토엡스키가 있을 수 있게 한 일등공신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1866년 <노름꾼>을 시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구술을 속기로 받아적은 다음 보기 좋게 정서해서 출판사로 넘겨 주는 유능한 속기사로 활약했는데,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비록 퇴고는 제대로 못할지언정[10] 계약 기간에 맞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니트키나는 <노름꾼>을 출판사에 넘긴 후 도스토옙스키의 청혼으로 결혼하는데[11], 이때 그녀의 나이가 21세, 도스토옙스키는 46세였다. 도스토옙스키 사망 당시에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겨우 35살이었다. 그런데도 재혼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의 글과 유품을 정리해서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기증하고, 남편과의 삶을 회고록으로 묶어 출판하는 등 남편이 잊혀지지 않는 데에 여생을 바치다 1918년 만 71세로 사망했다. 이 정도면 단순히 성공한 팬 정도가 아니라,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구원자인 셈.

도스토옙스키는 여생 동안 수많은 빚에 시달렸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와 형 미하일과 한 출판사 일이 연거푸 실패하였고, 이 와중에 세상을 뜬 형의 빚도 자진해서 맡고 과부가 된 형수와 그 자식들도 지원했고, 거기다 첫째 아내가 이전 결혼 생활에 낳은 자식까지 돌보게 된다.

그런데 미하일의 미망인인 형수는 사치가 심했고, 양아들인 파벨도 양아치라서 그는 경제적으로 시달렸다. 게다가 형수와 양아들은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도스토옙스키를 고마워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막장이었다. 파벨은 원하는 돈을 내놓지 않으면 양아버지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물고문을 할 정도로 패륜아였으나 마음 약한 그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수와 양아치 파벨은 도스토옙스키를 괴롭힐뿐만 아니라 아내인 안나까지 구박하였다. 안나도 폭발하여 남편에게 "형수와 양아들을 버리고 떠나자"며 설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잡지 「러시아 통보」에서 원고료를 가불하여 형수와 양아들에게 생활비로 준 다음, 1867년 4월 14일 형수와 양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다.

서유럽에서 선인세로 받은 돈을 원정 도박으로 날리고 다시 받고 하던 즈음에는 <악령>을 집필하다 결국 러시아로 다시 귀국한다. 귀국할 돈도 도박으로 날려먹어서 출판사에게 '러시아로 가서 글 써야 함' 하며 징징대서 간신히 차비를 뜯어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 이후 본격 아나키즘, 무신론자 까기 소설인 <악령>이 성공하자 이전과는 반대로 보수층과 친해진 도스토옙스키는 신문사 주필 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 성격 어디 못 가서 1년도 안 돼서 때려치워야 했다.

한편, 그가 도박중독에 걸린 이유를, 있는 돈을 다 날리는 방법으로, 과거 자신이 사형수가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의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라는 설도 있었다. 이런 심리를 소설 <노름꾼>에서 묘사하고 있다. 왜 도박에 빠지느냐는 질문에, '주변이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라고 답했는데, 이 말이 폼나보였는지 몇몇 도박광들은 이걸 그들의 좌우명쯤으로 여기고 살아가기도 하는 모양. 걍 무시해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끝내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뗐는데, 이 또한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덕분이었다. 남편이 도박에서 아무리 돈을 날려도 안나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선선히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던 것. 이런 생불같은 아내에게 아무리 그래도 미안해졌는지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도박을 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도박만 즐겼던 게 아니라 남에게 적선하는 데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박을 끊었어도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툭하면 아내에게 선물할 옷이나 아이들 장난감을 사오는 통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알뜰한 아내 덕분에 차츰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안나가 출판사와의 계약에 매여서 남편이 집필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포착하고선 직접 출판사를 하나 차려 버렸기 때문. 이 출판사를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철저히 아내에 의해 관리되었고, 덕분에 경제 사정도 점점 나아졌다. 이 출판사는 도스토옙스키 사후 안나의 결정으로 문을 닫는다. 꽤 튼실한 출판사여서 인수제의도 있었다고 하는데, 남편의 이름을 아름답게 지키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안나가 제의를 물리치고 아예 출판사를 닫아버린 것.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스타라야 루사라는 지방 도시에 2층 목조 주택 1채를 구입할 정도로 경제력을 회복했다. 당시 러시아의 중산층들도 단층집에서 살았고, 구입한 집의 크기도 상당한 편이어서 중산층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축에 속하는 수준의 경제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현재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다.

안타까운 점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소설의 1부에 해당하며, 작품의 서문에 앞으로 20년 동안 그 소설의 뒷부분을 쓸 것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망으로 미완성작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들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더 가치가 높은 문학 작품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꼽기도 한다.

7. 사망

생활에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미성년>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차례로 발표하고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881년 1월 26일, 재산 상속 문제로 여동생이 집에 찾아와 말다툼을 하고 간 후 갑작스럽게 각혈이 시작되고 병상에 누워 투병하다가 1월 28일[12] 저녁 8시 38분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결핵, 만성 기관지염, 폐기종으로 전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장례식상트페테르부르크 사상 유례없던 규모였다고 한다. 그 시절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보러 왔다고 하니 말 다했다. (열린책들 전집에는 6만 명이라고 되어 있다.)

그의 추모사는 드미트리 팔름이라는 무명 작가가 낭독했다. 팔름은 도스토옙스키와 개인적으로 매우 친했던 인물인데, 바로 도스토옙스키와 처형대에 묶였다가 사형 집행 직전에 특사로 풀려나 같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


[1] 나폴레옹 전쟁에도 종군했다.[2] 환상 속의 이리에 대한 어린이다운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마레이라는 농부가 그를 안심시켜 주었던 10살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875년에 쓴 작품 미성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3] 아이반호의 작가.[4] 바르바라는 결혼했고, 두 아이들은 학교로 보낸다.[5] 이 때 도스토옙스키는 클럽에서 인쇄기를 맡고 있었는데, 이는 대중 선동 담당을 뜻하기 때문에 중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룹은 도스토옙스키가 보수주의로 전향을 한 뒤에 쓴 본격 아나키즘, 무신론자 까기 소설인 악령에서 등장한다.[6] 몇몇 책에서는 봉기 내용은 빼고 처형 사건 내용만 적어놓아서 도스토옙스키가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처럼 묘사된다.[7] 옴스크는 현재 시베리아 연방관구 서부에 있는 도시로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옴스크를 관통하는 이르티시강과 함께.[스포일러] 하지만 묘하게도, 그 남자는 살아나게 되자 결심했던 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냈다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도스토옙스키도 마누라 잘 만나기 전까지 도박을 못 끊었으니 자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도.[9] 도스토옙스키와 이사예바의 자세한 이야기는 고려대 노문과 석영중 교수의 기사에 실려있다. 기사 링크-뭐, 애 딸린 미망인과 결혼하겠다고?[10]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유독 문장이 긴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문장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얼른 출판사에 넘겨야 했기 때문. 심지어 <미성년>에서는 인물의 이름이 중간에 바뀌기도 한다.[11] 일설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도 나이차가 너무 나 괜히 청혼했다 거절 당할까 두려워 첨엔 원고를 상의하려는듯 글을 하나 써서 갔는데, 그 내용이 늙고 병든 화가가 젊은 여성에게 청혼한다는 것이었다. 즉, 자기와 안나의 상황을 은근슬쩍 비유한건데 이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 안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청혼했다고 한다.[12] 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 9일. 가톨릭 국가들은 그레고리력의 시행이 빨랐지만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18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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