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피해자 중심주의(Victim-centered approach)란 범죄 사건 피해자의 진술, 증언 및 의사를 가장 우선시해야 하며, 형벌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 및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대체로 성범죄, 가정폭력, 학교폭력 문제에서 특히나 많이 주장된다.
2. 설명
형벌의 목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피해를 끼친 만큼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응보주의(엄벌주의), 전체 범죄율의 감소를 목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일반예방주의(공리주의) 그리고 범죄인의 재사회화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특별예방주의(교정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의 고전적 형벌론들은 개인보다는 사회 공공의 이익에 주목하고 있고, 그 개인도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피해자를 강조하는 이념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범죄 사건의 판단을 사회,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결과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를 탄생시켰다.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르면 범죄 사건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피해자란, 물론 범죄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을 피해자의 (유)가족들도 포함한다. 결국 범죄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우리 사회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다수의 이익도, 가해자의 이익도 아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피해자는 범죄 처리 절차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처분은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며, 범죄인의 반성과 사과의 진실성 또한 피해자가 판단해야할 몫이다. 당사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사회가 마음대로 가해자를 용서해주거나, 임의로 벌해버려서는 안 된다. 피해자 상처는 안중에도 없이 범죄율의 등락에만 관심을 가지며 모든 형량을 계산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가해자만을 두둔하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무고죄로 몰아가는 등의 2차 가해를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 비판을 금기처럼 여기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탓도 있다면서 공감은 못할망정 잘못 없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덮어씌우는 오늘날 사회 분위기는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3. 옹호
3.1. 피해자 책임론 반박
오늘날 현대적 의미의 형벌은 기본적으로 범죄인의 주관과 고의, 의도에 따라서 그 처벌이 다르다. 피해자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것이 살인죄인지, 폭행치사인지, 과실치사인지가 갈린다. 따라서 모든 형벌의 잣대를 '피해자'로 전제하는 '피해자 절대주의'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에서도 이러한 가해자의 의도에 따른 형벌 차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형법은 행위의 선악을 분별하는 윤리도덕적인 잣대에서의 목적도 분명 존재하기에, 형벌이 일명 '가해자 중심주의적 관점'으로 보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당장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증거재판주의, 죄형법정주의 등 오늘날 대원칙으로 인정받는 형법의 기본 전제들 또한 가해자적 시각을 인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적 시각을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해자의 관점을 참고해야만 그 의도에 따른 범죄인의 성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면모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해자 중심주의적 시각이 만연한 현대 형법 질서는 역으로 피해자에 대한 과도한 합리성을 요구하며 피해자들을 위기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는 종종 피해자의 증언이 번복되거나, 피해자가 속칭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피해자가 한 증언의 효력이나 피해자의 고발 행위의 신빙성이 의심받기 마련이다. 이것이 현대 형법 질서에서의 합리적 판단이다. 그러나 과연 피해자가 증언을 번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의 신빙성을 배제하거나,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보였다고 무작정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정당할까? 피해자도 인간이고, 실수를 할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착오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 헛나올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맥락과 피해자의 사정 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전제해버린다면 오히려 객관적인 판결이 불가능해진다. 즉, 피해자의 관점에서 왜 피해자가 그러한 행동을 했을 지에 대한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며, 단순한 실수를 고의적인 무고죄 행위나 허위 진술로 몰아세우는 등 피해자 비난적인 사법 시스템으로 굴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신고자에 의한 무고죄 사건을 증가시키고, 특히 성폭력 무고죄 사건에 대해서는 합의된 성관계 파트너도 범죄자로 몰아갈 수 있다며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신고를 하는 피해자들 중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상대를 악의적으로 처벌하고자 거짓말까지 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을 지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무고죄가 존재하는 이상 누구라도 섣불리 허위 사실로서 신고할 수 없다. 또한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를 고려했을 때, 그러한 누명 씌우기가 성공하여 상대방이 처벌받을 가능성도 높지 않다. 더군다나 상대방을 범죄자라고 지목하여 신고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물론, 개개인의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선 시간과 돈도 상당히 소모되는 행위이다. 신고자가 상대를 신고했다는 것은 이러한 수많은 가능성들을 모두 감수하고자 다짐했다는 뜻인데, 이런 맥락을 고려해봤을 때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심으로 범죄 피해를 당해 신고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피신고자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을 확률은 매우 높다. 오늘날의 형법은 무고자에 대한 처벌을 줄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신고자가 무고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치지만, 형식 논리를 배제한 채 확률적으로만 따져봤을 때에는 신고자의 주장대로 상대가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피해자가 허위 사실을 고소할 이유가 없거나, 그러한 누명을 씌우면서 오히려 피해자 본인이 큰 타격을 입고, 사회적인 위신이 깎이는 등 피해자의 행동 맥락을 고려했을 때 거짓 증언 및 신고를 한다고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증언이 번복되거나, 범행을 당한 피해자의 특수성이 통상적으로 비합리적이거나 남다르다고 할 지라도 그것을 섣불리 단정짓고 피해자의 판단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의도나 상황을 무시하고 인간의 비합리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피해자들의 실수를 그대로 가해자에 대한 이익으로 치환시킨다는 현대 형법 질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기된 것이다.
4. 비판
4.1. 형벌의 목적으로 부적합
기존의 형벌론에서 '피해자'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데에는 명백한 까닭이 있다.- 첫째, 형벌이 피해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은 피해자 없는 범죄를 처벌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범죄가 있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벌어지는 살인, 강간, 폭행 등의 범죄들은 물론이고,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성매매, 미성년자 의제강간, 자살방조, 촉탁승낙살인죄, 피해자의 동의가 있는 장기매매 그리고 피해를 자기 자신만 감당하는 도박, 마약 등이 있다. 음주운전도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피해자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1]만약 형벌이 피해자만을 위한 것이라면, 피해자가 없는 위와 같은 범죄들은 처벌할 명분이 없어진다.
여기에 대해 '상황에 따라 피해자를 위해 피해자의 의사를 어길 수 있다', '피해자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 가족들이 안 괜찮다'라는 식의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내용 모두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한 처벌'이라는 피해자주의의 대전제를 어기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순에 가깝다. 심지어 저런 반론들이 타당하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다. 아무런 가족도 안 남아 있고, 자길 사랑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피해자가 본인의 의지로 성매매, 자살을 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처벌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뜻인데, 아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를 위해 형벌이 존재한다'라는 가설을 치워버리고 '사회 질서 유지'나 '범죄자 교화'로 형벌의 목적을 가정해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아무 모순없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 둘째, 피해자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범죄를 선처할 때의 폐해가 크다. 형법에 따르면, 현재 반의사불벌죄나 친고죄에 해당하지 않는 범죄들은 피해자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 만일 피해자의 의사를 가장 중점적으로 반영해야 된다면, 다른 범죄들도 피해자의 합의에 따라 '공소권 없음' 처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사회에 끼칠 폐해는 무지막지하다.
상술했다시피 피해자가 없거나, 피해자가 자기 자신인 범죄들을 처벌하지 못하는 건 기본이다. 또한 가정폭력 범죄에서는 남편 혼자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 아내가 경제적인 이유로 남편의 가정폭력을 묵인해줄 수 있다. 현재 상해나 특수폭행은 합의가 있더라도 사회에서 나서서 처벌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범죄들이 합의로 무죄가 될 수 있다면 아내는 어떠한 피해를 입든 생계를 위해서라도 합의를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녀가 학대를 당하는 경우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제3자가 범행을 발견하거나 고발하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막대한 합의금과 금전적 손해배상으로 상습범을 풀어주고 범죄를 합법화할 수도 있다. 부유한 계층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가난한 사람을 마음껏 폭행, 상해하고 대가로 합의금을 줬다고 하자. 피해자가 그 돈에 만족해버린다면 가해자는 처벌할 수 없는 게 된다. 돈을 주고 타인의 신체를 마음껏 이용하는 것은, 돈을 받고 본인의 몸과 존엄성을 팔아버리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큰 차이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사기죄를 저지르는 상습범은 들키지 않은 범죄들로 돈을 마련해서, 들킨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남는 돈을 쥐여줘 조용히 묻고 넘어가는 수단도 생긴다. 피해자가 만족한다고 장땡이라면, 아무리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만행들이라도 방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 셋째, 법규에 정해진 형량보다 피해자의 의견이나 만족도를 우선하게 된다면 법은 공정성을 잃게 된다. 피해자는 본질적으로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 각자의 성향이나 스트레스 정도가 다르다. 어떤 피해자는 적당한 처벌로 만족할 수 있고, 어떤 피해자는 교정주의를 믿고 소신껏 선처를 바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사형이 아니면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들마다 원하는 정도의 처벌이 다 다르므로, 피해자의 의사를 형량에 전적으로 반영한다면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끼리도 피해자의 성격에 따라 다른 처분이 내려질 수 있다. 일체의 차이가 없는 똑같은 상해 범죄라도 누군가는 집행유예, 누군가는 징역 10년, 누군가는 무기징역에 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가해자의 주관에 따라 형량을 정해야 한다는 근대학파 형벌론에도 위배가 되지만, 결정적으로 형량이 '운에 달려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므로 결코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간혹 이에 대해서 '법이 뭔데 피해자 대신 가해자를 용서해주냐'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초에 법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이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엄연히 사회의 질서가 달린 문제인데, 거기서 피해자 개인의 주관만 강조한다면 사회적인 합의가 무의미해진다.
4.2. 보호법익의 불명확성
형벌이 피해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피해자의 권리를 중시한다고 말하지만, 대체 정확히 피해자의 무슨 권리를 강조하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결국 피해자 중심주의적 관점의 사람들은 '판결이 피해자의 마음에 달리게끔 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피해자의 마음대로 판결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피해자의 어떤 기본권이 충족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 배상받을 권리는 민사 절차로서 보장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형법에서의 이데올로기이고, 형법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밖에 없다. 가해자를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처벌하는 것은 정말로 피해자의 권리일까?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피해자에게 그런 권리는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결정할 권한은 헌법으로도 보장되지 않으며, 보장되어서도 안 된다.
이미 피해자의 합의에 따라 가해자의 처벌이 감형되거나 처벌이 안되기도 하지 않느냐면서, 그러면 그건 왜 허용되고 있는 거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합의에 따라 가해자를 감형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바라고 있는 지의 여부를 참고하여, 가해자가 저지른 죄의 죄질, 피해 복구를 위한 노력, 교화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당사자가 얼마의 기간이면 재사회화되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지, 즉, 이미 범죄를 당한 과거의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닌, 앞으로 범죄를 당할 수 있는 미래의 불특정 다수와 이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어떤 판결이 옳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참고하는 목적으로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에서 만든 양형기준에 의하면, 처벌불원 사유 감경은 "피해자 또는 그 법정대리인의 나이, 지능 및 지적 수준에 비추어 처벌불원의 의사표시가 가지는 의미, 내용, 효과를 이해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여부 및 그러한 의사표시가 진실한 것인지 여부를 세밀하고 신중하게 조사, 판단"하여 감형이 적절한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분명히 표했는데 처벌이 안되기는커녕 감형사유로도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석된다.
결국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반영된다고 할 경우에는 그건 피해자 개인의 만족감과 불특정 다수의 속 시원함의 이익만 있을 뿐, 결국 판결은 사회적 합의와 무관한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피해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판결이 달리게 두지는 않는 것이다.
4.3. 유죄추정의 원칙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거가 동등할 때, 피해자의 증언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관점일 수 있다. 헌법에서도 천명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유죄추정의 원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4.4. 가해자면서 피해자인 경우
범죄 사건에는 다양한 경우가 있다. 개중에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경우나, 피해자가 된 가해자 또는 쌍방 범죄의 케이스도 상당수 나타나는데 이때 피해자 중심주의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맞닥뜨린다. 과잉방위 사건이나 가해자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보복 범죄 사건 등 사건 당사자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경우, 피해자 중심주의는 섣불리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어렵다.4.5. 과하게 페미니즘적인 전제와 세계관
피해자 중심주의는 기존의 형법 질서가 남성주의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특히 성범죄 관련 쟁점에 있어서 이를 지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형법학들은 역사적 변천과정에 있어서 합리적인 논쟁과 토의를 통해 정립되었기에, 그것이 남성중심주의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근거가 별도로 제기되지 않는다면 이데올로기의 전제부터가 성립할 수가 없다.[3]형법학은 수사학적인 논리와 역사, 보편타당한 윤리관을 따른다. 지극히 합리적으로 발달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법 질서에 대고 남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가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합리주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남성적이라고 규정하는 모양이 되므로 이는 자가당착이라고 할 수 있다.[4]
즉 '현대의 형법 질서가 남성주의적이므로 비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환논증이다. 형법 질서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게 비합리적인 질서가 아니라면 남성주의적이라고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합리적이라는 증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페미니즘적인 전제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는 오히려 형법 질서가 남성주의적이라는 전제를 세워놓고 그 때문에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결국 페미니즘적인 전제라는 것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남성들이 발전시켜온 학문이라는 근거만으로는 지금의 법철학이 여성혐오적이라는 증명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4.6. 엄벌주의를 위한 명분
단순한 엄벌주의적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피해자를 위해서이다'라고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피해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엄벌을 선고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기에 피해자를 위한다는 것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기도 한다.[1] 사고가 나도 가드레일을 받고 추락해 길가던 사람을 들이받거나 하는 일 없이 운전자 혼자 중상을 입었다는 식이라면 도박, 마약범죄랑 큰 틀에서 차이가 없게 된다.[2] 그렇다면 복수심 해소라도 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는데, 복수는 분노, 성욕과 같은 본능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이걸 마음대로 해소 내지 분출할 수 있게끔 법이 보장해줘야 할 의무는 없다. 형벌은 개인의 인권을 제한하는 사항이므로, 최소한 제한하는 인권에 버금가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복수는 기본권도 법적 권리도 아니기 때문이다.[3] 지금껏 법학 자체를 남성들이 주로 발전시켜왔다는 근거를 드나, 학문 연구자들의 특수성이 그 연구 방향성을 절대적으로 결정짓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연구원들이 법학을 발전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법학이 여성우월주의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으며, 누가 연구를 했든 결론은 지금과 같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학문 연구자들이 대부분 비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복지나 인권신장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과도 같다.[4] 물론 그러한 윤리조차 남성주의적이라는 넬 나딩스와 같은 주장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러려면 기존 윤리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