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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 후 경과일 | D[dday(1948-09-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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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南北分斷 / Division of Korea일반적으로는 하나의 국가가 남쪽, 북쪽으로 분단되는 것을 의미하지만[2] 이 문서에서는 한반도의 남북분단에 대해 설명한다.
2. 유형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 따르면,[3] 한반도 남북분단의 유형은 '내쟁형 분단이 가미된 국제형 분단'이다.1945년 8.15 광복 후 미국과 소련이 멋대로 삼팔선을 그어서 강제로 분단된 데다 해방정국 시기 이념적 혼란에 정치 지도자들과 정파들이 온갖 이념별로 갈라져 서로 싸웠고, 1950년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문제가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분단 초기에는 한 나라가 이유없이 갈라졌다고 하여 정치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다. 남쪽은 통일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 진영이 대립하는 혼란이 있었고, 북한에서는 분단의 책임을 남쪽과 자신이 적으로 설정한 미국 등의 세력에 전가하며 자신이 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정책을 폈다. 현재도 대북 정책에서 대립이 큰 이유가 북한의 폐쇄성으로 인한 북한 정권의 정책 의도 파악의 어려움, 한국 측의 정책 효과 파악의 어려움과 더불어 분단의 충격이 분단 초창기에는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국력의 차이가 커지자 북한 주민의 통일관은 정부가 주입하던 것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는 한국을 동경하는 통일로 바뀌어 갔고, 남한에서는 한국과 북한의 이질성을 은근히 강조하며 경제 격차나 체제 등의 차이로 통일을 반대하는 여론이 생겼다. 북한은 이제 지나친 한국 동경에 따른 체제 붕괴를 걱정하며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했으며, 남한에서도 통일을 북한의 체제 유지 의지를 꺾으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시도는 흔치 않기에 분단 상황이 유지되는 상황이다.
3. 과정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가 일제가 패망하고 그와 동시에 한국은 광복을 맞이한다. 연합군사령부는 한반도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출하는 것으로 합의하였고 동년 8월 소련이 가장 먼저 군대를 한반도 북부에 진출시켜 소련군정을 세웠으며, 미국도 9월에 군대를 한반도 남부로 진주시켜 미군정을 세웠다.한반도의 북쪽에선 전쟁이 다 끝나가 잡병이 된 관동군과 만주 전쟁을 통해 내려온 소련군들에게 관동군이 천황의 옥음방송으로 항복하고, 한반도의 남쪽에선 이오지마, 오키나와, 일본 본토까지 밀고 올라온 미군들에게 일본군들이 각각 항복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독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듯이 한국 역시 양국의 갈등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련은 이미 동유럽을 거의 잡아먹고, 핀란드의 숨통까지 잡은 상황이었으며, 이탈리아와 일본을 미국이 처리하도록 합의했으나, 독일과 한국에선 양국의 이해관계가 연이어 충돌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전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미국의 '대지역(Grand Area)' 구상과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하에서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은 핵심지역(a key world area)으로 간주되었다. 종전시 이 지역의 군사정세가 이후의 한국문제 처리에 중요했기에 미국은 자신의 발언권과 주도권 확보를 위해 미국측에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는 현실적 대비책이 필요했다. 미국 군부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동북아시아 초래할 정치적 영향력에 대비해 연합군 공동점령•공동시정 방침 또는 분할점령안을 마련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포 후 일본이 일찍 항복하자,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고자 38선 분할점령안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은 전후 대일 발언권 확보 차원에서 미국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했다.[4]
38도선을 경계로 소련은 한반도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길 원했고, 미국은 자유주의 정권을 세우길 원했다.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며, 스탈린은 김일성을, 트루먼은 이승만 쪽을 지지하며 한반도 남부와 한반도 북부가 결국엔 합의를 얻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부가 출범해버린 것이었다.
이후에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후에도 90년대까지 남북한 각국은 세계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와 냉전 상황에 맞물려 국교 수립이나 UN 가입에도 제약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UN 가입은 소련을 필두로 중국이나 동독, 폴란드, 베트남, 쿠바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방해 때문에 제약을 겪었고, 이들은 한동안은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북한의 UN 가입은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대만 등의 제1세계 국가들의 방해가 이어졌고, 이들 역시 북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소련의 해체와 함께 냉전이 끝나고 결국 남북한 각국은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독자국가로서 UN 가입도 이루어내나, 현재까지도 냉전 당시의 구도와 비슷하게 남한-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라는 대립 구도가 유지, 분쟁과 갈등이 도사리는 중이다.
3.1. 한반도에서의 상황과 반응
당시 한반도는 일제의 지배에서 갓 벗어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당시 이주했던 일본인들도 모두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돌아가게 되는 격랑기를 맞아가는 시기였다. 처음에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을 그었을 당시에는 단순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한편 한반도 내부에서는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 및 건국동맹이 구성되었으며 1945년 9월 6일, 건준 내 공산주의세력(장안파 조선공산당파였던 박헌영의 주도하에)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 국무총리 허헌, 내무장관 김구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 전체 70%가량이 주로 좌파 성향 및 공산성향 인사들이 대부분 채워지게 된 입장이라 우익 및 보수성향 인사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이승만 자신도 주석에 임명된 일이 없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러한 문제와 미국과 소련의 문제충돌로 인해 국가로 승인 받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3.2.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소(美蘇)공위의 결렬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은 4국 명의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반도를 '통일 임시정부'수립을 쟁점으로 논의하고 여기서 최장 5년동안 신탁통치 명의로 지배하는 결정을 합의하고 합의문을 공식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모스크바 3상회의였다.여기서 국내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본질 목적인 '통일 임시정부 수립'내용을 쏙 빼놓고 '신탁통치'만을 강조해 사건이 터졌다. 신탁통치만 부각된 보도를 접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에 남한내 좌, 우파 모두 한 목소리로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이듬해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평양에 갔다오고 나서는 찬탁으로 선회. 이를 두고 남한내에서는 좌, 우파가 서로 갈라져 이념대립이 심화되어갔다. 반면, 북쪽에서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신탁통치 찬성을 밝혔고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한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을 적으로 지목하여 숙청시켰다. 이후, 북한은 1946년 2월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사실상의 정부'를 만들었고, 반면 이와 동시에 남한에서도 1946년 2월에 미군정의 자문기관격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만들어 갈라져가고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신탁통치 오보사건 참조.
1946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었지만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인사들 구성'문제에서 양국간의 이견차로 1차 결렬되었고, 1946년 6월에는 이승만이 전국을 도는 중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시사했다. 이때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은 물론이거니와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이런 주장에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혔지만, 한민당만 '찬성'을 밝혔다. 이후 미국 국무성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 '극우파'와 '극좌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지해 좌우합작운동에 간접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극우파인 한민당, 이승만과 극좌파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였고, 이듬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영향으로 미 국무성은 '반공주의'노선으로 선회,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였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어 초창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하였으나, 결국 또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내각 구성'을 비롯해 '찬반탁 인사 참여 여부'를 놓고 입장 차이로 10월에 완전 결렬되었다. 이와 동시에 좌우합작운동 주도인물 가운데 핵심인물인 여운형이 7월 19일에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도 사실상 유명무실화되고 1947년 12월에 해체된다.
3.3. 남북한 정부 수립
남북분단의 조짐이 심화되자, 미국에 의해 한반도 문제는 UN소총회로 이관되었고, 1947년 11월 14일, UN은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가 열려야 하고, 선거를 관리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소련은 UN이 주관하는 선거가 공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남북총선거를 거부하였다.[5]유엔 한국위원단에 참석했던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남한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남한의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인사들도 그에 동조하였다. 이에 백범 김구는 이승만의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여 남북한이 함께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며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였다. 이어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단독정부를 합의하는 데에 실패하였다.[6]
결국 UN이 주관하는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 단독으로 진행되었다.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 해 '9월 9일' 한반도 북부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됨에 따라 남북분단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936년 후삼국 통일 이후 1000여년만에 한반도는 다시 분단되었다. 우편물 교환 등은 전쟁 직전 22일까지도 이어졌지만 휴전 후 민간교류 단절에 쐐기가 박히는데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무력통일하고자 하였으나 낙동강 대치와 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고, 대한민국은 북한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한 뒤 미군, 유엔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전황은 일방적으로 한 쪽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을 맺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4. 분단 시대
당초엔 분단이 이렇게 오래갈 것을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국토분단,' '남북분단', '분단국가', '분단조국'과 같이 주로 지리적인 분단만 이야기하였다.하지만 강만길 교수의 평론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과 같이, 70년대말부터 분단을 '시대'로 인식하고 '분단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용어는 수십여년간 지속된 분단의 고착화와 그에 따른 남북간의 이질화를 인정하며, 이러한 가운데 통일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7] 이에 따라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역사, 문학, 사회학, 교육 등에서 '분단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북한의 역사,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북방외교와 독일 통일, 소련의 해체 등 냉전 종식 분위기 속에서 폭발적으로 그 사용량이 증가했었다. 하지만 9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그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최근에는 현재만 볼 게 아니라 미래도 봐야한다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통일 시대'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나 현재 통일은 커녕 남북간 자유왕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세계의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연평 해전과 천안함 피격 사건, 그리고 연평도 포격사건 같은 군사도발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한편으로는 2000년, 2007년, 2018년에 걸쳐 총 다섯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단 이것이 평화의 초석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는 견해 중 하나일 뿐이며 북한의 전통적인 화전양면전술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평가도 적지않다. 실제로 남측에서 300억 가까이 들여 개성에 설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북측에서 일방적으로 폭파하고 군사도발을 예고하는 등 여전히 북한에서는 이룰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을 전후해 '북한 주적론', '대북 선제타격론'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십수년에 걸쳐 핵실험을 진행해 핵무기의 개발에 성공한 상태이므로 선제타격론은 점점 현실성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반응도 많다.
게다가 경제력 차이가 극도로 커져서 통일의 주체가 될 남한에서 통일반대론이 크게 늘어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2024년 북한의 평화통일 포기 및 주적, 유사시 '수복' 선언으로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 출신 사이(북한 주민부터 탈북민까지)에서는 굉장히 통일 여론이 강해 심지어 통일을 하지 말자는 주장을 두고 류현우 전 대사대리 등이 여야, 보수·진보를 초월해 문제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민족 동질성 등은 이들은 2000년대 이후 한류나 자본주의, 남북 교류도 아예 없지는 않아서[8] 높아져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이 공언하던 두 국가론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도 예상보다 늦어졌던 이유가 이런 통일을 이상향으로까지 여기던 상황을 처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때문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래서 통일은 김정은 정권이 유지된다면 불가능에 가까우나, 이 정권이 예상을 뛰어넘는 태도를 보이거나 정권 자체가 교체된 사건이 벌어질 경우에는 최소 남북한 이상의 분리 기간을 거쳤던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루마니아가 몰도바를 바라보는 식으로 공식적으로도 논의가 가능할 수도 있다.
4.1. 대한민국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북한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북한/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5. 관련 문서
6. 참고 자료
-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1 9권: 우리나라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207.
7. 외부 링크
- 분단 60년 후 북한 사람들의 삶과 남한 사람들의 삶을 대조한 유튜브 영상: 단순히 양쪽 모두 방문해 보았던 영어권 여행객의 입장에서 만든 VLog 영상이지만 의외로 굉장히 깊이 있는 고민과 통찰이 담겨 있는 영상이다.
[1]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일 기준.[2] 비슷하게 남북이 분단된 사례로 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북예멘과 남예멘, 아메리카 연합국과 미국 등이 있다. 키프로스의 경우 현재진행형이며 예멘도 북부를 장악한 후티 반군과 남부를 차지한 정부군과의 내전으로 사실상 분단상태다.[3] 해당 도서에서 언급된 내용은 동일 저자가 참여한 통일원 홍보책자 《통일로 가는 길(1990)》에서 발췌해낸 것이다.[4] 출처 :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길잡이 하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370~371쪽 참고[5] 실상은 북한 지역보다 인구가 2배 넘게 많은 남한 지역을 우익이 장악했기 때문에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치르면 자신들이 선거에서 패할 것임이 뻔했기 때문이었다.[6] 김구는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이승만, 한민당과 입장을 같이 하여 신탁통치에도 반대하였고 이승만의 정읍발언도 지지하였으나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이후로는 이승만 세력과 결별한다.[7] 관련하여 강만길 교수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서 '분단체제'를 현실로 인식하고 객관화하고 비판해야지만 극복해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분단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밝힌다.[8] 개성공단이나 능라도경기장의 연설이 특히 교류를 지지하는 입장의 정책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호응을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