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폭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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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fff> 1925년 | <colbgcolor=#fff,#212121><colcolor=#000,#ddd> 7~9월 한반도 전역 | |
1998년 | 7~8월 구례군, 산청군 | |
2010년 | 9월 서울특별시 | |
2011년 | 7월 중부권 전역 | |
2014년 | 8월 동남권 전역 | |
2016년 | 8~9월 함경북도 | |
2017년 | 7월 중부권 전역 · 9월 동남권 전역 | |
2018년 | 8월 강원 영동권 · 8~9월 한반도 중부 이남 | |
2020년 | 6~9월 한반도 전역 | |
2022년 | 6~8월 중부권 전역(수도권) | |
2023년 | 5월 한반도 전역 · 6~9월 한반도 전역 | |
2024년 | 한반도 전역 (7월 압록강 유역) |
1. 개요
UN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서도 함경북도 지역을 기준으로 50~60년 사이의 최악의 재앙으로 지적했다. # 다만 이 주장은 북한 정부가 수해 복구 여력이 부족한 것을 불가항력적인 재난의 탓으로 돌리려는 과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 실제로 1995년의 홍수는 집을 잃은 사람만 10만 가구, 50만명이 발생한 더 큰 참사였다고 한다. #[2]
2. 상세
2016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함경북도 두만강 일대에 기록적인 대폭우가 내렸다.이 폭우로 인해 두만강이 범람하였고 댐과 같은 시설이 매우 부족한 북한 사정상 엄청난 홍수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홍수는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의 여러 도시들을 있는 대로 쓸어버렸다. 회령시, 무산군, 연사군, 온성군, 경원군, 경흥군 등 과거 두만강의 6진 지역이 주된 피해 지역이다.
3.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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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번 홍수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회령시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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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시 일대의 홍수 전(좌)와 홍수 후(우)의 모습.사진 출처 |
두만강이 범람한 시간이 8월 31일 새벽 3시경이었는데 시간상 대부분의 주민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자다가 무방비 상태로 물난리를 당했다고 한다.
함경북도 거주 중국 화교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번에 두만강 물은 10m가 넘는 강둑을 넘어 들어와 온성군 남양구 아파트 3층(약 10m)까지 잠겼다”며 “두만강 물이 평소보다 15m는 넘었던 것 같다”고 한다.
처음 북한 당국은 이재민 등 직간접적 피해자가 10만 명이 넘으며 공식 사망자는 60명이라고 밝혔다.기사 비공식적으로는 회령에서만 200명이 숨졌다는 말도 나왔다.기사 이후 로동신문은 공식집계 사망자 숫자를 133명까지 늘렸다.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두만강변 모든 발전소와 변전소가 침수피해를 입어 기능이 정지되었고 수천여 채의 가옥과 공장도 파괴되었으며 간선도로와 철도도 산사태 등으로 유실되어 안 그래도 열악한 교통상황을 마비시켰다.
조선중앙통신은 14일 “이번 큰물(홍수) 피해는 해방 후 대재앙”이라며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인명피해는 수백 명에 달하며 6만 8,900여 명이 한지에 나앉았다"고 보도했다. 다만 "해방 후 대재앙"이라는 말은 앞서 언급했듯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조선중앙통신은 2007년에도 30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홍수를 지역별 피해상황을 알려 가면서 보도한 적이 있다. #
상세한 피해를 보면 회령시 강안동에서만 200여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두만강 변에서 잠복근무를 서던 국경경비대 수십명도 물에 떠내려 갔다고 한다.
3.1. 추가 피해
이 홍수로 말미암아 북한과 중국 사이 세관, 다리 등이 유실되어 북중무역에 큰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설상가상으로 수해지역에 콜레라가 발발하는 등 각종 전염병이 발발하면서 2차 피해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아졌다.北 수해지역서 콜레라 환자 급증
4. 피해가 큰 이유
4.1. 호우(대우)에 대한 허술한 대비
일단 북한 각지에선 지역별로 이보다 심각한 재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잘 알려진 경우는 1967년 8월 평양 대홍수와 1995년~1996년의 호우(일명 95년 대홍수)[3]가 있다. 정밀분석 - 북한은 왜 매년 물에 잠기나?[4] 바로 전해인 2015년에도 함경북도 라선시는 큰 수해를 입었다.그러나 이전까지 괄목할 만한 홍수들은 대부분 황해도, 평안도 등 서남부 지역이 주 대상이였으나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동북지역에 엄청난 호우가 내린 것 때문에 피해가 컸다.[5]북한의 허술한 대비도 그 이유가 되었는데 댐이 너무나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것도 발전용이거나 체제선전을 위한 것이라 이러한 국지적 호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이러한 북한의 실태가 피해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왔다.[6]
게다가 이 폭우의 원인인 라이언록의 그 특이한 경로도 한몫을 했다.
일본 남해에서 시작해서 북위 35'까지 남진하다가 이와테 찍고 아오모리 찍고 동해 찍고 함북 찍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라이언록의 특이한 경로 때문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도 피해를 키웠다.[7]
4.2. 미흡한 대처
이렇듯 충분치 못한 대비와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가 났음에도 언론을 통제하며 국외에 소식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았고 이를 수습해야 할 수뇌부는 주민들을 내팽개친 채 나 몰라라 했다. 사건에 대한 사실을 감추고 정치적 선전이나 했으니 핵실험 후에 홍수 발생이 서방 언론에 알려지고 자체 보도도 했으나 보도 이전까지 알 수 없었으니 도울 수도 없었고 알려진 후에도 이미 너무 늦은 데다 핵실험 등의 도발로 지원하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4.3. 댐 방류
전술한 강수량을 보면 폭우기는 했으나 이렇게 상태가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피해가 심각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폭우로 댐이 한계량을 초과해 무너질 것 같자 31일 새벽에 어떠한 통보도 없이 강물을 방류해 버린 것이다.
4.3.1. 대체 왜 방류했나?
전술했듯이 댐들이 무너질 것 같자 급한 나머지 알릴 시간도 없어 무단 방류를 했다고 한다.그렇다면 '대체 왜 이 정도의 비에 여러 댐들이 방류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원인은 부실공사 때문으로 보인다. 저수량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수위에 근접했다면 방류하는 것이 옳다. 어떠한 댐이라도 일단 범람하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속도전이라는 이름 아래 체제선전을 위해 수년은 족히 걸릴 공사를 수개월만에 해버렸는데 이렇게 지은 건물들이 튼튼할 리가 없고 당장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를 포함해 댐과 같은 구조물이 건설 중 무너졌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었다.
즉, 이렇게 날치기로 지은 댐들이 정해진 한계량에 못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부실공사로 인해 댐이 균열되는 피해가 발생했고 결국 댐을 지키기 위해 무단방류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방류한 여러 댐들중 유력한 댐 중 하나인 백두산 영웅 청년댐은 그 대표적인 예시로 학생, 청소년, 대학생, 군인 할것 없이 동원하여 불과 79일만에 완성했으며 공사 중에 무너져 수십명이 죽은 적이 있던 댐이다. 그것도 연일 선전해 가면서 완공된 지 4개월도 안된 댐이 피해를 키웠다. 북한 백두산 청년 영웅댐, 속도전으로 불과 79일만에 완성
단, 부실공사가 아니었어도 저정도의 재앙적인 폭우라면 대량 방류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반론도 있다. 일본만 하더라도 2018년 일본 서남부 폭우 사태 당시 이들 지역에 위치한 댐 중 일부가 폭우를 감당하기 힘들자 유입량과 거의 같은 양의 물을 단시간동안 대량 방출하면서 인근 하천이 범람하는 바람에 피해가 굉장히 커졌었는데 북한도 사실상 부실공사와는 별개로 폭우를 감당하지 못해서 대량 방류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서일본지역 폭우…인근 댐 초당 1700t 방출로 피해 키워
4.3.2. 어느 댐이 방류했는가?
백두산 청년댐, 서두수 댐 등이 물을 무단방류했다고 한다. 이 댐들 중 가장 피해를 키운 댐은 서두수 댐으로, 두만강 지구에 발생한 대홍수 피해는 북한이 서두수 발전소 수문을 예고 없이 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만큼 사고에 큰 역할을 하였다.서두수 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70년대에 두만강 유역을 변경하기 위해 건설한 수력발전소다. 함경산맥에서 두만강으로 흐르던 서두수를 막아 거기에 생긴 물을 동해로 뽑아 전기를 생산하는 유역변경식 발전소이며 여기에는 저수지 물을 동해로 뽑아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뚫은 100리 물길 굴이 있다.
그동안 서두수댐은 장마철마다 내리는 비를 수로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방류하곤 했는데 당시에도 서두수 발전소 측은 태풍 제10호 라이온록의 영향으로 함경북도 일대에 많은 비가 내리자 수문을 열었으며 특히 내린 비가 엄청났고 상류의 백두산 청년댐까지 방류하면서 방대한 수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미처 통보할 시간도 없이 방류했다고 한다.
4.4. 남한의 피해
두만강 홍수로 떠내려간 나무들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가 동해안까지 흘러가 강원도 고성군, 양양군, 강릉시까지 피해를 주었다. 기사5. 대북 지원
5.1. 해외반응
북한 정부는 긴급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다.기사이에 대해 유엔은 인도적 차원에서 홍수지역 주민들에게 지원을 하기로 했다.유엔, 홍수피해 주민들 14만명에게 쌀 지원.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는데 홍수 발생 후 며칠 뒤에 5차 핵실험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몇몇 국가들이 지원에 참여했다.
스위스는 북한에게 365만달러를 지원했다.스위스, 북한에 최대규모 지원... 이는 이 홍수로 인한 지원 중 가장 큰 금액에 해당한다.
북한은 유엔이 지원한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지는 않았지만 유엔이 지원했다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밝혔다고 한다.기사
북한의 지원 요청이 통했는지 중국에서 자원을 지원했다. 기사 러시아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기사
스웨덴도 북한에게 47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한다. 기사
중국이 34억원을 무상지원하였다.#
러시아도 대북지원에 동참했는데 수해 지역 주민들에게 디젤유와 구호물품을 전달했다. #
5.2. 남한의 반응
5.2.1. 통일부의 입장
일단 북한이 핵실험을 한 시국이고 남한도 남한대로 지진이라는 피해를 입은 터라 초기에는 그다지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후 관련 소식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도적 지원이 검토되기 시작했고 9월 18일 통일부는 지원에 대해 검토하여 보겠다고 밝혔다.통일부, 대북지원 검토9월 19일, 통일부는 지원이 불가하다고 밝혔다.통일부, 지원 불가
통일부는 현 시국에서의 지원은 정당치 못하며 자칫하면 이번 지원이 김정은의 공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5.2.2. 각종 정당/단체 반응
북한의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인도적 지원을 해야한다"는 주장과 "대북제재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맞섰다.새누리당은 통일부 발표 다음날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국민의당은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광주일보 9.29일자 기사
친박 홍사덕 전 의원은 정부의 방침과 달리 인도적 대북지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몇몇 시민단체와 농민조합은 각 단체가 지원할 수 있도록 촉구했고 통일 쌀보내기 운동을 선포하기도 했다.#
5.2.3.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탈북 권유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1일 국군의 날 연설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탈북을 권유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더욱 북한을 압박하려는 의도라는 말이 나왔다.당연히 북한 정권은 비난을 쏟아냈고 남한 정치권 일부에서도 동조했다. 기사
6. 사건 이후
6.1. 김정은의 행보
원래 김정은이 방문해서 위문하기로 했으나 미국에서 이른바 '김정은 참수작전'으로 불리는 대북선제타격 및 김정은 암살 프로젝트를 구상하였고 김정은은 '무서워서 두만강 위문 방문 일정을 취소'한 뒤 평양밖을 나가지 못했다. 이후 김정은의 행보는 두절되었다.6.2. 북한의 선전
사건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분노한 민심을 다독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8][9]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며칠 밤낮으로 자지 못하며 인민들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는 등의 체제 선전 등을 통하여 수습하려고 했다. 모든 가공식품을 피해지역에 보낸다던가, 철도수송을 한답시고 함경선의 모습을 보여주며 고원지대 군 철도관리국 인사가 인터뷰를 하고, 회령, 연사, 무산 일대에 살림집(주택) 건설을 한답시고 건설현장을 보여주고 22일에는 피해복구가 완료됐다면서 선전했다.[10] 그런데 정작 살림집 복구는 커녕 주민들 주택보다 경비초소부터 복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
이것만으로는 안 되겠던지 김정은이 고기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필품과 쌀이라는 점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대외적 선전을 위해 이러는 듯했다.
정작 김정은은 며칠 동안 울기는커녕 평양의 공장에 시찰을 가는 등 전국을 강타한 재앙인 홍수와 상관없는 일정을 소화했으며 피해복구 현장을 방문한 고위층 인물은 박봉주 총리가 유일하다고 한다. 다만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 북한 지도자들이 피해 복구가 진행 중인 현장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기사 참조
오히려 피해지역에서 충성심을 기르기 위한 행사 도중 떠내려간 김씨 일가 초상화를 건지려다가 1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
2달이 지난 후부터 북한 당국은 복구가 다 되었다고 선전했으나 실제론 방치된 곳이 더 많다.#
북한 주민들의 여론도 좋지 않았다.# 주민들을 단속하는 채찍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김정은 정권에 반하는 자 40여 명이 체포되었다.# '탈북자 은신처를 없애려고 일부러 방치'했다고도 전해졌다. #
6.3. 탈북자 급증
한편 홍수 이후 국경초소도 쓸려내려간지라 국경지역의 관리가 부실해진 덕에 탈북자들이 급증하자 중국 도문에 있는 탈북자 수용소가 탈북자들로 넘쳐났으며 북한은 국경지역에 국가 보위부 검열단을 급파해 내부 단속 강화에 골몰했다고 한다. 기사탈북을 시도하려는 주민을 발견해서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주겠다고도 했다.기사
6.4. 피해 복구
북한의 자체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극복할 수 없음을 자기들도 알기 때문인지 조선중앙통신은 9월 10일을 기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성명으로 200일 전투의 주 타격 방향을 피해복구로 돌린다고 발표했다. 200일 전투는 김정은의 주요 치적사업을 위해 전국적으로 행하던 동원사업인데 함북, 량강도의 피해가 너무 커서 200일 전투와 평양 여명거리 조성 사업에 투입할 인력과 자재를 피해복구로 전용하겠다는 의미다. 아울러 '자기네 힘으로 도저히 해결 불가하니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집까지 잃고 목숨만 겨우 건진 주민들에게 수해복구비를 떠넘겨 불만이 쌓였다. #
북한은 인근 군부대, 청년 그리고 주민들까지 총동원하여 수해 지역을 복구했다고 한다. 북한 특성상 중장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에 하던 대로 인력 갈아넣기 선전선동을 했지만 정확한 실종자 수도 모르는 데다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복구하는 식이라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11월이면 북한에선 사실상 겨울이라 추위에 완공되지 않은 주택 무단 입주까지 발생하였다.#
일단 11,900여 세대를 복구하였다고 한다.#
복구된 주택이 내륙 쪽에 지어져서 탈북을 더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구글 어스로 두만강가를 보면 과거 위성 사진을 볼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하면 강가에 있던 주택이 흔적만 남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탈북민 박유성도 고향이 사라졌다고 한다. #
한편 홍수 당시 청년돌격대가 수해복구를 위해 온성군 수해 지역에 파견됐는데, 청년돌격대가 건설사업이나 수해복구에 파견될 경우 숙소와 식사는 돌격대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당국에서 식량 공급을 하지 않다 보니 돌격대원들이 개인집 텃밭의 옥수수를 훔쳐 식량으로 대용하며 수해복구에 나서다 보니 2017년 온성군에서는 절량 세대가 늘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
7. 같이 보기
[1] 자료 사진[2] 사망자 수는 1995년의 홍수가 68명으로, 2016년의 두만강 홍수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긴 하나, 홍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구수는 520만명에 피해범위만 국토의 75%로, 상당히 궤멸적이었다. 마침 연도상으로 고난의 행군 초반기라 더더욱 큰 피해를 야기했다.[3] 각각 신의주시와 황해도에 집중된 피해로 68명, 116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520만 명, 327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각각 36만 정보, 26만 정보의 농경지가 침수·유실됐다. 통계 사례 분석[4] 북한은 대한민국(남한)에서 장마가 그친 8월에 도리어 강수량이 집중되는 특징이 있다. 특히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지역이 그렇다.[5] 기본적으로 당시 홍수가 난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에 속하는 지역으로 해당 지역의 연 평균 강수량은 500~700mm 정도다. 서울로 치면 400~500mm 정도의 호우가 난 것과 동일한 수준이다.[6] 사실 북한이 호우에 대비해 댐을 지을 만한 경제력이 안 되는 것도 있긴 하겠지만.[7] 당시 세 개의 태풍이 동시에 일본에 상륙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특이한 경로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8] 함경도 지방은 전통적으로 평양을 위시로 한 평안도 지역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평안도는 함경도더러 "드세고 억센 넘들."이라고 함경도는 평안도더러 "능글맞은 능구렁이들, "이라 비난한다고 한다) 남한의 지역감정도 북한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약한지라(심지어 혼인도 안 된다. 상대 지역 부모들이 결사반대를 외친다고 한다) 조선로동당 내부에서도 함경도 세력과 평안도 세력이 대립각을 세우는 등 분리주의에 준할 정도로 북한에서도 민심이 가장 나쁜 지역들 중 하나다. 게다가 당시 피해를 입은 곳은 함경도 중에서도 이미 중국 등을 통해 바깥 사정에 밝은 국경지역이다.[9] 실제로 탈북자의 대부분이 함경도-량강도 지방 사람들이다. 두만강이 폭도 좁거니와 수심도 얕아 탈북 루트로 쉬워서라고 한다. 평안도 출신은 적은데 압록강의 수심과 폭이 월경에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10] 출처는 우리민족끼리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지만 국보법에 따라 링크를 걸 수 없다. 정 보고 싶다면 유튜브에 검색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