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총리 | |||||
{{{#!wiki style="word-break: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 제2대1 | 제3대1 | 제2대2 | 제4대 |
헨리 슈얼 | 윌리엄 폭스 | 에드워드 스태퍼드 | 윌리엄 폭스 | 앨프리드 도미트 | |
제5대1 | 제6대 | 제3대2 | 제2대3 | 제3대3 | |
프레더릭 휘태커 | 프레더릭 웰드 | 에드워드 스태퍼드 | 윌리엄 폭스 | 에드워드 스태퍼드 | |
제7대 | 제2대4 | 제8대1 | 제9대 | 제8대2 | |
조지 워터하우스 | 윌리엄 폭스 | 줄리어스 보글 | 대니얼 폴른 | 줄리어스 보글 | |
제10대1 | 제11대 | 제12대 | 제5대2 | 제10대2 | |
해리 앳킨슨 | 조지 그레이 | 존 홀 | 프레더릭 휘태커 | 해리 앳킨슨 | |
제13대1 | 제10대3 | 제13대2 | 제10대4 | 제14대 | |
로버트 스타우트 | 해리 앳킨슨 | 로버트 스타우트 | 해리 앳킨슨 | 존 밸런스 |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1 | 제18대 | 제19대 | |
리처드 세든 | 윌리엄 홀존스 | 조셉 워드 | 토머스 매켄지 | 윌리엄 매시 | |
제20대 | 제21대 | 제17대2 | 제22대 | 제23대 | |
프랜시스 벨 | 고든 코츠 | 조셉 워드 | 조지 포브스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 |
제24대 | 제25대 | 제26대1 | 제27대 | 제26대2 | |
피터 프레이저 | 시드니 홀랜드 | 키스 홀리오크 | 월터 내시 | 키스 홀리오크 |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잭 마셜 | 노먼 커크 | 빌 롤링 | 로버트 멀둔 | 데이비드 롱이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제프리 파머 | 마이크 무어 | 짐 볼저 | 제니 시플리 | 헬렌 클라크 |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존 키 | 빌 잉글리시 | 저신다 아던 | 크리스 힙킨스 | 크리스토퍼 럭슨 | |
<rowcolor=#fff> 자유당 개혁당 통일당 | |||||
<rowcolor=#fff> ※ 뉴질랜드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역대 국왕 | }}}}}}}}} |
출생 | 1950년 2월 26일 ([age(1950-02-26)]세) | |
뉴질랜드 와이카토 지방 테 파후 | ||
재임기간 | 제37대 총리 | |
1999년 12월 10일 ~ 2008년 11월 19일 | ||
학력 | 오클랜드 대학교 (정치학 / MA) | |
정당 | [[뉴질랜드 노동당| 뉴질랜드 노동당 ]] | |
의원 선수 | 10 | |
의원 대수 |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 |
지역구 | 마운트 앨버트[2], 오와이라카[45대] | |
약력 | 뉴질랜드 대의원 (1981~2009) 제27대 보건부 장관 (1989~1990) 뉴질랜드 제11대 부총리 (1989~1990) 제11대 노동당 부대표 (1989~1993) 제12대 노동당 대표 (1993~2008) 제1야당 대표 (1993~1999) 뉴질랜드 제37대 총리 (1999~2008) | |
서명 |
[clearfix]
[clearfix]
1. 개요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뉴질랜드의 총리를 역임한 뉴질랜드의 정치인이다. 당적은 노동당이다. 뉴질랜드 두 번째 여성 총리이다.2. 생애
1950년 2월 6일 뉴질랜드의 해밀턴근교 테 파후의 목장집에 장녀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부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등 정치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74년 뉴질랜드의 명문 대학인 오클랜드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4년과 1977년 노동당 소속으로 오클랜드 시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1년 오클랜드시의 마운트 앨버트 지역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984년 재선, 1987년 3선을 거쳐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뉴질랜드 환경보존부 장관을 역임했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부총리직을 역임했다. 1993년 노동당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199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뉴질랜드 역대 2번째 여성 총리, 그리고 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3. 총리 재임 시절
1980년대 노동당의 로저노믹스(Rogernomics)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버리고 대규모 사회 개입 정책들의 도입을 시도하며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주의 노선에 충실한 정통 좌파로 사회안전망 강화와 소프트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Working For Families 정책을 도입해 중/저소득층 가정에 대한 복지 급여와 세액 공제를 시행하고 최저급여 인상, 새액 공제 확대와 무이자 학자금 대출 시행들 여러 복지 시스템을 확충하였다. 환경 부분에서도 비핵화에 찬성하며 환경 보존에도 관심을 보였고 NCEA 도입 등 교육 시스템 개혁도 시행했다. 2002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연정 파트너였던 동맹당이 내부 다툼으로 붕괴하면서 조기 총선이 치뤄지게 되었지만 노동당은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집권에 성공했다. 2003년에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면서 이라크에 전투 인력 파병을 거부하였지만 대신 의료 인력을 파견하였다. 재임 기간 동안 꾸준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 정책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3선 이후로는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와 마오리족 사이의 간석지 및 해저면 소유권 분쟁에서 논란을 빚었고 2007년 부모들의 체벌을 금지하는 수정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클라크 내각의 보모국가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더군다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인한 경제침체가 시작되자 클라크에 대한 인기가 더욱 하락하며 2008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작은 정부를 기조로 내세운 존 키의 국민당에 패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2009년 국회의원직도 사퇴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4. 정계 은퇴 이후
2008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 클라크는 대표직을 사임했지만 의원직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 유엔개발계획 관리자로 부임하며 의원직을 사임했다. 임기 내 클라크는 조직 내 비리 척결과 여성 인권 상향등에 힘썼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4년 임기를 마친 후 클라크는 2016년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후임을 뽑기 위한 UN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5위로 낙선하였다.2020년에는 세계보건기구의 코로나-19 팬데믹의 대처를 평가하는 독립 검토 위원회의 공동 의장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