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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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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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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의 유럽과 아시아를 제외한 대륙별 주요 국가들을 정리한 문서.2. 아프리카
2.1. 남아프리카 연방 (SAF)
남아프리카 연방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남아프리카의 영국이 소유하고 있었던 케이프 식민지, 나탈, 트란스발, 오렌지 자유국의 합병으로 1910년 결성된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영향력의 마지막 잔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치령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네덜란드계 백인 주민들은 옛 보어 공화국의 독립을 갈망하고 있는 한편, 프랑스 코뮌이나 브리튼 연합이 설립되기 이전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생디칼리슴 같은 반대쪽 정치적 사상이, 인종에 상관없이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허덕이는 빈곤한 하층민들의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파고들고 있습니다. 연방의 정치적 구도는 얀 스뮈츠 장군의 남아프리카당과 J.B.M. 헤르초흐 장군의 국민당이라는 두 정당 체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현재 대립하는 두 파벌로 나뉘어 있는 더 작은 정당인 노동당도 남아프리카 의회에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24년과 1929년 사이에 이들은 연립정부에서 국민당과 통치하였으나 대공황의 대처에 실패한 이후 남아프리카당은 다시 다수당을 확보하였는데, 처음에는 국민당에서 이탈한 민족주의자들의 도움으로, 1933년 이후에는 대공황의 여파를 완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스로 다수당을 확보하였습니다. "연방은 강하다." 남아프리카법 웨스트민스터로부터 통과된 1909년 남아프리카법은 연방의 헌법 역할을 합니다 - 남아프리카 연방은 연방이라기보다는 단일 국가로서 각 식민지의 의회가 폐지되고 지방의회로 대체됩니다. 국회는 폴크스라트(Volksraad)와 상원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폴크스라트 의원은 지방마다 선거권이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자격을 통과한 백인 소수자들에 의해 선출됩니다. 케이프와 남부 로디지아에서는 재산과 교육 수준에 근거한 자격 있는 선거권이 마련되어 있지만, 투표는 오로지 백인 전용입니다. 상원은 5개 지방의회의 각 의원과 폴크스라트 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임명됩니다.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형식을 따르며, 현재 클라렌든 백작인 남아프리카 총독에 의해 임명됩니다. 남아프리카는 1920년대 영국 혁명 이후 영국을 대신하여 베추아날란드, 바수톨란드, 스와질란드를 보호령으로 관리해 왔으며, 남부 로디지아는 1922년 연방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 상공조합 |
7% 상공조합 |
8%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연맹 |
6% 국민노동의회 |
0% 남아프리카당 |
0% 남아프리카당 |
41% 남아프리카당 |
34% 국민당 |
0% 국민당 |
2% 국민당 |
- {{{#!folding 국가 정신
- 인종 분리
남아프리카는 분단된 국가입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다양한 아프리카계 토착 민족인 반면, 사회경제적 힘은 소수의 유럽계 백인이 쥐고 있습니다. 이 집단은 차례로 네덜란드 식민지 개척자의 네덜란드어권 후손이자 오렌지 자유국 및 트란스발의 아프리카너들, 케이프 지방과 나탈, 그리고 로디지아의 백인 인구 대다수를 이루는 영국인으로 나뉩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50%, 사단 조직력 -15%, 안정도 -15%, 생산 효율성 한도 -15% - 흔들리는 자치령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에 속해 있지만, 많은 아프리카너들은 대영제국이나 협상국에 대한 충성을 거의 느끼지 않으며, 대신 비동맹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만큼 남아프리카의 본토 수복 참여에 대한 의지는 낮습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10, 안정도 -10%, 전쟁 지지도 -40%, 동맹으로부터 전쟁에 참가하거나 동맹을 전쟁에 호출할 수 없음 - 고등판무관 영토에서의 노예제
노예제는 바수톨란드, 스와질란드, 그리고 특히 베추아날란드의 고등판무관 영토에서 여태껏 한번도 완전히 근절된 적이 없는데, 이 영토에서의 부족적 구조가 비밀리에 이 제도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관습이 이를 없애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는 사실은 남아프리카의 명예에 오점을 남깁니다.
안정도 -5%
독일의 승리로 인해 실제 역사와는 달리 나미비아를 얻지 못했지만 영국 혁명의 혼란을 틈타 베추아날란드와 남로디지아 등 현실보다 국경을 확장했다. 그러나 옛날부터 사그라들지 않는 인종갈등, 영국계와 안 그래도 본체가 박살난 대영제국 밑에 계속 있는 걸 거부하는 아프리카너, 미텔아프리카의 위협 등으로 역시 혼란한 상태. 게임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검은 월요일이 터지며 여기 대응하는 방식으로 각기 다른 이념과 세력을 정부에 들여올 수 있다.
디폴트는 협상국 안에서 계속 영국의 충실한 영연방국 노릇을 하는 거지만 정치적 선택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를 현실보다 20년 일찍 구현해버릴 뿐만 아니라[1] 대외적으로도 오히려 독일에게 붙어버리는 극단적인 아프리카너 인종주의 극우 민족대중주의 루트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인종차별을 뿌리뽑고 미텔아프리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상대로 아프리카 해방의 첨병이 될수도 있다.
사회주의 루트는 싫고 흑인들에게는 인종평등을 주고 싶다면 사회자유주의 루트가 있다.
검은 월요일 이벤트에서 국민당하고 협상해서 통합당 만들고, 후계자로 보수파 선택하면 자유당이 떨어져 나가는데 1943년 선거에서 자유당 당선시키고 노동당하고 연합정부 만들면 최대한 인종차별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남아공 루트 타는 중 정치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자세히 말하면 실제 현실에서도 당시 남아공 노동계, 좌파의 고질적 문제였던 백인 노동자만 우대하는 인종차별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을 찍어누르지 않고 은근히 실질적으론 인종차별을 남겨두는 정치적 선택지를 고르면 빡쳐버린 흑인 민족주의자들이 2차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엎어버린다.[2] 그런데 이 흑인 민족주의 정권도 현실세계 현대의 경제자유투사당 마냥 백인은 무조건 다 강제 재산몰수, 학살, 추방해버리는 반대방향으로 끔찍한 인종주의적 정권을 만들어버린다. 어떤 루트를 가던 차별이 남아있는 셈이다.
이상주의적인 방향이든 일부러 막장 디스토피아 세계를 즐기는 맛으로든 방향이 다양하고, 인게임 컨텐츠 상으로도 2차세계대전 대비하며 거대한 미텔아프리카에 맞설 것인지, 아니면 여기 편승할 것인지 딱 도전욕을 자극할만큼 적당히 어려워서 비열강 비유럽 태그 중 인기가 많은 편이다.
2.2. 라이베리아 (LIB)
라이베리아 소개 Liberian Introduction 대략 버지니아 크기인 라이베리아는 미합중국의 보호 하에 있는 서아프리카의 독립국입니다. 사회 상류층은 진휘그당True Whig Party이라는 굳건한 의원연합에 속해있으며, 이 당은 1870년대 이래로 매 주요 선거마다 승리해왔습니다. 미국 출신의 라이베리아인들에겐 기독교를 원주민들에게 전파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서아프리카의 전통을 몇몇 수용했습니다. 하층 계급을 위한 포로Poro, 라이베리아 상류층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결사는, 부자는 계속 부유하게, 빈자는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관리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세계대전은 라이베리아에겐 어둡고 음모스런 때였습니다. 몬로비아에서 프랑스 소유 청음초소의 존재가 거의 드러났고, 독일 대사는 수상쩍은 정황으로 사라졌으며, 국경도 변했습니다.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시에라리온은 프랑스에게 점령 및 합병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온 코트디부아르 난민들은 시에라리온 난민들의 물결을 초과할 정도였습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프랑스 혁명의 혼란 와중에 프랑스령 식민지인 코르디부아르를 공략하면서, 긴장감을 오히려 더 고조시켰던 겁니다. 이제 라이베리아는 실패한 계획들의 부채에 시달리며, 그 경제는 파이어스톤 내츄럴 러버Firestone Natural Rubber의 손에 달려있어, 국가의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진휘그당의 정통주의자 에드윈 바클레이Edwin Barclay 대통령이 라이베리아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까요? "라이베리아 만세, 만세!"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7% 라이베리아 운명당 |
2% 생디칼리슴 |
11% 인민당 |
5% 사회민주주의 |
15% 진휘그당(혁신) |
15% 진휘그당(중도) |
40% 진휘그당(보수) |
1% 진휘그당(강경) |
0% 군사 정부 |
4% 라이베리아 프리메이슨 그랜드 롯지 |
- {{{#!folding 국가 정신
- 심각한 부채 위기 Crippling Debt Crisis
라이베리아는 최근 수 년간의 수많은 실패한 프로젝트로 인한 빚에 빠져버렸고 현재 이런 노력의 성과는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고생만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파산의 위기에 몰려있으며, 스스로가 판 구덩이에서 올라올 희망이 전혀 없다면 구제금융 요청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건설 속도 -10%, 안정도 -20%, 매일 정치력 비용 +0.2
카이저라이히에서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국가 중 하나. 미국의 속국으로 시작하지만 2차 미국 내전이 일어나거나 중점을 밟다 보면 독립할 수 있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국가가 지고 있는 채무와 더불어 검은 월요일의 영향에서 회복해야 한다. 독일, 일본, 파이어스톤 사 중 하나의 지원을 받아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집권 정당은 1939년의 선거를 통해 교체 할 수도 있지만 전체주의 정당이나 프리메이슨이 쿠데타를 벌여 정권을 잡는 경우도 있다.
0.20 패치 후 미텔아프리카와 프랑스 공화국 간의 국경이 조정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에 둘러싸여 있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아프리카의 해방을 외치며 인접국에 전쟁을 걸 수 있는데 하필이면 그 국가가 협상국 소속인 프랑스 공화국... 프랑스 공화국이 라이베리아 국경에 군사를 배치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존재하니 타이밍을 잘 노려서 요구하는 지역만 급습해서 점령하고 이벤트로 종전을 노리거나 아예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자. 상아 해안과 기니까지 점령할 경우 이 지역들을 괴뢰국들로 해방해 '서아프리카 연방'을 세우거나 토고까지의 직접통치를 시행할 수 있다.
2.3. 미텔아프리카 (MAF)
아프리카의 심장에서 In the heart of Africa 프랑스와 벨기에 식민지를 흡수해 탄생한 도시, 추장령, 왕국, 농지, 정글, 사바나, 사막 등등으로 구성된 미텔아프리카는 암흑대륙의 절반을 덮고 있는 광대한 땅덩어리입니다. 이것은 암흑대륙의 절반을 덮고 있으며 도시, 군장국가, 왕국, 농지, 정글, 사바나, 사막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약, 협약, 묵약이 복잡하게 얽힌 이 식민지는 식민지청은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겠지만 안정적임에도 수익성은 정말로 없습니다. 현 총독, 카를 리터가 도착했을 때에 미텔아프리카는 이미 1919년과 1925년의 평정 작전의 여파로 형성된 다양한 군벌들의 변덕에 수년 동안 휘둘리는 상황이었고,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법적인 책임자임에도 독일군의 '독립적 행동'이라는 전통 때문에 자신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36년에 이르러 그는 이러한 노력을 거의 포기하고 적어도 아프리카의 상황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해버린다면?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36% 제국 식민지국 (개혁파) |
64% 제국 식민지국 (강경파) |
- {{{#!folding 국가 정신
- 1936년 예산안
우리는 독일로부터 신병과 함께 보조금과 무역을 통해 우리의 예산의 상당 부분을 지원받습니다.
민간공장 공여 +10, 군수공장 공여 +2, 매주 인력 추가치 +120 - 위임통치령 문제
우리는 그들의 통치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기에 이는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것입니다. ||
매일 정치력 비용 +0.15
* 벨기에계 투자
기반시설/민간공장/철도 건설 속도 +10.00%, (콩고) 매일 순응도 획득 -0.05%
}}}* 벨기에계 투자
기반시설/민간공장/철도 건설 속도 +10.00%, (콩고) 매일 순응도 획득 -0.05%
독일 제국이 패배한 협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인수한 후 합병한 결과물. 카를 리터(디크르젠 내각 초기에 임명 되었다)[3] 총독으로 통치하고 있다. 시작하면 검은 월요일이 터지면서 경제가 순식간에 악화된다. 공장 하나 짓는데 50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여러 이벤트들이 일어나 정치력과 안정도를 엄청나게 잡아먹고 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본국에 요청하는 이벤트가 뜨는데 이때 독일의 선택지에 따라 또 안정도, 정치력이 감소하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 안정도가 -40% 이하로 내려가면 아프리카 국가들이 일제봉기하며 아예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
경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가 중점으로 예산안을 짜고 집행해야 한다. 예산안 관련 중점은 매 해마다 자동으로 찍히고 민간 경제 위주로 갈지 전시 경제 위주로 갈지 선택해서 서로다른 효과를 받게 된다. 전시 경제에 맞춰져있는 1939년 예산안 쯤되면 경제는 거의 정상화된다.
식민지 내부에서는 옛 영국 식민지와 벨기에 식민지가 불안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 지역의 순응도는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영국 식민지였던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는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어 있다.
- 1.0 패치이전 플레이
- 정치적으로는 괴링으로 대표되는 방금 막 부임한 신정부 계열과 이전까지의 관료들이 지지하는 계열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괴링 개인은 독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단적인 통치를 하려는 야망을 품고 국민대중주의 계열로 기울고 관료들 중 자유주의적인 파벌은 아프리카에서도 선거제를 이식하고 싶어한다. 1938년에 괴링의 비리로 촉발되는 위기상황에서 독일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중점이 달라진다. 1차적으로 식민지 정부 자체적으로 비리 수사를 통제하거나 괴링을 억류시킬 수 있으며, 괴링을 억류시키면 바로 독일의 선택에 의해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만 비리 수사를 통제하면 이후 체포 영장 이벤트가 발생한다. 여기서는 괴링이 체포에 응하거나 거절하고 국민대중주의 정당을 집권시키는 선택지가 있는데, 체포에 응하면 마찬가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며 거절한다면 독일이 넘어가 주거나 반역으로 선언할 수 있다. 독일이 눈감아 주면 중점을 통하여 영국 식민지를 합병하면서 명목상 괴뢰국으로 자치도를 높일 수 있지만, 반역으로 선언당하면 안정도가 무려 100%나 깎인다. -40% 이하일 때 식민지가 붕괴되는 것을 감안하면 무조건 붕괴라 봐도 좋을 정도. 다행히 유저가 잡을 때는 AI 독일이 반역으로 선언하는 선택지가 나오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만약 괴링을 하야시킨다면 반대파들이 정권을 잡고, 독일식민협회나 개혁파들은 비교적 민주적인 형태로 개혁을 단행하나 신식민정부(후견전제주의)가 정권을 잡는다면 현상유지를 지속한다. 어느 루트든 개혁을 통해 카탕가, 부간다, 나이지리아 등을 괴뢰국으로 해방한다. 괴링의 국민대중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중앙집권화를 시행하며, 안정도를 매우 떨어뜨리고 영국계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치권을 몰수, 핵심 주를 박고 최종적으론 '부왕령'의 지위로 국가 단계를 상승시킨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봉기가 일어나며, 최대한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주간 안정도 패널티로 인해 국가가 붕괴된다.
주적은 포르투갈.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여러 공작을 벌여 경찰관이 총에 맞거나 무기고가 털려서 육군 경험치가 하락하거나 민간 공장이 파괴되거나 심지어는 요인이 암살되기까지 한다. 모두 정치력과 안정도를 엄청나게 잡아먹는 이벤트들이다. 이에 대해 독일 본국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독자적으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독일에 도움을 요청해서 포르투갈과 협상해 외교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괜찮지만 협상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요청을 거절하면 또 정치력이 떨어진다. 독자적으로 행동을 취할 경우나 협상에 실패할 경우 대립이 격해지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포르투갈 본토에 있는 사단들이 아프리카에 재배치되기 전에 식민지들을 빠르게 접수해주면 곧 포르투갈에게서 평화요청 이벤트가 오게 된다. 안정도를 얻고 무조건 평화를 맺거나 포르투갈의 식민지 일부를 할양받기, 안정도를 잃는 대신 앙골라와 모잠비크 전 지역을 합병하는 것 중에서 고를 수 있다. 포르투갈에게 잠비아나 카탕가 등을 점령당할 경우 포르투갈 주도의 평화협정이 이루어지며, 이 경우 땅을 잃게 되고, 1년간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강제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포르투갈과의 마찰이 시작되면 주간 안정도 -1.00%의 국민정신을 달게되며, 협상을 맺거나 전쟁이 끝나게 되면 패널티가 사라지므로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수를 쓰는 것이 좋다.
그 외에 라이베리아가 미국 내전으로 독립하면 정치력을 떨어뜨리고 선전포고해서 집어먹을 수 있다. 또한 베를린이 점령당하면 독일에서 망명정부 수립을 요구하는데, 수락한다면 독일 망명정부로 플레이하게 되며 거부한다면 독립국이 될 수 있으나 관련 추가 컨텐츠는 없다.
0.19 패치 후 미텔아프리카가 붕괴할 경우 단번에 붕괴되기도 하지만 르완다와 우룬디, 부간다를 시작으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하나씩 튀어나오며 서서히 붕괴하기도 하게 되었다. 현 시점에서는 케냐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붕괴가 시작된다.
0.20 버전에서는 코트디부아르 지역을 상실했다.#
1.1 패치 이후로는 커스텀패스에서 붕괴를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리워크 이후로는 강경파가 정권을 잡았을 시 완전 독립이 가능해졌다.
2.3.1. 독일 망명정부
독일 제국이 멸망할 시 망명정부 선택지를 누를 경우 정치트리는 사라지고 망명정부로써 아프리카에 기반을 다지고 본토 수복을 준비하는 중점 트리가 새로 생긴다. 첫 중점의 제목은 '가장 암울한 시기'로, 사실상 유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암울한 상황을 훌륭하게 반영한다.(...) 또한 매 주마다 안정도 -0.20%가 깎이는 '빌려온 시간'이란 국민정신이 생기는데. 안정도가 -100%이 되면 붕괴된다.독일 망명정부를 플레이하기 위해서 게임 초반에 일부러 프코뮌에게 항복당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독일 본토가 러시아와 인터내셔널에 의해 점령된 상태니, 다른 임시정부들이 모여있는 협상국에 가입해 본토 탈환을 위해 인터내셔널을 상대할 수 있다. 또는 프랑스 공화국을 침공해 협상국과 전쟁을 하는 대신 독자적으로 마르세유 상륙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협상국의 공세를 막는 도중에 인터내셔널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공멸할 수 있으니 독자 루트는 가지 말자. 만약 독일 제국 붕괴 이후 독일령 동아시아가 살아있을 경우 동아시아를 괴뢰국으로 둘 수 있고, 협상국에 가입할 경우 동아시아는 망명정부로부터 독립하고 동등한 회원국이 된다. 본토를 탈환한 후 협상국을 탈퇴하고 영국에게 전쟁 목표를 받을 수 있으나 독자 세력은 파지 못한다.
의외로 콩고, 동아프리카 등에 코어가 박혀 있고 이전에 미텔아프리카가 부왕령 루트를 탔을 경우 영국령 아프리카 지역에 핵심 주를 박을 수도 있어서 인력은 충분히 뽑히지만,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매우 빈약한 산업력과 산업 중점을 가지고 있다. 시작 이전에 미리 개발딸을 쳐놓지 않은 상태라면 협상국 경제기구에 막대한 정치력 투자로 산업 버프를 받아 공장을 늘리도록 하자.
독일 망명정부의 경우 미텔아프리카가 붕괴된 이후 생겨나는 남서아프리카보다 더 후반 컨텐츠가 빈약하고, 독일 본토를 탈환한 이후 받는 새로운 중점도 없어(본토 탈환 이후 수도를 본토로 옮기고 합병 결정을 통해 대독일을 만들 수는 있다) 플레이가 권장되지 않는다. 제작자들도 이런 국가는 아무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
2.4. 소말리아 (SOM)
뭉치면 산다! United We Stand! 소말리아의 여러 국가들은 식민주의자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국제 사회의 눈에는 우리가 약해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졌고 동족간의 관계는 분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압둘라 하산Abdullah Hassan이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인들을 상대로 거둔 놀라운 승리 이후 이탈리아는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후퇴했으며 와르산갈리Warsangali의 술탄, 알리 시레Ali Shire는 영국이 독일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이름뿐이나마 영국의 지배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공식적으로 세계대전을 종결한 명예로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소말리아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알리 시레의 조약에 의해 영국의 보호령은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양측에 모두 이익이 된 이 현상유지책은 대영제국이 몰락하며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와르산갈리의 군은 노린 듯이 잽싸게 남아있는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했고 영주들은 그를 보코르Boqor 즉 소말리아의 황제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맹국의 군주들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칼리프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서방에는 그 자신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소말리아에는 번영이 찾아왔고 우리의 토지는 비옥해졌으며 우리의 도시는 거대해졌습니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로부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가덴을 점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도로, 서적, 대학은 통칭 소말리 르네상스로 칭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지표들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현명한 이들은 좋은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우리의 나라를 질투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으며 중앙아프리카의 신임 총독은 외교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미래가 어떻든 간에, 우리가 우리에게 제시된 가능한 모든 기회를 잡았고, 하나가 되어 소말리아를 더 좋고 밝은 미래로 이끌었다는 사실에는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섰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 공동협의회 모가디슈지부 |
5% 소말리 연맹 |
0% 자문위원회 |
2% 정의당 |
5% 진보당 |
5% 자유당 |
10% 소말리 청년단 |
47% 부족의회 |
11% 와르산갈리 술탄정 |
14% 신 소말리 운동 |
- {{{#!folding 국가 정신
- 와르산갈리의 철권통치 Iron Fist of Warsangali
와르산갈리는 소말리아 연방의 지도국으로, 오스만,독일 같은 외세와는 그 유래가 세계대전 때까지 이어지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 권력 기반이 튼튼합니다. 소말리아의 수도가 명목상으론 모가디슈긴 하지만, 실제 결정은 라스코레이에서 내려지며, 이에 반항하는 이들은 빠르게 입다물게 됩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3 - 식량난 Food Shortages
소말리아는 도시화, 외국의 투자, 문화적 르네상스같은 번영을 경험했지만, 부정적인 측면이 다소 없잖습니다. 성장하는 인구와 군대, 농장 노동력의 감소는 식량난을 일으켰고, 다소 드문 일이지만 여전히 소말리아의 농촌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소비재 공장 10%
이탈리아와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도 모자라 오가덴 지방까지 확보한 모습이다. 주요 컨텐츠론 연방 왕국/중앙집권 왕국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 개혁과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이 있다. 이 이외에 뭔갈 해보기는 어려운데, 부족한 자원·인력·공장이라는 마이너 국가들의 삼중고를 제대로 달고 있으며, 국가 중점도 딱히 이를 해결해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연구 쪽으로는 빠르게 슬롯을 올릴 수 있으며, 장비 생산비용과 소비재 비율을 줄이고 전투력 보너스를 받는 국가 정신이 많아 효율과 질 측면에서는 꽤 좋은 모습을 보인다.
2.5. 에티오피아 (ETH)
교차로에 선 제국, 에티오피아 Ethiopia, an empire at Crossroads 현지 지명으로는 에티오피아라고 부르는 아비시니아는 19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하는데 성공한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로 1896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 승리는 경제·군사·행정 면에서 유럽에 발맞추어 나라를 현대화시키고자 하던 아비시니아 제국 내의 현대화 과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18년 자우디투 여제 치하의 아비시니아는 세계대전에 독일의 편으로 참전해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에리트레아를 성공적으로 합병했고 제위 요구자 이야수를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이탈리아의 주둔군을 상대할 때나 협상국 군의 제국 내로의 습격을 막을 때 더 한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분쟁지역이었던 하라르에 대한 영유권은 지역 대다수를 점령한 소말리아 군을 몰아내지 못하며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령의 자우디투 여제가 살아있는 아이 없이 사망하자 그녀의 사촌이자, 섭정이며, 오랫동안 대립해왔던 라스 터퍼리 머콘는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반동적인 파벌의 지도자였던 그의 전임자의 색채를 지우고 아비시니아를 서구화하기 위해 새로운 개혁들을 실시하려는 그의 의도에 따라 새로운 왕조가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자우디투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던 소 왕이나 공작 등의 국가의 보수적인 귀족들에게는 거센 반대를 맞았습니다. 근거리에 있는 지부티의 새로운 주인이 된 독일과의 연계는 해군 기지와 아디스 아바바, 케냐를 연결하는 철도가 (독일 자본의 힘으로) 완공되며 더 강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신임 중앙아프리카 총독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지만 독일과의 관계는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소말리아와 그들의 후원자인 오스만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최고조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는 하나의 깃발과 대의 아래에 통일된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야심찬 공작들의 권력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적의 편에 설 수도 있기 때문에 국내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굳건히 서 있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에티오피아 인민위원회의 |
0% 전에티오피아 생디칼리슴 운동 |
1% 에티오피아 노동당 |
2%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전선 |
0% 통일과 민주주의 연합 |
2% 통합에티오피아민주권 |
23% 민주동맹 |
35% 솔로몬 왕조 충성파 |
36% 귀족평의회 |
1% 대중주의 장교단 |
- {{{#!folding 국가 정신
- 주체 불가능한 채무 Crippling Dept
우리의 채무는 치명적인 수준에 달했고 국가의 어깨 위에서 주체못할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채무가 우리를 너무나도 구속하기에 사람들은 에티오피아의 독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산 효율성 한도 -5%, 매일 정치력 비용 +0.2 - 귀족들의 군대 Aristocratic Military
우리의 군대에서의 직위는 출생으로 결정되고 모든 최고위직은 세계 대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그 능력이 의심스러운 귀족들의 것입니다.
사단 조직력 -5%, 최대 계획 수립 -5% - 노예제 Slavery
노예제는 에티오피아에서 매우 만연한 관습입니다. 메넬리크 2세 이후 전임 황제들의 노력은 사실상 상징적인 것 뿐이었고 노예제와 노예의 후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합니다. 노예제의 실행은 그 어떠한 문명국에서도 부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 제도는 비효율적이며 에티오피아의 수치의 원천입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05, 안정도 -10%, 소비재 공장 -5% - 소집군 Army of Levies
에티오피아는 근대의 강대국들과는 달리 통일되고 조직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에티오피아의 '군대'는 귀족들 개개인의 소유이며 사람들은 귀족들에게 충성하며 오직 그들에게만 충성합니다.
사단 조직력 -30%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공격해서 뜯어냈지만 오가덴 지방을 소말리아에 뜯겨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양분한 상태로 시작하게 된다. 최근에 점령했기 때문인지 에리트레아 지역에는 코어가 박혀 있지 않다. 경제 트리를 타면서 코어를 박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봉건국가나 다름 없는 나라를 서구식으로 개조하기 위해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주도로 다방면의 개혁을 하게 된다. 다만 에리트레아에 코어가 박혀 있지 않다면 개혁에 반발하는 보수파가 에리트레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개혁은 노예제, 세금, 행정, 군사, 토지의 5개 부문에 걸쳐서 이루어지며 각 개혁을 마칠 때마다 나오는 선택지를 어떻게 선택했는지에 따라 모든 개혁을 마친 후에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국가,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국가, 지금까지와 동일한 봉건국가 중 하나로 변모하게 된다.
개혁을 끝마치면 소말리아에 전쟁을 걸어 오가덴 지방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 외에 이집트가 중점으로 전쟁을 걸 수도 있으니 주의.
이 외에도 만약 미텔아프리카가 독일 아비시니아 철도를 매각하거나 파산시키지 않으면 친독일 산업화를 진행하는 중점들이 해금되며 2차세계대전 후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할 수 있다.
AI가 잡을 시 십중팔구 오가덴 전쟁에서 소말리아를 이기나 도중에 에리트레아가 봉기할 경우 패배하고 소말리아의 괴뢰국이 된다.
2.6. 이집트 왕국 (EGY)
이집트 왕국The Sultanate of Egypt 근대 이집트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1882년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의 영토의 일부라고 여겨지던 이집트의 법률적 지위를 놓고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이 지역 내의 영향권에 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14년 보호령은 공식적인 것이 되었고 1867년 파샤에서 케디브로 바뀐 국가수반의 명칭은 술탄으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오스만의 술탄의 잔류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절연한 것이었습니다. 압바스 2세는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삼촌 후세인 카밀이 그를 대체하여 술탄이 되었습니다. 1917년 그가 사망하고 그의 외아들 카말 알 딘 후세인이 상속을 거부하자 후세인 카밀의 동생 아흐메드 푸아드가 푸아드 1세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명예로운 평화가 맺어지며 이집트는 이제 약화된 영국 영향권의 일부로 남았습니다. 이는 이집트 대중의 분노를 고조시켰고 1925년 대영제국의 몰락의 와중에 폭력사태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집트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푸아드 1세는 혁명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며 그의 정통성을 입증했습니다. 혁명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것이었고 자연스레 모든 계층, 신앙, 직업의 이집트인들을 연합시켜서 영국계 외국인들을 한번에 몽땅 몰아냈습니다. 혁명은 또한 이집트가 독일의 것을 모델로 하는 의회를 구성하게 했습니다.혁명의 혼란 가운데 독일은 수에즈 운하를 접수했고 이집트는 독일 제국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습니다. 혁명 이래로 현재 이상으로 나가서 군주제를 진정한 입헌군주제로 만들려는 자유주의자들과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자 가운데 갈등이 있어왔습니다. 게다가 1936년이 오면서 왕위를 위해 양육된 계승자 젊은 파루크에게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위축되면서 모든 정치적 정당의 구성원들은 이집트의 패권의 부활과 오스만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동이라는 꿈에 주목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이집트 마르크스주의기구 |
0% 이집트 사회당 |
0% 전국노동자해방위원회 |
3% 이집트 사회민주당 |
12% 자유입헌당 |
25% 와프드당 |
35% 와타니당 |
15% 이티하드당 |
10% 알라위야 왕조 |
0% 국민이슬람당 |
- {{{#!folding 국가 정신
- 농업 경제
이집트의 경제는 다소 저개발 된 상태이고 대부분 농업 위주입니다. 일부분에서 공업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혁들이 필요합니다.
소비재 공장 10%, 생산 효율성 한도 -20%, 공장 생산량 -10% - 만연한 문맹
이집트 농촌 인구의 대부분은 문맹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 개혁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2, 연구 속도 -16.7% - 경험 없는 군대
이집트 장교단은 그들이 강력하게 성장하지 않기를 바랐던 영국과 오스만의 의도대로 다소 경험이 부족합니다. 많은 장교들이 세계대전 이전의 전투 방식에 익숙하고, 이는 군대의 향상에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를 근대 국가로 만들려면 군대에도 역시 알맞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사단 조직력 -5%, 사단 공격/방어 -10%, 계획 수립 속도 -10% - 엘리트층의 토지 소유 Land Owning Elites
이집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65%의 토지는 겨우 6%에 불과한 엘리트 계층과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토지들의 상당수는 과거의 이크타Iqta 제도에서 기인합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10, 자원 획득 효율 -5%, 소비재 공장 5%, 안정도 -3%
인구는 어느 정도 있으나 건설 슬롯과 자원은 석유를 제외하면 부족하다. 검은 월요일 극복과 개혁 중점에서는 토지개혁 방법/세속주의vs이슬람주의/아랍어나 콥트어 교육에 투자/영미법vs대륙법vs전제정 등 완료한 중점에 따라 입헌군주국/현상유지/전제군주국으로 갈리며 세속주의에서 국가 정체성을 고대 이집트로 잡았다면 알렉산드리아로 천도하는 이벤트가 뜬다. 1937년 6월 이후 카이로 회담 이벤트가 완료되면 카이로 협약 세력의 맹주가 되어 하위 중점 2개를 마치면 오스만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오스만의 중동 영토를 이집트와 동맹군이 점령하면 승리하며, 이벤트 선택에 따라 차지한 영토를 아랍 국가[4]와 나누거나 이란과 분할한 뒤에는 에티오피아를 병합하는 중점이 열린다. 만약에 미텔아프리카가 분해됐다면 사리 토후국[5]/하우사[6]/잔지바르[7]를 카이로 협약에 초대할 수 있다. 오스만과 싸우는 중 시리아 반란을 획책할 수 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후 중점으로 트리폴리타니아와 통합이 가능한데 트리폴리타니아가 독립국이어야 하며, 트리폴리타니아에 국민대중주의 정당이 집권해야 한다. 오스만에게 패배하면 재통합될 수도 있고, 괴뢰국이 될 수도 있는데 괴뢰국이 되면 파루크 1세의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후엔 프랑스 공화국을 치며 북아프리카•서아프리카를 해방시키려 한다.
1.1.4 패치로 중점이 약간 리워크되어서 검은 월요일 극복 중점과 개혁 중점이 따로 떨어졌다.
2.7. 키레나이카 에미르국 (LBA)
키레나이카 토후국 1843년 위대한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앗세누시가 설립한 세누시 교단은 그들이 지배하는 키레나이카 지역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이고 서서히 성장하고 있는 벵가지의 도시 엘리트층에게 자발지역을 점점 빼앗기고 있지만, 우리는 거의 100년 가까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비열한 제국주의자들과 싸워왔으며, 특히 선대 최고지도자들은 와다이 사막에서 시와 오아시스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을 향한 공격을 이어왔습니다. 1911년 이탈리아군이 트리폴리타니아를 침공했을 때, 우리는 칼리프와 함께 싸워 그들의 가공할 만한 병력과 싸워왔고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오스만이 리비아를 넘겨줄 때까지 지속했습니다. 우리와 오스만의 관계는... 말하기는 복잡하나 우리가 1911년부터 1915년까지 힘을 합쳤듯이, 오스만 정부가 이 영역에 그들의 독립된 행정부를 설치하려고 혈안이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계대전이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지나치게 방만하고 파산한 제국은 전후 우리의 강화된 지위에 대항할 수단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벵가지에 있는 관료들의 명목상의 지배권 확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키레나이카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 이유는 이런 안정된 상황을 바꾸려는 수단과 의지가 서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1933년 아흐메드 샤리프 앗세누시 최고지도자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에게 넘겨주었을 때부터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 이후 망명길에 오른 정당한 후계자이자 세누시 교단의 왕자인 이드리스와 전 최고지도자의 범이슬람 지지자들과의 긴장을 재점화시켰습니다. "계속해!"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9% 알마왈룬 이드리스 |
58% 알 세누시 |
23% 알 세누시 |
- {{{#!folding 국가 정신
- 세누시 교단의 고향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우리 교단의 강직함은 우리를 교육, 종교, 군사, 심지어 경제까지 모든 것을 국가가 토제하고 있는 키레나이카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강직함은 우리가 이탈리아와 싸울 때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들의 군대를 바다 건너편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마그레브와 마슈리크 전역의 아랍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5%, 사단의 핵심 영토 공격력 +5.0%, 사단의 핵심 영토 방어력 +5.0%, 적이 점령한 우리 주의 저항도 증가 속도 +100%
* 오스만의 해양 지배
정치력 획득 -20%, 공장 생산량 +10.00%, 해군기지 건설 속도 -50.00%, 조선소 건설 속도 -50.00%
* 세누시 교단 지원자
주간 인력 +200, 기병 공격 +8.0%, 기병 방어 +8.0%
}}}* 오스만의 해양 지배
비록 우리 교단이 키레나이카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오스만이 벵가지와 트리폴리타니아를 통제하고 있는 한 바다에 대한 그 어떤 영향력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벵가지 오스만 군사기지는 오스만 제국이 동부 리비아에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땅으로, 오스만 공무원들과 상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교역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사헬 지대, 수단, 이집트, 리비아를 오가는 오래된 카라반들이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이 제공하는 현대식 인프라와 경쟁할 수 없게 만들어 우리 경제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
* 세누시 교단 지원자
세누시 교단의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인을 몰아내고 마그레브의 억압받는 이슬람교도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믿음의 깃발 아래 몰려들고 있습니다. |
시작 시점에서는 키레나이카 지역의 오스만 토후국으로 등장하며 트리폴리타니아 지역과 벵가지는 오스만의 영토이다.
이드리스 1세를 집권시키거나 국민대중주의 루트를 타면 카이로 협약에 가입해 오스만 제국과 싸울 수 있으며, 승리하면 벵가지와 트리폴리타니아를 획득한다. 이후에는 중점으로 국명을 리비아로 바꾸고 중앙집권 국가와 연방 국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중점을 탈 수 있다. 리비아를 형성한 상태에서 튀니지까지 획득하면 이프리키야를 형성할 수 있다.
0.19 패치 이후 AI가 벵가지만 획득하고 트리폴리타니아를 따로 해방시키게 되었다.
1.0 패치 이후 판도가 고증에 맞게 변경되었으며, 사용자 설정에서 트리폴리타니아와 통합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통합하도록 지정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AI는 트리폴리타니아를 해방시키기만 한다.
판도의 경우 너무 비판이 많았기 때문에 1.1 패치를 기점으로 다시 현대의 리비아 판도로 돌아왔다.
3. 북아메리카
3.1. 도미니카 공화국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전체주의당 |
2% 생디칼리스트당 |
0% 사회주의당 |
7% 독립당 |
3% 누에보 아줄당 |
22% 공화당 |
41% 로호당 |
12% 애국자 연합 |
13% 군부 |
0% 대중주의당 |
- {{{#!folding 국가 정신
- 대공황
미국을 휩쓴 대공황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도 파괴했으며, 무능한 전임 대통령은 문제를 더 악화시켰습니다. 경제가 점차 나아지고는 있지만, 계속 복구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소비재 공장 40%, 건설 속도 -10%, 생산 효율성 한도 -10%, 공장 생산량 -10% - 적대적인 상류층
마르티네스 대통령의 정책과 주요 정치 조직의 대중지향화, 그리고 군부의 견제되지 않은 영향력으로 고립된 상류층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 분노가 정치적인 위협으로 바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라에는 매우 해롭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8, 주간 안정도 -0.4%
아이티와 국경분쟁 중이고 온건하게 접근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거나 강경하게 밀고 나가 전쟁을 벌여서 이를 타개할 수 있다. AI가 잡으면 대개 아이티에게 점령당해 멸망한다.
3.2. 멕시코
몇 년 전의 멕시코 멕시코는 최근 몇 년간 변화되었습니다. 1910년의 멕시코 혁명은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대항하여 시작되었고 거의 1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1917년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사파타를 포함한 그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하였고 다른 혁명가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수의 군대 및 정치 지도자들에 의한 아과프리에타 계획으로 이어졌고 알바로 오브레곤이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는 것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부터 멕시코 정부가 안정기에 들어가기 시작함에 따라 혁명의 혼란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알바로 오브레곤의 첫 임기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판초 비야가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고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가 마침내 미국인들로 하여금 멕시코의 현 정부를 멕시코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게 만든 후에 더욱 그러합니다. 경제는 특히 사파타가 권력을 쥐고 있어서 다른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보다 더 포괄적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남부 지역에서 개선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브레곤은 노동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것은 두 거대 노동조합인 '멕시코 노동자 지역연합(CROM)'과 보다 생디칼리슴적인 '노동자 총동맹(CGT)' 사이의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헌법에 규정된 엄격한 반성직주의법으로 인해 모든 가톨릭 인구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멕시코 오브레곤은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의 뒤를 이어 같은 정책을 이어나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동안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많은 국제적 사건들이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영국의 혁명과 그 이후 미국의 대공황은 남쪽으로 충격파를 보내왔고 멕시코 경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것은 중앙아메리카, 특히 니카라과에서 갈등을 촉발시켰습니다. 사파타는 그곳으로 가서 그의 혁명적 이상을 남쪽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저것들이 데 라 우에르타가 저지른 일들 중 최악은 아닙니다. 그는 임기 제한을 수정해 오브레곤이 두번째 임기도 지낼 수 있도록 했고, 당연히 오브레곤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32년 사파타가 사회주의자와 대중주의자를 기반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사파타의 임기는 경제에 초점을 두었으며, 특히 농업 분야의 근로환경과 농민의 에히도에 대한 권리, 혹은 사용권자의 재산 밑에 놓인 공공토지의 개선에 맞추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임기 동안 멕시코의 원주민과 소작농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보수주의자들과 가톨릭 교회들이나 더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더 인기가 없던 정책은 선거법 개정으로 최대 연임 제한을 1회로 바꾸고 최대 5년으로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국제사회에 제안한 것은 그가 시행하기 시작한 토지 재분배 정책처럼 미국과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36년 동이 트면서 많은 사람들은 멕시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멕시코 만세! ¡Viva México!"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6% 국가혁명당 |
17% 멕시코 노동당 |
45% 국가농민당 |
17% 멕시코 노동운동당 |
0% 국가행동당 |
0% 자유당 |
0% 멕시코 민주당 |
0% 멕시코 국민당 |
0% 군부 |
5% 대중단체당 |
- {{{#!folding 국가 정신
- 혁명의 경제유산
멕시코 혁명은 멕시코 경제를 황폐화시켰습니다. 혁명의 종식 이후 불황의 구덩이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진정으로 경제가 혁명으로부터 회복되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10, 안정도 -5.00%, 건설 속도 -10.00%, 생산 효율성 한도 -10.00%, 공장 생산량 -10.00%, 시장으로 가는 자원량 -5% - 혁명의 군사유산
멕시코 군대는 멕시코 혁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군대는 여전히 혁명 기간 동안 존재했던 군 구조, 특히 입헌군과 남부 해방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유산 때문에 군대는 두 방향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입헌군에서 복무한 장교들은 멕시코 군대가 유럽의 군대들과 유사한 전문 군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반면 남부 해방군에서 복무한 장교들은 게릴라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멕시코를 위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단 조직력 -20.0%, 사단 회복률 +5.0%, 계획 수립 속도 -25,0%
알바로 오브레곤이 집권할 때까지는 실제 역사와 같으나, 카라에서는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며, 시작 시점에서는 사파타가 대통령이다.
일단 사파타의 정해진 임기는 37년까지지만 36년에 사파타에 대한 암살시도가 성공하면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의 군사 쿠데타, 빠른 선거,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의 막시마토 설립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암살이 실패하거나 선거로 판초 비야(급진사회주의), 파스쿠알 루비오[9](사회민주주의), 비센테 톨레다노(생디칼리슴) 중 한 명이 뒤를 이으면 좌파적 민주주의가 유지된다. 막시마토 루트를 타면 플루타르코 카예스와 라사로 카르데나스,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의 극좌 독재 정부가 수립된다. 군사 쿠데타 시 우파적 민주주의를 재건하거나 군사정권을 유지하는데, 제3의 루트로 호세 우르키사의 시나키스트 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외교적으로는 좌파 집권시 제3인터내셔널에, 우파 집권시 협상국에 가입할 수 있으며 인접한 센트로아메리카 4개국 중 다른 성향을 가진 국가에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
시나키스트가 집권하고 관련 중점을 찍으면 중앙아메리카와 미국-멕시코 전쟁 때 뺏긴 영토를 수복하는 디시전이 열린다.
3.3. 서인도 연방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 혁명전선 |
12% 국민레지스탕스 |
8% 자유연맹 |
7% 자치당(사회주의자) |
10% 자치당(연방주의자) |
30% 단일당 |
21% 국민통합당 |
8% 애국연합 |
2% 군사정부 |
0% 통일당 |
- {{{#!folding 국가 정신
- 카옌 협약
1931년 체결된 카옌 협약은 프랑스 영토의 지위에 관해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 사이에 체결된 협약입니다. 이 협약은 프랑스 식민지에 영국인들 보다 더 높은 자치권을 보장하며, 당시부터 지금까지 대협상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17%, 안정도 +5%, 전쟁 지지도 -10% - 풋내기 육군
영국인 참모들이 우리 군의 양성에 도움을 줬을지라도 결국 서인도군은 풋내기일 뿐입니다. 우리 군인들은 어리고 경험과 전문지식이 부족합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는 훈련과 실전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육군 경험치 획득량 +20%, 사단 조직력/회복률 -15%/10%, 최대 계획 수립 -10% - 경제 붕괴
안정도 -4%, 전쟁 지지도 -10%, 건설 속도 -5%, 생산 효율성 한도/성장 -10/5%, 시장으로 가는 자원량 -15%
}}}협상국이 중남미에 가지고 있던 수많은 식민지를 하나로 뭉쳐서 탄생한 국가이다. 일단은 협상국 소속인데다 영국계 주민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만큼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하나 프랑스계나 특히 흑인 주민들은 사회주의 계열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Divided states 패치로 독립국에서 캐나다의 식민지로 변경되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코뮌에 의해 프랑스 공화국의 영토가 점령당한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여기로 이사한다.
캐나다 자치령과 프랑스 공화국이 본토로 복귀할 경우 중점을 통해 각자 먹었던 식민지를 원상복구하거나(영국령대로 프랑스령대로) 복원된 영국의 중점 및 디시전을 통해 독립을 시켜줄 수도 있다.서인도 연방 소속 군대, 특히 해군의 경우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왕립 해군으로 복귀한다.
3.4. 중앙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의 국가인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4개국(코스타리카는 조건에 없지만 형성할 수는 있다)이 하나로 통합해 형성할 수 있는 국가. 게임을 진행하며 꼭 한번은 중앙아메리카 통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이긴 세력의 정치 성향에 따라 통일 후의 국가 방향과 국가중점이 달라진다. 좌익 성향(전체주의~사회민주주의)일 경우 센트로아메리카가, 중도 성향(사회민주주의~사회보수주의)일 경우 중앙아메리카 연방이, 권위주의와 독재 성향(권위민주주의~국민대중주의)일 경우 중앙아메리카 공화국이 성립된다.모든 루트에서 통일 결정을 누를 경우 같은 세력 안에 있는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즉시 합쳐지며 국가 태그가 교체된다. 이후 첫 중점을 찍기 전까지 헌법과 집권 정당을 선택하며 향후 플레이가 결정된다. 사회주의 중앙아메리카에선 급진사회주의~전체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같은 사회주의 정부와 협력하려 하며, 제3인터네셔널에 가입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권위 정부의 경우 우민화정책을 추진하거나(국민대중주의), 계속되는 군정을 실시할지(후견전제주의), 형식적으로나마 민정에게 권력을 이양할지(권위민주주의) 결정한다.
반면 중도 성향으로 통일을 이뤘을 경우 통일 이후 자치적인 연방, 혹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 둘 중 선택하며, 자유 선거가 실시된다. 다른 루트에 비해 실질적으로 고를 수 있는 정치 방향이 다양한 편이다.(급진사회주의~사회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와 사회자유주의는 협상국이나 라이히스팍트, 사회민주주의 루트는 협상국에 가입하며, 시장자유주의는 캐나다의 비호를 받는 상태로 고립을, 급진사회주의 루트는 영구중립을 택한다. 어떤 루트던간에 4년마다 계속 선거가 일어나며, 다른 정당을 선택해 보너스를 받는 것이 가능하다. 단, 경제 관련 국민정신은 다른 루트의 경제중점을 찍을 경우 그것으로 교체되니 조심해야 한다.
중앙아메리카는 딱히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중점이 없는데, 무력으로 코스타리카와 파나마를 점령하면 핵심 주를 박을 수 있는 결정이 뜬다.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사회보수주의 루트만이 할 수 있다.
3.4.1. 과테말라
과테말라 소개 1898년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과테말라에 정치적 혼란이 시작했습니다. 카브레라의 "자유"당은 1920년까지 실시된 모든 선거들을 카브레라와 자유당에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등 광범위하게 정부를 통제했습니다. 자유당 시대 동안 미국인 사업가가 운영하며 더 싼 가격에 미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영향력도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1918년 지진이 카브레라가 설치한 산업 시설을 완전히 파괴한 이후로 자유당은 거센 반발에 시달리게 되었고, 1920년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카브레라의 대처 능력 부족으로 인해 호세 아스미티아, 타시토 몰리나, 에두아르도 카마초, 훌리오 비앙키, 에밀리오 에스카미야를 중심으로 국내 보수주의자들이 뭉쳐 과테말라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통일당을 조직했습니다. 통일당은 정당 창립 강령으로 "삼중법"을 준비하였고 1920년 새해가 다가오자 과테말라 시에 이를 배포했습니다. 1920년 3월 11일 수도 외곽에서 일어난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삼중법에 영향을 받은 통일주의자들을 격앙시켰고 대중은 여태껏 느낀적 없었던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1920년 아드리안 비다우레 국회의장이 카브레라가 통치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여전히 카브레라 지지자들이 저항을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퇴진시키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카를로스 에레라를 과테말라 대통령직에 앉혔습니다. 에레라는 자유당과 같은 관점을 가진 이들과 통일당을 대표하는 이들 사이에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줄타기를 하면서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1921년 에레라가 과일 회사에 추가적인 양보를 제공하는 사안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당이 크게 분노하면서 줄타기는 끝나버렸고, 호세 마리아 오레야나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다음 해, 오레야나는 과일 회사에 양보를 제공하는 등 자유당의 요구와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오레야나가 좌우 양쪽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한편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판은 완전히 정체되었습니다. 과테말라는 지금 완전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오레야나는 영원하리."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 과테말라 혁명당 |
3% 혁명당 |
15% 혁명행동당 |
12% 국민진보당 |
1% 자유당(사회주의) |
1% 자유당(조합주의) |
18% 통일당 |
30% 자유당(군부) |
19% 과테말라 국군 |
0% 대중당 |
- {{{#!folding 국가 정신
- 먼로 독트린
미국이 주장한 먼로 독트린은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과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 버렸습니다. 먼로 독트린이 국가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확장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100%, 우리에게 전쟁 목표 정당화 하는 시간 +100% - 사회주의자에게 보상
과테말라 내 사회주의자들은 조선소와 철도 파업 이래로 계속해서 멕시코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시위를 벌여왔습니다. 이로 인해 정부는 가끔 의미 없는 개혁과 변화를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정도 -10%, 전쟁 지지도 -10%, 생산 효율성 한도/성장 -10% - 문맹
문맹이 과테말라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레야나 정권 초기 문맹률은 96%에 달했으나 개혁에 착수한 이후로는 75%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정도도 충분히 문제가 되는 수준이며, 혹독한 개혁을 실시할 때 까지는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연구 속도 -25% -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1898년 카브레라 독재정권 이후,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과테말라의 정치와 경제를 꽉 잡고 있습니다. 이는 과테말라가 유의미한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과테말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현재,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우리 토지의 50% 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일일 정치력 -0.2, 건설속도 +15%, 소비재 공장 -5%, 전쟁 지지도 -30%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할 수 있는 4개국 중 하나.
3.4.2. 니카라과
니카라과의 새로운 공화국 미국의 니카라과 점령과 아돌포 디아스의 복권은 니카라과를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의 괴뢰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무장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를 함락시키고 아돌포 디아스가 미국으로 도망치면서 혁명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정권은 변화를 거의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자유 혁명가 호세 마리아 몬카다의 밑에서 미국에 계속하여 부역하였습니다. 미국 해병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의 '국가 방위군' 으로 알려져 있는 무장 국가 경찰력의 창설은 그러한 정국의 현상유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습니다. 신정부의 방침에 실망한 후안 보티스타 사카사와 같은 이전의 자유주의 혁명가들은 나라를 떠났습니다. 다른 이들은 무장 봉기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젊은 프란시스코 세키라 모레노가 온두라스와의 국경 근처 북쪽에서 저항군을 조직하는 동안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는 남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권에 충성하는 세력들의 거듭되는 공격에 의해, 모레노의 북부 저항군 400명은 남쪽을 떠나 산디노의 300인 연대와 합류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통합군은 게릴라전에 통달해가면서 남쪽 정글로 천천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갈수록 더 절박해졌던 산디노는 외세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도망쳤습니다. 모레노는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산디노는 멕시코에 있는 동안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만났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금세 절친한 친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합의 물질적 지원에 힘입은 사파타는 사적으로 산디노를 소수의 멕시코 지원병들과 함께 니카라과로 돌려보냅니다. 그의 입지가 개선됨에 따라, 산디노의 국내 지지는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그의 혁명가들은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 쇠약해졌던 사기가 산디노의 새로운 성공에 의해 고조되자, 생디칼리슴 시위가 수도에서 일어났고, 혁명군의 접근은 미 해병대가 니카라과 동부로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낙후된 국가 방위군과 해병대가 수도를 계속해서 방위하는데 드는 엄청나게 높은 비용 때문에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합니다. 곧 '자유주의자' 들과 그들의 국가 방위견들은 수도를 산디노의 마지막 진격에 훤히 열어둔 채 온두라스로 탈출했습니다. 이와 함께 전 정부에 대한 증오로 멕시코로 후퇴한 사카사는 혁명 정부 구성을 돕기 위하여 니카라과로 돌아왔습니다. "혁명을 위하여!"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 국가혁명당 |
7% 니카라과 사회당 |
36% 국민주권전선 |
19% 니카라과 농민당 |
22% 자유혁명당 |
0% 자유헌정당 |
8% 보수당 |
0% 자유국민당 |
6% 국가야당연합 |
0% 공화연합 |
- {{{#!folding 국가 정신
- 먼로 독트린
미국이 주장한 먼로 독트린은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과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 버렸습니다. 먼로 독트린이 국가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확장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100%, 우리에게 전쟁 목표 정당화 하는 시간 +100% - 중미 혁명의 고향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 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중앙아메리카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해외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할 겁니다.
사단의 핵심 영토 공격력/방어력 +10%/15% - 미국의 오랜 영향력
산디노가 미국의 영향력을 뿌리치기 위해 수행한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여전히 매처럼 우리 주변을 돌고 있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이 족쇄를 풀 수 없습니다.
정치력 획득 -10%, 전쟁 지지도 -5%, 생산 효율성 한도 -10%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할 수 있는 4개국 중 하나. 현 대통령은 혁명의 영웅 산디노. 미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영향은 남아있어서 동부는 명목상으로만 니카라과의 영토고 실질적인 행정은 미치고 있지 못한다. 시작 직후 사회자유주의자 후안 바티스타 사카사, 사회민주주의자 프란시스코 세키라 모레노, 산디노가 선거에 참여한다. 미국에 내전이 일어나면 디시전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과 이념이 다를 경우(산디노, 모레나-사회주의 루트, 사카사-민주주의 루트) 온두라스를 공격한다.
온두라스와의 충돌 후 기존 정권에 대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나는데, 사카사가 권력을 잡고 있을 경우 산디노의 쿠데타 시도가, 산디노나 모레노가 권력을 잡고 있을 경우 사카사가 반혁명을 일으킨다. 이런 시도를 내치고 기존 루트를 그대로 타거나 쿠데타 성공을 시키고 반대 루트를 탈 수 있다. 전쟁으로 온두라스를 이겼다면 이념이 어찌됐든 괴뢰국을 유지하며,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4개국 모두가 같은 사상의 국가가 되면 디시전으로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하고 4개의 국가를 통합시킬 수 있다.
3.4.3.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소개 1931년 12월 부통령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가 노동당과 아르투로 아라우호 정권에 쿠데타를 일으키자, 진정한 민주주의의 복원은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고 국가를 두고 정치적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쿠데타의 원인은 경찰에게 유리하도록 군 봉급을 엄청나게 삭감한 조치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대중 지지도가 급격히 낮아졌습니다. 모든 반대파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국가를 요새화하고 자신이 속한 프로파트리아당 외의 모든 정당을 금지한 마르티네스는 엘살바도르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런 조치들이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2년 5월 16일,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1932년 막시밀리아노가 아우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와 펠리시아노 아마에게 영향을 받은 서부 원주민들에 대항하는 정책을 입안하면서 소작농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다지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산디노의 니카라과 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반군에 가담했습니다. 여전히 군부에 대항한 저항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가운데, 멕시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사파타가 반군에게 총기를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란은 1933년 1월 22일까지 이어졌습니다. 7만 명이 사망했고 반군 지도자 펠리시아노 아마와 아우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는 멕시코로 망명했습니다. 파르티잔의 공격은 더 이상 엘살바도르에서 생소한 풍경이 아니며, 막시밀리아노 정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잃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 내에서도 막시밀리아노의 반란 대처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등장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정권은 미국의 지원에만 매달려 있는 상황입니다. "막시밀리아노는 자신의 실수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것이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전체주의 국민연대 |
17% 인민해방군 |
6% 개혁운동 |
15% 노동당 |
12% 국민민주당 |
0% 기독민주당 |
1% 민주국민동맹 |
10% 통일민주혁명당 |
18% 엘살바도르 국군 |
21% 국가 프로파트리아당 |
- {{{#!folding 국가 정신
- 먼로 독트린
미국이 주장한 먼로 독트린은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과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 버렸습니다. 먼로 독트린이 국가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확장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100%, 우리에게 전쟁 목표 정당화 하는 시간 +100% - 32년도의 기억
엘살바도르 서부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자와 원주민 학살로 인해 반역자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사방에서 암약하는 등 우리나라에 상처가 남았습니다. 미국이 개입할 능력이 없다고 밝혀진다면 정권이 완전히 무너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30.00%, 전쟁 지지도 -20.00% - 대공황의 잔재
미국발 대공황이 우리의 커피 시장을 크게 황폐화시켰고 결과적으로 20년대 내내 불안정성이 국가를 집어삼켰습니다. 수없이 많이 시행했던 은행 개혁과 함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공황이 사그라들었고 현재 불황은 엘살바도르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건설 속도 -5.00%, 생산 효율성 성장 -5.00%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할 수 있는 4개국 중 하나. 시작 시점의 지도자는 바닐라에서도 엘살바도르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다.
3.4.4. 온두라스
원조 바나나 공화국 온두라스는 여러 미국 과일 업체들에게 지배당하면서 경제적인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1933년 불만이 폭발하게 됩니다. 소작농들이 일으킨 봉기가 수도를 휩쓸었고 현직 대통령은 자살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태가 지나가고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정부는 여전히 미국의 이익과 소수 지식인 집단의 지배 하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온두라스 국가기구는 완전히 난장판입니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철도와 항구를 연결시키기 위해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보잘것 없는 국가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향이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2% 국민혁명운동 |
2% 온두라스 생디칼리스트당 |
4% 온두라스 민주혁명당 |
3% 혁신단결 사회민주당 |
2% 온두라스 자유당 |
11% 민주연합당 |
13% 온두라스 국민당 |
40% 반부패당 |
2% 온두라스 애국동맹당 |
11% 온두라스 국민구원위원회 |
- {{{#!folding 국가 정신
- 먼로 독트린
미국이 주장한 먼로 독트린은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과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 버렸습니다. 먼로 독트린이 국가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확장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100%, 우리에게 전쟁 목표 정당화 하는 시간 +100% - 농민 공화국
농민의 이름으로 평의회를 개최하는 온두라스는 '농민 공화국'이며, 정식 명칭은 온두라스 농민 노동자 공화국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부는 빈사상태에 놓여 있고, 국민을 대표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10, 안정도 -15%, 전쟁 지지도 -5%, 공장 생산량 +10% - 12월 혁명
1932년 농민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여러 집단들의 느슨한 연대체가 "온두라스 농민 평의회"라는 이름으로 집권하면서 12월 혁명이 터졌습니다. 누군가는 혁명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충분히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20, 안정도 -20% - 대숙청
대숙청은 주로 미국과 연관된 온두라스군 인사에게 가해진 대규모 박해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돌아오고 먼로 독트린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로서 온두라스군이 굉장히 약해졌는데... 아마도 결과는 모두가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02, 사단 조직력/회복률 -10%/9%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할 수 있는 4개국 중 하나. 초반 내각을 보면 전체주의자부터 군 장교까지 다양한 이들이 정부 구성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작 직후부터 정치 불안정 이벤트 체인이 계속되는데, 탈영 군인들을 잡으려다 엘살바도르와의 국경분쟁으로 까지 번진다. 별 쓰잘데기 없지만 이길 경우 정치력을 주기에 군대를 키우고 공세선을 그어두는 게 좋다.
먼로 독트린이 붕괴되면 군사정권, 좌익민주주의, 우익민주주의, 전체주의 중 이념을 고를 수 있는데 니카라과와 비슷한 이념을 고를 경우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니카라과와의 분쟁도 마무리가 됐다면 38년 3월에 중앙아메리카 통일전쟁을 시작하면 된다.
3.4.5.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 중앙아메리카 성공의 이야기 중앙아메리카 정글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작지만 자랑스러운 국가는 심지어 일부 유럽 국가들보다도 낮은 문맹률과 바나나와 커피 무역에 기반을 둔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경제로 인해 수십년간 번영을 구가해 왔습니다. 1917년 있었던 티치노의 독재 시도가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국민 전체의 압력에 힘입어 채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모든 정당이 엄격히 헌정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개입이나 정치적 쿠데타는 전혀 없습니다. 이후로 줄곧 성장하는 독일 경제의 과실과 양국간의 밀접한 유대의 결실을 누렸던 평등주의적인 정치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국민공화당 소속이었던 리카르도 히메네스 대통령 치세는 미국발 침체가 원인이 된 경제공황과 대서양노동자의회가 마침내 일어서서 더 나은 권리를 요구한 것에 영향을 받아 고조된 사회주의 운동 모두를 성공적으로 다뤄낸 괜찮았던 시대로 평가받습니다. 비록 그들이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는데 성공했고 정부가 노동조건 법안을 입안하도록 해냈지만, 법안은 아직 통과되려면 오랜 시간이 남았습니다. 떠오르는 인기인 마누엘 모라 발베르데 아래에서 사업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미텔오이로파와 관계의 결실이 문화교류 프로그램과 과학 원조, 플란데런-왈로니의 뢰번 가톨릭 대학교와 코스타리카 상류층 사이의 관계와 같은 강력한 대학 연대로 흘러감에 따라 번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에 또 다시 햇살이 비치는군."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인민전위당 |
5% 인민전위당 |
0% 인민전위당 |
4% 국민공화당 |
21% 중도파 |
12%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
53% 국민공화당 |
5% 중앙아메리카 커피 회사 |
0% 군사정부 |
0% 카리브 군단 |
- {{{#!folding 국가 정신
- 먼로 독트린
미국이 주장한 먼로 독트린은 우리나라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과 다른 아메리카 국가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해 버렸습니다. 먼로 독트린이 국가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확장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안정도 +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100%, 우리에게 전쟁 목표 정당화 하는 시간 +100% - 민주주의의 등대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온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과 진보적인 개혁을 통해 코스타리카는 중앙아메리카 민주주의의 빛나는 등대로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안정도 +15%, 최대 의용군 사단 +1 - 과일 회사 노동 쟁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우리나라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정부 내에서도 깊은 유대를 맺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미국의 공황으로 인해 해외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고 독일 무역이 증가했지만, 과일 회사와 끔찍한 노동 조건은 정치판에 긴장감을 증가시켰습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사회주의가 중앙아메리카 전역에 침투한 현재, 정부가 적절히 개입하지 않는다면 긴장은 더욱 확대될 겁니다.
정치력 획득 -15%, 생산 효율성 한도 +10%
중앙아메리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은 독재나 사회주의로 빠지는 일이 많지만 코스타리카만은 그런 가능성 자체가 낮고 설사 독재정권이 들어서도 호세 피게레스 페레르가 반란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구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레르 집권시 중미, 남미 북부의 민주주의 국가들끼리 별도의 세력을 창설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주변 국가 중 독재정권이 들어선 국가의 민주주의 반군과 연계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3.5. 쿠바
쿠바의 간략한 역사 1902년이 돼서야 독립을 한 쿠바는 젊은 국가입니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이 언젠가는 또 다른 미국의 주가 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반면, 쿠바인들은 본인들의 국가 정체성을 마음 깊숙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쿠바는 처음 자치가 시작된 25년이란 기간 내내 미국의 내정 간섭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1928년 9월 20일이 되자, 점점 더 독재적이 되어가는 제라도 마차도 대통령과 그 꼭두각시의 주인인 미국인들에 대한 쿠바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쿠바는 온건파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새 정부를 새 정부를 가지게 되었고, 미래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젊고 경험이 없는 라파엘 트레호를 대통령으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받을 때도 쿠바인들은 계속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새 정권은 미합중국에 분개하면서도 대공황의 영향 속에서 통치를 이어가려 몸부림쳤고, 권력과 명목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대에게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5년이 되었을 때, 마차도를 무너뜨린 혁명가 연합은 붕괴 직전이었고, 선거일에는 정통주의와 사회주의 정당 지지자들 사이의 긴장이 폭발했습니다. 아바나의 거리가 붉게 뒤덮혔던 그 악명높은 날의 여파로써, 사회주의자들과 정통주의자들은 모두 의회에서 쫒겨났고, 집권 중인 연합당의 온건파들은 군대의 영향력과, 잔존한 '충성파', 자유당의 지지자들과, 쿠바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보단 권력 확보에만 더 관심있는 보다 보수적인 동맹들에 대해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반대파임을 깨달았습니다. 1936년 1월 28일에 의회와 대통령을 선출할 새로운 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닥쳐옴에 따라, 언뜻봐도 그날에 쿠바의 운명이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롭군."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 사회주의 운동-공산주의자 |
12% 사회주의 운동-노동자 |
5% 사회주의 운동-혁명가 |
40% 연합당 |
13% 신자유당 |
12% 공화당 |
10% 국가민주연합 |
4% 진보당 |
0% 군부 |
2% 국가혁명군단 |
- {{{#!folding 국가 정신
- 부분적인 암울함 회복
젊은 대통령 라파엘 트레호와 연합당의 정책은 대공황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완화시켰습니다.
소비재 공장 40% - 만연한 미국의 영향력
미국은 쿠바 사회와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미국인들은 쿠바의 정치적 발전을 면밀히 관찰하고 때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어떠한 종류의 실질적인 상태 변화도 미국의 반응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15, 소비재 공장 5%, 시장으로 가는 자원량 +10%, 미합중국 : 종주국과의 추가 무역 +25%, 미합중국 : 목표 국가 무역비용 -40% - 혼합된 정권
쿠바 군대는 보장된 의회 의석을 포함한 많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고 민간 정부에게 완전히 양보하지 않고 있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15,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5%
ic 9, 인구 410만의 약소국.
입지가 좋지 않아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노릇을 하며 나라를 좀먹고 있는 상황이다.[10]
36년 1월에 총선이 치러진다. 선택지는 집권 세력인 연합당(사회민주주의), 신자유당(사회자유주의)-공화당(시장자유주의)-민주국민연합(사회보수주의) 대연정, 그리고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의 추천인 진보당(권위민주주의) 이렇게 3개가 있다.
허나 신 정부가 제대로 정치를 하기도 전에 독일발 검은 월요일이 터진다. 대공황의 여파로 암울했던 경제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수도 아바나에서 총파업이 벌어지고 이틈을 타고 숨어있던 생디칼리스트 세력이 다시 한번 도시에 진입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후 이벤트 분기점을 통해 파업을 대처하게 되는데 불만 세력들과 타협을 시도할 수도 강경 진압을 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강경 진압을 시도할 경우 혼란이 가중되면서 민주 정부가 무력화되고 생디칼리슴이나 군부 루트를 탈 수 있다.
타협을 시도할 경우 다시 한번 선택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초헌법적인 비상통치권을 통과시킬 경우 권위주의 정부로 나아가고 부결시킬 경우 민주 정부 주도하에 미국과의 관세를 조정하고 노동자 구제책을 내놓는 등 불만 세력들과 타협을 진행한다.
이때 미국의 사주를 받은 대통령 경호대의 쿠데타 시도가 있는데 쿠데타에 성공할 경우 군부가 집권을, 실패할 경우 경호대를 숙청하고 민주 정부가 집권을 이어나간다.
민주 정부가 살아남는다면 대통령 트레호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대선이 치러지게 된다.
정치 중점을 모두 찍고 새로운 쿠바 중점까지 찍게 되면 현 정부에 맞춰 추가 정치 중점이 드러나고 외교 중점을 찍을 수 있게 된다. 지역 외교, 유럽 외교, 미국과의 관계, 서인도 연방과의 관계를 정리하며 최종적으로는 무역 파트너와 새로운 동맹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4. 남아메리카
4.1. 베네수엘라
세계에서의 베네수엘라의 위치 1830년 베네수엘라가 그란 콜롬비아에서 분리된 후, 베네수엘라는 1864년 이 나라가 연방화되기 전까지 보수와 진보 사이의 수많은 내전으로 흔들렸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여러 간헐적인 군사 정부와 민간 정부를 통해 계속해서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것을 변화시킨 것은 1908년 석유 매장지 발견과 후안 비센테 '메기' 고메스 장군의 쿠데타입니다. 고메스 정권 하에서 석유 산업은 국가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고, 비록 석유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지만, 세계대전 속에서 중립을 지키고 국가의 부채를 줄이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하였기에 메기 정권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개입으로 대영제국은 베네수엘라에서 물러났으나 베네수엘라는 에세키보 강 주장의 추진을 실패하였고, 그는 1928년 영국에 대한 '배상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사임했고, 선거 이후 1926년 세대의 민주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1936년까지, 26세대 정부는 3당 사이에서 심하게 분열되었습니다. 민주운동당은 현재 정권을 잡고 있지만, 민주공화연합에 있는 이전의 자유주의 동맹들이 힘을 얻고 있으며 인터내셔널을 지지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회당은 반자본주의 의견을 계속하여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이 지역에서 비교적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이지만, 전 세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초기 민주주의를 쉽게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군."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좌익혁명사회전체주의운동 |
8% 베네수엘라 사회당 |
2% 좌익혁명조합 |
33% 민주운동당 |
24% 민주공화연합 |
12% 기독교 사회당 |
9% 독립선거관리위원회 |
5% 임시정부 |
5% 베네수엘라 국가회의 |
2% 국가해방운동 |
- {{{#!folding 국가 정신
- 석유 중독
베네수엘라는 절망적으로 검은 황금, 석유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석유는 이 나라 경제의 중심이자 부의 원천입니다. 다른 산업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익은 거의 없기 때문에, 국가는 네덜란드병에 취약합니다.
군수 공장/민간 공장 건설 속도 -10% - 외국 석유 회사의 지배
국내 유정의 대부분은 스탠더드 오일과 로열 더치 쉘의 후임자들인 외국 회사들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들이 창출하는 재산의 일부분은 결코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력 획득 -20%, 시장으로 가는 자원량 +10%
남아메리카의 북동단에 위치한 국가. ic 6에 인구 320만의 별볼일 없는 체급의 국가이지만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국가다.[11] 당연하게도 석유 위주로 경제가 굴러가고 있으며 그로 인한 폐단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
시작 지점에는 로물로 베탕쿠르를 리더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민주운동당이 집권중이지만 검은 월요일이 터지며 경제가 개박살이 나고 나라가 혼란해진다.
이후 이벤트 결정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거나 예방 쿠데타를 벌이고 권위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하는 루트로 갈리게 된다.
이중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쪽으로 정했다면 1939년 5월에 총선을 치른다. 선택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민주운동당, 사회자유주의 정당인 민주공화연합, 생디칼리슴 정당인 베네수엘라 사회당이 있다.
민주운동당이 집권할 경우 석유 일변도의 경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노동 기반 경제로 나아간다.[12]
민주공화연합이 집권할 경우 석유 산업을 더 발전시켜 경제를 호황으로 이끈다.[13]
베네수엘라 사회당이 집권할 경우 소비재에 큰 보너스를 받고 인터네셔널에 가입이 가능해진다.
인터네셔널 가입을 제외하고는 큰 존재감을 보이기 힘들지만 협상국이 대전쟁에 참여해 서인도연방이 전쟁중일 경우 디시전으로 에세키보를 요구할 수 있다.
4.2. 볼리비아
볼리비아 도입부 볼리비아는 형성된 이후 외교정책에서 많은 고통스러운 손실을 겪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칠레와의 국경 분쟁은 '태평양 전쟁'(1879~1883)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은 페루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가 패하고, 안토파가스타의 해안 지역을 강제로 빼앗기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후, 1903년 브라질과 볼리비아는 오늘날까지 볼리비아인들을 여전히 화나게 하는 부끄러운 합의 하에 중요한 고무 생산지인 아크레를 브라질에 양도하는 페트로폴리스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볼리비아의 광산 재산은 몇 년 동안 증가했지만, 정부에서의 광업 회사들의 영향과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들의 능력도 증가했습니다. 그 후 차코 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의 연장선상에 몇 번의 영광이 있었지만, 볼리비아는 완전히 패배했고 파라과이는 볼리비아 국가가 붕괴하는 것을 두려워한 브라질과 페루에 의해서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파라과이의 손에 의한 종말론적 패배는 볼리비아 국민 자부심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볼리비아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었고 현재 대부분의 국민들은 차코 전쟁이 공공문제에 간섭하는 광산 회사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분쟁 지역에서 전쟁의 선동가로서의 볼리비아의 지위를 고려하면,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파라페티 강 동쪽에 있는 차코, 필코마요 북부와 안데스 산맥의 동쪽은 파라과이 전체에 영구히 양도되어야 했습니다. 그 석유 재산은 영원히 외국인의 손에 있습니다. 많은 장군들과 장교들이 공개적으로 다니엘 살라망카 대통령과 그의 진보적인 우방국들의 간섭을 비난하면서 부패한 민간 정부는 빠르게 비난받았습니다. 훈장을 받은 두 명의 전쟁영웅인 헤르만 부슈와 다비드 토로는 1934년 초에 정부를 타도하고 폭넓은 지지기반으로 "국민구원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하지만 군대의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보는 것 외에 정의된 이념은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의 조정과 도시 빈민들의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게르만이 헌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석의 가격이 더 떨어지면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할 것이고 볼리비아 경제가 붕괴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 사람들은 여전히 바깥을 내다보며, 오래된 영광의 날을 기억하고 정의가 만들어지며 차코와 해안선이 그들에게 되돌아오는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좋든 안 좋든, ¡볼리비아 만세!"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 총체혁명운동 |
8% 볼리비아 생디칼리슴당 |
0% 사회주의 동맹 |
7% 혁명국민운동 |
3% 자유당 |
19% 대중자유당 |
15% 공화연합당 |
0% 일치국민당 |
42% 국민구원위원회 |
4% 볼리비아 국민당 |
- {{{#!folding 국가 정신
- 차코 전쟁의 유산
사단 조직력 -50.0%,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5%, 전쟁 지지도 -30.00%, 육군 교리 연구 속도 -10% - 경제 대공황
자원 획득 효율 -10.00%, 건설 속도 -8.00%, 생산 효율성 한도 -10.00%, 공장 생산량 -10.00%
시작 시에는 차코 전쟁의 영웅 헤르만 부슈 베세라가 집권하고 있는데 검은 월요일 위기 때의 광산 파업에 대처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잘 대처했다면 정권이 계속 유지되지만 만약 대처에 실패했다면 베르나르디노 리오하의 군사정권이 들어서거나 민주주의, 생디칼리슴 정권이 들어서기도 한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전쟁 중 개입해 파라과이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으며 칠레를 공격해 영해를 되찾을 수도 있다.
여담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도 볼리비아 영유권 주장 지역이 존재한다.
4.3. 브라질
브라질 연방 공화국 United States of Brazil 영국 혁명과 주요 무역 상대국들의 위기 이후 경제가 붕괴될 때까지 세계대전에서 브라질의 중립성은 나라를 평화롭고 안정되게 유지시켰습니다.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 둘 다 1926년 선거 후보들을 각각 창당한 후 선거의 균형이 깨지면서 혼란의 시대는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사건은 큰 위기를 맞이하여, 내전이라고도 불리는 주간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상파울루는 연방 정부에 대항한 전쟁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주앙 페소아 주와 히우그란지두술 주를 주도하는 북부 및 동부 주지사였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국경 지대로 불균형적으로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원으로, 제조업과 금전적 이득을 얻었고 연방 해군의 반란과 함께, 전쟁 종식은 반군들의 승리로 끝났고 페르난두 지 멜루Fernando de Melo는 잠시 공화국을 통치하고 현행 헌법으로 개정한 보르지스 지 메데이루스Borges de Medeiros의 편을 들어 사임했습니다. 그 이후로, 공화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경제적으로 변화해 왔고, 두 대통령이 민주적으로 선출됨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번영해 왔습니다. 그러나 1936년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생디칼리스트, 아나키스트, 통일주의자들이 계속해서 거리 싸움에 참여하고 정치인들의 미사여구가 분열되고 선동적이 되면서 정치적 급진주의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지배와 진보에는 대가가 따른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3% 국민최대주의 운동 |
3% 브라질 생디칼리스트당 |
4% 노동총연맹-브라질 아나키스트 연맹 |
13% 좌익민주당 |
13% 자유당 |
8% 자유민주당 |
33% 공화당 |
7% 연방의회당 |
3% 국가노동당 |
13% 브라질 통일주의 행동당 |
- {{{#!folding 국가 정신
- 선거 연도의 긴장감
아마도 브라질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논쟁이 많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대화는 열띤 논쟁과 거의 동의어이며 이념적 극단주의의 분위기가 국가의 대중을 둘러싸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20 - 극단적인 지방분권화
브라질 연방 공화국은 자국의 자치권을 항상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대통령, 자신의 정당,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러한 지역 권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약하고 이빨 빠진 중앙 정부로 귀결되는데, 이것은 필요할 때 결단력 있게 행동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05, 안정도 -20% - 전쟁의 흔적
내전만큼 회복에 오래 걸리는 상처는 거의 없습니다. 미나스제라이스의 군대가 상파울루에 침입한 후 정치적 과두 정부와 지역 정체성 사이의 긴장이 마침내 전쟁터로 쏟아져 나감에 따라, 전쟁은 수천 명의 사망자와 더 많은 고아와 노숙자를 남겼습니다. 중앙 정부가 하려고 하는 어떤 행동들은 현재 엄청난 불신으로 보여지고 있고, 리우와 상파울루 사이의 국경에 야기된 완전한 피해는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05, 항복 한계치 -30%, 전쟁 지지도 -15%,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 시간 +50% - 분열된 군대
브라질의 군대는, 간단히 말해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소위 '연방군'으로 불리는 26개 주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군집단이고, 브라질의 해군이 실제 연방 정부 산하의 군대의 거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이 거대하며 고풍스럽게 조직된 병력은 훈련과 장비 모두에서 질적으로 매우 다르며, 어떤 면에서도 현대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단 조직력 -20%, 계획 수립 속도 -10%
세계대전에서 끝까지 중립을 지켰지만 이후 미국발 불황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내전까지 일어났다. 내전은 금방 끝났지만 내전의 상흔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극심해진 지방분권화로 연방정부의 권한이 약화되어 여러 부작용을 겪고 있다.
1936년의 대선에서는 사회보수주의,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국민대중주의 중에 대통령이 결정된다. 이 중 줄리우 프레스치스 지 아우부케르크의 사회자유주의를 제외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이벤트가 발생할 수 있다.
사회보수주의에서는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집권하게 된다. 집권 초반에는 무난한 모습을 보이지만 여러 이벤트에서의 선택지에 따라 후견전제주의로 전환하며 독재정권이 수립된다. 선거는 일어나지만 후보는 제툴리우 바르가스 한 명 뿐이다.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주앙 망가베이라가 집권하는데, 칠레인들과 관련된 이벤트가 일어나며 선택지에 따라 생디칼리스트들이 집권하게 된다. 후속 이벤트에 따라 전체주의, 생디칼리슴, 급진사회주의의 3가지 사상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국민대중주의에서는 구스타부 도치 바호주가 먼저 섭정으로 집권한 뒤 망명간 브라질 황족들을 데려와 페드루 3세에게 권력을 이양하여 브라질 제국을 복고한다. 이때는 문화적, 인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포르투갈이나 아프리카 국가들과 친선관계를 맺게 된다.
독재정권이건 사회주의건 제정복고건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휘하의 주 정부에서 이에 반발해 내전을 일으키기도 한다. 내전이 연방정부의 승리로 끝나면 정권이 유지되지만 반군이 승리한다면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하게 된다. 내전이 한 지방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두세 지방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기 때문에 금방 진압하기는 힘든편. 다른 남미 국가들은 밥먹듯이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반면 브라질은 이런 거름망이 있어서 나중에 가면 남미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디시전으로 협상국, 라이히스팍트, 인터내셔널에 가입할 수 있고 아르헨티나가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에 무너져 적화되어 아르헨티나 코뮌이 설립되면 이에 예방전쟁을 실행할 수도 있다.
군대를 통합하는 중점도 있는데, 지역 민병대를 해체하고 연방군을 재수립하든지, 아니면 지역 민병대를 느슨하게 통합해 지방분권적인 군대를 만들 수도 있다. 패치로 민주주의 정권일 때만 군대 통합 중점이 기능하게 되었다.
다른 국가가 브라질을 정복하면 브라질을 통째로 괴뢰화시킬 수도 있고 브라질 내 각 주 정부를 7개국으로 분할시킬 수도 있다.
4.4.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지위 Status of Argentina 20세기 초까지 아르헨티나는 육류와 곡물 수출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경제력을 누렸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공화국으로 몰려들었고, 활발한 기업가 정신과 초기 산업이 아르헨티나를 가장 번영한 국가 중 하나로 빠르게 나아가게 했습니다. 무역 관계는 안정적이었고 영국과 독일로의 수출은 계속해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전이 들이닥쳤을 때 아르헨티나는 가장 중요한 경제 동맹국인 영국이나 두 번째로 중요한 독일 편을 들지 않으려 하다가 중립국이 되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를 중재하였으나, 영국은 독일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제재를 가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제3국을 통해 판매함으로써 이를 우회하려 했지만, 판매 실적은 같지 않았고 세계대전 이전의 기적은 둔화되었습니다.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가 다가오면서, 영국은 패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졌고, 아르헨티나 정부와 기업들에게 생산을 늘리고 나라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늘어나는 수요와 영국의 착취에 대한 불만으로 노동자들은 조직화하고 저항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무장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던 아르헨티나 정부의 봉기 통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는 새롭게 형성된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Frente Obrero Patagonico에 산타 크루스, 추부트, 리오 네그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습니다. 뒤이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 정부는 위기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연이어 실패했습니다. 통치에 대한 무능력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부루 장군은 1930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사회주의자와 생디칼리스트 동조자들이 대량 학살당하고 남쪽으로 밀려 가면서 공포의 시대가 전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재정권은 그가 2년 후 암으로 사망함으로써 권력 공백을 초래하고 다시 한번 남부로의 대규모 개입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거가 조작되고, 부정 선거를 통해, 로카의 국민자치당이 성공적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우리부루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느린 회복과 FOP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유발했습니다. FOP 지역으로의 작은 교전이 시작되고 해군은 성공적으로 티에라델푸에고 섬을 다시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칠레로부터의 개입은 정부가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막고 FOP와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종식시켰습니다. 1935년에 로카가 분쟁을 끝내고 FOP를 남겨두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에 걸친 분노가 폭발하면서 마누엘 카를레스 산하의 애국당은 크리스마스 쿠데타로 절정에 이르는데 필요로 하는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해군과 다양한 군사 요소들의 지원을 받은 카를레스는 1935년 크리스마스에 정부를 해체하고 수도권을 장악하고 자신의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1월 1일의 첫번째 날이 나라에 밝았으나, 카를레스는 여전히 아직 확실한 성공을 하지 못한 채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도권과 작은 내륙 지방을 제외하고, 그의 통제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ARA 또는 '아르헨티나 무적함대'의 지원은 보장되지만, 군대의 많은 사령관들은 카를레스의 잠재력을 의심하며 쿠데타를 진압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아."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0% 전체주의, 노동, 절제 |
0% 인터내셔널 |
4% 사회당 |
7% 민주진보당 |
15% 급진시민연합 |
12% 민주국민당 |
9% 반개인주의적 급진시민연합 |
18% 6월의 해방자들 |
8% 정의당 |
27% 애국당 |
- {{{#!folding 국가 정신
- 군부 경쟁 - 해군 지배
어느 한쪽에 너무 많은 영향력을 갖게 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심지어 군사 쿠데타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공장 생산량 -5%, 조선소 생산량 +10%, 계획 수립 속도 -10%, 군수공장 건설 속도 -20%, 조선소 건설 속도 +20%, 육군 교리 연구 속도 -10%, 해군 교리 연구 속도 +10%
국가적 중점과 이벤트를 통해 육군이나 해군을 강화시킬 수 있다. - 군대 파벌
사단 조직력 -10%, 사단 회복률 -10%, 육군 교리 연구 속도 -10%
국가적 중점 군대 파벌 근절로 제거됨 - 크리스마스 쿠데타의 문제
작년 크리스마스 기념 행사 직후 마누엘 카를레스와 애국당에 의해 혼란에 빠진 아르헨티나는 대통령직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는 여러 군대와 함께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사단 조직력 -90%,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60% 사단 회복률 -90%
국가적 중점 완전한 정치적 지배로 제거됨
영국계 기업들의 지나친 착취로 국가의 남쪽 절반에서 생디칼리스트 반란이 일어나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해버렸다. 서쪽의 칠레 역시 생디칼리스트 국가로 변모해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그 와중에 북쪽의 파라과이와 페루, 볼리비아는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외교적으로도 고립무원인 상황인데 내부적으로도 1935년 크리스마스, 즉 게임 시작 6일전에 해군 주도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만을 장악했을 뿐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대중주의 계열의 마누엘 카를레스의 쿠데타로 나라가 엉망이다. 초기의 이벤트에서의 선택에 따라 정권을 확고하게 하거나 페드로 파블로 라미레스의 육군이 역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카를레스 정권을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 해군의 쿠데타를 엎은 뒤에는 군정을 유지하거나 민정으로 이양할 수도 있다. 정치가 안정되면 검은 월요일로 엉망이 된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
외교적으로는 우선 남쪽과 서쪽의 사회주의자들이 첫번째 목표다. 37년 12월까지 이쪽 트리를 전혀 밟지 않으면 정권이 다시 무너지게 되고 정치가 다시 어지러워지게 된다. 중점으로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과 칠레에 전쟁을 걸면 북쪽의 파라과이가 뒤를 찌른다. 여기서 중점으로 볼리비아를 전쟁에 끌어들여 칠레와 파라과이를 견제할 수 있다. 다만 민주주의가 재건된 상태라면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하다.
어찌어찌 삼면전쟁을 끝마치고 남부를 완전히 통합시키면 이제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트리가 열린다. 여기서는 협상국이나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할 수도 있고 외부와 완전히 관심 끊고 페루와 '부에노스아이레스-리마 협약'을 결성해 남미의 맹주가 될 수도 있다. 초반에 카를레스가 집권했다면 주변 온 나라들에 전쟁 목표를 생성할 수도 있다.
특이하게도 바닐라의 일본처럼 육군과 해군이 반목하고 있고 중점과 이벤트에 따라 어느 쪽에 집중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육군이든 해군이든 어느 쪽에 치우쳐 있으면 좋지 못한 이벤트가 나오니 주의.
여담으로 후견전제주의 계열 국가 지도자가 후안 페론인데 권위주의 계열임에도 선거로 집권하고 그런 주제에 고유 정치트리는 존재하지 않고 휘하 장관들은 사회주의 계열 소속으로 나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4.5. 칠레
1936년 칠레 Chile in 1936 1879년부터 1883년까지의 초석 전쟁으로 칠레는 페루에서 타라파카와 아리카 지역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의 해안지역인 안토파가스타를 획득하였으며, 그 후 거대한 구리 광산을 지배하고 초석의 세계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경제 번영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세계 대전 초기에 초석의 수요가 높았기에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 동안 인공적으로 초석을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화학 공정으로 칠레의 퇴적물은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인구 증가와 함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사회 위기가 증가했습니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은 특히 1931년 칠레가 파산한 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의 비참한 통치 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물러났고 해군과 대부분의 육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인민들의 지지와 오랜기간 동안 망명했던 마르마두케 그로베[14]가 브리튼 연합에서 이끌어 온 증원의 도착과 함께, 칠레 생디칼리슴 공화국이 선언되었습니다.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아르투로 푸가가 이끈 1대 의회 하에서의 5년간의 재건 후, 공화국 경제는 크게 회복되었고, 군사적인 축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수사가 점점 공격적으로 바뀌면서, 대양을 가로지르면서 두 혁명을 경험한 베테랑 군인이자 존경받는 마르마두케 그로베가 공화국을 재건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칠레 국민들이 생디칼리슴 지도자들만큼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생디칼리슴의 빛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 것이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0% 영구혁명당 |
47% 칠레 생디칼리슴당 |
12% 국민사회주의연합 |
8% 칼레 협약 |
2% 자유당 |
0% 급진당 |
2% 민중해방연합 |
5% 공화운동 |
5% 급진공화당 |
9% 무신론자와 배신자에 대한 장교위원회 |
- {{{#!folding 국가 정신
- 남아메리카 생디칼리슴의 본고장
1931년 혁명 이후, 산티아고는 남아메리카에서 생디칼리슴의 중심지로 남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반동분자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념을 옹호하며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징병 가능 인구 1%, 사단의 핵심 영토 공격/방어력 +5%/+10%
- {{{#!folding 괴뢰국
-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 (자치 괴뢰국)
남미 생디칼리슴 국가의 맹주. 아르헨티나에서 분리된 파타고니아를 속국으로 두고 있다. 1938년 이전에 아르헨티나에서 선전포고를 해오게 된다. 이때 볼리비아는 칠레 측으로,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 측으로 전쟁에 참가한다.
칠레-아르헨티나 전쟁에서 이기면 파타고니아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모두 점령하고 아르헨티나 코뮌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나간다. 독립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당연히 전쟁. 이후에는 1940년쯤에 선거를 치르고 나서 인터내셔널에 가입하게 된다.
칠레-아르헨티나 전쟁에서 밀리거나 1940년의 선거에서 전체주의가 집권하면 보수적인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가 뒤집힌다. 전쟁중이었다면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처리되고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후에는 민정으로 이행할 수도 있고 군정을 유지할 수도 있다.
급사 지도자로 32살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선출할 수 있다.
4.6. 파라과이
파라과이 공화국 3국 동맹의 파괴적인 전쟁 후에, 파라과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고 깨졌습니다. 파라과이는 대부분의 남성 인구가 죽고 고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모두 과라니 공화국의 영토를 빼앗았으나 양국 간의 완충국으로서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에 극심한 인구 및 경제적 피해가 피해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재난을 복구하고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정치적 불안은 여전히 나라를 부식시켰습니다. 1904년, 콜로라도당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자유당 통치는 1922년 경쟁 관계에 있는 정당간의 내전으로 정점을 찍은 정치적 불안의 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29년 말에, 전쟁은 다시 볼리비아와 손을 잡고 파라과이에 왔습니다. 차코 지역의 유정을 확보하라는 경제적인 압력을 받고 있는 그 나라는 분쟁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차코 전쟁은 4년이 걸렸고, 1933년까지 파라과이는 볼리비아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늘어나는 부채와 군비가 정부에게 계속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는 비용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볼리비아군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전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사기도 낮아 파라과이의 사상자는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정국은 나아지지 않았고 자유주의 통치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라파엘 프랑코와 다른 급진 지도자들은 1934년 좌파 권위주의 원칙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차코 전쟁의 영웅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에 의해 3개월이라는 짧은 통치로 물러났습니다. 이제, 자유주의 혼란의 시대는 끝났고, 호세 펠릭스의 통치는 위대한 평화로써의 하나입니다. 그가 '생디칼리스트' 프랑코와 볼리비아의 침략자들에 대한 그의 행동은, 거의 만장일치로 국가 구세주이자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기 때문에,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르헨티나 애국당의 부상과 함께, 에스티가리비아와 그의 내각은 다시 초긴장 상태에 빠졌습니다. 마누엘 카를레스가 그 나라의 지도부에 오르자 그의 팽창주의 목표를 숨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곧 파라과이에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공화국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1% 파라과이 아브릴스타당 |
6% 파라과이 생디칼리스트당 |
8% 파라과이 아나코-사회주의 연합 |
2% 국민독립연맹 |
10% 푸른당 |
6% 국민정통자유당 |
5% 콜로라도당 |
56% 에스티가리비아 국민자유당 |
2% 파라과이당 |
4% 독립수비대연맹 |
- {{{#!folding 국가 정신
- 군인 연금
공장 생산량 -5% - 군부 영향력
징병 가능 인구 5%, 사단 회복률 +5%, 공장 생산량 -5%
차코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 전리품으로 배상금과 영토를 얻어냈다. 현 대통령은 차코 전쟁의 영웅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시작하자마자 검은 월요일이 터지고 이를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1937년 중반쯤 아르헨티나가 통일을 외치며 칠레, 파타고니아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때 아르헨티나의 뒤통수를 칠지 가만히 있을지를 결정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에 전쟁을 걸게 된다면 볼리비아가 차코 전쟁의 복수를 외치며 남하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가 병력의 수와 질에서 모두 앞서지만 상대해야하는 전선의 너비가 매우 넓으니 지형을 이용해 방어하다가 AI의 빈틈을 찔러 사단을 포위 섬멸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파라과이가 함께 전쟁을 걸어 양면전선이 되었다면 난이도는 더욱 상승한다. 칠레와 파타고니아가 아르헨티나를 잘 싸우기를 기도하자.
나라가 망하지 않고 1941년이 되었다면 선거가 개최되고 에스티가리비아 대통령이 연임할지(권위민주주의), 정권이 교체될지(사회보수주의) 선택하게 된다. 매우 맞추기 어려운 조건으로 1938년에 평화상태이고 검은 월요일 해결 중점 중에 붙는 디버프 국가정신을 떼지 못한다면 감소된 연금에 불만을 품은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우파 군인들이 일으킬 경우 국민대중주의, 좌파 군인들이 일으킬 경우 전체주의 정권이 세워지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브라질과 전쟁을 하거나 차코 지역을 볼리비아에게 양도했을 경우 반환을 위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
4.7.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
혁명의 불꽃 세계대전 동안 영국 기업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로 인민과 자원을 착취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불만이 쌓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부의 파타고니아 지역이 가장 심각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슴이 대두했고, 인민 수천명이 노동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개입할 것을 강요했고, 폭동은 반란으로 비화해 세마나 트라히카(비극의 주)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지점부터 사태는 점점 악화되기만 했고, 그 와중에 애국연맹이 주요 도시들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과두제 집권층 사이에서 점차 힘을 얻어갔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남부 깊은 지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저항이 성장했습니다. 시골 노동자들의 단순한 파업에서 시작한 저항은 남부의 총파업으로 커졌고, 몇 달 전에는 만기가 지난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제1차 파타고니아 농촌 협정'이라는 이름의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지주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노동자들은 또 다른 총파업을 시작했습니다. 엑토르 베니그노 바렐라 중령이 지휘하는 원정대가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복을 가했습니다. 1차 협정을 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바렐라를 믿었던 노동자들은 또 다른 협상을 기대했지만 끔찍한 결과만이 뒤따랐습니다. 바렐라는 파업자들의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파타고니아에서 통제권을 위협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사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혁명은 슬프게 시작했군." 파타고니아 반란 안토니오 소토와 호세 '파콘 그란데' 폰트를 중심으로 결집한 노동자들은 지금이야말로 혁명을 일으켜야 할 때가 왔다고 결정했습니다. 본래 농촌 협정에 있던 무장 해제 조항에도 불구하고 소토가 이끄는 아나키스트들 대부분은 무기를 알프레도 '엘 토스카노' 폰테에게 남겨 두었습니다. 그와 다른 더 급진적인 아나키스트들이 협정을 거부한 이래로 소토 본인도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파타고니아 도적단과 연계해야만 했습니다. 초기 군이 승기를 잡은 이후, 노동자들은 라 아니타 농장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합이 전신선과 전령을 지원해주면서 2차 파타고니아 대규모 파업은 힘을 점차 얻어가는 중입니다. 이 와중에 아르헨티나군은 유명하고 힘있는 급진시민연합의 정치적 반발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연합한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 근황 수년 후, 아직 파타고니아에는 혁명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칠레가 개입하면 파타고니아의 북부를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칠레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지역노동자연맹의 지도자이자 혁명의 주요 참여자 중 한 명인 안토니오 소토는 이후 국가를 이끌어 왔으며,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급진사회주의자들의 느슨하고 약한 연합을 이끌어 왔습니다.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아직 제대로 된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고 소토는 아르헨티나와의 위기가 끝나면 결과가 어떻든간에 일단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지만, 북부의 지도자로 마누엘 카를레스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선거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타고니아를 향한 공격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의 등불로 보여지는 가운데, 인터내셔널과 열렬한 아나키스트들, 망명중인 볼셰비키들 모두 다 국제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파타고니아와 같이 겉보기에는 황량한 황무지에 홀로 있는 것만 같은 노동자들에게도 아직 기회고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바 라 레볼루시옹!"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20% 계급주의 노조위원회 |
29% 아르헨티나 노조연합 |
24% 아르헨티나 지역노동자연맹 (9차 의회) |
10% 진보민주당 |
1% 급진시민연합 |
2% 국가민주당 |
1% 반독재주의 급진시민연합 |
8% 6월 해방자 |
5% 정의당 |
0% 애국연맹 |
- {{{#!folding 국가 정신
- 파타고니아 저항군
항복 한계치 +15.00%, 사단 한계 +10 - 비승인 공화국
매일 정치력 획득 -0.15, 안정도 -30.00%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의 광부들이 봉기해서 설립한 사회주의 국가. 칠레-아르헨티나 전쟁에서 승리하면 파타고니아 노동자전선에서 아르헨티나 코뮌으로 바뀌게 되면서 남미 사회주의 주도국이되고 칠레와 종속국 관계가 풀린다. 플레이어가 파타고니아 노동전선을 잡으면 AI 칠레가 종속국 풀어주기를 거부하고 전쟁뜨는 경우는 없으니 걱정하지 말자.
장군진에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바실리 추이코프, 게오르기 주코프,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지구-1 소련군 유명인사들이 있다. 설정상 프랑스 코뮌이 파타고니아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에서 패배해 망명 온 인사들을 보낸 것. 정작 파타고니아 노동자 전선을 플레이어블로 잡으면 높은 확률로 러시아가 적화되어 볼셰비키 인사들과 망명 군대 모두 러시아 공화국 정벌을 위해 떠나버린다.
아르헨티나 내전은 터지는 시기도 거의 비슷하고 기믹이 덩치 큰 왕따 단독 세력이 사방에 포위돼서 다굴을 견뎌야 한다는 기믹만 좌우익이 반대인거 빼곤[15] 여러모로 리틀 미국내전이라 부를만하다. 특정 거대 세력의 수장으로 플레이하고 있다면 아르헨티나 내전에서 자기가 후원하는 세력이 패망했다 하더라도 겜 접어야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통일하고 코어 다시 박고 이리저리 중점 찍은 아르헨티나+웬만하면 무조건 딸려오는 칠레는 어느쪽이던간에 상당히 덩치도 존재감도 크고 당연히 미국만큼은 아니라해도 여러모로 2차세계대전의 추를 기울일만한 국력이 있다. 결국 이 내전의 행방 하나로 남미 전체 해당 켐페인 내내 별로 싸울일도 없이 특정 진영에 뭍어 편히 가느냐[16], 아니면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로 유럽 못지 않은 치열하고 처절한 총력전의 현장이 될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인기 많은 컨텐츠이다.
4.8. 페루
1936년의 페루 페루는 1821년부터 사실상 독립상태였지만 스페인 정부는 1871년 친차제도를 둘러싼 충돌로 인해 양국간 평화상태가 깨진 이후에야 식민지의 자치권을 인정했습니다. 이후 페루는 볼리비아와 동맹을 맺은 이유로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이어진 아타카마 사막에서 벌어진 볼리비아와 칠레간 국경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 지역을 잃었습니다. 때를 틈타 영국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페루의 채무를 없애주는 조건으로 약화된 페루 국영 철도를 가져갔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1919년 아우구스토 레기아의 쿠데타가 페루의 민주주의를 공격했습니다. 1924년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혁명인민동맹이 결성되었을 때쯤, 레기아 정권은 1925년 월 스트리트 대폭락이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11개월동안 계속된 개혁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APRA의 지원을 받은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폭동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연결될 것을 우려한 군대가 사태에 개입하였고, 루이스 산체스 세로 중령이 레기아 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4개월 후 레기아는 페루 국가에 대한 각종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세로 정권의 지지율이 낮았으나,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있던 사건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폭동을 진압하고 콜롬비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설을 하던 세로를 한 폭도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동시에 그가 이끌던 혁명연맹이 혼란에 빠졌고 온건파였던 오스카르 베나비데스가 페루 안정을 위해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연맹이 재기를 준비하는 한편, 민주 정당이 끊임없이 선거 로비를 벌이고 APRA 세력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페루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어떤 미래가 다가오든, 우리는 준비되어 있다."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4% 혁명인민동맹 투팍주의파 |
7% 아메리카 혁명인민동맹 |
1% 혁명인민동맹 급진파 |
4% 사회민주당 |
6% 민주운동 |
8% 민주운동 |
12% 신국민협약 |
40% 헌법회의 |
10% 군 강경파 |
8% 혁명연맹 |
- {{{#!folding 국가 정신
- 몰락한 카우디요
레티시아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자이자 사회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낸 구원자인 산체스 세로가 우리의 남부 고토를 되찾기도 전에 APRA에 의해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기억과 이상은 그가 몸담았던 혁명연맹이 이어받을 것입니다.
전쟁 지지도 +10% - 급진화된 APRA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0%, 안정도 -10% - 몬토네라 경비대
칠레가 생디칼리스트 혁명으로 몰락한 이후 태평양전쟁의 아레키파인 참전용사와 그 아들들이 생디칼리스트의 침입을 막고 난민을 돕기 위해 무장 국경 순찰대를 설립했습니다.
(칠레) 타국에 대한 방어 혜택 +15%
실제 역사처럼 에콰도르와 영토 분쟁 중이며, 영유권 지대를 목표로 선전포고할 수 있다.
페루-볼리비아 연합과 관련된 중점도 있으며 만약 연합을 재건했다면 페루와 볼리비아가 각자 영유권을 주장하는 영토를 가진 국가들에 선전포고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 심지어 과거의 마드리드 조약을 근거로 아마존 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1.1 패치 이후 스토리가 약간 리워크되어 산체스 세로가 살아서 지도자로 등장한다. 리워크 이전 지도자였던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라레아는 세로가 암살당했을 때 지도자가 될 수 있다.
5. 오세아니아
5.1. 오스트랄라시아 연방
연방의 현황 Status of Federation 1924년 자원 보존법의 결과로 형성된 오스트랄라시아 연방은 영국령 오스트랄라시아 자치령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령 피지, 뉴기니 섬의 결합체입니다. 대전쟁이 큰 변화와 고난을 가져온 지도 십수년이 지났습니다. 전쟁은 사회와 경제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멜버른 코뮌이 짧지만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비록 당시 여당이었던 노동당 정부의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사태는 비상 계엄령, 선거 중단, 그리고 윌리엄 버드우드 총독의 임명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후 1925년의 영국 혁명이 대영제국을 뼛속까지 뒤흔들었고, 오스트랄라시아는 독일이 영토를 강탈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어 있고 나라를 거의 단결시키지 못하는 버드우드와 그의 동맹 빌리 휴즈의 국민당에 대한 국내의 불만은 계속해서 커져가며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합니다. ''오스트랄라시아여 전진하라, 앞으로!" |
- {{{#!folding 정부
<colbgcolor=#eee,#444> 3% 오스트랄라시아 최대주의당 |
12% 오스트랄라시아 생디칼리스트당 |
0% 오스트랄라시아 사회당 |
1% 오스트랄라시아 노동당 |
2% 오스트랄라시아 노동당 (반생디칼리스트) |
12% 오스트랄라시아 국가당 |
35% 오스트랄라시아 연합당 |
25% 오스트랄라시아 국민당 |
4% 오스트랄라시아 제일 운동 |
6% 중앙당 |
- {{{#!folding 국가 정신
- 비대한 함대 Oversized Fleet
영국의 몰락의 혼란스러운 여파로, 많은 함선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호주로 도망쳐왔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영구적인 것이 되었으며, 현재의 경제 상황으로는 상황을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해결책을 곧 찾아내야만 합니다.
함대 협조성 -10%, 조선소 생산량 -25%, 소비재 공장 5% - 경제 불황 Economic Depression
오스트랄라시아의 경제는 결코 튼튼하다 할 수 없었으며, 대전의 여파는 경제를 훨씬 더 악화시켰을 뿐입니다.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직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다 극단적인 해결책이 고려되기 시작함에 따라 극단주의자들이 전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 +0.25, 생산효율성 한도 -20%, 공장 생산량 -20%, 건설 속도 -20%, 시장으로 가는 자원량 -10%, 안정도 -10% - 말라비틀어진 충성심 Bled Dry
우리는 대전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결판이 났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아무 의미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20%, 전쟁 지지도 -25%, 항복 한계치 -10% - ANZAC 정신 ANZAC Spirit
대전기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출신들은 가장 공격적이었으며, 의심스러운 규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직을 유지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도를 넘을 정도로 다루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막상 전투를 즐겼습니다. 그들은 강인함과 감정적임의 흥미로운 조화였습니다.
사단 회복률 +10%, 사단 공격/방어 +5%, 사단 조직력 -2%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통합되어 형성된 오스트랄라시아이다. 협상국에 가입해 있고 시작 시에는 군정체제가 들어서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선거가 재개된다.
1936년과 39년의 선거의 결과에 따라 정치 체제가 변화한다. 36년의 선거에서는 민주주의 정당만 선택할 수 있고 39년의 선거에서는 국민대중주의 정당과 후견전제주의 정당을 선출할 수 있다. 또 후속 이벤트에 따라 국민대중주의나 후견전제주의, 생디칼리슴 정당이 집권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협상국 소속으로 활동하게 되나 생디칼리슴 집권시 제3인터내셔널에, 후견전제주의 집권시 공영권이나 독자 생존을 선택하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여분의 함선을 스크랩해서 관리비를 아끼거나 함선을 다시 함대에 편입해 전쟁을 대비할 수 있다. 그외에 디시전으로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
[1] 당연한 말이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제도적 기원은 이미 이 시절부터 영국계, 아프리카너 정치세력 불문하고 신나게 제정하던 인종차별적 법률에 기원하지만 어쨌든 정식으로 법제화 된 건 2차대전 이후였다.[2] 이전 버전에선 사회주의 정권을 설립하면 국가지도자로 나오는 윌리엄 헨리 앤드류스, 시드니 번팅, 데이비드 이본 존스 같은 당시 남아공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도 이런저런 편법을 사용해 인종차별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려는 위선자들로 묘사했는데, 최근 업데이트 이후 개정된 조사, 연구에 따르면 역사왜곡이었다고 한다. 당시 남아공 뿐만 아니라 호주에서도 "백인 노동자만 돕자"는 인종차별주의적 좌파 조류가 분명 있었고, 해당 국가, 운동 내부에서도 심각한 정치적 잡음을 일으켰던 건 맞지만 카라 사회주의 남아공의 지도자로 나오는 백인 사회주의자들은 오히려 당시 시대적 문맥을 고려하면 인종적으로 진보적인 인물들이었고, 궁극적으론 인종차별의 철폐를 추구하며 당시 남아공 사회적 현실로 인해 '일단 각 인종 별로 노동조합, 계급의식을 각성시키고 통합된 노동자 운동을 만들자'는 노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게 현실 세계에선 당시 전세계 좌파판을 아주 멋지게 트롤링해놓은 코민테른의 내부 정치적 밥그릇 싸움에 잘못 걸려서 1922년 란드 광부 봉기를 주도했던 남아공의 원로 노동운동가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출당당하게 되었고, 이게 상당히 오랜 기간 정설처럼 여겨지다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재평가 받는 모양이다.[3] 리워크 이전에는 헤르만 폰 괴링이 총독이었다.[4] 나지드-하사, 시리아.[5]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동부.[6] 나이지리아 북부.[7] 모두 이슬람 우위 지역이다.[8] 상술된 인물 맞다.[9] 실제 역사에서는 카예스의 바지사장 중 한 명이었다.[10] 미국의 영향이 큰 탓에 대공황에 직격타를 입었다. 36년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11] 시작 시점에 181의 석유를 생산 중이고 이후 중점에 따라 추가로 생산할 수도 있다.[12] 확대된 복지 계획을 강화시켜 인구 증가분을 10% 더하고 소비재 패널티를 5%로 경감한다.[13] 소비재를 10%나 잡아먹는 대신 인구 증가량을 40% 늘려주던 확대된 복지 계획이 없어진다. 대신 소비재 -5%의 석유 산업 개혁이라는 국민정신이 추가된다.[14] 현 한국어 모드에서는 '마마듀크 그로브'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영어로 읽은 표기이며 스페인어 표기로는 '마르마두케 그로베'가 맞다.[15] CSA-아르헨티나, TEX/PSA/NEE/USA/CAN-칠레/FOP/파라과이[16] 어떤 루트던간에 아르헨티나, 브라질 양쪽 모두 같은 세력에 떨어지면 남미는 정말 할일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