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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5 21:30:24

K리그/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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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기: 1988~2001
2.1. 주요 내용2.2. 연도별 드래프트2.3. 뒷이야기
3. 2기: 2006~2015
3.1. 주요 내용3.2. 연도별 드래프트3.3. 뒷이야기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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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프로축구 K리그에서 시행했던 드래프트 제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K리그에서 시행된 드래프트제는 크게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1기는 1988년~2001년을 칭하고 2기는 2006년~2016년까지를 칭한다.[1] 최근에 시행중이었던 2기 드래프트제는 점차적으로 축소되어 2015년 드래프트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고 2016년부터 완전 자유계약제로 전환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KBO 리그와 달리 K리그가 자유계약제와 드래프트제 사이를 오가는 이유는 축구의 종목상 특성에 기인한다. 국가간 선수이적이 드문 야구나 농구 등 타 종목과는 달리 축구는 한국 국적 선수라 해도 유럽이나 타 아시아 등 외국으로의 이적의 문이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다. 따라서 국내 클럽들은 우수한 신인선수 확보를 위해 국내 타 클럽들과 경쟁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클럽과도 경쟁해야 하고, 결국 선수에게 들어오는 제의는 돈을 더 줄수있는 해외클럽 쪽이 상대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다. 드래프트제로 선발된 신인은 지명 순위별로 계약조건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제 자체가 직장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이기는 하나 타 종목의 경우 그 침해의 정도가 드래프트제 시행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이익에 비해서 가벼운 데 비해, 축구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K리그 출범 시에도 처음부터 신인선발 제도를 자유계약제로 택한 것이며, 중간중간 아래에서 서술할 몇 번의 사건(?)들로 인해 드래프트제로 전환했지만, 결국은 자유계약제로 돌아가는 것이 리그를 위해서나 선수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방향이란 데에는 대부분의 축구인들과 축구팬들이 동의했다.

결국 2012년 프로축구연맹에서는 현 시행중인 드래프트 제도의 점진적 완전 폐지를 결정하고, 2013년 신인선발부터 드래프트에 우선해서 각 구단에서 자유계약 신인 선발을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2013년 각 구단별 1명의 신인 자유계약이 허용되고, 이 인원수를 점차 늘려나가다 2016년부터는 완전 자유계약제로 전환한다는 계획. 2017년부터 지금까지, K리그의 군경팀인 김천 상무를 제외한 24팀은 모두 신인선수를 자유계약제도로 충원하고 있다.

2. 1기: 1988~2001

슈퍼리그의 출범과 함께 시행된 신인 자유계약제도는 큰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년만에 축구판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당시 고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축구천재 김종부의 스카웃을 놓고 현대대우 간에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현대는 신인 최대어 김종부를 잡기 위해 고대 측에 물량공세를 퍼부었고, 그 결과 김종부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현대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2] 그러나 김종부는 현대 행을 거부하고 자신은 대우로 갈 것이라고 선언하며 현대와의 계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에 현대는 분노하며 김종부를 못 데려올 바엔 팀을 해체하겠다고까지 했고, 고려대 역시 김종부를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으며 선수를 압박했다.[3] 김종부 파동은 결국 대한축구협회에서 나서서 김종부를 제3의 구단인 포항제철에 입단시키는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이 파동으로 인해 신인 자유계약제의 폐단[4]이 드러났고 결국 1988년 신인선발부터는 전격적으로 드래프트제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도입된 드래프트제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몇 차례의 드래프트 거부 파동을 거쳐 구단, 선수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라는 비판에 직면하였고[5] 2001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자유계약제로 회귀하게 된다.

2.1. 주요 내용

2.2. 연도별 드래프트

드래프트 1기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년부터 드래프트제 폐지, 자유계약제도로 전환

2.3. 뒷이야기

3. 2기: 2006~2015

1기 드래프트가 도입되는 계기는 김종부가 제공했듯, 2기 드래프트 도입에도 또다른 대형 유망주 박주영이 중심에 있었다. 박주영의 모교 청구고는 포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학교로[14] 박주영도 포항의 돈으로 브라질 축구 유학을 다녀왔다. 그 조건으로 박주영과 포항은 추후 박주영이 프로에 입단할 시, 포항과 가장 먼저 협상테이블에 앉을 것을 약속했는데 고려대학교로 진학한 박주영은 계약을 어기고 FC 서울과 홀라당 계약해버린 것이다. 이미 김동현일본에 뺏긴 적이 있는 포항은 당연히 크게 분개했고, 기껏 어린 선수들 키워놓으면 뭐하냐 다 뺏기는데. 그냥 드래프트해서 꽁으로 주워오면 되지라며 드래프트제 부활을 주장한다.
사실 박주영 파동 이전부터 드래프트제 부활 주장은 있어 왔다. 주로 탄탄한 자금력으로 좋은 계약조건을 제시해 우수한 자원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었던 수원 등 부자구단과, 자체 유스육성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던 포항, 전남 등이 드래프트제 부활에 반대했고, 자금력이 부족한 시민구단들은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신인선수들을 확보할 수 있는 드래프트제 부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업구단이 시민구단보다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으니 드래프트제 반대 주장이 우위였으나, 기업구단이자 영향력이 큰 명문구단인 포항이 드래프트 찬성으로 돌아서니 밸런스가 깨진 것. 결국 박주영이 K리그에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2005년 연말에 2006 드래프트가 시행된다.
그리고 2015년 드래프트를 끝으로 다시 완전 자유계약으로 돌아왔다.

3.1. 주요 내용

3.2. 연도별 드래프트

드래프트 2기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3.3. 뒷이야기

4. 둘러보기



[1] 이하 드래프트 시기를 칭하는 모든 연도는 드래프트 지명된 신인들이 데뷔하는 연도를 기준으로 함. 즉 1988년 드래프트로 함은 1988년에 K리그에 데뷔할 신인선수 수급을 위해 1987년에 시행된 드래프트이다. 대입 수능 명칭에 들어가는 연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2] 여담으로 이 때 현대에서 김종부측에 제의한 계약금 1억 5천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물가를 생각해 보면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3] 김종부는 경기에 뛰지 못해 감각이 떨어진 와중에도 월드컵에 출전하여 불가리아 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활약까지 보여줬다. 확실히 파문이 일어날 정도의 재능이긴 하다.[4] 과연 선수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계약이 "자유계약"일까?[5] 이 때 드래프트제 완전폐지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두 구단이 바로 수원과 안양이다.[6] 이동국이 포항에 입단한 것이 이 우선지명을 통해서이다.[7] 대우 연고대학 아주대 소속[8] 예정대로 3년을 채우고 돌아온 건 아니고 1993년 드래프트에 나오기는 했다.[9] 홍명보와 서정원, 신태용의 드래프트 신청을 받는 과정에서 신청 마감시한을 연장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10] 다만, 김병수는 어쩔 수 없었던게 그때 이미 무릎이 작살나있었다. 그래서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진출한 JFL(일본 실업리그)에서도 치료-경기-치료의 악순환이었다. 중학생때 이미 포항 1군 선수들과 같이 훈련할 정도로 포항에서 공을 들였기에 무릎 상태만 아니었으면 포항에서 뛰었을 가능성이 높았다.[11] 여담으로 이 때 포철에서 완산으로 간 8명 중에는 포철 레전드 이흥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산 푸마의 이듬해 리그 참가가 무산되면서 결국 포철 이외의 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뛰는 일은 없이 은퇴했다.[12] 실업축구 국민은행과 계약했다가 2년 후 전남이 창단하면서 우선지명으로 프로행.[13] 김대의[14] 포항시 내 학교는 아니었지만 근처 광역연고 (대구 청구고) 내에서 축구명문이었기에 지원한 것. 대구 창단 전부터 지원을 실시해 왔다.[15] 이후 오산고로 변경[16] 이후 개성고로 변경[17] 이후 비학원축구 클럽팀 별도 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