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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K리그
1. 역사
1.1. ~1983년1.2. 1984~1993년1.3. 1994~2001년1.4. 2002~2010년1.5. 2011~2019년1.6. 2020년 이후
2. 역대 연고지 제도3. 역대 참가 구단
3.1. 참가 구단의 변동3.2. 참가 구단 연혁
4. 역대 로고5. 역대 스폰서
5.1. 스폰서 연혁5.2. 스폰서 엠블럼 연혁
6. 역대 이적료 순위7. 역대 공인구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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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1.1. ~1983년

일제강점기 시절 전조선축구대회(오늘날 코리아컵)를 시작으로 광복 이후 전국축구선수권대회로 재탄생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최상위 축구 리그 시작은 1964년 창설된 실업 리그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이었다.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은 오랫동안 개최되며 국내 최상위 축구 리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1979년 최순영신동아그룹 회장이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리그 창설의 닻을 올리게 되었다. 최순영 회장의 공약 중 하나가 바로 축구의 프로화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실업 리그를 1부 리그와 2부 리그로 나누고 승강제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1975년에도 있었고 1980년에도 있었지만, 둘 다 실업팀들의 반발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최순영 회장은 취임 후 프로 리그 창설에 앞서 프로 구단을 만들기 위해, 1980년 직접 신동아그룹을 움직여 한국기독교선교원 산하에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축구단 할렐루야 독수리를 창단했다.

프로축구 리그 창설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에 힙입은 바도 있었고, 무엇보다 전두환이 축구광이란 점도 중요 배경 중 하나였다. 1981년 5월 청와대 비서관들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프로 스포츠를 만들기로 계획했고, 6월에 실업야구 롯데 감독 박영길과 최순영 전 대한축구협회장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최 회장은 축구의 프로화 계획에 대해 물어보자, "축구는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다. 반면 야구 측 박영길 감독은 1976년 재미사업가 홍윤희가 주도해 만든 야구의 프로화 청사진이 이미 있다고 어필했다. 청와대는 프로화 종목을 정해둔 것이 아니었고, 어느 쪽이든 구체적인 실현 가능한 계획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호출한 것이었다. 여기서 축구계는 경기장 시설 투자 등 프로화 비용으로 무려 139억 원을 국비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야구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요 인물이었던 이호헌/이용일이 정부 지원 없이[1] 프로화가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결국 청와대는 축구가 아닌 야구를 먼저 프로화 하기로 결정한다. 그럼 축구도 이런 방식을 제안했으면 됐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야구는 이미 지역별로 어느 기업을 영입할지 플랜B까지 모두 짜서 제출했다.

그런 야구조차 인천/경기와 호남 연고 기업 영입에 한참 어려움을 겪다가 간신히 삼미와 해태로 구색을 맞췄을 지경인데 축구는 아예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도저히 견적이 안 나왔다. 실제로 프로축구는 출범 이후 무려 10년간 호남 연고 구단 하나를 창단 못해서 빌빌대다가 결국 KBO의 쌍방울 레이더스 저리가라 수준의 빈곤 구단이던 전북 버팔로를 거쳐 현대 호랑이포항제철 아톰즈의 위성 구단으로 취급되던 전북 다이노스전남 드래곤즈로 갈음해야 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프로축구 출범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두환은 1981년 4월 30일에 새마을 성금 기탁 기업인들을 초청해 만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에게 할렐루야 팀이 있으니 나무아미타불 팀을 만들어보시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한 달 뒤 느닷없이 유공의 프로축구단 창단 검토가 등장한다.

1981년 10월, 대한축구협회 최순영 회장은 기존의 할렐루야 팀에다가 1982년 3개 팀을 추가해 총 4개 팀으로, 다시 1983년 4개 팀을 추가해 총 8개 팀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2] 그러나 원하는 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국 축구는 빈곤한 축구 인프라와 국가대표팀의 부진으로 점차 인기를 잃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한국 축구는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많은 축구인들은 프로축구 리그 창설을 한국 축구 부활의 유일한 길이라 보고 있었고, 그만큼 프로축구 리그 창설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1983년 3월 3일, 대한축구협회 산하에 슈퍼리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슈퍼리그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은 이수환이 맡았으며, 할렐루야 독수리, 유공 코끼리, 포항제철 돌핀스, 대우 로얄즈, 국민은행 까치 등 리그 참가 구단의 감독들과 대한축구협회의 이사들이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5일, 위원회를 열어 슈퍼리그의 리그 방식과 일정을 결정했으며, 개막전은 4월 9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장애물이 등장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브라질 프로팀 초청 건이었다. 국가대표팀과 브라질 프로팀 간의 경기를 통해 프로축구 개막 이전에 축구 열기를 지펴놓는다는 계획이었지만, 당시 지방 각 시도의 협회 지부는 "프로야구 때문에 관객유치가 곤란하다. 적자를 내면서까지 대회를 유치할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여러가지 애로사항으로 인해, 슈퍼리그는 당초 결정되었던 4월 9일 개막 대신 5월로 개막을 미루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한 것은 슈퍼리그에 앞서 3월 12일 개최된 제31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였다.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는 3월 12일부터 29일까지 대회 전 경기를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하여 많은 관중들을 축구장으로 향하게 만들었고 축구 열기를 뜨겁게 달궈 놓았다. 그리고 1983년 5월 8일, 할렐루야 독수리 대 유공 코끼리의 개막전으로 모든 축구인과 축구팬들이 염원하던 프로축구 리그가 출범하였다. 슈퍼리그는 할렐루야 독수리, 유공 코끼리 등 2개 프로 구단과 대우 로얄즈, 포항제철 돌핀스, 국민은행 까치 등 3개 실업 구단 총 5개 구단 체제로 출범하였으며, 슈퍼리그의 창설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축구 리그이자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을 대체하는 최상위 축구 리그가 탄생하였다. 슈퍼리그는 부담 없는 입장권 가격과 부녀자 및 어린이 무료 혜택, 공격적인 경품 행사 정책 등으로 전후기 리그 총 72경기 동안 60여만 명의 관중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슈퍼리그의 성공적인 출발로 인해, 이듬해 슈퍼리그에 주택은행한일은행, 현대가 참가를 요청해 올 정도로 프로축구의 인기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1983년의 K리그 출범은 1986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에서 10회 연속으로 본선진출을 기록하게 될 정도로 한국 축구의 강한 뿌리가 되었고 아시아 최강급의 전력으로 발돋움하게 될 수 있는 본격적인 초석이 되었다.

1.2. 1984~1993년

1984 시즌에는 전년도의 성공적인 흥행과 함께 운영에 자신감을 얻은 기업들이 대거 참가하여, 참가팀이 8팀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선교원, 대한석유공사, 대우, 포항제철, 럭키금성, 현대 등 6개 프로 구단과 국민은행, 한일은행 등 2개 실업 구단의 참가가 결정되었다. 상금도 대폭 늘어, 1억 4천만 원이 늘어난 3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우승팀은 1억원, 2위팀은 7,500만 원, 3위팀은 5,000만 원 정도였다.[3] 특히 선수단에 있어서도 조영증, 허정무와 같은 해외 선수들의 국내 복귀와 외국인 선수 영입 등이 이어지면서 그 질과 양이 대폭 개선되었다. 또한 관중을 불러오기 위한 경품 제공량도 원년의 1억 3천만 원에서 3억 5천만 원 가량으로 크게 늘어났다. 한편 리그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외래어 사용이 심하다는 정부 지적에 따라 '슈퍼리그'라는 명칭 대신 '축구대제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체육부가 지시하였다. 이로 인해 공식 명칭은 '축구대제전'으로 변경되었지만, 매체나 대중들 사이에선 '슈퍼리그'나 '축구대제전'이라는 두 개의 명칭이 병용되었다.

1985 시즌에는 리그 확대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시즌 중이던 할렐루야 독수리에서 7월 18일 이수정 단장이 선수단을 불러놓고 해체 의사를 밝힘으로써 3차 리그 참가를 포기했다. 또 아마추어로 전환할 선수만 받아서 새롭게 팀을 구성하겠다고 밝히면서, 프로축구계에 충격을 안겼다. 특히 구단주인 최순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선교에 방해만 된다"고 말하며 할렐루야 독수리에 대한 해체 입장을 밝혔다. 할렐루야의 해체가 리그에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프로축구에 있어 할렐루야의 해체는 다른 축구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최순영 대한축구협회장에게 협회장 직 사임을 요구할 정도로 축구계는 격앙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최순영 협회장은 오락가락하며 의사를 번복하다 결국 해체 의사를 다시 밝혔고, 결국 할렐루야는 해체되고 말았다.

1986 시즌은 리그의 운영과 신인 충원에 있어 굵직한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우선 실업 구단과 프로 구단이 참가하던 ‘축구대제전’과 별도로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를 신설하여 리그를 2개 운영했다. 축구대제전은 지난해 우승팀인 럭키금성 황소를 비롯해 대우 로얄즈, 포항제철 아톰즈, 현대 호랑이, 유공 코끼리 등 5개 프로 구단과 한일은행 축구단 1개 실업 구단이 참가했다. 그리고 춘계 리그와 추계 리그로 나누어 각각 30경기씩 60경기를 치렀고, 각 리그 우승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가져 최종 우승팀을 가렸다. 5개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프로축구선수권대회'는 연고지를 순회하며 경기를 가졌다.[4] 한편, 김종부[5]를 둘러싼 각 구단의 스카우트 파동도 일어났다. 선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우와 이적 결정권자인 모교 고려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현대의 싸움으로 인해 김종부는 무적선수로 월드컵에 출전한다. 결국은 김종부는 제3의 구단 포항제철로 가게 된다.[6]

1987 시즌에는 광역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되어, 이전까지 명목상으로만 할당 받고 실제로는 순회 경기를 치렀던 구단들이 광역 연고로 연고지를 확정하게 됐다. 구단들이 연고지를 확정하며 홈을 가지게 되자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하며 경기장 입장 수입을 홈 구단이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축구협회에서 프로축구위원회가 발족하여 독립적으로 대회 운영에 관한 사무를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실업 구단과 프로 구단 둘 다 참가 가능했던 '축구대제전'을 프로 구단만 참가 가능하도록 규정을 바꾸면서, 리그 명칭을 '축구대제전'에서 '한국프로축구대회'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한일은행 축구단이 리그에서 제외되어 5개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진정한 프로 리그가 시작되었다. 리그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전후기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 방식에서 리그의 숙원이었던 단일 리그 방식으로 변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수에 대한 연봉을 기본급과 수당으로 나누고, 출전 수당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1986년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리그를 만들기 위해 신설했던 '프로축구선수권대회'는 기존 리그가 프로 구단만 참가하는 리그로 변하게 되자, 1987년 자연스럽게 폐지되어 1986 시즌 한 시즌만 열리고 사라졌다.

1988 시즌에는 전 시즌까지 행해졌던 주말 2연전을 선수 보호 차원에서 폐지하고 1경기만 치르도록 변경하여 경기 수가 작년보다 줄어들었다. 한편, 1988 서울 올림픽도 있고 하여 프로축구도 그 바람을 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잔디 보호를 명목으로 서울 등 올림픽이 치러질 경기장에서 리그 경기를 치르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리그 경기를 제주, 청주 등 중소도시들만 순회한 까닭에 관중 동원력은 좋지 못했고, 평균관중 3~5,000여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7]

1989 시즌에는 일화 천마의 리그 참가로 6구단 체제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한 시즌 동안 소화해야 할 경기 수가 늘어났다. 4강 신화의 주역인 박종환을 감독으로 선임한 일화는 연고지를 서울로 하였으며, 홈 경기는 동대문운동장을 주 경기장으로 하되 잠실에서도 경기를 하였다.

1990 시즌에는 도시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되어, 각 구단들이 광역 연고에서 도시 연고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2군 리그가 창설되어, 출전 선수 명단에 들지 못하는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 리그 내에서는 대우 로얄즈동독의 프랑크 엥겔 감독을 선임하며 최초의 외국인 감독을 탄생시켰고, 일화 천마사리체프를 영입하며 최초의 외국인 골키퍼를 탄생시켰다.[8]

1991 시즌에는 럭키금성 황소가 모기업의 사명 변경에 따라, 사원투표를 통해 LG 치타스로 구단명을 변경하였다. 또한 유공 코끼리는 작년에 이미 광역에서 도시로 연고지를 이전한 다른 구단들에 이어 인천/경기에서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리그 일정 또한 기존 6라운드에서 8라운드로 늘어나 팀당 40경기를 소화하게 됐다.

1992 시즌에는 '아디다스컵'이라는 이름으로 리그컵이 최초로 신설되었다. 아디다스컵은 6월 3일 개막하여 격주로 수요일마다 경기를 가졌다. 6개 구단이 2라운드 풀 리그를 치른 뒤 1위와 2위가 홈 앤 어웨이로 결승전을 가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초대 우승은 일화 천마가 가져갔다. 리그컵의 신설로 인해 리그는 다시 6라운드 30경기 체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3 시즌에는 무승부 제도를 없애고, K리그 역사 최초로 승부차기 제도를 도입했다. 승부차기 제도는 경기가 동점으로 끝났을 경우 승부차기로 승패를 가리는 제도였는데,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팀은 승점 2점, 패배한 팀은 무승부 승점과 같은 승점 1점을 얻었다. 다만 이 승부차기 제도에서 0점 승부차기[9]가 2번이나 나왔고, 경기의 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이어짐에 따라 승부차기 제도는 한 시즌만에 사라졌다. K리그 역사에 자주 등장했다 사라지는 승부차기 제도의 첫 등장이었다.

1.3. 1994~2001년

1994 시즌에는 5년만에 제7 구단인 전북 버팔로가 최초의 호남 연고 구단으로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그리고 광역 지역 연고지 제도가 부활하여 전북 버팔로가 전라북도를 연고로 리그에 참가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리그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리그 명칭을 '한국프로축구대회'에서 '코리안리그'로 변경했다. 또한 K리그에 프로 스포츠 최초로 타이틀 스폰서십 제도가 도입돼, 대회 명칭에 리그 명칭과 스폰서 브랜드가 함께 들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K리그 최초의 타이틀 스폰서는 주류 회사인 하이트로서, 대회 명칭은 '하이트배 코리안리그'가 되었다. 전북 버팔로는 기존 6개 구단과 달리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과 유니폼 공급업체 푸마의 지원에만 재정적 기반을 두고 있어, 첫 참가 시도가 있었던 1992년에도 한 번 참가가 보류되었던 팀이었다.[10] 우여곡절 끝에 리그에 참가한 전북 버팔로는 리그 내내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해체되고 만다. 심지어 전북 버팔로는 구단의 재정난으로 인해 시즌 도중 연맹이 남은 기간 동안 구단을 직접 운영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승점제가 3-1-0 승점제로 다시 돌아갔으며, 1994 미국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유럽 오퍼를 받던 고정운을 지켜낸 일화 천마가 무패 행진을 달리며 최초로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1995 시즌에는 8구단 체제로 리그가 더 확장되었다.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인 현양에서 전북 버팔로의 선수단을 인수하여 전라북도를 연고로 하는 전북 다이노스를 창단하였고, 포항제철에서 두 번째 구단인 전라남도 연고의 전남 드래곤즈를 창단하여 리그에 참가했다. 포항제철 아톰즈는 포항 아톰즈라는 연고 중심의 명칭으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그리고 리그 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9년만에 다시 전후기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 방식으로 리그가 운영되었다. 전기 리그 우승팀 일화 천마와 후기 리그 우승팀 포항 아톰즈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나 두 번의 무승부를 거뒀으며, 중립 구장 플레이오프까지 치르는 초접전을 펼쳤다. 경기는 일화 천마의 이상윤이 골든 골을 넣으면서, 일화 천마가 최초로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전남 드래곤즈노상래는 프로 데뷔 1년만에 15골로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96 시즌에는 9구단 체제로 리그에 참가하는 구단이 하나 더 늘어났다. 삼성전자를 모기업으로 하는 수원 연고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그리고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리그에 유럽식 선진형 연고지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구단 명칭에는 반드시 연고지명이 들어가야 하고, 연고지명은 구단 명칭의 맨 앞에 와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11]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구단이 기업의 홍보를 위한 기업 예속물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지역과 시민에 밀착해야 한다고 밝히며 규정 신설의 이유를 밝혔다. 또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FIFA의 2002 월드컵 개최지 평가 사항 중 하나였던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만들기 위해, 서울 축구전용경기장 건설 계획을 1995년 말까지 가져오는 구단에 한해서만 서울 연고로 남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구단은 지방으로 연고지를 이전해야 한다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했다. 결국 서울 축구전용경기장 건설 계획을 가져오지 못한 기존 서울 연고의 세 구단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각각 천안, 안양,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해야 했고, 서울 연고지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 지역 연고를 명시하는 연맹의 구단 명칭 규정 신설과 서울 연고지가 공동화되어 각 구단이 개별적인 홈 경기장을 갖게 되는[12] 1996년부터 완전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전임 심판제가 실시되어 심판의 전문성이 제고되었으며, 외국인 골키퍼 제한 정책이 시행되어 더이상 외국인 선수를 골키퍼로 기용할 수 없게 되었다. 리그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리그 명칭을 '코리안리그'에서 다시 '한국프로축구대회'로 변경하였다.

1997 시즌에는 제10 구단인 대전 시티즌이 리그 최초로 컨소시엄 형태로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이와 함께, 리그가 10구단 체제가 되면서 국내 프로 스포츠 최초로 참가 구단이 두자릿 수에 이르는 최대 리그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리그컵에 이어 두 번째 리그컵이 추가 개최되면서, 한 개의 리그에 두 개의 리그컵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리그 경기 수는 18경기로 줄어들게 되었다. 부산 대우 로얄즈가 리그와 두 개의 리그컵에서 모두 우승하며, 리그 최초로 3관왕을 거두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다.

1998 시즌에는 월드컵을 맞아 리그 일정이 월드컵 이후로 미뤄졌고, 대신 두 개의 리그컵이 월드컵 이전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무승부가 다시 한 번 폐지되고, 끝장 승부를 보게끔 연장전과 승부차기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리그에 4강 플레이오프가 도입되어, 리그의 이목을 늘리려는 시도를 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돌아오면서 리그의 흥행이 염려되었지만, 오히려 포항의 이동국, 부산의 안정환, 수원의 고종수로 대표되는 K리그 트로이카의 등장으로 리그가 폭발적인 흥행을 거두었다. 폭발적인 흥행을 이루었던 이 시기를 K리그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리그 명칭이 '한국프로축구대회'에서 'K-리그'로 변경되어,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리그 명칭에 가깝게 변화한 해였다.

1999 시즌에는 리그가 흥행의 정점을 찍게 된다. 총 275만 관중을 기록하며 최다 관중 수를 경신했다. 그리고 리그의 정규 라운드가 기존 18라운드에서 27라운드로 늘어났다. 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부산 대우 로얄즈가 3위 팀과 2위 팀을 차례로 격파하고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이에 화려한 선수단을 자랑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리그 1위 팀으로서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섰다. 챔피언 결정전은 양 팀의 혈전 끝에 수원이 승리를 거뒀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리그, 두 개의 리그컵, 슈퍼컵에서 우승하면서 리그 최초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2000 시즌에는 리그가 정점을 찍고 내려와 다소 침체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메인 스폰서로 참여하는 등 호재도 있었다. 천안 일화 천마가 연고지 천안시의 열악한 인프라를 문제 삼아 성남시로 연고를 이전하였고, 수도권에만 4개 구단이 위치하게 되면서 구단 간 라이벌리가 형성되기 쉬운 환경이 마련되었다. 특히 안양 LG 치타스수원 삼성 블루윙즈서정원 이적 파동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하면서 거대 구단 간 라이벌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IMF 경제위기의 여파로 대우그룹이 도산하면서 부산 대우 로얄즈현대산업개발에 매각되었다.

2001 시즌에는 다시 리그에 흥행이 불면서 230만 관중을 기록, 두 번째로 200만 관중 달성에 성공한다. 세 시즌 동안 유지되었던 연장전과 승부차기 제도가 폐지되고, 다시 전통적인 3-1-0 승점 체제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제도를 폐지하면서 단일 리그만으로 우승팀을 가렸다. 또한 두 개 대회로 운영되던 리그컵에서 한 개 대회를 폐지하면서, 단일 리그컵 체제로 복귀하였다. 2002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K리그에도 축구전용구장 시대가 열렸고, 기존의 포항 스틸야드와 더불어 수원 월드컵경기장, 울산 문수경기장이 등장했다. 부천 또한 기존의 낡은 목동 구장에서 리모델링된 부천 종합운동장으로 홈 구장을 바꾸면서, 구단들의 관중 수용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1.4. 2002~2010년

2002 시즌은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이 치러지면서, 리그컵을 월드컵 이전인 3월에 치르고 리그를 7월로 미뤄 치르게 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이뤄내면서, 2002 시즌은 257만 관중을 기록하는 초대박을 치게 된다. 또한 대학생 신분으로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이천수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여 프로 데뷔 시즌을 보냈고, 베스트 11, 도움왕, 신인상을 석권하며 리그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활약한 월드컵 스타들 대부분이 체력적인 문제에 부딪히며 각 소속팀 전력에 100퍼센트 도움이 되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명의 월드컵 스타도 배출해내지 못한 성남 일화 천마가 리그와 리그컵에서 모두 우승하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프로축구연맹도 선수 차출에 따른 페널티가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시즌 한정으로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를 7명으로 늘려주는 조치를 취했다.

2003 시즌에는 월드컵 경기장 사후 활용 방안의 일환으로 대구 FC광주 상무 불사조가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하면서, 리그가 12구단 체제로 확장되었다. 특히 17년만에 국군체육부대 산하 구단의 프로 리그 등장으로 프로 선수들의 병역 문제 해결에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당시 2002 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과 아시안게임 우승 실패로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동국이 광주 상무 불사조에 입단하여 뛰게 되었다. 리그 방식은 단일 리그라는 틀을 유지했지만, 4라운드 로빈의 정규 라운드 44라운드로 경기 수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두터운 선수층 확보가 리그 우승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리그의 외국인 선수 면면은 2002 월드컵의 후광과 당시 좋지 않았던 브라질의 경제 상황이 맞물려 훌륭한 커리어를 지닌 외국인 선수들이 역대급으로 많았다. 브라질 국가대표 경력이 있던 도도, 나드손, 따바레즈가 각각 울산, 수원, 포항으로 이적해왔고, 브라질 1부 리그 스타 공격수였던 마그노 또한 전북의 유니폼을 입고 K리그에 데뷔했다. 리그에서는 성남 일화 천마가 K리그 역대 최다 승점인 91점으로, 승점 73점의 2위 울산을 크게 앞지르며 우승을 거뒀다. 성남으로 이적한 김도훈이 28골로 득점왕에 올랐는데, 김도훈이 28골, 마그노가 27골, 도도가 27골을 넣으면서 득점왕 경쟁 또한 역대급이었다. 부천 SK는 22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최하위를 기록했고, 대전 시티즌김은중, 이관우, 최은성의 활약으로 크게 선전하면서, 단일 경기 역대 최다 관중 수 4만 3천 명이 입장하여 "축구특별시"라는 슬로건을 걸게 되었다.

2004 시즌에는 인천을 연고로 하는 제13 구단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리그 방식이 다시 한 번 바뀌어 전후기 리그와 4강 플레이오프를 치르도록 변경되었다. 변경된 리그 방식에서 전후기 리그 각 우승팀과 전후기 리그 통합 성적 1, 2위 팀이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고[13], 플레이오프는 전후기 리그 우승팀과 전후기 리그 통합 성적 1, 2위 팀이 전후기 리그 우승팀의 구장에서 단판 승부를 벌였으며,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가 1, 2차전 홈 앤 어웨이로 최종 우승팀을 가렸다. 그리고 2002 월드컵 이후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이 폐지되자, 과거 서울연고공동화정책으로 연고지를 안양으로 이전했던 안양 LG 치타스가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약 75억 원의 서울월드컵경기장 건설 분담금을 지급하고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이와 함께 안양 LG 치타스는 구단 명칭을 FC 서울로 변경하였다.

2005 시즌 K리그는 오랜만에 큰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대형 신인 박주영의 등장 덕분이었다. 박주영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며 FC 서울에서 데뷔한 그는 12골로 리그 득점 2위에 오르며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가 리그 참가 1년만에 전후기 리그 통합 성적 1위를 달성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인천은 플레이오프에서 전기 리그 우승팀 부산을 꺾으며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비록 챔피언 결정전에서 울산에게 합계 점수 3 - 6으로 패배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축구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라리가에서 복귀하며 울산에서 후반기부터 리그에 참가한 이천수가 챔피언 결정전을 지배했고, 그로 인해 울산 현대 호랑이가 리그 최종 우승을 거뒀다.

2006 시즌 경상남도를 연고로 하는 제14 구단 경남 FC가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그리고 부천 SK가 부천에서 제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구단 명칭을 제주 유나이티드로 변경하였다. 또한 대전 시티즌의 대주주였던 계룡건설이 재정난으로 구단 운영 포기를 선언하면서 대전이 기업 구단에서 시민 구단으로 전환되었다. 리그에서는 전기 리그에서 성남이 압도적으로 우승하며 강력한 최종 우승 후보로 떠올랐고, 후기 리그에서는 전기 리그에서의 부진했던 모습과 다르게 수원이 우승을 거두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성남과 수원은 통합 성적 2,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포항과 서울을 각각 누르며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성남이 1, 2차전 2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성남의 김학범 감독은 차경복 감독 이후 다시 성남에 우승을 안기면서 명장으로 떠올랐다.

2007 시즌 연맹이 다시 한 번 리그 방식을 변경했다. 3년간 많은 비판을 받아온 전후기 리그와 4강 플레이오프 방식에서[14] 단일 리그와 6강 플레이오프 방식으로 변경해 리그를 운영했다. 이 시즌에 관중 수가 5만 명을 넘기는 경기가 처음 나왔는데, 서울과 성남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맞붙은 경기에서 55,397명이 입장하면서 서울 연고지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경남 FC가 외국인 선수 까보레뽀뽀의 활약을 바탕으로 리그 참가 1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대전 시티즌 또한 시민 구단 전환 1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큰 이변은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포항 스틸러스였다. 포항은 플레이오프에서 4위 경남, 3위 울산, 2위 수원을 차례로 격파하며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1위 성남을 상대로 1, 2차전 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하는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당시 포항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는 스틸러스 웨이라는 혁명적인 전술로 각광받았고, 15년만에 포항에 우승컵을 안겼다.

2008 시즌 지난 시즌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우승까지 거머쥔 포항의 사례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상위 팀에게 주어지는 어드벤티지가 너무 적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플레이오프 일정을 보다 압박적으로 조정하여, 리그 하위 팀에게 체력적인 불이익이 주어지도록 하였다. 시즌 내내 수원과 서울의 선두 다툼이 매우 치열했고, 양 팀은 결국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났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수원은 서울을 상대로 1승 1무를 거뒀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수원과 서울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의 TV 시청률은 K리그 최고 시청률로서 아직까지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2009 시즌 리그는 첫 타이틀 스폰서를 유치했던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스폰서 유치에 실패하면서 대회 명칭이 K-리그로만 명명되었다. 그러나 6강 플레이오프를 브랜드화 하는 전략으로 플레이오프를 K-리그 챔피언십이라 명명했고, 현대자동차와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맺으며 쏘나타 K-리그 챔피언십이란 이름으로 플레이오프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제15 구단 강원 FC가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했다. 강원 FC는 당시 2부 리그 격이었던 내셔널리그의 최상급 선수들을 주전 자원으로 영입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원 FC에 입단해 늦깎이로 리그에 데뷔한 김영후는 리그 13골을 기록하면서 최고령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 6심제가 도입되고, Man Of the Match(MOM)를 선정하는 등 리그에 소소한 변화가 생겼으며, 세뇰 귀네슈, 세르지오 파리아스, 일리야 페트코비치 등 어느때보다 리그에 외국인 감독이 많았던 시즌이기도 했다. 리그 1위를 차지한 전북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성남을 1승 1무로 꺾으며 구단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미들즈브러성남 일화 천마에서 연거푸 실패하며 아무도 부활할 거라 믿지 않았던 이동국이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북 현대 모터스에 최초 우승까지 안긴 시즌이었다.

2010 시즌에는 12년 동안 사용된 'K-리그'라는 리그 명칭에서 하이픈(-)을 빼고 'K리그'라는 이름으로 리그 명칭을 다듬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와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맺으면서, 쏘나타 K리그라는 대회 명칭을 사용했다. 실경기 시간을 늘려보자는 취지의 5분 더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선수 교체 가능인원이 6명에서 7명으로 늘어나는 변화가 있었다. 박경훈 감독의 지도와 유망주 구자철의 맹활약으로 제주 유나이티드가 리그 2위를 차지하며 연고 이전 후 처음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디펜딩 챔피언 전북을 꺾으며 1위 서울과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양 팀 다 연고 이전을 한 팀 간의 경기였고, 좋은 쪽 나쁜 쪽으로 모두 화제가 되었다.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 56,000명의 관중이 운집하며 서울이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결국 서울이 1승 1무로 승리하며 10년만에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2년차 신인급 선수 유병수가 리그 22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경남 FC의 윤빛가람조광래 감독과 환상의 호흡으로 활약하면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 두 선수는 나란히 2011 AFC 아시안컵에 국가대표팀으로 뽑히게 된다.

1.5. 2011~2019년

2011 시즌 2010 시즌을 끝으로 광주와 상무 축구단 간의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상무 축구단이 상주와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면서 광주 상무 불사조가 해체됐다. 광주 상무 불사조가 해체되고 상주로 연고지를 이전한 상무 축구단은 상주 상무 피닉스로 새로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 상무 불사조가 해체되고 시민 구단 광주 FC가 새로 창단되어 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국가대표팀의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선전과 2011 아시안컵에서의 긍정적인 인상으로 축구 인기가 상승했고, 이로 인해 K리그 또한 많은 스폰서를 확보하면서 호기롭게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5월 6일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 윤기원이 차량 안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채 발견되었고, 차량에서 미상의 현금이 발견되는 등 수상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작년부터 떠돌기 시작했던 승부조작의 루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의혹이 커지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5월 21일 현역 선수 2명이 구속되는 것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1차로 11명 영구 제명, 2차로 40명 영구 제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K리그는 상승세를 타던 인기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중 상주는 선수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감독까지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감독 스스로 억울함을 표출하고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등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승부 조작의 요인으로는 저연봉 선수들의 금전적 욕망, 상무 축구단에 입대하며 연봉이 줄어든 군경 구단 선수들의 불만 등이 주로 꼽혔고 특히 리그컵이 승부조작의 주 무대가 되면서 안 그래도 인기가 없던 리그컵이 결국 폐지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2012 시즌 K리그는 내년의 리그 출범 30주년을 기념하고, 작년의 승부조작 악재를 돌파하기 위해 전격적인 승강제 도입을 발표했다. 과거 내셔널리그[15]와 승강제를 추진했다 무산된 전력으로 인해, 이번에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자체적으로 2부 리그를 창설해 승강제가 이루어지도록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승강제는 구단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특히 시민 구단은 2부 리그로 강등될 경우 구단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며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구단의 반대와 상관없이 승강제 도입이 통과되었다. 이와 함께 리그 방식도 변경되어, 현재도 운영되고 있는 단일 리그와 스플릿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승강제가 도입되고, 리그 방식이 변화하면서, 이번 시즌은 정규 30라운드 + 스플릿 14라운드 총 44라운드로 진행되었다. 이 장기 레이스에서 FC 서울이 2003년 성남의 리그 최다 승점 기록을 깨고 승점 96점으로 리그 최다 승점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서울의 데얀이 리그 31골로 역대 가장 많은 골로 득점왕이 되면서 또 하나의 기록을 경신했다. 승강제 도입 첫 해, 예상대로 광주, 강원, 대전 등 시민 구단이 하위 스플릿에 떨어져 리그 잔류 싸움을 벌였고, 광주가 최종 15위를 기록하면서 강등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상주는 리그 결과와 상관없이 AFC 클럽 라이선스 미비를 이유로 강제 강등이 조기 확정되면서, 잔여 일정 보이콧을 선언하는 등 아픔이 많았다. 또 광주와 상주의 관중 수에 공짜표 등으로 인한 뻥튀기 관중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실관중 집계를 처음 도입한 시즌이기도 했다. 실관중 집계로 인해 리그 평균 관중 수가 1만 명 이하로 크게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했다.

2013 시즌에는 2부 리그가 새로 창설되면서, 1부 리그는 'K리그 클래식'으로 리그 명칭을 변경하고, 2부 리그는 'K리그 챌린지'라는 리그 명칭으로 출범하였다. 첫 출범한 2부 리그에는 1부에서 강등된 상주 상무, 광주 FC와 신생 구단 FC 안양, 내셔널리그에 참가하다가 프로 전환한 수원 FC, 고양 Hi, 충주 험멜, R리그[16]에 참가하다가 프로 전환한 경찰 축구단, 챌린저스 리그[17]에 참가하다가 프로 전환한 부천 FC 1995 등 총 8팀으로 리그를 치르었다. 군경 구단인 상주 상무와 경찰 축구단이 한 리그에 속하게 되면서 군경 더비가 탄생하기도 했다. 한편 경찰 축구단이 연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시즌을 원정 경기만으로 치르면서, 준비되지 않은 팀을 무리하게 참가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K리그 클래식은 정규 26라운드 + 스플릿 12라운드로 운영되었고, K리그 챌린지는 정규 35라운드로 운영되었다. K리그 클래식 최종 14위 대전과 13위 대구가 다이렉트 강등을 당했고, 12위 강원이 K리그 챌린지 우승팀 상주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K리그 클래식에서는 울산과 포항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울산은 포항과의 최종전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항이 후반 추가시간에 극장골을 넣으면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상주가 강원을 상대로 합계 점수 4 - 2로 승리하면서 최초의 승격팀이 되었다. 투명한 구단 운영과 재정 건전성 제고를 위해 선수들의 연봉을 공개하도록 한 첫 시즌이기도 했다.

2014 시즌에는 K리그 클래식이 12팀이 되면서 정규 33라운도 + 스플릿 5라운드 총 38라운드로 치러졌고, K리그 챌린지가 10팀이 되면서 정규 라운드 36라운드로 치러졌다. 또한 K리그 챌린지에 승강 플레이오프로 진출하는 한 팀을 선별하기 위한 플레이오프가 도입되었다. 플레이오프는 리그 4위 팀부터 시작하는 승자 진출 구조로 2위 팀까지 상위 팀의 홈에서 단판전을 치렀다. 플레이오프에서 무승부가 나올 경우 상위 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도록 규정하여 리그 상위 팀에게 어드벤티지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성남 일화 천마 창단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큰 관심과 투자를 해 왔던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2012년 고인이 되자, 통일교에서 구단 매각 의사를 밝히며 인수 의향 기업을 물색했다. 하지만 인수 의향을 가진 기업이 나타나지 않았고, 성남시에서 구단 인수 결정을 내리면서 성남이 기업 구단에서 시민 구단으로 전환되었다. K리그 챌린지의 경찰 축구단안산시와 연고 협약을 체결해 안산 경찰청 축구단이 되면서 정상적인 승격 조건을 갖춘 팀이 되었다. K리그 챌린지에서는 지난 시즌 강등됐던 대전이 조진호 감독의 지도와 아드리아노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하며 1년만에 승격에 성공했고, 플레이오프에 4위로 진출한 남기일 감독의 광주가 3위 강원, 2위 안산을 연이어 격파하고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K리그 클래식 11위 경남을 꺾어내며 극적인 승격을 이루어냈다.

2015 시즌에는 서울을 연고로 하는 서울 이랜드가 창단되어 K리그 챌린지에 참가했다. 서울을 연고로 한 구단이었기 때문에 창단 자체가 많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과거 국가대표팀의 주 경기장으로 사용된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정하고, 경기장에 가변석을 세워 운영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하며 단숨에 리그 문화를 선도하는 팀으로 꼽히게 됐다. K리그 챌린지에 서울 이랜드가 참가해 참가팀이 늘어나면서, K리그 챌린지가 정규 40라운드로 경기 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K리그 클래식에서는 기업 구단인 부산 아이파크가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진 뒤 수원 FC에 패하면서, 최초로 기업 구단에서 강등 구단이 나왔다. 한편 이변의 주인공 수원 FC는 3부 리그 격인 내셔널리그에서부터 1부 리그인 K리그 클래식까지 올라온 최초의 팀이 되었다. 또 한편 경남 FC 안종복 사장의 심판 매수 행위가 발각되면서, 경남은 차기 시즌 승점 10점 삭감과 7,000만 원 벌금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2016 시즌에는 피아퐁 이후 32년만에 동남아시아 선수 쯔엉이 등장했다. 인천 유나이티드가 마케팅의 일환으로 선수를 영입한 첫 사례로 4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베트남에 K리그 인천 경기 중계권이 팔리는 등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북 현대 모터스가 33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일방적인 우승이 점쳐졌으나, 2013 시즌 저질렀던 심판 매수 행위가 발각되면서 승점 9점이 삭감되어 2위 FC 서울과의 우승 경쟁이 갑자기 치열해졌다. 우승의 향방은 결국 전북과 서울의 리그 최종전에서 결정되게 되었다. 전북은 서울과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시즌 내내 전북을 상대로 승리를 하지 못했던 서울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전북을 꺾었고, 역전 우승을 이루는 드라마를 써내렸다. 화끈한 공격의 막공으로 리그에 파란을 일으킨 조덕제 감독의 수원 FC가 한계를 내보이며 다이렉트 강등되었고, 리그 전반기 선두권 경쟁까지 하던 성남 FC가 부진 끝에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게 되었다. K리그 챌린지에서는 다음 시즌 해체가 예정되어 있던 안산 무궁화가 우승하는 바람에 승격 자격이 리그 2위로 이양되어 대구 FC가 승격을 하게 되었고, 리그 3위부터 5위까지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시즌이 되었다.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강원이 승강 플레이오프에 올라 성남을 꺾으며 승격에 성공했고, 성남은 굴욕적인 강등을 맛보게 됐다. 한편 K리그 챌린지에서 고양 자이크로충주 험멜이 각각 경영난을 이유로 해체하면서 졸지에 K리그 챌린지 참가팀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2017 시즌에는 지난 시즌의 징계로 인해 AFC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이 박탈된 전북이 리그에만 집중하면서 비교적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K리그 챌린지에서는 2016 시즌을 끝으로 안산과 경찰 축구단 간의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경찰 축구단이 아산과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면서 안산 무궁화가 해체됐다. 안산 무궁화가 해체되고 아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경찰 축구단은 아산 무궁화로 새로 창단되어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산 무궁화가 해체되고 시민 구단 안산 그리너스가 새로 창단되어 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게 되었다. 안산 그리너스가 새로 참가하게 되면서 K리그 챌린지는 참가팀이 10팀으로 유지되어 리그 규모가 급격히 줄어드는 참사를 피하게 됐다. 그리고 김종부 감독의 경남 FC말컹을 내세워 압도적으로 K리그 챌린지 우승을 차지하고 승격을 확정지었다.

2018 시즌에는 2부 리그 출범과 함께 변경했던 리그 명칭 'K리그 클래식'과 'K리그 챌린지'를 직관성을 높이기 위해 'K리그1'과 'K리그2'로 변경했다. 다만 2018 시즌에는 혼란을 막기 위해 두 개의 명칭을 병기했다. K리그1에서는 경남 FC말컹이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차지하며 승격 후 첫 시즌만에 무려 준우승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반면 전남 드래곤즈는 K리그1 최하위로 다이렉트 강등을 당하면서, 부산 아이파크에 이어 두 번째로 강등된 기업 구단이 됐다. 한편 불과 2년 전 우승을 차지했던 FC 서울이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떨어졌다가 겨우 생환하면서, 서울 팬들은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리게 됐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극적인 독일전 승리로 최악이었던 리그의 인기가 반등하는 호재를 맞았다. K리그2에서는 아산 무궁화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경찰이 경찰 축구단 폐지를 검토하면서 구단의 존폐가 불확실해지자 승격 자격이 박탈되었다. 이에 따라 2위였던 남기일 감독의 성남 FC가 다이렉트 승격을 하게 되었고, 3위부터 5위까지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3위 부산이 다시 한 번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승격을 노렸지만,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서울과 맞붙으면서 1, 2차전 1무 1패로 승격에 실패해 승강 플레이오프 3회 진출, 3회 탈락의 진기록을 세우게 됐다.

2019 시즌에는 K리그1의 '스플릿 라운드' 명칭이 '파이널 라운드'로 변경되면서, 상위 스플릿과 하위 스플릿을 의미했던 '스플릿 A'와 '스플릿 B'가 '파이널 A'와 '파이널 B'로 명칭 변경되었다. 경찰이 2018년부터 프로축구 선수 의무경찰 선발을 중단하고, 2020년 경찰 축구단 해산을 결정함에 따라, 아산 무궁화는 선수단 수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 선수를 영입하여 경찰과 일반 선수가 혼합된 형태로 리그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기 시즌 아산 무궁화의 해산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리그 순위와 상관없이 승격권은 박탈되었다. 2019년 9월, 아산의 마지막 의무경찰 기수였던 이명주주세종이 전역하면서 더이상 경찰 없는 경찰 팀이 되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역습 위주의 호쾌한 축구로 지난 시즌 FA컵에서 우승한 대구 FC가 축구전용구장으로 리모델링한 DGB대구은행파크로 홈 구장을 옮기면서 일약 리그 최고의 흥행팀으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1~2만 석의 소규모 축구전용구장이 리그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K리그1에서는 울산 현대가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던 포항 스틸러스와의 최종전에서 1 - 4 의 대패를 당하면서, 전북 현대 모터스가 다득점으로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두게 됐다. 반면 제주 유나이티드는 K리그1 최하위로 다이렉트 강등을 당하면서, 세 번째로 강등된 기업 구단이 되었다. 한편 지난 시즌 준우승의 돌풍을 일으켰던 김종부 감독의 경남 FC말컹이 이적해 나가자 부족한 경기력을 보이며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게 되었다. K리그2에서는 승격 4수에 도전하는 부산이 수원 FC를 승격시켰던 조덕제를 감독에 선임하며 또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맞붙게 된 경남과 부산의 외나무다리 승부에서 부산이 1, 2차전 1승 1무로 승리하며 4수만에 승격에 성공했고, 지난 시즌 준우승까지 거뒀던 경남은 불과 한 시즌만에 강등을 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

1.6. 2020년 이후

2020 시즌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대한민국 내 대규모 확산 우려로 인해 당초 2월 29일 예정돼 있던 리그 개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감염증의 확산세가 진정되면서 5월 8일 무관중으로 리그가 개막하게 되었다. 개막일이 늦춰지면서 K리그1은 정규 22라운드 + 파이널 5라운드 총 27라운드로, K리그2는 정규 27라운드 총 27라운드로 경기 수를 줄이게 되었다. 또한 전 세계 대부분의 축구 리그가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 K리그의 개막 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각국의 스포츠 플랫폼에서 K리그 중계권을 구매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편 리그 내에서도 여러가지 변동이 있었다. 대전 시티즌하나금융그룹에 인수되면서 시민 구단에서 기업 구단으로 전환되었고, 구단명을 대전 하나 시티즌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비록 대전이 이전에 기업 구단인 적이 있었다고 하나 시민 구단에서 기업 구단으로 전환된 첫 사례이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그리고 경찰 축구단 아산 무궁화 FC가 해체되고 시민 구단 충남 아산 FC가 새로 창단되어 K리그2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상주시상주 상무 FC 간의 연고 협약이 2020년에 종료되면서 상무 축구단은 다음 시즌 다른 지자체와 연고 협약을 체결하고 리그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고 이전이 별개 구단으로 간주되는 군경 구단에 대한 해석상 상주 상무는 리그 순위와 상관없이 자동 강등이 조기 확정되었다.

순위와 상관없이 강등이 확정되었지만, 상주 상무는 그 어느 시즌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파이널 A에 진출해 리그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결국 상주가 12위로 리그를 종료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이번 시즌에 한하여 강등팀은 기존 1.5팀 강등에서 2팀 강등으로 강등 티켓이 늘어나게 되었다. 파이널 B 최종전에서 이번 시즌 내내 최하위를 맴돌았던 생존왕 인천 유나이티드 FC와 시즌 초반 놀라운 기세를 보였고 강팀 전북 현대 모터스까지 잡아냈지만 시즌 중후반부터 힘든 시간을 보냈던 성남 FC가 극적으로 잔류에 성공했고, 오히려 강등 가능성이 가장 적어보였던 부산 아이파크가 12위를 기록하면서 승격 1년 만에 다시 강등되는 비운을 맞았다. 반면 또 다른 승격팀인 광주 FC광주축구전용구장 개장 원년이자 승격 첫 해에 파이널 A에 들면서 일찌감치 잔류를 확정짓고 구단의 축구전용구장 시대를 자축했다. K리그1에서는 전북이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최초의 4연패와 8회 우승이라는 신기록을 경신했다.

한편 K리그2에서는 남기일 감독이 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지휘봉을 잡고 강등 1년 만에 제주를 우승과 함께 승격에 성공시켰다. 남기일 감독은 광주, 성남에 이어 제주까지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명실상부한 승격 전문가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반면 수원 FC와 부산을 승격시켰던 또 다른 승격 청부사 조덕제 감독은 부산에서 성적 부진으로 결국 사임하고 부산 역시 강등당하면서 두 감독의 명운이 엇갈렸다. 한편 K리그2 플레이오프에서는 설기현 감독의 경남 FC김도균 감독의 수원 FC를 상대로 후반 추가시간까지 경기를 주도하며 승격의 문턱에 다다랐지만, 후반 추가시간 막바지에 VAR 온 필드 리뷰를 통해 선언된 PK로 동점골을 허용하며 주저앉게 됐다.

2021 시즌에는 K리그 브랜드 리뉴얼로 새로운 엠블럼과 중계 디자인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2020년 12월 15일 소집된 한국프로축구연맹 제8차 이사회를 통해 K리그 구단의 B팀을 K4리그에 참가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18] 그리고 K리그에 보스만 룰이 도입되어 선수의 계약 만료 6개월 전부터 현 소속 구단 혹은 타 구단과 계약 협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단 구단이 타 구단의 선수와 협상을 하는 경우 선수의 현 소속 구단에게 계약 협상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보스만 룰의 도입으로 선수는 이적 및 재계약이 용이해졌으며, 선수를 보유한 구단은 계약 만료 6개월이 되기 전에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고 선수를 원하는 구단은 여유를 두고 계약 협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K리그1의 교체 가능 선수의 수가 3명에서 5명으로 늘어났다. 교체 횟수는 3회로 이전과 동일하며, 하프 타임 교체는 교체 횟수로 계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U-22 선수가 출장하지 않으면 교체 가능 선수의 수를 3명으로 간주하며, U-22 룰은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이날 이사회에서는 장기적으로 시행될 새로운 규정과 제도들이 의결되어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규정 및 제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각주와 같다.[19][20] 그리고 2020 시즌을 끝으로 상주와 상무 축구단 간의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상무 축구단이 김천시와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면서 상주 상무가 해체됐다. 상주 상무가 해체되고 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상무 축구단은 김천 상무 FC로 새로 창단되어 K리그2에 참가하게 되었다.

2022 시즌에는 선수의 동의 없이 구단 간 이적이 가능했던 기존의 불공정 조항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구단은 계약 기간 동안 경기·행사·팬 서비스 활동 등 선수 활동에만 한정하여 선수의 퍼블리시티권[21]에 대한 사용 권한을 갖게 됐다. 또한 선수가 자신의 퍼블리시티권을 사용하는 것이 소속 구단, 스폰서, 연맹의 명예를 명백하게 실추시키는 활동이 아닌 한 해당 활동을 제한할 수 없도록 변경되었다.# 또한 이전 시즌 K리그1에만 적용했던 5명 교체 룰을 K리그2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교체 횟수는 3회로 이전과 동일하며, 하프 타임 교체는 교체 횟수로 계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U-22 선수가 출장하지 않으면 교체 가능 선수의 수를 3명으로 간주하며, U-22 룰은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K3리그에 참가하던 김포 FC가 프로로 전환하여 K리그2에 참가하게 되었다. K리그2의 참가 구단이 홀수가 됨에 따라 매 라운드마다 1개 팀은 경기가 아닌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2023 시즌에는 K3리그의 천안 시티 FC충북 청주 FC가 프로로 전환하여 K리그2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K리그2의 참가팀이 13팀으로 증가하면서 2부 리그 창설 이래 2부 리그 참가팀 수가 1부 리그 참가팀 수보다 많은 최초의 시즌이 되었다. 2부 리그 참가팀 수는 여전히 홀수이기 때문에 매 라운드마다 1개 팀은 경기가 아닌 휴식을 취한다. K리그1의 보유 외국인 선수는 국적불문 5+ AFC 소속 1 포함 6인까지 보유 가능하며 동남아 쿼터가 폐지되었다. K리그2의 동남아 쿼터는 유지된다. 또한 4년 만에 아무런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 없이 관중석 입장과 관람이 가능한 시즌이 되었다. 시즌 이후 K리그1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구단 역사 최초로 K리그2로 강등당하는 시즌이 되었다. 또한 최초로 K리그1의 유료 평균 관중이 1만이 넘는 시즌이 되었다.

2024 시즌에는 제시 린가드라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 스타가 FC 서울에 입단하면서 이전부터 조짐이 보이던 K리그 흥행에 큰 기폭제가 생긴 시즌이다. 이미 쿠팡플레이의 적극적인 미디어 투자, 김기동, 이정효 등 스타 감독들의 유려한 축구가 흥행하는 가운데 수많은 신규 유입 팬이 들어오는 흐름에서 린가드의 등장은 K리그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이적으로 기록할 만하다는 평가다. 신규 팬들의 정착도도 높아서 2024년 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크게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K리그의 관중 동원은 스타 효과와 연고지 정착 등으로 전혀 식지 않고 평균 관중 상승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K리그 흥행의 최대 맹점으로 거론되었던 대표팀에 종속된 흥행이란 기존 이미지도 조금씩 탈피해가고 있다. 2018년에는 0.1%도 안나오던 시청률도 2023년에 들어서면서 시청률 0.3%를 찍으면서 우상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2027 시즌부터 프로인 K리그2와 준프로인 K3리그와의 승강제가 시작된다. 밑그림을 잡아가던 한국 축구 승강제가 드디어 완벽하게 연결되는 것이 공식화된 것으로, K리그2 최하위 팀은 K3리그 우승팀이 K리그(프로) 클럽 라이선스를 취득했을 시 자리를 맞바꾸게 된다. 하지만 K3리그 우승팀이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승강은 진행되지 않는다. 또한 세미프로 K4리그와 아마추어 K5리그도 승강제 연결이 확정되면서 프로 클럽들은 더욱 안이한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별개로 인구 50만 이상의 연고지 자치단체 혹은 국내 재계순위 100위 안의 기업이 프로 클럽을 창단하면 7부 리그가 아닌 2부 리그부터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예외 조항도 마련했다. #

2. 역대 연고지 제도

한국 프로축구 리그 출범원년인 1983년부터 1986년까지 K리그 참가 구단들은 명목 상 연고지를 할당 받았지만[22], 전국 도시를 돌아다니며 순회 경기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했기 때문에 사실상 지역 연고지 제도 미시행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 광역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되어 유공 코끼리는 인천/경기, 포항제철 아톰즈는 대구/경북, 현대 호랑이는 강원, 럭키금성 황소는 충남/충북, 대우 로얄즈는 부산/경남 등 K리그에 참가하는 5개 구단이 광역 지역을 연고지로 정하여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리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7년부터 실업팀이 아닌 오직 프로팀만 리그에 참가하고, 리그를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홈 경기의 입장 수입을 구단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역 연고지라는 넓은 연고 범위로 인해 지역 연고 정착이 어렵고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88년부터 포항제철 아톰즈가 포항에서 대부분의 홈 경기를 개최하였고, 1989년부터 대우 로얄즈가 부산에서 대부분의 홈 경기를 개최하였다. 게다가 1989년 일화 천마가 서울을 연고지로 창단을 하면서 사실상 도시 연고지 개념이 리그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결국 1990년부터 도시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 아톰즈는 포항, 현대 호랑이는 울산, 럭키금성 황소는 서울, 대우 로얄즈는 부산, 일화 천마는 서울 등 도시를 연고지로 정하여 리그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1991년 유공 코끼리가 뒤늦게 서울을 연고지로 정하고 합류하며 K리그의 모든 구단이 도시를 연고지로 두게 되었다. 서울을 같은 연고지로 갖던 유공 코끼리, LG 치타스, 일화 천마는 당시 서울동대문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공동 사용했다.

1994년 광역 지역 연고지 제도가 부활하여 1994년 전북 버팔로가 전북, 1995년 전남 드래곤즈가 전남, 전북 다이노스가 전북 등 광역 지역을 연고지로 리그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FIFA의 2002 월드컵 개최지 평가 사항 중 하나였던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만들기 위해, 서울 축구전용경기장 건설 계획을 1995년 말까지 가져오는 구단에 한해서만 서울 연고로 남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구단은 지방으로 연고지를 정해야 한다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1996년 서울 연고 구단들 중 막대한 건설 비용이 드는 서울 축구전용경기장 건설 계획을 제출한 구단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유공 코끼리는 부천, LG 치타스는 안양, 일화 천마는 천안을 연고지로 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 연고지가 공동화(空洞化)되었다. 그리고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리그에 유럽식 선진형 연고지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구단 명칭에는 반드시 연고지명이 들어가야 하고, 연고지명은 구단 명칭의 맨 앞에 와야 한다는 규정을 신설하였다.[23]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구단이 기업의 홍보를 위한 기업 예속물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지역과 시민에 밀착해야 한다고 밝히며 규정 신설의 이유를 밝혔다. 서울 연고지가 공동화되어 각 구단이 개별적인 홈 경기장을 갖게 되고, 지역 연고를 명시하는 연맹의 구단 명칭 규정이 신설되는 1996년부터 완전 지역 연고지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3. 역대 참가 구단

3.1. 참가 구단의 변동

연도 구단 명칭 구단 형태 연고지 비고
1983 할렐루야 독수리 프로/종교 구단[24] 강원/충남/충북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축구단.
1986년 실업 리그 행.
1998년 해체됐다.
유공 코끼리 프로/기업 구단 서울/인천/경기 유공 코끼리(1983~1995년)부천 유공(1996년)부천 SK(1997~2005년)제주 유나이티드(2006년~현재)
대우 로얄즈 실업/기업 구단 부산/경남 대우 로얄즈(1983~1995년)부산 대우 로얄즈(1996~1999년)부산 아이콘스(2000~2004년)[25]부산 아이파크(2005년~현재)
포항제철 돌핀스 실업/기업 구단 대구/경북 포항제철 돌핀스(1983~1984년)포항제철 아톰즈(1985~1994년)포항 아톰즈(1995~1996년)포항 스틸러스(1997년~현재)
국민은행 까치 실업/기업 구단 전남/전북 1985년 실업 리그 행.
1997년 해체됐다.[26]
1984 럭키금성 황소 프로/기업 구단 충남/충북 럭키금성 황소(1984~1990년)LG 치타스(1991~1995년)안양 LG 치타스(1996~2003년)FC 서울(2004년~현재)[27]
현대 호랑이 프로/기업 구단 인천/경기 현대 호랑이(1984~1995년)울산 현대 호랑이(1996~2008년)울산 현대(2009~2024년)울산 HD(2024년~현재)
한일은행 축구단 실업/기업 구단 없음 실업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28]
1987년 실업 리그행.
1997년 해체됐다.
1985 상무 축구단 군경 구단 없음 실업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
1986년 실업 리그 행.
2003년부터 광주나 상주, 김천 등 지자체와 연고 협약을 맺으며 K리그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989 일화 천마 기업 구단[29] 서울 일화 천마(1989~1995년)천안 일화 천마(1996~1999년)성남 일화 천마(2000~2013년)성남 FC(2014년~현재)[30]
1994 전북 버팔로[31] 기업 구단 전북 호남 최초의 프로축구단.[32]
경영 악화로 선수단이 전북 다이노스에 인수되면서 1994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1995 전남 드래곤즈 기업 구단 전남 포항제철의 두 번째 구단.
전북 다이노스[33] 기업 구단 전북 전북 다이노스(1995~1996년)전북 현대 다이노스(1997~1999년)전북 현대 모터스(2000년~현재)
1996 수원 삼성 블루윙즈 기업 구단 수원
1997 대전 시티즌 기업 구단 대전 대전 시티즌(1997~2019년)[34]대전 하나 시티즌(2020년~현재)[35][36]
2003 광주 상무 불사조 군경 구단 광주 광주가 신규 구단을 창단하려다가 어려워지자 상무 축구단과 연고 협약을 맺으며 광주를 연고지로 창단하게 됐다.
2010 시즌을 끝으로 광주와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상무 축구단이 상주와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며 광주 상무 불사조는 해체됐다.
대구 FC 시민 구단 대구 최초의 시민 구단
2004 인천 유나이티드 시민 구단 인천
2006 경남 FC 도민 구단 경남
2009 강원 FC 도민 구단 강원
2011 광주 FC 시민 구단 광주 상무 축구단이 상주와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며 상주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광주 상무 불사조가 해체되면서 시민 구단으로 새로 창단되었다.
상주 상무 피닉스 군경 구단 상주 상주 상무 피닉스(2011~2012년)상주 상무(2013~2020년)
광주 상무 불사조의 상무 축구단이 상주로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새로 창단되었다.[군경]
2020 시즌을 끝으로 상주와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상무 축구단이 김천과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며 상주 상무는 해체됐다.
2013 경찰 축구단 군경 구단 없음 경찰 축구단(2013년)[38]안산 경찰청 축구단(2014~2015년)[39]안산 무궁화(2016년)
R리그에서 K리그 챌린지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2016 시즌을 끝으로 안산과 연고 협약이 종료되고, 경찰 축구단이 아산과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며 안산 무궁화는 해체됐다.
고양 Hi 종교구단 고양 고양 Hi(2013~2015년)[40]고양 자이크로(2016년)[41]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 챌린지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2016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부천 FC 1995 시민 구단 부천 K3리그에서 K리그 챌린지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수원 FC 시민 구단 수원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 챌린지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충주 험멜 기업 구단 충주 내셔널리그에서 K리그 챌린지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2016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FC 안양 시민 구단 안양
2015 서울 이랜드 기업 구단 서울
2017 안산 그리너스 시민 구단 안산 경찰 축구단이 아산과 새 연고 협약을 맺으며 아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하고, 안산 무궁화가 해체되면서 시민 구단으로 새로 창단되었다.
아산 무궁화 군경 구단 아산 안산 무궁화의 경찰 축구단이 아산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새로 창단되었다.[군경]
2019 시즌을 끝으로 경찰 축구단이 해체되면서 아산 무궁화도 함께 해체됐다.
2020 충남 아산 FC 시민 구단 아산 아산 무궁화가 해체되면서 시민 구단으로 새로 창단되었다.
2021 김천 상무 군경 구단 김천 상주 상무의 상무 축구단이 김천으로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새로 창단되었다.[군경]
2022 김포 FC 시민 구단 김포 K3리그에서 K리그2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
2023 천안 시티 FC 시민 구단 천안 K3리그에서 K리그2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44]
충북 청주 FC 협동조합 청주 K3리그에서 K리그2로 프로 전환하며 참가하게 되었다.[45]

3.2. 참가 구단 연혁

연도 구단 수 비고
1 2
1983 5 5 슈퍼리그 창설
할렐루야 독수리 참가
유공 코끼리 참가
대우 로얄즈 참가
포항제철 돌핀스 참가
국민은행 까치 참가
1984 8 8 럭키금성 황소 참가
현대 호랑이 참가
한일은행 축구단 참가
1985 8 8 국민은행 까치 탈퇴
상무 축구단 참가
1986 6 6 할렐루야 독수리 탈퇴
상무 축구단 탈퇴
1987 5 5 한일은행 축구단 탈퇴
1989 6 6 일화 천마 참가
1994 7 7 전북 버팔로 참가
1995 8 8 전북 버팔로 해체
전남 드래곤즈 참가
전북 다이노스 참가
1996 9 9 수원 삼성 블루윙즈 참가
1997 10 10 대전 시티즌 참가
2003 12 12 광주 상무 불사조 참가
대구 FC 참가
2004 13 13 인천 유나이티드 참가
2006 14 14 경남 FC 참가
2009 15 15 강원 FC 참가
2011 16 16 광주 상무 불사조 해체
상주 상무 피닉스 참가
광주 FC 참가
2013 14 8 22 K리그 챌린지 창설
K리그 클래식에서 K리그 챌린지로 2개 구단 강등
K리그 챌린지에 6개 구단 참가
경찰 축구단 참가
고양 Hi 참가
부천 FC 1995 참가
수원 FC 참가
충주 험멜 참가
FC 안양 참가
2014 12 10 22 K리그 클래식에서 K리그 챌린지로 2개 구단 강등
2015 12 11 23 K리그 챌린지에 서울 이랜드 참가
2017 12 10 22 안산 무궁화 해체
고양 자이크로 해체
충주 험멜 해체
K리그 챌린지에 아산 무궁화 참가
K리그 챌린지에 안산 그리너스 참가
2020 12 10 22 아산 무궁화 해체
K리그2에 충남 아산 FC 참가
2021 12 10 22 상주 상무 해체
K리그2에 김천 상무 참가
2022 12 11 23 K리그2에 김포 FC 참가
2023 12 13 25 K리그2에 천안 시티 FC, 충북 청주 FC 참가

4. 역대 로고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 width=350><table bordercolor=#00263e> 파일:K리그1 로고(흰색).svgK리그1
역대 로고
}}} ||
구분 코리안리그 한국프로축구대회 K-리그 K리그
1994~1996 1997~1998 1999~2005 2006~2009 2010~2012
<colbgcolor=#bbbcbc> 기본 로고 파일:코리안리그 (1994~1996) 로고.png 파일:한국프로축구대회 (1997~1998) 로고.png 파일:K-리그 (1999~2005) 로고.png 파일:K리그 로고(2006~2009).svg 파일:K리그 로고(2010~2012).svg
구분 K리그 클래식 K리그1
2013~2017 2018~20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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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스폰서

1994년 K리그가 한국 프로 스포츠 중 최초로 타이틀 스폰서십 제도를 도입했다. 최초의 타이틀 스폰서는 하이트맥주이며, 타이틀은 '하이트배 코리안리그'다. 만약 역사를 컵 대회까지 포함시킨다면, 1992년 아디다스가 리그컵 스폰서로 참여한 '아디다스배 프로축구 컵 대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아디다스는 1992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1년 동안 컵 대회를 타이틀 스폰서로서 후원하였다.

5.1. 스폰서 연혁

연도 스폰서 대회 명칭 후원 금액
1994 하이트맥주 하이트배 코리안리그 4억 원
1995
1996 삼성물산 라피도컵 프로축구대회 미상
1997
1998 현대중공업 현대컵 K-리그 미상
1999 현대증권 바이코리아컵 K-리그 15억 원
2000 삼성전자 삼성디지털 K-리그 18억 원
2001 포스코 포스코 K-리그 20억 원
2002 삼성전자 삼성 파브 K-리그 27억 원
2003 삼성 하우젠 K-리그 35억 8천만 원
2004 32억 원
2005 34억 원
2006
2007 33억 원
2008
2009 없음[46][47] K-리그 없음
2010 현대자동차 쏘나타 K리그 23억 원
2011 현대오일뱅크 현대오일뱅크 K리그 30억 원
2012 35억 원 (추정)
2013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현대오일뱅크 K리그 챌린지
2014
2015
2016
2017 하나은행 KEB 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KEB 하나은행 K리그 챌린지
35억 원
2018 KEB 하나은행 K리그1
KEB 하나은행 K리그2
2019 하나원큐 K리그1
하나원큐 K리그2
2020
2021 미상
2022
2023
2024 하나은행 K리그1
하나은행 K리그2

5.2. 스폰서 엠블럼 연혁

연도 대회 명칭 스폰서 엠블럼
1994~
1995
하이트배 코리안리그 파일:K리그 -하이트배.jpg
1996~
1997
라피도컵 프로축구대회 파일:attachment/K리그/1997.jpg
1998 현대컵 K-리그 파일:attachment/K리그/1998a.jpg
1999 바이코리아컵 K-리그 파일:attachment/K리그/1999.jpg
2000 삼성디지털 K-리그 파일:K리그 2000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1 포스코 K-리그 파일:attachment/K리그/2001.jpg
2002 삼성 파브 K-리그 파일:attachment/K리그/2002.jpg
2003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3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4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4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5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5시즌 스폰서 엠블럼1.jpg
2006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6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7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7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8 삼성 하우젠 K-리그 파일:K리그 2008시즌 스폰서 엠블럼.jpg
2009 K-리그
2010 쏘나타 K리그 파일:/image/018/2010/02/26/1267149783.749436_PS10022600059.jpg
2011~
2012
현대오일뱅크 K리그 파일:external/pds.joinsmsn.com/201202221145775664_1.jpg
2013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파일:external/img.sbs.co.kr/30000239442_700.jpg
현대오일뱅크 K리그 챌린지 파일:2013 K리그 챌린지 엠블럼.jpg
2014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파일:/image/014/2014/03/06/20140306162441554_59_20140306162504.jpg
현대오일뱅크 K리그 챌린지 파일:2014 K리그 챌린지 엠블럼.jpg
2015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파일: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5 로고.svg
현대오일뱅크 K리그 챌린지 파일:2015 K리그 챌린지 엠블럼.jpg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파일:/image/382/2016/03/04/76810995.1_99_20160304054731.jpg
현대오일뱅크 K리그 챌린지 파일:2016 K리그 챌린지 엠블럼.jpg
2017 KEB 하나은행 K리그 클래식 파일:2017 K리그 클래식 엠블럼.png
KEB 하나은행 K리그 챌린지 파일:2017 K리그 챌린지 엠블럼.jpg
2018 KEB 하나은행 K리그1 파일:K리그1 2018 엠블럼.jpg
KEB 하나은행 K리그2 파일:K리그2 2018 엠블럼.jpg
2019 하나원큐 K리그1 파일:K리그1_2019.png
하나원큐 K리그2 파일:2019_K리그2.png
2020 하나원큐 K리그1 파일:하나원큐 K리그1 2020.jpg
하나원큐 K리그2 파일:하나원큐 K리그2 2020.jpg
2021 하나원큐 K리그1 파일:하나원큐 K리그1 2021.jpg
하나원큐 K리그2 파일:하나원큐 K리그2 2021.jpg
2022 하나원큐 K리그1 파일:하나원큐 K리그1 2022.png
하나원큐 K리그2 파일:하나원큐 K리그2 2022.png
2023 하나은행 K리그1 파일:K리그1 40주년 엠블럼.png
하나은행 K리그2 파일:K리그2 40주년 엠블럼.png

6. 역대 이적료 순위

순위 이름 기존 클럽 이적 클럽 이적료 이적 시기 포지션
1 김기희 전북 현대 모터스 상하이 선화 73억 원 2016 DF
2 로페즈 전북 현대 모터스 상하이 하이강 71억 원 2020 FW
3 김신욱 전북 현대 모터스 상하이 선화 70억 원 2019 FW
4 김민재 전북 현대 모터스 베이징 궈안 67억 원 2019 DF
5 조나탄 수원 삼성 블루윙즈 톈진 진먼후 65억 원 2017 FW
6 손준호 전북 현대 모터스 산둥 타이산 60억 원 2021 MF
7 에두 전북 현대 모터스 허베이 FC 52억 원 2015 FW
8 이명주 포항 스틸러스 알 아인 50억 원 2014 MF
9 말컹 경남 FC 허베이 FC 50억 원 2019 FW
10 티아고 성남 FC 알 힐랄 45억 원 2016 FW

7. 역대 공인구

K리그 역대 공인구
스폰서 파일:나이키 로고.svg
( ~2011)
파일:아디다스 로고.svg
(2012~ )
연도 명칭 형태
2000 Nike GEO MERLIN 파일:2000-01NIKE_GEO_MERLIN(K리그).jpg
2001
2002 Nike GEO MERLIN VAPOR 파일:2002-03NIKE_GEO_MERLIN_VAPOR(K리그).jpg
2003
2004 Nike TOTAL 90 AEROW Ⅰ 파일:2004-06NIKE_TOTAL90_ARROW(K리그).jpg
2005
2006
2007 Nike TOTAL 90 AEROW Ⅱ 파일:2007-08NIKE_TOTAL90_ARROW2(K리그).jpg
2008 Nike MERCURIAL VELOCHI 파일:2008NIKE_MERCURIAL_VELOCHI(K리그).jpg
2009 Nike TOTAL 90 OMNI 파일:2009NIKE_TOTAL90_OMNI(K리그).jpg
2010 Nike TOTAL 90 ASCENT 파일:2010-11NIKE_TOTAL90_ASCENT(K리그).jpg
2011
2012 Tango 12 파일:2012 Tango12(K리그).jpg
2013 Cafusa 파일:Cafusa(K리그).jpg
2014 Brazuca 파일:2014ball.jpg
2015 Conext15 파일:2015ball.png
2016 Errejota 파일:ball2016.png
2017 Krasava 파일:Krasava.jpg
2018 Telstar 18 파일:2018ball.png
2019 Conext19 파일:2019ball.jpg
2020 Tsubasa Pro 파일:2020ball.jpg
2021 Conext 21 Pro 파일:CONEXT 21 PRO (White).jpg
2022 전기
2022 후기 Al Rihla 파일:Al Rihla.png
2023 Oceaunz 파일:아디다스 OCEAUNZ 오션즈 축구.png
2024 FUSSBALLLIEBE 파일:FUSSBALLLIEBE.jpg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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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부 돈을 안 들이는 방법은 기업들이 돈을 내게 하는 것이다. 이호헌과 이용일은 기업들의 투자와 관련해, 융자 혜택을 주고 야구장 입장세도 수 년간 면제해 주는 등의 방식을 제안했다.[2] 매일경제 1981년 10월 29일 기사[3] 2020년 K리그1 우승 상금이 5억 원이다. 1984년의 우승 상금이 엄청났던 건지. 2020년의 우승 상금이 짠 건지...[4] 원래 이번 시즌부터 홈 앤드 어웨이의 지역 연고에 기반한 리그를 실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체육부는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명목 하에 반대 의사를 표했으며, 경품으로 관중을 유치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인터뷰까지 했다.[5] 198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서 4강 신화라는 눈부신 활약을 펼친, 전 경남 FC 감독.[6] 대우는 이미 김종부의 작은 형을 구단 경리담당으로 임명하고, 과거 2년간 김종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족까지 접촉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상황이었다. 현대도 만만치 않아서, 김종부의 모교인 고려대에 3억 원의 시설 투자를 약속했고, 고려대 측에서도 김종부에게 현대로 갈 것을 권유했다. 김종부는 대우로 가고 싶은 의사를 여러 번 드러냈으나, 대우로 가기 위해서는 학교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 됐다. 현대는 김종부와의 가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하며 법정 싸움으로 옮겨가겠다는 자세를 취했고, 김종부가 대우와 현대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혼란을 겪자 여론 또한 악화되어 갔다. 결국 체육부가 나서서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고려대가 김종부의 축구협회 등록 선수에서의 제명을 요구하고, 축구협회가 김종부를 월드컵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충격적인 일로 이어졌다. 결국 축구계가 나서서 김종부 구명운동을 벌였고, 김종부는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에 합류하여 득점도 거뒀지만 거기까지였다. 대우와 현대는 한 치도 물러섬 없이 김종부를 두고 계속 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 상처 받는 것은 선수 뿐이었다. 월드컵 이후로도 계속된 싸움은 현대의 팀 해체 위협과 축구계 내분으로 이어졌고 결국 김종부는 대우도 현대도 아닌 포항으로 리그 데뷔를 하게 됐다.[7] 흥행이 실패하자 각 구단과 언론들은 여러가지 흥행 방안을 내놓았는데, 결론은 역시 연고 정착이었다. 선수를 연고지별로 선발한다든가 연고지 내 학교를 프로 구단이 순회하며 교육한다든가 지금과 비슷한 결론이었다.[8] 카카오에서 제작하는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도 이 사건은 “한국 축구에서 골키퍼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언급되었다. 사리체프를 시작으로 외국인 골키퍼들이 대거 영입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리그와 각 구단에서 외국인 골키퍼 영입금지를 규정화 했기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 인해 김병지 vs 이운재로 시작되는 라이벌 골키퍼 구도가 굳혀졌고, 서동명, 김용대, 신화용이라는 수준급 골키퍼들이 발굴 육성되었으며,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조현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권순태, 김승규, 김진현 등 다수의 골키퍼들이 J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외국인 골키퍼 영입 제한을 걸지 않은 일본이 수준급 골키퍼의 부재 문제를 겪고 있다는 점을 볼 때, 선견지명이었다고 평가받는다.[9] 즉, 승부차기에서 한 골도 못 넣은 것이다![10] 심지어 1993년에는 리그 참가가 승인되었음에도 리그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는데, 신인 선수들의 드래프트 지명 거부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당시 완산에 지명을 받고도 입단을 거부했던 선수 중 하나가 황선홍 선수였다. 결국 다른 구단들과 트레이드를 통해 겨우 교통 정리가 되었으나, 이 때문에 선수 등록 시기를 놓쳐 리그 참가를 한 해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기존 연고였던 완산 대신 전라북도를 연고로 선택해 겨우 리그에 참가했기 때문에, 신생 구단에 대한 우려는 그 어느때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11] 하지만 축구단을 의미하는 FC(Football Club)의 경우에는 연고지명보다 앞에 표기되어도 문제가 없다. FC 바르셀로나의 영향으로 보인다.[12]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서울동대문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공동 사용하고 있었다.[13] 만약 통합 성적 1, 2위 팀 중 전후기 리그 우승팀과 겹치는 팀이 있다면, 통합 성적 차순위 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부여했다.[14] 전기 리그 우승팀이 후기 리그에서 동기 부여가 떨어져 질 낮은 경기력을 보인다는 지적이 많았다.[15] 현재는 K3리그로 통합된 실업 리그.[16] 2군 리그.[17] K3리그의 옛 이름.[18] 대한축구협회와의 협의를 통해 2021 시즌부터 K리그 구단들이 프로 B팀을 운영할 경우 K4리그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K리그 구단들은 2021 시즌부터 R리그(2군 리그)에 참가하거나 B팀을 구성하여 K4리그에 참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K4리그에 참가하는 프로 B팀은 11명의 선발 출전 선수 중 23세 이하의 선수가 7명 이상이어야 하며, 프로 경기에 출장한 횟수가 일정 기준을 초과할 경우 B팀 참가가 제한될 수 있다. 기타 세부사항은 한국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의 논의를 통해 정해질 예정이다.[19] 선수 규정 개정 - 재일교포, 북한 국적 선수에 대한 국내 선수 인정 관련 규정 구체화, - P급 미보유 감독대행의 60일 이상 업무 수행 불가 조항을 선수 규정에도 명시, - 플레잉코치 등록 근거 추가, - 여름 이적시장 등록 신인 선수에 대해서도 계약 첫 해 기간은 1년을 채운 것으로 인정, - 우선지명 후 해외에 진출해 5년이 경과한 선수는 우선지명 구단의 동의를 얻는 경우 타 구단 입단 시 신인계약이 아닌 자유계약으로 인정, - 보스만 룰 적용(FA 선수의 계약 만료 6개월 이전 타 구단과의 협상 보장) / 경기 규정 개정 - 경기장 부대시설을 권고사항에서 필수사항으로 변경, - 경기장 내 앰뷸런스는 반드시 특수 구급차 포함 2대 이상, - 플레잉코치의 출장 정지 기준은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 경고 누적 기준에 따름, - 킥오프 시간 지체 시 제재금 100만 원 부과, 재발 시 제재금 2배 부과 / 임대 규정 개정 - 22세 초과 선수의 해외 임대는 팀당 8명 이하로 제한, -22세 초과 선수의 K리그 내 임차 및 임대는 팀당 5명 이하로 제한하며, 같은 구단과의 임차 및 임대는 1명으로 제한, -2024년부터 국내외 불문 22세 초과 선수의 임대는 6명 이하로 제한, -상무 입대는 예외이며 22세 이하 선수의 임대는 무제한 허용, -이적 및 임대 시 원소속 구단과의 경기에 출전 불가 조항 설정 금지 / 프로 B팀 운영 -B팀은 K4리그 참가 가능, -11명의 선발 출전 선수 중 U-23 선수 7명 이상 의무 출전, -프로 경기 출전 횟수가 일정 기준을 초과할 경우 등록을 제한하는 규정 논의 예정, -R리그와 선택 가능 / 비율형 샐러리 캡 제도 도입 - 스페인 라리가 모델 연구, 실무적 논의 후 2023년부터 시행, 비율형 샐러리 캡을 초과하는 비율은 리그의 타 구단들에 재분배하는 사치세 도입, 사실상 FFP에 가까운# 형태. / 로스터 제도 운영 -2023년 32명, 2024년 30명, 2025년 28명, -등록 인원에는 일정 수의 U-22 선수 및 구단 유스 선수도 포함 / 승리 수당 상한 설정 -2022년까지 K리그1은 경기당 100만 원, K리그2는 경기당 50만 원이 수령할 수 있는 최대 금액 -중요 경기 추가 수당 설정 금지를 위반하는 구단에게는 제제금 및 등록기간 1회 신규 선수 등록을 금지하는 제재 부과 / 연맹 산하 마케팅 전문 자회사 설립[20] 비율형 샐러리 캡FFP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FFP는 구단의 총 지출 상한을 '총 수입 + 일정 금액'으로 두는 반면, 비율형 샐러리 캡은 구단의 선수단 연봉 상한을 '총 수입 × 일정 비율'로 두고 있다. 또한 FFP와 달리 비율형 샐러리 캡에서는 구단주의 지원도 수입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FFP는 규정을 위반할 경우 대륙 축구 연맹에서 대륙 클럽 대항전 참가를 일정 기간 금지시키지만, 비율형 샐러리 캡은 규정을 위반할 경우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상한 초과 비율에 대한 사치세를 징수하여 리그 내 타 구단들에 재분배하는 선에서 그친다. 때문에 상한을 초과하여 선수단에 큰 투자를 하고 싶은 구단은 약간의 지출만 더한다면 무리 없이 선수단에 대한 투자를 할 수 있다.[21] 선수의 성명, 초상, 예명, 아호, 음성 등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는 모든 것.[22] 할렐루야 독수리는 강원/충남/충북, 유공 코끼리는 서울/인천/경기, 포항제철 돌핀스는 대구/경북, 대우 로얄즈는 부산/경남, 국민은행 까치는 전북/전남을 연고지로 할당 받았다.[23] 하지만 축구단을 의미하는 FC(Football Club)의 경우에는 연고지명보다 앞에 표기되어도 문제가 없다. FC 바르셀로나의 영향으로 보인다.[24]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회장에 의해 창단되었다. 선교 목적의 구단이었기 때문에 신동아그룹 산하가 아닌 한국기독교선교원 산하에 구단이 창단되었다.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이 만들고 지원했기 때문에 기업 구단으로 분류하기도 한다.[25] 2000년, 대우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구단을 현대산업개발에서 인수했다.[26] 이후, 2000년에 재창단하였고 실업 리그 전통의 강자로 군림하다가 2012년 해체됐다. 2006년 내셔널리그 1위 팀이었던 국민은행을 K리그로 승격시키려 하자 승격을 거부해 파문이 일었다.[27] 2005년, LG그룹에서 GS그룹이 분리되면서 운영 주체가 LG그룹에서 GS그룹으로 바뀌었다.[28] 당시 부족했던 축구대제전(현 K리그) 참가 구단 수를 늘리기 위해 실업 리그 우승 구단을 참가시켰다. 그 바람에 실업 리그는 유야무야 되어버리고 말았다.[29]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에 의해 창단되었다. 일화가 공식적인 운영 주체였기 때문에 기업 구단으로 분류되지만, 일화 자체가 통일교 산하의 기업이기 때문에 종교구단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구단 내에 종교에 대한 강요는 없었다고 한다.[30] 2012년, 구단 창단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큰 관심과 투자를 해 왔던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고인이 되면서 통일교로부터의 지원이 줄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통일교가 구단 매각 의사를 밝히며 인수 의향을 가진 기업을 물색했다. 하지만 인수 의향을 가진 기업이 나타나지 않았고, 구단 인수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던 성남시에서 인수를 결정하면서 2014년 기업 구단에서 시민 구단으로 전환되었다.[31] 1993년 창단 후, 완산 푸마→완산 제우 엑스터→전북 엑스터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최종적으로 이름을 전북 버팔로로 바꾸고 리그에 참가했다.[32] 프로 리그 창설 당시 국민은행이 호남을 연고지로 했으나, 이는 명목상의 연고지였을 뿐 당시 리그가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연고지 개념이 없었다.[33] 전북 다이노스가 전북 버팔로의 선수단을 인수한 것일 뿐 전북 버팔로의 전체 자산을 인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북 다이노스가 전북 버팔로의 역사를 승계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북 버팔로와 전북 다이노스는 서로 다른 구단으로 분류된다. 프로야구의 현대 유니콘스넥센 히어로즈의 관계와 같다.[34] 1997년, 대전/충남 연고기업인 계룡건설,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이 컨소시엄 형태로 대전 시티즌에 출자하여 기업 구단으로 창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 IMF 경제위기로 컨소시엄을 구성했던 기업들 중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이 파산하였고, 계룡건설만 홀로 남아 지원을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구단 운영에 재정적 한계를 절감한 계룡건설이 구단 운영 포기를 선언하였다. 결국 2006년, 대전광역시에서 구단을 인수하면서 기업 구단에서 시민 구단으로 전환되었다.[35] 2020년, 구단이 하나금융그룹에 인수되면서 다시 기업 구단으로 전환되었다.[36] 새로운 대전 하나 시티즌과 기존 대전 시티즌이 별도의 법인이기 때문에 구단 역사가 승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금융그룹은 금융회사이기 때문에 비금융회사인 대전 시티즌 법인의 지분을 취득해 소유 및 지배를 할 수 없다. 이는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의 상호 소유 및 지배를 막는 금산분리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하나금융그룹은 대전 시티즌 인수 과정에서 유권해석을 얻어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대전 시티즌 법인의 자산을 인수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새로운 법인이라 하더라도 대전 시티즌 법인과 계약을 통해 영업권과 영업자산을 양도받았으며, 기존 대전 시티즌 법인은 청산되었기 때문에 대전 하나 시티즌이 대전 시티즌의 역사를 승계한다고 보아야 한다.[군경] 군경 구단이 연고지를 이전할 경우 별개 구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신생 구단으로 분류된다.[38] 연고지 없이 전 경기를 원정 경기로 치르며 리그에 참가했다.[39] 안산과 연고 협약을 맺으며, 안산을 연고지로 정하게 됐다.[40] Hi는 할렐루야 임마누엘의 약자다. 할렐루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할렐루야 독수리와는 별개의 구단이다.[41] 스포츠 용품 제작업체인 자이크로와 명명권 계약을 하면서 바뀐 이름으로, 운영 주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군경] [군경] [44] 이전 구단명은 천안시 축구단.[45] 이전 구단명은 청주 FC.[46] 정규 라운드에서는 스폰서가 없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현대자동차가 스폰서가 됐다.[47] 스폰서가 없어진 이유로, 2008년 국정감사에서 삼성이 너무 오래 스폰서를 한다는 이유로 태클이 들어와서 삼성이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는 풍문이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은 2005년에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2009년에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은 이유로 꼽기에는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2008년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인해, 삼성전자가 스포츠 후원을 대폭 축소하면서 생긴 일이라고 보는 게 더 설득력 있다. 그 방증으로, KBO 리그도 당시 스폰서였던 마구마구의 후원 금액이 전년도보다 적어지는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