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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레이블 | 워드 레코드[1] | |||
소속사 | 카타나 뮤직 | |||
멤버 | 타카사키 아키라 니이하라 미노루 스즈키 마사유키 야마시타 마사요시 | |||
링크 | (일본어) (영어) (일본어)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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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1년에 결성된 일본을 대표하는 헤비메탈 밴드.밴드 이름의 유래는 스테레오 앰프에 써있던 Loudness라는 단어, 이 단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무슨 뜻인지 알아봤는데 볼륨을 나타내는 뜻이라 느낌이 매우 좋아 밴드의 이름으로 택했다고 한다. 사실 라우드니스는 타카사키 아키라의 솔로 프로젝트와 비슷했던 건데, 스튜디오 세션들이 예상을 뛰어넘어서 히구치 무네타카가 결성을 제의했다고 한다.[2]
2. 평가
흔히 일본의 4대 메탈 밴드로 불리는 LOUDNESS, ANTHEM, VOW WOW, E.Z.O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밴드이다.[3]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의 록 음악/헤비메탈 역사를 이야기할 때 라우드니스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다. 결성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살아있는 전설이다. 국내의 메탈 밴드들조차도, 반일감정과는 별개로 존경할 만큼 높은 지지도와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아시아 밴드로서는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3. 바이오그래피
LAZY 출신의 타카사키 아키라와 히구치 무네타카를 중심으로, 니이하라 미노루, 야마시타 마사요시[4]의 라인업으로 처음 결성되었다. 이들은 결성 당시에도 이미 일본 내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뮤지션들이었다.원래는 베이시스트로 히구치 무네타카, 타카사키 아키라와 함께 밴드 LAZY에서 활동한 타나카 히로유키를 끌어들일 예정이었지만 음악성의 차이[5]로 인해 무산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야마시타 마사요시가 합류하였다.
머틀리 크루나 Ratt과 같은 당시 인기 있던 미국의 팝 메탈 밴드에 큰 영향을 받아 LA 메탈 스타일의 그루브감과 화려한 테크닉, 화려한 의상과 분장 등을 도입하였다. 그러한 미국식 팝 메탈에 일본적인 감성을 잘 융합한 스타일이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곡의 완성도가 높고 테크닉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역으로 기존에 활동하던 서구 팝 메탈 밴드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1984년, 4번째 정규 앨범인 DISILLUSION 〜撃剣霊化〜의 영어버전 'Disillusion'을 발매하면서 미국 진출을 결정하였으며 이때부터 주로 영어로 가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미국 진출을 위한 첫 앨범인 THUNDER IN THE EAST를 발매하였다. 오지 오스본, 메가데스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Max Norman과 손을 잡고 제작한 이 앨범은 곧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빌보드 200에서 74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서 라우드니스는 아시아 최초로 빌보드 200에서 100위 안에 들어간 록밴드라는 기록을 갖게된다. 이때 발표된 'Crazy Nights'나 'Like Hell'등의 싱글곡은 메가히트를 기록하며, 일본문화 개방이 이루어 지지 않았던 한국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된다.
이어서 1986년에 발표한 앨범 SHADOWS OF WAR의 미국버전인 LIGHTNING STRIKES는 빌보드 200에서 64위까지 오르며, 라우드니스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6] 그 후 앨범 Hurricane Eyes에서 정점을 찍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평가였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라우드니스의 전성기가 저물어갔다. 또한 보컬이 니이하라 미노루에서 마이크 베세라(Mike Vescera)로 교체되었다.[7] 하지만 타카사키 아키라는 마이크 베세라를 굉장히 못미더워했다, 컨디션의 기복이 심해 라이브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생활면에서도 망나니(...) 같았기 때문이다.[8] 다만, 라우드니스 재적 당시에는 이렇다 할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베세라 이상으로 한 성질 하는데다 이름난 싸움꾼인 아키라가 베세라를 심하게 휘어잡았기 때문에다. 그래서 베세라는 타카사키 아키라를 무서워 했다. 특히 연습 때는 툭하면 베세라에게 욕을 하면서 쥐어팼다고 하니(...?) 베세라는 그렇게 당하고도 라우드니스에 남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라는 계약이 끝나자마자 베세라를 해고해 버렸다. 게다가 사석에서는 베세라를 '보컬의 기본도 안 된 놈'이라고 혹평을 쏟아낸다.[9] 아키라의 평가와는 반대로 당시에도 마이크 베세라 또한 시원시원한 고음을 자랑하는 명보컬리스트였으며, 짧은 시기였지만 베세라 제적시의 라우드니스 또한 아직도 그리워 하는 팬들이 많다. 또한 1989년 이 멤버 그대로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첫 국내 내한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1992년에는 前 E.Z.O의 보컬리스트인 야마다 마사키와 X JAPAN의 베이시스트인 TAIJI가 가입하였다. 타이지의 베이스 테크닉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10] 무네타카 히구치와 타카사키 아키라가 그를 정말 아꼈다고 한다. 물론 후에 타이지는 타카사키 아키라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되지만[11] 그래도 꽤나 아끼던 후배였던지라 타이지가 사망했을 때, 타카사키 아키라가 애도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부터 판테라 스타일의 헤비, 스래쉬 메탈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타이지 탈퇴 후에는 베이시스트와 드러머가 ANTHEM의 "시바타 나오토" 와 혼마 히로츠구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부터 리더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스님처럼 머리를 싹 밀고 도(道)에 심취하면서 기존 자신들이 보여주었던 메탈이 아닌 Korn이나 RATM의 스타일의 랩메탈과 동양사상에 심취한 듯한 전위음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팬들이 더 떨어져 나가기도(...) 야마다 마사키는 이후 네이티브 스피커의 강점을 이용해 직접 영어 가사를 쓰기도 했지만 음악적인 색깔이 많이 변화된 상황이라 평가는 들쑥날쑥 했다.
일본 메탈계의 침체와 더불어 잠시 활동을 중지하기도 하였으나, 2000년에 원년멤버로 재결합하며 복귀를 선언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현재진행형이다.
4. 음반
5. 영향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헤비메탈에 입문하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활[12], 백두산, 시나위 등 전설적인 밴드들도 라우드니스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헤비메탈 붐을 일으켰다. 현재 성우와 헤비메탈 밴드 활동을 겸하고 있는 한국 성우 권창욱도 좋아하는 밴드 중 한 명으로 거론할 정도니 말 다했다. 실제로 부활의 김태원이 디엔드와 부활 초창기 시절 타카사키 아키라에 푹 빠져서, 멤버들과 음악적인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 이태윤이 남자의 자격에서 직접 증언했다.일본의 밴드지만 영어 가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았고 반일감정이 강했던 한국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의 반감이 적었다. 오히려 록이나 헤비메탈을 사랑하는 10대라면 이들의 음반은 필수 아이템이었다. 이는 라우드니스가 일본어 음악이 정식으로 유통될 수 없었던 80년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음반이 정식으로 발매된 일본 아티스트일 수 있었던 이유이다.[13] 다만, 일부 곡은 비판적 성향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제목이나 가사가 바뀌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6. 멤버
1기 (1981년 ~ 1988년)2기 (1989년 ~ 1992년)
- 마이크 베세라 (보컬)
- 타카사키 아키라 (기타)
- 야마시타 마사요시 (베이스 기타)
- 히구치 무네타카 (드럼)
3기 (1992년 ~ 1993년)
4기 (1994년 ~ 2000년)
5기 원년멤버로 재결합 했기 때문에 1기와 동일하다. (2000년 ~ 2008년)
- 니이하라 미노루(보컬)
- 타카사키 아키라 (기타)
- 야마시타 마사요시 (베이스 기타)
- 히구치 무네타카 (드럼)
6기 (현재멤버) (2009년 ~ )
7. 논란
군국주의와 극우성향에 대한 논란이 좀 있지만 헤비메탈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음악적으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이 크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공연 시작 전 기미가요를 틀고 앵콜을 할 때 욱일기를 게양하고 있다.
- 타카사키 아키라의 킬러사 기타 중에서 KG-PRIME RISING SUN이라는 이름의 커스텀 기타를 절찬리에 팔았다. 물론 타카사키 아키라는 이 기타를 메인으로 라이브에서 사용하고 있다.
- 베이시스트 야마시타 마사요시가 사용하는 베이스 시그네처 모델 중에서도 검은색 욱일기 모양의 시그네처가 있다.
- 1985년에 발매한 앨범인 THUNDER IN THE EAST의 앨범아트에 욱일기가 그려져 있다.
- 2014년 6월 4일에 발매되는 신보인 THE SUN WILL RISE AGAIN ~撃魂霊刀의 앨범자켓이 욱일기이다. THUNDER IN THE EAST가 입체적 느낌이 드는 강화판(…)
8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는 일본 내에서도 욱일기 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을 뿐더러 음악내에서 군국주의 관련 정치적인 묘사를 한 부분이 없다. 초기의 욱일기 아트워크의 의도는 당시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던 당시 일본의 밴드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그 의미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17]
다만 그것들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고 문제점이 알려진 지금도 라이브를 할 때 욱일기를 내걸며 기미가요까지 트는 후기의 모습은 빼도 박도 못하는 극우성향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보컬인 니이하라 미노루는 극우주의자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라우드니스 멤버들이 공개적으로 일제를 찬양하거나 전쟁 범죄를 부정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극우파로서 정체성을 드러낸 적은 없다. 앨범 자체에서도 오히려 SHADOW OF WAR나 SDI 같은 곡에서 반전을 외치는 성향이었다. 물론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 볼수 있지만 욱일기를 애용하고 공연장에서 기미가요를 트는 것은 라이브 공연에서의 퍼포먼스의 일종으로 이해해도 무방 할 수준으로 지금까지 정치적으로도 큰 문제도 일으킨 적이 없다. 보컬인 니이하라 미노루가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발언을 한 것 외엔 일본 극우파의 고질병인 혐한 발언을 한 적도 없고 외려 다들 한국에 우호적인 친한파다. 널리 알려졌듯 신해철을 비롯한 한국의 록 셀렙들과 아주 친하고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자 타카사키 아키라는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내한 공연에서 애국가를 록 버전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문화적 성향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혐한 발언을 일삼는 일본 극우파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분명 궤가 다르다. 이런 걸 감안하면 라우드니스 멤버들은 아마 국수주의 성향의 우익인 듯 싶다.
8. 기타
- 아래의 두 영상은 그들의 대표곡인 Crazy Nights[18]이다. 8비트 곡이라 쉽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타 솔로가
상변태라서 기본기와 테크닉을 지니지 않으면 함부로 연주하기 힘든 곡이다.
- 2011년 결성 30주년을 맞아 일본 전역 라이브 투어에 나섰다. 이때 한 회사에게 라이브 기획 및 제작을 맡겼는데, 알고 보니 그 회사의 정체는 기타리스트가 활동하던 다른 밴드의 키보디스트가 사장으로 있는 ‘반다이 남코 라이브 크리에이티브‘라는 회사였다.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안심되겠지 역시.
- 여담으로 우리나라에도 팬클럽이 있다. 이제는 유령 페이지가 된 듯하다.
- 2000년 타카사키 아키라가 오리지널 멤버로의 부활을 선언하며 파란만장했던 제 4기 LOUDNESS는 끝난다. 오리지널 멤버 재집결에 대해서는, 타카사키 아키라 본인의 의사뿐 아니라 4기 LOUDNESS 활동에 피로를 느끼고 의문을 품고 있던 야마다 마사키가 "오리지널 멤버로 다시 해보는건 어떻겠냐" 며 조언한 일도 도움이 되었다고 타카사키 아키라가 말했다.
8.1. 내한
-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했다. 첫번째 공연은 1989년 등촌동 88체육관(현 KBS아레나)에서 열렸는데, 일본어로 된 음악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전곡을 영어로 부르는 조건으로 공연이 허가되었다. 보컬 역시 마이크 베세라였다. 이 공연에서 타카사키 아키라는 애국가를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라이트 핸드(태핑) 주법으로 연주하기도 하였다.[19]
- 2010년 6월 5일 대한민국 라이브 뮤직 타임투락 페스티벌에 출연했고, 이틀 뒤에는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공연을 했다. N.EX.T의 신해철과 김세황이 무대에 함께 섰으며, 9월 4일 비바 코리아 페스티벌에도 출연하면서 한해동안 출연했던 내한을 통해 신해철과 김세황과의 친분관계를 쌓게 된다.
- 2018년 8월 10일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출연하며 여섯번째 내한을 가졌으며, 두번째 단독 내한에 출연했던 게스트 밴드 피아와 같은 스테이지에서 만나게 되었다.
- 2023년 7월 28일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페어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주최측의 사정으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1] 2018년 1월에 신보 발매와 함께 유니버셜 뮤직에서 해당 레이블로 이적하는 것을 발표했다.[2] 히구치 무네타카와 타카사키 아키라가 소속되어 있던 LAZY가 해체된 시점이 1981년 5월 31일이었고, 라우드니스가 메이저 데뷔한 시기는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 동안 솔로 프로젝트로 준비되다가 12월에 메이저 데뷔한 것.[3] 다만 실질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건 ANTHEM이었다. 라우드니스는 주로 일본의 헤비메탈로 외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걸로 평가가 높다. 물론 이건 라우드니스가 일본에서의 인기가 별로였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정작 일본 현지에서는 자국 메탈을 대표하는 밴드로 보통 저 4개가 아니라 X JAPAN을 꼽는다.[4] 1998년에 타카사키 아키라가 LAZY에 복귀할 것을 제안한 장본인이었다.[5] 타카사키 아키라는 헤비메탈을 하고 싶어했지만 타나카 히로유키는 '팝 노선도 괜찮지 않느냐'라는 의견이었다.[6] 프로레슬러이자 록밴드 Fozzy의 보컬인 크리스 제리코는 이 앨범의 광적인 팬으로, Fozzy의 공연 때도 이 앨범의 곡들을 자주 연주한다고 한다.[7] 소속 레코드사인 아틀란틱 레코드의 일방적인 결정. 판매량 부진을 니이하라 미노루의 어설픈 영어 발음 탓으로 돌려서 해고했다. 이후 원 보컬인 니이하라 미노루는 이 때 다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 솔로 앨범도 내고 Ded Chaplin으로 활동하기도 했다.[8] 라이브 후 반성회를 갖기로 했는데, 베세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호텔 방에서 그루피들과 뒹굴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전 아내와 바람을 피운 게 베세라다.[9] 현재는 사이가 많이 회복돼서 라우드파크 2015에서 게스트로 마이크베세라와 공연하기도 했다..[10] 타이지는 이전에 타카사키 아키라에게 태핑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태핑을 X JAPAN의 'ROSE OF PAIN'라는 곡에서 연주하기도 했다.[1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12] 부활의 1집 앨범 LP판 속지를 보면 Loudness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는 문구가 써져 있다.[13] 1987년작 Hurricane Eyes, 1989년작 Soldier of Fortune[14] 시바타 나오토가 영입되기 전, 4기 초창기에는 타카사키 아키라가 베이스 기타를 겸임했다.[15] 前 SABER TIGER의 드러머. 히구치 무네타카의 사망 이후 영입됐으며 기존 라우드니스 앨범에서 들을 수 없었던 더블 베이스 드럼 연타를 도입했다.[16] 2018년 2월 28일, 검진결과 뇌경색이 의심된다는 판정을 받아 잠시 이탈하게 되었다. 그 빈자리는 NOVELA의 니시다 류이치가 서포트 드러머로서 메움을 라우드니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표. 이후 건강해졌는지 2022년 7월에 새 앨범을 내면서 복귀했다.[17] 당장 EBS 스페이스공감에 나왔을 때도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전범기의 인식이 희박했던지라 전혀 문제가 되지않고 있다. 유투브 댓글에서 지적하고는 있지만 모두 최신 댓글들 뿐이다.[18] Crazy Night로 알려져 있고, 그렇게 소개하는 미디어도 있지만 원래 제목은 Crazy Nights다.[19] 당시 오프닝 밴드는, 임재범과 김도균의 밴드 아시아나(ASIANA)였다. 저명한 록 음악 평론가인 성우진 씨는 MBC에서 방영된 '나는 록의 전설이다'라는 기획 프로그램에서, 당시 오프닝 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체격으로나 퍼포먼스 자체로나 아시아나가 전혀 라우드니스에 밀리는 감이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