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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대 순으로 정리한 고구려사 연표.논란이 있는 경우는 가장 합리적인 것이나 통설을 취하되 이설을 주석 처리한다. 월일까지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월일까지 기록한다.
2. 건국 이전
- 기원전 3세기경: 압록강 중류 일대에 적석총 무덤 양식으로 대표되는 인구 집단이 형성되었다.[1]
- 기원전 107년: 전한에 의해 현도군이 설치되었으며, 치소는 고구려현(高句麗縣)이었다.[B]
- 기원전 75년: 원고구려 세력에 해당하는 이맥(夷貊)의 침범으로 인해 현도군이 축출되었다.[C]
- 기원전 58년 4월: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출생하였다.
3. 건국 이후
3.1. 졸본성 시기
- 기원전 37년: 고구려 건국, 추모성왕 즉위. 말갈 복속
- 기원전 36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함.[4]
- 기원전 35년 3월: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 기원전 35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 기원전 34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 기원전 34년 7월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했다.
- 기원전 32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오이와 부분노가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 기원전 28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부위염이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 기원전 24년 8월: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동부여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장사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했다.
- 기원전 19년 4월: 추모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추모왕 붕어해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5] 유리왕이 즉위했다.
- 기원전 18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 기원전 17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유리왕이 골천 사람의 딸 화희와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를 왕비로 맞는다.
- 3년: 국내성으로 천도했다.[A]
3.2. 국내성 시기
- 12년: 왕망의 흉노 공격에 고구려인이 징발된다. 고구려인은 모두 새외로 나가 도적질했고, 왕망은 엄우로 하여금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7]의 목을 베게 하고 수도 장안으로 보낸다. 왕망은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라고 고쳐 부른다.[A][B]
- 13년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 14년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겼다.
- 18년 겨울 10월: 임금이 두곡의 이궁에서 돌아가셨다.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왕위에 올랐다. - 20년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통해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 22년 봄 2월: 임금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 26년 겨울 10월: 임금은 직접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다.
- 37년: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44년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를 대수촌(大獸村)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하였다.
대무신왕의 아우가 왕위에 올랐다. - 48년: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
- 51년: 임금이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에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죽였으며, 신하 가운데에서 간하는 이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를 쏘았다.
- 53년 겨울 11월: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마침내 그를 모본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모본왕(慕本王)이라 하였다.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 55년 봄 2월: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병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56년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개척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 68년 가을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해왔다.
- 121년: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 124년 겨울 10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A]
- 146년: 임금은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D]
태조대왕의 친동생이 왕위에 올랐다. - 165년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119세였다.
겨울 10월: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임금을 시해하였다. 호를 차대왕(次大王)이라 하였다.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 166년: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에 임명했다.
- 168년: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해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임금이 스스로 항복하고 현도에 속하기를 빌었다.[A]
- 172년: 한나라에서 많은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싸우니 한나라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 179년 가을 9월: 국상 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곡(故國谷)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 191년: 을파소를 국상에 앉히고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A]
- 194년: 관리들에게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청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있게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A]
- 197년: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항복하여 오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C][D]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천(故國川)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하였다.
산상왕이 왕위에 올랐다. - 203년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통곡하였다. 임금은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 217년 가을 8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항복해 왔다.
- 227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산상릉(山上陵)에 장사 지내고, 호를 산상왕(山上王)이라 하였다.
산상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 234년: 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 236년 2월: 오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임금이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 그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
- 238년: 위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쳤다. 임금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보내 병사 천 명을 이끌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 242년: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 246년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 248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원(柴原)에 장사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동천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 270년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중천(中川)의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중천왕(中川王)이라 하였다.[A]
12월: 구다국(句茶國)왕이 개마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대무신왕의 맏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3.3. 평양성 시기
4. 멸망 이후
5. 연대 불명
6. 기타 사건
7. 이모저모
- 삼국사기 기록으로만 보면 태조왕은 고구려 700년 역사의 1/7 이상을 혼자 쌈싸먹은 도인.
실제로는 장수왕이 쌈싸먹었지만 - 통일 중국과의 전쟁인 고구려-수 전쟁과 고구려-당 전쟁은 598년부터 668년까지 정확히 70년간 지속되었다. 중간에 휴지기가 있었다지만 가히 70년간 전쟁이 지속된 대전쟁이었다.
8. 외부 링크
[1] 북한 학계에서는 일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가 건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해당 주장은 다른 문헌들과 교차 검증이 되지 않으므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사항은 고구려/역사 문서 참조.[B] 한서[C] 삼국지[4] 고구려어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5]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호가 추모왕이라 나와있다.[A] 삼국사기[7] 또는 구려후(句麗侯) 추(騶). 한서, 후한서, 양서, 북사 등에서 이 인물을 지목하고, 삼국지에서는 구려후 도(騊)라고 한다.[A] [B] [A] [D] 후한서[A] [A] [A] [C] [D] [A] [A] [19] 십육국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