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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6:23:49

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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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궁병의 역사
2.1. 동북아시아2.2. 유럽 및 서아시아2.3. 아프리카2.4. 궁병의 특징2.5. 실전 궁술 복원
3. 그 외의 참조하면 좋은 문서들4. 창작물에서
4.1. 목록

1. 개요

弓兵. 을 무기로 다루는 병사. 궁수(弓手)라고도 쓰며 궁사(弓師)라고도 쓴다. 영어로는 아처(Archer)나 보우맨(Bowman) 등으로 쓴다.

2. 궁병의 역사

고대~근세까지의 전장에서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멀리서 적군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비슷한 역할로 쇠뇌를 쓰는 노병, 투창병, 돌팔매 부대 등도 존재했지만 세계사적으로 궁병이 원거리 공격 병과로서 가장 보편적이었다.

궁병은 아주 먼 거리에서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막대한 장점 때문에 문화권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징집했던 병과다. 그러나 궁병만으론 전투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주력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갑옷을 갖춘 적을 상대로 단단한 부분을 피해 급소만 찌를 수 있는 근접무기와 달리 활은 돈 없는 병사들조차 방패 뒤에 숨으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1][2], 방어측에 비해 공격측은 동기가 부족했기 때문에[3] 불만을 가라앉히고 속전속결을 내기 위해선 근접부대를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궁병은 공성전에 특히 유용했다. 공성전에선 기병은 쓸모가 떨어졌고[4], 그래서 기병이 아닌 보병만 상대하면 되는데 야전과 달리 성벽의 존재가 적의 접근을 차단해주고, 때에 따라서 역공세를 취하게 될 때에도 높은 곳이 확보된 상태이니 투사무기의 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궁병의 활용도가 높았다.

궁술의 난이도 때문에 궁병을 양성하는게 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선 활을 일정거리 이상 쏠 수 있기만 하면 궁수로 쳐주고 운용했다. 냉병기가 주된 무기인 시대여서 자연스레 양쪽 다 방진을 짜고 있다면 평소엔 그냥 빗나가거나 방어구에 막히고 말았을 화살이 아무렇게나 쏴도 재수없는 누군가의 미처 방어구가 가려주지 못하는 곳에 우연히 적중하는 빈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과녁 못 맞추는 초보궁수도 집단운용하면 쓸만했다. 유목민족은 스웜 전술로 대표되는 궁기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야전에선 무적을 자랑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 탄 주몽이 매의 눈으로 저격한게 아닌, 20m 근방의 초근접거리까지 접근한 후 아무나 맞아라 식으로 쏜 것이다. 근접 전투의 경우 상대보다 실력이 열등하면 압도당하기에 한 사람 몫을 하기 위한 기준치가 높은 편이지만 궁술을 비롯한 원거리 무기는 기본적인 수준만 충족한다면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익히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저격'능력을 가진 사람은 부사관 내지 하급 장교로써 좋은 대우를 받고 지휘관 바로 밑에서 저격수 역할을 했다.

문화권에 따라 무장 수준이 낮고 경무장한 비율이 높을수록 궁병의 취급이 좋았다. 십자군 전쟁 기록을 보면 사슬갑옷을 입은 보병을 투르크식 활로도 절대 죽일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고온다습한 기후상 중무장이 기동력을 제약하기 쉬워 경무장 병력이 다수였던 중세 일본에서는 부상자의 8할이 활에 의해 발생했다.

서양에선 갑옷이 기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끝내 일반적인 활로는 중무장한 기사를 뚫을 수 없는 사태까지 이르자 연사력을 대폭 희생하는 대신 위력을 높인 석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궁이 궁보다 무조건 우월한 것은 아니라, 그 유명한 제노바 석궁병파비스가 없으면 장궁한테 연사력에서 밀려 개박살 나 크레시 전투같은 참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석궁조차도 사슬갑옷 정도가 한계였고, 장다름 등 흔히 연상되는 중세 말 서양의 풀 플레이트 갑옷으로 말까지 중무장한 기병들의 판금 갑옷을 뚫을 수 없어 도태되어 가던 도중 화승총의 등장과 함께 비효율적인 전신 무장은 도태되고 급소만 탄탄하게 가린 무장이 트렌드가 되자 이 틈새시장 속에서 총과 함께 아직 현역으로 굴러가긴 했다.

이후 총검이 개발되고 총이 양산되기 시작하여 총이 장궁 하나와 가격이 비슷한 사태까지 이르자 파이크맨과 궁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전열보병에게 자리를 완전히 내주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1. 동북아시아

동아시아는 크게 요약하면 북방에서 끝임없이 중원을 넘보는 유목민들과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농경민들간의 사투의 역사이기 때문에 서양과 달리 관통력보다 연사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많은 기병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궁병에 대한 취급이 좋았다. 맹장을 수식하는 말 중 명궁은 굉장히 흔한 수식어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기병으로 구성된 북방 유목민족과 맞설 일이 많았고, 그만큼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호주머니와 환도. 아울러 한반도 전체에 걸친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산성이나 읍성을 중심으로 한 수성/공성이 주요 전쟁 양상이었기 때문에 활도 많이 썼다.[5] 단시간에 산해경이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로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많은 기록에서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까지, 한민족 국가들의 뛰어난 궁병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이르면 활쏘기는 선비의 기본 소양일 뿐 아니라 기생과 같은 아녀자들까지도 취미로 활쏘기 내기를 할 정도로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다. 오죽하면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에서 내린 치안 관련 칙령 중 하나가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활을 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궁수들이 많다. 명궁 항목 참조.

일본에서는 궁수를 유미토리(弓取り)라고 한다. 직역하면 '활잡이'라는 의미지만 이 단어는 꼭 활잡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았고 '무명이 뛰어난 무사'를 가리키는 일종의 관용구였다. 유미토리라는 말이 '무사'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이유는 헤이안 시대 말엽 겐페이합전 시기의 무사들의 주된 무기가 크기가 긴 일본식 활이었기 때문. 이 시대에는 주로 서로를 향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대는 것이 주된 무사들의 대결 양상이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활을 더 이상 무사의 상징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말만은 남는다. 마치 '중장기병'을 뜻하다가 '귀족 무사 계급'을 뜻하게 된 영단어 Knight, 라틴어 Equites와 같은 경우.

중국중원에서는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 쇠뇌를 적극 활용하였다. 활보다 쉽게 숙련도를 올릴 수 있어 농민 출신 병사를 원거리 무기로 무장시키기 용이했기 때문이다.[6] 산해관 하나만 뚫리면 침략자를 막아줄 험준한 산맥따윈 없고 평야 지대만 쭉 펼쳐진 지형적인 특성상 제각기 성에 틀어박혀 막는건 의미가 없고 기병을 양성해서 수비하는게 나은데도 북부 초원지대의 상실로 인해 기병을 확보하기 힘들어지자 궁수와 전투 마차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7]

유목민 국가도 활을 적극적으로 애용했다. 사냥에서의 유용함은 물론이고 유목민 최대의 적은 다른 유목민이었기에 활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동북아시아에서도 임진왜란을 겪고 대다수 총으로 제식무장을 변경하고 활을 보조무기로 쓴거보면 활의 위력적 한계는 명확했음을 보여준다.

2.2. 유럽 및 서아시아

고대엔 크레타 궁병과 스키타이인 궁수가 유명하였고, 중세에는 영국군장궁병이 유명하였다. 다만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선 궁병을 매우 천시하였다. 모두 같은 중갑과 무기를 들고 열을 맞춰 행군하는 중장보병은 평등하다는 의미로 그리스 시민권과 연관이 있었는데, 가볍고 싼 무장으로 "안전하게" 화살을 쏘는 궁병은 되도록 외부에 맡겼고 그리스 문화가 로마로 이어지며 유럽 전역에 영향을 주자 유럽 전반에 걸쳐 이러한 인식이 생기게 된다. 극단적인 예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헤라클레스"에선 다름아닌 헤라클레스가 활을 쏜다는 이유로 비겁한 겁쟁이라는 모욕을 하는 인물이 나올 정도다. 이때가 이미 헤라클레스가 히드라등 온갖 괴물들을 때려잡은 이후인데도 단순히 활을 잘 쏘니까 겁쟁이다라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곧바로 활은 전략적인 무기라는 반론이 나오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궁병을 얼마나 천시했는지 볼수 있는 예. 어찌보면 1차 대전까지 저격수 천시하는 풍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까지 스키타이인 궁수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특히나 스키타이인들은 유목민족 답게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기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뿐만 아니라, 그와 싸웠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조차도 동방원정 후기에 스키타이인 궁기병을 용병으로 택하여 데리고 다녔다.

유독 활을 사랑했던 영국에서는 오히려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활쏘기만 하라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삼기도 했는데, 채택한 활은 이러한 정책에도 숙련된 병사를 확보하는게 어려운 장궁이어서 영국의 궁수들은 대개 정예병이었으며, 팔과 상체 골격이 변형된 상태로 유골이 발굴된다. 이게 변형되어 그냥 평범한 활을 쏘는 궁병 하나 하나가 무슨 척후병 같은 정예병이라는 오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8]

그러나 중세에 이르자 중무장 기병대가 주력이 된 서유럽의 경우 일반 궁병의 화살로는 중무장 기사를 제압하기는 커녕 갑옷에 팅겨나가서 별 효과가 없자 점차 홀대되었다. 게다가 개인 및 국가의 경제 능력이 점차 향상되면서 사람이 시위를 당기는 일반 활보다 비싸지만 사용이 쉽고 위력이 강력한 쇠뇌로 갈아타는 중이었다. 당시 제노바 쇠뇌병들이 유명했던 것도 이런 이유.[9] 총기가 보편화된 이후로는 비유럽권 지역에서도 극소수의 전문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열보병 시대가 되면 일정 비율의 궁병, 궁기병 편제를 유지하였던 동아시아 지역이나 총기 전래가 아예 되지 않은 오지를 제외하고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통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던 영국에선 근대 이후로도 수차례 장궁병 병과를 부활시키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유일무이한 궁병으로 활약했던 잭 처칠도 이런 풍조하에 나타난 인물.

2.3. 아프리카

아프리카에서도 활을 잘 쏘는 민족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현재 수단 공화국이 있다. 수단 지역의 궁병들은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긴 활인 장궁을 쏘는 명사수들로 유명했는데,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장명족"이 바로 이 수단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에티오피아 장명족"은 크고 긴 활을 당겼는데, 당시 이 "에티오피아 장명족"을 방문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사절단들 중 누구도 긴 활의 시위를 당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장명족"의 왕은 페르시아 사절들한테 긴 활 한 자루를 선물로 주면서 "너희 페르시아인들이 이 긴 활을 당길 수 있을 때에야 우리나라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해보라."고 조롱했다고 언급된다.

또한 서기 7세기 무렵, 이집트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아랍인들이 수단마저 정복하려고 여러 차례 침공했으나, 모두 수단인들에 의해 격퇴당했다. 당시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수단의 궁병들은 활솜씨가 매우 뛰어나서 "아랍인들의 눈을 뽑아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아랍인들을 활로 잘 쏘아 맞혀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결국 수단 궁병들의 강력한 활 때문에 아랍인들은 수단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수단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누비아[10]의 특수 유닛으로 강력한 궁병들이 등장한다. 토탈워 파라오에서도 누비아 궁수들이 이집트나 가나안, 히타이트보다 훨씬 긴 사거리와 강한 위력을 보여준다.

2.4. 궁병의 특징

궁병의 존재 이유는 창칼로는 커버 못하는 원거리 무기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활의 가격은 재질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중갑과 금속무기보다는 저렴했다. 문제는 소모품인 화살이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하는데 돈이 깨졌다. 궁술 역시 백병전을 익히는 훈련보다는 훨씬 단시간 내에 습득이 가능했기 때문에 전사계층이 아닌 징집병들도 빠른 기간 내에 기본적인 사격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참고 영상 일반적으로 투사무기들이 근접무기에 비해 교육기간이 짧은 편이다. 활은 모든 투사무기 중 배우기 어려운 편에 속하나 조준 사격의 명중률을 따졌을때 그런거고, 개개인의 명중률도 전쟁에서처럼 집단으로 운용할 경우 탄막을 펼치는 식으로 어느정도 보완이 된다. 이는 총기가 등장했을때 머스킷병의 보병전술과도 상통한다. 일개 징집병들이 전장에서 레골라스마냥 뛰어다니고 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만 입문 자체가 싸게 먹힌다는 거지, 조준 사격하는 명사수로 훈련시키려면 이쪽도 비싼 건 매한가지였고, 화살도 소비량이 심각한 주제에 제대로 된 재료로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유지비는 제법 들었다. 따라서 궁수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부농이나 상인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냥꾼, 혹은 전문용병이 담당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전쟁시에는 활이 아닌 집에서 쓰던 농기구나 혹은 나무를 깍아서 만든 몽둥이(클럽,스태프)로 무장하였다.

궁병이 보편화 되기 전인 고대에는 이 자리를 투창병이나 투석병이 차지했는데, 이 경우에는 활에 비해 무기인 투석구의 제조와 투척할 돌멩이 수집은 활과 화살에 비해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없을 정도로 쉽고 싸게 준비 가능하며, 위력에 대해서도 활을 능가했지만 제대로 써먹으려면 활을 능가하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소수의 전문가[11]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 지방에서 영국이 궁수 양성을 위해 수시로 활쏘기를 장려했던 것처럼 평시에 투석을 즐겼던 지방[12]에서 전시에 동원하는 일종의 예비군 방식으로 비교적 대규모로 충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까지는 이러한 군제가 다수 있었으나 시대가 지나며 궁병에 비하면 편제상으로 휠씬 줄어들게 되었다.

기계식 활인 쇠뇌의 경우 활과 투석구를 모두 아득히 상회하는 무지막지한 위력[13] 그리고 현대의 총처럼 걸어놓고 나서(장전) 편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이기에 활에 비해 익숙해지기 굉장히 쉽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기계장치가 추가된 활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일반 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 방법이 복잡하고, 덕분에 만드는 기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억소리나게 비싼 가격도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에 지급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관계로(훈련 시간은 훨씬 짧지만) 중세 유럽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비중 있게 쓰인 적은 많지 않았다. 한국사에서는 신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쇠뇌를 많이 사용했고 그 품질은 당나라에서도 높게 쳐줄 정도였다. 당나라에서는 전군의 3분의 1을 궁수 겸 쇠뇌수들로 채울 정도로 비중을 높게 두었다. 이들은 단순한 궁수들이 아니라 적이 접근하면 창을 들고 대응하는 다목적 보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활이든 쇠뇌든, 궁수 양성에는 많은 시간이 들기 마련인데, 여기에 비용(화살[14])도 많이 드는 탓에 질 좋은 궁수부대를 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잉글랜드나 조선, 터키 등에서 궁수부대를 편제하기 쉬웠던 것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활쏘기를 즐기는 문화 덕이 매우 컸다. 특히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는 기마사격(기사, 騎射)은 굉장히 고급 기술이며, 몽골 등 북방기마민족처럼 기사 자체가 어려서부터 생활화된 민족이 아니면 대규모 기마궁수 양성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었다.

많은 매체들이 궁병들은 오직 활만 갖고 다니며 그 탓에 원거리에서는 유리하나 근접전에서는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병이라고 해서 활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영국 궁사들은 상당수가 꽤 잘 사는 편이었으므로 갑옷도 잘 장만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영국 궁사들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프랑스 기사들에게 근접전을 걸어 뼈와 살을 분리해놓은 경우도 있고, 그 외에도 적국 보병이 영국 보병대를 부수고 영국 궁병대에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궁병 부대에게 근접전에서 발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전문적으로 양성된 인력이 있을지언정 병과에 따른 구분이 세분화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정말로 중무장할 여건이 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프랑스 기사들이 대놓고 거렁뱅이 집단이라고 비웃을 정도로 갑옷이 부실했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이들이 이질 등으로 고생하는 중이라 갑옷이 있었더라도 입을 여건이 안됐다는 것과, 이렇게 비웃었던 기사는 평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갑옷이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웬만큼은 챙겨입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기사가 궁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중세시대에 그린 전투화를 보면 궁병들이 부무장으로 칼이나 메이스 같은 철퇴를 상비하고 있고 정 안되면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몽둥이라도 장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궁수들에게 칼이나 철퇴 그것도 아니면 육모방망이로 부무장 시켰다. 예초에 조선이나 중국을 제외하면 활을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재력이 소비되었고 주로 앞에서 말한대로 재력있는 부농이나 상인 혹은 전문용병이나 사냥꾼들이 궁병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냥꾼이 활만 들고 다니는 것도 매체의 왜곡이다. 위험한 사냥을 생업으로 사는 사람들이 활만 들고 사냥하는 경우는 없다. 사냥하다가 늑대나 곰을 만나게되면 활로 상대하는데 한계가 있어 활뿐만 아니라 창이나 단검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냥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북병들이 총이나 활만큼 창도 잘 다룬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총탄이나 화살이 빗나가면 바로 창으로 바꿔 들고서 목표물의 심장을 귀신같이 찔렀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대로된 활과 화살도 제작-유지 비용이 많이 깨진다. 거기다 궁병 1명이 들고 다닐수 있는 화살 수도 많아야 100개 미만이었고 화살이 떨어지거나 적이 근접했을 경우를 대비해 부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현대전에서도 탄약이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소총 말고도 권총이나 군용나이프를 지급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최악의 경우 보조 무기로 적과 싸우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궁수는 일반적으로 근접전에서 적과 맞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역할을 맡는데다, 좋은 갑옷은 보병에게 지급하는 것도 모자랄 판이었기 때문에 궁수가 좋은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또한 너무 무거운 갑옷은 활을 쏘는데 방해가 되므로 경장을 선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궁병대는 민소매 갑옷을 입고 투구가 아닌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다. 소매 있는 갑옷은 활쏘기에 방해가 되며 투구는 시야 확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위에서 애기한대로 양판소처럼 일반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려~조선 시기의 한국의 궁수들은 갑옷을 비교적 잘 갖춰 입은 편이었다. 실제로 고구려 때완 달리 고려~조선 시기에 주류를 차지하던 갑옷 양식인 포형 갑옷은 활을 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였고, 갑사를 비롯한 조선의 궁수들은 방호력이 좋은 갑옷을 갖춰입고 다녔다.

활도 근접전이 가능한 무기로 조선무과 시험중 하나가 근접사격 시험이었다. 조선시대 무인들의 기록을 보면 심지어 근접전에서까지 활을 썼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수세에 몰리자 자살하는 일부 경우도 있었던거지 일반화를 시키면 안된다.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탄금대 전투신립의 일화가 있다. 신립은 활을 어찌나 많이 쐈는지[15] 깍지를 낀 손에 열이 나서[16] 남한강에 뛰어들어서 손을 식혔다가 나오길 9번이나 반복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최후엔 남한강에 투신했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대포진성 전투에서 전사한 윤흥신의 경우, 신립과는 달리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결하진 않고, 대신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하는 최후의 발악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조선이라도 이런 기행이 아무 병사들이나 가능한 것은 아니며 애초에 칼도 차고 다니는 만큼 필요하면 백병전도 치뤘다. 상술한 탄금대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전사한 김여물의 경우,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적들에게 돌격해 부월을 휘두르며 싸우다가 붙잡혀 죽었으며, 이시애의 난 때 전사한 신면(신숙주의 아들)도 화살이 다 떨어지자 활을 휘어 꺾어버리고[17]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다가 죽는 등 조선시대 무인들이라고 해서 화살이 다 떨어졌을 때 무조건 자결만 하는 건 아니고 근접무기 들고 개돌한 케이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상대가 어느정도 접근했다고 무조건 활을 안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생각하면 될 듯?

애초에 멀리서 쏘든 가까운 데서 쏘든 활에서 나간 화살은 사람을 죽인다. 거기다 자신이 활밖에 없다고 순순히 죽어주는 사람은 더욱 없다. 거기다 가까운 데서 활을 쏘면 활의 저지력과 관통력이 강한 상태에서 맞추는 것이라, 관통되지 않더라도 저지력 때문에 상당히 귀찮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knight vs warbow 참조.

2.5. 실전 궁술 복원

현대에는 실전된 궁병들의 기술을 복원하려는 시도들도 있는데, 어떤 국가든 활쏘기가 전통으로 남아있는 한 되도록 거기에 충실하고자 한다.

대한민국국궁의 경우에는 온깍지 궁사회에서 발굴하여 연구했던 온깍지 사법이 실전 궁술의 형태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었다. 여기서 추구했던 것은 높은 장력의 활을 아무리 많이 쏴도 몸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으로, 이는 표적 맞추기를 중시하는 현대적 이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온깍지궁사회는 2000년 겨울에 출범하여, 2007년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형태로 운영을했고, 2007년 이후에는 친목회인 사계로 운영을 하다가, 2018년에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은 온깍지활쏘기학교로 이첩시켰다.

온깍지궁사회에서 해방 전후에 집궁한 구사들을 만나서 사풍과 사법을 확인한 결과, 대부분 1929년에 발행된 <조선의궁술(조선궁술연구회)>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사법 또한 이와 같아서, <조선의 궁술>에 정리된 사법이 한국의 전통사법이며, 1970년대 접어들어 개량궁의 등장과 함께 변형된 반깍지 사법은, <조선의 궁술>의 전통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이런 과정은 활을 스포츠로 볼 때 그 활동이 사람의 몸에 유익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으로 판정난다. 건강에 유익하지 않는 증거는 그 후로 폭증하여 팔꿈치나 어깨를 다치고 심지어 목디스크까지 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전통이 갖는 유의미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온깍지 사법은 한국의 전통사법을 말한다는 점에서, 체육을 위한 사법으로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과거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장려해줬기 때문인지, 현대에도 여전히 장궁 커뮤니티가 존속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실전 궁술을 복원했다고 알려진 유명 인물로는 라르스 안데르센이 있다.[18] 그러나 이 인물에 관해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라르스 안데르센의 영상(한국어 자막 있음)

라르스 안데르센의 경우 각종 고대 사료를 바탕으로 자신이 그것들을 복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의 궁술은 창작에 불과하다. 우선 그가 참고한 고대 사료의 경우 어느 문화권의 사법을 말하는지 전부 다 다르다. 어떤 것은 아랍의 방식을 따르는 한편, 어떤 것은 몽골의 방식을 따르는 등등, 결국엔 고대 궁술의 재현이 아니라 라르스 안데르센 자신의 입맛대로 각종 궁술을 차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묘기중 일부는 현대의 권총 사격술에 기반한 궁술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위 영상의 장면중[19] 책상에 앉아있다가 적들을 쏘는것은 IDPA의 방어술 사격 코스중 하나다. 이는 권총의 우수한 휴대성과 IDPA의 실전지향적 방어사격술의 결합으로 나온 사격술이지 권총과 달리 커다란 활과 화살을 쓰기 위한 사격술이 아니다.

고대 궁술의 재현이 아니라고 할 수있는 또 다른 이유는 어느 특정 지역의 고대 활과 화살의 재현 및 분석은 하나도 하지 않고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낮은 장력의 활과 화살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묘기용 궁술을 잘 할뿐 궁술재현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셈. 이후 사람을 상대로 윌리엄 텔을 흉내낸 영상도 올린 바람에 궁술계에 엄청난 비판과 분노를 사고 말았다. 해당 영상은 얼마 안 가 삭제되었다. 그러나 라르스 안데르센의 노이즈 마케팅이 나름 선전하였는지, 그의 모국에서는 이미 유명인이나 다름없으며, 영국에서는 그에게 자문한 영화를 개봉하기까지 하였다.

3. 그 외의 참조하면 좋은 문서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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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여성의 등도 상당히 근육질이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고있는 상식

2차 창작물들에서는 궁병 종족으로 엘프의 이미지가 매우 강했고 대부분의 궁병 캐릭들이 호리호리하거나 혹은 연약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다가, 궁병은 후방에서 사거리를 두고 화살만 쏜다는 이미지로 인해 일부 대중매체에서는 궁병은 최전선 전사로 뛰기 힘들어서 활을 잡게된 자들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활을 당기고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팔과 손의 악력을 비롯해 활 시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등근육을 비롯한 전신의 근력이 상당히 요구된다.

그리고 궁병의 정예화를 하려면 많은 예산과 시간을 잡아먹는 병과였다. 일단 화살은 검과 창에 비해 철은 적게 들어가지만 대량생산이라는 개념이 없던 중세시대에서는 대장장이들이 그야말로 대거투입해서 정기적으로 화살촉을 만든 뒤 깃털과 나무로 성형한 화살 몸체에 아교 같은 것으로 고정시키는 등의 많은 과정을 거쳐야했다. 게다가 궁병의 명중률을 높이려면 결국은 이 화살을 이용해 명중률 상승과 사격 속도 향상을 위해 장기간 연습을 해야했다.

실제 중세에 쓰던 전쟁용 활은 그 장력이 88lb에 달했으며 영국 장궁병의 경우에는 장력 154lb가 넘는 활을 쓰기도 했고 심지어 조선에선 396lb[20]짜리 강궁을 당기는 데에 성공한 사람도 존재했다고 한다.[21][22] 상당한 근력이 요구되었으며, 보디빌더처럼 근육이 펌핑되지는 않지만, 활을 수련하는 사람들 또한 근육이 다부지게 발달하여 있다. 당장 여말선초 최강의 궁수이자 조선의 건국자로 알려진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면 장년의 나이임에도 어깨가 떡 벌어진 모습이 다부진 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23] 더군다나 굳이 중세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대 올림픽 양궁선수들의 몸만 보더라도 겉보기엔 말라보이지만 알맹이는 근육으로 꽉 찬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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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당길 때 쓰이는 근육.

단 활을 쏠 때 필요한 근육은 신체에서 그리 크지 않은 근육들이라 등이 넓어지는 효과가 사실상 없다는 반론도 있긴 하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어깨가 넓어지는 거랑 등이 넓어지는 거 사이엔 미묘하게 온도차가 조재하기 때문. 실질적으로 팔근육을 제외하고 활을 쏠 때 쓰이는 근육은 후면 삼각근, 중하부 승모근, 극하근, 소원근 정도인데, 극하근이랑 소원근은 진짜 작은 근육이라 활을 쏘지 않을 땐 그리 눈에 안 띄는 근육이니 그렇다 쳐도 후면 삼각근과 중하부 승모근은 어깨가 넓어지기 위해선 반드시 키워야 하는 근육이란 게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넓은 등을 원하는 건 옷핏을 위해서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용도면 광배근을 키워야 한다. 옷을 입었을 때 멋있어 보이게 만드는 근육은 광배근이다. 그에 반해 체감상 멋진 상체가 아닌 객관적으로 넓은 어깨를 원한다면 승모근을 키워야 한다. 견갑골을 억지로 벌어지게 만드는 건 광배근이 아니라 중하부 승모근이기 때문. 즉 궁수들은 공유처럼 여자들이 좋아하는 태평양 등짝이 아닌, 승모근과 삼각근이 극단적으로 뻠핑된 톰 하디같은 체형이었을 거란 얘기.

사실 궁수들이 어깨는 넓었다 해도 그리 보기 좋은 체형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술했듯 활을 당길 때 단련되는 근육은 육체미와는 거리가 있는 삼각근, 승모근이고, 무엇보다 강궁을 당기던 궁수들은 아예 쇄골이 극단적으로 발달해 휘어버리고 견갑골도 양쪽이 이상할 정도로 벌어져 고정되는 등 강제로 어깨가 넓어지게 물리치료가 된 체형이기 때문. 실제로 영국 장궁병의 유골을 보면 쇄골과 팔뼈가 이상하게 휘어있고 견갑골도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는 등 분명 어깨는 넓었을 것 같은데, 너무 넓어져서 오히려 불쾌한 골짜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편 지금의 한량이나 양궁선수들은 맨날 활 쏘면서 왜 그리 상체가 왜소하냐는 얘기가 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옛날 궁수들이 쓰던 활이랑 장력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 장궁병들은 최고 150lb 언저리의 활을 쐈고, 조선 사수들도 모든 병사들이 130lb 이상의 활을 쓰는 등 기본적으로 120lb는 넘는 활을 사실상 삶의 일부다시피 해서 쐈는데, 40lb 정도인 양궁과 50lb 정도인 국궁을 가끔 취미로 쏘는 것만으론 당시 궁수의 체형이 나온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옛날 궁수들은 일단 상술한 엄청난 장력의 강궁을 가지고 쇄골이 틀어지고 척추가 나가고 깍지에 열이 날 정도로 활을 쐈던 사람들이고, 이 정도면 어지간한 웨이트 트레이닝급이라 충분히 우락부락한 승모근과 삼각근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보통 도적과 함께 민첩성과 관련된 스탯을 보유하며 신속하고 재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식으로 특징을 잡는데, 바로 위 문단에서 말했듯이 활은 보기보다 완력과 등근육을 비롯하여 굉장한 피지컬과 힘을 요구하는 도구이며, 오히려 실제론 무거운 강궁은 물론 화살 수백 발에 철퇴나 칼 같은 부무장까지 갖춰야 했기 때문에 가벼운 갑옷을 입었어도 기동력은 제한되는 편이었을 것이다.[24] 예외적으로 겁스라는 TRPG는 나름 현실성을 신경썼기 때문에 활의 명중률은 덱스를 요구하지만[25] 피해량은 근력을 요구한다.

화살 수백발과 함께 부무장까지 들고 다니느라 기동성이 저하되는 것은 다소 극단적인 사례고 대부분의 경우 당장 전투에 쓸 화살 십수 발을 제외하면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투 중에도 전통에는 화살 십수 발만 넣어두고 수시로 재보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궁수가 직접 수백 발씩 짊어지고 다니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최고의 궁수들은 총을 쏘는 포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에 몸이 날랬으면 날랬지 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흔히 가지게 되는 편견과는 달리 근육의 크기는 민첩성과 반드시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수들이 근육질이었을 것이라고 해서 둔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육상 선수들만 봐도 대부분이 근육질이다. 특히 민첩함으로는 손에 꼽을 단거리 육상 선수들과 민첩성은 비교적 덜 중요한 마라톤 선수들을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근육질인지는 명확하게 보인다.

신호에 맞춰서 한 번에 일제사격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일이 잦은데, 현실에서는 머스킷을 쓴 전열보병과는 달리 궁병은 일제사격을 하지 않았다.[26] 일제 사격을 하면 딱 사격할 때에 맞춰서 방패 등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막은 뒤에 다시 화살을 재고 쏠 때까지 달려들 수 있으니까. 물론 유효 사정거리 개념은 있으므로 적이 충분히 다가오고 나서 지휘관이 사격 시작 명령을 내리긴 하지만, 신호에 맞춰서 일괄적으로 사격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냥 사격 명령을 내리면 각각의 궁병이 개별적으로 목표 지점으로 사격을 할 뿐이다. 사격 개시 신호를 맞추느라 첫 발만 일제사격이라 생각하면, 대충 맞을 듯.

대다수의 무협소설에서는 찬밥 취급이다. 대부분이 도검제일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드물게 맨몸이나 이 주력이 되기도 하지만 활은 어떻게 해서든지 별볼일 없는 무기로 만든다. 가끔 위력적으로 묘사될 때는 암습에나 쓰는 비겁한 무기 취급이다. 현실적으로 근접무장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깎아내리는 셈이다. 비슷한 취급을 받는 원거리 무기가 대표적으로 총기류. 그나마 총기류는 현실성을 중시하는 작품에서 악당의 히든카드로 나와 조연들을 학살하는 충격의 장면을 연출할때 쓰이거나, 위기에 처한 주인공 일행을 구출하는데 쓰이거나, 아예 극중 장치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쓰이는 등 현실의 위력대로 나오는 빈도수가 늘고 있지만 활은 그런것조차도 없다.

드래그 온 드라군 시리즈에서도 악명을 떨치는 졸개들. 오죽하면 그냥 잡졸인데도 최악의 캐릭터 인기투표에 이놈들이 순위권에 올라왔다.

전직이라는 개념이 있는 게임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연노/쇠뇌/석궁병, 레인저나 저격수 등의 병과와 호환되지만 드물게 궁수가 전직해서 도적이 되거나 반대로 도적이 전직해서 궁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로빈 후드같은 활잡이/도적 속성의 유명인이 있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민첩성을 살리는 클래스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삼국지 영걸전의 경우 궁병의 최종테크가 특이하게도 발석차다.

대부분 궁병들은 활만 들고 다니고 그 탓에 화살이 떨어지거나 적이 가까이오면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데 이것은 게임이나 영화 등의 대중매체의 왜곡으로 현실적으로는 반지의 제왕, 호빗으로 유명한 톨킨의 소설 세계에서는 엘프나 궁병들도 검같은 보조 무기로 근접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보병처럼 창벽이나 방패벽을 구축해서 강력한 방어 전술을 펼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톨킨이 소설을 쓰면서 중세시대의 궁병을 잘 표현했는데 이는 톨킨이 서구 유럽에서 유일하게 궁병을 체계적으로 사용한 영국 출신인 탓이 크다.

한국 사극에서도 활만 들고 다니다가 적에게 죽는 궁수들을 보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방송국이 엉터리로 고증한다고 성토하는 기사도 있다. 사실 한국 사극에서도 궁수들이 칼을 소지하거나 들고 전투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다만 한국 사극의 경우 칼집을 손에 쥐고 다니거나 칼집을 버리고 칼날이 보이게 패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역사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 문서에서도 상술했듯, 조선시대의 궁수들은 오히려 근접전까지 화살을 쏴서 치렀고, 적과의 근접전에 대비한 근접사격 기술까지 훈련했던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적과 근접전에 들어갔다고 맥없이 당하는 조선군도, 적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칼부터 집어드는 조선군도 둘 다 의도치 않게 고증에 실패한 경우에 해당된다.

게임의 경우에는 궁수들이 근접전까지 치르게 되면 밸런스가 붕괴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 정도는 고려해주자. 안그래도 사거리 무기라는 우위를 잡은 궁수들이 현실처럼 근접전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보여주게 된다면 다른 병과들은 버림받게 된다. 현실과 달리 훈련기간이 짧거나 거의 없는 게임 여건상 밸런스를 맞추자면 궁수를 어떻게든 너프시켜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궁수들은 솔플에 적합하다. 다른 근접 딜러들처럼 공격받을 위험이 적은데다 마법사들처럼 mp의 부담을 많이 받지 않고, 컨셉이 컨셉인만큼 기동성이 좋거나, 사냥꾼 컨셉인 경우 대신 몸빵을 해주거나 딜링을 같이 해주는 동물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손이 덜가기 때문. 거의 모든 온라인 게임에서 궁수 컨셉의 직업은 솔플 앵벌용 부캐로 하나씩은 키워놓는 경우가 많다.

RTS 계열은 게임의 성격 따라 다르다. 워크래프트 시리즈 부류의 캐주얼한 RTS 게임의 경우는 오로지 활만 들고 나오지만 토탈 워 시리즈와 같은 경우는 부무장까지 갖추고 나온다. 특히나 토탈 워 시리즈는 고급 전문궁병들과 하급 농민 궁병들의 격차가 확 벌어지는데 당연히도 전자는 일정 수준의 갑옷과 근접전 무장을 장비하고 나온다. 미디블2: 토탈 워의 잉글랜드 고급 장궁병들이 대표적.

한국 사극에서도 궁병들이 많이 나온다. 사극에서 궁병들은 활과 화살이 든 활집을 허리가 아닌 등에 매달고 다니며 활과 화살이 동시에 들어있다. 장희빈에서는 궁병이 나오지 않았다.[27]

4.1. 목록

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단일 캐릭터는 활잡이 문서 참조.


[1] 헤이스팅스 전투[2] 조선군은 해결책으로 방패 틈새로 화살을 쏘아넣어 맞히는 걸 표준 교리로 삼았다. 왜인들이 반드시 방패 사이의 두 귀로 엿보았으므로 이를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3] 예로 게르만족은 관습상 40일 까지만 주군을 위해 봉사했고, 그 이상의 복무는 거부하거나 재물을 요구했다.[4] 물론 기병이 성벽을 돌파하는 경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성벽 앞에 흙주머니를 잔뜩 던져 언덕을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거나, 말이 오를 수 있는 거대한 사다리차를 만들어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5] 조선 중기까지도 우리나라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었다. 스페인 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상대가 정복자가 아닌 약탈자라면 신속한 출병을 위해 방어력 보다는 기동성을 높이는 쪽으로 무장이 발전하는데, 통일 신라 시대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대부분 군사적 충돌은 유목민과 발생했던 역사적 특성상 특히 고려~조선에서는 이 현상이 심했다.[6] 또한 세계 최초의 화약 무기도 당나라~송나라 시대에 발명되었는데, 기병 중심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에 용이했다. 여기에 숱하게 당하던 몽골인 등도 화약무기를 적극 도입해 전술적으로 잘 활용했고, 이들에 의해 전 세계로 화약 무기가 전파되었다.[7] 치중대의 마차를 둘러쳐 급조 진지를 형성하고, 방패병과 창병들이 급조 진지를 활용해 기병들의 접근을 거부하는동안 강노병들이 월등한 사거리와 관통력, 그리고 연사력을 통한 화력 집중으로 궁기병들을 박살내고, 승기가 확실해지면 기병 (중국은 주로 경기병을 운용했다) 을 맞돌격시켜 판을 굳히는게 중국의 대기병 기본 전술이었다.[8] 여담으로 영국의 손등을 보이며 v 사인을 날리는 욕이 100년 전쟁 당시 영국군이 장궁을 잘 썼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영국군 포로의 검지와 중지를 자른 것과 관련 있다는 얘기가 유명한데 딱히 증거가 없어 이는 현대에 만들어진 낭설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9] 이때문에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장궁병들은 완전 정예화가 완료된 병사들이었고 장궁의 엄청난 장력에서 나오는 관통력으로 중장갑 기사단들이 쇠뇌가 아닌 화살에 의해 갑옷이 관통되어 쓰러지자 엄청 당황해했다.[10] 고대 이집트에서 수단을 불렀던 이름[11] 고대에는 로도스섬 투석병과 발레아레스섬 투석병이 유명했다고 한다.[12] 우리나라의 경우 안동과 김해의 투석병들이 유명했는데, 이들은 한국의 전통 연례행사인 석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한다.[13] 활에서 발사된 화살의 운동에너지는 평균 200J에 해당한다. 그러나 쇠뇌는 최대 1000J에 해당하는데, 이는 머스킷 탄환의 기본 운동에너지와 흡사하다.[14] 화살은 훈련에서든 실전에서든 소모/분실되기 매우 쉽다. 그리고 예나 지금(1발당 2~3만원)이나 재료/인건비가 무척 비싸다. 그렇다고 비용 아끼겠답시고 화살을 싸구려로 막 만들면 안 쓰느니만 못 할 정도로 조악한 물건이 되어 버린다. 화살은 공기역학적으로 굉장히 섬세한 물건이다.[15] 아마 본인 화살만 쏜 게 아니고 적군이 쏜 화살도 뽑아서 쐈던 것으로 추측된다.[16] 이게 뭔 소린가 하겠지만 조선 전기에 가장 흔하게 쓰이던 숫깍지의 경우, 강궁을 당기기에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쐐기가 어중간하게 조였거나 풀릴 경우 구조상 활을 쏠 때마다 엄지 부분이 쓸려서 굳은살은 기본이고 관절에 멍이 들 정도로 엄지 부분에 자극이 심하다.[17] 정황상 적이 노획했을 때 못 쓰게 하려는 것으로 추정.[18] 덴마크인이기 때문에 덴마크어로 라르스 안데르센이라고 읽는다.[19] 3분 20초대[20] 기록상으로는 100균(300근).[21] #@[22] 이런 활을 실전에서 썼을 리는 없지만 396lb짜리 활을 당기는 데에 성공했다면 실전에선 220lb 정도는 썼다는 얘기다.[23] 단순히 타고난 근력만 뛰어나더라도 높은 장력의 활은 쉽게 당기고 쏠 수 있으며, 실제로도 활 입문자의 경우 그런 유형이 종종 나타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활을 오래 쏘기 위해선 단순 근력이 아닌 오랜 훈련에 따른 상당량의 근지구력이 요구된다.[24] 단, 민첩성은 Dexterity의 번역어로, 손재주 같은 것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 능력이라, 조준하고 명중시키는 능력을 반영한 능력이다.[25] 겁스에서 덱스는 몸을 정밀하게 다루는 능력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체능력 실력 값을 좌우한다.[26] 심지어 그 머스킷 사수들조차 일제사격은 환상일 뿐, 최초 사격 이후에는 되는대로 쐈다는 내용이 있는 편지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사격통제 시도는 했는데 전장의 소음 등의 이유로 쉽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27] 조선 숙종 시절이면 더 이상 궁병은 전장의 주력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주력은 어디까지나 조총수였고 활을 쏘는 사수는 조총의 장전 시간 등의 약점을 채우기 위한 보조적인 병종이었다. 물론 드라마에서 그정도까지 고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 씬이 나오는 드라마도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