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권학봉 權學峰| Hakbong Kwon |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977년 7월 ([age(1977-07-01)]세) |
경상북도 상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태국 람빵[2] |
학력 | 예천 유천초등학교 (졸업) 유천중학교[3] (졸업) 문창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시각디자인학[4] / 학사) 치앙마이 대학교 대학원 (예술학부 비주얼아트 / 재학) |
가족 | 처[5] |
종교 | 무교 |
신체 | 170cm, 75kg, A형 |
소속 | 스트로비스트코리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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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진작가, 예술가이다. 사진보정및 사진조명에 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사진작업은 주로 다큐멘터리나 순수 예술사진을 위주로 하고 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정식 가입한 공식 가수[6] 이기도 하다. 더불어 사진보정강의, 사진조명강의, 리뷰등을 전문적으로 하는 유튜브 채널 Hakbong Kwon을 운영중이다.2. 생애
1977년 7월 10일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아버지 권수철(權守哲, 1949 ~ )과 어머니 함창 김씨(1951 ~ )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경상북도 예천군으로 이주했으며, 유천국민학교와 유천중학교, 문창고등학교,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2.1. 고등학교 미술부
1993년 경북 문경시의 문창고등학교[7]에 입학하였다. 당시 문창은 입학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만 지원하였다. 입학 후 문창에서 유명한 '미술부[8]'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미술쪽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당시 문경시는 탄광 산업이 완전히 쇠퇴하여 미술 학원이 전무한 편이었다. 미술 선생은[9] 미술부의 상징적인 역할만[10] 하였고 입시 미술은 선배에서 후배로 전달되는 18세기 도제식 시스템이었다. 짐작 하겠지만 군대보다 힘든 일과(새벽 1~2시에 귀가, 아침7시 등교)와 매주 혹독한 체벌을 이겨내야 했다. 시스템상으로 1,2학년은 연필에 불이 붙을 정도로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이 늘지 않거나 대충하는 분위기만 풍겨도 '집합'을 했다. 짐작했겠지만 학년별로 2~3명정도에 불과한 인원수와 시골 특유의 지역사회로 등교하지 않거나(학교 안나오면 집으로 찾아간다) 미술부 탈퇴는 용납되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타 도시로 전학가는 케이스만 가능했다.""창조""
미술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거수경례와 함께 큰 목소리로 외친 구호다.
미술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거수경례와 함께 큰 목소리로 외친 구호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서 마치 손오공의 정신과 시간의 방 효과가 나온다. 선천적인 미술치가 아니라면, 아니 미술치라도 3학년이 되면 서울의 특 A급 입시 미술학원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는 실력이 패시브로 붙게 된다.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기만 하면 고3 때 그동안 소홀했던 수능 공부에 집중해서 나름 좋은 대학(인 서울)원하는 학과에 진학하는게 어렵지 않게 된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 터치하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게 됨으로 악대부놈들하고 어울려 기타나 치고, 학교를 안나오거나[11] 하면 재수/ 삼수가 기다리게 된다. 이점에 비추어보면 권학봉은 딴길로 새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다.
2.2. 단국대 미술관
1996년 한남동 시각디자인과 건물에서 권학봉 사진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시각디자인학과에 1996년 입학해서 2003년 졸업하였다.
시각전달디자인과(Visual communication design)를 줄여서 어처구니 없는 한국어가 되었다. 아무튼 한남동 산 꼭대기에 4층건물의 3,4층이 시각디자인과였다. 뛰어난 뎃생실력과 묘사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문자(타이포그래픽)/편집디자인에 애정을 가지고 연구했다.
1997년 심심할 때 취미로 그린 연필 자화상 |
인도 관광 50주년 기념(가상)을 주제로 작업한 졸업작품은 '웹사이트 디자인'과 포스터/ 리플렛(전단지) 디자인을 제출하여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생활중 1996년~1997년 학생회(한총련 소속) 활동을 했다. 당시 단국대는 NL계열이 주측었다. 한남동 외인주택 담벼락 넘어 화염병을 던지면[12]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달려드는 것을 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한다.
2001~2002년, 4학년 재학중 휴학을 하고 1년간 인도,동남아지역을 배낭하였다. 당시 여행한 국가는 네팔, 인도, 태국,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등이다.
2002년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전시회 전시중 권학봉작품 부스, 디자인포장센터(혜화동, 현 한국디자인진흥원) |
2001년 인도 배낭여행 시절. |
2.3. 장교동 디자인 센터
대학졸업을 앞두고 사진 작가를 하기에는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다. 집안의 반대 때문에 어쩔수 없이 취업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에는 보통 4학년 2학기 졸업전시회가 끝나면 공식적인 학교활동이 없고 취업활동이 시작되는게 일반적이었다. 교양과목의 경우에도 출석이나 기말시험 없이도 양해를 구하면 적당한 학점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13]2002년 미술관 옥상에서 4학년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권학봉 |
실제 디자인 작업에 전념하는 디자이너를 목표로 유명한 디자인 전문회부터 시작해 규모가 작은업체까지 모두 원서를 넣었지만 최종면접에서 항상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실망해 그 뒤로는 대기업위주로 면접을 봤고 50번 이상의 면접으로 갈고 닦은 프리젠테이션 실력을 바탕으로 한화종합화학 디자인센터[14]에 입사하게 된다. 한 달간 신입사원연수[15] 중 현대기아자동차 남양 디자인 연구소의 합격 통지도 받게 된다. 하지만 한화와 비교해서 연봉이 100만원정도 작고[16] 근무지도 서울이 아닌 남양에서 기숙사 생활[17]을 해야하는 점, 그리고 이미 절반 정도 신입사원 연수를 마쳤고, 현기차의 경우 신입사원연수(훈련소생활)만 3개월인 점을 고려해 한화로 결정했다.
2003년 한화그룹 공채 신입사원 연수 중, 아침 구보시간 중 가지고 들어간 일회용 카메라로 촬영했다. 자유로운 영혼이 노예계약을 하면 어떤 표정으로 담배를 꼬나무는지 볼 수 있다. |
2004년 한화종합화학 디자인센터에서 근무당시, 그 흔한 디자인 샘플하나 없는 책상을 보면 공수래공수거의 정신을 실천하는 직장인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화면을 보면 개인 홈페이지 디자인중임을 알 수 있다. |
디자인센터에서의 보직은 홍보물/ 전시/ 판촉이었다. 제품을 디자인하는것 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편집/그래픽 디자인쪽을 하고 싶어 입사초기에 적극 어필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부분의 업무는 디자인 외주를 발주하고 관리, 감독하는 것이었음으로 아주 작언 업무건수에만 직접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잘 팔리지 않는 원목마루 제품의 포장/스티커디자인의 같은 경우 열과 성을 다해 '디자인 특허, 실용신안'등 다수의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회사에 제공해 주었다. 회사는 건당 만원의 장려금을 하사 해서 노력하지 마라는 경고를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즐거움을 위해서 꾸준히 작업했다. [18]
2005년 한화종합화학 경향하우징페어 부스, 좌상: 열일하고 있다.(개폼잡는다고 작업 방해중인 담당자) 우상: 컨벤션센터 안이기 때문에 큰 구조물도 최대한 인력으로 설치한다. 좌하: 통과된 기획안. 우하: 실제 설치완료된 전시 부스. |
이런 성과 때문에 한화종합화학에서 당시 가장 돈을 잘버는(힘이쎈) 부서인 자동차 내장재부서로 보직 이동하게 된다. 반 강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자동차 내장재 색상 맞추는 지루한 업무를 이어가게 되었다. 당시 그가 디자인한 자동한 내장제 패턴을 사용한 차량은 소나타NF, 베라크루즈(초기), 토스카, 윈스톰등 현대/기아, GM대우(구), 르노삼성(구)등이었다.
퇴사의 가장큰 이유는 1년에 2박3일에 불과한 국내 기업의 문화 때문이었다. 그는 1년에 무급 1개월 휴가(월급도 필요없다)를 제안했지만 인사팀에서는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특별 승진등의 차선책등을 제시했지만 퇴사를 결정하는것을 막을수 없었다. 한화의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
2.4. 충주 아시마, 사바이
퇴사후 2008년에서 2016까지 충주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앞에서 아시마(ASIMA, आसिमा[19] )라는 주점을 운영 하였다. 당시 근처에서 가장 뛰어난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가진 호프집[20]이었지만 처음에는 경험부족으로 경영 상 문제가 생겼다. 이를 회복하는데 약 1년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지방대학교 캠퍼스의 특성상 방학기간중에는 학생이 전혀 없었다. 이 시기에 가게 문을 닫고 사진 작업에 열중 할 수 있는 시간과 자금을 위해서 영업을 했다. 따라서 연고가 전혀 없는 충주에서 사업을 하였다. 시대를 앞서간 워라벨형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학기중에는 영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6년 후에는 임대하던 해당 건물을 매입하였다.2008년 아시마(ASIMA)의 내 외관 사진 |
2010년 아시마 맞은편 지하에 주점 '사바이(sabai สบาย[21])'를 오픈하여 2016까지 영업하였다. 아시마가 칵테일을 내세운 호프집이라면, 사바이는 사케를 내세운 소주방이라 하는 것이 맞을것이다. 약 70여평의 넓은 평수와 저렴한 가격 그리고 실내 정원, 그리고 무료 포케볼 테이블이 구비되어 있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2012년 법 개정으로 인해 실내 흡연실(흡연부스)를 설치 했는데, 배기 1.5마력, 흡기 1마력의 강력한 환기 시스템을 갖추었다. 오버스펙 시스템으로 한평 반 정도의 흡연실 공기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았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사바이(sabai)의 실내 사진 |
2.5. 태국, 람빵으로 이주
2017년 한국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태국 람빵으로 이주 하였다. 처가 태국인으로 공무원 교사였기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서 거주[22]하는 것을 부담 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태국에서도 사진작업을 계속 할 수있으니 태국으로 이주가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태국에서는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6월 부터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 예술학부, 비주얼아트 대학원[23] 에 재학중이다. 해당 대학교에서는 기존 작가를 위한 연구 대학원생 프로그램(정규 강의가 없이, 논문과 전시만으로 운영됨)이 있기 때문에 작업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아서 진학했다고 한다. 같은 프로그램의 동기는 5명이 있다.[24] 참고로 졸업자격으로 영어시험(토익;650이상)을 제출하기 위해서 본 2번의 시험결과는 1차 635점, 2차 735점이다.2020년 스튜디오람빵에서의 권학봉 작업실 모습 |
2017년 람빵에서 스튜디오람빵(Studio Lampang)을 오픈했다. 지역 사람들의 일거리도 받을 생각이었으나, 태국 물가수준의 비용을 받고 작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현재는 개인 작업실 용도로 주로 사용하며 가끔식 지인을 통해서 들어오는 일감 정도만 처리해 주고 있다. 스튜디오람빵은 3층 건물에서 1층 촬영스튜디오이며, 2층은 창고, 3층에는 드레스룸이 있다.
가끔식 유튜브나 책을 보고 찾아오는 한국 펜들도 있는데 드물기 때문에 바쁘지 않으면 최소한 저녁 대접정도는 해주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이후 한국인은 현재(2021)까지 찾아오지 않(못)는다.
2019년 한태 사진교류전 ' 팝타이사진'을 참여/감독한 권학봉 전시회에서 만남 한태 참여 사진작가[25] 와 주태 한국문화원 원장(가운데). |
3. 작업 경력
3.1. 사진작업
3.1.1. 초기 사진과 카메라
그는 부친의 사진 취미로 어릴때 부터 SLR카메라[26]와 매우 친숙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환등기(슬라이드 필름 프로젝터)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기본적인 촬영의 기술은 익힐 수가 있었다.[27]
대학교에서는 광고사진 동아리[28]에서 암실 작업을 익혔다. 암실 작업은 부친의 작업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는 정도였지만 이 때 부터는 본격적인 암실 작업 기술에 몰두해서 이를 거의 마스터 하게 된다. 당시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미대학생들 수준이 대부분 그렇듯, 유명한 대가들의 작풍이나 스타일을 모방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미술 같은 분야에서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니 아주 잘못된 방법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절 크게 영향을 미친 사진작가로는 초기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로베르 드마시(Robert Demachy)등의 회화주의 사진작가들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과 같은 1세대 다큐멘터리 작가에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8년 두개의 아치 |
1997년~2002년 네모 시리즈 |
더불어 이 시기에 누구나 그렇듯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장비병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디지털 시대의 카메라와는 다르게 당시 필름 카메라와 렌즈는 감가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면서 중고 거래가 활발한 물건이었기에 가능했다. 즉 어느정도의 현금만 있으면 큰 손실없이 사고 팔면서 원하는 카메라는 모두 만져볼수 있었다. 펜탁스 ME Super, SF7, Z5p에서 부터 시작해, 니콘 FM2, F3, F4, F801, 캐논 EOS 5, EOS 3, EOS 6, EOS1, EOS 55, 미놀타 다이낙스7, 라이카 M4, R6, 콘탁스 G2, 등등 구미가 당기는 거의 모든 카메라로 기변했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사용한게 몇달 정도이며 짧게는 1주일만에 되판것도 많았다. 대학생활 후반기에는 거의 펜탁스 K마운트에 안착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오랫동안 사용한 카메라는 펜탁스 Z1p 였다. 이런 관계로 펜탁스클럽[29] 사이트의 전체적인 디자인 리뉴얼도 해주고 거의 운영진으로 활동 하였다.
2003년 펜탁스 Z1p와 24mm f2.0 렌즈를 매고 있다. |
2002년 오래동안 이용했던 펜탁스 Z1p , SMC Pentax-FA* 85mm F1.4 [IF] |
2000년은 대 디지털 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구입한 카메라는 니콘의 쿨픽스 990이었다. 190만 화소로 1600x1200 똑딱이 형식의 카메라였지만 렌즈부와 바디부가 따로 돌아가는 독특한 디자인의 카메라였다. 디지털카메라는 당시 화질 문제와 가격의 밸런스가 상상이상 이었기 때문에 캐논 EOS 5D가 출시하기 전 까지는 필요할 때 마다 구입하고 촬영이 끝나면 파는 식으로 이것저것[30] 이용하면서 메인으로는 필름 SLR카메라를 유지했다.
2006년 마지막까지 사용했던 필름 카메라, 펜탁스 MZ-S, 지금 봐도 필요한 모든 기능이 들어가 있는 멋진 바디다. |
3.1.2. 중기 사진과 카메라
이시기의 카메라는 디지털과 필름사진이 섞여 있는 시기다. 캐논의 5D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필름카메라는 사라지게 된다.2002년 필름카메라와 후지필름 프로비아100으로 작업한 인도 푸리의 사진 |
2007년 캐논 5D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한 인도 필리핀의 사진 |
이 시절의 사진을 보면 알다 싶이 심각한 작가병에 시달리고 있다. 유명한 대작들에 압도되어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흉내내기에 집중하고 있는 인상이다. 이런 현상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거처갈 수 밖에 없다. 뭔가 예쁘고 아름다운것을 표현하면 달력 사진, 혹은 이발소 그림이 된다고 생각한 듯 하다. 따라서 사진의 구도나 구성에 있어서 항상 뭔가 조금 삐딱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했으며 실제와는 다르게 오버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작업이 그렇듯이 이런 마음의 병을 덜어 놓고 자유롭게 촬영한 B컷들이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왼쪽:샤르나트의 티벳사 사원, 오른쪽: 타르사막의 일몰 |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추구했던 방향인 왼쪽 예제사진은 당시 뭔가 새로운 예술적인 감성을 녹여 낸듯 생각해 신중히 촬영한 것이다. 오른쪽 사진의 경우 일종의 놀이에 가깝게 촬영한 결과물인데 잔재주를 부린 B컷 정도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난 햄보칼수가업서, 아무도 날 이해모태" 짤이 적절한 시기.
물론 왼쪽 사진이 나쁘지는 않으나 결국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의 스타일을 강하게 풍겨내는 작품으로 잘 처봐야 오마주 정도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즐길수 있는 오른쪽 사진의 경우 반응도 좋고 판매도 잘 이루어진다. 추구하는 사진의 경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아류일 뿐이었고, 오른쪽 사진의 길 역시 겉만 번지르르한 영혼 없이 얇팍한 사진이 될것이 분명했다. 두 악수 중 고민하는 이 시기 작품은 이런 극과 극속에서 표류하는 느낌이 강하다.
3.1.3. 현재
2010년 이후 만난 프랑스인 사진작가 친구를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는 사진의 표현방법에 대한 자유를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면 안돼?"
훌륭한 예술적 작가란 항상 쉬운것도 어렵고 복잡하게 표현해야 하며, 누구나 이해할만한 유치한 것을 지양하고, 기술적 미숙함을 마치 철학적 깊이로 포장는 현대 미술에 완전히 매몰되어 한 번도 이런한 질문을 해 본적이 없던 그에게는 충격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결국 이발소 달력을 차지하고 있는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은 당시 귀족이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가난한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그저 목가적인 풍경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 처럼 현대 예술 사진의 스타일과 표현의 방법 역시 사조와 흐름속에서 하나의 유행이 처럼 굳어진 것이다. 결국 사진은 그 수준에 따라 평가 되는 것이지 어떤 유행을 따랐다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을 깨닫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2011년 좌상:나담축제의 경주 준비중인 말들, 우상: 10세이하 아이들의 나담축제 말경주 좌하:사냥개와 함께 포즈를 취한 몽골의 사냥꾼 우하: 저녁식사 준비중인 몽골의 여성 |
이 시기 부터 권학봉은 개인전을 열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장르의 사진과 함께 순수 예술 사진도 함께 진행했다. 특히 이시기 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진에 적극적인 조명을 사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장르이지만 결국 작가의 프레이밍 역시 사실의 조각일 뿐이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상황을 조작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면 추가적인 조명이 얼마든지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대상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 주는것을 기본 틀로 많은 사진을 촬영한다.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족, 국가, 성별, 지위등에 따라 그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2014년 좌상:산위의 얼굴들, 우상: Face of Mongolia, 좌하:대한민국에서 대학생으로 산다는 건, 우하: 탄광마을 사람들, 인도 자리아 |
순수예술사진 작업으로 접근한 '대한민국에서 대학생으로 산다는 건' 작품들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로 기획했다. 대학생들의 고달픈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등장인물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임하되, 과장된 연출과 비현실적인 후반작업을 통해서 우스꽝스러운 대비를 추구했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블랙 코미디'스타일의 작품으로 한국 대중과 평단으로 점잔하지 못한 작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기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진의 탐구였다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가치 있는 작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명을 사용한 다큐멘터리 사진에도 대중적인 거부감이 많이 줄어 들었다. 이 시기 작업의 밀도를 더욱 올리기 위해서 철저한 조사와 기획에 많은 공을 들인다. 특히 로힝야 시리즈의 경우 당시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난민캠프의 삶을 들여다 보는 형식으로 버림받은 소수민족의 처절한 생존이야기를 풀었다. 또한 순수예술 사진작업인 낭파는 태국어로 '천사'를 의미한다. 태국인의 상상속 천사복장을 한 주인공이 세월에 무심하게 무너진 왕국을 돌아본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작업이 되었다.
2017년 좌상:로힝야 난민 이야기, 우상: Colors of Thailand, 하:낭파, 왕국 다시 돌아보기 |
코로나 사태로 인해 다큐멘터리 작업에 큰 장애가 발생했다. 당시 태국내 이동은 크게 무리가 아니었지만 외지인 특히 외국인이 시골의 낮선 마을을 방문 한다는 것 자체가 주민들에게는 스트레스일수 밖에 없다. 따라서 2020년 부터 다큐멘터리 작업은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있다. 2022년의 경우 새로운 순수예술작업 '깃발 아래(가칭)'을 준비중이다. '깃발 아래'는 장기 기획인 '인간'의 한 파트로 구성되고 있는데 인간의 본질인 내면에 대해서 시각적으로 다루어 볼 예정이다.
3.2. 출판물
4. 기타
- 편집기록을 보면 알수 있지만 본인 작성 문서이다.(...)
- 디지털 사진 갤러리의 갤주이다.
[1] 부정공파 오(墺)계 37세 학(學) 항렬.[2] 태국인 여자와 결혼하고 4년 만에 거주지를 태국 람빵으로 결정하고 2017년 이주하였다.[3] 2007년 3월 1일 폐교되었다.[4] 서울 한남동 캠퍼스 시절 도예과와 함께 문과대학로 분류되었었다. 한남동 캠퍼스의 시각디자인학과는 2007년 용인 죽전캠퍼스로 옮겨져 현재는 음악·예술대학 디자인학부 커뮤니케이션디자인전공이 되었다.[5] 태국 람빵 출신으로 현재 국립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다.[6] "사진가의 길"이라는 노래의 작사만 하였지만 작곡, 노래등의 모든 권한을 위임 받아 음악인에 등록되었다. 실제로 그는 음치다.[7] 남자 사립고등학교로 45명 한 반(8반까지) 학년별 360명 정도 규모, 기숙사 및 전체 학생식당, 3학년 전체가 들어가는 대형 독서실, 전교 행사가 가능한 체육관이 있음[8] 미술실은 체육관 건물에 붙어있는 칸으로 일반교실 2배정도 크기, 맞은편에는 악대부가 있었다. 학교는 문/이과 입시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체육부와 함께 단 3개의 특수활동부가 있었으나 학교는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다[9] 뽀식이라 불렀다. 들키면 미술부 전체 집합.[10] 일주일에 한번 미술실에 들어오면 많이 오는편이고 주로 3학년에게만 지시사항 전달하고 간다. 보통 5분정도[11] 3학년쯤 되면 자리에 없어도 얘들이 '미술부인데요'하면 선생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12] 잔디밭에 떨어진 화염병의 불을 입으로 불어서 끄고 자루에 담아 버려는 모습이 당시 있었던 육교에서 보였다. 화염병이 깨지지 않아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던진다는것 자체가 중요한 의식이었다[13] 현재 대학처럼 상대평가도 아니고 누구도 대학교 학점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생의 경우 대체로 C~B 정도의 점수를 받고 졸업 학점을 채우는 분위기였다[14] 2003년 한화그룹 하반기 공채[15] 보통 합숙하게 되며 주로 창업자의 업적을 세뇌교육식으로 주입하는 곳, 군대 훈련소와 매우 비슷한 분위기다. 아침 6시 기상 3km 구보후 식사, 저녁 10시 취침[16] 당시 그는 성과급과 같은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17] 남양 연구소의 디자인센터에서는 퇴근이 없고 '잠시 집에 다녀오겠습니다.'가 인사였다고 한니 분위기를 대충 짐작 할수 있얼것이다. 더불어 당시 서울역뒷편(서부역)에 거주 하고 있었음으로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의 한화(장교동)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18] 기업이 모든 권한을 가지는 것에 비해서 터무니 없는 작은 금액임에 틀림없다.[19] 힌디-무한/중앙이라는 뜻으로 주로 여자 이름으로 많이 사용한다.[20] 칵테일바라고 하지만 대학교앞이라는 특성상 저렴한 생맥주를 판매하는 호프집에 가깝다.[21] 태국어-편안하다라는 뜻으로 인사말이나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한다.[22] 방학기간내 한국에서 거주하는 일이 많았음으로 대략적인 한국 생활의 분위기를 짐작하는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23] Master of Visual ARTS, Fine Art Faculty, Chiang Mai university로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대학은 방콕에 위치한 실라파컨대학(Silpakorn university)이지만 위치상 북부에서 미대가 가장 좋은 치앙마이대학교에 학적을 두었다.[24] 한국인1, 미국인1, 러시아인1, 중국인1, 태국인1, 참으로 인터네셔널하다고 할 수 있다.[25] 왼쪽에서 부터, 마닛Manit Sriwanichpoom, 수텝Suthep Kritsanavarin, 성남훈, 유별남, 촬영;권학봉[26] 펜탁스 ME Super로 추측되며, 모터 드라이브와 교체용 렌즈가 여럿 있었다.[27] 당시 카메라가 매우 귀했고, 있다고 하더라도 포인트 앤 샷(똑딱이) 수준이었기 때문에 SLR카메라는 어디에서도 대환영을 받는 인기맨이 될수 있는 아이템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그도 이런 재미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28]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동아리기 때문에 사진관련 동아리는 이것이 유일했다.[29] pentaxclub.com 의 도메인도 그가 구입하여 펜탁스클럽에 기증했다.[30] 2000년부터 나온 크롭바디 DSLR은 거의 다 거쳐갔다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