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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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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업 (1946년)3. 사업 확장 (1950~70년대)4. 박인천 사후 (1980~90년대)5. 형제 공동 경영 체제의 종말 (2002~2011년)6. 금호석유화학그룹 계열 분리 (2011~2015년)7. 짧은 전성기와 몰락 (매각 과정)8. 박삼구 회장의 사퇴 및 그룹의 사실상 해체 (2019년~)9. 무리한 M&A가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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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호아시아나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창업 (1946년)

창업주는 박인천이다. 박인천은 일제강점기 때 순사 시험(현재의 국가공무원 시험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볼 수도 있다.)에 합격하여 순사로 일했다. 그는 순사 시험에 합격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서 곽씨 성씨를 지닌 지역 유지에게 유의미한 수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 후 일제가 패망하자 퇴직금으로 1935년형 포드 디럭스 세단과 1933년형 내쉬 등 2대를 구입하여 1946년 광주에서 택시 운수업인 광주택시 를 세웠다. 이어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현재의 금호고속)을 설립하여 버스 운송업을 시작했다. 광주를 기반으로 하여 전라남도에서는 제법 큰 버스 회사로 성장했지만, 1960년대까지는 지역의 수많은 버스 회사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기업이 급성장하게 된 것은 1971년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이후이다.[1]

당시 코리아그레이하운드[2]가 미국 본사로부터 튼튼한 중고 대형 버스들을 들여와 전라도의 버스 노선을 장악해가는 상황이었다.
파일:광주택시 포드 디럭스.jpg
파일:광주여객.jpg
노산 이은상 선생 자택 앞에 대기중인 광주택시 35년형 포드 디럭스 (앞)과 33년형 내쉬 (뒤) 금남로에 위치했던 광주여객자동차 사업장
파일:광주고속 벤츠버스.jpg
파일:광주고속터미널.jpg
메르세데스-벤츠 O302을 도입한 광주고속 유스퀘어의 전신 구 광주고속 터미널
하지만 광주고속은
  1. 사실 초창기 광주고속은 주요 경쟁사보다 차량 성능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역으로 "고객의 안전을 위해 서행"한다는 주장을 널리 홍보하는 방식으로 맞불을 놓았다.[3]
  2. 전라도의 노선은 광주-광양[4]이 4시간 걸렸을 만큼 도로가 불량했던 데다, 아직 만(MAN) 엔진[5]이 나오기 전이라, 어느 회사건 버스를 한 번 운행하고 나면 반드시 정비를 거쳐야 했는데, 광주고속에서는 이 버스 정비에 사활을 건 수준으로 밤샘인력을 투입해 어떻게든 버스 운행 횟수를 채우거나 늘려나간다.[6]
  3. 콩나물 시루 같은 촘촘한 좌석 + 일부 노선은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고속을 타는 충성심 강한 지역사회 고객들의 성원이 있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다른 회사 고속버스를 타면 곧바로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는데도 다른 회사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30-40분씩 대기해 가며 광주고속을 탔다. 이런 전라도 사람들의 성원이 더해져 난적 중앙고속과의 경쟁에서 승리, 전라도의 고속버스 노선에서 대세를 점하게 된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서울과 수도권에 상경하였기에 열악한 도로 실정에도 불구, 전라도행 고속버스 노선은 경상도행 노선에 크게 뒤지지 않는 운송량을 자랑했다. 광주고속은 전라도를 경유하는 고속버스 노선 시장의 대다수를 장악하였고, 중앙고속[7] 정도을 제외한 다른 고속버스 회사들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철수하고 만다. 이렇게 전라도행 노선을 과점한 광주고속은 다른 고속버스 회사들을 압도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8] 매머드 고속버스 회사로 성장한 광주고속은 이미 장악한 전라도 노선 뿐만 아니라 경상도 쪽에도 적지 않은 노선에 배차를 투입하였다. 덕분에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의 고속도로, 고속버스터미널에서도 "광주"고속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다.

3. 사업 확장 (1950~70년대)

파일:삼양타이어.jpg
삼양타이어(주) (현 : 금호타이어) 광고
파일:한국합성고무 출하개시안내 광고.png
한국합성고무공업(주) (현 : 금호석유화학) 출하개시안내 광고
파일:금호 전자동 세탁기.png
금호전자 (현 : 금호산업) 금호전자동세탁기 광고

그는 1954년 귀속재산 전남도시제사를 불하받아 섬유사업에 진출했고, 1959년 학교법인 죽호학원을 설립하면서 육영 사업에도 손을 뻗고 1960년 삼양타이어를 설립해 1960년대 후반 자동차 수요 증가에 힘입어 타이어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웠다. 그 후 1967년 금호건설의 전신인 제일토목건축을 설립하여 건설업에도 뛰어들었지만 건설에서는 오랫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9] 뒤이어 1970년 일본합성고무(JSR)와 합작해 '한국합성고무'를 설립해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하고 1972년 종합무역상사 '금호실업', 1973년에 금호전자 및 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을 각각 설립 후, 1974년에 광주투자금융을 설립하고 극동철강공업을 인수하기도 했으며 1976년에 마포전기까지 인수했다. 그러나 1979년 제2차 오일 쇼크로 어려움을 겪자 금호실업은 금호산업과 금호전자를 합병했고, 1981년에 금호전기가 분가했다. 같은 해에는 출자관리부를 금호실업에서 분리해서 그룹 참모조직 '회장 부속실'로 개편해 그룹 총괄체제를 구축했다.

4. 박인천 사후 (1980~90년대)

1984년 박인천이 타계한 후, 자녀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찍지 않고 2세대가 지분을 골고루 나눠 가져 돌아가면서 경영권을 행사하는 독특한 후계 방식을 취했다.[10] 2세대 중 장남 박성용(2대 회장, 1984~1996), 차남 박정구(3대 회장, 1996~2002) 시절에는 형제 상속이 잘 실천됐다.
파일:금호타이어 CI(1986-2006).svg
파일:아시아나항공 CI(1988-2006)_국문.svg
1986년 삼양타이어에서 금호타이어로 명칭 변경 국내 두번째 민항사 아시아나항공 설립
파일:hl7251.jpg
보잉 737-400으로 운항을 시작한 아시아나항공
서울대를 나온 장남 박성용은 수완과 처신에 능해, 승계 후 사세를 키우는 데에 성공한다. 먼저 1984년에 금호실업과 삼양타이어를 통합해 '(주)금호'를 출범시킨 후, 금호건설을 광주고속에 합병시켰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제2민항사 설립을 추진한 정부 시책에 호응해 전국 최대 규모의 고속버스 운송 회사로 성세를 구가하던 금호그룹이 제2민항사로 선정되고, 본격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88년 12월에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해 보잉 737-400으로 서울(김포) - 부산, 광주 간 국내선 취항을 개시했다.[11] 1991년 금호개발이 '광주패밀리랜드'를 개장해 서비스업에도 손을 뻗었다.
파일:금호그룹 초기로고.jpg 파일:금호그룹 로고(1986-2006).svg 파일:금호아시아나 심볼.svg
1973~1986 1986~2006 2006~
금호아시아나그룹 역대 로고
1986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붉은 사각형 안에 음각으로 K의 사선 획이 그려진 로고를 썼으며, 금호고속 버스 옆면 도색의 회색 부분이 바로 구 로고의 흔적이다. 오래된 금호아파트 외벽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로고 교체 작업이 순조롭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6년 2월 말까지도 오스트리아 항공기와 도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항공기 도색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으며,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기존엔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국 2006년 안에 모든 교체 작업을 마친다는 목표로 교체 작업에 임했다. @

1990년대에는 건설 호황기를 맞아 그동안 고전해오던 금호건설이 마침내 흑자로 전환되었다. 이어 90년대 건설 호황을 제대로 타며 금호건설의 규모가 커지자 광주고속이 금호건설을 관리하던 상황이 역전되어 1993년에는 광주고속이 '금호건설'로 법인명을 변경했다. 1995년에 (주)금호가 미국 허츠 사와 제휴해 렌터카 사업을 시작했다.
파일:315198_317306_4048.jpg

1996년에는 박성용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자 2남 박정구가 그룹을 이어받았고 2002년까지 이끌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그룹에 위기가 도래했다. 금호의 부채비율은 심각한 수준인 900%를 웃돌았고, 특히 아시아나항공은 외환위기로 인한 손님 급감에다가 당시 환율이 800원대에서 무려 2000원까지 치솟았는데, 이로 인한 환차손으로 제대로 타격을 입었다. 또 외환위기 당시 가장 크게 직격탄을 받은 분야 중 하나가 자동차산업이었는데, 기아, 삼성차, 쌍용차, 대우차 등이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자동차산업의 줄도산 위기로 금호타이어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건설 또한 건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천운으로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IMF가 요구했던 가차없는 구조조정을 밀어붙였지만, 전라도를 대표하는 기업인 금호와 해태 등에게 만큼은 타기업과 달리 구제의 기회를 주었다.[12] 금호는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위기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1998년 구조조정을 단행해 계열사를 정리했고, 1999년 금호타이어와 금호건설을 합병해서 금호산업을 출범하여 그룹의 지배 구조를 개편했다.

박인천 창업주의 3녀 박현주는 복합 조미료 "미원"으로 유명한 대상그룹 명예회장 임창욱과 결혼했다. 임창욱 명예회장이 수사와 건강악화로 경영일선에 나서기 힘들자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 부회장직에 올라 경영일선에 나서며 재계 여걸로 불린다. 두 사람의 장녀인 임세령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과 1998년에 결혼하지만, 2009년에 이혼했다.[13]

5. 형제 공동 경영 체제의 종말 (2002~2011년)

파일:금호아시아나 로고(2004-2006).svg
2004년부터 사용한 그룹 CI
창업 2세 4형제 중 둘째인 박정구 3대 회장이 2002년 먼저 세상을 뜨면서 3남 박삼구가 2002년 4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2004년 1월 1일에 그룹명을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변경하였다.[14] 이 때 첫째 박성용 2대 회장이 동생들과 함께 ‘형제공동경영합의서’를 작성했다. 초기 합의서에는 그룹 회장직은 65세까지이며 최장 10년을 넘기지 않을 것, 회장직은 4가계 합의로 추대할 것, 4형제가 그룹 지분을 동일하게 보유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장남 박성용 명예회장이 뒤이어 작고하자, 박삼구 4대 그룹회장이 합의서를 수정하기 시작한다. 우선 ‘65세, 최장 10년’ 조항이 삭제됐고, 그룹 회장에 대한 4가계 의견이 엇갈릴 시 다수결원칙과 연장자[15] 의견에 따른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6년 수정안에서는 그룹 존속 위해 그룹 분할, 해체를 금지한다는 조항을, 2008년 수정안에서는 합의서 위반 시 소유 주식에 해당하는 금액 50%를 다른 가계에 보상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합의서가 수정될수록 형제간 골은 깊어가고, 심지어 2008년 수정안에는 박찬구 회장이 서명 날인을 하지 않았다.[16]
파일:금호아시아나60주년.jpg
2006년 2월, 그룹 창립 60주년을 맞아 현재 사용 중인 '윙 로고'를 포함한 새 CI를 선포하였다.[17] 창립 60주년을 맞아 박삼구 회장은 건설업을 주력 사업으로 성장시킨다는 원대한 기치 아래 당시 종합시공능력 평가 1위의 초 우량 건설회사였던 대우건설의 주식 72.1%를 무려 6조 4,255억원에 인수한다.[18] 천문학적인 인수금액을 감당하기 위해 금호건설금호타이어가 2조 9,000억원의 대부분을 금융사에서 차입하고, 나머지 액수는 연기금과 사모 펀드 등 재무적투자자(FI)를 통해 조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FI들로부터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위임 받는 대신 3년 뒤인 2009년 FI 보유 주식을 주당 31,500원에 되사는 풋백옵션을 체결하였다.[19]

바로 이 과정에서 3남 박삼구 회장과 4남 박찬구 당시 화학부문 회장이 갈등을 빚게 된다. 박찬구 회장은 유동성 위기를 우려해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묵살당했고, 2009년 우려가 현실화되자 금호건설 주식을 매각하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했다. 이로 인해 ‘형제공동경영합의서’ 상 동일지분 보유 항목이 위반되긴 했으나, 4가계 합의 룰을 깨고 독단적인 경영으로 합의서를 무력화했던 건 박삼구 회장이었으며 주식 매입은 금호석유화학까지 유동성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게 박찬구 회장 입장이다.[20] (박찬구 회장 입장문 전문, 현재 재무건전성을 보면 금호석유화학 분리는 박찬구 회장의 신의 한 수)

다시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 상황로 돌아가 보자. 2008년 대침체로 세계 경제에 공황이 찾아와 증시가 추락한다.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 풋백옵션 행사 시기가 다가오는데, 건설업 불경기로 대우건설의 주가는 3년 전인 2005년 11월 인수계약 체결 당시의 약 13,000원에서 오히려 10,000원 전후로 하락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채무부담을 가중시켰다. (주당 31,500원에 도달하지 못할 시 금호그룹이 그 가격에 투자자들의 주식을 모두 매입해야 함, 망했어요) 채무불이행에 의한 부도를 맞을 위기에서 2009년 12월, 금호건설과 금호타이어는 워크아웃을 신청하고,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도 자율협약에 돌입하게 된다.

결국 대우건설을 인수해서 10대 재벌 안에 들겠다는 박삼구의 야망은 새우가 고래를 먹는 정도의 무리수가 아니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완전히 폭망해서, 채권단에게 박삼구의 지분까지 뺏기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6. 금호석유화학그룹 계열 분리 (2011~2015년)

파일:금호_형제의 난.jpg
금호 형제의 난 일지
채권단 자율협약에 돌입할 당시만 해도 금호석유화학은 차입금이 2조 2,307억원, 부채비율은 498%에 달했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은 업계 호황 하드캐리로 2010년과 2011년 역대 최고의 실적을 내고, 역대 최고 신용등급인 A-를 달성했으며, 2012년 11월 기준 부채비율을 189%까지 끌어내리는 등 경영정상화를 준수하게 달성하며 2012년 말 자율협약을 졸업했다. 2011년에는 독자적인 비전인 ‘VISION 2020’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분리 경영을 이어갔으나 공정거래위원회 기준으로는 계속 금호아시아나그룹 소속이었다. 2015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금호석유화학 계열분리 소송에서 승소하며 금호석유화학은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법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되었다.[21]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공정위를 상대로 '승소'한 것이 소송과는 아무 관련 없는 금호석유화학에게는 호재로, 승소한 금호아시아나에게는 부채가 늘어난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어찌됐건 박찬구 측에서는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 같은 일을 벌여 회사를 이 지경으로 만든 형과 거리를 두는 데 성공해 한숨 돌리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특히 이 그룹은 코로나19 수혜를 톡톡히 누렸던지라 이 시기 창립 이래 최대의 이익을 내어 자산과 현금이 풍부한 구성을 갖춘 건실한 그룹으로 자리매김 하였고, 이 때 때마침 매물로 나왔던 금호리조트도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인수하였다.

7. 짧은 전성기와 몰락 (매각 과정)

파일:대우건설 로고(2007-2010).svg 파일:대한통운 로고(2008-2011).jpg 파일:금호속리산고속 로고.svg
금호아시아나 시절 대우건설, 대한통운, 속리산고속의 CI.
금호의 고유 폰트와 붉은 윙 로고를 사용했다.[22]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5년 9월 4일 코오롱고속을 인수하였고, 2006년 건설업계의 강호 대우건설을 6조 4,000억에 인수하는 것을 시작으로[23] 2008년에는 충청북도 연고의 속리산고속과 물류 운송의 강자 대한통운까지 4조 2,000억원에 인수하였다. 이를 통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한진그룹을 제치고 재계서열 7위까지 뛰어올랐다. 이로 인해 박삼구 회장은 승부사, 마이더스의 손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파일:대우건설 신문광고 스타일 편.jpg
파일:1207101980.jpg
하지만 10조원이 넘는 이 무리한 M&A들이 결국은 그룹의 몰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일단 인수 가격부터가 시장에서 평가한 적정 가격보다 너무 비싸게 사왔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기업의 30% 정도의 지분만으로도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데, 금호아시아나는 70%가 넘는 정부 지분 전체를 굳이 다 떠안았다. 즉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10조원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도 인수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기 위해 필요한 총 자금은 무려 10조 6,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는데, 이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었다. 사실상 지주회사인 금호산업의 당시 자산규모가 3조가 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 8조원을 차입을 통해 해결했고, 이 빚에서 나오는 이자만 해도 큰 부담이었다. 특히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금호산업은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조원에 가까운 차입을 했는데, 금호산업에서 나오는 영업 이익은 2,000억원이 채 되지 않았다. 결국 이로 인한 유동성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조정 즉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멀쩡한 우량 계열사들을 연이어 팔아야 했다.[24] 이러한 잇따른 계열사 매각으로 그룹의 현금 흐름은 더욱 줄어들었고, 그룹 경쟁력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 무리한 인수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보유현금이 많았던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내오기 위해서 배당·유상감자·보증·대여 뿐만 아니라 대우건설의 자산을 무리하게 투입하였고, 몇몇 계열사의 지분을 대한통운에 비싼 값에 매각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뒷탈이 난다.

특히 대우건설 인수 건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던 무리한 M&A였다. 박삼구 회장은 동생 박찬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우건설을 인수했을 뿐만 아니라 인수 자금이 없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사모펀드, 연기금 같은 재무적 투자자들을 동원해 이를 해결했다. 당시 박삼구는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풋백옵션'을 제시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감행했다. 2009년 말까지 대우건설의 평균 주가가 34,000원에 못 미치면 투자자들에게 이 주가를 기준으로 주식을 되사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 34,000원은 인수 당시 시세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건설주가가 폭등할 것이라 생각한 박삼구의 예상과 정반대로 건설 경기가 침체되면서 대우건설 주가가 곤두박칠 쳤고 이에 재무적 투자자들이 박삼구가 약속한 풋백옵션을 행사했는데, 풋백옵션 행사액과 대우건설 주가의 시가 차이는 배 이상이었고, 이 풋백옵션 행사 액수만 무려 4조 2,000억원에 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4조원이 넘는 풋백옵션 행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대우건설을 3년만에 재매각했고 한국산업은행에서 이를 재인수하였다.

대우건설을 팔고도 자금이 모자라서 현금이 잘 들어오던 대한통운 역시 팔아야 할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고, 결국 CJ그룹대한통운을 매각했다. 이후로도 빚을 갚기 위해 계속해서 계열사들을 하나하나씩 팔아야 했다.

제일 먼저 렌터카시장 부동의 1위였던 금호렌터카가 있었다. 당시 렌터카 업계 시장점유율 20%로 1위인 금호렌터카와 5%로 3위인 대한통운 렌터카사업부는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 목적이었다면 그냥 대등합병하면 될 것을 굳이 기존 금호렌터카 법인에서 유일한 사업부인 렌터카 사업부를 대한통운에서 인수하는 식으로 해서 3,073억원의 현금이 지출되었고,@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여 6,960억원을 추가지출하였다.@ 이후 껍데기만 남은 기존 금호렌터카 법인(금호알에이시)은 회사채투자자들에게 소송을 당했고,@ 1,000억원을 조기상환했다.@ 한편, 통합 금호렌터카 신법인은 KT에 3,000억에 매각되어@ KT렌탈로 또 사업부가 흡수합병되었고[25] KT금호렌터카라는 브랜드로 영업하였는데, 이를 다시 1조 200억원에 롯데그룹에서 인수하여 브랜드명이 롯데렌터카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금호산업 터미널부문을 떼내 금호터미널이라는 신설법인을 일부러 만들어서 대한통운에 2190억원에 팔았는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한통운이 CJ그룹에 팔리면 그 자회사인 금호터미널도 덩달아 팔려, 그룹의 시조인 금호고속까지 흔들릴 판이라 대한통운을 매각하기 전에 금호터미널은 재인수하였다. 그러자 터미널 부지를 활용한 유통업 확장을 노리던 롯데그룹은 대한통운 매각전에서 금호터미널이 빠지자 아예 발을 빼버렸고[26] 순수하게 물류사업에만 관심있던 포스코 등 다른 원매자들은 인수가격이 하락하는 효과가 있어 / 롯데와 경쟁관계인 신세계는 롯데가 발목잡힌 상황을 환영하였다.

아스공항(현 아시아나에어포트)(240억원), 아시아나공항개발(550억원) 역시 물류 산업을 통합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명분 하에, 실상은 대한통운의 현금을 빼오기 위해 팔았다. 그런데 이 회사들은 아시아나항공의 지상조업사들로 항공사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회사들이라 애초에 팔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금호터미널과 마찬가지로 대한통운을 매각하면서 되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2008년 대한통운을 인수했을 때 아시아나항공과 대우건설이 반반씩 지분을 인수하였는데, 대한통운 매각 당시에는 이미 대우건설을 매각한 이후였기 때문에 이미 결별한 대우건설이 대한통운의 1대 주주자격으로, 이 3개회사 주식에 대해서, 샀던 가격 이하로는 못 판다고 나와서 결국 더 비싸게 주고(금호터미널 2,190억원→2,555억원, 아시아나공항개발 550억원→677억원, 아스공항 240억원→383억원) 사와야 했다.@@

그 외에, 전국에 4개소의 철도와 도로운송을 연계한 복합화물물류터미널을 운영하는 한국복합물류라는 회사도 대한통운에 1,652억원에 팔았는데,@ 이 회사는 대한통운과 같이 CJ그룹으로 넘어갔다. 또한 금호생명은 한국산업은행에서 인수하여 KDB생명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산업은행 민영화정책으로 산은금융그룹의 계열사가 되어 안전히 운영하나 싶었는데, 박근혜 정부의 민영화 취소결정과 이후 산은의 몸집줄이기/공적자금회수정책으로 2019년부터 매각 추진중이다.

금호종합금융은 우리금융지주에서 인수하여 우리종합금융이 되었다가 2024년 한국포스증권과 합병하여 우리투자증권이 되었다.

또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주)의 최대 주주였다. 경기가 좋을 때만 해도 계열 건설사에서 복합 터미널로 재개발 한다고 떠들었었는데, 보유 지분 1,486,236주(지분율 38.74%)전부를 사모 펀드 SEBT투자에 2,000억원에 매각하였다.@ 결국 당시 알짜 매장이었던 인천점이 위치하였던 인천종합터미널 부지를 롯데에 빼앗긴 신세계그룹에서 강남점마저 뺏길까봐 우려하여 센트럴시티에 이어 인수하였는데, 매각가보다 200억이 오른 2,200억에 인수하였다.

결국 대한통운과 대우건설을 매각하면서 어찌저찌 상황이 수습되나 했으나, 이번에는 금호고속[27]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서 그룹을 재건하겠다고 하고 있다.[28] 사실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박삼구 회장과 그 장남 박세창 사장이 차근차근 은행관리로 넘어간 회사들을 하나씩 인수해서, 그걸 담보로 돈 빌려서, 다시 다른 계열사를 인수하고, 다시 담보 잡혀서 돈 빌려서,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의 반복이다. 그 와중에 땡빚을 낼 담보가치를 올리기 위해, 우량 비상장 계열사는 자산가치평가를 박하게 하여 헐값에 오너지분율이 높은 회사에 넘기기도 하고,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납품사업권을 담보로 금호홀딩스에 돈을 빌려준 기내식 공급업체에게 기내식공급을 맡긴 게 잘못되어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분식회계가 적발되어 감사의견 한정을 받아 주식이 거래정지가 되기도 하는 등 회사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앞세운 오너 일가의 욕심때문에 막대한 액수의 금융비용 및 제세금을 지출하여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투자자와 고객들에게도 광범위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오너 3세들이 대우건설 인수로 인한 손해를 벌충하기 위하여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 기업 지분을 계열사에 떠넘기고 그 매각 대금으로 우량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엽기적인 행태가 드러나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금호가 오너 3세들, 부실 계열사에 손실 떠넘겼다.

8. 박삼구 회장의 사퇴 및 그룹의 사실상 해체 (2019년~)

(박삼구 회장의 아시아나항공 매각 관련 사내게시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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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시아나항공 임직원 여러분,

오늘 그룹 비상경영위원회와 금호산업 이사회는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번 회계 사태 이후 모든 책임을 지고 제가 대표이사에서 물러났고 회사의 자구안이 채권단에 제출되었습니다만,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그룹 비상경영위원회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키로 하였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아시아나항공 임직원 여러분께서 받을 충격과 혼란을 생각하면, 그 간 그룹을 이끌어왔던 저로서는 참으로 면목 없고 민망한 마음입니다. 다만 이 결정이 지금 회사가 처한 어려움을 현명하게 타개해 나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에 대해 임직원 여러분의 동의와 혜량을 구하고자 합니다.


아시아나 임직원 여러분,

1988년 아시아나항공 설립을 위해 사업계획을 준비하고 2월 17일 아시아나항공을 창립한 후 여러분들과 같이 했던 31년간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임직원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신생 항공사로서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경쟁사와의 치열한 노선경쟁을 펼치며 새 비행기를 도입하던 일들,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한 비상 상황들. 그리고 우리는 IMF를 비롯하여 9.11테러, 사스와 메르스,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외부적 시련에 맞서야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여러분들과 땀 흘렸던 빛나는 순간과 고독한 결정을 해야 했던 불면의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특히 IMF 때 고생시켰던 임직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좁은 Cockpit에서 안전운항을 위해 애써 온 운항승무원들,

고객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땀 흘린 캐빈승무원들,

혹서기 혹한기를 가리지 않고 안전 정비에 몰두해 온 정비사들,

한 장의 티켓이라도 더 팔기 위해 국내외를 누비던 영업 직원들,

전 세계 공항에서 최고의 탑승수속 서비스를 제공하며 정시성을 위해 힘써 온 공항직원들과 항공 화물을 책임지던 화물 직원들,

현장의 오퍼레이션을 지원하면서 회사의 미래를 설계해 온 일반직 직원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에게 고마웠다는 말씀 전합니다. 마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처럼 아시아나인 모두가 자기 파트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펼쳤고 아시아나만의 고유한 하모니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나는 전 세계를 누비는 글로벌 항공사로 성장할 수 있었고, 세계 최대 항공 동맹체인 스타얼라이언스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세계 유수의 서비스 평가기관으로부터 ‘올해의 항공사 상’을 석권할 수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임직원 모두가 합심한 결과입니다.

2004년에는 그룹 명칭도 금호그룹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변경할 만큼 아시아나는 늘 그룹의 자랑이었고 주력이었습니다. 그룹을 대표하는 브랜드였습니다. 아시아나라는 브랜드에는 저의 40대와 50대 60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듯이 제게도 아시아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유능한 임직원과 함께 미래와 희망을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아시아나 임직원 여러분,

이제 저는 아시아나를 떠나보냅니다. 여러분들은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만, 고생한 시간을 보내게 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시아나항공이 조속히 안정을 찾고 더 나아가 변함없이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발전해 나가길 돕고 응원하겠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아시아나의 아름다운 비행을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제 마음은 언제나 아시아나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아시아나의 한 사람이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2019. 4. 15.

朴 三 求}}}

결국 무리한 인수와 매각 등의 경영 악화로 2019년 3월 28일 박삼구 회장이 사퇴하고 경영권마저 포기하였으며 2019년 4월 15일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결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이 매각될 경우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해체되고, 잔류하는 기업 중 가장 큰 규모의 금호건설은 중견기업으로 강등되게 된다.[29] 한때 재계서열 7위까지 올랐던 대기업이 이젠 자산이 5조가 안되는 중견기업으로 몰락하는 것이다. 참고로 대우건설 인수실패 후 계열사를 분리시켜 독립한 동생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그룹은 시장의 호평에 힘입어 준대기업으로 정착하며, 두 그룹의 입장이 뒤집히게 되었다.

아시아나항공과 항공관련 계열사들이 모조리 매각된다면 금호그룹에 남는 것은 사실상 금호고속금호건설 단 둘뿐인 셈이다.

2019년 연말부터 전 세계와 항공업계를 뒤엎은 초대형 악재가 터진 시점에서 당시의 금호그룹 입장에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위험이 닥치기 바로 직전에 HDC 현대산업개발에 나름대로 제값 받고 넘길 수 있었기에 나름 다행인 듯 했으나, 2020년 4월 29일 현산은 아시아나 인수를 무기한 연기하였고 2020년 9월 11일에 인수가 무산되며 상황은 다시 오리무중이 됐다.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이 불발되면서 매각 대금으로 유동성을 해결하려고 했던 금호고속이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고 산업은행의 주도하에 금호고속은 채권단 관리 체제로 돌입했다. 산업은행이 투입한 지원자금으로 당장 급한 불은 끈 상태이지만 추후 금호고속 마저 매각되거나 부도를 맞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구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2021년 3월 31일, 금호리조트금호석유화학에 매각했으며 동년 9월 7일엔 금호속리산고속금호고속관광 서울법인을 동부고속-파이오니아-휘밸류-애스턴(코리아와이드)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더불어 그룹내 가장 큰 부동산 자산인 광주 유스퀘어도 개발후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히면서 정말 몰락에 가까운 상황에 처했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20년 12월 8일 그룹 내 컨트롤타워인 전략경영실을 해체했다. 이 것은 사실상 금호그룹을 해체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결정인데, 이미 계열사들을 총괄 경영할 오너 일가들이 경영진 자리에서 물러섰고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한 항공부문을 전부 매각하면 그룹 내에는 사실상 금호고속금호건설 둘만 남게되어 기업 규모도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추락하기 때문에 그룹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금호고속과 금호건설은 각자 경영으로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는 그룹과 두 회사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30] 금호그룹은 이후 지금까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금호그룹이 대한통운을 인수하기 위해 부족한 자금력에 대우건설을 끌어들여 결국 과거 대우그룹의 상징과 같았던 대우센터빌딩(현 서울스퀘어)을 매각하게 되어 대우건설의 자산가치도 크게 떨어지게 만드는 결과만 낳았다.

여담으로, 한때 재계 서열 1위였던 대기업이었다가, 현재는 중견기업으로 추락한 현대그룹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다만 현대그룹은 계열사 분리 독립 이전까지 회사 경영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고, 창업주 자녀들의 경영권 분쟁과 그로 인한 핵심 계열사들이 분사하여 그룹이 쪼그라든 것이고,[31] 이쪽은 그냥 회장 및 경영진이 오판과 방만경영을 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매각될 위기에 처했지만 그나마 건설과 고속만 남긴 것 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2024년에는 금호고속을 비롯하여 금호아시아나그룹 전체로 놓고 봐도 가장 크고 가치있는 부동산 자산인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 마저도 광주신세계에 팔아넘기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광주신세계는 지난 30여 년간 금호고속으로부터 백화점 건물을 빌려서 영업을 해오던 세입자인데, 그 세입자한테 금호고속의 둥지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 여파로 금호문화재단이 운영하던 금호·동산아트홀, 금호갤러리 등도 문을 닫게 되었고 광주에서 금호아시아나의 흔적이 한방에 사라지게 되었다.

9. 무리한 M&A가 없었더라면?

박삼구 항목에도 기재되어 있듯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포트폴리오는 정말 망할래야 망하기 힘든 구조였다. 광복 후 중고 택시 2대로 시작하여 고속버스, 건설업, 타이어, 생명보험, 렌터카, 석유화학, 대형 항공사,종합금융회사등 꾸준히 이익이 들어오는 계열사와 사내보유금을 보유한 재벌이 보기 힘들 정도로 안정적인 그룹으로 자리 잡았다.[32] 그래서 금호그룹은 과거 오일 쇼크 및 IMF 등 굵직한 위기에도 비교적 탄탄한 자금력 덕에 충분히 극복하였었지만 문제는 박정구 회장의 별세 후 박삼구가 회장에 취임되면서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 등 두 건의 M&A에 무려 1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거액을 계열사 자금 + 교환사채 + 인수금융 등을 끌어모아 마련했고 이는 그룹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두 건의 M&A가 없었더라면, 혹은 대우건설 이전에 인수를 추진했던 범양상선 내지 대한통운만 인수했더라면 금호아시아나는 라이벌인 한진과 엎치락 뒷치락 하는 정도의 재계서열 순위에 등극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아시아나항공이 규모면에서 대한항공에 비해 열세였을지라도 건설, 타이어, 석유화학 등 분야가 다른 사업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만큼 무리한 인수합병이 없었더라도 장기적으로 충분히 한진을 능가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33] 더욱이 대한통운은 한진택배 따위 보단 훨씬 우월한 규모에 재무구조도 우량했으니 대우건설 인수는 접고 대한통운만 인수했다면 육상·항만 물류 기업을 갖춤으로써 주력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항공 운송까지 결합한 종합 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범양상선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면 지금의 팬오션처럼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해운 업체 빅3로 성장하여 어쩌면 다른 계열사보다 이익 창출을 확대해 항공 부문과 더불어 핵심 계열사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만약 이런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면 금호아시아나는 한국판 에버그린 그룹이 됐을 수도 있다. 또한 대우건설 인수할 돈으로 주력 계열사의 R&D 비용으로 투자했더라도 중견 기업으로의 추락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박삼구의 경영권 욕심으로 형제의 난은 언젠가 발발했을 일이였겠지만, 지금과 같이 박찬구 회장이 이끄는 석유화학 부분이 계열분리 되었을지언정 금호아시아나는 비록 재계서열 순위에서 하락했을지라도 남아있는 계열사를 가지고도 충분히 성장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금호타이어가 중국으로 넘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으로 흡수소멸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다른 만약이란 가설이지만서도, 형인 박삼구 전 회장이 한발 양보하여 LG (구씨일가)와 GS (허씨일가)의 사례처럼 경영권 분쟁 없이 박삼구-박찬구 형제 간의 원만한 합의 하에 서로 분할되었어도 그룹 해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그룹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골든 타임이 있었음에도 박삼구의 연속적 실책의 댓가로 천문학적인 빚을 갚기 위해 핵심 계열사들과 사옥까지 팔았음에도 버티지 못하고 계열사 두개만 남는 결과를 낳았으니[34] 어찌보면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망하기 어려운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췄음에도 오너의 탐욕과 그걸 막지 못해 몰락하도록 바라본 경영진의 무능함이 잘 드러나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박삼구 본인도 장기적 성장을 위해 2건의 M&A를 단행했겠지만 전반적인 시장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전망하여 빚을 내면서까지 추진한 순간부터 회사의 운명이 결정된 셈이다. 그 만큼 금호아시아나의 흥망성쇠의 포인트는 '오너리스크' 단 한가지 였고, 경영계에서 반면교사의 대표적 예시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1] 이 때문인지 전라도 사람들이 보수진영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도, 전라도를 연고로 하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보수진영과의 인연이 깊어 보수정권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물론 지역 특성상 민주당 진영 인사들과도 친한 편이다.[2] 1969년 코리아나관광진흥이 미국 그레이하운드와 50:50 합작으로 설립한 고속버스 업체. 1978년에 중앙고속에 인수되었다.[3] 광주고속도 벤츠 고속버스 등 좋은 차량도 도입했다. 하지만 타사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저렴한 저성능의 차량도 함께 많이 굴렸다. 당시 일부 차종은 저마력으로 인해 고속버스로서 부적합하다고 여겨졌지만 당시 도로사정이 썩 좋지 않았던 전라도 내 노선에서 굴리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또 서울로 가는 노선에는 가급적 좋은 차량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리 티가 나지는 않았다. 벤츠 고속버스의 경우 독일제를 직수입하던 일부 타사와 달리 광주고속은 현대자동차가 국내에서 면허 생산하던 차량들을 많이 구매했다. ※ 물론 면허 생산이라고는 하나,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관계로, 주요 부품은 벤츠의 것을 가져다 써서 조립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일본 히노 등에서 한국 협력업체로(예, 한진고속 등) 파견 온 일본인 기술자들이 (처분 예정인) 독일제 부품들을 확보하고자 금호의 현장 관리자들을 접대하는 풍경이 나타났던 것. 아무튼 광주고속이 급성장하게 되고, 1980년대에는(초반~중반) 대우그룹이 독일 만(MAN)과의 기술협약으로 출시한 "명품" 만(MAN) 엔진이, 운수업을 하는 국내 대형 차종에 속속 도입되면서 타사와 차이가 사실상 없어졌다.[4] 1990년대 들어 고속도로 정비 후 1시간 거리로 간주되고 있다.[5] 대우중공업에서 독일 MAN 社로부터 라이선스를 얻어 생산한 엔진. 힘도 좋고 잔고장이 적어서, 이 엔진을 단 새한-대우 버스가 출시된 후부터, 정비 비용 및 시간을 절감한 운수회사들이 비로소 제대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5공화국 출범 후에는, 정부 방침으로 버스 엔진이 MAN엔진으로 통일되기에 이른다.[6] 아시아나항공의 마법사식 기재운용의 기업문화가 이 시점에 싹트고 있었다. 이 무렵의 중앙고속은 제휴를 맺은 미국 그레이하운드 사의 영향으로 회사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나름 준수하고자 노력하는 회사였다고 한다. 노동자 인권은 개나 먹는 거인 줄 알았던 시절에 보기 힘든 훈훈한 풍경이었지만 이를 본 금호고속의 어느 임원은 "니들은 우리에게 안 되겠구나."라 말하며 일종의 공략 지점 및 활로를 찾았다는 후문. 이러한 분위기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인지 중앙고속은 여전히 괜찮은 복지와 직원처우를 자랑하는데 비해 금호는 썩 좋지 않다.[7] 호남 노선 시장 2위[8] 동부고속, 한진그룹과 더불어 운수 업체가 대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다만 버스 회사 경영 노하우나 실적은 금호 쪽이 더 나았기에, 한때 모 한진그룹 임원이 "비행기 1대 값도 안 되는 것들한테 (버스 회사 실적에서)뒤지고 있다"며 한탄한 적도 있다는 후문이다.[9] 건설은 나중에 장남 박성용이 회장에 취임한 80년대 때 개선되기 시작했고, 90년대 건설 호황기로 접어들면서 성과를 내게 되었다.[10] 이런 식으로 후계를 한명으로 찍지 않고 2세대들이 형제경영하는 방식은 범두산가에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도 범금호가처럼 밀양 박씨다. 버스 차장이 자녀에게 표를 안 받고 승차 시켰단 소식이 들어가면 자식을 호되게 야단쳤다는 일화가 있다.[11] 참고로 아시아나항공의 첫 국제선 취항은 1990년 1월 10일 서울(김포)-도쿄(나리타) 노선 취항이다.[12] 해태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서 몇차례 부도를 유예시켜 주는 특혜까지 받았음에도 워낙 부실의 규모가 커서 결국 망했다.[13] 즉, 임세령은 박인천의 외손녀, 박삼구, 박찬구의 조카가 된다.[14] 박삼구 회장이 금호그룹의 4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애착을 가진 아시아나항공을 더욱 부각하기 위한 의도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시아나항공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졌다.[15] 이때 형들인 박성용, 박정구가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최연장자는 박삼구 본인이니까 사실상 본인만을 위한 법이다.[16] 류현정, 공동경영합의서와 금호家 '형제의 난', 조선비즈, 110623[17] 여담으로 금호아시아나에서 오래 근무한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로고 교체 이후 그룹이 무너짐에 따라 이 윙로고에 대해 대단히 탐탁찮게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윙로고 선포 이후로 급격한 성장을 하긴 했으나, 잠깐이였을 뿐 사실상 그룹해체의 시발점이 되어 버린 것과 반대로 예전 K로고 시절에는 1988년 아시아나항공 출범을 시작으로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으로 순탄하게 성장하였기에 과거의 로고를 그리워하는 분위기다. 금호타이어도 금호아시아나의 품을 떠난 후 예전의 로고를 본뜬 상표를 출원한 바 있다.[18] 당시 국내 일반기업 M&A사상 최대 규모였다. 심지어 당시 대우건설 인수 적정가를 3조원 정도로 예측하고 있었는데 박삼구가 엄청나게 지른 것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사단이 발생한다. 물론 당시 대우건설 인수전 자체가 과열 양상을 보이기는 했다. 총 5개사가 인수전에 뛰어들었는데, 두산 6조 4,000억을 비롯하여 프라임 6조 1,000억, 유진 6조, 삼환 5조 5,000억 등 참여한 5개사가 모두 말도 안되는 가격을 써냈기 때문이다. 당시 경영권 프리미엄 및 인수전 열기를 고려해도 5조는 넘기기 힘들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금호가 조금만 작은 금액을 썼어도 승자의 저주는 두산을 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15년 후인 2021년 대우건설은 중흥건설에 2조원에 재매각되었다.[19] 참고로 박삼구 회장은 3년 안에 주가가 40,000원까지 갈거라 믿었다고 한다.[20] 무엇보다 박삼구의 도를 넘은 갑질에 박찬구가 분개하여 항의하자 대판 싸운 적도 있었다.[21] 류형열, 대법원, “금호아시아나와 금호석유화학은 다른 기업 집단”[22] 2006년 새 CI 선포 이후 2013년, 2017년 총 두번의 CI 개정으로 레터링 색상과 윙로고 크기 등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23] 대우건설 인수 이전인 2004년엔 범양상선 (현 팬오션)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STX그룹에 밀려 인수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24] 가정이지만, 무리하게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모두 인수하지 않고 둘 중 하나만 인수하여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면 한진그룹과 본격 물류기업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거나 한 발 앞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우건설은 우리나라 건설업의 Big 5로, 대우건설을 보유함으로 금호그룹은 삼성, 현대, 대림, GS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막강한 초대형 건설사를 발판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금호산업 건설사업부(현 금호건설) 역시 국내에서는 수준급의 대형 건설사였지만, 기업 규모와 기술력, 국내외 인지도는 대우건설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한통운 또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물류회사로, 택배사업 이전부터 기업물류부문에서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항공물류와 연계한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오히려 기존 사업과의 연계를 감안한다면 비주력 사업인 건설 보다는 물류 쪽에 투자하는 것이 사업 포트폴리오 상으로 더 유리했다.[25] 이후 금호렌터카(2대)는 '금호렌터카글로벌'이란 청산법인이 됐다.[26] 그대신 현대택배를 인수해 롯데택배가 되었다.[27] 당시 금호산업 고속사업부.[28]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하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시초이자 상징인 금호고속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라서 내부, 외부 양쪽에서 논란이 있다.[29] 애초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후보군이었던 신세계그룹은 정작 금호고속 인수를 원했던 모양. 한화그룹은 아시아나항공보다 정비공장이 있는 대한항공 인수를 원했다고 하나.[30] 다만 무리한 인수합병이란 평가는 사실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다. 인수 당시의 경제는 전에 없는 호황이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31] 그룹의 모태인 현대그룹의 위상이 축소된 것일 뿐 범현대가에 속한 그룹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중 하나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현대자동차현대건설을 생각해보자. 둘 다 각 분야에서 최선두주자이다.[32] 항공, 해운, 물류, 중공업, 고속, 금융, 호텔업이 전부였던 전성기 시절의 한진그룹보다 사업 포트폴리오상 금호그룹이 더 유리했었다.[33] 게다가 한진도 금호와 다르지 않게 형제간 지분 다툼과 경영 실책이 있어 한진해운, 한진중공업을 떠나 보냈고 알짜 정유사 지분 매각에 호텔업도 부진에 빠졌기에 기본만 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34] 금호고속도 채권단 관리 체제에 놓여있으니 사실상 금호건설 단 하나밖에 안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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