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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근 감독이 지도자로 올라서기 전까지의 경력을 정리한 문서. 김성근 감독의 오랜 지도자 시절에 비해 현역 경력은 생각 외로 짧은 편이다. 그러나 1970-1980년대 한국 야구에 비해 압도적인 선진 야구를 구가했던 일본 야구를 접한 특성상, 이러한 경력이 이후 빠른 속도로 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2. 학창 시절
2.1. 일본에서의 초기 생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으나 상술한 대로 일본 국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재일교포로서 차별을 받았고 그 때문에 노력했다는 내용이 언론이나 매체에 자주 등장했지만,[1] 정작 김성근 스스로는 재일교포라서 차별받은 적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싸움을 잘해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었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에 있었으며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2] 한 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주도적인, 이른바 인싸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차별받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 항상 만취 상태로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야 했던 넓은 기차 선로에서 그만 열차에 치이는 변을 당했고 시신도 수습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일본 교토 가쓰라 고등학교 시절 |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다. 야구 실력은 출중했지만 가난과 재일교포로 차별받았기 때문에 명문고 입학이 좌절되었다고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었고, 이러한 내용은 역시 노리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며 김성근을 차별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김성근 본인은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차별보다는 순전히 실력 문제였다고 스스로 인터뷰한 바 있다.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한다. 심지어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다.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할 정도였다. 또 고교 시절 김성근은 항상 야구만을 생각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학창 시절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을 했다고 한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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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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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김성근은 처음으로 투수를 하게 되었다. 본래 우익수였으나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나타났다.
2.2.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대학 시절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김성근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재일 대한야구협회에서 기획하였는데, 이 당시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가쓰라고교는 사실 별볼일 없는 팀이었지만, 김성근은 3학년 때 예선에서 나름 빼어난 활약을 하면서 여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그러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김성근 관련 서적이나 기사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최정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비주류 선수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정확히 서술하면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제외되었고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없는 사람만 차출되었다. 때문에 야구 명문고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김성근 옹호자들은 장훈의 경우를 들며 반박하지만, 장훈은 오사카 나니와 상고의 4번타자였으나 나니와 상고 폭력 사태 가담 누명을 쓰고 고시엔 출전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 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당시 재일교포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간 재일교포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가족을 살린 선택이 된 셈.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3]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언어불통의 고충을 겪으며 더욱 야구에 매진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성근은 여러 여학생들과 러브라인을 만들기도 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나.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
3. 선수 시절
3.1. 일본 사회인 야구 시절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김성근은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다.여기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는데,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하였고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거짓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4]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건 프로 차원의 이야기이고, 사회인 야구 수준에서는 분명히 차별이 존재했다. 즉 전체를 씹어먹을 정도의 선수라면 당연히 차별에서 열외였지만, 사회인 야구단 정도에서 어차피 충분한 인원이 있는 판에 굳이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실력이 애매한 재일교포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즉 차별을 받았던 것도 맞지만 차별을 넘어설 정도의 실력이 없었던 것도 맞았다고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앞서 본인 스스로 그닥 잘하는 선수는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 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한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5],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즉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온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이다.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 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는다. 즉 김성근이 이 시기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인 야구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여튼 프로 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던 것은 사실. 그리고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다.
참고로 김성근 안티들은 김성근이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운 바가 있다.#
하지만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 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만 해도 일본 프로팀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였고, OB에서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자기포장도 뭣도 아니고 팩트이다.
3.2. 한국 실업 야구 진출
1962년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당시 모습 |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단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 야구단 교통부[6]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 야구 리그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다.
실업 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 레이스(실업 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 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과 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김성근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7]와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8]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 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어깨 문제로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현역 시절에는 좌완 정통파 투수였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 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9] 동시에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건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기는 하다.[10]
즉, 나름 싱커는 개발된 지 10년 정도 된 최신 변화구였기에 김성근을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가져온 선진 문물인데, 당시 지금같은 방송 중계나 기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어느 경기에서 뭘 던졌네 하는 서로 간의 구두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즉 김성근 본인이 경기 도중 싱커를 구사했는데 다른 투수가 그걸 먼저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최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진짜 처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최초로 싱커를 던진 몇 명의 투수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는 맞다고 볼 수 있다.
3.3. 한국으로의 영주 귀국
1964년 12월, 김성근은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 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 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다만 여기서 논란이 나오게 되는데,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달 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을 만나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김성근이 영주 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 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 귀국을 결심한지 두달 여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김성근이 영주 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 국교 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또 보자면,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운동선수가 시사 등에 어두운 것은 일종의 클리셰 수준인데 그 시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기본 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도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즉,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출입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 시기였다.
즉 말이 좋아 국교 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다. 해외여행 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국교 정상화 이후에조차도 정말 만나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1]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 - #[2] 1940년대생인데 프로필상 키가 현재로서도 장신인 180cm다. 물론 덩치가 크다고 차별이나 괴롭힘을 안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학생 김성근에게 함부로 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 압도적인 피지컬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인 남자 평균 키가 160 초중반이었다.[3]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서 더 심하지만 사실 이전에도 한국어 발음은 부정확했다. NHK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을 때 일본어를 더 유창하게 쓰기도 했다.[4] 태어날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외국인 선수(장훈이 태어날 당시엔 한국도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도 일본인 선수로 대우하도록 바꿨다.[5] 팀에 따라 오히려 활동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사회인 클럽팀이 본격적인 프로진출 교두보가 되고 컨소시엄팀까지 등장한 이후 이야기지 김성근 시절은 그런 거 없었고 100% 월급을 받으면서 선수생활 했다.[6] 현 국토교통부의 전신.[7] 나중에는 전등을 키는 것조차 어깨가 안움직여서 힘들었다고 한다.[8] 당시 투수들은 경기 후 아이싱은커녕 오히려 뜨거운 걸 어깨에 대고 있었다고 한다.[9] 참고로 들고 온 사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속 사진이라고 한다.[10] 박영길은 재일동포 출신인 신용균이 최초로 싱커를 던졌다고 증언했고, 김영덕은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 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진 인물로 기록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신용균이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졌으며, 김영덕 본인은 싱커를 처음으로 던졌다고 말했다. 일단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싱커 자체가 없었다. 싱커를 처음으로 던진 투수는 47년 데뷔한 커트 시몬스인데, 이 선수의 본격적인 커리어는 한국전쟁 이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