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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54:08

김성근/야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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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본적 성향
2.1. 승리지상주의, 윈나우 성향2.2. 제왕적 감독 야구: '야구는 감독이 한다'
2.2.1. 비판론 : 메이저리그의 대세, 프런트 야구2.2.2. 옹호론 : KBO는 프런트 야구를 할 수 있는가?
2.3. 일본 지향적인 야구관
3. 선수단 육성 및 교육
3.1. 지옥훈련
3.1.1. 김성근식 훈련에 관한 말말말3.1.2. 긍정적 효과 : 수비 강화3.1.3. 복합적 효과 : 특타3.1.4. 부정적 효과
3.1.4.1. 강훈련에 따른 선수들의 부상3.1.4.2. 경기 뒤 숨겨진 또다른 혹사 : 특투3.1.4.3. 오대산 극기 훈련의 실상
3.2.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와 체중 감량 강요
3.2.1. 한화에서의 웨이트 트레이닝 실패 사례
3.3. 선수 육성의 허와 실
3.3.1. 선수 육성의 기준이란?3.3.2. 김성근 감독의 육성 사례 : 타자3.3.3. 김성근 감독의 육성 사례 : 투수
3.4. 팀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
4. 즉전감 중심의 선수 구성
4.1. 베테랑 선호 성향4.2. 선수 군입대 억제4.3. 베테랑 중심의 트레이드와 유망주 유출4.4. 노장들의 연금 보험 : 제 식구 데려오기4.5. 외국인 선수와의 관계
4.5.1. 외국인 선수 실패 사례
4.5.1.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4.5.1.2. LG 트윈스 시절4.5.1.3. SK 와이번스 시절4.5.1.4. 한화 이글스 시절
4.5.2. 외국인 선수 성공 사례4.5.3. 투수 중심의 외인 구성 주도
5. 경기 운영
5.1. 일본 스타일의 스몰볼, 작전 야구 선호 경향
5.1.1. 비판론
5.1.1.1. 메이저리그의 스몰볼5.1.1.2. 한화에서의 스몰볼의 실패
5.1.2. 옹호론5.1.3. 김성근 감독이 맡았던 팀들과 스몰볼 성향
5.1.3.1. OB 베어스 시절5.1.3.2. 삼성 라이온즈 시절5.1.3.3.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5.1.3.4. LG 트윈스 시절5.1.3.5. SK 와이번스 시절
5.2.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기 운영
5.2.1. 위장타순과 위장선발, 이중오더에서 플래툰까지5.2.2. 비판론5.2.3. 옹호론
5.3. 투수 운용의 대가, 하지만 그에 가려진 혹사의 그늘
5.3.1. 김성근 감독의 상징 : 벌떼야구5.3.2. 한화 감독 이전까지의 김성근 : 투수 운용의 신5.3.3. 한화 감독 시기의 김성근 : 시대에 뒤떨어진 감독5.3.4. 역대 최악의 투수 혹사5.3.5. 계산된 기용인가, 마구잡이식 기용인가5.3.6. 혹사에 대한 지속적인 부인과 잘못된 방향 찾기
5.4. 시즌 초반 중심의 운용 방식
6. 김성근 야구 비판 기사

1. 개요

김성근의 야구 스타일을 정리한 문서.
김성근 감독의 경기 스타일을 총정리한 기사
2015년 아주경제 (기획) 마음처럼 되지 않는 ‘김성근 야구’

2. 기본적 성향

2.1. 승리지상주의, 윈나우 성향

감독 김성근. 구단 모기업 부도로 존속 자체가 불투명했던 쌍방울을 제외하고는 모든 팀이 김 감독이 떠난 1~2년 후 암흑기를 맞아 선수단 리빌딩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당시 김 감독 야구의 '투수 총아'들은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쉽지 않은 야구 인생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 김성근 야구 '에이스' 총아인가 제물인가

김성근의 운영 스타일 면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전력을 효율적이고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윈나우로, 선수 보는 눈은 있는 편이지만 자체 운영 스타일은 리빌딩과는 거리가 있고 단기간의 승리를 위하여 미친듯이 달리는 방식의 감독이다. 김성근은 대한민국 야구계를 대표하는 윈나우 성향 감독으로, 성적을 내기 위해 구단을 최대한 쥐어짜내는 극단적인 윈나우 스타일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리빌딩 개념이 희박하던 과거에는 약팀을 맡아 성적을 냈다는 점에서 리빌딩형 감독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김성근이 나간 뒤 팀이 휘청대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야구적 관점에서는 틀린 지적이며, 오히려 현대야구적 관점에서는 올드스쿨 윈나우형 감독으로 분류된다.

사실 윈나우형 감독의 경우 김성근 시대 한참 뒤인 2023년 KBO 리그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1] 발전이 더딘 KBO 리그에서는 리빌딩형 감독[2]보다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나, 김성근이 스타일 상으로 비판받는 것은 이 과정에서 단순히 있는 전력을 최대한 쥐어짜는 수준을 넘어 선수가 망가지도록 혹사시키거나, 미래에 팀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유망주를 팔아서 1~2년 쓰다 버릴 노장을 영입하는 식의 운영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운용보다는 그날 하루, 길어봐야 며칠 단위로 최선을 다해서 성적을 내는 운용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성근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다"라는 말이 널리 퍼졌고, 김성근 감독이 빠져나간 팀은 그 후유증으로 팀이 황폐화되고 암흑기아 빠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처럼 김성근이 팀을 쥐어짜내고 나가면 그 후유증으로 팀이 황폐화되고 암흑기에 빠진다 하여, "김성근의 저주"라고 불리기도 한다.[3]

사실 김성근의 저주는 김성근의 능력적 문제가 아닌 스타일상의 문제에 가깝다. 김성근이 한화를 맡을 당시에는 이런 문제로 매우 큰 비판을 받았으나, 감독의 여러 가지 스타일에 대한 논의가 더 이루어지고 김성근이 한화를 떠난지 시간이 지나서 부정적 감정이 누그러진 현재는 단순한 김성근 야구의 승리지상주의 스타일의 결과로 보는 의견이 많아졌다. 당장 김성근이 언플로만 본인을 치장한 완전히 무능한 인물이었다면 벌떼야구라는 독특한 투수 운영을 하며 SK를 전성기로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며, 약팀을 맡아 전력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20년대 현재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카고 컵스, 텍사스 레인저스, NPB는 현재의 히로시마 카프나 닛폰햄 파이터즈, 한국은 2010년대 후반의 삼성 라이온즈 등 열심히 영끌해서 대권도전을 한 팀들은 화려한 전성기가 지나고 나면 암흑기가 찾아왔다.

김성근은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승리지상주의를 추구한 탓에 어느 팀에 가나 이러한 극단적으로 전력을 짜내는 윈나우형 감독이었고, 전성기가 화려했던 대신 나가고 난 후에 찾아오는 암흑기도 깊었다. 아직 한국이 리빌딩-윈나우-탱킹-리빌딩이라는 메이저리그식 장기적 팀 운영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이러한 암흑기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말들.

한때는 리빌딩을 못한다는 면에서 까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전력을 가지고도 성적을 못 내는 감독이 워낙에 많아서 전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성적을 내는 능력이 좋다는 점은 고평가받는다. 선수들 웰빙시킨다고 이 마지막 짜내기 부족으로 올스타급 타선으로 가을야구 턱걸이에만 그쳤던 로이스터 롯데, 짜낼 때 짜내지 못하고 세이버 야구한다고 리그 최강급 전력으로도 2020 단축 시즌 전까진 어이없게 우승을 헌납하기만 한 로버츠의 다저스, 마찬가지로 스타 군단을 가지고도 하던 대로 발야구를 시도해 전부 틀어막힌 오가타의 카프 등 분명 최고의 스쿼드를 지녔음에도 우승까지 이어지지 못한 팀은 차고 넘친다. 이 주어진 전력을 최대한으로 짜내는 힘이 마지막 방점을 찍어주는 것이다. 스트라스버그와 슈어저의 워싱턴처럼, 사파테의 호크스와 최동원의 롯데처럼 짜낼 땐 전력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내는 것도 중요한 감독의 능력이고 김성근은 분명 이 분야에서는 KBO 최고라고 불릴 만했다.

물론 무리하게 전력을 짜내다 보면 개중에 혹사당하는 선수, 망가지는 선수가 있다. 또 한화처럼 전력이 100% 올라오지 않아서 윈나우보다는 좀 더 육성이 필요한 팀에서도 이걸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만년 꼴찌를 어떻게든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은 쌍방울 돌격대 시절, 말이 필요없는 SK 시절을 보면 이 달려야 할 때 달려주는 능력이 얼마나 화려하게 빛을 발했는지 알 수 있다. 망했다는 한화에서조차 결국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 가지고 마지막까지 5위 싸움을 하는 등 확실히 절반은 성공하기도 했고.

2.2. 제왕적 감독 야구: '야구는 감독이 한다'

프런트는 견제만 하고, 전권을 감독한테 맡기는 조직이 돼야지. 내 뜻이 그래요. 내 성격이 그러니까. 전권을 주고 3년이면 3년 계약을 하고. 목적 달성을 했느냐 못했느냐로 판단하면 돼요. 2009년에 SK가 한국시리즈에서 투수 한 명 모자라서 기아한테 졌어요. 아니면 이겼다고. 그런데 그 다음에 투수 보강 안 해줬어요. 프런트 있으나 마나라고. 그랬다면 SK는 4연패, 5연패 했을 거에요. 한국야구 역사에 남을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건 생각 안하고 훈련비가 많다고 하잖아. 미국이나 일본에선 안 되면 당장 데려온다니까.
- 과거 발언

김성근은 프런트의 권한이 극대화된 현대야구와는 정반대의 스타일로 팀 운영을 하는 편으로, 감독 본인의 강력한 팀 운영 권한을 중시한다. 여기서의 운영은 단순한 경기 운영뿐만 아니라, 팀 재정 등 갖가지 상황에 관여해 전권을 쥐는 스타일을 말한다. 마치 김성근과 동갑내기인 알렉스 퍼거슨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스타일의 감독은 올드하긴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아직까지 있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대표적으로 토니 라 루사 및 마이크 소시아, 벅 쇼월터 등등의 감독들.

사실 한국 야구에서는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구단 프런트가 현장에 병크를 저지르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운 만큼, 현장 중심이 통용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되어 있기는 하였다. KBO 특성상 프런트 수준이 메이저리그급은 아니기도 하고,[4] 결정적으로 현대야구를 받아들이는 시기가 늦어서 아직도 KBO는 메이저에 비해 감독의 권한이 더 강한 편이다. 거기다가 프런트의 운영 역시 자유롭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구단 자체적인 재정 자립이 아닌, 모기업의 홍보 목적으로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특성상, 기업 고위층의 입김 한방에 구단 플랜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게 대한민국의 프로 스포츠 구단이기 때문.

하지만 이는 프런트 쪽에서 견제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적당히 한귀로 흘려가며 처신하면서, 감독과 프런트의 선을 계산해가면서 팀 운영을 해야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너무 강했다. 심지어 야구중심 9회에 따르면, 한화 감독으로 재임했을 때에는 구단 유니폼 구매까지 관여했을 정도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독으로서의 전권을 아득히 넘어선 수준이기는 하다.

특히 김성근 감독의 제왕적 감독 스타일의 문제는 프런트와의 관계였다. 김성근 감독의 제왕적 야구 스타일이 오직 프런트를 무시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프런트는 전적으로 감독을 지원해야 한다는 시선이 깔려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김성근이 말하는 전권이란, 사실 감독이 원하는 선수를 다 사달라는 뜻이다(...).

김성근은 가성비를 따지거나 구단사정 봐 가며 지출하는 감독이 절대로 아니다. 무조건 최대의 지원을 요구한다. 그 가난한 쌍방울이 페이롤 1위를 찍게 만들었고[5] 다른 대기업 구단에서도 프런트로부터 최대한 전권을 끌어간 뒤 말 그대로 엄청난 금액을 쓰면서 프런트가 세우던 플랜을[6] 다 헝그러뜨리고 팀의 미래를 희생해가며 전력을 쥐어짜냈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 선수 사주길 원하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다. 좋은 선수 안 갖고 싶은 감독이 세상 어디 있을까? 그러나 김성근은 그 도를 넘은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그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 구단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더라도 모든 것을 본인의 공로로 돌렸다. 잘 되면 내 덕분, 안 되면 니 때문이라는 방식이면 누가 그 편을 들 수 있겠는가. 결국 이에 프런트가 반발하거나 조금이라도 본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프런트가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 프런트가 문제다, 프런트가 현장을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해서 성적을 못냈다, 본인이 비주류라 핍박받는다며 언플을 해왔다.

심지어 그나마 구단을 칭찬한 몇몇 사례들조차 자신에 대한 미화가 곁들어져 있다. 대표적으로 SK 시절 선수가 부상을 입을 경우 타팀이 선수 치료비에 1~2천만원을 쓸 때 자신은 8~9천만원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며, 그 돈을 이의 없이 지출해 준 것은 구단의 공로라고 언급한 적이 있긴 하다.[7] 하지만 이 발언도 결국 김성근 자신이 8~9천만원을 사용하도록 했다는 자화자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김성근에 대한 각 구단 프런트의 반감으로 이어졌고, 암묵적으로 김성근을 보이콧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김성근이 SK에서 경질된 후, 일부러 마산과 수원에 내려와 인스트럭터 역할을 하며 언플하던 김성근을[8] NC, KT가 시원하게 무시한 것이 대표적. 결국 고양 원더스 독립구단의 감독으로만 전전하다가, 2014시즌 후에 한화 팬들의 선임 운동으로 한화에 부임하기 전까지 프로구단 어느 곳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던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9] 결국 2015년 한화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복귀 후 전권을 가진 감독이 잘못 움직일 때 팀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김성근 감독 옹호 팬들의 주장과는 달리, 김성근 감독이 여러 구단을 전전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프런트와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가 가장 크다. 한화 시절만 봐도 전권을 쥐어주자 외국인 선수 선발, FA 영입, 심지어는 신인지명은 물론이고 프런트가 반대하는 선수의 트레이드까지도 거침없이 행하다가, 2016 시즌 후 프런트가 전권을 가져가자마자 작심 발언을 쏟아내는 등 구단과의 대립각을 세우다가 경질에 이르렀다.

2.2.1. 비판론 : 메이저리그의 대세, 프런트 야구

냉정하게 말해서, 야구는 팀 스포츠 중에서 가장 감독의 영향력이 적은 종목이며, 단적으로 말하자면, 선진화된 현대 야구에서 감독은 별 상관 없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1대1 대결이며 MLB를 중심으로 한 현대 야구에서 경기 운영에 관한 것은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세이버메트리션들(이 있는 프런트)의 몫이다.

현재 가장 선진적인 야구 리그인 메이저리그의 경우 감독은 선수단의 사기와 부상자 관리 등 선수단 관리에 중점을 두는 매니저형 감독이 추세이고, 전문적인 경영 지식과 야구 지식을 갖춘 단장들이 팀을 이끄는 추세이다. "머니볼"로 유명한 빌리 빈, 테오 엡스타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단장 중심의 프런트들은 장기적/전략적 차원에서 팀을 운영하면서 리빌딩 타이밍을 잡고, 타팀의 가능성있는 유망주들을 눈여겨 보다가 트레이드 등을 통해 데려오는 등 팀에 큰 기여를 한다. 이로 인해 메이저리그 감독의 연봉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물론 모든 구단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이크 소시아, 브루스 보치, 벅 쇼월터 등 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감독도 분명히 있고,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결국 야구는 선수가 하는 거라는 기본적인 전제 아래, 감독은 그 선수를 잘 컨트롤하고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에 집중하며,[12] 그 선수를 모아오는 프런트를 중심으로 하는 야구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는 감독이 원하는 선수와 코치를 다 사주고, 감독이 원하는 모든 지원을 다 해주면 감독이 모든 것을 총괄해서 성적을 낼 테니 프런트는 이에 전적으로 따르라는 방식을 고수했다. 본인 스스로 "프런트는 견제만 하라."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프런트의 견제조차도 불허하고 프런트와의 파트너쉽을 철저히 거부하며 일방적인 종속을 요구했다. 그리고 구단이 하나라도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구단과 각을 세우고 마찰을 빚기 일수였다. 때문에 각 구단 프런트와 수없이 갈등을 빚어온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한화 이글스 역시 김성근 체제 2년간 전권 행사의 폐해를 뼈져리게 체감한 후, 박종훈 단장을 새로 선임하고 1군 운용을 제외한 다른 모든 권한을 김성근 감독에게서 박탈하여 프런트로 가져왔다. 하지만, 박종훈이 부임하자마자, 그리고 여러번 단장이 바뀌면서도 한화 프런트의 병크는 조용히 쌓이다가 2023년에 기어코 터져버리면서 그냥 거기서 거기라고 재평가 받고 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마무리 캠프 도중 구단 "내 모습이 초라해 연말 시상식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후 시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단장과 끊임없이 싸우다 끝끝내 자진사퇴 형식의 경질로 자신의 지도자 경력을 사실상 마감했다.

2.2.2. 옹호론 : KBO는 프런트 야구를 할 수 있는가?

프런트 야구는 말 그대로 현장은 현장 야구인들이 게임 내의 일을, 프런트는 데이터나 경영 전문가들이 프런트의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각각 맡는 철저한 분업화 야구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프런트 직원들은 통계학과나 경영학과 등 프런트 업무와 관련된 전공을 공부하여 대기업 입사하듯 입사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의 프런트는 미국과는 다르다. 한국의 프런트는 대부분 은퇴 선수이며,[13] 코치하던 사람이 전력분석하고, 작년에 단장 하던 사람이 올해는 감독하는 구조이다. 즉 프런트에서 일하는 인력과 현장에서 일하는 인력이 거기서 거기이며, 사실상 또 하나의 현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심하게 말하면 코치나 감독 등 지도자 자리는 티오가 너무 적으니 이름만 바꾼 은퇴 선수 일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낸 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 즉 미국 쪽이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라면, 한국 쪽은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만 두 개인 것.

본래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스포츠계에서 감독은 하늘이 내려준 자리라고 해서, 단장, 사장이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야구 장인', '웃어른', '감독님'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그게 당연했다. 직급이야 옛날에도 사장과 단장이 감독보다 더 높았지만, 사장과 단장은 모기업 등지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야구단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야구계 생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14], 그러다보니 '야구 전문가'인 감독에게 힘이 더 실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15]

그러다가 세기가 바뀌더니 은퇴한 야구선수들이 단장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야구단에서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동안 일한 사람들이 단장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렇게 소위 '잔뼈 굵은' 사람들이 구단 고위직을 맡으면서, 감독은 FA 선수를 사기 위해 프런트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 을 하고, 몇몇 감독은 프런트와 기 싸움을 벌이는 등 프런트의 권력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2010년대 후반부터는 장정석이나 허삼영 등 코치 경력도 없이 프런트직에 있던 사람을 감독으로 임명하는 등 프런트가 현장을 장악한 상황이다. 이게 옳고 그르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아니고, 대체적으로 현장의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는 이야기이다.

시대가 변하고 프로야구도 점차 규모가 커지고, 분야도 전문화되면서, 감독 한 사람만이 팀을 변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결국에는 프런트가 방향 제시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좋게 보면 전문가들이 여럿 모여 효율적인 야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정수근의 말처럼 '소신있게 자기 야구를 하는 놈이 아니라 손바닥 잘 비비는 놈이 지문 없어지면 감독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 야구에서 감독이라고 해서 단장보다 야구를 더 잘 알거나, 단장이 운영을 더 잘 알거나 등 프런트 야구가 더 효율적일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구성원이 같으니 다를 것이 없는 것. 이런 상황에서 전권을 감독이 쥐느냐, 프런트가 쥐고 감독은 그에 따르느냐는 딱히 어느 쪽이 효율적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둘다 구단 경영은 전문적이지 않은, 한평생 야구만 한 사람들이기 때문.

즉 이런 상황에서 프런트에 좀 더 힘이 실려 있는 팀이 야구를 잘한다 해서 프런트 야구가 성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야구를 잘 모른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KBO는 상술한 대로 이름만 프런트 야구지 경영 전문가가 팀을 운영하고, 감독은 매니징만 하는 제대로 된 미국식 프런트 야구를 하는 팀은 없다.[16]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프런트 야구든 감독 야구든 한국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차이라면 감독 쪽이 현장 상황에 밀착되어 있는 만큼 더 돌아가는 판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반대로 프런트 쪽은 현장 상황에서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만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차이 정도. 따라서 이 체제 자체를 개선하기 전의 한국 야구에서는 야구를 더 잘 할 수 있는 쪽이 주도권을 잡으면 될 뿐이다.

다만 똑같이 옛날 야구를 했고 옛날 감독이지만 프런트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편이었던 김인식, 본인이 둘 다 해봐서 느물느물하게 관계 조율을 하는데 능했던 김응용과 달리 김성근은 감독이 유일한 왕으로 대접받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옛날과 같은 제왕적 감독 시절의 야구를 했다. 굉장히 독선적인 인물답게 프런트 등 주변인물과 마찰을 많이 빚으며 타협을 할 시도조차 안했고, 말년에는 그의 스몰볼 야구가 메타에 뒤쳐져 결과를 못 낸 것이 문제이지, 김성근이 감독야구를 지향한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즉, 메이저리그와 달리 감독 야구를 지향했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한국 야구가 그런 시스템을 소화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성근 야구에 대한 비판은, 김성근 감독이 지향했던 감독 위주의 야구가 팀에게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영향으로 인해 팀이 전체적으로 어떤 득실을 봤는지에 대해 비판하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다.

2.3. 일본 지향적인 야구관

김성근의 야구를 대표하는 키워드로는 일본식 야구가 있다. 여기서 일본식 야구란 선수보다는 감독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관리 야구와 작전 야구, 개인보다는 팀을 중시하는 집단 야구, 타자보다는 투수를, 타격보다는 수비를 중시하는 수비 중심 야구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선수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 선수를 믿기보다는 잦은 작전과 짜내기식 스몰볼 위주의 플레이[17], 지옥 훈련과 수비에 대한 강조, 데이터 야구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파고드는 현미경 분석 등이 모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벌떼야구로 대표되는 계투 중심 야구도 일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미국에서는 선발을 중시하고 계투는 특정 상황 때문에 공을 오래 던질 수 없는 선수나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은 마무리 투수를 수호신으로 부르는 등 계투에 대한 취급이 높은 편이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김성근이 일본 야구를 지향한다고 해서 미국 야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김성근 역시 미국 야구에 대해서 일본 야구보다도 월등하게 고평가를 하고 있지만, 본인은 여러 제반적 요건 때문에 일본식 야구를 하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 2008년 SK에 감독으로 재임 당시 김성근이 본 한미일 야구①…"가장 세밀한 데이터 야구는 미국"이란 기사를 보면 처음 인터뷰 수락 당시에는 아무차이 없다고 농담을 했지만 실상 한국, 일본, 미국의 야구 격차는 명백하게 존재하며, 보여지는 이미지와 달리 분석적인 측면도 미국이 압도적이라는, 당시 힘의 미국, 세밀함의 일본이라는 언론의 이미지 메이킹과는 정 반대되는 발언을 했다.

일본의 현미경 분석은 미국을 본뜬 것이며, 쿠세 찾기[18]도 테드 윌리엄스의 책에서 나온 이론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이다. 관리 속에 자율이 있다는 말[19]을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시스템 속에서 체계적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정도. 한국, 일본 선수가 미국에서 그나마 우위를 가질수 있는 건 정신력정도 밖에 없다는 다소 혹독한 발언은 덤. 또, 류현진의 미국 진출 당시에도 미국야구가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것은 큰 착각이라면서, "팔로스루에서 어퍼스윙을 하는 것만 보고 미국 선수들의 스윙이 무분별하게 크기만 하다고 착각하면 절대 안된다. 스윙 스타트에서 공을 맞히는 거리가 정말 짧다. 이런 짧고 간결한 스윙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된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면서 우리나라 타자들도 미국 선수들의 스윙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논지의 인터뷰 역시 한적 있다.

심지어 일본인 타격, 투수 코치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도 메이져리그나 미국인 코치를 쓰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다. 하지만, 경력에서 연줄이 대부분 일본에 있고, 본인의 언어적 문제 때문에 의사소통 문제와 같은 것들이 발생하는 것, 우리나라 선수랑 피지컬이 비슷한 건 일본 선수들이라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인 타격, 투수코치를 기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김성근의 팀 훈련 일정에도 "아메리칸 펑고"라는 단어을 사용한다. 미국야구를 폄하한다는 사람이 본인팀 훈련 일정에 미국식 훈련도 포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김성근이 일본 야구를 좋아하고, 실제로도 야구팀 운영 방식을 보면 일본식 경향인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미국 야구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전제만큼은 확실하게 깔고 들어간다.

3. 선수단 육성 및 교육

3.1. 지옥훈련

“나는 강한 훈련만이 훌륭한 선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中
지옥훈련을 거쳐야만 천국에 올라갈 수 있어요.”
- JTBC 야구의 신 김성근
"저는 야구 인생에서 감독님을 존경하고, 사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선수 시절에 감독님을 안 만난게 하늘의 복이라 생각합니다."
이대호

김성근의 혹독한 지옥훈련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하다. 맹훈련 이미지가 워낙 인상깊어서 타 종목에서도 훈련 좀 빡세게 시킨다 싶으면 바로 김성근이 소환되고 그 팀 감독에게는 x성근, xx콘 등의 별명이 붙으며, 스포츠 외에서도 심심찮게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체계적인 훈련 따윈 존재하지 않고 무작정 선수들을 굴리기만 한 80년대 OB 시절부터 강훈련으로 유명했고, LG 감독 시절에도 훈련 중독자라고 불렸다.

이러한 훈련은 비시즌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즌 중에도 김성근 감독의 훈련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고, 시즌 중에도 성과가 나빴던 선수들은 경기 후 야간 특타를 자주 실시하였다. 명목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잘못된 자세를 교정하여 타격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고 실제로 성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안 했을 때 성적이 더 좋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아 효용성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특히 한화 이글스 부임 후 이런 특타가 선수들에 대한 체벌성, 질책성 특타가 아니냐는 벌타 논란이 일기도 했다.

3.1.1. 김성근식 훈련에 관한 말말말

"나이 먹은 아이들 연습 많이 시키는 거 비난이 많아요. 그면 야구 그만두면 돼요."
- 김성근 감독, 연습이 힘들면 야구 그만해라
"연습 시키는데 힘이 드니까 (선수들이 나한테) 막 욕하더라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편
"시합 나가서 지면 억울하죠. 어떻게 훈련했는데, 우리가 남들보다 두 배는 더 훈련했는데, 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김강민
서경석: 저런 수장을 둔 선수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마해영: 제가 볼 땐 행복하진 않아요.
김성근: (웃음)
서경석: 밑에 안있어 보셔서 그런거 아니에요?
마해영: 음 간접경험이라는 게 있고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쉬는 날도 없고, 너무나 훈련량이 많고 그런 부분, 과정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 MBC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김성근
"죽자사자 뛰는 걸 그렇게 많이 시켰어요. 완전 실미도 야구단이지. 야구단이 아니었어요."
- 유지훤
"너무나 힘든거에요. 야 이건 해도해도 진짜 너무한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그정도로 해요."
- 김재현
"훈련할 때는 정말 욕도 하고 '이 영감, 빨리 안 죽나' 그런 생각도 사실 한대요"
- 장강훈 기자

3.1.2. 긍정적 효과 : 수비 강화

김성근 감독이 맡은 팀에서 이러한 강한 훈련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수비 강화였다. 펑고로 상징되는 강훈련을 통해 팀의 수비력이 일취월장한다는 것이다. 김성근 훈련에 대한 많은 부정적 시선이 있지만, 적어도 수비 향상에 대해서는 확실히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는 것은 극단적인 비판 세력이 아닌 한 부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SK 왕조 시절 김성근 감독은 수비에 큰 신경을 쓰고 일본 출신 후쿠하라 코치를 선임하는 등 큰 노력을 하였다. 실제로 왕조 시절 SK는 NHK에서도 일본식 수비를 도입한 야구의 성공사례라며 국뽕(...) 사례로서 취재해 갈 만큼 높은 수비율로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팀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SK 시절 정근우최정, 김강민 등이다. 물론 정근우와 최정은 김성근 부임 당시 2년차의 신인이었기 때문에 프로 경력이 쌓이면서 수비력이 향상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지만, 당시 정근우는 송구 입스에 걸려 있기도 하였다. 또 타 팀에도 수많은 2, 3루수의 유망주들이 있었지만, 이 둘만큼 수비 분야에서 크게 성장한 선수는 없었다. 물론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선수를 발굴한 전임 감독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2015년 김성근 감독은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후에도 역시 수비력 강화를 위한 엄청난 강훈련을 실시했다. 실제로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한화의 수비력은 일취월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로 유명했던 한화 이글스라는 걸 생각했을 때 이는 굉장히 큰 성과임에는 분명했다. 실제로 세이버매트릭스 상의 수비 지표인 DER에서 2015년 한화는 큰 향상을 보였다. 당시 한화의 성적은 DER수치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렇기에 전문가들은 2015년 한화의 성적상승 요인은 DER에 있다고 말한다.

2016년에는 수비력이 다시 저하된 모습을 보였고, 이 부분에서 과연 지옥훈련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초반 실책 퍼레이드가 컸는데, 이 초반 수준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인 2013~2014년보다 심한 수준이었다.[20] 다만 최종 실책 개수는 경기당 0.86개로 정리되었고, 저 기사에 나온 초반 32경기를 제외하면 경기당 0.72개로 리그 평균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지옥훈련의 효과를 보여주는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2015년과 달리 2016년 캠프 당시 김성근 감독이 오히려 훈련 강도를 낮췄기 때문. 다만 이 부분은 지옥훈련의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지옥훈련을 하다가 자율훈련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타율적인 상태에서 자율적인 분위기를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시즌기에 다시 훈련으로 다잡으니 정상 수치로 돌아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성근 재임 당시 한화의 수비가 일취월장까지는 아니어도 확실히 는 것은 맞다. 수비 지표가 아무래도 세이버 스탯 정립이 덜 되어 있는 편인 데다가 한국은 그 자료가 부족하여 더더욱 믿기 어려운 상태로 신뢰도가 낮은 편이다. 결국 플레이를 눈으로 보는 것 말고는 아직은 답이 없는 상태인데, 확실히 한화의 수비는 김성근 부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이 해설들을 비롯한 전문가들의 총평이고 그 신빙성 없는 스탯상으로도 2016년 초반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의 향상이 나타났다.

3.1.3. 복합적 효과 : 특타

"공을 7000개씩 치는 날이 있다. 사람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한계를 넘으니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연습을 이렇게 했는데 안타를 못 치면 억울해서 죽을 것 같다는 독기가 생긴다."
- 최동수

김성근 감독 특유의 지옥훈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펑고와 특타이다. 수비 강화 훈련인 펑고가 어느 정도 확실히 성과로 나타나는 것을 판단하기 상대적으로 쉽다면, 특타는 판단 자체가 꽤나 어려운 성과이다. 특타 훈련을 통해 타자가 타격감을 되찾은 건지, 아니면 상황상 그게 맞아떨어진 건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 그래도 SK 시절에 한정하여 특타 효과를 어느 정도 정리해둔 기사가 있어 참조할 만하다.#

특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여론도 분명히 있다. 대표적으로 2000년대 후반 특타 무용론의 선두에 있던 로이스터 감독은 주축 선수들이 타격 슬럼프에 빠지면 “차라리 골프를 한번 치고 오라”던가, “나라면 제주도에 가서 푹 쉬고 오겠다”는 말을 하는 등 특타 무용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한 전임 감독은 “특타는 결국 감독이 자기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

또 "가만히 있어도 체력 소모가 심한 여름에 추가 훈련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심지어 김성근 감독의 아들인 김정준 당시 SK 전력분석팀장조차도 "다른 팀보다 특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현명한 일인지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특타라는 훈련 자체는 타 구단에서도 선수 단위나 팀 단위에서 어느 정도 효용성을 보여준 바들이 있다. 2023년 삼성 사례 심지어 상술한 롯데 로이스터 감독마저도 결국은 특타 훈련에 동참한 바가 있는 만큼, 적어도 국내 야구에서 특타는 분명 어느 수준 이상의 효과를 적게든 많게든 거두고 있다는 믿음이 야구계 내에는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김성근 감독은 그게 좀 과하게 자주 있다는 정도.

어쨌든 SK의 사례를 보듯 단기적 성과 및 흐름을 바꾸는 효과는 분명히 어느 정도 득을 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미친 체력적 여파 등은 판단하기 어려운 만큼, 득과 실 중 어느 것이 큰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하는 부분으로 두는 것이 맞을 것이다.

3.1.4. 부정적 효과

3.1.4.1. 강훈련에 따른 선수들의 부상
팀에 투수가 수십명이다. 몇 명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 스프링캠프 때의 과도한 투구 개수로 인한 부상에 관한 질문에 대한 김성근의 답변#

계속된 연습을 통한 체력 향상과 자세 교정 등은 분명 큰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연습량을 늘리는 것 자체는 좋지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특징과 포지션, 몸 상태에 맞춘 적절한 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수비의 경우에는 공이 오는 상황에 대한 대처인 만큼 대처율을 높이기 위한 훈련이 즉각적인 도움으로 올 수 있지만, 투구와 송구 등은 어깨의 소모란 측면에서 봤을 때 오히려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훈련은 투수의 경우에도 스프링캠프 때 과도한 투구를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며[21], 타자들도 송구 훈련 등이 문제가 된 사례가 있다. 특히 후술하겠지만, 김성근 감독은 어깨는 던질수록 단련된다는 옛날 이론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투수 혹사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이 훈련 또한 독이 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났다.

특히 이런 문제는 스포츠 의학의 발전이 부족했던 2000년대 초까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SK 시절까지 넘어오게 되면 지옥훈련은 계속되었지만 강압적인 성향은 많이 줄어들었고 재활과 부상 방지 등도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느 정도 도입되었으나, 2000년대 초 LG 시절까지만 해도 지옥훈련을 강요하고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강한 질책과 선수 기용에서의 불이익 등의 압박이 가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희생당한 선수들도 많았다.[22] 다만 이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후속 사례들은 타자에 한정하여 서술한다.
투수는 기용 부분에서 따로 서술 예정.
박용택: 계약하고(프로입단 후), (마무리) 캠프[23]가서 그때 감독님이 김성근 감독님이었죠. 마무리 캠프갔는데... (허탈한 웃음) 외야수가 공을 보통 하루에 많이 던져야 50개씩 던지는데, 많이 던져야! 하루에 500개 이상 씩을 던졌어요.
이광용 캐스터: 하필이면 또 김성근 감독이셨네요.
박용택: 예. 그러니깐 팔이 떨어지죠. 근데 감독님은 "그걸 이제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렇다."(중략.)[24] 그래서 많이 던졌어요. 그러다보니 적응도 하고 이겨내려는 방법을 알아지고 점점. 그래서 이제 시즌 들어가고 했는데 한 2년 정도는 잘 던졌어요 그래도. 뭐 꾸역꾸역? (이하 생략)
- KBS 옐로우카드 79회, 박용택 “아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26분 40초부터)
3.1.4.2. 경기 뒤 숨겨진 또다른 혹사 : 특투
타자에 특타가 있다면 투수에는 특투가 있다. 시즌중 훈련 상황에서 전력 투구를 시키며 투구폼 등을 교정하는 방식인데, # 2011년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루키 시즌 때 대량 실점한 뒤 2군에 내려갔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2군 사령탑이었는데 매일 아침 호출해 공을 500개씩 던지게 했다”며 “날이 갈수록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3일이 지나고 난 뒤 공을 던지는 게 편안해졌다. 어깨와 팔꿈치 대신 하체로 공을 던지게 됐다,
- 배영수의 김성근 감독 썰 “절로 90도 인사”, 데일리안, 2019. 12. 08
6시에 일어나서 일단 다같이 산책을 한다. 그후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웨이트트레이닝이 이어진다. 그냥 계속 하는 거다. 러닝도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몇시간씩 계속 공을 던졌다. 마냥 던졌다. 그리고 저녁 먹고 또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 임창용 "내 기억속 김성근 감독님은…", 조선일보, 2011. 03. 14

사실 김성근 감독은 이러한 특투 시스템 이전에도 공을 많이 던지게 하는 방식의 훈련을 많이 사용해왔다. 삼성 2군 감독 시절 신인이었던 배영수가 대량 실점 후 2군으로 내려오자, 하루 500개씩 3일에 걸쳐 공을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은 그 이전의 임창용 또한 1995년 김성근의 해태 2군 감독 시절, 몇시간씩 공을 던지게 했던 일화가 있다. 즉 이는 꽤 오랜 시간부터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훈련 방식 중 하나.

특타든 특투든 결국 폼을 잡기 위한 훈련인 만큼 이는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훈련을 위해 선수에게 공을 던지게 하는 것 자체는 사실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전력 투구는 사실상 경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그렇다면 적절한 휴식이 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의 방식에서는 이런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극단적으로 터져나온 사건이 바로 한화 이글스 시절 송창식 벌투 사건 이전에 벌어진 송창식 특투 사건. 특투가 이루어지고 바로 다음날 선발 등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은 특투 때문에 실제로 김성근 감독 팀의 투수들은 같은 수의 경기를 치르더라도 다른 팀 선수에 비해 더 많은 혹사를 경험하였고, 그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송창식이었다. 위의 기사에서 나왔던 고효준 또한 2011년 수술로 시즌 아웃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여파가 없었으리라는 보장을 하기 어렵다. 타자는 매일 경기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체력 안배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투수는 하루의 투구를 위해 그전까지 훈련과 휴식을 잡아줘야 한다는 특성을 무시한 훈련법이었던 것.
3.1.4.3. 오대산 극기 훈련의 실상
"그때 마침 아는 사람, 도사같은 사람(변도사)이 있어가지고 오대산에 산행(훈련)을 갔어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김 감독의 판단을 좌지우지하는 B라는 사람이 김성근에게 오대산 극기훈련을 권유했다. 만약 그가 우악스런 훈련 대신 리듬체조를 권했다면 태평양 선수들은 따뜻한 실내체육관에서 겨우내 리듬체조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B를 '변도사’ 라고 불렀다. … 김성근 감독은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그의 말을 절대 신봉하는 스타일이다. ... 그런 김성근에게 오대산 극기훈련을 권한 것은, 이제 누구나 다 눈치챘겠지만 바로 변도사였던 것이다.
- 이종남 기자의 [인천야구 이야기] 中

지금의 김성근 감독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초기 김성근 감독 커리어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은 오대산 극기훈련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시 김성근은 태평양 감독에 부임한 직후, 평소 신통력을 가졌다고 믿고 따르던 '변도사(본명 변영호. 실제 직업은 한의사)'가 오대산에서 훈련을 하라고 하자 이를 정말 실행에 옮겼다. 위에 나오지만 김성근 본인이 직접 도사같은 사람이 하라고 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원래부터 강훈련으로 유명했던 김성근은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1989년 1월 6박7일 간의 오대산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김성근이 이런 유례없는 엉뚱한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하자 태평양 구단은 "웬 미친짓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태평양 구단은 오대산 훈련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극기훈련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성근은 구단의 반대에도 한겨울 극기훈련을 추진했다. 구단이 비시즌 기간 훈련비용 지급 금지 방침 때문에 비용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하자,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참가비+일주일간의 식사 준비물+취사도구를 낼 것을 강요했다. 선수들이 직접 훈련비를 내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선수들이 반발했지만, 반발하는 선수들은 2군으로 보내겠다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통보로 반발을 찍어눌렀다. 또 김성근은 구단이 오대산 훈련 비용을 지원해주지 않은 것을 구실로 첫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오대산은 밤에는 영하 1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갔고, 눈이 1미터 이상 쌓여 있었다고 한다. 새벽 네시부터 시작해 한밤 중이 될 때까지 선수들은 오대산에서 극기훈련에 임해야 했다. 특수부대원처럼 눈밭에서 포복자세로 기어갔고, 웃통을 벗고 영하의 칼바람을 맞으며 30분간 기수련을 했다. 알몸으로 얼음물에 입수기, 맨발로 눈밭을 뛰어가는 구보도 이어졌다. 극기훈련 내용 중에는 동물행동 흉내내기도 있었다. 10km 산악구보와 50km 행군도 이어졌는데 새벽 6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새벽까지 걸어가는 강행군이었다. 행군 때는 사과가 얼어서 못 먹고 땅콩만 먹으면서 걸어야 했다. 버너를 가지고 직접 밥을 해먹었다.

당시 선수들은 이런 지옥훈련의 성과에 의문부호를 붙이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주장 김일권이 "과연 이렇게 훈련하는 것이 시즌때 야구를 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발하거나 훈련에서 낙오하면 2군으로 보낸다는 방침에 별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만 했다. 당시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김동기는 "칼이라도 있으면 (김성근을) 찔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고 말했고, 재일교포 김신부는 "연봉 1억원을 줘도 싫다.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시 선수들은 대놓고 "야 이 개새꺄", "이거 끝나면 죽여버리겠다"며 김성근을 욕했다고 한다.

선수들이 이렇게 대놓고 김성근 감독을 욕했던 것은 김성근 감독 본인만 지옥훈련에 따라가지 않고 다음 시즌을 구상한다는 이유로 따듯한 숙소에 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지옥훈련 내내 혼자서 숙소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감독에게 성토하고 나서지는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오히려 팀워크에 문제가 생길 판이 되자 주치의 주인욱 박사가 나섰다.
해가 질 무렵, 선수들은 오대산을 올랐다. 선수들 오대산에 오르고 김성근 본인은 따라가지 않음
얼음 속에 들어가고,
허리만큼 쌓인 눈밭을 맨발로 걸었다.
깜깜한 밤에 짐승 소리를 함께 들었다. 김성근은 혼자 숙소에 있어서 짐승 소리가 잘들림
그리고 한 팀이 되어 내 눈앞에 돌아왔다. 극기훈련에서 돌아온 선수들을 숙소에 남아있던 김성근이 맞이함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103[29]

김성근은 가족병력상 간이 나쁘기 때문에 평소 간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고, 간에 좋다는 것이라면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김성근에게 주인욱 박사는 "얼음물 찜질이 간에 그렇게 좋다"면서 얼음물에 들어갈 것을 설득했고, 오대산 훈련 막판에야 김성근은 숙소를 나와 얼음물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대산 극기훈련은 1983년부터 연재되어 큰 인기를 끌고 1986년 영화로까지 제작된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실미도지옥훈련의 실사판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당시 국민적 인기를 끈 만화이자 영화이기도 했기에, 이런 무지막지한 극기훈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겨울 극기훈련 때문에 적지 않은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은 이듬해인 1990년에는 소리소문도 없이 극기훈련 일정을 3박4일로 대폭 축소해서 형식적으로 실시했고, 그 다음해(1991년)부터는 더 이상 이런식의 극기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

훗날 오대산 극기훈련은 김성근의 정신력 강조를 보여주는 예로 포장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기훈련에서 많은 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얻게 되어 시행 2년만에 조용히 그만두었다. 김성근 감독 또한 SK 감독 시절 인터뷰에서 이런 식의 극기훈련은 부상위험이 높기 때문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성근이 오대산 극기훈련을 실시한 후 그해 태평양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혹한기 극기훈련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곧바로 그해 겨울인 1990년 삼성, OB, 롯데 등이 태평양과 유사한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OB는 태평양처럼 오대산에서, 롯데는 해병대에 의뢰해 한겨울에 유격훈련을 했다. 삼성 구단은 김성근의 지옥훈련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그해 겨울에 2차례나 극기훈련을 실시했다. 우선 1월 6일부터 3박4일산 팔공산에서 극기훈련을 한 후 2월 3일 다시 선수들을 소집해 서울 근교의 한 공수부대에 입소해서 극기훈련을 치렀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 막 현역을 은퇴하고 코치로 부임했던 권영호가 실신하여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원조 태평양은 3박 4일로 일정을 대폭 축소했고, 훈련 내용도 훨씬 완화되어 거의 형식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그해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한 4개팀은 공교롭게도 그해 시원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삼성은 전년도와 같은 정규시즌 4위에 그쳤고[30], OB는 5위에서 최하위인 7위로 떨어졌다. 극기훈련의 원조인 김성근의 태평양도 3위에서 5위로 떨어졌다. 전년도 꼴찌(7위)였던 롯데만이 6위로 겨우 최하위를 면했을 뿐이었다. 반면 혹한기 극기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나머지 3개팀은 그해 정규리그 1~3위를 독식했다. 정규리그 1위인 LG, 2위 해태, 3위 빙그레 등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상위 3팀은 모두 동계 극기훈련과 무관했다. 때문에 1990년 열병처럼 퍼졌던 동계 극기훈련 붐은 한해 반짝하고 사그러들었다. 훗날 삼성 류중일 감독은 1990년 반짝 유행했던 김성근식 동계 극기훈련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선수 부상만 발생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김성근 감독 스스로도 오대산 극기훈련을 더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의 김성근 감독에 대한 부정적 지적으로는 애매한 부분은 있다. 그렇더라도 오대산 극기훈련에 자기만 쏙 빠져 있었던 만큼 선수와 함께 고락을 같이 한다는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은 분명하다. 김성근은 이후 더는 혹한기 극기훈련은 하지 않지만, 선수들의 정신력을 바로잡기 위해 수시로 정신교육을 실시한다. 다만, 김성근 감독도 지옥훈련 자체는 실패를 자인했지만, 2023년 최강야구에서 밝혀지길 혼자 숙소에 있었다는 비판은 본인도 농담처럼 했고, 실제 선수단과 시작부터 얼음물 입수까지 주기적으로 함께 했다. 문서의 윗 부분에서도 나왔으나 김성근 본인이 함구해서 밝혀지지 않았었다. 영상 9:06부터

3.2.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와 체중 감량 강요

"폼 이외에 우리 투수들에게 문제가 되는 건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지나치게 무게가 높은 것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근육을 너무 많이 붙인다. ... 근육은 던질수록 단련되는 거지, 안 던지면 약해지는 거다. 약해진 상태에서 던지니까 아픈 거다. 그건 우리나라 야구가 지나치게 미국화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김성근 인터뷰
"이치로의 예를 들어보자 ... 몇 억짜리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을 집에 설치했다가 금세 버렸다. 이유는 야구에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 김성근 인터뷰
"또 하나는 (이치로가) 일본 시절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줄였다는 거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야구선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메이저리그에 가서 느꼈을 거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던 이치로가 원했던 건 이소룡 같은 몸매였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로 줄였다고 들었다."
- 김성근 감독이 본 이종범, 이승엽, 그리고... 이치로
"이대호류현진을 맡게 되면 살을 빼게 할 것이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서

김성근이 선수 육성에서 중요시하는 부분 중 하나가 체중 감량과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이다. 김성근은 2015년 유희관을 빼면 배 나온 투수중에 잘 던지는 투수가 없다고 말했다. "투수는 배가 나오면 끝이다. 공을 던질 때 허리가 안 넘어와서 팔이 벌어지게 되어있다"라며 특유의 이론을 주장했다.[31] 다만 자주 하는 오해와는 달리 웨이트 트레이닝 자체를 경시한다기보다는 과도한 무게나 근육 생성을 부정하였고, 유연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야수는 일정 수준까지는 웨이트 트레이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파이고[32], 투수들 역시 너무 무거운 무게를 드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가벼운 무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신 큰 근육위주의 고중량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해선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물론 종합적인 밸런스가 중요하고 유연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 밸런스가 깨지지 않는 선에서 근육을 키우면 좋지만, 자기 몸이 이를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운동을 하는 자신도 모른다. 오버클럭을 시도 안 하면 최소한 망가지진 않는 것과 비슷하다. 신체를 오버클럭을 하면 결국 어딘가 망가진다. 2010년대 이지풍 트레이너의 넥센을 필두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장타력을 길러서 성공하는 타자가 많지만, 실패 사례도 많은 게 사실이다. 웨이트로 성공하자 더더욱 호성적을 노리고 행한 과도한 벌크업이 결국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올라가는 장타력과 구속에 취해 계속해서 웨이트를 하다가 오버 밸런스로 무너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홍현우가 있다.
이치로는 비시즌 겨울 일본 호텔에서 묵을 때 호텔 창고를 개인 트레이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뒤 특수제작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훈련한다. 일반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는 기구별로 특정 부위만 강화되게 설계돼 있으나 이치로가 사용하는 특수 트레이닝 기구는 야구를 할 때 사용되는 어깨, 골반, 엉덩이 쪽 근육을 한꺼번에 단련시킬 수 있다. 일본 기업인 월드윙 엔터프라이즈에서 제작한 이치로만을 위한 맞춤 설계용 트레이닝 기구라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트레이닝 기구는 근육의 이완과 긴장을 반복시키면서 유연성을 증가시켜 몸의 동작 반경을 넓혀준다”고 했다. 이치로는 “한때는 몸무게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의 잠재된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이제는 안다”며 “나는 유연성이 나에게 힘을 준다고 믿는다. 유연성이 나의 무기”라고 했다.
- 스즈키 이치로는 철학자다

실제로 이는 김성근이 가장 자주 예로 드는 스즈키 이치로의 사례와 연관선상에 있다. 김성근의 말과는 달리 이치로는 트레이닝을 많이 신경쓰는 선수이지만, 근력을 위해 과도하게 큰 근육을 만들기보다는 순발력을 발휘하기 위한 작은 속근 위주의 특수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를 사용한다. 다만 이치로는 많은 수의 안타를 생산해내기 위해 장타와 볼넷 출루를 크게 희생하는 유형의 타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mlb 진출 후 아예 히팅포인트를 뒤로 둔 채 끝까지 공을 보며 배트를 갖다 대는 방식의 타격 접근법을 취해, 장타를 크게 희생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출루율과 장타의 가치가 급등하며 현재 mlb에서는 2루수와 중견수 등 센터 라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장타 툴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현대 야구에 와서는 이치로의 훈련법이나 타격 접근법을 절대적인 근거로 제시할 수 없는 이유다. 동시에 마이크 트라웃이나 알버트 푸홀스 등 웨이트를 통한 근력 향상과 유연성 및 수행 능력을 동시에 고려한 타자들의 훈련법도 있다.

결국 야구는 종합적인 신체의 밸런스가 가장 중요한 것이 맞으며, 웨이트에 대한 인식에 대해 이 밸런스를 중시하는 김성근의 인식 자체는 틀리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2000년대 시점까지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플라이볼 혁명이니 뭐니 하며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었고, 동양인들도 신체 조건이 많이 개선되어 노력 여하에 따라 홈런 타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일본 또한 최근에는 웨이트를 하는 투수와 안 하는 투수가 반반 정도이며, 노장선수의 경우 근력 유지와 부상 방지를 위해서 웨이트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과거처럼 타자는 방망이, 투수는 볼보다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벼운 운동은 권장하지만 웨이트를 하면 늘어나는 근력으로 구속이 빨라지니 좋다는 파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파가 반반 정도로 나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르빗슈 유가 메이저리그 와서 웨이트를 경험하고 했던 말이 "이 좋은 걸 왜 여태 안 했을까." 라며, 후회했을 정도의 웨이트파.[33]

결국 여기서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웨이트 한계치에 대한 선수 개개인의 차이와 김성근 본인의 인식 차이가 있던 것, 그리고 김성근 특유의 성향상 이 부분을 트레이너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관리해야 직성이 풀렸다는 것. 여기에 김성근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이 결합되면서, 체중 감량의 영향으로 망가지는 선수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3.2.1. 한화에서의 웨이트 트레이닝 실패 사례

2010년대부터 넥센 이지풍 트레이너의 성과를 시작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김성근 감독 또한 이례적으로 한화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훈련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 그러나 이 웨이트 트레이닝은 한화에서 크게 득이 되지 못했는데,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성근 감독은 이 상황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이유를 꼽았다. 우선 상체 위주로 던지는 투수들이 많아진 게 잦은 부상의 첫 번째 원인이다. ... 김 감독은 “러닝이나 유연성이 아닌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력을 키우는 선수들이 많다. 하체 밸런스가 잡혀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체의) 힘으로만 던지다보니 내구성이 떨어지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 스포츠서울 2017년 1월 17일 장강훈 <

하지만 최근의 트레이닝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이 실패 원인은 오히려 휴식의 부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성근은 기본적인 휴식도 많이 주는 감독이 아닌 반면 넥센은 휴식에 있어서는 그 어느 팀보다도 관대했다는 점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기본적으로 무산소로 무게를 이용하여 한순간에 근육에 부하를 가하는 게 전제가 되는데, 부하 이후에는 근육에 미세한 손상들이 발생한다. 이 손상들이 회복되면서 근육이 커지고, 소위 말하는 가용 근육량이 늘어나는 것. 근데 이게 회복되려면 당연한 얘기지만, 휴식을 취하는 게 효율적이다. 괜히 헬스 등을 하더라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의 경우, 이런 휴식 비중이 극단적으로 적었다는 것. 물론, 프로구단이니만큼 웨이트 직후에도 마사지라든지 컨디셔닝 수단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기반으로 한 휴식 그 자체에 비할 바는 절대 못된다. 결국 타격 훈련이든 투구 훈련이든 운동이기 때문에 근육이 회복되는 속도가 한참 늦어지거나, 심지어 회복이 안될 수도 있다. 이런 손상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고, 이는 부상당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하루가 24시간인 건 누구한테든 변하지 않는데, 김성근 감독은 휴식 시간까지 깎아가며 선수들을 강훈련시켰다. 제대로 된 휴식을 못 취하는 상태에서는 웨이트를 포함해 그 무엇이든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즉 김성근 감독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는 상태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새로이 도입해봐야 성과를 내기는 커녕 부상 가능성만 높일 수밖에 없었던 것.

결국 김성근 감독은 개인간 웨이트 임계점 차이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지했으며, 이것이 웨이트 경시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화에서 타 구단의 성과를 보며 조금의 변화를 가져오나 싶었지만, 웨이트 이후 근육이 회복할만한 휴식을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발생한 것.

3.3. 선수 육성의 허와 실

"야구감독으로서 시합에 이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는 선수 육성이다. 리더는 한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좋은 선수 없으면 좋은 팀 만들라"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는 말을 싫어한다. "선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선수가 없다는 말은 곧 지는 것이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이다. 설령 선수가 부족하더라도 하소연해서 면죄부를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든 만들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선수가 없다? 프로에선 말이 안 돼"
난 지금까지 무슨 ‘타령’을 해보지 않았다. 인생 살면서 제일 싫어 하는 말이 ‘없어서 못한다,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리더들을 보면 타령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선수가 없다, 긴장해서 못했다, 실수가 많았다 등등 타령을 하는 리더들이 눈에 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속에서 뜨거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리더는 10원짜리 살림도 100원짜리 살림처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선수가 없다고 타령만 하지 말고, 10원짜리 선수를 100원짜리 선수로 만드는 게 리더의 역할 아닌가. 선수가 없다는 말은 누워서 챔 뱉기나 마찬가지다. 자기의 능력 부족을 대놓고 인정하는 셈이다. 선수들도 보고 듣는 눈이 있다. 자신이 따르는 리더가 ‘타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생기겠나. 오히려 선수들은 그런 리더를 보면서 절망한다.
김성근 감독에게 프로팀 감독이란?, 이영미 칼럼, 2013. 11. 07 #

김성근은 강연 등에서 선수 육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리더는 가능성 있는 선수들의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의 팬덤과 일부 기자들에 의해 선수 육성의 대가로 포장되어 왔다. 실제로 김성근이 신인선수를 발굴해서 육성한 예는 긴 경력에 걸맞게 꽤 많다. 그러나 기간 대비로 치면 타 감독에 비해서는 적은 편인데, 이는 김성근 감독의 가장 큰 특성인 윈나우형 감독이란 특성에서 기인한다.

당대 SK나 LG, 쌍방울 또한 가을야구를 노리며 대대적 투자를 했고 OB 또한 우승을 위해 김성근을 데려왔다고 하는 팀으로 김성근은 거의 대부분 소위 말하는 윈나우 팀에서 감독생활을 해 왔다. 아예 팀 자체가 망가져서 시즌 성적 포기하고 신인을 발굴하는 리빌딩팀이라면 신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것이 맞지만, 성적이 우선시되는 윈나우팀은 성적이 우선이다. 일단 신인은 대타, 대수비, 패전처리로 1군에 올리고 거기서 잘 하면 스타팅으로 내보내보고, 거기서 또 잘 하면 주전이 되는 것. 실제로 알버트 푸홀스도 이런 식으로 기회를 받아서 데뷔 첫 해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등록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신인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유망주라는 것이 게임처럼 딱딱 경험치만 먹인다고 잠재력이 터지지 않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루키 시즌부터 포텐이 터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1군에 적응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한 해에 신고선수까지 10명이 훌쩍 넘는 선수를 뽑지만, 개중 2~3명 이상만 1군급 자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어도 성공한 드래프트로 평가받는 것이 KBO의 육성으로 기본적으로 유망주란 성공확률이 20~30%도 안 되는 복권인 것이고 미국에서도 확실한 선수를 내주고 대신 가능성 있는 유망주를 받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그 중 이정후나 원태인, 구자욱처럼 거의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자원은 KBO에서는 절대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반면 베테랑은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선수인 만큼 계산이 서는 편이고, 운동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재활에 성공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렇기에 윈나우형 감독은 유망주보다는 베테랑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특히 이미 쓸모를 다한 것이 분명해보임에도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들을 데려오는 데 집중하는 일을 자주 일으켰다. 삼성 때의 윤석환과 조범현, LG 때의 심성보, 한화 때의 송은범 영입 등은 순전히 자기 제자들 데려오는 것 이상으로 봐주기 어려울 정도의 일들. 정말 좋게 보더라도 이건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망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선수들의 군 입대 억제, 유망주를 내주고 베테랑을 데려오는 트레이드 등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의 힘은 최대로 끌어올리지만, 반대로 팀의 미래에는 악영향을 주는 행위도 매우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즉 선수 육성을 아예 못하는 감독이라고 폄하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만큼 또 구단 전체로 봤을 때는 윈나우라는 이름 아래 폐해를 끼치는 것은 맞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3.1. 선수 육성의 기준이란?

선수 육성은 사실 참 애매한 부분이, 어디까지가 선수 본인의 재능이고 어디까지가 그를 기용하고 육성한 코칭 스태프의 영향인지 구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에 있다. 모든 성공한 선수들은 다 각기 그만큼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 생각해보면 한국 프로야구 구단에서 선발된 선수 중 고교 시절 이름 날리지 않은 선수는 거의 없다.

즉, 고교 시절 스타플레이어들 중에서 프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추락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원래 될 선수였다는 식의 주장은 결과론적인 주장일 뿐이다. 당장 그 천재라던 강혁 어떻게 됐는가? 그리고 고교 시절에 스타급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길고 긴 2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즉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꾸준히 1군 출장 기회를 부여받으면서 1군에 적응해 나가면서 기량을 만개하는 것이 대부분의 선수들이다. 신인을 중용하면 대박이 터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당연히 당장 성적을 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팀의 미래를 위해선 점점 기량이 하락세에 접어드는 노장들에게 체력 안배를 해주면서 신인급들도 꾸준히 출전시켜서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결국 이 꾸준한 경험 제공이 선수 육성의 핵심이 된다.

이런 논리라면 류현진을 기른건 김인식, 오승환을 기른 건 선동열이란 논리도 성사되며, 그 말이 맞다. 김인식이 류현진을 못 믿어서 2군에만 쳐박아 두었거나, 과감하게 선발 자리를 주지 않고 좌완 계투로 갈아마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학생 시절 팔꿈치를 수술한 오승환을 1이닝 마무리로 고정시킨 것은 선동열인데 오승환의 부상 여부를 감안하지 않고 선발이나 중무리로 기용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강에게 기회를 안 주어서 나름 대형 유망주였던 김강을 망친 것이 김인식의 책임으로 회자되고, 좋은 볼을 가지고 있음에도 박희수를 믿지 못해 기회를 주지 않아 박희수를 자신의 집권 말기에야 만개하게 만든 것이 김성근의 잘못이 맞듯이, 선수에게 과감하게 기회를 주어서 터뜨린 것도 감독의 공이 맞다. 선수의 성장에는 시기적절한 기회와 알맞는 역할의 부여도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선수의 출장 권한을 가지고 라인업을 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감독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래 될 놈이었다'는 논리는 결과론적이고 사실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원래 될 놈이었어도 몇년동안 2군에 쳐박아버리고 기회를 안 주면 될 놈도 안 되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천재타자였지만 뒤늦게 프로에 뛰어든 탓에 출장하고 경험을 쌓아야 할 시기에 경험을 못 얻어 그저 그런 선수가 된 강혁이나 상술한 김강, 해외로 눈을 돌리면 타다노 카즈히토조시 해밀턴, 맷 부시 등 그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특급 선수는 선수의 능력과 감독의 적절한 코칭 및 기용이 버무러져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만 갖춰져서는 태어나지 않는다.

즉, 원래 그 팀에서 잘했던 선수들이라면 그것을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러나 고교 시절 특급 선수였다지만 프로에서 검증되지 못했던 선수, 트레이드 전까지는 별볼일 없던 선수 등 그 감독을 만나기 전에 프로에서 활약한 적이 없는 선수라면, 그 선수를 기용하고 육성한 것은 분명 그 감독의 성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또는 타격이나 수비 등 어느 하나는 인정할 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던 선수가 그 분야까지 만개하며 성과를 거둔 것 또한 감독 및 코칭 스태프의 공으로 봐야할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이를 기반으로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3.3.2. 김성근 감독의 육성 사례 : 타자

김성근은 윈나우팀 감독 치고는 선수에게 꽤 과감하게 기회를 준 편이다. 특히 그런 모습이 가장 크게 드러났던 것은 SK 왕조 시절. 당시 주전 박재홍을 두고 자꾸 신인 김강민을 주전 중견수로 쓴다며 세자저하라는 비꼼 섞인 별명까지 있는 김강민이 대표적이다. 또 아무리 상무에서 기량을 쌓아 왔더라도, 이제 한 시즌 제대로 보내고 제대한 3년차 새파란 박정권에게 기회를 주면서 2009년 1루수로 정착하게 만들었던 것은 분명 김성근의 공이다.

최정 이후 주전 선수인 박재상, 박정권, 김강민 등은 엄연히 기회를 준 김성근의 공적이 맞으며 당시 왕조를 세운 업적이 있다. 두산에서 잉여자원으로 분류되었다가 트레이드로 데려왔던 나주환, 김성근 부임 이후 자리 잡은 포수 정상호 등도 좋은 사례이며, 일반적인 포지션 가치로 보면 활용 가치가 전혀 없었음에도 그 활용 방법을 찾아내 SK 왕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조동화도 훌륭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정근우최정 발굴은 조범현의 공이라지만 그들을 각 포지션에서 역대급 레전드로 기록될 정도의 선수로 꾸준히 기회를 주며 성장시킨 것 또한 김성근 감독이다. 특히 정근우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 때까지 3차례나 입스가 올 정도로 멘탈 문제와 수비 문제를 안고 있는 선수였지만, 김성근 휘하에서 그걸 극복하고 KBO 역대 2루수 탑 레전드로 손꼽히고 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LG의 최동수,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쌍방울의 마지막 톱타자 윤재국이나 이연수, 심성보, 최태원 등 돌격대 선수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성근의 애제자 1순위로 꼽히는 조범현이나 기업은행 시절 발굴한 윤동균까지. 선수 잘 키워내기로 유명한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비난받는 것에 비하면 좋은 선수를 많이 키워낸 육성 실적이 제법 있는 감독이다.

약간 애매한 케이스는 박용택. 고려대 졸업 이후 스카우트 단계부터 김성근 감독의 훈련 및 인정을 받고 2002년 주전으로 고정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이 컸다. 그러나 박용택의 본격적인 커리어 하이는 2000년대 후반으로 이는 김용달 타격 코치의 영향이 컸으며, 박용택 커리어를 꾸준히 발목 잡았던 어깨 부상 또한 김성근 감독의 지옥훈련의 부작용이었다. 즉 기회를 주고 주전급으로 성장시킨 것은 김성근 감독이 맞지만, 대타자 박용택의 완성은 그 이후의 일이고 한편으로 그 커리어의 발목을 잡은 것도 김성근 감독이란 이야기.

여튼 결론적으로 육성으로 일가견이 난 타 감독에 비한다면야 기간 대비 선수 육성 실적은 그저 그런 편이나 평범한 감독보다는 뛰어나고, 또 오래 감독을 했기에 절대적인 숫자는 많은 편이다. 이처럼 김성근 감독이 선수 육성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비판은 리빌딩/윈나우라는 개념이 정착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상에 따른 비판으로 볼 수 있다.

3.3.3. 김성근 감독의 육성 사례 : 투수

김성근 감독의 육성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 타자보다는 투수 쪽인데, 세간에도 김성근이 투수 조련과 운영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투수를 아주 잘 키워냈으며, 태평양 돌핀스의 짠물 트리오라 불린 신인 3인방, 양상문, 김현욱, 이동현, 전병두,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등등 수많은 투수들을 키워냈고 특히 불펜 파이어볼러들을 잘 키워냈다. 대표적으로는 SK 시절의 전병두, 고효준, 엄정욱 같이 구위만 좋고 제구가 아예 안 되는 선수들을 육성하여 좋은 스윙맨으로 만들어냈다. 삼성 2군 감독 시절 키워낸 배영수 또한 좋은 사례로, 배영수 본인이 당시 그 훈련을 통해 하체를 가장 잘 사용하는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이미 망했다 싶은 선수들을 살려내어 쓰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롯데에서 방출된 가득염. 이미 끝났다 싶은 노장을 LOOGY로서 되살려내어 쓰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자기가 망가뜨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혹사로 이미 망가져서 끝났다 싶었던 박정현조차 쌍방울 임기 말기에 데려와 나름 수준급 선수로 활용하였다.

특히 멘탈 관리에도 뛰어난 편이었는데, 정명원 같이 멘탈에 문제가 있던 선수를 프로야구 최고의 강철 멘탈로 만들어냈으며, 신나게 혹사당하고 끝나버리긴 했지만 그 혹사 이전에는 아예 멘탈이 막장이라 구단에서조차 포기했었던 신윤호 또한 가다듬어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쌍방울 시절에는 김현욱 같이 야구를 사실상 포기했던 선수를 리그 최강의 미들맨으로 키워내기도 하였다. 이 분야의 최고 아웃풋은 바로 임창용. 재능이 뛰어났으나 놀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팀 훈련도 불참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2군에서 썩고 있던 선수였는데, 김성근에게 크게 혼난 후 반성하고 성실한 선수가 되었고, 김성근 역시 아예 숙식을 함께하며 관리를 해준 덕에 오늘날 임창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원포인트 레슨도 좋은 사례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희수윤희상이었다. 윤희상에게는 어깨 통증 등으로 괴로워할 때 김 감독이 해준 말은 "아파도 안 아프게 던질 수 있는 폼을 연구하는 것이 프로의 자세"라는 조언으로 윤희상이 성장할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박희수에게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가 필요하다는 조언으로 투심에 매달릴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 이러한 선수들은 확실히 김성근 감독의 성과라 할 만하다.

다만 가득염 정도의 사례를 제외하면 절친 김인식과 같은 재활 공장장 감독이라기에는 어렵고, 유망주이긴 하지만 사용이 어려웠던 선수들을 훈육하고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그 사용 방향을 잡아내는 것에 뛰어난 감독이었다. 그러나 한화에서의 양훈 사례와 같이 지나친 체중 감량이나 훈련으로 망친 케이스도 분명히 있었으며, 고양 원더스 감독 시절 외국인 선수였던 데럴 마데이의 상위 리그로 올라가고자 하는 절실한 심리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한 혹사를 시켜 다음 해 부상을 당하게 한 반대 사례도 있다.관련 기사[34]

또 투수 육성의 경우 당장의 성적을 위해 신체의 전성기에 다다르기 전에 너무 어린 나이로 과도하게 많은 이닝을 소화시키거나 역할 구분 없이 스윙맨으로 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김성근에 의해 1군에 확고히 정착한 시즌에 고점을 찍고 그 이후로는 다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유리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태평양 시절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 신인 3총사[35]와 OB 시절의 윤석환, 쌍방울 시절의 김현욱, SK 시절의 전병두 등. 선수 본인이 나는 김성근 감독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LG의 이동현도 꼽을 만하다.

3.4. 팀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

KBO에 이름을 남긴, 아니 스포츠계에 이름을 남긴 명감독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KBO 올드스쿨 감독 중에서도 김성근 감독은 김응용 감독과 함께 팀 장악력이 굉장히 뛰어난 감독으로 꼽힌다. 동시에 강한 카리스마로 약팀 특유의 사분오열하는 팀 분위기를 각종 훈련이나 기용 변화 등을 통해 휘어잡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평양 시절 오대산 극기훈련. 극기훈련 자체는 본인 스스로도 "해서는 안 되는 훈련"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태평양 돌핀스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해 “당시 선수들 사이에 패배의식이 너무 뿌리깊었어. 또한 트레이드도 많고 팀도 어수선했지. 그 이전부터 인천팀에는 여기저기서 온 선수들로 구성되다보니 파벌이 심했어. 그래서 극한상황으로 내몰아 하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야. 말 그대로 팀이라는 개념이지”라고 설명했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는 신생 팀 특유의 외인구단 성향이 강했는데,[36] 당시 팀을 대표하는 베테랑 선수였던 김일권, 김윤환이 해태에서 오는 등 타 구단 소속 선수들이 팀에서 밀려난 상태에서 모여든 팀으로 기존 인천 선수들과의 알력 싸움이 심하였다. 이에 김성근은 반발하는 선수들은 2군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통보로 선수들의 반발을 억지로 무마했으며, 극기훈련 이후로도 지옥 훈련은 계속되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아메리칸 펑고 훈련이 너무 힘들었는데, 당시 김일권의 말에 의하면 똥물까지 게워냈다고. 당시 김일권은 김성근에게 "야 이 개xx야 쳐라!" 소리치고 김성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았다 xx야"하면서 쉬지않고 타구를 날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하지만 그런 훈련 결과 그 고집불통이던 김일권마저 휘어잡는 데 성공했고, 사실상 퇴물로 분류되던 김일권은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으며, 1989 시즌 62개의 도루를 기록, 자신을 밀어낸 해태 이순철과의 도루 경쟁에서까지 승리하며 도루왕을 되찾아왔다.

반대의 방식으로 이런 능력을 보여준 건 LG 트윈스 시절. 당시 LG는 선수협 사태 당시 강경파였던 양준혁, 선수협 지지파였던 김재현, 온건파이다가 반대파로 돌아선 유지현 등 선수협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하나로 모여 있었고, 이 문제를 두고 파벌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서용빈은 1999년 병역 비리 사태로 소송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교통사고까지 이어지며 멘탈이 거의 날아간 수준이었다. 심지어 투수진조차도 노송 김용수의 반강제 은퇴 이후 팀이 뒤숭숭한 상황. 즉 팀 자체가 약한 팀은 분명 아닌데, 팀 분위기와 멘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이를 위해 김성근이 선택한 것은 팀의 안정화였다. 그는 이들 모두를 포용하여 양준혁,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을 각각 포지션에 붙박이로 기용하고, 투수는 신윤호를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안정시켰다.

다만 이처럼 장악력을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보니 오히려 강팀에는 안 맞는 스타일이었다. 삼성은 김성근이 맡기 전에도 이미 우승을 다투는 팀이었고, 선수들 또한 팀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팀이었다.[37] 이런 팀에서 어디서 굴러들어온 감독, 심지어 OB 시절 앙숙이었던 감독이 갑자기 나타나 전체를 휘어잡으려 하는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류중일 등 베테랑 선수들의 항명 사태가 터져나왔고, 삼성 시절은 감독 커리어 중 흑역사로 남았다.

반대로 한화 시절에는 이런 장악력이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 이 시점의 김성근은 아예 아무도 태클을 걸 수 없는 "야구의 신"으로 취급받는 시절이었고, 한화 구단 또한 전권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심지어 연배도 워낙 높다 보니 고집은 고집대로 늘어나고, 한참 제자인 코치진들이 직언하기도 어려워진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한화 시절의 운영이 막장으로 가도 그걸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한국에서의 사제 관계로 엮여 있지 않아 비벼볼 만한 쇼다 코우조, 니시모토 다카시 등 일본 코치들은 2015-2016년 충돌 끝에 팀을 떠났다. 특히 2016년 쇼다 타격 코치와 함께 바바 토시후미 작전·주루코치, 오키 야스시 배터리코치 등 일본 코치진 전원이 사의를 표하고 직언으로 유명한 김재현조차 사의를 표한 걸 보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는 2017년 박종훈 신임 단장의 등장과 김성근 경질로 이어졌다.

4. 즉전감 중심의 선수 구성

4.1. 베테랑 선호 성향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쓸 생각은 안 한다고. 예를 들어 작년에 안치용이라든지 그 최동수 같이 SK에서, 버리기 일보 직전 아이들이 일하는 거에요.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쓰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에요. 위기 때, 어려울 때 걔네들이 한다니까. 경험 갖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선수 수명은 지도자 손에 달려 있다. 지도자가 선수를 몰아가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 선수를 선입관 갖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싶다. 사람을 판단하려면 시켜 보고 기회를 주고 판단해야 한다. 시켜 보지도 않고 판단하면 안된다. ... 고참은 말을 안 해도 팀을 끌어가는 자리다. 고참이 야구를 잘하면 팀에 득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독이 된다. 팀 리더는 득이 되는 쪽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다. ... 4강에서 탈락해 다음 해를 기약하는 팀이라면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해 키워야겠지만 4강을 노리거나 우승을 기대하는 팀이라면 베테랑의 힘이 필요하다. 그를 통해 신구 조화도 이뤄야 강팀이 될 수 있다.

김성근의 고참론 “선입견 대신 기술로 평가”, 스포츠경향, 2013. 08. 02 #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시절 내내 외부로부터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노장 선수를 사서 쓰는데 열을 올렸다. 이렇게 영입된 노장 선수들의 대부분은 1,2군을 오가는 백업선수로 활약하다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백업감이나마 많이 영입해 두면 단기적으로 선수층을 두껍게 만드는 데 큰 효과를 내는 것이 사실이며, 실제로 이는 어느 정도 효과를 냈다.

이러한 이유로 김성근 감독은 구단에 수시로 선수 영입을 요청하며, 타팀에서 방출된 선수들을 자유계약 또는 현금트레이드로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실제로 이 노장들로 구멍을 잘 메웠고 꽤 쏠쏠하게 활용했으며, 크게 터지는 선수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근은 애초에 노장을 풀 주전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다. 그저 필요할 때 한번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비싼 돈을 들이게 된다.

문제는 노장 선수들의 경우 연봉이 높은 편이라 가성비가 매우 떨어져 구단 경영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에 부담을 느낀 구단이 김성근의 이런 묻지마식 영입 요구를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구단이 지원을 안해준다고 하면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김성근의 집착적인 노장선수 영입은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3월 9일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태평양 그룹은 그해 겨울,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김성근 영입을 필두로 청보 핀토스 시절의 코칭 스태프들을 전부 물갈이하고,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들어갔다. 이때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김성근은 구단에 일본어로 된 21개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 결과 태평양은 1989 시즌에 앞서 비시즌 기간 동안 이충우(1989년 은퇴), 정영기(1990년 은퇴), 천창호(1990년 은퇴), 김한근(1990년 은퇴), 이광길(1992년 은퇴) 등 은퇴를 앞둔 노장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후에도 김경문(1991년 은퇴), 오영일(1990년 은퇴), 이길환(1990년 은퇴) 등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노장 선수들이 시즌 동안 계속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초반 어느 정도 활약에도 불구, 대부분 급격한 기량 쇠퇴를 겪으면서 김성근 경질을 전후로 은퇴 수순을 밟았다.[38]

1990년 11월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성근은 우승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구단에 강력히 요청하여 1991시즌을 앞두고 무려 일곱명의 노장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OB의 윤석환(1991년 은퇴), 조범현(1992년 은퇴), 신경식(1995년 은퇴), 태평양의 이광길(1992년 은퇴), LG의 최일언(1992년 은퇴), 최홍석(1991년 은퇴), 롯데의 허규옥(1992년 은퇴)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장 선수 중 최일언이 1991년 9승 6패로 어느 정도 활약하였고, 신경식이 트레이드 첫 해 3할 타율과 최다안타 2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외 선수들은 대부분 삼성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김성근 경질과 동시에 은퇴 수순을 밟게 된다.

쌍방울 감독 시절은 약간 독특한데, 본래 쌍방울은 김성근을 영입하면서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원을 스카우트 비용으로 배정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다만 1996년에는 생각보다 주워온 선수가 별로 없었는데, 1996년 영입된 노장 선수로는 김실, 김성래, 박정현이 있다. 이 중 김실 영입은 김실의 커리어 하이로 이어지며 나름 성과를 낸 편이며, 김성래 또한 역할을 톡톡이 한 편. 다만 김성근 감독 이전부터 쌍방울은 타팀에서 선수 주워오는 경향이 강했던 만큼, 8개 구단 중에서 유독 평균연령이 높은 팀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1996년의 성과는 이용일 전 사무총장의 말처럼, 그렇게 큰 지원이 없었음에도 거둬낸 성과라고 볼 수 있는 편. #

쌍방울에서의 노장 사랑이 본격화된 건 1996년 성과를 내고 지원이 더 강해진 1997년이다. 이 시기 쌍방울에는 윤형배, 한대화, 이종두 등 한때 한가닥 했지만 기량이 많이 떨어진 선수들이 이 시기 대거 영입된다. 때문에 선수 연봉 지출액도 수직상승했으며, 기어이 "페이롤 1위"를 찍기에 이른다.[39][40]

SK 감독 시절에도 타 팀에서 방출된 가득염, 안경현, 윤재국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왔고, 최동수,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노장 선수를 열심히 수집하고 젊은 선수들은 딴 팀에 내줬다. 노장 선수만 트레이드해 온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노장 선수들을 SK로 데려왔지만 이제부터 젊게 만들 것"이라는 면피성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하고 나서도 이러한 성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곧바로 권용관, 임경완, 오윤 등 타 팀에서 풀린 방출 선수를 영입하였으며, FA로 송은범배영수를 영입하였다.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도 트레이드로 30줄에 들어선 이성열허도환을 데려오는 등 여전히 노장 선수 영입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화가 10개 구단 중 연봉총액 1위를 찍은 것은 덤이다. 2016년에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장민석, 차일목, 송신영을 데려왔고, FA 자격을 얻은 정우람심수창을 영입했으며, 두산의 코치직을 뿌리치고 나온 이재우를 영입한 바 있다.

4.2. 선수 군입대 억제

이는 절친한 사이인 김인식 감독도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어린 선수들의 군입대는 막을 수 있는데까지 막는다. 중간중간 공백이 생기면 쓸지도 모른다는 게 그 이유. 김성근의 반대로 제때 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경찰청이나 상무 야구단 지원 가능 나이를 넘기 버리고 김성근 경질 후에야 현역이나 공익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비극이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당장 SK 시절만 해도 고효준, 이영욱, 조영민이 김성근 감독의 반대로 제대에 군에 입대하지 못하고 붙잡혀 있다가 결국 군 야구단 입단 가능 시기를 넘어서까지 남아있다가 결국 공익 등으로 병역을 해결했다. 모창민이재원[41], 나주환도 김성근의 반대로 입대를 못하고 계속해서 붙잡혀 있다가 결국 김성근의 동의 없이 구단 프런트가 상무와 경찰청 입대를 허락해서 병역을 해결한 적이 있다.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은 격노했고 프런트와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김성근은 프로야구팀 감독으로 어떻게든 작은 자원이라도 쥐어짜내서 팀을 강하게 하는 것이 직업이지 선수 원활히 군대 갔다오고 FA 비싼 값에 할 수 있도록 생각해주는 것이 직업이 아니다. 정반대 사례로 선동열은 KIA감독 당시 선수들의 장래를 고려해서 대졸선수를 우선적으로 뽑는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선수들 장래는 생각하고 팀 전력은 생각하지 않느냐며 분위기는 험악했다. 선수의 커리어패스를 우선할지, 팀의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우선할지의 문제로 판단은 개인의 몫일 것이다.

4.3. 베테랑 중심의 트레이드와 유망주 유출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시절 내내 프런트를 졸라서 외부에서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노장 선수를 대거 영입하는 방식으로 전력을 보강해왔다. 그 영입은 FA일 수도 있고 2차 드래프트일 수도 있고 방출 선수 주워오기, 트레이드 등 다양한 방법이 있었지만, 팀을 맡았을 때 이런 베테랑 선수들을 데려와 뎁스를 두텁게 만드는 것은 김성근 감독의 오랜 특성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보상선수, 트레이드 카드 등으로 팀내 잠재력이 있는 유망한 젊은 선수들의 유출이 자주 발생하였다. 실제로 한화 시절에도 노수광, 오준혁처럼 트레이드로 보내버리거나 임기영, 박한길, 조영우처럼 보상선수로 내주거나 해서 젊은 선수 유출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올드 팬덤층 사이에서 김성근 감독이 미래를 없애버렸다는 비판이 자주 나타났다.

물론 그렇게 해서 데려온 노장 선수들은 작고 큰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활약들을 보여주었다. 살려조로 활약한 정우람과 심수창은 말이 필요없고, 성적은 별로였지만 어쨌든 한화의 3선발로 이닝은 먹어주었던 배영수, 18년 리그 최상급 불펜으로 리바운딩하고 지금도 불펜의 한 축을 맡은 송은범에 30홈런타자로 한화의 주포가 된 이성열, 최재훈 영입 전까지 한화의 포수진을 어찌어찌 버티게 한 차일목, 백업 허도환까지.

다만, 이 중 큰 활약상을 보인 노장 선수들은 이성열 외엔 FA로 데려온 선수들이었고 거의 200억원 가까이 되는 재정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보였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42]

이는 단기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며 팀의 페이롤과 선수단 나이를 급증시키는 부작용이 있지만, 돈 문제는 애초에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모기업 홍보용으로 적자를 봐가며 예산을 써서 운영되는 KBO리그 특성상 문제는 없다.[43] 2010년대로 들어서며 KBO에서도 페이롤에 신경을 쓰는 추세이긴 하지만, MLB처럼 정말 구단의 생사가 걸려있지는 않다. MLB에서는 스티븐 코헨이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구단주급으로 부자가 아닌 이상 사치세를 초과하며 현질을 할 경우 진짜 구단주가 파산할 수도 있는데, KBO에서 돈을 많이 써도 모기업들이 한국에서 좀 규모있는 기업이 운영하여서 큰 문제급은 아니지만 프런트 입장에서는 다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팀의 연령대 문제. 물론 영원히 젊은 팀은 없으니 전성기가 있으면 암흑기도 오지만, 김성근의 이런 방식은 전성기를 더욱 강력하게 보낼 수 있는 대신 팀의 암흑기도 더욱 빨리, 깊게 찾아오게 만든다. 오히려 돈보다 모기업의 홍보와 이미지 개선이 주된 목표인 야구단에서 암흑기가 길어지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크지 않은 돈인 십몇억 당장 더 나가는 것보다도 치명적일 수 있다.

동시에 프런트 또한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프런트는 모기업의 자회사이며 적자를 보는 게 일상인 프로구단인 만큼 적자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모기업으로부터 성과를 인정받아 예산을 더 받을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설득 또한 가능하다. 그런데 적자를 보는 금액은 나날히 높아지는데 구단의 성적이 최하위에 위치한다면 당연히 모기업 입장으로써는 불신을 가지게 되고 트라우마가 되어 당연히 모기업은 지갑을 닫게 되며 프런트는 적어진 예산으로 어떻게든 선수단 연봉협상과 외인 계약, 스프링캠프 등등을 꾸려나가야 한다.

실제로 김성근 경질 무렵부터 한화는 고액연봉자가 많아져서 박종훈 단장 체제에서 체질개선과 구조개편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정민철 체제 때까지 2022년, 즉 6년 동안 외부선수 0입을 하였고, 김성근 시절 들어온 베테랑들도 점차 내쳐 버렸다. 하지만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자 다시 투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2018년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화는 0입과 더불어 외인들도 저렴한 축에 서는 제이슨 휠러, 키버스 샘슨으로 구성되었는데, 플루크와 올림픽 브레이크라는 행운 덕에 가을야구를 바라볼 입장이 되자 휠러를 버리고 50만 달러에 데이비드 헤일을 영입하였다. 즉, 성적이란 성과를 낸다면 프런트는 모기업으로부터 특별예산을 받아올 명분이 된다. 2023년 스토브리그는 박찬혁 사장이 한화 그룹 본사와 계열사까지 돌아다니며 지원을 요청 및 6년간 0입으로 인해 이제는 투자를 해야한다고 설득한 끝에 150억이라는 실탄을 받아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김성근 감독은 팀 차원에서의 장기적인 플랜보다는 팀의 미래를 희생해서 본인의 임기 내에 성적을 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자원을 갖춰놓으려는 스타일. 노장 수집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본인의 임기 내에 최대한 쥐어짜낼 많은 자원을 갖춰놓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윈나우 성향 감독으로서의 전형적인 성향. 그래도 나름 대박을 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박현준-최동수, 안치용과 양훈-허도환 이성열이 대표적으로 김성근 주도의 성공적인 트레이드로 꼽힌다.

4.4. 노장들의 연금 보험 : 제 식구 데려오기

베테랑 선호만으로 따지면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베테랑들은 그 나이까지 야구판에서 살아남은 만큼 기본 실력들이 있고, 실제로 김성근이 데려온 선수들 중 상당수가 1군에서의 활약상은 남겼다. 노장을 기용해 미래를 팔아넘긴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김성근의 노장 영입은 당장의 구멍을 메꾼다는 목적으로서는 성공이라서 임시방편이라는 단기적인 영입 자체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심이 얽히는 듯한 느낌의 선수들도 꽤 많다는 것. 삼성 시절의 조범현이나 LG 시절 심성보[44], 한화 시절 송은범, 최동수 등의 선수 영입은 정말 저 선수의 기량을 보고 영입한 사례인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선수들의 은퇴와 관련된 내용들에서도 김성근 감독님께 연락을 드려서 기회를 잡아보려 했다 등의 내용이 종종 나올 정도.

심지어 이는 FA에까지도 적용되는데, SK 때의 송은범은 준척 이상의 선수였던 것이 맞으나 FA 시기에는 이미 기아 시절 7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FA로 나오는 것 자체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선수였다. 그런데 이를 데려오면서 보상 선수로 기아에 내준 임기영은 제대하고 복귀한 후 전반기 헥터-양현종에 이은 실질적인 3선발로 매우 뛰어난 피칭을 보여줬다. 반면 김성근에게는 송은범 사용 설명서가 있다는 주장과는 달리 자기 식구 감싸기만 아니었다면 진작 2군에 내려갔어야 할 성적으로 김정은범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반년 뛴 임기영이 한화에서 2년 이상 뛴 송은범보다 승수가 많다는 것도, 후반기에 체력이 떨어져 부진하나 싶더니 한국시리즈에 부활해 팀의 V11에 한몫 단단히 한 것도 한정.[45]

물론 이렇게 은퇴를 앞둔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현역 생활을 연장하고자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자신을 여전히 믿고 기용해주는 지도자가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참 고마운 일이라 상당수가 은퇴 후 김성근을 지지하는 친 김성근 세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안치용안경현이 대표적이다.[46] 하지만 그게 팀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주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

4.5. 외국인 선수와의 관계

김성근은 외국인 선수들과 숱한 기싸움으로 불화를 일으켜왔다. 물론 KBO를 거쳐간 수백명의 외국인 용병 중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사례는 많고, 외국인 용병들과 트러블을 일으킨 감독도 김성근 말고도 많다. 하지만 그 비율로 볼 때 김성근은 갈등이 없었던 외국인 용병이 극히 드물 정도로 외국인 용병들과 숱한 트러블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외국인 선수 도입 초창기인 쌍방울, LG 시절에는 외국인 용병들과의 지나친 감정 싸움으로 팀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그가 명감독으로 인정받게 된 SK 감독 이후부터는 프런트에서 아예 용병을 뽑을 때 이점을 철저히 주의해서 용병을 뽑았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트러블이 줄기는 했다.

특히 외국인 타자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악연으로 끝났다. 투수력을 중시한 김성근 감독이 타자용병을 상대적으로 천시하기도 했고, 특타, 펑고, 강훈련에 특유의 권위적인 성격이 골고루 버무려진 결과. 매일매일 이어지는 강훈련에 한국 선수들보다 적응이 훨씬 어렵다는 점도 부진의 원인. 다만 하술하듯, 당대에는 한국 야구를 우습게 보는 외인도 많았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외인도 많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김성근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외인에게 좀 강압적인 경향은 있었으나, 그건 김성근의 팀 운영 방식이고 그게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로 후임 이만수는 정반대 성향이었는데, 김성근과는 정반대로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다 보니 스캇이나 울프, 레이예스 등 외인들이 줄줄이 항명하는 등으로 거의 팀이 와해되다시피 했다. 뭐 세든 같이 좋은 궁합을 보인 선수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외인 관리에 실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너무 선수를 강압적으로 옥죄는 것도 좋지 않고 너무 풀어주는 것도 좋지 않은데, 어느 정도 외인 관리 경험이 쌓인 SK 시절 김성근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외인 관리를 보여주었다.

사실 타 구단 사례를 보면 아예 외인이 태업을 해버리거나 감독 욕을 하고 짐을 싸서 탈주해버리고, 본국으로 째서 안 돌아오는 등 대형 트러블이 나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외인 제도 초창기에는 한국 프로야구가 외인을 다룰 줄 몰라서 숀헤어나 루이스 안두하 등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패 사례가 많았고, 타이론 우즈처럼 한국선수 패듯이 외인을 뒤지게 팬다던가 하는 웃지못할 사례도 많았다. 이런 측면에서 김성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짬밥이 쌓인 이후 SK시절에는 외인과 나쁘지 않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며 외인 선발 트렌드를 주도하는 등 선진적인 면모까지 보였다. 그 덕에 2007년 외인이었던 레이번, 로마노 듀오는 2군 강등이나 퀵후크에 대한 불만으로 충돌하기는 하였으나 나름 원만히 진행되었고, 2009년의 게리 글로버, 2010년의 카도쿠라 켄과 같이 원만한 관계를 이어간 용병들도 있다.

마지막까지 타 감독에 비해 고쳐지지 않았던 점이라면 조급증. 외인이 못해도 끝까지 살아나리라 믿는 감독이 있는 반면 김성근은 외인이 못하면 조금 기다려주기보단 바로바로 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또한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두고 보면 살아날 지도 모르는 것을 내쳐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데, 결국 끊어야 할 때 못 끊어서 1년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김성근의 경우 조급증으로 모건-폭스같은 실패 사례도 있다. 반면 타 구단 사례를 보면 전반기의 뽕에 취해 대놓고 태업을 하던 히메네스를 시즌 끝까지 교체 못 해서 팀의 추락에 일조한 14 롯데, 나믿가믿이란 말로 유명했지만 끝까지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고 결국 방출된 라이언 가코 등 반대 사례도 많다.

4.5.1. 외국인 선수 실패 사례

4.5.1.1.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1999시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쌍방울 구단이 나름 큰 맘 먹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인 마이크 앤더슨, 제이크 비아노는 김성근의 외국인 용병 잔혹사의 첫 주자들로 다사다난한 시즌을 보냈다. 쌍방울은 본격적인 해외 스프링캠프를 떠나기 전 일단 제주도에서 1차 캠프를 했었는데, 비아노는 거기서 술판을 벌이다가 걸려서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프링캠프에 제외되었다. 이후 투수폼 교정을 두고 마찰을 빚기도 했고 시즌 시작 후에도 두 투수들은 2군 강등과 1군 복귀가 반복되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앤더슨의 경우 전년도에 LG 트윈스에서 주로 마무리로 뛰며 20세이브를 돌파하며 그럭저럭 성적을 냈던 투수였다. 그러나 쌍방울에서 초반에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투구폼을 지적하며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하자, 납득할 수 없다며 훈련에 불참하며 김성근에게 항명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은 앤더슨의 퇴출을 지시했고, 앤더슨은 구단 사장에게 전화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결국 구단의 중재로 앤더슨이 김성근 감독에게 사과하며 사태는 표면적으로 수습되었지만, 이후 앤더슨의 성적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아노 역시 2군 강등과 1군 복귀를 반복했다.

비아노의 경우야 원체 성적도 안 좋았고 스프링캠프에서 술판까지 벌이는 등 문제가 많았으니 논할 여지가 없지만, 앤더슨은 초반에 분명 호투하고 있었던 만큼 왜 김성근 감독이 2군 강등을 지시했는지에 대해 불만을 품울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앤더슨의 잘못에 가까운데,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감이 있지만, 선수와 감독이 수평적 관계인 미국야구와 달리, 한국야구는 감독과 선수를 지금도 '사제' 관계로 칭할 만큼 굉장히 수직적인데 이게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된 90년대, 20세기에는 더 심했다. 김성근 입장에서는 감독이 투구폼을 교정을 해 주려 하는데, 선수가 감히 스승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만약 국내 선수가 감히 스승의 지도를 거부했다면 2군에 가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맞다. 일종의 문화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 앤더슨의 대처는 선을 넘었다. 물론 감독이나 코치가 자신의 폼에 손을 대려고 하면 불만이야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을 훈련 불참이란 형태로 직접적 항명으로 표현한 것도 모자라 코칭 스태프와 감독을 무시하고 멋대로 구단 사장에게 전화를 거는 등 조직 체계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미국 기준으로도 선을 넘는 행위다.

미국이라고 타격코치 투수코치 없는 것이 아니고, 코치나 감독이 폼에 손을 대는 행위 역시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감독이 투구폼 수정을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 상호존중을 통한 대화나 타협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항명과 구단 사장에게 꼰지르기로 대처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감히 야구 후진국의 허접한 코치와 감독이 그들보다 야구를 잘하는 나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불쾌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든 행위로, 초창기 외국인 선수 도입 시기 한국 야구 수준을 낮잡아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선수가 많았던 그 시절의 방증.
4.5.1.2. LG 트윈스 시절
4.5.1.3. SK 와이번스 시절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은 2008년 부진했던 투수 다윈 쿠비얀을 단 3경기 만에 퇴출시켰고, 대체 투수 케니 레이도 5경기 만에 방출했다. 2009년 마이크 존슨크리스 니코스키도 각각 2경기와 9경기 만에 퇴단 조치시켰다.
4.5.1.4. 한화 이글스 시절

4.5.2. 외국인 선수 성공 사례

4.5.3. 투수 중심의 외인 구성 주도

외국인 선수 선발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타이론 우즈, 펠릭스 호세, 제이 데이비스 등의 리그를 지배하는 타자들로 인해 타자 외국인 선수가 대세였다. 특히 수비력보다는 확실한 장타력을 가진 선수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비력보다 공격력이 훨씬 중요시되는 1루수 및 코너 외야수 포지션의 선수를 영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는 KBO 리그가 전체적으로 투수진의 양적 질적 부족이 심화되었고, 2006년 두산이 비록 5위를 하였지만 다니엘 리오스 - 맷 랜들 듀오의 강력한 원투 펀치를 구성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를 선동열의 삼성이 따라하였고, SK에 부임한 김성근 또한 가장 부족한 건 선발이라는 결론을 내며 2인 외인펀치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투수 용병의 시대가 개막하기에 이르렀다.

2007 시즌 김성근 감독은 외국인 2명으로 선발을 채운 다음 채병용-송은범-이영욱 등 5선발 체제를 구축, 단단한 불펜을 앞세워 우승, 08시즌에는 김광현 - 채병용 - 외인 선발 2명 - 송은범으로 5선발 구축한 후, 트레이드로 데려온 전병두와 고효준을 스윙맨으로 굴리면서 강력한 투수력을 앞세워 08 한국시리즈 2연패를 거두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렇게 06/07 시즌 두산과 07/08 시즌 SK가 외국인 원투 펀치로 재미를 본 것을 보고서, 기아마저 09시즌에 구톰슨-로페즈 원투 펀치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양현종-윤석민이 뒤를 받쳐주고 타선에는 최희섭-김상현의 일명 'CK포'가 가동되면서, 전년도 하위권에 머물렀던 기아가 투타 전부 맞물리며 우승까지 차지하기에 이르자 이 시즌을 기점으로 메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사실 투수 듀오 용병 구성이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효율적인 전략이라기보다는 두산의 고질적인 투수력 약세에 맞물린 변칙 전략 수준으로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그전까지 한국 야구에서 MLB와 같은 미국 야구를 볼 때는 투수보다는 강한 힘이 강조되는 거포형 타자를 더 주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7-2009 SK와 기아가 이 전술로 우승에 성공하자, 2010년에 이르면 외국인 타자는 클락과 가르시아 단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 12~13시즌은 전 구단이 투수를 2명 뽑게 된다. 이에 오히려 타자 용병을 뽑는 게 변칙이 될 정도로 대중화되기에 이르렀고, 10구단 체제로 넘어가면서 결국 KBO는 용병 3명 중 투수는 최대 2명으로 제한을 두기에 이르렀다.

5. 경기 운영

5.1. 일본 스타일의 스몰볼, 작전 야구 선호 경향

기자: 지난해 기록을 분석하니 번트는 강공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김성근: 타순을 봐야지. 4번 타자 앞의 3번 타자에겐 나도 번트를 지시하지 않는다. 번트에 대해서라면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번트는 한 점을 내는 작전’이라고 하지만 번트로 대량 득점이 가능한 때도 있다. 상대 실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주자가 2루에 가면 흔들리는 투수도 있다. 번트는 여러 목적을 갖고 하는 작전이다.
- 김성근에게 SK 야구를 묻다
“메이저리그 야구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저번에 보니 초반부터 번트를 대고 작전도 많이 쓰고 있다. 마무리투수도 8회부터 등판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렇게 야구할 때 얼마나 많은 욕을 들었나. 그런데 지금 메이저리그도 그런 야구를 한다. 내 야구가 세계적인 추세가 됐나보다”라며 껄껄 웃었다.
- 고양 김성근 감독 "내 야구가 세계적 추세"

김성근은 감독 시절 내내 일본식 스몰볼을 매우 신봉하는 모습을 보였다. 투수 부문에서는 잦은 투수 교체를 기반으로 한 '벌떼야구'를 구사했고, 공격 부문에서는 특히 [번트]를 자주 이용하여 한점씩 쌓아가는 야구를 매우 선호한다. 또 수시로 작전을 걸고 대타도 자주 기용하는 스타일이다. 번트와 작전 야구를 선호하는 만큼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컨택이 뛰어난 교타자를 우선적으로 기용하는 경향이 있고, 야수의 수비력을 공격력보다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50] 이 과정에서 주로 기용했던 선수들이 정근우, 이용규 등의 재간 좋고 기동력 좋은 야수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조동화 등 극단적으로 공격력이 떨어지지만 수비력과 작전 수행 능력 때문에 활용되는 선수들도 있었다.

김성근의 스몰볼은 그의 커리어 내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세이버 매트릭스 등 데이터를 근거로 경기력 측면에서 번트와 작전이 팀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된다는 비판에서부터, 과도한 번트와 작전으로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자팀팬들의 비난과, 작전으로 상대팀을 도발한다는 타팀팬들의 비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커리어 내내 자신의 번트와 작전 야구에 대한 의지와 고집을 이어나갔다. 번트와 작전 야구에 대한 김성근 감독의 지론은 고양 원더스 감독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한 인터뷰에서는 메이저리그도 최근 스몰볼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내 야구가 세계적 추세"라고 말하기도 했다.

5.1.1. 비판론

김성근의 스몰볼 야구는 김성근 특유의 비매너 플레이와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야구팬들에게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번트 위주의 재미없는 야구는 자팀 팬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삼성 시절과, 호쾌한 신바람 야구가 캐치프레이즈였던 LG 감독 시절에 팬들의 반발이 많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다른 감독들이 장기를 둘 때 김성근 감독은 바둑을 두고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오늘날 세이버메트릭스를 이용한 각종 지표와 보고서들은 일관되게 번트가 강공보다 득점 확률을 떨어뜨린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현대 야구에서는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강공이 번트보다 득점 확률이 높다고 보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다.

번트 위주의 스몰볼이 오히려 득점 확률을 떨어뜨리는 구시대적 야구 방식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때마다, 김성근 감독의 팬덤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맡은 팀들은 강한 타자가 없었던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스몰볼을 했다는 주장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김성근이 맡았던 팀 중에 태평양 돌핀스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모두 김성근이 맡기 직전 성적을 기준으로 할 때 나름 리그 중상위권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좋은 타선을 가진 팀을 가지고도 항상 스몰볼 야구를 구사해 왔던 것.
5.1.1.1. 메이저리그의 스몰볼
김성근 감독이 메이저리그의 스몰볼에 대해 이야기한 시점은 2012년인데, 이때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투수력과 교타력을 앞세워 우승을 한 해였고, 이 외에도 오클랜드 에이스 등 넓은 구장 탓에 지키는 야구를 하는 팀이 돌풍을 일으켰고 이 이후로도 몇년간 스몰볼을 앞세운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전성기를 맞는 등 당시 MLB는 확실히 돌아온 스몰볼 붐이 불던 시기이긴 했다. 하지만 이는 2010년대 MLB식 스몰볼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겉보기만 보고 한 발언이다.

애초에 이러한 스몰볼을 내세운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캔자스시티의 홈구장은 모두 악명 높은 투수 친화 구장이다. 리그 평균보다 홈런이 20%가량 적게 나오는 곳들이다. 어차피 비싼 돈 주고 장타자와 FA를 맺어도 홈런 수가 확 줄어버리니, 가성비 좋은 수비형 선수들로 로스터를 채우고 세이버매트릭스에 기반한 적극적인 시프트를 통해 수비로 일을 내보자는 것이었다. 2010년 구장 외야를 개조하기 전에도 SK 홈구장의 파크팩터는 리그 평균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2010년 이후에는 리그 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홈런공장으로 변모했다. 즉 SK와는 처한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게다가 캔자스시티와 오클랜드는 MLB의 대표적인 스몰마켓 팀들이다. 한마디로 홈런을 뻥뻥 날려대는 강타자들을 사올 돈이 없어서 머리를 싸매다 나온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수비가 뛰어나고 방망이가 약한 타자들은 기여도에 비해 값이 쌌기 때문. 그리고 오클랜드와 캔자스시티, 샌프란시스코의 경우에도 타선에 강타자가 없었던 게 아니며, 철저히 데이터 기반 야구를 지향했던 팀들인 만큼 이들에게 번트나 작전 지시를 남발하는 경우는 없었다.
5.1.1.2. 한화에서의 스몰볼의 실패
김성근의 스몰볼과 작전야구는 한화 시절 완전한 실패를 겪으면서 야구팬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상황이다. 김성근의 한화 이글스는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번트를 시도한 팀이었지만, 번트 이후 한화의 득점 성공률은 43.2%로 리그 8위에 그쳤다. 대타 역시 한화의 대타 성공률은 리그 7위에 불과했다. 때문에 김성근의 작전이 오히려 한화의 득점 확률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실 타격 생산성 나쁜 타자가 나왔을 때는 번트가 1점을 확실히 얻는데는 강공보다 확률이 높다는 것은 사실이며[51] 따라서 경기 종반인 8,9회에 1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상황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주저없이 번트를 하기도 하고, 세이버매트리션들도 나쁘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희생 번트를 성공해도 무사 1루라는 다득점 찬스를 1사 2루로 바꾸기 때문에 다득점을 낼 확률은 강공보다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특히 문제는 김성근이 한화 감독을 맡기 바로 전인 2014년부터 KBO리그는 엄청난 타고투저 리그가 되었다는 점이다. KBO리그의 평균 팀당 득점은 2015년 5.46점이고, 2016년은 5.65점이니 다득점 포기하고 번트로 1점 뽑아봐야 역전당하기 일쑤다. 때문에 2010년대 중반부터 상식적인 KBO리그의 각 팀들은 희생번트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2015년 한화의 희생번트 수는 139개의 압도적인 1위로 NC 다이노스(68개)와 넥센 히어로즈(61개)의 두 팀을 합친 것보다 많다. 갈수록 희생 번트 수가 줄어드는 2017년 기준이라면 넥센 히어로즈(21), 두산 베어스(48), KIA 타이거즈(55) 세 팀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엄청난 투고타저 시즌인 2012년 최다 희생번트 수가 KIA의 133개였는데 이보다도 많다는 건 타고투저고 나발이고 신경안쓰고 무조건 번트만 하겠다는 거다. 참고로 김성근이 맡은 2010, 2011년 SK 와이번스의 희생번트는 147개였다.

이러한 처참한 지표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이 계속 번트와 작전, 대타에 집착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확실히 그게 잘 먹혔기 때문. 2010년대 들어 급격히 타고가 진행됐지만, 김성근은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크보 현장에서 거의 3~4년간 떨어져 있던 사람이고, 그의 전성기인 2000년대에는 김성근뿐만이 아니라 선동열, 김재박 등 이런 불펜야구 쌕쌕이 스몰볼 메타가 크보를 관통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화에 부임할 시점에는 이미 시대에 뒤쳐진 감독이었던 것이다.

5.1.2. 옹호론

희생번트가 기대득점값을 낮춘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희생번트가 항상 나쁘다는 생각은 바보 같은 생각이다. 경기 초중반까지는 기대득점값 자체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기대치 자체보단 '한 점의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 희생번트에 대한 세이버메트릭스의 최초의 견해는 혁명에 가까웠고, 몇십 년째 사용되던 작전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그 몇 년 미묘한 차이의 논리에 의해 최초의 이론은 다시 기존의 통념과 가까운 쪽으로 대체되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이제 희생번트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지만, 현장에는 아직 희생번트 무용론을 외치는 자들이 남아 있다.
- 세이버메트릭스레볼루션, 한빛비즈

번트는 단순히 번트 하나만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번트는 가장 기본적인 작전이며, 번트라는 시스템 하나에서 다양한 작전이 유발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번트에 따른 수비 시프트 변화와 에러 유발. 그리고 페이크 번트 앤 슬래시까지, 번트는 흐름을 끊을 수 있는 행위이며 투수가 강제로 뛰어야 하는 상황을 만듦으로써 투수의 체력을 소모시킬 수 있다. 여기에 번트를 대는 척하면서 도루로 전환하는 등, 번트 동작 하나만으로 다양한 작전이 시작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투수와 수비진을 흔들 수 있다.

정말 위험한 것은 번트가 아니라 뻔하게 예상되는 상황 자체이다. 1루만 나가면 무조건 번트를 대는 것도 위험하지만, 타자와 상관없이 무조건 강공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다. 수비 시프트의 발달과 함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경우의 수도 더욱 늘어났기 때문. # 반대로 1루만 나가면 히트앤런을 남발하던 백인천 등도 큰 비판을 받았다. 상황상 필요하다면 그 흐름을 깨는 전술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하나만 고집하는 방식은 무엇이 되었든 비판받아야 하고 실제로 비판받았다.

무엇보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수치는 평균치일 뿐이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타격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이 관점에서 이 평균치에는 계산할 수 없는 오류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상위 타선에서 1루로 나갈 확률이 하위 타선에서 1루로 나갈 확률보다 높다. 즉 상위 타선에서 1루로 나가고 강한 타자가 타석에 서는 경우 자체가 확률상 더 높기 때문에, 전체 평균으로 보면 확률이 떨어지더라도 하위 타선 기준에서는 반드시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SK 시절의 특성을 보면, 당시 SK 와이번스는 장타의 팀이라기보다는 출루의 팀이었다. 현재의 세이버메트릭스 분석에 따르면, 같은 리그평균득점 조건에서 출루율이 높을수록 그리고 장타율이 낮을수록 희생번트 효율성은 높아진다. 이 당시 SK 와이번스가 장타율이 그렇게 낮은 팀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장타율은 많은 2루타에서 비롯된 부분이 컸다. 즉 최정 각성 이전 이대호나 박병호 같이 탁월한 거포가 없는 당시 SK로서는 높은 출루율을 바탕으로 2루까지 진루한 후, 1-2루타를 통해 득점을 빨리 확보하는 것이 전형적인 공격 패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일반적으로 아는 세이버매트릭스에서는 무사 1루와 1사 2루만 계산하는데, 무사 1루는 병살을 전제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SK는 이러한 스몰볼을 기반으로 2008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서 각 구단 중 가장 적은 병살타를 기록하였다.[52] 즉 당시 SK는 병살을 줄임으로써 득점 찬스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2007-2011까지의 왕조 SK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대로 현재 세이버메트릭스에서는 희생번트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2012년부터 메이저리그 또한 스몰볼이 다시금 부활하였다. 애초에 스몰볼과 빅볼은 그 중 어느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시기적인 흐름이다. 투고타저가 중심이 되는 시대에는 스몰볼이, 타고투저가 중심이 되는 시대에는 빅볼이 좀 더 효용 가치가 높아지는 편이다. 그리고 당시의 SK는 왕조라 불릴 정도의 성적을 통해 그 성과를 증빙하였다 할 수 있다.

5.1.3. 김성근 감독이 맡았던 팀들과 스몰볼 성향

김성근의 스몰볼과 관련하여 자주 나오는 얘기 중 하나는 팀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는 부분이다. 즉 강타자들을 많이 보유한 팀이었다면 2010년 롯데 같은 공격야구를 했을 것이라는 소리로, 이는 김성근 감독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한 바가 있다. 반면 비판론 측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SK 이전까지 맡았던 팀들이 결코 타격이 약한 팀이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양측의 의견을 같이 서술하여 비교하도록 한다. 여기서는 양측 모두 팀 타격이 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평양 돌핀스를 제외한 타 팀의 당시 상황을 서술한다.
5.1.3.1. OB 베어스 시절
5.1.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5.1.3.3.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5.1.3.4. LG 트윈스 시절
5.1.3.5. SK 와이번스 시절

5.2.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기 운영

"깨끗한 야구를 해 달라."
- 신영철 SK 사장
"세상 사람들은 아주 내 야구 가지고 드럽다, 일본식이다, 이리저리 비난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런건 전혀 신경도 안썼고 오히려 선수들에게는 바깥에서 뭐라고 얘기하던간에 신경쓰지 말아라, 걔네들 야구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라고. 이런식으로 말한 경우가 많았어요."
- 2012년 4월 18일 '꼴지를 일등으로' 강연
정진영: "(상대가) 기분 나쁠 수 있겠어요. 감독님"
김성근: "사람들이 기분 나빠도 난 상관없어요. 이긴다는 것 자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해요."
- MBC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김성근
"승부세계에는 모략도 하나의 전술이에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깅성근의 야구는 승리지상주의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좋게 보면 악착같이 승리를 위해 매달리는 야구라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보면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화 이글스 이전 야신으로 포장되던 시기까지는 전자의 의견이 더 우세했다면,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부터는 후자가 좀 더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전반적인 여론의 흐름이었고, 사실 SK 와이번스 감독 이전까지만 해도 후자의 여론이 꽤나 강했으며, SK 왕조의 성공 사례 과정에서 전자가 일시적으로 우세해졌고 그전까지는 인터넷 발달이 덜 되던 시기였던 만큼 그전의 모습이 가려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뒤의 옹호론과 비판론을 읽을 때 알아두어야 할 부분인데, 김성근의 승리지상주의 경기 운영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옹호는 그래서 규정을 어긴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고 비판은 그래도 이것은 비매너 플레이라는 부분이다. 실제로 김성근의 경기 운영은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이거다 하는 규정을 어기진 않고 교묘하게 그 허점을 찌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김성근의 야구관과도 이어지는데, 김성근의 야구는 스포츠에서의 승패보다는 전쟁에서의 승패와 같고, 스스로를 야구단의 감독이 아니라 전장의 사령관으로 보는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송양지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에서는 정정당당함이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도 그러한가? 김성근 감독에 대한 옹호와 비판은 이 엇갈린 시선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5.2.1. 위장타순과 위장선발, 이중오더에서 플래툰까지

김성근은 80년대부터 타자, 투수 가릴 것 없이 가장 적극적으로 좌우놀이를 사용하던 감독 중 하나였다.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위장타순(위장오더), 위장선발, 이중오더 등의 비신사적이고 편법적인 방법들을 남발하며 지속적으로 야구팬들과 언론의 비판을 받아왔다. 90년대 중반까지는 선발투수예고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편법들이 가능했다. 당시 언론 기사들을 살펴보면 당시 김성근이 지나치게 위장오더, 위장선발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 김영덕 등 다른 일본야구 출신 감독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53] 물론 포스트시즌에서는 몇몇 감독들이 총력적을 하면서 위장오더를 사용한 경우가 있지만, 시즌 중에서는 김성근의 팀에 맞대응 및 보복으로 행하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감독들은 위장오더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또 김성근이 강연 등에서 해온 말들을 보면, 선발투수 예고제가 생기기 전인 80~90년대에 김성근은 경기장에 미리 첩자를 잠복시켜 상대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미리 알아내는 방법을 빈번하게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좌타순 오더와 우타순 오더를 미리 작성해 둔 후 상대 선발투수가 누군지 미리 알아낸 후, 이에 따라서 오더를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이러한 방식을 데이터 야구로 치장하고는 하였다. 해태-삼성전에서 벌어진 그 유명한 이중오더 사건도 이러한 김성근식 편법 야구의 연장선상에 발생한 일이다. 96년 김성근이 다시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고, 그 결과 마침내 선발투수 예고제가 정식으로 KBO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였던 위장오더는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타자의 좌우놀이, 위장오더, 이중오더와 함께 투수 입장의 좌우놀이를 악용하는 위장선발도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여기서 위장선발이란 1회 1아웃 직후 다른 팔 투수로 투수를 교체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역시 김성근이 80년대부터 빈번하게 사용했던 일이었고, 90년대인 삼성, 쌍방울 감독시절에는 위장 선발을 너무 남용하여 이를 비판하는 언론 기사들이 보도될 정도였다. SK 시절에도 빈번하게 위장선발을 이용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부임 초기에 이동걸 빈볼 사건으로 김성근식 야구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거세지자, 1회 1아웃에 대놓고 교체하는 행위는 줄었지만 2회 전에 다른 팔 투수로 교체하는 방식은 여전히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SK 시절에는 타자의 플래툰 기용을 즐겨했다. 이것은 치바 롯데 인스트럭터로 있던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에게 배운 것이라고 한다. 발렌타인 감독이 치바 롯데에서 플래툰을 잘 써먹었는데, 그 대표적인 선수가 이승엽이었다. 이승엽의 개인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치바 롯데에 들어갔던 김성근은 필연적으로 발렌타인의 플래툰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발렌타인 감독의 운용을 보면서 세부 운용 측면에서 여러가지를 배우고 진일보한 측면은 있겠지만, 사실 이러한 플래툰 기용은 김성근에 예전부터 즐겨해오던 타순의 좌우놀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김성근 덕분에 선발투수예고제가 시행된 이후였기 때문에, 위장타순이나 이중 오더처럼 대놓고 하는 기만 행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K 시절 김성근의 플래툰 기용은 도가 지나칠 정도여서 당시에 비판을 받았다. 이는 외야진에서 이진영, 박재홍, 박재상, 조동화, 김강민 등 주전급 선수들도 대부분 플래툰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당시 야구팬이나 언론으로부터 팀의 미래를 갉아 먹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 이승엽이 플래툰 기용 방식 때문에 크게 고생했던 터라 그걸 잘 알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오히려 플래툰을 남발하느냐는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으며, LG 시절부터의 제자였던 김재현도 이 플래툰 기용을 두고 마찰이 생겨 한동안 굉장히 껄끄러운 관계였다.

5.2.2. 비판론

김성근은 규정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의 비매너도 가차없이 저질렀다. 위장타순과 위장선발, 오프너 전술 등으로 경기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했고, 상대 팀의 컨디션 좋은 타자를 맞추는 악의적인 빈볼, 스파이크를 높이 드는 거친 플레이 등으로 상대를 위축시키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또 상대방의 흐름을 끊고 선수를 흔들기 위해 로진 사용, 방망이 색깔, 마운드 높이, 타격폼 및 투구폼 등 트집잡기성 항의를 일삼았으며[54], 언론을 이용하여 상대 감독의 선수 기용을 비판하고 상대 팀을 도발하는 등 규칙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상대 팀과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시즌 내내 끊이지 않고 갖은 수법으로 도발하는 임팩트가 너무 커서, 당시에는 김성근의 선수 혹사 등의 다른 문제는 별로 문제거리로 언급되지도 않을 정도였다. 비매너 플레이의 수많은 사례들은 김성근/구설 항목 참조.

사실 김성근/구설 항목에 기록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인터넷이 없고 스포츠신문이라곤 단 두개 밖에 존재하지 않던 1980~90년대 상황을 감안하면 현재 기록으로 남은 것은 김성근의 수많은 비열한 행위 중 정말 일부에 불과하다. 80년대 TV 중계로 야구를 보던 사람들에 따르면 김성근의 팀과 붙으면 거의 한 경기에 한번씩은 열받아서 뒷목잡는 경우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전혀 공론화되지 않았다.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개막 직후인 4월 12일 또다시 이동걸 빈볼 사건이 일어나며 김성근 특유의 비매너 야구가 부활하는가 싶었다.[55] 그러나 전 구단 야구팬들이 맹렬하게 비난하고 각종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지상파 방송 메인 뉴스에까지 보도되는 등 사회 문제 수준으로 사태가 커져버렸다. 이 사건의 후폭풍이 너무 거세었던 나머지 이후 김성근 야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빈볼 등 비매너 플레이는 크게 줄었다. 하지만 대신 그동안 가려있었던 혹사와 마구잡이식 기용, 유망주 유출, 특타(벌타) 등 다른 문제들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다른 비매너 사례로는 다른 팀의 훈련 염탐 사례가 있다. 김성근은 몰래 사람을 보내 다른 팀의 훈련 장면을 엿보고 정보를 빼온 것을 데이터 야구의 사례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이런 방법으로 고교 감독 시절 우승을 차지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김성근이 고교 감독 시절 4대 메이저 대회[56]에서 한 번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던 점은 논외로 치고, 이것은 반칙은 아니지만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되긴 한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안면몰수식 행태가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이러한 방식을 정당화하며 따를 것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야구를 따르지 않은 선수는 벌투와 2군 강등 등의 혹독한 처벌이 내려졌다. 대표적으로 다른 팀 선배에게 빈볼을 던져서 미안하다고 했다가 벌투 및 2군 강등이라는 혹독한 처벌을 받아 논란이 된 조영민 사건이 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 밑에 있던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김성근이 지시하는 비매너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김성근의 팀에 있던 선수들은 현역 시절 더러운 플레이를 한다고 욕먹은 선수들이 많다. 단적으로 SK 시절 정근우, 윤길현, 채병용, 나주환, 김강민 등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더티 플레이로 타팀 팬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사인 훔치기와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사인 훔치기 자체는 다른 팀도 할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비난할 수는 없다는 입장도 있으나, 김성근은 사인 훔치기 그 자체보다 상대팀이 사인을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상대팀을 흔들고 나쁜 놈으로 만드는 행위를 많이 했다. 심지어 정작 스스로는 사인 훔치기를 해놓고, 사인 훔치기는 당한 쪽이 잘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내로남불의 태도를 보였다. # 이걸 좀 일관된 시선으로 본다면 사인 훔치기를 핑계로 상대를 흔드는 승리지상주의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2002년과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이미 패한 이후조차 우승팀인 삼성과 기아가 사인을 훔쳐서 우승했다고 주장하면서 잔치집에 찬물을 뿌리는 행위를 하기도 했다.

5.2.3. 옹호론

엄밀히 따지면 위장오더는 반칙이 아니다. 미리 슬쩍 떠보고 유리한 라인업으로 제출하는 게 좀 치사해서 그렇지, 규정에 이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MLB에서는 위장오더 논란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동양야구에서 선발예고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어지간하면 전날 예고한 대로 선발을 내는, 실질적 선발예고제인 관습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이도 전략의 일부이며 반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장선발도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선발예고를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그러나 보통 감독이 웬만하면 누가 선발로 나올지는 예고는 해주고 있지만 만약 포스트 시즌 같이 신경전이 날 경우 안 알려주는 경우가 있다. 내일 누구 낼 거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서 예고하는데, 여기서 입 다물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여기서 일부러 예고한 선발과 다른 투수를 내기도 한다. 이는 오히려 변칙전략의 일종으로 평가되지 비열하다고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57] 당장 2020년에도 포스트시즌에서 휴스턴을 상대로 양키스가 위장선발을 냈는데, 결국 기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가이지 그래서 위장선발을 사용한다고 욕 먹진 않는다.

초창기 야구에는 타순이란 게 없었고 진행중인 이닝에 출루하지 않은 타자는 아무나 타석에 설 수 있었는데, 경기 진행 중 하도 좌우놀이를 해대다 보니 기록이 미비하던 시절 출루했다가 아웃된 놈이 또 타석에 스리슬쩍 서기도 하고 감독이나 기록원도 헷갈리는 등 경기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어느정도 정리를 위해서 18세기 말에 생겨난 것이 배팅 오더다. 타순을 정해놓는 것 자체가 게임진행의 편의를 위해서 생겨난 룰이지 스포츠맨십을 위해서 생겨난 룰이 아니다.

일본의 아테우마 오더라고 불리는 이중오더 또한 날이 갈수록 빡빡해지는 로스터로 인해 대주자, 대타로 쓸 수 있는 선수를 위장오더로 쓰는 행위가 비효율적이라 자연스럽게 안 하게 된거지, 스포츠맨십과는 별 상관없다. 세리그 파리그의 선발예고제 또한 관중몰이를 위해서 하게 된 거다. 세리그는 2012년에 선발예고제를 실시했는데 아테우마오더는 이미 00년대 중반쯤부터 멸종한 상태였다.

빈볼과 관련해서 미국 야구는 오히려 몸에 바짝 붙는 위협구나 빈볼에 관대하다. 미국은 마초이즘을 상당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명분없는 고의 빈볼[58]에도 칭찬을 많이 한다. 과거 돈 드라이스데일은 고의사구 4개 던지는 투구수를 아끼기 위해 그냥 몸에 하나 던져 맞춰버리는 플레이를 즐겼고, 로저 클레멘스는 마이크 피아자가 자신의 공을 잘 친다는 이유로 피아자가 나오면 대놓고 몸에 맞춰댔다. 그러나 온화한 성격의 피아자는 싸움이 싫고 보복구가 또 날아올 것을 두려워해 클레멘스에게 덤비지 못했는데, 당시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이런 피아자를 조롱했고 그게 대놓고 언론에 실릴 정도로 여론은 피아자를 쫄보라고 놀려대는 쪽이었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도 이어져 노아 신더가드가 주저없이 머리에 위협구를 날리자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배짱있는 놈이라고 칭찬했고, 여튼 MLB에선 명분따위 없어도 위협구와 빈볼은 작게는 1루 진루부터 크게는 타자가 달려들어서 개패듯이 두드려 맞을수도 있는 리스크를 지고서라도 타자가 타석에 바싹 붙는 것을 막고 자신의 존을 확보하기 위해 던지는 엄연한 승부의 수단이며, 타자는 타자대로 싫으면 피할 수도 있고, 맞아서 출루를 하는 선택도 가능하며[59] 다 집어치우고 다신 나에게 위협구를 던지지 못하도록 주먹으로 참교육을 해 줄 수도 있는[60], 양측에게 다 리스크와 리턴이 존재하는 시합의 일부다. 이런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기술인 빈볼과 위협구를 적절히 잘 사용하는 것은 명분따위 없어도 칭찬을 들을 만한 일이고 실제로 듣는다. 야구는 대놓고 심판의 눈을 속이는 프레이밍 같은 플레이가 기술로서 인정받을 정도로 걸리지만 않으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정신이 지배하는, 스포츠맨십과는 100만 광년쯤 거리가 있는 스포츠다.

이는 야구의 탄생 배경과도 관계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유럽의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간의 다툼을 대리하는 성격을 띄게 되다 보니 하다가 죽는 사람도 나오고 해서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포츠맨십을 엄격히 강조할 필요가 있던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놀이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심판도 속을 만한 창의적인 플레이라면 재미있으니 OK였던 것. 또한 거친 미개척 대륙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 속이는 놈이 나쁜 게 아니라 당하는 놈이 바보라는 신대륙의 정서가 겹치게 되니 이렇게 스포츠맨십을 우습게 여기는 스포츠로 완성되었고, 그것이 야구의 독특한 매력이 된 것.

실제로 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 '속이는 놈이 아니라 당하는 놈이 바보다' 라는 정서는 미국을 지배하는 근본 정서 중 하나라 야구 외에도 농구나 미식축구 등 미국 태생의 스포츠는 거의 다 이렇다. 파울을 '해서는 안 되는 비신사적 행위'로 여기는 축구와는 달리 농구나 야구는 반칙도 '대가만 치르면 얼마든지 해도 되는 게임의 일부' 로 여기는 것이다. 농구 같은 거 보면 상대방의 결정적 찬스를 막기 위해서는 파울도 거침없이 하고, '파울 한 개와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등 이러한 반칙조차 게임의 일부로서 취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금지약물이 한국이나 일본보다도 더 성행하고, 약물 복용자들도 얼마든지 영구결번과 명예의 전당 등 명예와 존경을 얻는 것도 이러한 정서가 영향을 끼친다. 약물도 일단 안 걸리면 그만이고, 걸리더라도 출장정지나 벌금 등 처벌로서 '대가를 치르면 얼마든지 해도 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

그런 야구에서 스포츠맨십을 중히 여기는 행위는 사무라이 정신을 야구에 대입한 일본의 '야구도'에서 온 것인데, 일본식 스몰볼 하는 일본 출신의 감독이 가장 미국적인 야구를 하고 있고 그가 일본에서 와서 싫고 일본식 야구를 해서 싫다는 양반들이 정작 본인들이 일본식 야구도에 경도되어 김성근이 하는 미국야구의 근본 정신을 비신사적이라며 조롱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훈련 염탐은 시대상을 감안하면 충분히 데이터 야구가 맞다. 지금이야 방구석에서 유튜브로도 불펜피칭 영상을 볼 수 있어서 일반인들도 클릭 몇번으로 접할 수 있는 데이터지만 데이터는 커녕 프로야구가 생기기도 전인 당시로서는 저정도만 되어도 고급 데이터로 저런 상황에서 나름 초창기 데이터야구의 터를 닦은 감독이고 한국에서 저런 데이터마이닝(?)을 한 감독이 이전에 별로 없었음을 고려할 때 최소한 한국내에서는 창시자라고 해도 무방하고 김성근 본인의 말은 맞다. 다만 문제는 김성근이 선도한 40년전 데이터야구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통계와 흔히 생각하는 머니볼에 나오는 세이버를 이용한 00~10년대의 데이터야구와는 꽤 차이가 있고 김성근은 10년대 들어서까지 저 수준을 벗어나질 못해서 뒤쳐져서 그렇지 선구자는 맞긴 맞다.

프로야구 감독 시절에는 매일 경기를 하면서 전력이 사실상 다 노출된 상황이라 몰래 훈련을 살펴볼 필요는 없었지만, 김성근은 상대팀의 선발 투수를 미리 알아내기 위해 야구장에 몰래 사람을 미리 보내 누가 일찍 출근해서 몸을 풀고 있는지를 알아내곤 했다. 동시에 자신의 팀은 수시로 위장오더, 이중오더를 써서 상대팀을 기만하곤 했다. 김성근은 이런 사실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긴 커녕 자서전과 강연에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당시 세이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OPS가 뭔지도 잘 모르며 대충 이름값으로 1번부터 4번 적어서 내던 시절에 전력분석팀은 없었기에 상대 투수 주력 구종이나 훈련방법을 통해 플레이스타일 정도만 알아내서 저격용 라인업만 낼 수 있어도 꽤 질좋은 데이터였다.

근본적으로 야구는 타자가 공을 못 치게 기만하기 위해 공에 변화를 주며 디셉션을 넣는 투수들과 주자는 그런 투수로 부터 도루로 한 베이스 더 훔쳐내고 포수는 프레이밍이란 기술을 통해 심판의 눈을 속여서 벗어난 공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게임이다. 대표적으로 부정투구 그 자체를 심리전으로 몰고간 게일로드 페리 등. 부정투구는 치사해서가 아니라, 선수가 맞고 죽는 바람에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야구의 근본이 속고 속이는 것이고 현재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파인타르 논란이 불거지고 대놓고 이물질을 발라대고 있지만, 그래서 커리어가 박살난 선수가 어디 있는가? 콜, 기쿠치, 다르빗슈 누구 하나 벌금 한 푼이라도 냈는가? 2021년 사무국의 방침은 앞으로 너무 대놓고 하지 마라 정도이지 아예 찍어 바르는 장면이 TV중계에 찍히는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아무도 적발하지 않았다. 야구의 근본국인 미국이기에 이 야구의 근본 정신을 무시할 수 없어서, 상대팀이 직접 항의하지 않는 이상 심판진은 멋대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유명한 레전드 투수 로저 클레멘스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도핑논란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확률도 매우 적어질 정도로 비판받고 있는데, 결국 이 둘도 커리어가 작살나지 않았고 둘 다 고액 계약을 다 받아먹고 정상적으로 은퇴했다.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걸리면 다 니 책임이다 는 예나 지금이나 야구의 근본 정신이 맞다. 엄연히 반칙인 부정투구조차 이러한데, 훈련 염탐이나 위장선발, 위장오더는 상대방의 양심에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비매너 행위이지만, 반칙조차 아니다.

결국 김성근이 야구 내적으로 잘못한 건 없다. 문제라면 이런 것을 언론에 흘려 상대팀을 흔드는 장외전술을 이용했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도 치사하긴 하지만 반칙이 아닌 이상 잘못은 없긴 하다. 당하는 입장에서야 열받고,이렇게 반칙은 아닌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켜가며 얄미운 비매너 플레이를 했기에 상대편에게 짜증나는 감독인 것이고, 결국 진짜로 해서는 안될 선을 넘지는 않았기에 수많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감독직을 맡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이렇게 긴 항목이 만들어진 것이지만.

5.3. 투수 운용의 대가, 하지만 그에 가려진 혹사의 그늘

5.3.1. 김성근 감독의 상징 : 벌떼야구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에서 우선 이해해야 할 부분은 불펜 투수 중심의 운용이다. 특히 왕조를 이루었던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불펜 투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돌려가며 상대팀 타자들을 막는 스타일의 벌떼야구로 유명했다. 이는 의외로 현대야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투수 운용 스타일 중 하나로 꼽힌다.[61] 김성근 본인은 자신이 정말 불펜 야구를 선호해서라기보다 제대로 긴 이닝을 소화하는 선발투수가 없고 구위 좋은 중계투수도 부족했던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사실 이건 변명에 가깝고 실제로는 그냥 김성근 감독이 불펜 위주 운영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에 가깝다. 과거 삼성이나 프론트라인[62] 선발진만큼은 최강급이었던 SK에서도 벌떼야구로 유명했다.

사실 종목을 불문하고 감독의 고유한 성향은 한번 굳어지면 변하지 않으며, 그 스타일로 성공했으면 더욱 굳건해지는 경향이 있다. 종목은 다르지만 무리뉴가 팀 바뀌었다고 공격축구하던가? 펩 과르디올라가 팀 바뀌었다고 티키타카 버리던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보다 정교해질 순 있어도 스타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무리뉴 휘하 첼시가 골 많이 넣었다고 공격축구 한다고 하는 사람이던가? 펩 휘하 뮌헨이 수비 탄탄히 했다고 수비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나? 야구라고 다르지 않다.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떠나서,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생물이 아니다. 특히나 김성근은 본인의 야구 스타일에 대한 고집이 매우 강한 편이었던 만큼, 이러한 불펜 위주의 야구를 2010년대까지 유지했다.

다만 SK 시점까지만 봤을 때, 김성근 감독의 투수 교체는 다른 감독들의 단순한 불펜 교체와는 달리 체계적인 관리를 더한 것이라고 한다. SK와이번스 재임 시절 당시 더그아웃에서 김성근 감독의 가까운 자리에는 경기 내용을 기록하는 구단 기록원 안교훈씨가 함께 했는데 기본 임무는 경기 내용 기록과 야구규약의 확인, 투수 교체와 관계 있는 타임의 횟수, 그리고 투구수의 확인이며, 투구수는 감독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표시되었다. 벽에 붙어 있는 양 팀 라인업 카드에 투수들의 최근 3경기 투구수가 색깔별로 다르게 적힌다. 2경기 전 투구수는 빨간색,직전 경기 투구수는 파란색이다.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감독이 투수 교체를 고려할 때 보다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경기 전 김성근 감독 자리에는 또 하나의 투구수표가 자리잡는데,투수들이 불펜에서 공을 던진 횟수와 투구수가 포함된 숫자가 경기별로 적혀 감독은 이들 숫자들을 바탕으로 마운드를 운용하였다. 관련 기사

물론 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항상 똑같은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3명의 선발투수를 확실한 주축으로 삼았으며 타자를 벌떼로 운용하였다. 또한 2009년 SK 와이번스의 경기당 투입한 투수 수는 3.9명으로 8개팀 중 6위였고[63] 2010년에는 8개팀 중 7위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성향은 선발이 길게 못 가더라도 불펜 투수 한사람 한사람의 이닝소화율을 높여 투수진 전체의 부담을 더는 것이었다. 즉 전반적으로 보면 벌떼야구로 대표되는 불펜 중심의 운용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에 따른 운용의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5.3.2. 한화 감독 이전까지의 김성근 : 투수 운용의 신

김성근은 올드스쿨 야구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실제로도 감독 위주의 팀 운영, 스포츠 과학에 기반하지 않은 지옥훈련, 리빌딩 경시 성향의 승리지상주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매우 올드스쿨한 면모를 보여주나 투수 운용에서만큼은 1980년대 기준으로 매우 혁신적이었다. 오히려 현 시점에서 봐도 올드스쿨한 야구관에 따른 투수 혹사가 비정상적으로 심해서 그렇지 투수 기용 방식 자체는 선발 투수를 최대한 빨리 내리고 다수의 불펜을 동원하여 경기를 마무리짓는 뉴스쿨에 가깝다. 이전까지 야구계는 그냥 선발 투수가 무식하게 완투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김성근은 독특하게 투수 운용에서 불펜 위주의 기용을 중시하였으며 이는 매우 현대야구적인 요소로 평가받는다. 김성근하면 특정한 투수를 붙잡아서 갈아마신 뒤 은퇴시키는 운용으로 악명이 높으나, 그건 김성근 개인 성향과 시대의 한계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세이버메트릭스가 발전한 현재 '투수의 팔은 소모품이다'와 같은 지론에 따라 로스터에서 투수의 비중을 극대화시킨 뒤 최대한 많은 투수를 등판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알려져있다.

김성근의 선진적인 투수 기용은 첫 프로 감독 시절인 OB 베어스 시절부터 나타나는데, 1984년 당시 윤석환을 마무리 투수로 기용하여 57경기 146이닝 12승 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거두었다.[64] 이는 선발이 완투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기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기용이었으며, 당시 OB 베어스는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하였다.[65]

마무리 투수가 80년대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기 마무리는 지금의 1이닝 마무리의 분업화 체제가 아니라 중무리가 일반적이었고,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김응용이 선동열 선발로 쓰면 매일 못 쓰니까 스윙맨으로 썼고 그런 인식 자체가 당연했을 정도로 보직, 로테이션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90년대 LG 이광환 감독이 당대 선진문물이라는 라루사이즘을 가져와서 우승까지 이끌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었다. 더군다나 80년대는 프로팀이라는 팀들이 로스터를 다 채우지도 않고 대충 있는 선수 모아서 시합을 하지 않나 여튼 프로야구가 출범은 했지만 아마추어 티를 완벽히 벗지 못한 시기였다.

상술하였듯이 김성근 감독은 이 시기 중무리이기는 해도 마무리 개념을 처음 도입하였으며, 쌍방울 때부터 시작한 "벌떼야구"는 불펜 중심 야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금에야 보면 그냥 무식한 살려조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땐 그냥 어제 던진 선수가 오늘 던지고 내일도 던지고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권혁이 맨날 나와서 혼자서 다 던지는 것처럼 보여도 80-90년대는 살려조 3~4명 정도면 대단한 분업 야구였던 것. 즉 한 명이 질 부담을 몇명이 나눠서 지는 수준만으로도 차원이 다른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로서는 홈 어드밴티지처럼 여겨지던 마운드 높이 조절 등 타 감독은 생각지도 못한 장외 전술[66]을 이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비단 쌍방울 뿐만이 아니라 태평양이나 SK 등 성과를 낸 팀 거의 모두에서 투수력을 위주로 성과를 냈는데, 이는 타 감독과 차별화되는 불펜 쏟아붓기나 무엇보다 플래툰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감독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는 달리 플래툰을 잘 하지 않았고, '좌우놀이'라는 비하적 표현이 당연시되었다. 당시 한국은 정수근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수를 삐꾸로 만든다' 로 할 정도로 플래툰에 부정적이었으며, 이런 분위기가 무려 0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 좌우 편식없이 잘 하는 타자/투수가 진정 실력있는 선수고, 플래툰 시스템은 약점을 피해가는 치사한 짓, 반쪽짜리 선수가 되는 길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아마추어 야구의 낭만, 나쁘게 보면 안일함이 00년대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것. 지금도 그 시절 00년대에 작성된 나무위키 문서들을 보면 이런 그 시절 야구관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서도 쓰는 감독만 쓰던 투수 플래툰을 적극적으로 쓰는 감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선진적인 감독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나 다 하니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뭐든지 처음 하는 건 아무나 못 하는 거다.

더군다나 쥐어짜내기의 달인답게 정말 극한의 투수 쥐어짜내기를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용병제도 도입 이후 관습적으로 투1/타1로 선발하던 용병메타에서 선발 2명을 외인으로 뽑고 선발 자리에 들어갈 한국인 투수를 스윙맨으로 돌리는 운영을 선보여서[67] 07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함으로서 메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외인 2명을 선발로 놓아서 선발도 강했고, 원래라면 4-5선발 정도는 충분히 돌 실력의 한국인 투수를 스윙맨으로 쓰니 불펜도 강했던 것. 거기다가 우천 취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감독이었는데, 일기예보를 보며 우천 취소까지 불펜 투수 휴식에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짜먹을 수 있었던 것. 김성근이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이런 점도 포함된 것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시절엔 비온다 하면 하루 쉬니 개꿀 정도로 생각했지 휴식일에 우천까지 염두에 두고 운용을 하는 감독은 없었기에 투수 운용의 대가 소리를 들은 것.

여튼 현재 와서 현재의 기준으로 평가하려니 이상하다 하는 것이지 그 시절은 분명 선진적인 운용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뒤쳐져 갔으나 그의 전성기에는 분명 KBO리그에서 선진적인 투수운용을 보여준 감독이었고, 특정 인물을 부정하고 싶을 때 과를 강조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거짓말까지 해가며 공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 치졸한 것이다.

5.3.3. 한화 감독 시기의 김성근 : 시대에 뒤떨어진 감독

"확신에 사로잡혀 변화할 생각이 없는 지도자가 실패한다."
- 실패학의 대가 시드니 핑켈스타인 다트머스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그러나 시대가 지나 2010년대 중반에 부임한 한화 이글스에서는 과거의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실패한 투수 운용을 하게 되었다.

사실 김성근식의 벌떼야구는 팀 투수진 뎁스가 좋은 팀이어야 어느 정도 구사가 가능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벌떼야구가 우향이나 이는 메이저리그의 투수 풀이 매우 좋기 때문이며, 김성근이 과거 약팀을 맡아서 호성적을 내는 것에 벌떼야구가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고 여겨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선수 생명을 갈아넣던 과거 투수들의 높은 이닝 소화 능력과 당시 높지 않았던 리그 수준에 따른 결과였을 뿐이다. 그러나 한화에서는 나쁜 팀 뎁스와 더불어 불펜 투수진을 쥐어짜서 마운드를 운용하는 김성근식 야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되려 심각한 부작용만 일으켰는데, 가장 큰 원인은 신구단 창단이었다. 그전까지는 2008년 기준 1년 126경기, 2010년 기준 1년 133경기라는 적은 경기 수였으며, 그만큼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SK 와이번스 2010년 우승 당시 최훈의 분석에 따르면, 김성근 감독은 철두철미한 기준에 따라 선발을 가차없이 교체하고 이를 불펜으로 매조지하는 플레이를 진행하였다. # 문제는 이게 팀 뎁스가 강한 편인 SK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한화는 그럴 만한 젊은 불펜진도 없고 경기수도 너무 많았다는 것.

실제로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 시절 정도이다. 최근에 김성근의 살려조가 너무 충격적인 사례가 그렇지 옛날 김성근식 혹사하면 1년에 주전 불펜 투수를 잡아 갈아마시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1년에 한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하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고, 어찌됐건 팀 성적은 좋으니 주류 여론이 되지는 못한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체제로 로스터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 일본보다도 많아진 경기 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풀로 지키는 야구가 힘들어진 상황이었고, 경기 수가 많다 보니 스케줄이 빡빡해져서 우천 취소 남발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돔 구장 건설, 한반도의 강수량 감소에 따른 장마 우천 취소 비율의 감소까지 휴식 시간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게다가 돌아온 빅볼 메타에 탱탱볼이라고까지 불리는 반발력 큰 공인구, 웨이트 트레이닝의 발전으로 비거리가 급격히 늘어난 타자들의 타격까지,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 감독의 기본 전술인 지키는 야구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필승조 한명 노예로 쓰는 정도로 시즌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그 결과 3~4명이 동시에 망가질 정도로 혹사당하는 살려조 상황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진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그저 상황 탓만 할 수는 없다. 유능한 감독이라면 이 상황에 맞게 자신의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하고, 김성근 감독은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이 시기의 김성근 감독의 방식은 충격적인 수준의 투수 혹사를 당한 선수들의 숫자만 차이가 있지 사실 SK 시절의 방식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었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4-5년에 걸친 휴지기 동안 이에 대한 유연한 변화는 없이 자신의 기존 성공 공식을 다른 환경에서 그대로 적용하였고 결국 당연한 실패로 이어졌을 뿐이었다.

2020년대 현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SK 시절까지는 올드스쿨 이미지와는 달리 투수 운용의 선구자였으나 한화 시절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올드스쿨함을 이기지 못하고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현재의 한화 이글스에서의 운용이 막장 운용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이게 대단한 운용이었다. 즉 2000년대에는 선동열과 함께 KBO 불펜야구 메타를 이끌다시피 한 감독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2010년대 빅볼 야구 메타를 쫒아가지 못하고 국민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하면서 과거 업적도 상당히 부정당하고 만 것이라 볼 수 있다.

5.3.4. 역대 최악의 투수 혹사

'야구는 감독이 한다'고 주장하는 김성근식 야구의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선수를 감독의 소유물이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 김 감독은 자신의 지도자 인생 동안 혹사로 인하여 야구인생의 기로에 섰거나 은퇴의 길에 내몰린 수많은 선수들의 희생에 대하여 한 번도 진심으로 반성이나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다. 아예 혹사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으니 책임져야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김 감독의 시각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란 혹사당하고 지쳐도 '똑바른 폼으로 공을 던지지 못했거나 근성이 부족한' 선수들이며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고 감독의 권한을 침범하는' 프런트와 고위층, '현장 사정을 모르고 외부에서 비판하는' 언론과 팬들이다.
- 고장난 야신, 김성근 감독이 최악의 리더인 이유
과거는 물론 지금의 한화까지 선수들은 개성을 잃은 채 공장 기계의 부품 마냥 돌아가기 일쑤였다. 하물며 기계도 무리하게 가동하다 보면 마모가 되고 닳아 결국 고장 나기 마련이다.
- ‘송창식 혹사논란’ 김성근 감독 벌투의 추억

김성근은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혹사의 아이콘으로 인식할 정도로 본인의 지론이나 커리어 상 행적으로나 투수 혹사의 대명사로 볼 수 있는데, 김성근은 선술했듯 사실 1980년대 기준 전세계적인 관점에서는 매우 독특한 유형의 투수 혹사를 하는 감독이었다.

김성근이 투수진을 쌓아올리기보다는 투수를 소모해서 성적을 올리는 감독임은 데이터상으로도 잘 드러나는 편이다. 김성근 감독의 경력을 잘 살펴보면, 1986년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부임 첫 해에 팀방어율이 가장 낮고 이후 계속 팀방어율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는 김성근 첫해에 노장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후 전력을 쥐어짜내 혹사시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팀방어율이 내려가지만, 이후 그 후유증으로 투수진이 줄부상을 겪고 팀도 노화되면서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팀방어율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김성근은 투수 혹사의 대표주자로, 김성근의 오랜 경력동안 혹사로 망가진 투수들이 워낙에 많아 김성근이 80대가 되어 최강야구로 그동안 받았던 부정적인 평가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고 그나마 개선된 이미지로 말년을 보내는 현재까지도 투수 혹사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다.

김성근 감독의 혹사에서 특이한 부분이라면, 혹사가 주로 불펜 투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태평양 시절 박정현[68], 최창호, 정명원 신인 트로이카 정도를 제외하면, OB 시절의 윤석환, 삼성 시절의 김성길, 쌍방울 시절의 김현욱, LG 시절의 신윤호, SK 시절의 전병두 등 혹사당한 선수들 대부분이 불펜 투수들이다. 보통 선발급 선수를 선발과 마무리를 번갈아가며 혹사시키는 게 일반적이었던 올드 스쿨 감독 중에서는 조금 특이한 경우.[69]

어쨌든 김성근 감독은 매우 여유 없는 불펜 운용을 처음 시작했기에, 예전부터 혹사 논란이 무척 많은 감독이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선발이 강하였던 2009-2010년도 SK조차도 이러한 혹사 논란은 끊이질 않았는데, 당시 SK 와이번스의 선발진, 특히 프론트라인은 KBO 역사를 통틀어도 정말 손꼽을 만큼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2009년의 전병두는 11번의 선발 등판과 불펜 등판을 합쳐서 글로버의 105.2이닝보다 많은 133.2이닝을 던졌고, 2010년의 고효준은 10번의 선발 등판을 합쳐서 106이닝을 던졌다. 당시 SK를 제외하면 이렇게 선발 로테이션이 제대로 굴러가는 팀은 구톰슨-로페즈-양현종-윤석민의 기아 말고는 없었음에도 그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투수들은 매해 한명씩 나오는 수준이었다. 올드 스쿨 시대의 혹사라 할 수 있는 태평양 시절 신인 트로이카의 혹사는 차치하더라도,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김성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김현욱[70], 박노준[71], LG 트윈스 시절의 이동현, 장문석신윤호, SK 와이번스 시절 정우람, 전병두,[72] 이승호, 고효준, 채병용 등등. 물론 본인의 부임 시기에는 혹사로 부상당하지 않도록 나름 투수를 관리하는 노하우가 있다고 하지만 길지 않은 재임 기간이 끝난 후에는 망가지는 투수도 많다.
투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
- 김성근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다. 서서히 닳게 마련이다”
- 김용수
“투수를 망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를 투수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 폴 나이먼

이는 단순 운용뿐 아니라 김성근 감독의 지론과도 연관이 있는데, 김성근 감독은 투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논리 아래 강훈련을 반복하였다. 투수가 투구할 때 가장 많은 힘이 걸리는 부위는 의외로 근육이 아니라 인대이며, 혈관이 없어 회복이 거의 되지 않는 인대의 해부학적 특성으로 인해서 이 주장은 스포츠 과학적으로는 완전한 거짓이나, 사실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야구 지론은 올드스쿨 야구인들 중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며 현대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이 지론을 가지고 훈련하는 선수들이 많다.[73] 사실 많이 연습할수록 익숙해지는 게 당연한 말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연습량을 늘리는 것 자체는 좋지만,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특징과 포지션, 몸 상태에 맞춘 적절한 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화 시절 김성근 감독의 연습 투구량이 알려졌는데, 스프링캠프에서 하루에 무려 500개의 이상의 공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화의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은 하루에 최소 200개 이상에서 300개 이상에 달하는 투구를 했다.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스프링캠프에서 100개 이상 투구하는 것은 미친 짓에 해당하고, 한화 이글스의 경우에는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 스프링캠프에서 하루 50개 내외의 투구를 했었다. 한 프로야구단 단장이 김성근 감독에게 스프링캠프 때의 과도한 투구 개수에 대해 묻자, “그 정도를 못 시키면 지도자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단장이 “부상 관리라는 면도 있지 않느냐”라고 재차 묻자, 김성근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팀에 투수가 수십명이다. 몇 명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는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소모된다는 분필 이론[74]과 100년 이상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취하는 운영 방식을 봤을 때, 김성근의 불펜 운용은 충분히 혹사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강훈까지 연결되면서 회복 시간의 부족이 발생, 투수 수명의 빠른 소모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게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혹사 후의 관리 노하우가 뛰어나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그 악명에 비해 재임 기간 중 시즌 아웃당하는 투수가 타 감독 대비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닌 것은 사실.[75] 그러나 실제 김성근이 맡았던 팀의 성적을 보면 SK 시절 딱 한번을 제외하고 그가 있던 모든 팀에서 첫해가 가장 성적이 좋고 둘째 해 셋째 해가 될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데[76] 이러한 성적 하락 현상도 혹사와 무관하다고 볼 수가 없다. 심지어 2016년 한화에서 선수단 부상 사실에 대해 은폐와 거짓 발표를 했음이 확인되면서, 실은 이미 김성근 시절에 망가져있었던 걸 김성근이 알려지지 않게 막고 있다가 후임 감독때 드러난것 아니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김성길이나 전병두처럼 김성근 부임 중에 망가진 투수도 적지 많다.

그리고 30년간 감독 생활을 하다보니 한가지로 정리하긴 힘들고, 같은 선수에게도 전혀 다르게 대한 측면이 있는지라 이런 걸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예를 들어 2009년에는 김현수의 타구에 맞아 부상당한 에이스 김광현을 빨리 올리자는 의견을 거부하고, 김광현 없이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그동안 김성근 감독 혹사 사례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상황. 2010년 다소 무리할 정도로 이닝을 소화했기는 하지만(193 2/3이닝, 리그 1위), 김광현은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 혹사 사례로 꼽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77]

5.3.5. 계산된 기용인가, 마구잡이식 기용인가

김성근 감독의 특징 중 하나는 투수 보직의 파괴이다. 선발로 등판했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임시로라도 불펜 등판을 한 적이 있으며, 불펜을 뛰던 선수들이 땜빵 선발로 뛰기도 한다. 특히 SK 시절 전병두, 고효준, 송은범, 채병용, 이승호 등 스윙맨들의 활용이 두드러졌던 것은 김성근 감독 야구의 가장 큰 특징. 팀의 상황에 따라 투수의 보직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것은 타팀에서도 일어나지만, 김성근 감독 휘하의 팀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이는 좋게 보면 적재적소에의 기용이지만, 나쁘게 보면 마구잡이식 기용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SK 시절조차도 이런 성향은 자주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정대현의 활용이었다. 2007년 김성근 감독 집권 이후로 SK 벌떼야구의 핵심이자 마무리는 여왕벌 정대현이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의외로 세이브 갯수는 그리 많지 않은데, 이는 상황에 맞춰 정대현을 마무리부터 셋업, 롱맨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기용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가장 롯데팬들의 아픈 기억으로 남은 것이 바로 "돼지 도살자". 정대현이 유독 이대호에게 강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이대호가 득점권 상황에서 나오기만 하면 정대현이 올라와 잡아버리는 것은 압권이었다.

심지어 이대호가 타격 7관왕을 기록하며 말 그대로 리그를 씹어먹던 2010년조차, 9타수 무안타로 이대호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오죽하면 이대호가 "대현이 형만 없으면 4할에 50홈런은 칠 수 있었다" 라고 한탄하기도.[78] 즉 적어도 SK 시절까지의 김성근 감독의 불펜 기용은 분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마구잡이식 기용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위치를 바꿔가며 상대를 농락하는 계산된 기용에 가까웠다.

미들-셋업-스윙-클로저 등으로 계투를 분업화하는 라루사리즘은 1990년대 이광환 감독이 도입한 이후 점차 한국 야구에도 뿌리내린 기본 상식이었다. 같은 불펜 중심 기용의 선동열 또한 안지만 셋업, 오승환 마무리를 철저히 지킨 편.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고, SK 시절까지만 해도 이는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그러나 라루사리즘이 현대 야구에서 투수 운용의 대세로 자리를 잡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선발 투수와 불펜 투수의 보직을 시즌 전 몸을 만들 때부터 미리 알려 투수가 자신의 보직에 맡게 몸을 만들게 하고, 시즌 중에는 투수의 보직을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아 몸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보직 파괴 역시 혹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다.

특히 한화 감독 시절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SK 시절에는 그래도 김광현과 카도쿠라, 글로버 등 시즌별로 최소 1-3선발 선에서는 확실한 선발진이 구축되어 있었고, 이런 선발진의 운용 아래 불펜진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한화는 류현진이 떠난 이후 사실상 믿을 만한 선발이 단 한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한화 이글스 부임 후에는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살려조로 대표되는 불펜 혹사와 2015년 하반기 시즌 선발, 불펜 투수의 보직 파괴와 투수들의 출장 후 일반적인 휴식일도 지켜주지 않는 변칙적인 투수 로테이션[79] 운용을 하기에 이른다. 이는 투수들의 부상 및 구위 저하를 야기하였고, DTD급 성적 급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김성근 감독의 경기 운영 스타일이 SK 시절에는 통하였는지 모르지만, 10개 구단 144경기의 장기 레이스를 펼치며 타자들의 벌크업과 타격 기술 향상 속도가 투수들의 구위 향상을 앞지른 현 상황, 심지어 와일드 카드로 인해 중위권 팀들이 막판까지 이전투구하는 상황에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은 후 드러난 실제 투수 운용에서는, SK 시절 나름 철저하게 계산되어 진행되었던 투수 교체와 관리조차 온데간데 없었다. 불펜 투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투시키면서도 자신은 3연투시키지 않는다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어느날은 "아차"했다고 말하여 야구팬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5.3.6. 혹사에 대한 지속적인 부인과 잘못된 방향 찾기

“근데 혹사라고 하는 거는 부상자를 그냥 억지로 쓴다던지 ... 사람이 그 순간에 넘어가야 되는 선이 있어요, 라인이 있어요. 이 라인 넘어감으로서 그 사람이 갈 길을 찾아요. 이 순간에 아이가 무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뭐 한다 이러면 사람을 못 만들어요. 그니까 여기 스타트해서 여기 결과를 목적진데 요기 스타트해서 여기 갈 동안 이 과정에서 불쌍하다, 가혹하다, 혹사시킨다 의식하는 리더는 다 실패에요. (선수를) 못 만들어요. 줄을 때까지 (선수를) 못 만들어요. 여기 스타트 그러면 여기(목적지) 가아돼. 요기(목적지) 갈 때 힘이 들 때 혹사하니까 불쌍하다고 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얘(선수)를 망가뜨리는 사람이이에요. 이것을 요즘 리더가 착각하는 부분이에요. 여기로 가아해. 불쌍한 거는 어디서 불쌍하냐면 여기(목적지)에 못 갈 때 불쌍한 거에요. 이런 프로세계 속에서 불쌍함이라는 건 하나도 없어요."
- 김성근 "혹사 의식하는 리더는 실패한 리더!"

결국, 김성근 감독은 그 스타일에 따른 호오는 있을지언정, 혹사를 많이 시키는 감독이 맞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이 부분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비슷한 혹사 감독으로 유명한 강병철조차도, 최동원과의 대화 중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라는 말처럼 본인이 혹사시켰다는 걸 인정하였고 염종석이 혹사당한 후 차년도에 염종석에 대한 재활을 주장했다. 구단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2015년 9월 투수진의 혹사 논란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성근 감독은 혹사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2015년 9월 5일 네이버-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상대가 질릴 만큼, 지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다음엔 이긴다 김성근의 저런 신념은 현재 한화 이글스 팀이 처한 상황과 대다수의 여론을 볼 때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힘든 관점일 수 있다. 다른 팀의 지도자들과 선수, 그리고 구단 자체까지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있지만, 자신의 시계는 멈춘 채로 변화를 거부하며, 역량 역시 발전되는 것을 포기하는 자충수 같은 신념이자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SK에게 2009년은 그야말로 부상자와의 싸움이었다. 2년 연속 우승 강훈련과 혹사의 후유증이 몰려왔다. 없는 전력으로 싸웠지만 선수 보급은 없었다. 알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훈련량을 늘리면 그게 또 문제가 됐다. 밖에서는 훈련 때문에 선수들 부상이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모든 훈련은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건데, 팀이나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인식하니 너무하다 싶었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59

심지어 이런 혹사에 따른 부상조차 김성근은 자신의 과중한 훈련과 기용 때문에 부상이 생긴다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훈련을 강화하여 방법을 찾으려 하였다. 당시 2009년은 이미 2년 동안 혹독한 훈련과 혹사로 부상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없는데도 구단이 선수를 사다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훈련량을 더 늘렸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SK와이번스가 외부 FA영입에 대해선 매우 인색했던게 분명한 사실이지만, 트레이드같은 다른 경로를 통한 영입에 대해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 애초에 훈련과 혹사로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문제를 알면서도 훈련을 늘렸다는 건 애초에 모순이다.

프로야구 감독이 성적을 내기 위해 훈련 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성적을 내기 위한 전력을 제대로 온존하지 못할 정도로 훈련을 하는 것에 대해선 분명한 문제점이 있다. 프로야구 감독의 첫번째 목표는 어디까지나 성적이고, 훈련은 그 수단일 뿐이다. 또 저런 상황에서 훈련량을 더 늘리면 부상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하는 구단과 언론이 잘못되었다며 비난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김성근의 추종자들 또한 선수들이 혹사당했다고 분개하기보다 중용해준 것을 고마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성근 혹사의 대표 사례인 전병두, 쌍방울의 김현욱, LG의 신윤호 등 자신이 혹사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인터뷰가 많으며, 최초의 혹사 사례로 꼽히는 OB의 윤석환조차 혹사 자체는 긍정했지만 김성근 감독 본인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렇다고 혹사당한 선수가 이를 비판하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므로, 그 선수들이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이를 순진하게 믿을 수만은 없다. 누구나 혹사라고 인정하는 최동원, 염종석에게 강병철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도 이들은 감독에게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선수들은 혹사가 맞더라도 기용 자체를 고마워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선수들의 옹호가 있다 하여 혹사 자체를 부정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5.4. 시즌 초반 중심의 운용 방식

“내가 SK에 있을 때 우리는 다른 팀보다 훈련을 더 일찍 시작해서 더 오래, 더 많이 했다. 당연히 시즌 초반에 이미 컨디션이 올라와 있었고, 이때부터 치고 나갔다. 그러다가 5월 말에서 6월 초가 되면 힘든 상황을 맞았다. 그동안 주적된 피로 때문에 힘을 못 쓰는 것이다. 거의 한 달 내내 피로가 몰려서 온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p.66

김성근은 윈나우형 성향과 불펜 위주의 야구로 인하여 전반기때 달리고 후반기때 버티는 식의 시즌을 보내는 경우가 잦았다. 이 부분은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본격화된 방식이다. 보통 야구는 봄에 서로 치열하게 순위경쟁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종순위는 더위와 습기와의 전쟁을 벌이는 여름에 향방이 갈린다고 할 정도로 여름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그 반대로 스프링캠프에서 강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컨디션을 초반에 빨리 끌어올린 다음, 이를 기반으로 시즌 초반 상대팀을 압살해 기선을 제압하여 선두를 빨리 차지하며 승차 여유분을 확보해놓고 무더위와 장마, 습기로 체력소모가 확 오는 여름에는 1군 주전들을 휴식성 2군이나 벤치를 뎁히거나 간혹 대타로 타격감을 유지시키는 등 휴식을 보장해주는 대신 그 공백을 2군에 콜업한 유망주들로 꾸역꾸역 버티는 방식으로 시즌을 운영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여름에 유망주 투입기용과 호성적으로 리빌딩의 대가라는 윈나우와 정반대인 명성을 얻었다.

시즌 초반부터 압도하는 이 전술은 SK 시절 굉장히 효과적인 전략으로 기능하였다. 시즌 초반부터 압도해버리면 후일 다시 매치업되었을 때 상대방의 위축된 플레이를 끌어낼 수 있고, 시즌 초반부터 저금을 벌어놓은 만큼 몇 경기 지더라도 순위는 뒤집히지 않는다. 이는 선수들의 멘탈 안정을 가져와서 좋은 플레이를 이끌어낼 수 있다.

특히 상위권 진입을 위해서는 몇몇 하위 구단을 정신적으로 압살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실제 리그 상위권 혹은 우승까지 노렸던 구단 대부분은 모든 팀을 상대로 좋은 정적을 보였다기보다는, 몇몇 약팀에 대해 압살에 가까운 압도적인 성적을 거둠으로써 성과를 거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초반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런 약팀 찍히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가을야구 다툼을 하는 타 구단도 압도적인 전적을 보여준 SK에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하위 구단을 제압하는 것에 더 주력하는 경향성을 보였다.

동시에 이는 한국의 지역적 특성과 당시 8구단 체제가 맞물려 작용하였는데, 한국은 6-7월이 장마철이라 우천 취소가 잦은 편이다. 따라서 초반 항상 경기가 계속될 때 독주를 하다가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로 인한 습기로 지칠 무렵에는 장마시기 우천 취소 등을 이용해 체력을 회복하고 2군 유망주 돌려막기로 버틴 뒤, 시즌 후반에 1군 주전들이 재충전이 완료되어 다시 풀전력을 가동해 압도적인 경기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휴식을 거쳐 다시 가을 야구를 지배하는 방식의 운용이 김성근 재임시절 SK의 대표적인 운용이자 필승 방식이었다.

이는 반대로 시즌 중반 한창 컨디션이 올라왔을 때 비가 와서 개점 휴업하는 상황보다 시즌 전체를 두고 봤을 때 경기력 저하가 덜했는데 문제는 이 것을 가능하게 해준 또 하나의 요인이 8개 구단 체제였다. 당시 SK시절에는 122경기였으나 10개 구단이 되자 144경기로 대폭 늘어나고 일정도 길어진데다가 8구단 체제에 비해 대폭 늘어난 동선거리로 인해 선수들의 피로도 쌓이는 속도도 급격히 늘어나면서 금이 간 것이다.[80][81]

그러나 이 방식은 바로 다음 팀인 한화 감독 시절에는 독이 되었는데, SK는 전력 자체는 조범현 감독의 육성으로 06년 중위권을 차지한 전력이었고 그런 팀전력을 이어받은 김성근의 윈나우와 김광현, 김강민, 박정권의 잠재력 만개도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은 이승호처럼 어디든 기용이 가능한 애니콜급 노예라 불리는 불펜자원이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초반에 승리를 엄청 적립해놓고 2군도 나름 구비가 되어있었기에 버틸수 있는 여력이 있었던 팀인 반면 한화는 오랜 암흑기와 너무나도 얇은 뎁스 때문에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따라서 초반 질주를 위한 투자는 팀에 과부하를 더욱 심하게 줄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과부하를 줬음에도 상위권까지 치고 올라올 여력은 없었다.

실제로 2015년 당시 2009년 이후 4월 승률 0.545로 최초 5할 기록, 3위라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SK 때만큼의 압도함은 없었다.[82] 게다가 2014-2016년은 역대급 폭염과 가뭄 사태가 이어지면서 우천 취소에 따른 회복에도 실패하고 늘어난 동선거리로 지역 이동에 선수단은 더 빠르게 지쳐갔다. 그렇게 뎁스가 얕았던 한화로서는 이 위기를 견딜 힘이 전혀 없었으며 애초에 한화는 성적이 나면 좋지만 최대한 리빌딩 능력을 발휘해 팀을 재건해주기를 바랬는데 뎁스가 얇은 상황에서 윈나우를 뛴게 큰 실책이었다. 결국 이는 한때 마리한화라 불렸던 한화 이글스가 후반기 급격히 추락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6. 김성근 야구 비판 기사

2015년 하반기부터 김성근 감독의 지도 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을 '야구는 감독이 한다'로 정의하고 이는 전형적인 동양식 야구관이라 하며 그 문제점을 분석한 기사도 나왔다.

역시 2015년 9월 MBC 경제매거진M에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아직도 세간의 혹사 논란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이 보도는 올 한화 이글스의 경제 효과[83] 및 김성근 리더십의 명과 암 등을 다룬 것이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 및 이에 따른 한화 선수들의 불만을 나타낸 기사도 나왔다.

시사인이 2015년 10월 16일에 3회에 걸친 김성근 감독 야구관을 비롯한 2015년 총정리 기사를 냈다. 시사인 원사이트가 네이버 링크보다 로딩 시간이 더 걸리지만 도표 등을 확대해서 볼 수 있다.

샤브샤브뉴스가 2015년 10월 5일과 10월 7일에 역시 김성근 감독 야구관 및 그에 따른 문제점 분석 기사를 올렸다. 10월 12일에는 팬심에 관한 내용도 실었다.

2016년 들어서는 더 많은 비판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16년 하반기 이후 김성근을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기사들을 일일이 여기에 수록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1] 이강철, 김원형, 이승엽, 박진만 등이 극단적인 올드스쿨형 윈나우형 감독으로 꼽혔다. 이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감독들이 리빌딩이나 시스템 빌딩보다 승리지상주의식 운영을 구사하였다. 김성근 직후 KBO 최고의 감독으로 꼽혔던 류중일 역시나 선수 관리를 잘할 뿐 윈나우 일변도 성향이며, 그 이후 최고의 감독인 김태형 역시 리빌딩 성과가 좋았으나 그 전력 이상으로 성적을 뽑아내는 해결사적 면모가 강한 감독이었다.[2] 대표적으로 백인천, 김인식, 김경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마저도 거의 다 타선 리빌딩 전문가였지 투수진 리빌딩은 평가가 거의 부정적이다. 투수진 리빌딩 면에서는 가장 호평받는 인물은 이강철, 손승락 정도가 꼽히나 이강철은 야수진 면에서는 리빌딩이 매우 더딘 편이고 스몰볼인데다 투수진 운용 방식도 못하는 투수들을 끝까지 밀고 가는 성향이기에 투수진 육성이 훌륭할 뿐 거의 올드스쿨에 가깝다고 여겨지며, 손승락은 2군 감독이라 애매하다. 애초에 이강철, 백인천, 김인식, 김경문 모두 올드스쿨이며 선수 갈아마시는 데에는 정평이 나 있는 인물들이다.[3]김성근의 저주에 대해서는 소위 노리타라고 하는 김성근 옹호 세력에서는 김성근이 떠나니 팀 성적이 하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김성근 비판 세력에서는 김성근이 팀을 망가뜨려서 팀 성적이 하락하는 거라고 주장하며 충돌하고 있다.[4] 다만 메이저에서도 모레노나 몽포트 등 KBO보다도 더 최악인 프런트가 있다.[5] 실제로 김성근 감독 비판 세력이 말하는 것처럼 팀 전력 자체가 엄청나게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특급 선수의 영입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타팀에서 방출된 연봉 높은 노장 선수들을 수집했기 때문에 페이롤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6] 그 플랜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실제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웠는가는 차치하고[7] 사실 김성근의 공과와는 관계없이, 몸이 재산인 프로선수가 모인 구단에 있어서 돈을 좀 쓰더라도 부상 치료 관련한 컨디셔닝 부분에서는 당연히 투자를 해주는 게 구단의 궁극적인 목적을 생각하더라도 무조건 남는 장사다. 실제 이 부분 미흡했던 기아가 한동안 부상병동 소리를 달고 다녔던 걸 생각해보면 돈좀 들더라도 부상을 완전히 회복시키거나, 아예 부상이 안나오게 미리미리 체크하는 게 당연한거다. 심지어 대상이 팀내 주축선수라면 더더욱.[8] 물론, 성균관대의 이연수 감독이 김성근 직속 제자였기에 이 연줄로 가르쳤던 것도 있다.[9] 김성근은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주류로부터 핍박받는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로 언플하기도 했다.[10] 이 시점에서 김성근은 이미 한국 생활 20년차로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런데 왜 일본어로 쓰인 계약서를 들이밀었겠는가? 아예 대놓고 배째라식으로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11] 민경삼 단장은 신일고 시절 김성근 감독의 제자였으며, 김성근 감독 개인과도 굉장히 긴밀한 사이였다. 심지어 경질 이후 민경삼 단장 아들 사망 전 병원에 김성근 감독이 일부러 방문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게 민경삼 단장 때였다. #[12] 최근 메이저리그의 감독은 작전조차 경기 후반부 승부처 정도에만 내는 경우가 많고, 투수 교체 정도를 제외하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13]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선수 출신 프런트가 대부분이긴 한데, 그래도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 중 명문대 출신, 특히 경영학과 등을 나온 고학력 선수들을 주로 프런트로 영입한다.[14]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구단은 돈이 안되기 때문에, 어떤 임원이 스포츠 구단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임원에 대한 좌천이라는 의미도 강했다. 물론 구단주인 모기업 회장이 스포츠 구단에 관심이 많으면 핵심 측근 임원이나 엄청난 성과를 낸 임원을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츠단을 맡은 사장과 단장이 의욕이 생길 리도 없었다.[15] 정확히는 힘을 실어준다기 보다는 감독이 아주 말아먹는 것만 아니면, 적당히 방임만 하는 보신주의에 해당된다.[16] 이처럼 경영 전문가가 팀을 운영하는 형태의 프런트 야구가 국내에서 실현된 바는 2009~2016년 이장석 구단주와 조태룡 단장 체제가 유일하다. 다만 이 체제 또한 중후반까지는 성공적인 사례로 기록되었으나, 2017년 이장석의 횡령 혐의가 드러나면서 실패 사례로 남고 말았다.[17] 대표적으로 희생 번트는 별칭이 고시엔 전법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전술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활성화되면서 미국에서는 거의 사장되어 가고 있는 전법이기도 하다. #[18] 노무라 감독이 테드 윌리엄스 이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중 한명이다라면서 예를 들었다.[19] 당시에도 일본 야구 지향이자 극한의 훈련야구의 상징인 김성근의 입에서 자율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20] 실책이라는 기록 자체가 기록원의 재량으로 주는 것이고 수비 범위 등이 반영되지 않는지라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단적으로 답이 없다던 10년 한화는 놀랍게도 실책 개수가 8개 구단 중 가장 적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리그 평균 개수인 경기당 0.73개(그전에는 1.46개로 되어 있었으나 이건 양팀을 통틀어 나오는 개수이다)보다는 많았다.[21]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스프링캠프에서 100개 이상 투구하는 것은 미친 짓에 해당한다. 한화 이글스의 경우에는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 스프링캠프에서 하루 50개 내외의 투구를 했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하루에 무려 500개의 이상의 공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화의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들은 하루에 최소 200개 이상에서 300개 이상에 달하는 투구를 했다.[22] 2000년대 후반 이후에도 권혁 등 휴식을 요청하는 선수에 대한 강요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경기 기용에 대한 내용이었고 건강상 이유에 따른 훈련 미참여 등에 대한 내용으로는 구설수에 오르진 않았다.[23] 정규시즌 끝나고 11월 쯤. 다음 해부터 뛸 신인선수도 범주에 포함되며, 이때는 아직 대학재학 시절이었다.[24] 내용은 아픈 이유를 말한 것으로 추정.[25] 물론 박용택은 2002년 시즌 후반에 세면대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다 세면대를 부숴먹고 손바닥이 찢어지며 순위 싸움을 하던 후반에 결장하며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질책받는 등 눈밖에 날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질책에 박용택 또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깨 부상에도 훈련을 시킨 부분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26] 그나마도 중견수로 풀타임에 가깝게 출전한 시즌은 2013년 시즌 정도. 2008년 부상으로 시즌을 반 쯤 날려먹었을 때 어깨 재활도 같이 했는지 2009년 들어 송구능력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도 했다.[27] 1999시즌에 앞서 KBO는 김기태와 김현욱의 현금 트레이드를 승인하는 대신, 쌍방울이 전반기에 승률 3할 이상의 경기력을 유지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28] 애초에 김응용 감독은 한대화 뿐만 아니라 팀 전체적으로도 훈련을 세게 시키는 감독은 아니었다. 실제로 평소에도 훈련시간이 타팀의 절반수준이라 외부에서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은 해태의 훈련에 대해 "벌써 끝나요??" 하면서 놀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렇듯 김응용 감독 당시 해태는 프로팀 중 훈련을 가장 적게 하는 팀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점을 전성기 해태가 소수의 인원으로도 운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훈련으로 인한 체력소모가 적었기에 그만큼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이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굉장히 이른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낸 마이크 트라웃의 지론인 휴식 강조형 훈련과 매우 유사하다.[29] 김성근 자서전인 "김성근이다"에 나와 있는 위의 시를 음미해보면 김성근 본인은 지옥훈련에 따라가지 않고 혼자 숙소에 남아있다가 밤이 되어 선수들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30] 이후 코시 진출[31] 물론 과체중의 투수들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 무릎에 문제가 빨리 오는 경우가 있고 김성근의 이론은 비만이 되면 허리가 안넘어 오고 팔이 벌어지기 때문에 좋은 투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인데, 메이저리그에서 멀쩡히 공 잘 던지는 배 나온 투수들이 있다. 다만 이것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문제도 있는데, 상체 위주로 던질 때는 비만이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하체 위주로 던질 경우 특별히 유연한 몸이 아니라면 허리 회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만이 영향을 주는 것이 맞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는 동양인은 하체 위주로 던져야 하는 만큼, 메이저리그의 힘좋은 서양인들의 예시가 적절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타자는 몰라도 한국, 일본을 통틀어 동양인 선수 중 비만 체형의 투수는 찾기 어렵다.[32]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은 몸의 밸런스를 무너뜨려 스윙 궤적이나 중심이동, 코어 회전 속도가 영향을 받아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33] 다만 다르빗슈 사례가 어떻게 보면 김성근의 지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2018 시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밸런스가흐트러지면서 제구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2019년 후반부터는 세세한 제구를 포기하고 구위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즉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 발달은 구위 향상을 가져오지만 제구를 흐트러뜨리기에 투수 기준 웨이트는 양날의 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기에, 어느 쪽 의견도 반드시 맞다고, 혹은 틀리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34] 다만 마데이의 케이스는 김성근 감독만의 잘못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데럴 마데이 문서에 나온 김지호 선수의 증언처럼 김성근 감독의 만류에도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스스로 무리한 자진 등판을 지나치게 감행한 것도 있었다.[35] 기존 서술에서 이들 3총사를 그냥 원래 잘하는 투수였다고 서술한 부분이 있었으나, 신인 3총사라는 말에 오해한 케이스이다. 박정현은 2년차 중고 신인으로 데뷔 시즌 성적은 18 2/3이닝 7.71의 보잘 것 없는 성적이었으며, 최창호 또한 3년차로 2년 동안 23.1이닝 8점대 평균 자책점의 별볼 일 없는 선수였고 심지어 연습생 출신으로 아마추어 시절 증명된 바조차 없는 선수였다. 당시 태평양 투수 트로이카 중 순수한 1년차 신인은 정명원밖에 없었으며, 이들을 발굴하여 키워낸 것은 어쨌든 김성근 감독이 맞다.[36] 이는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생 팀들 중 구단 지원이 유달리 빠방했던 빙그레 이글스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다 한번씩은 거쳤던 과정이었다.[37] OB 베어스 또한 원년 우승 프리미엄이 있어서 이런 의식이 없지 않았지만, OB 시절에는 처음 시작부터 함께 했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38] 기존 서술에서는 유망주를 버리며 트레이드를 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이 시기의 트레이드는 현재와는 달라 대부분 현금 트레이드로 이루어졌다. 초창기 한국 야구는 지역색이 굉장히 강했던 데다가 트레이드가 고향팀이 해당 선수를 버린다는 의미 혹은 징계 수준로 받아들여졌던 만큼, 이제 팀에서 필요도가 별로 없어 쫓겨나는 선수들을 돈으로 사가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39] 페이롤 1위는 쌍방울 감독 첫 해였던 1996년이 아니라 1997년으로, 이는 쌍방울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엮이면서 상승폭이 반영된 결과이기는 하다. 어쨌든 이는 리그를 지배하던 최강팀이었던 해태는 물론 당시 엄청난 현금 트레이드를 진행해오기로 유명해 부자구단이라고 불리던 삼성, 현대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다는 것. 즉 선수 하나하나의 연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압도적이었다.[40] 여담으로 고참 선수들이 많아 해태 타이거즈 다음으로 팀내 군기가 강했다고 한다. 게다가 훈련량까지 많아 쌍방울 고등학교라고 자조했다고 한다.[41] 오죽하면 부모가 찾아와 제발 군대 보내달라고 통사정까지 했다.[42] 이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나간 많은 유망주들 중 KIA로 떠났던 노수광, 임기영의 둘이 크게 활약해 소속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SK로 떠난 조영우도 20년, 21년 1군에서 꽤나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물론 양훈, 오준혁처럼 반짝활약 후 망하거나 박한길처럼 아예 반짝활약도 못하고 그냥 망한 경우도 있었다.[43] KBO에서는 미국처럼 구단이 선수 연봉을 감당 못해서 팔아치우는 샐러리 덤핑 트레이드나 진짜 돈이 없어서 수십년 후까지 지불을 미루는 디퍼 계약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처럼 가성비를 따져서 보호명단에서 연봉 많이 먹는 베테랑을 제외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돈 수십억이 왔다갔다하는 FA 정도나 되어야 가성비를 따져가며 지갑사정을 재지, KBO에서 방출된 베테랑이라고 해 봤자 많이 줘야 선수 예우차원에서 1억 정도 주고, 보통은 평균 7500만원 선인데, 이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니다.[44] 특히 심성보는 당뇨병까지 앓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애매한 선수였다. 다만 LG로 들어온 2001년 약 2할 8푼 34타점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재기하기는 하였다.[45] 다만 송은범은 2018년 리그 최상급 불펜으로 부활해서 한화의 가을야구를 이끌었으며, 이후로도 롤코를 타긴 했지만 한화-LG 시절 나름 마당쇠 불펜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송은범의 불펜으로서의 부활은 김성근이 노린 바도 아니었고, 송진우 등 김성근 경질 후 복귀한 한화 코치진의 투심 장착의 결과였으니 아이러니할 뿐이다. 반면 임기영은 꾸준히 부진하다가 2020년 들어서야 터질락말락하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송은범이 임기영보다 못한 선수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FA 영입 자체를 칭찬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46] 하지만 그 안경현조차도 상대편조차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투수가 혹사당한 사례 같은 경우에는 감독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47] 실제로 로마이어가 한화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방출된 것은 이러한 성격에 당시 한화 1군 수석코치였던 유승안 감독이 대노하여 "로마이어를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라는 말까지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48] 까놓고 8실점하고 조기강판되는 주제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터인데, 여기서 적반하장으로 대드는 것만도 어처구니가 없을 터인데 코칭스태프에게 대드는 선수에게 2군행을 지시하지 않을 감독은 없다.[49] 비슷하게는 롯데의 카림 가르시아도 개막 15타수 무안타쯤부터 퇴출설이 돌았다. 19타수만에 기적적으로 그 유명한 8점 홈런을 치고 롯데에 남을 수 있었다.[50] 물론 공격을 우선하는 닥공야구를 했던 로이스터의 타선도 프로로써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수비력은 있었듯이. 공격을 우선한다고 수비를 아예 안 보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잠시 1루수를 한 경기 보다가 끔찍한 수비로 바로 다시 지명타자로 돌아갔던 홍성흔.[51] 이것도 생산성이 평균 이상의 타자라면 그냥 안타를 노리는 게 차라리 1점을 낼 확률이 높다.[52] 오히려 같은 스몰볼을 지향했던 선동열의 삼성 같은 경우, 희생번트도 많았지만 병살도 타 구단 대비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희생번트의 타이밍 등에서 김성근 감독의 SK가 선동열 감독의 삼성보다 더 효율적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53] 굳이 김성근 외에 위장타순을 즐겨 썼던 감독을 들자면, 백인천 정도가 대표적이었다. 백인천은 "훈련은 정직해야 하지만, 실전에서는 얼마든지 사기꾼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하며 위장타순을 정당화했을 정도였다.[54] 다만 이 과정에서 단순 트집잡기를 넘어서는 지적들도 꽤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리오스 약물 의혹과 보크 지적. 실제로 그때는 김성근이 또 억지 쓴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리오스가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투구폼은 보크로 판정되어 투구폼을 수정하게 되었고 도핑 테스트에서도 양성 판정이 나왔다. 억지 항의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야구에 대한 전문적인 눈은 얕볼 수 없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55] 다만 이동걸 빈볼 사건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빈볼 지시는 2021년 김태균의 증언으로 김태균보다 선배인 한화의 모 고참 선수가 범인으로 결론났다. 물론 그전까지의 전적이 있었기에 김성근 감독이 지시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었기도 하다.[56]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57]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음날 선발로 나올 선수는 지금 쓸 수 있는 투수 중 가장 잘 던지는 투수다. 가장 잘 던지는 투수 대신 다른 투수를 낸다는 것은 의외성을 위해 실력이 떨어지는 카드를 이용한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선수들의 휴식 일정도 꼬이는 셈이니 뒤는 볼 것 없고 이 한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다지 득 될 게 없다.[58] 홈런 후 상당히 오버액션하며 들어오거나 상대팀을 향해 어그로를 바짝 끌어올리는 올드 스쿨파 혹은 메이저리그 데뷔 타자에게 일부러 고의 빈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대표적인 사례다.[59] 실제로 대놓고 노린 공이 아님에도 타자가 슬쩍 몸을 갖다대서 출루하는 것도 종종 있는 플레이다. 타자도 위협구나 빈볼을 단순히 비매너가 아니라 전략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이용하는 것.[60] 실제로 일본프로야구에서 우즈를 비롯 몇몇 용병들은 위협구가 날아오면 일부러 크게 화를 내서 마운드로 달려가 죽빵을 갈기는 식으로 대응했고, 이러면 일본인 투수들은 주먹맛이 무서워 함부로 몸쪽 승부를 할 수가 없고 타자는 치기 좋은 코스의 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경기 외의 폭력마저도 전략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61] 다만 이런 운용 역시 투수풀이 극도로 좋아진 2010년대 후반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유효하다고 평가되며, 투수 육성 자체가 약한 KBO에서는 아직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62] 07:레이번,채병용, 08:김광현, 채병용 09:김광현, 송은범, 글로버, 10:김광현, 카도쿠라[63] 1위는 LG 트윈스, 2위는 두산 베어스[64] 당시 윤석환을 KBO 최초의 마무리 투수로 보기도 하나, 장기적으로 기용되지 못했기에 보통은 1985년부터 마무리로 전업한 삼성의 권영호를 역사적인 첫 마무리 투수로 인정한다.[65] 다만 당시에는 전기 리그 1위와 후기 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시기였으며, 김영덕 감독의 져주기 사건으로 OB 베어스가 후기마저 2위를 기록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하였다.[66] 마운드 높이가 10인치로 고정된 현재와는 달리 당시에는 규정 이내에서는 자유롭게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고, 이것이 지금의 구장마다 다른 외야 넓이처럼 홈 어드밴티지처럼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김성근의 쌍방울은 언더핸더들을 주축으로 삼고 상대팀의 정통파 투수들의 위력은 감소시키고, 자팀 언더핸더들의 공의 위력이 강해지도록 마운드를 깎는 장외 전술을 사용해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67] 엄밀히 말하면 김성근이 처음은 아니었고 당대 두산이나 삼성도 선발 2명을 뽑았지만, 두산은 우즈 이후 모든 타자용병이 다 망했을 정도로 넓은 잠실야구장이라는 여건상 타자용병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삼성은 선동열 감독이 워낙 투수야구를 좋아했기에 팀 사정상 하는, 외국인 타자의 공격력을 포기하는 고육지책 내지는 기책으로 평가되었지 정석적인 전략으로 평가되진 않았다. 이게 효율적인 전략으로 재평가된 계기가 김성근의 07SK 우승.[68] 전형적인 언더핸드 폼이라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가는 편이었던 박정현을 억지 연투시키는 바람에 포스트시즌에서 허리가 완전히 무너지며 마운드에서 말그대로 실려나갔다. 물론 이후에는 자발적 등판이었다고 포장했다.[69] 이러한 올드 스쿨 스타일 혹사 감독의 대표 사례로는 최동원, 염종석을 혹사시켰던 강병철, 선동열을 혹사시켰던 김응용, 문동환, 구대성을 혹사시켰던 김인식 등이 대표적이다. 오히려 불펜 혹사의 사례는 2세대인 김경문, 김기태, 김시진 등이 주로 하였다.[70] 1997년 구원투수로 뛰며 157이닝의 혹사를 당하고 삼성 가서도 100이닝 혹사를 당한 끝에 은퇴.[71] 부상중 경기출전을 강행시켜 은퇴를 앞당겼다.[72] 투수혹사가 얼마나 심했냐면 5년 동안이나 재활만 하다가 2016년 10월 8일 시즌 마지막 날 가진 은퇴경기에 등판했을 때 팔을 아예 아래로 내려야만 했고 5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이를 악물고 투구를 하는 모습이 찍혔고 타자를 상대한 후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73] 대표적으로 팀 린스컴최충연이 있다.[74] 다만 어깨가 소모품이라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 통용되긴 하지만, 분필 이론은 딱히 실체가 있는 이론은 아니다. 실제로 투구 수와 어깨 및 팔꿈치 근육 파열의 인과 관계가 명확한 이론으로 증명된 바는 없으나, 경험적 차원에서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피로도에 따른 자세 불균형이 파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이는 훈련을 통해 이 부분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75] 대표적인 불펜 혹사 감독인 김경문의 케이스에서도 임태훈, 고창성, 이재우, 김성배, 정성훈, 금민철 등 1년에 1명 이상씩은 아웃이 나오며, 불펜 혹사 빈도가 적다는 감독들도 다양한 이유로 시즌 아웃되는 투수들은 등장하는 편이다. 그 엄청난 혹사 강도와 비교해서도 타 팀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수준의 망가지는 수준이라면 나름 관리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76] 정규시즌 기준 OB: 3→4→4→4→5, 태평양: 3→5, 삼성: 3→4, 쌍방울: 2→3→6→17승 59패에서 경질, LG: 중도취임 49승 42패 → 66승 61패 4위로 SK시절 1→1→2→1→3에서 09년 2위 이후 10년 1위를 한 SK시절을 제외하고는 김성근은 단 한번도 첫해 올린 성적 이상의 성적을 낸 적이 없다.[77] 2011년 147구 등판 때문에 김광현까지 혹사의 사례로 넣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2010년 한국 시리즈 이후 뇌경색이 왔고 당시 투구폼을 보면 던지면서 디딤발이 무너져내리는 등 밸런스가 크게 무너져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 김성근 감독 또한 밸런스를 잡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으며, 그 경기 이후 바로 휴식 및 재활 목적으로 일본으로 보내어 김상진, 최일언 코치를 번갈아 붙이는 등 올 시즌 1군 구상에서 제외하고 다음 시즌을 위해 철저히 대비하려 하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혹사로 볼 수도 있지만, 2010년 LG 박종훈 감독이 서승화를 완투시킬 때 투구 밸런스 때문이었다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면서 후임인 이만수 감독이 이를 무리하게 끌어쓰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는 것이 흠. 이는 김성근의 과와는 별개로 이만수 감독이 두고두고 욕 먹는 대목 중 하나이다. 그 결과 김광현은 관절와순 부상을 입고 2013년까지 고생했다.[78] 이대호 항목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시즌 이대호의 대 SK전 타율은 0.197이다. 2010년까지 이대호의 대 정대현 성적은 통산 29타수 1안타였으며, SK 전을 제외한 2010년 타율은 0.390에 달하였다. 2011년 6월 9회 2아웃 상황에서 이대호 상대로 또 정대현이 등판하자, 이대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김성근 감독을 향해 웃음을 짓고 김성근 감독도 마주 웃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79] 안영명은 암만 투구 이닝이 적었다고 해도 1주일에 3번을 선발 등판하는 기행의 피해자가 되었다.[80] 8구단 체제에서는 가장 최악인 케이스가 수도권 경기 후 - 경남권 or 호남권 - 다시 수도권인 케이스였다. 문제는 이 경남권에 NC 다이노스가 창단되고 이후 경기도권에 KT WIZ가 창단되면서 이 최악의 케이스 동선거리 발생빈도가 높아진 것이다.[81] 이동하는 동안 선수는 쉬지 않느냐는 선입견이 있는데 면접이나 지방이동 할 때 고속버스를 타면 알 듯 의자에서 편히 눕지도 못 하고 기본 2시간 3시간을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며 편히 수면을 취하기도 힘들다. 한 팀과의 3연전에 등판 예정이 없는 선발투수들은 미리 다음 상대팀 지역에 가있지만 그 외 선수들은 밤 9시에서 12시에 경기가 끝나면 짐 정리하고 다음 지역으로 가있어야 한다. 특히 국토가 넓은 미국은 구단 전용기를 이용하거나 델타항공사의 1등 석 수준의 좌석배치의 항공기를 전속계약해 피로를 풀 수 있게 만들었다. 대신 트리플A 이하 마이너리거들은 버스를 타고 그 넓은 미국 국토를 횡단하며 경기를 하는데 최악인 경우 10시간 이상 타고 다니며 쪽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82] 심지어 이때는 운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2015와 2016년 모두 개막전부터 끝내기 패배로 마무리지면서 초반 기세가 죽으며 들어갔다. 특히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2015년은 다시 치고 나갔지만, 2016년은 그래도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며 개막 7연패로 이어졌다.[83] 한편 방송 3분 30초경에 포브스가 산정한 2014년 한국 프로야구단 가치평가도 나오는데 1위 LG(1,265억 원)와 2위 두산(1,247억 원)이 유이하게 1,000억 원을 넘기고 있으며-3위 SK가 878억 원-, 한화는 꼴찌에서 두 번째인 8위(2014년 9구단 체제)로 653억 원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한화의 매출 및 인기도가 상승한 것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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