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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38

김성근/야구계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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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세대 야구인들
2.1. 삼김(三金)2.2. 그 외 관계2.3. 외국인
2.3.1. 제리 로이스터2.3.2. 트레이 힐만
3. 2세대 야구인
3.1. 비제자 출신 감독
3.1.1. 김재박3.1.2. 김용희3.1.3. 김시진3.1.4. 선동열3.1.5. 염경엽
3.2. 제자 출신 : 우호 관계
3.2.1. 조범현3.2.2. 김진욱3.2.3. 양상문3.2.4. 김기태3.2.5. 조원우3.2.6. 김원형3.2.7. 이승엽3.2.8. 김태형
3.3. 제자 출신 : 대립 관계
3.3.1. 김경문3.3.2. 이만수3.3.3. 류중일3.3.4. 한대화3.3.5. 박종훈3.3.6. 최계훈
3.4. 제자 출신 : 중립 및 기타 관계
4. 감독 당시의 선수들과의 관계
4.1. 좋은 관계
4.1.1. LG 시절 선수들
4.1.1.1. 이병규4.1.1.2. 이동현4.1.1.3. 이상훈4.1.1.4. 김재현
4.1.2. 삼성&해태 2군 감독 시절 선수들
4.1.2.1. 배영수4.1.2.2. 임창용4.1.2.3. 강동우
4.1.3. SK 왕조 시절 선수들
4.1.3.1. 이진영4.1.3.2. 이대수4.1.3.3. 정상호
4.1.4. 한화 시절 선수들4.1.5. 기타 선수들
4.1.5.1. 박철순4.1.5.2. 박찬호
4.1.6. 일본에서의 인연
4.2. 미묘한 관계
4.2.1. 박재홍4.2.2. 권혁4.2.3. 민경삼
4.3. 나쁜 관계
4.3.1. 마해영4.3.2. 장성우4.3.3. 외국인 잔혹사

1. 개요

김성근과 야구계 타 인물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서이다.

2. 1세대 야구인들

해당 내용은 김성근 및 그 세대 감독들과 프로야구 시절 선수-감독, 즉 제자 관계로 만나지 않은, 즉 프로야구 시절에는 이미 감독-코치 라인까지 올라가 1세대 야구를 이끌어갔던 지도자급 인물들과의 관계를 서술한다.

기존 서술에서는 재일교포 출신이라 한국에 학연, 지연 등이 없었다고 서술하였으나, 사실 1세대 야구인들 상당수가 그렇다. 김응용, 김동엽은 이북 출신, 김영덕, 배수찬, 김성근은 일본 출신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와 6.25 등 시대적인 특성상 그런 인물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인 것. 즉 야구 자체에는 큰 영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반대로 생활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반쪽바리' 같은 이미지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오히려 문제는 성격이다. 김성근은 성격도 외곬수 스타일에 한국말도 어눌했고, 실제 성격도 모난 구석이 있었기에 적이 많은 편이었다. 1세대 야구인들이 전반적으로 친했다가 갈라서는 일도 잦았고 싸움도 많은 아사리판이긴 했다. 하지만 김영덕, 김응용 감독이 선수나 코치들에게는 모질 때가 많았어도 프런트에 대해서는 친화적이었던 반면, 김성근 감독은 오히려 기업 오너와는 친밀도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프런트와는 대립각을 많이 세웠던 편.

2.1. 삼김(三金)

초창기부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감독사를 써온, 1세대를 상징하는 "삼김"과의 관계를 서술한다.

2.1.1. 김응용

파일:김응용 김성근.jpg
파일:김성근 김응용.jpg
파일:김응용vs김성근_전설의 시작.jpg
파일:김성근 김응용 말년.jpg
김성근의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라 하면 단연 김응용 전 감독으로, 평생의 라이벌 관계라 할 만 하다.

김응용 전 감독과는 애증의 관계였다. 선수 시절 김성근이 2살 많은 김응용에게 계속 반말을 하여 김응용이 부아가 치밀었다고 말 할 정도. 다만 이는 문화적 차이로 볼 수 있는데, 일본은 나이 2~3살 정도는 상관없이 친하게 지내며, 친해지면 나이 상관없이 반말을 한다. 친하면 학생이 선생에게 반말을 하는,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김성근은 김동엽이나 여타 재일교포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주로 서로 타향살이하는 외지인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 나름의 친하게 지내 보자는 친목도모 방식이었던 것을 김응용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더더욱 사이가 나빠졌던 것.[1]

김응용은 현역 시절 국가대표팀에서 김성근을 본 기억이 없다고 은근히 디스하기도 했다. 선수 시절 김응용은 10여년간 국가대표팀에 밥먹듯이 나갔는데, 김성근은 1961년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본 기억이 없다고 간접 디스한 것.

지도자 시절 그 유명한 위장오더 사건 이후 김응용과 김성근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에서 잠시 1군(김응용), 2군(김성근) 감독으로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나, 단둘이 함께 식사한 것이 단 한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관계가 냉랭했다고 한다. 게다가 김성근이 2002년 첫 한국 시리즈에 올라갔을 때도 물을 먹인게 김응용이였기에 뒤끝이 무진장 심한 성격상 김성근도 김응용을 무진장 싫어했다.

김응용이 감독에서 물러나 삼성 사장에 있던 시절인 2008년 김성근이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김경문을 하도 비난하자 보다 못한 김응용이 나서서 김성근을 비난하고 김경문 국대 감독을 비호해준 적이 있다. 당시 김응용은 '''김성근 수법은 다 알고 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나. 김성근이 국대 감독을 비난하는 것은 결국 라이벌 팀인 두산을 흔들기 위한 작업이다"라고 김성근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바가 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서로간에 성격은 맞지 않았으나, 그래도 서로간에 어느 정도 인정은 하는 사이였다. 김성근이 해태 2군으로 갈 당시에 자신은 김응용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에 어떻게 김응용이 저렇게 야구를 잘 하는지 한수 배우기 위해 들어간다는 발언은 이미 유명하며, 또한 상술한 2002 한국시리즈 이후 김응용이 '야구의 신이 아니었을까'라는 발언을 통해 야신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주게 되었다. 사실 김응용이 이런 발언을 한 의도는 패장에 대한 예우와 본인을 상대적으로 높이기 위해서였지만,[2] 결과적으로는 야신이란 평생 타이틀을 만들어준게 김응용. 정말 인간적으로 싫어하고 인정조차 하고 싶지 않다면 예우 따위는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래저래 본인의 오랜 경쟁상대로서 리스펙 정도는 하고 있었다는 반증.

서로간에 싫어하는 사이이긴 했으나, 결국 젊은 시절부터 한평생 야구판에 몸담아오며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건 김응용과 김성근 단 둘밖에 없었기에, 후일 공식석상에서는 서로 악수와 인사도 제법 나누고, 말년에 김응용의 은퇴식 이야기에 김성근은 흔쾌히 '대한민국 최고 감독의 은퇴식인데 당연히 올스타전에서 해야 한다' 며 챙겨주었고, 이후 김응용은 은퇴, 김성근은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하던 시절에는 김응용이 김성근에게 그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으로 건강 잘 챙기라는 훈훈한 덕담을 할 정도. 이렇게 과거에는 라이벌이자 적으로서 서로간에 적대시하는 관계였으나, 수십년을 한 바닥에서 부대끼며 미운 정도 들었고, 서로 같이 늙어가며 인생 말년에 이른 현재는 과거의 앙금은 많이 사라진 상태. 원래 나이 들면 많은 것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2.1.2. 김인식

파일:XFPL7FN2WBMSCREYSMGY6TGIK4.jpg

1세대 원로 중 김성근과 가장 좋은 관계. 1세대 야구 원로 소위 '3김' 중 김인식 감독은 사실 김응용과도 한일은행 선후배 사이이자 타이거즈 감독-코치 관계로 오랜 기간 인연을 맺었지만, 김인식 감독이 쌍방울 감독으로 오면서 김응용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후로는 김성근과의 연결고리가 좀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야구관이 비슷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김인식은 김성근과 이광환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어 좀 애매하다. 그냥 김인식이 성격이 좋은 편이라 두루두루 친한 거라 보는 편이 맞을 듯. 김성근 또한 김인식에 대해서는 팀으로 붙을 때도, 국가대표 감독일 때도 강한 발언을 한 적이 거의 없다.[3]

나이 들어서는 같은 원로로 악수하는 모습 등이 유독 자주 비치는 사이이고, 2012년 김성근 감독 SK 경질 이후에는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공저하기도 하였다.

2.2. 그 외 관계

2.2.1. 김영덕

파일:김영덕 김성근.jpg
파일:김성근 김영덕.png

어떻게 보면 김응용 감독보다도 최악의 사이.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교토 동향 출신이다. 김영덕이 김성근의 6년 선배다. 둘은 본래 상당히 좋은 사이였다. 1959년에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당시 난카이 호크스 선수였던 김영덕이 같은 재일교포였던 김성근에게 야구 용품 지원 등의 도움을 주었고, 이후로 한국에서는 한동안 이웃으로도 지냈을 만큼 인연이 깊었다. # 동시에 김영덕이 한국에 진출하게 된 것도, 김성근이 1961년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때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끈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

김영덕은 일본에서 은퇴한 후 뒤늦게 한국 실업야구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실력과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영덕은 고향 후배인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때 김성근이 윗사람에게 개기기 좋아하는 성격임을 알게 된 김영덕은 이후 김성근을 꺼리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도 김영덕과 김성근은 OB 베어스의 감독과 투수 코치가 되어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김성근이 투수 코치가 된 것은 김영덕 감독의 의사와 무관했고,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이 최인철 회장의 조언에 따라 김성근을 임명한 결과였다. 결국 구단 수뇌부에서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내정하자,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에게 직접 연락해서 "난 솔직히 말해 네가 싫어서 말 안 했다. 위에서 널 쓰라고 하니 어쩔 수 없어 말하는데 내일 한번 들어와 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2년 OB 베어스는 원년 우승을 달성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이었던 만큼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코치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격이 워낙 강했던 둘이었던 만큼, 시즌 중에도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김성근이 올린 2군 선수를 김영덕이 다시 교체해버리면서 김성근이 경기 도중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존의 인연이 있었던 만큼 이때까지는 사이가 완전히 갈라진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는 후술할 일화가 이어지면서 사실상 앙숙 지간으로 악화되었다.

김영덕이 OB 감독을 사퇴하고 삼성 감독으로 가게 되자, 후임 감독이 된 김성근은 자신에게 먼저 제의가 온 삼성 감독 자리를 김영덕이 가로채갔다고 주장했다.[4]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OB-삼성의 관계도 4차 대전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앙숙 관계가 되었다. 1984년 시즌 초 3연전 마지막날, 당시 경기 중 OB의 신인 포수 배원영이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삼성 벤치를 향해 김영덕 감독이 가장 싫어하던 별명인 "변태"를 외치며 놀리자, 경기 후 김영덕 감독이 OB 덕아웃을 찾아와 따귀를 날린 사건이 대표적.

아주 훗날 2017년 김영덕이 김성근에게 지금 고난을 잘 헤쳐나갈 꺼라고 덕담을 남기거나, 기자한테 그래도 현역 감독인데 기사 좀 잘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는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어느 정도 감정이 식은 것도 있겠지만, 한화에 대한 김영덕의 애정과 충성심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5]

2023년 1월 21일 김영덕 감독이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김성근 감독이 애도를 표했다. 김성근은 "일본에 있던 시절부터 김영덕 선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국에 온 뒤에도 야구가 막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김영덕 선배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며 "투수로는 한국에 처음 슬라이더를 전수하셨고, 감독으로는 긴 페넌트레이스를 치르는 법을 알려주셨다"고 회상했다.

김성근 전 감독은 "김영덕 선배는 감독으로 은퇴한 뒤에도 한국 야구에 공헌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그 경험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게 너무 아쉽다"고 추모했다. 한편 김인식 전 국가대표 팀 감독, 이상군 천안북일고 감독 등 다른 야구계 인사들도 추모 메세지를 전했다.

2.2.2. 이광환

파일:RXs3JoH.jpg

이광환 전 감독과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야구관이 굉장히 다른 편이었는데, 김성근 감독이 한국 야구 초기 관리야구의 대표 주자였다면 이광환은 자율야구의 대표 주자로 이후 한국 프로야구의 양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프로야구 원년에 김성근과 이광환은 각각 OB 베어스의 투수코치와 타격코치로 부임했는데, 공격력을 중시했던 이광환과 극단적인 스몰볼 야구를 추구했던 김성근은 이때부터 대립하기 시작했다. 84시즌을 앞두고 연배가 많은 김성근이 먼저 감독으로 승진하자 이광환은 야구 유학을 떠나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80년대 당시 메이저리그의 강팀이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유학을 하고 88년 돌아와 OB의 2군 감독에 부임했다.

이광환은 돌아와서 OB에서 메이저리그식 야구를 추구했는데, 이러한 이광환의 야구관은 김성근의 스몰볼 야구과 대척점에 있었다. 특히 1988년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OB 2군 감독에 취임하면서, 이광환은 김성근 OB 감독의 스파르타식 야구에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기자들에게 의견을 피력하여 기삿거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둘의 야구관 갈등은 초창기부터 계속해서 있었다. 원년 당시 타격코치였던 이광환은 김성근과 타격 이론의 차이 및 식단에서까지 차이를 나타내며[6] 충돌을 빚은 바 있었다. 또 타격 이론에서도 김성근은 일본 야구 스타일대로 배트헤드의 스윙스피드를 이용한 타격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광환은 근육의 힘은 직선 운동이 아니라 물걸레짜듯 비트는 데서 훨씬 강하게 나온다는 인체생리학에 의거한 타법을 펼쳤다. # 코칭 스태프로서의 직무에 대한 생각도 두 사람은 엇갈렸다. 김성근감독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손수 보살피고 가다듬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반면 이광환코치는 야구 이론을 통일시키되 전문코치로서의 활동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7] 이에 따라 이광환은 사장, 김성근은 가정교사라는 기사도 후에 나온 바 있다. #

심지어 이때의 모습을 보면 2010년대 김성근-이만수의 관계와도 유사성이 보인다. 실제로 당시 프런트가 은근히 이광환의 편을 들었다. 당시의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참조.

결국 파워 게임에서 밀린 김성근[8]이 물러났고, 이광환이 뒤를 이어 OB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감독에 올랐던 이광환 감독도 자율야구라는걸 이해 못한 선수들과 프런트 때문에 1990년 시즌 도중에 해임당하였고, 이광환은 92년부터 96년까지 LG 트윈스 감독으로 있으면서 자율야구를 꽃피우게 되었다. 좀 특이한 것은 2002년 김성근 감독이 LG를 준우승시키고도 경질되었는데, 프런트는 처음부터 후임으로 이광환을 준비했었다는 OB 시절의 악연이 반복되었다는 것. 또한 이광환 감독 부임 후 OB와 LG는 각각 암흑기를 겪는다.

이렇게 야구 관련해서는 정반대인 스타일을 지녔고 김성근 짜르고 그 후에 이광환이 오는 묘한 상황이 여러 번 연출되었지만, 정작 이 둘의 개인적인 관계는 나쁘지 않은 편을 떠나 매우 좋은 편이다. 실례로 히어로즈 감독 말기에 시즌후 김성근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히어로즈와 SK와 연습경기를 가지려고 했으나 구단주 이장석의 주도로 감독에서 해임되어 이는 취소되었다. 이 때 "약속이 어긋나 (김성근) 형님에게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렸다." 고 말했으며 그리고 해임될 당시에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던 SK와의 3연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 때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면서 말하기를 한 3번은 더 짤려야 형님처럼 좋은 감독이 될까요 라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고. 이렇게 서로 연습경기까지 잡을 수 있고, 약간의 디스와 자조가 섞인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인 걸 보면 좀 많이 친하다.

오히려 이광환은 김응용과 감정싸움이 심해 기사까지 여러 차례 날 정도로 앙숙지간이었다. 사실 1세대 야구 원로들은 좀 전반적으로 티격태격하는 관계가 많은 편이다. 김인식과 강병철이 전반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고, 김응용과 김영덕 또한 악연이 깊은 편. 김영덕과 이광환의 사이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서 똑같이 김응용과 대립각을 세웠던 김성근과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했던 편. 이광환 감독이 신사적인 스타일로 유명하기도 하고.

2.2.3. 강병철

파일:김성근 강병철.jpg

강병철 前 감독과는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김영덕 前 감독을 제외하면 선배 야구인들에게 악평을 하지 않는 강병철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알려진 일화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일부 올드팬들은 8개 구단과 각종 트러블을 일으키던 김성근이었던 만큼 80~90년대에도 강병철과도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김성근 감독의 행보에서 결정적인 순간 가로막는 역할을 하던 감독이 강병철 감독이었기 때문에 감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풍설이 있는 정도. 다만 겉으로 볼 때는 만담을 나누는 등 관계가 그렇게 나쁘다 하는 여지는 보인 바가 없다.
김성근: 신문 보니 (순위가)우리 바로 밑에 있더니 언제 저 아래로 내려갔지?
강병철: 3승인가 별 차이가 없던 데요. 뭘…(2위 SK는 현재 30승. 7위 롯데는 27승)
김성근: 하긴 우린 두산에 2패 했는데. 롯데는 이기고(한화전 2연승) 왔지?
강병철: 올해는 막판까지 아무도 모르겠던데, 어떻게 SK한테 5할만 했으면 좋겠는데….
김성근: 이번 주부터 계속 롯데랑 하는데, 그럼 우리 것 뺏어가려고?
강병철: 진짜 어떻게 대진이 그렇게 짜였나 몰라. 3주 연속 붙더라고요.
강병철: (서로 라이벌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우린 서로 욕심 없어요.
김성근: 그래도 고생은 많아. 강 감독이….
강병철: 하긴 작년에 꼴찌 할 때 몸도 안 좋고 해서 등산을 열심히 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성적 나빠 어떡하느냐고 위로하는 터에 살이 더 빠졌어. 멀쩡한 배도 갑자기 아프고…. 그런데 배 아파 운동을 쉬었더니 몸이 불고, 성적도 좋아지대? 홈에서 자꾸 지는 바람에 배가 또 아파 고생이긴 했지만….
김성근: 그러게, 야구 감독이야 다 그렇지, 하여튼 TV로 보니까 많이 늙었어. 염색 좀 하지.
강병철: 안 그래도 했는데 물집인가 생기고, 머리털도 자꾸 빠지길래 그냥 관뒀어요. 야구나 흰머리나 그냥 놔두는 게 좋은 것 아닌가도 싶고. 김 감독은 머리가 '꺼메서' 좋겠네.(요즘 성적 부럽다는 의미)
김성근: 우리? 그럼 짧게 깎아봐. 내 머리도 다 희여. 짧게 깎아서 그렇지.
강병철: 그나저나 우리 리오스 말이죠. 멀리 가서 고민 끝에 데려왔는데, 얘가 수비는 3루든 1루든 아주 귀신같이 하는데, 쳤다 하면 땅볼이야. 용병이 또 속을 썩이네요.

그러자 김 감독은 일본 용병 중에서 고르는 방법을 조언했고, 두 노 감독은 3주간의 명승부를 기원했다.
"베이스볼 시네마 - 홈에서 자꾸 져 배가 또 아파오네...", 2007.06.19

김성근이 김영덕과의 잡음 끝에 처음 감독을 맡게 되었던 1984년, 강병철의 롯데와 김성근의 OB는 후반기 1위를 놓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했다. 이에 삼성의 막판 져주기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다만 그 해 OB와 삼성 사이에 몇 차례 난투극을 벌일 정도로 험악했기 때문에 OB와 롯데의 악연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결국 김성근은 그해 강병철의 롯데에 밀리며 통합승률 1위를 하고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강병철은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명감독 반열에 들었다. 그리고 OB가 1984년의 악몽을 극복하고 후기리그 우승까지 매직넘버 1을 남긴 1986시즌 최종전에서 강병철은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됐음에도 불구, 굳이 최동원을 선발투수로 올리는 초강수를 두며 논개 작전을 시도한다. OB가 1대3으로 지던 9회말에 폭풍 3득점으로 역전승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1989년 김성근은 태평양을 이끌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명감독으로 급부상했고,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임호균 각서 파동까지 일으켜 가며 1991년 그토록 바라던 삼성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삼성에서 저조한 성과를 거두었다. 삼성 팬들이 연일 김성근 경질 시위를 벌였지만 구단 수뇌부에서 영입했던 감독인 만큼 언론의 예상을 깨고 1년 더 유임되었다. 이랬던 김성근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 바로 1992년 준플레이오프였다. 준플에서 강병철의 롯데에게 처참하게 발린 직후 김성근은 삼성 감독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성근의 삼성을 물리친 롯데는 그해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김성근은 1996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될 때까지 야구 인스트럭터 알바를 하며 야인생활을 해야 했고, 약체 쌍방울이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야구계에서 잊혀질 뻔 했던 아픈 시절을 겪어야만 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 기사를 보면 2007시즌, 상술된 바와 같이 김성근의 SK가 롯데 전에서 여러차례 빈볼을 던지면서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강병철 감독이 김성근이 비신사적인 야구를 한다고 인터뷰에서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7개 구단 감독들이 전부 김성근의 SK가 비신사적인 플레이를 한다고 비난하던 때여서 따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2.2.4. 백인천

특별한 관계성은 보이지 않는 편. 다만 1961년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국가대표로 같이 뛰었던 인연이 있고, 심지어 당시 백인천은 포수로 김성근과 배터리를 이루었다. 또 백인천의 일본 진출 당시 너랑 비슷한 수준인 김성근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며, 네가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겠냐는 선배들의 말에 자극받았다는 기억을 백인천이 토로한 바도 있다. https://news.tf.co.kr/read/playground/1005947.htm} 현재는 자선경기 등 야구계 원로로 행사 등에 같이 참석하고 인터뷰 같이 하고 하는 정도의 사이.

2.2.5. 김동엽

파일:김성근vs김동엽.jpg

빨간 장갑의 마술사. 야구계에서 친한 사람이 별로 없던 김성근이지만, 김동엽만큼은 매우 가깝게 지냈다.

둘은 여러가지로 공통분모가 많기에 둘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다만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일종의 쇼맨십으로 만담 수준이었다. 톰과 제리처럼 서로 디스하며 놀던 사이. 둘의 만담은 1985~87년 시즌 중반까지 서울 라이벌인 OBMBC 감독으로 맞서면서 한층 더 독해졌는데[9] 1987년 5월경 전기리그 막판 상대와의 경기를 앞두고 잠실야구장 구내식당에서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식당에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김동엽 자리에 김성근이 합석하였다.

김성근: 이기지도 못하면서 비싼 것만 드시누만.
김동엽: 그러지 말라우야. 잘 먹어야 이길거 아니가서?
김성근: 고기 먹어봤자 소화도 안될텐데 뭐?
김동엽: 닥치라우, 우린 오늘부터 10연승이야.
김성근: 10연승 좋아하시네. 오늘 내일 우리한테 다 지면 어쩌시려고?
김동엽: 그러면 8연승이지.
김성근: 8연승 같은 소리하지 마쇼. 모가지에요 모가지!
김동엽: 모가지좀 또 떨어지면 어때. 내레 땅에 떨어진 모가지 주워서 붙이는데 선수잖네. (옆에서 밥먹고 있던 강병철을 가리키며) 는 모가지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리 서툴겠지만 나야 뭐 수도 없이 붙여보지 않았어? 모래가 묻으면 좀 따끔따끔 하겠지만...
김성근: 그러다 모가지가 거꾸로 붙으면 어쩌려고 그러슈?
김동엽: 더 좋지. 뒤까지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김성근: 좋기도 하겠수. 그럼 MBC가 아니고 CBM 이유.
이 대화가 있은 지 두 달 만에 김동엽은 실제로 모가지가 달아났고,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성근은 일본, 김동엽은 이북 출신으로 둘 다 타향살이하는 서러운 처지를 겪는 사이였고,[10] 덕분에 차별에 지지 않고자 독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방향은 달랐지만 둘 다 말빨도 탁월했고 제법 유머 감각도 있었다. 거기에 둘다 근성을 강조하는 70년대식 야구관을 지녀, 야구에 관해서도 서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더군다나 김동엽이 3살 많았지만 김성근의 디스에 저렇게 유머로 받아넘길 수 있는 넉살까지 지녔으니, 서로 주거니받거니 하며 티키타카를 했던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야구계에서 김성근의 몇 안되는 정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으로 남았다.

정말 여담으로 사진을 보면 둘다 바짝 깎은 스포츠머리로 헤어스타일이 같은데, 아예 단골 이발소까지 같아서 같은 이발사가 깎아줘서 그랬다고 한다. 그만큼 사적으로 이발소까지 같이 다닐 정도로 친했던 사이. 김성근과 김동엽은 워낙 친해서 아예 등번호를 둘 다 38번으로 맞추었는데, 김동엽이 젊은 나이에 사망한 후 김성근은 친구를 추모하는 뜻으로 이후 평생 38번을 유지했다.

2.2.6. 배수찬

배수찬 전 감독과는 같은 재일교포 선후배 출신이었다. 김성근보다 5년 선배였던 배수찬은 같은 재일교포 후배인 김성근이 한국에서 자리잡고 야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성근이 일본 교토 상호차량에 입사하여 일과시간 중에는 근로자로서 일하고 점심시간 때 사내 야구팀에서 훈련을 하며 사회인 야구선수로 지내고 있을 때, 한국 실업야구 교통부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배수찬이 팀에 김성근을 추천했고, 그리하여 김성근은 1960년 일본을 떠나 한국 교통부에 입단하여 최초로 전업 야구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배수찬과 김성근은 2년 후 기업은행 야구팀으로 함께 팀을 옮기기도 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던 배수찬은 한국말이 어눌했던 김성근의 한국생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김성근이 결혼할 때 장인을 만나 “딸을 달라”고 설득하기 하기가 어렵자 함께 장인을 만나 2대1로 술을 마시면서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도 했다.

1970년 당시 지방의 약팀이었던 마산상고 감독으로 야구계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김성근을 실업야구 강팀인 기업은행 코치로 적극 추천한 것도 당시 기업은행 타격코치를 맡고 있던 배수찬이었다. 배수찬의 제안을 받은 김성근이 곧바로 마산상고 감독직을 그만두고 상경해 버린 바람에 마산상고 야구부는 졸지에 감독을 잃고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11]

그러나 1971년 김성근이 기업은행 감독이 되었을 때 배수찬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배수찬은 김성근이 거짓 정보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맡았어야할 기업은행 감독자리를 꿰찼다면서 김성근과 의절했다. 김성근은 처음에는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배수찬은 믿지 않았으며, 결국 이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갈라졌다.

그 외에 60년대 말 월북한 아버지와 비밀리에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배수찬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는데, 이때 김성근도 연루가 되어 본인 말로는 따귀 몇 대 맞고 나왔다고 한다.

2.2.7. 우용득

1992년 김성근이 롯데와의 준플에서 광탈하자 삼성 구단은 김성근은 경질하고 우용득 작전코치를 내부 승진시켜 후임 감독으로 선임했다. 당시 삼성이 매년 실시했던 LA 다저스와 합동 동계 훈련 때마다 미국 야구를 적극적으로 습득했던 우용득은 메이저리그식 야구를 매우 신봉했고, 호쾌한 타격 야구를 추구했던 삼성의 팀컬러와 매우 잘 맞았던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성향상 우용득은 1992시즌 삼성 코치진과 선수단이 김성근에게 집단 항명했을 때 그 중심 인물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우용득은 감독에 취임한 직후, 김성근의 스몰볼식 야구를 갈아엎길 원했던 구단과 팬들의 바램에 부합하여 선굵은 빅볼야구를 추구했고 그 결과 김성근 때 이탈했던 삼성팬들이 대거 돌아와 야구장을 찾아 김성근 시절 30만에 불과했던 관중이 50만 관중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를 바탕으로 93년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 김성근이 현금트레이드로 데려왔던 여러 노장 선수들을 모두 정리하고 리빌딩을 추구했다.

우용득은 삼성 감독에 취임한 후 "자잘한 작전을 펼치는 일본식 야구를 혐오한다"고 말하면서 김성근의 스몰볼 야구를 직접적으로 디스했다. # 실제로 이러한 리빌딩 결과 1993 시즌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숙명의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와 접전을 벌여 4차전까지는 2승 1무 1패로 앞서 나갔으나, 3경기를 연달아 패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여기에 더해 이승엽, 신동주 등 훗날 라이온즈를 뒷받침할 스타를 꾸준히 기용하며 향후 삼성 왕조의 기반을 닦은 것도 사실.

다만 이 때 당시 뛰던 일부 선수들은 전임자와의 차별화 때문이었는지 리빌딩의 강도가 너무 강했고, 노장 선수들의 부재가 팀 단합에 영향을 끼쳐 결정적인 한국시리즈에서의 실패를 낳았고, 1994-1995 시즌 내리 5위로 마감하는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2.3. 외국인

기본적으로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이 스몰볼 성향이고, 한국의 외국인 감독 대부분이 메이저리그 빅볼 스타일이 강한 감독이 많았던 만큼 외국인 감독들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접점이 있던 감독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로이스터와의 설화가 많이 부각되는 정도이다.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하고 사이가 각별하다고 한다. 소프트뱅크에서 코치 고문이라는 명예직을 맡음에도 불구하고 1군 고위직들하고 자주 붙어다니는 것도 이 때문. 어린 시절부터 친한 건 아니고 원로가 된 후에 가까워진 사이로 보인다.[12] 이 덕분인지 소프트뱅크에서 퇴단한 후인 2024년 초 김원형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연결해 줘서 연수코치로 갈 수 있게 했다.

2.3.1. 제리 로이스터

파일:김성근 로이스터.jpg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과도 3년 내내 앙숙 관계를 이어갔다. 김성근은 로이스터가 롯데 감독으로 선임된 직후부터 바비 밸런타인을 추켜세우며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였다. 로이스터 감독이 김성근과 정반대 스타일의 선굵은 야구로 돌풍을 일으키자 김성근과 로이스터 두 감독을 비교하는 기사들이 자주 실리기도 했다. 이후 여러차례 빈볼 사건 등이 얽히면서 그때마다 김성근 감독의 공격성 발언과 로이스터의 대응이 이어졌다.

또 김성근은 모래알 발언, 롯데의 3중 사인훔치기 발언 등으로 롯데를 도발하였으며, 이에 로이스터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13] 좀처럼 투수를 바꾸지 않는 성향의 로이스터가, 한번은 롯데가 SK를 크게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이례적으로 김성근 감독을 흉내내어 9회에 연달아 세명의 투수를 연달아 등판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이대호의 유튜브에 출연한 로이스터는 김성근과 야구장에서는 대립하는 관계였으나 로이스터가 김성근을 축하해 준 적이 있어 김성근이 좋은 문화를 정착시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었으며, 경기장 밖에서는 원만한 관계였다고 회상했다.

2.3.2. 트레이 힐만

트레이 힐만 전 SK 감독은 김성근이 치바 롯데 마린즈의 순회코치로 있던 2006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으로 있었지만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다. 이후 힐만이 2017년 SK 와이번스의 감독에 취임하였다. 2017년 한화와의 시범경기 도중 갑자기 덕아웃 앞쪽으로 나와 크고 느린 동작으로 번트 싸인을 전달하는 모습이 잡혔는데영상(6:00부터 보면 된다. 6:27에 황당해하는 김성근 본인의 모습은 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리 팀 싸인을 보는 팀이 있는데 그냥 보라고 했다. 싸인을 여러 방향으로 이용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그 외에 힐만과 연출한 명승부가 유명한데, 17년 5월 2일 SK전, 번트를 대는 척 페이크를 걸고 더블스틸을 성공시켰다. 평소 번트를 많이 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역이용한 작전으로, 김성근이 저런 상황에서 번트 대는 건 유명하니 언제나처럼 번트 대는 척 3루수가 전진수비를 하게 만들고 더블스틸을 걸어버린 것.

심리전으로 힐만을 완전히 농락한 작전으로 힐만은 얼마나 분했는지 fuck을 외치는 입모양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을 정도. 해설이던 허구연 역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1점 만회에 그치고 역전은 실패했지만, 왜 김성근이 한화 시절에는 욕을 먹어도 과거엔 명장이었는지, 그 시절의 번뜩이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준 명승부로, 유튜브 조회수가 300만이 넘고 아직도 종종 댓글이 달릴 정도로 한화 시절 김성근이 보여준 명플레이 중 하나다.

3. 2세대 야구인

김성근과 김응용의 경우 워낙 오랜 시간 프로판에서 감독직을 역임했던 만큼, 프로야구 출신 감독들은 대부분 어느 팀에서건 그와 선수-감독, 소위 제자 관계로의 접촉이 있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특히나 그 특유의 야구 스타일 때문에 대립각을 세우는 감독이 많은 편인데, 보통 이런 관계가 없었던 비제자 출신 감독들은 대부분 대립 관계에 있고 제자 출신이라지만 현역부터 악연으로 얽혔던 감독들 또한 대립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선수 시절 중용받았던 감독들은 애제자로 남아 그 영향을 짙게 받은 편. 예외라면 전혀 인연이 없던 염경엽 정도가 김성근에 우호적인 편이다.

동시에 해태, 삼성 출신 선수나 감독들과는 전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인데, 이는 팬들이 감독과 선수들을 김성근 계파와 김응용 계파로 나누어보는 것까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3.1. 비제자 출신 감독

3.1.1. 김재박

김재박과는 김성근 감독이 첫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1975년 제1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재박은 고교 때까지만 해도 커리어가 별로였는데, 영남대 야구부 창단 멤버로 겨우 야구를 이어가나 싶더니 2학년부터 수위타자로 등극, 3학년 때 첫 국가대표를 달았던 때였다.

둘은 1996년 각각 현대와 쌍방울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앙숙 관계였다. 박재홍 부정타격 시비, 마운드 높이 시비, 김원형 빈볼 사건 등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현대 김재박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도발하는 형태였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은 현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 이유가 현대는 부자구단이었던 반면에 쌍방울은 가난한 구단이어서 오기가 생겨서 시비를 많이 걸었다고 해명하다시피 얘기했다. # 다만 쌍방울이 정말 가난한 구단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해당 내용 참조.

2007년 김성근과 김재박이 각각 SK와 LG 감독에 부임한 이후에도 몇 차례 트러블이 있었다. 2008년 SK가 조범현 감독 시절보다 플레이가 더티해졌다고 디스한다던가 2009년 김성근 감독이 LG 봉중근 기용 문제를 놓고 참견하여 크게 논란이 된 바 있었다. 김재박이 당시 부상중이었던 봉중근을 기아와의 경기에서 내지 않겠다고 하자, 당시 기아와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던 SK의 김성근이 봉중근을 보러 온 팬을 위해 등판 시켜야 한다고 했던 것. 이에 김재박이 왜 남의 팀에 간섭이냐고 격노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자신이 이끄는 SK와의 경기에선 봉중근 등판이 예고되자 봉중근 같은 선수를 혹사시키는 것은 국가적 재원의 낭비이기 때문에 봉중근을 아껴야 한다며 내로남불을 시전했다.

여튼 여러 일화로 보아 알수 있지만, 대표적인 반 김성근파 야구인 중 한 명이다.

3.1.2. 김용희

파일:김성근 김용희.jpg
김용희는 롯데 자이언츠 원년 멤버로 초창기 롯데에서 주장 및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미스터 롯데로 불렸다. 당시 김성근은 순위 싸움을 하던 팀들과 여러 트러블을 일으키곤 했는데, 1984년 후기 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던 롯데와도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롯데 선수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김용희와 김성근은 껄끄러운 감정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김용희 전 감독과 유일한 인연은 2000년 한 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1군 감독과 2군 감독으로 지낸 것이었다. 김용희가 1군 감독, 김성근이 2군 감독이었다. 당시 드러난 에피소드는 많지 않다. 다만 1990년대부터 서로 다른 야구관으로 거의 대놓고 디스하는 관계였다. 김성근이 삼성에서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후 야인으로 있던 시절인 1993년말 롯데 강병철 감독이 전해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 불화 끝에 결국 재계약을 거부하고 한화 감독으로 이적하면서 롯데 감독이 공석이 되었다. 당시 감독 경력자로서 야인은 김성근과 김인식이 있었고, 당시 언론에서는 김성근 롯데 감독 취임을 기정 사실화하며 기사를 썼다. 하지만 정작 롯데 구단은 미국 연수를 받고 귀국한 김용희를 내부 승진시켜 감독에 임명했다. 이 때 김성근이 롯데와 김용희에 앙심을 품어 향후 롯데만 만나면 붙을 때 유독 독하게 물고 늘어졌다는 카더라도 있다.

김용희는 롯데 감독으로 부임할 때 선수단 운용에 있어서 제1 원칙으로 “무리한 투수진 운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연수하는 동안 메이저리그 팀들이 팀의 자산인 선수 보호에 각별히 신경 쓰는 것에 대해 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김용희를 필두로 미국에서 연수 경험이 있는 몇몇 소장파 야구 감독들은 김성근 감독의 비신사적인 야구를 비판하면서 깨끗한 선진야구를 추구하자는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선발예고제를 실시했다.

이러한 자발적 선발예고제에 앞장섰던 인물이 김용희 감독이었다. 당시 김용희가 자발적으로 선발예고제를 하자 팀에 손해라는 팬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김용희는 선발예고제를 통해 투수들의 마구잡이 운용을 막고 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팬들을 설득했다. 또 김용희는 감독 시절 메이저리그 스타일로 짧고 집중력 있게 훈련을 실시했다. 비시즌 기간 전지 훈련에서 김용희 감독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훈련을 실시했다. 집중력 있게 훈련하는 것이 효과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김용희 야구관은 밥먹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밤 늦은 시간, 때론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선수들을 굴리던 김성근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김용희는 2000년대 후반 해설 위원으로 활동할 때도 훈련을 짧고 집중력 있게 실시하던 로이스터 감독을 극찬하면서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당시 로이스터는 김성근과 대척점에 있는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야구로 큰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2015년 김용희와 김성근은 각각 SK와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시 야구계에 복귀했다. 김성근은 복귀하자마자 강도높은 지옥훈련을 실시하며 연일 언론에 화제가 되고 있었다. 김성근의 지옥훈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용희는 SK에서는 지옥훈련은 없다고 말했다.

야구계의 신사 소리를 듣던 김용희였지만 SK 감독 시절, 김성근의 한화에게만은 태도가 달랐다. 김경문 감독 등과 마찬가지로 김용희 감독도 김성근 감독의 한화를 만나면 평소에 안하던 항의를 하고, 큰 점수차에 도루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대표적으로 한화 장민재가 로진을 과다 사용한다고 항의하기도 했고, 한화전에서 5대0으로 앞서고 있던 2회에 도루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 김성근 감독이 박현준이 로진을 과다 사용한다고 항의한 것과 큰 점수차에 도루를 시도했던 것에 대한 항의로 풀이되고 있다.

단, 김용희가 SK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김성근에게 연락을 하여 조언을 구하였다는 일화가 있고, 경기 전 서로 악수를 하거나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 등 사이는 크게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1.3. 김시진

김시진은 사람 좋은 성격으로 유명해서 야구계에 척을 진 경우가 거의 없지만, 김성근과는 관계가 안좋기로 알려진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김시진 전 감독이 현대 감독으로 있던 시절 김성근에게 주먹감자를 날린 적이 있다. 현대가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SK 김성근 감독이 9회 2사 풀카운트까지 계속 능욕하는 투수교체를 해댄 것이다. 현대 덕아웃에서 선수단이 모욕이라면서 크게 술렁이고 있는 상황이었고, 감독으로서 액션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었다.

김시진이 현역이었던 시절 김성근이 맡았던 팀들은 다른 구단과도 사이가 안좋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김시진이 몸담았던 삼성, 롯데와는 특히 사이가 안좋은 편이었다. 1984년 김영덕과의 갈등 끝에 OB 감독에 오른 김성근은 김영덕과 삼성을 자극하여 시즌 중 여러차례 집단난투극이 벌어지고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삼성의 에이스였던 김시진이 김성근에게 가졌을 감정이 어땠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김시진이 롯데로 옮겨간 후, 김성근이 감독으로 오게 된 삼성과 롯데는 1992년 준플 등에서 감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김시진이 현역을 은퇴하고 투수코치가 된 구단이 바로 김성근이 경질 후 투수진이 줄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던 태평양 돌핀스였다. 정동진 감독과 함께 팀을 추스리고 부상 선수들을 재활시켜 태평양의 준우승에 기여한 후, 김시진이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코치가 되면서 김성근과 본격적인 악연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성근이 현대 유니콘스에 도발했던 역사는 김성근/구설 문서 참조.

다만 말년에는 사이가 괜찮아졌는지 2012년 시즌 도중 김시진 감독이 넥센 히어로즈에서 경질되자 야구판이 비상식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면서 넥센 프런트를 간접적으로 비판했고 김시진 감독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는데 김시진 감독이 경질되던 날 오전 11시에 서로 안부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3.1.4. 선동열

파일:선동열 김성근.jpg

선동열은 현역 시절에 1987년 8월부터 1990년 6월까지 근 3년에 걸쳐 태평양 돌핀스에 14연승을 거두는 기록을 세운 바 있었다. 이 기록은 김성근이 태평양 감독에 부임하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 기록의 절반 이상이 김성근이 태평양 감독으로 있을 때 진행된 것이며 당시 김성근 감독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고 이후로도 김성근 커리어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김성근이 1989년 태평양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며 생애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플레이오프 1차전과 3차전에 등판하여 완벽한 피칭을 보이며 태평양을 3연패로 광탈시킨 이도 선동열이었다.

당시 리그에서 태평양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김성근에게 선동열이 얼마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훗날 김성근이 SK감독이 된 후 삼성에게 별 같잖은 일로 트러블을 일으켰던 것에는 삼성이라는 팀 자체에 대한 김성근의 악감정도 있었겠지만, 선동열에 대한 김성근의 감정도 일정 부분 더해진 것이 아니겠냐는 의견이 있다.

선동열 전 감독은 감독 시절 항의하거나 타 팀 감독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거의 없어 자팀 팬들로부터 너무 항의를 안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을 받을 정도였지만 거의 유일한 예외가 김성근 감독이다. 특히 김재걸 빈볼 사건 때 선동열 감독이 탄식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항의를 하자 삼성 팬들도 선동열 감독이 그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본다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이후에도 양준혁이 덕아웃에 들어가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선동열 감독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엔트리에 없는 김광현 등을 덕아웃에 불러들인 것이 발굴되어 내로남불로 까이기도 했다. 선동열은 이례적으로 인터뷰에서 김성근의 야구를 "야구가 이상해지고 거꾸로 가는 것 같다"면서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다. # 하지만 이 당시 선동열과 김성근 둘 다 벌떼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이었고, 선동열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4연패로 준우승하면서 이 발언은 묻혔다.

다만 2018년 당시 선동열 국가대표 감독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국정감사에 불려나가는 등 온갖 논란으로 인해 결국 감독직을 그만두자 김성근 감독은 승부의 세계라는 것은 결과를 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국가대표 감독이라는 것에 얼마나 큰 고충이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선수 선발에서 문제가 있었더라도 결과를 냈다면 인정해줘야지 않을까. 국회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야구인을 존중하는 기본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표하면서 선동열 감독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3.1.5. 염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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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의 대표적인 김성근 키즈 중 하나로, 양아들 조범현을 필두로 김기태, 양상문, 염경엽이 대표적인 김성근 키즈로 꼽힌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정작 염경엽은 김성근과 같은 팀에서 지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점. 비제자 출신 감독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김성근에 확실히 우호적인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경엽은 학창시절 동기인 김기태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김기태가 김성근의 애제자였기 때문에 사석에서 김성근을 만날 기회가 많았고 공식적인(?) 애제자는 아니지만 사적인 인연으로 구계에서 김성근 키즈 취급을 받게 된 케이스다. 물론 은근히 김성근을 디스하는 것으로 보이는 발언을 할 때도 많았다. 예를 들어 양훈을 트레이드한 후 간접적으로 김성근의 훈련 방법을 디스하기도 했는데, 단지 야구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야구관을 가졌다고 해서 해당 인물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생각이 다른 것 뿐.

그러나 거시적인 야구관이나 훈련 방식 등 염경엽과 김성근은 공통점이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염경엽은 현역 시절 수비형 야수였는데, 방망이는 물방망이 그 자체였지만 수비력 하나로 주전을 차지했을 정도로 수비가 뛰어난 유격수였고 그야말로 김성근이 예뻐해 마지않을 스타일의 선수였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경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많고, 김성근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그래도 현역 중에서는 알아주는 작전성애자다. 염갈량이라는 별명은 이래서 생긴 것. 작전을 워낙 많이 구사하는 스몰볼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투수운용 역시 선발보단 불펜 위주의 운용을 즐겨하며, 선발자원으로 분류되던 선수들 여럿 불펜에 박아넣고 갈아마시는, 김성근이 생각나는 운영을 즐겨했다. 여러모로 큰 틀에서 김성근 순한 맛이라고 불릴 만한 감독.

그렇기에 염경엽 역시 김성근에게는 꾸준히 존경심을 표했으며 염경엽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 감독에 올라설때 롤모델이 김성근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김성근에게 조언을 부탁한 적도 있다.

김성근 역시 방송에서도 염경엽 감독에 대해서 "장차 위대한 감독이 될 인재"라고 후하게 평가하기도 했으며, 단장 부임을 했을 때 대단한 일이라며 항상 염경엽에 대해서는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도 인사가고 조언을 받고 염경엽 감독이 자청해서 어깨 안마도 해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허나 2016년 8월 김성근의 혹사가 한창 논란이 될 때, 김성근이 넥센 히어로즈 투수운용을 걸고 넘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는 사람들은 없다. 사적으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라운드에 서면 적이 되는 것이고, 김성근도 염경엽도 둘 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업무 관련해서 한번쯤 질책을 들었다고 그걸로 서로간에 평생 미워하거나 영원히 사이가 갈라지는 사람은 보통 없고, 있다면 사회생활이 많이 힘든 사람일 것이다.

이후 김성근 감독이 염경엽 감독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다는 칭찬성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염경엽은 LG트윈스 감독으로 영전하며 김성근의 아들인 김정준을 수석코치로 선임하는 등 둘 간의 좋은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3.2. 제자 출신 : 우호 관계

3.2.1. 조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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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가 인정하는 김성근의 수제자.

조범현 전 감독과는 충암고 시절에 선수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다. 흔히 김성근 아래에 있었던 야구인들을 모두 김성근의 애제자라고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중 조범현은 정말로 김성근의 애제자라고 할 만할 정도로 사이가 각별했다.[14]

조범현은 대구의 야구명문 대건고 야구부 출신이었으나, 대건고가 야구부를 해체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김성근은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 대건고 야구부 28명 전원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충암고 야구부에 합류시켰다. 조범현은 1977년 봉황기에서 맹활약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를 수상했다. 이것은 김성근 감독이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거치면서 고교 감독시절에 거둔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이었다.[15]

김성근이 OB 베어스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김경문보다 조범현을 포수로 기용하는 것을 선호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범현은 1991 시즌을 앞두고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프런트에 현금 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해줄 것을 요청하여 영입된 15명의 선수 가운데 한명이 조범현이었다. 김성근은 삼성 감독에 취임하면서 삼성의 약점으로 이만수를 거론하면서, 그 대체자로 조범현을 기용하려 했지만, 조범현의 기량이 쇠퇴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만수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이후 조범현이 은퇴한 뒤 쌍방울레이더스 배터리코치로 부임하며 멀어지는 듯 싶다가, 1996년 김성근이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하며 다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쌍방울 해체 이후 2000년 한 시즌 동안 조범현이 삼성 배터리코치로, 김성근이 삼성 2군 감독으로 부임하며 지도자로써의 인연이 이어지는 듯 싶다가, 2001년 시즌을 앞두고 김성근이 LG로 옮기며 서로 다른 팀에 몸담게 되면서 지도자로서의 연은 점차 멀어졌다.

LG 감독과 삼성 코치로 맞붙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짜 사인 사건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사인을 조범현 코치가 훔치는 것을 감지하여 이에 역으로 가짜 사인을 보내 삼성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후 SK 감독이 된 조범현은 2003년 한국시리즈, 2005년 시즌 막판까지 2위 후 4강 등으로 착실하게 유망주를 키우고 SK의 전력을 상승시켰는데, 후임 감독으로 온 김성근이 드디어 팀을 우승시키면서 더욱 묘한 관계가 되었다. 2008년~2011년 SK와 KIA 감독에 있으면서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김성근 감독이 KIA와 경기할 때마다 판정이 이상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커다란 파문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2008년 윤길현 빈볼 사건,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사인훔치기, 장외 수신호 파동 등 서로 야구계에서 적으로 만나며 여러 사건을 겪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사적으로는 여전히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일례로 kt위즈 감독이 되고 나서 당시 김성근이 감독을 맡던 고양 원더스와의 연습시합 때나 한화와의 첫 경기 때 김성근에게 찾아가 한화 감독실에서 경기전 30분씩 둘만의 담소를 나누며 격려를 받기도 하고, 또한 kt와 한화가 선수단 간에 트러블이 있었을 때도 김성근도 조범현을 아들이나 다름없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하는 등 야구 내적으로는 적으로서 부딪히기도 하지만 사적으로는 돈독한 사이다.

3.2.2.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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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과 더불어 대표적인 김성근 키즈 중 하나다.

김진욱 전 감독은 현역 시절, 김성근이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된 1984년 프로에 데뷔하여 김성근의 밑에서 초창기 선수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25세에 프로에 데뷔하여 전성기 시절 5년을 김성근 감독 밑에서 선발과 중무리를 오가는 생활을 했는데, 그냥 선발로 고정하여 기용했더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하며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하는 의견이 있다. 김진욱이 선발로 고정된 것은 김성근이 물러난 후였는데, 그때는 이미 김진욱도 30줄을 넘어서 베테랑이 된 시점이었다.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보직 없이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기용하는 것에 대해 나름 암흑기 에이스였던 김진욱이 불만을 표출했을 법도 한데, 워낙 무난한 성격 탓인지 선수 시절 김성근과 트러블을 겪은 일화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사실 80년대야 워낙 보직 개념이 없다시피 했으니.

오히려 트러블은 커녕 지도자로서 김진욱 감독은 김성근에게 상당히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였는데, 두산에 부임하고 한 일이 사인체계를 김성근의 것으로 교체한 것. 그 외에도 인터뷰에서 "야구에 미친 분" 이라는 표현으로 김성근을 언급하거나, 경질 후 해설위원 시절에도 따로 경기전 김성근을 만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등 지속적으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했다.

김성근 역시 김진욱 감독이 준우승 직후 두산 베어스에서 경질되던 당시에 김인식 감독과 함께 두산 프런트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는데 두 사람은 국내 야구가 현장 중심이 아닌 '프런트 야구'를 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유감을 표했고 장기적으로 팀을 키우기 위해 프런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은 지도자를 영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독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며 김진욱 감독의 편을 들어주기도 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근이 지도자 생활을 워낙 오래 한 만큼 본인의 제자가 감독이 되기도 했는데, 조범현과 더불어 대표적인 야구계의 김성근 키즈 중 하나다. 조범현과 김기태 양상문 염경엽 그 다음 티어 정도.

3.2.3.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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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의 애제자 중 하나. 김기태, 양상문, 염경엽 이 3명이 김성근의 대표적 애제자로 아예 거의 양아들인 조범현 다음가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양상문 감독과는 1978년 베네수엘라 U-20 야구대회 때 감독대행과 에이스 투수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 당시 양상문에게 크게 감탄한 듯 하며, 양상문이야말로 이선희의 뒤를 이을 한국 대표 좌완투수가 될 거라는 평가까지 남겼을 정도.

이 후 태평양 감독 시절에 김성근이 양상문을 투수진 리더로 지목했으며, 선수 개개인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김성근으로서는 드물게도 용돈까지 주어 가며 아꼈을 정도의 사이. LG 감독 시절에는 감독과 투수코치로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신화를 함께 일궈냈다. 특히 김성근 감독이 LG 감독에 있을 때 양상문에게 처음 코치직을 제안했을 때, 양상문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와서 롯데에서 지도자로 크고 싶다며 거절의 뜻을 전한 것을 두고 양상문의 인간됨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투수 기용은 양상문 코치에게 일임했고, LG 감독의 후계자로 밀어주려 했다고 하는 등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바 있으며, 병역 문제로 인해 해외출국이 불가능해져 국내에 잔류해 훈련해야 하는 고효준의 전담 인스트럭터로 양상문을 붙여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감독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덕담을 주고받고, 언론사 칼럼을 통해 편지도 주고받는 등 야구 지도자 중 대표적인 김성근 키즈 중 하나.

재미있는 점은 운용 스타일에 있어서 양상문은 노장을 극도로 배척하고 리빌딩에는 어느정도 능력을 보인 바 있는 지도자라는 점에서 노장을 극도로 중용하고 단기간에 전력을 쥐어 짜내는 김성근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지도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근데 단순히 야구 스타일이 다른 것이 대체 왜 디스까지 침소봉대로 이어지는지는 모를 노릇. 2019년에는 정수빈에게 고의 빈볼을 지시한 의혹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팀이 연패에 빠져 있을 때 분위기 전환용으로 빈볼을 지시하는 수법은 잘 알려져 있듯이 김성근만이 아니라 모든 야구인들이 빈번하게 사용한다. 이를 선수들의 은어로 육보시라고 하며, 타격감이 안 좋을 때 맞아서라도 나가는 것과 분위기가 안 좋을 때 빈볼로 분위기를 끊는 것 둘 다를 지칭한다.

3.2.4.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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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감독과는 쌍방울 시절의 애제자로 1998년 쌍방울이 주축 선수들의 거듭된 현금 트레이드에도 버티던 김성근 감독이 김기태의 트레이드 이후 '이젠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다던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제자이다.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과 함께 2002년 김성근 감독의 깜짝 회갑연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기태 감독이 LG 감독 재임 중 경기포기 논란에 휩싸였을 때 드물게 김성근 감독이 두둔하는 언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기태가 KIA 감독으로 부임 후엔 부딪치는 일이 늘었다. 대표적으로 2015년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 CCTV 사건이있다. 애초 청주시청에서 설치한 물건이었으니 서로 좋게좋게 가려는 크보 특성상 큰 구설수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상대 감독이 김성근이었고 지적한 김기태의 팀이 기아였기에 사건이 커졌다. KIA와 김성근의 갈등은 2009년에 이미 악연이 있었다. 김성근이 SK 감독 시절 전력분석원과 코치 간의 금지된 사인을 거래했던 사실 역시 김성근 밑에서 코치로 있었던 김동재 KIA 코치가 정확하게 캐치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사인거래는 화면으로도 포착되었으며, 이듬해부터 프로야구에서는 이에 대한 제한규정이 명문화되었다. 김성근은 CCTV 관련 언플을 통해 또 한번 구설수에 올랐다.

감독이 된 후 때때로 김성근을 연상시키는 내로남불 행태로 비판받는 경우가 있다. 심판에게 항의하며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눕기태로 유명해졌는데, 이 역시 김성근이 원조였다. (2008년 4월 19일 SK-두산 빈볼 사건 참조) 김기태 역시 김윤동 등의 혹사로 비판받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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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태의 원조 짤이 나온 2008년 4월 19일 SK-두산전. (참고로 이 경기에서 김성근은 그라운드에 드러누우며 항의한 후 덕아웃에 돌아가서 곧바로 신인으로 투수를 교체하더니 두산에 빈볼을 던졌다. 이미 SK에게 여러번 빈볼과 스파이크 테러에 당했던 터라 경기가 끝나자 김경문 두산 감독은 "당한만큼 돌려주겠다"며 분노의 인터뷰를 했다. 그러자 노리타들은 김경문이 스승에게 예의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하면서 김경문에게 테러를 가했다. 게다가 김인식이 사적으로 얘기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굳이 공개석상에서 꼭 말했어야 했냐라고 말하며 불난데 기름을 부었다. 김인식의 이같은 발언이 나오자 노리타들의 맹공은 더욱 수위가 높아졌다. 결국 김경문은 삭발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김재박 LG 감독이 김성근과 SK에게 비열한 야구를 맹비난하고 나섰다. 그러자 김성근의 아들 김정준 SK 코치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김재박 감독이 SK가 비열하고 일본식의 야구를 한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않으면 명예를 훼손한 것이니 사과하라고 역공했다. 그러자 김재박은 SK가 더러운 야구를 하는 건 다아는 사실이냐고 응수했다. 하지만 사태가 너무 커지자 각 구단 고위층과 감독들이 서로 물밑 작업을 했는지 김재박이 이제는 그만하겠다고 말했고 김성근도 이에 대해 더이상 얘기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눕성근은 2008년 야구계 최고의 대서사시가 된 사건의 발단이 된 장면이다.)

3.2.5. 조원우

조원우 전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뛰었던 것으로 인연을 맺었다. 1994년 쌍방울에 신인 선수로 입단해 가능성을 보였지만 그 다음 시즌에는 심성보의 입단으로 주전에서 밀려 주로 2군에 있었다. 그러나 1년 뒤인 1996년 김성근의 눈에 들어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고 그 해 시즌 100경기 이상을 출장하며 진가를 보여줬다. 후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 취임식에서 본인이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감독 세 명 중 하나로 김성근을 꼽을 정도.[16] 그러고선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쌍방울에서 함께 생활을 오래 한 김성근 감독님이다. 선수단 장악도 하셨지만, 선수단과 소통이 잘 됐다. 김성근 감독님은 훈련을 많이 시키시긴 했다"고 말했다.

선수시절 조원우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평범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도 빛나는 전성기가 있었다. 1997시즌부터 포텐이 터져 1997시즌 타율 8위, 1998시즌 타율 6위를 기록하며 리그 정상급 타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1999시즌에도 조원우는 쾌조의 타격감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김성근 특유의 무리한 주간 지옥훈련 도중 인대 부상을 입고 시즌아웃되고 말았다. 이때 부상당하지 않았고 그 페이스를 계속 유지했다면 리그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만큼의 좋은 페이스를 보이고 있었다. 조원우는 재활 끝에 다음 시즌 복귀했지만 부상 직전의 좋았던 폼을 되찾는데 실패했고 이후 9시즌 동안 타율 2할대 중반의 평범한 야구 선수로 지내다가 은퇴했다.

김성근에게 영향을 받아 롯데 감독 시절 과도한 작전 남발, 좌우놀이 집착, 데이터를 무시한 감에 의한 판단, 작전 수행 능력을 이유로 타율이 저조한 문규현을 상위타선인 2번에 배치하는 등 현대야구의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일부 비난의 소리도 있었으나, 결국 롯데 감독 2년차인 2017 시즌 정규리그 3위로 준플레이오프 진출의 성과를 거두며 5년만에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에 성공하며 비판을 실력으로 찍어눌렀고, 이후 롯데가 가을야구 진출에 계속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당연하지만 약팀이 작전조차 안 내면 그냥 전력대로 져버리기 때문에 약팀은 전력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리해서라도 작전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약팀은 손 놓고 있으면 손 놓고 진다. 2010년대 후반에 좌우 플래툰은 한국프로야구에서도 보편적인 작전이며, 좌우놀이라고 부르는 건 시대에 뒤쳐진 야구관을 가졌다는 소리. 거기다 감독은 그날그날 선수들의 시합 전 컨디션을 점검하는데, 통산은 좀 저조하지만 그날 컨디션이 올라와 있다던지 하는 여부는 팬이 접할 수 있는 데이터로는 알 수 없다. 결국 팬들은 감독보다 야구를 깊이 볼 수 없으니 그 판단근거를 알 수 없어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감이라고 치부하는 것에 가깝다.

거기다 보면 알겠지만 문규현그조차도 유격수라 별볼일 없는 2할 6~7푼대로 시즌을 마치지만 타율이 거의 유일한 장점인 선수다. 타율 때문에 1군에 붙어있는 선수를 타율이 저조하다고 비난한다? 더군다나 2017년 롯데의 라인업을 보면 주전은 대부분 강민호, 전준우, 이대호, 최준석 등 거포형에 황재균의 이탈로 이런 테이블세터에 배치할 만한 선수가 마땅히 없던 것도 사실로 거의 대부분 헛소리에 가까운 비난이었다.

롯데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SSG의 2군 감독을 거쳐 1군 벤치코치로서 감독이었던 김원형과 함께 KBO 최초 와이어 투 와이어 통합 우승의 대업적을 기록하였다.

3.2.6. 김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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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과는 20대일때 쌍방울서 만나 5년동안 함께 했고 후일 30대이던 2007년 SK와이번스 시절에서 재회해 똑같이 2011년 경질때까지 5년(대략 4년 + 8개월)간 함께 하여서 감독-선수 관계를 총 10년이란 기간을 함께하였다. 김성근 감독은 2007년 SK 와이번스에 부임하고나서 김원형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고 곧바로 주장직에 선임하기도 했다.

첫 지휘봉을 맡자마자 김광현 리턴을 비롯한 프런트의 전면적인 투자, 본래 탄탄한 전력을 가졌던 상황에서 김원형 SSG감독은 김성근 감독 시절처럼 비슷한 강훈련을 수행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김성근은 SK 감독 재임 시절 선수들 중 가장 미안하고 빚을 지고 있다고 언급한 인물이 김원형이었는데, SK 왕조시절 한국시리즈에 김원형을 등판시킬 타이밍에 다른 투수들을 기용해서 결국 김원형이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는 것. 이로 인하여 당시 주장을 맡았던 김원형에게 미안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크며, 선수시절 등판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의 한을 감독으로서 KBO리그 최초 와이어 투 와이어를 달성하며 정규리그 -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에 성공하며 더 큰 성공과 기쁨을 누렸다고 이야기하며 뿌듯해하였다.

우승 이후 인터뷰서 과거 20대 때는 뭐 이리 죽을정도로 훈련을 많이 시키나 하면서 투정을 부렸는데 30대 돼서야 김성근 감독이 20대때 게을러지면 30대에 진입해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안 따라주기에 지옥훈련의 의도를 깨달았다며 인터뷰하며 김성근 감독을 호평했다. 인터뷰 끝 마무리에서도 지금 생각해도 김성근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아직도 존경한다는 말로 마쳤다.[17]

이후 김원형이 2023 시즌 정규시즌 3위를 차지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NC 다이노스에게 스윕패를 당하고 탈락하게 되자 계약기간이 2년 남았음에도 팀 운영 전반과 선수 세대교체 등 변화와 혁신을 이유로 경질되어 본의아니게 공백기 및 재정비의 시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김성근이 한화 감독에서 경질 이후 5년여간 코치 고문 및 코치로서 있던 소프트뱅크에 코치 연수를 받을 수 있게끔 도움을 주게 되어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3.2.7.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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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시즌을 기점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이승엽 감독의 경우, 이 감독이 현역 시절 당시 일본 리그에 진출해 부진을 겪던 와중 전담 코치로 만나 무자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하도록 시켰고 이승엽 감독은 이를 훌륭히 수행하면서 부진을 털고 인상적인 활약상을 남긴 바가 있다. 이승엽은 이 시기에 대해 이때만큼 훈련을 열심히 해본 기억이 없고, 정말로 힘들었지만 덕분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며 김성근 감독에 대한 감사를 드러냈다.

2015 시즌 이승엽이 KBO 리그 통산 400홈런 고지를 밟았을 때 자신을 있게 해준 스승들에게 공을 돌리면서 류중일 감독, 박흥식 코치와 더불어 김성근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엽이 최강야구 1대 감독을 맡고 김성근이 그 후임인 최강야구 2대 감독을 맡으면서, 2023년 개막전으로 두산 2군-최강야구의 경기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3.2.8.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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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감독은 신일중 시절에 김성근 감독이 신일고, 신일중 총감독이었다.

김태형의 제자 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사실 총감독은 명목상 직책일 뿐이었으며 김성근은 실제로는 신일고등학교만 전담했기 때문. 하지만 명목상이라도 총감독인 이상 선수를 아예 파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실제로 김성근은 학창 시절의 김태형을 인상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다 직접적인 지도가 있었는지는 불명이라도 아예 김성근과 같은 침대에서 자기까지 했는데 관계가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한 날조다. 기사 이렇게 정확한 일화까지 소개가 되어 있다. 2020 시즌을 앞두고 진행된 스프링캠프에 김성근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김성근이 김태형에게 술을 선물하기도 하고, 김태형 감독 역시 깍듯한 태도로 김성근을 대하고 있다.

3.3. 제자 출신 : 대립 관계

3.3.1. 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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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문 전 감독과는 악연이었다.

김경문이 현역이었던 시절 당시 OB의 투수코치와 감독을 차례로 역임했던 김성근은 김경문보다 충암고 시절 제자였던 조범현을 포수로 기용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김경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태평양 감독으로 영전하며, 당시 아직 백업 포수에 머무르던 김경문을 트레이드로 데려온 것도 김성근이었다. 기용과는 별개로 실력 자체는 인정했던 것.

이후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지도자 시절. 김경문이 두산 감독이 된 후 같은 시기에 SK 감독이었던 김성근과 라이벌로 수많은 사건사고가 터지면서 앙숙 관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성근의 생애 최대 라이벌로는 보통 김응용을 꼽지만, 김응용이 사장으로 영전해 현장을 떠난 후로는 단연 김경문이야말로 김성근 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그 앙숙 관계의 최절정은 김성근의 SK와 김경문의 두산이 우승 경쟁을 하던 00년대 후반. 김성근 SK 감독은 우승 경쟁자였던 두산에 대해 투구폼 지적, 약물 의혹 제기 등으로 끊임없이 도발했고, 이에 더해 SK 선수들의 거친 태클, 빈볼 등이 반복되며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하지만 김경문은 김성근의 제자였다는 이유 때문에 SK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번은 김경문이 폭발하여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인터뷰했다가 스승에게 무례한 발언을 했다고 김성근 감독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결국 김경문이 삭발을 하고서야 사태가 무마되었다.

김성근이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 김경문 감독은 2015년 시즌 경기에서 9회 크게 앞서는 중 연달아 투수를 교체하는 김성근 감독의 운용법을 일부러 비꼬듯이 시전했다.[18][19] 참고로 김경문 감독은 다른 팀과의 경기에선 절대로 이런 투수운용을 하지 않는다. 사람 좋다는 김경문 감독이 아예 이렇게 반응한 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완전히 악연인 듯.

여튼 악연이었지만, 김성근의 마지막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SK시절과 김경문의 첫 번째 전성기인 두산 시절이 완전히 겹쳤었고 당시 리그의 1인자였던 김성근의 SK에 도전하는 언더독 포지션으로서 수많은 대립과 스토리를 낳았다.

그러나 김경문과도 세월이 흘러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가 되었는지,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서 경질될 당시 김경문은 평생 김성근을 싫어했던 사람답지 않게 씁쓸하다며, 김성근과 같이 한국야구의 역사를 쓴 감독은 마지막 가는 길은 멋지게 보내드려야 하지 않느냐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20]

3.3.2. 이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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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전 감독에게 김성근은 최악의 악연이다. OB시절부터 이만수를 공개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1982년 원년 때 이만수의 팔뚝을 보고 사인을 훔쳐서 우승했다는 발언은 시도때도 없이 하고 다녀서 지금도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이 일화가 진실이냐에 대해 수년간 많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21]

1984년 김성근이 OB 감독으로 부임하고 원년 OB 감독이었던 김영덕이 삼성으로 가면서 당시 양팀의 대립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집단 난투극을 벌였는데, 이만수가 당시 삼성의 중심 타자였던 만큼 감정이 좋을 리는 없었다.[22] 삼성 올드 팬들의 기억 속에도 당시 OB가 특히 이만수에게 집요하게 도발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1991년 삼성 감독으로 오고 나서는 취임식에서 "삼성은 포수(=이만수) 때문에 우승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디스했으며, 취임 직후, OB에서 노쇠화로 고전하고 있던 조범현을 영입하며 이만수 대신 기용할 뜻을 비치기도 했다. 개막 후에는 이만수 특유의 홈런 세레머니를 금지시켰다. 즉 적장이던 시절부터 심지어 같은 편이었던 시절까지 관계가 좋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사이.

이후 2007년 SK에서 감독과 수석 코치로 재회하게 되었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SK 프런트에서 이만수를 먼저 수석코치이자 차기 감독으로 내정한 후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김성근은 2002년 LG 감독에서 경질된 후 감독으로 찾아주는 팀이 없던 차라 SK가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감독직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감독 부임 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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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회 시상식이었던 이날 김성근은 시종 일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만수와 마주쳤을 때 저런 표정으로 돌변했다.

3.3.3. 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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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일 감독과는 명목상은 사제지간이지만 실제론 앙숙 관계다. 선수 시절 삼성의 수비 시스템과 관련하여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중일로 추측되는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질색한다는 기사가 뜬 적도 있다. 또 선수시절 김성근 감독의 얼음물 입수 지옥 훈련이 아무 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선수들 부상이 생길 뻔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류중일이 야구계 원로인 김성근을 대놓고 공격한 적은 없다. 반대로 김성근은 류중일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적의를 내세웠다. 김성근이 SK에서 경질된 이후 삼성은 현대와 SK를 왕조명단에서 빼야하지 않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야말로 독보적인 성적을 냈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가 류중일 감독이 삼성을 맡은 후였다. 류중일 재임 기간 동안 삼성의 성적이 잘 나오자 김성근은 툭하면 선동열이 삼성을 잘 꾸려놓고 나갔다느니, 배영수 같은 선수와 함께하니 우승은 당연하다느니, 리그가 하향평준화 되었다느니 등등의 언플을 날려 가만있는 류중일을 자극했다.

류중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언반구 없이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별로 대꾸할 가치를 못느끼는 것으로 보이며, 감독 생활 4년만에 김성근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어 김성근이 제자 운운하기도 엄한 꼴이 되었다. 그러던 2015년 10월 14일 # 기사가 떴는데, 내용을 보면 어째 누군가를 디스하는 내용이다 (...) 이 기사로 보아 류중일 감독도 김성근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3.3.4. 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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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화 전 감독과는 선수 시절부터 악연이었다. 한대화는 OB 현역 선수 시절 개인훈련 중 약수터 바가지로 간염에 걸려 김성근의 지옥훈련을 체력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김성근은 이런 한대화를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팀에서 배제하다가, 1985시즌이 끝나고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시켰다. 이 때 한대화는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대둔산으로 잠적 후, 홀로 개인훈련을 이어나갔지만 임의탈퇴 단계로까지 몰리게 된다.[23] 우여곡절 끝에 해태로 이적한 한대화는 김응용 감독의 배려로 기량을 만개하여 리그 정상급 타자로 거듭나면서 해태 왕조의 6회 우승의 1등 공신 중 한명이 된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한대화는 선수 말년인 1997년 LG에서 쌍방울 레이더스로 오게 되면서 김성근과 다시 만나게 된다. 김성근은 한대화에게 3루수 출장을 원했으나 한대화는 노쇠화에 따른 기량 저하와 체력 부담 등으로 고사, 김성근 감독이 바라는 포지션도 훈련량도 소화할 수 없자 다시 눈밖에 났고, 결국 한대화는 벤치와 2군을 전전하다 그 해 그대로 은퇴한다. 쌍방울 구단에서는 한대화가 팀에서 1년밖에 뛰지 못했지만 대선수였고 스타였음을 감안하여 은퇴식을 치러주고자 했으나 감독인 김성근이 두 번이나 반대하여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 가히 악연이라 할 만하다.

나중에 각각 SK와 한화의 감독을 맡고 있던 시절, 김성근이 부상당한 류현진에게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류현진의 멘탈을 흔들려고 시도했고, 심지어 류현진이 김광현을 자꾸 피한다는 발언까지 하면서 도발했다. 그러면서 정작 김성근 본인은 류현진 등반 예정일에 부상을 핑계로 김광현 대신 대체 위장선발을 내보내며 내로남불 행위를 했다. 또 한화 2군 선수들이 SK에 오면 1군에 뛸 수 있는데 한대화 감독이 이를 썩히고 있다고 말하는 등 한대화 감독을 자극하는 발언[24]을 계속했다. 이 발언을 전해들은 한대화는 기자들 앞에서 "입에서 험한 말 나올 뻔 했다."면서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트레이드를 원하신다면 누구누구 달라며 위트있게 넘어갔다.

3.3.5. 박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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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1군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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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에서 단장과 감독으로 재회한 두 사람

박종훈 전 한화 이글스 단장과는 한대화와 마찬가지로 선수 시절부터 불편한 사이였다. 정확히는 이때의 문제는 박종훈과 김성근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김성근과 이광환의 대립이었는데, 당시 김성근은 배트헤드의 스윙스피드를 이용한 타격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광환은 근육의 힘은 직선운동이 아니라 물걸레짜듯 비트는 데서 훨씬 강하게 나온다는 인체생리학에 의거한 타법을 펼쳤다. 박종훈의 타격폼 교정 과정에서 둘이 계속해서 충돌했고, 사이에 낀 박종훈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

다만 그 이후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긴 적은 없었다. 약간 묘한 뉘앙스가 있긴 했는데, 박종훈은 SK 시절 OB 동기였던 조범현 감독 하에 03년부터 06년까지 주루, 수석코치를 지내고 있었다. 조범현 감독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나고 김성근 감독이 들어오면서 1군 타격 코치를 맡기자 사임하고 친정팀 두산 베어스의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성근을 피해 도망친 거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당시 수석코치직에서 타격코치로 간다는 건 격하의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수석코치가 사실상 차기 감독으로 유력시되었던 이만수였기에 수석코치를 유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즉 이것이 김성근과의 갈등인지 SK와의 갈등인지는 애매한 상황.

진짜 갈등은 2017년 한화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단장과 감독으로 재회한 시점. 초반에는 야구인 출신 단장을 환영한다는 김성근 감독의 축사로 시작되었지만, 코치진 구성, 2군 운영 등 팀의 운영과 관련하여 격한 충돌이 계속 오고갔고, 이에 반발한 김성근은 스스로 물러나겠다며 내지르기에 이르렀다. 결국 폭발한 구단주에 의한 김성근 감독의 경질로 상황이 정리되었고, 김성근의 오랜 감독 경력도 끝을 맺었다. 이후 한화는 후임감독 한용덕 아래에서 베테랑들의 단체 플루크 시즌과 천운에 가까운 대전운 덕분이긴 하지만, 김성근 없이 비밀번호를 한번이라도 끊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3.3.6. 최계훈

최계훈 한화 2군 감독과는 태평양에서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삼미-청보의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1986시즌이 끝나고 현역으로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1989년에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해 있던 태평양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삼인방과 양상문 등 특정 선수들만 주야장천 굴리며 혹사시키던 김성근은 복귀한 최계훈을 끝내 외면했다.

팀의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복귀 후 1군에서 단 1이닝도 던지지 못한 채 1990시즌이 끝나고 쓸쓸히 은퇴하고 말았다. 1990년 당시 팀에서 같은 노장이었던 임호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옷을 벗겠다는 각서까지 썼던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처사였다. 물론 임호균을 보호하기 위해 각서를 썼다는 것은 김성근 본인에 의해 날조된 내용이며, 사실은 사실은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태평양 구단이 먼저 김성근을 경질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당사자 임호균은 원래 자기는 은퇴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김성근 감독이 자신을 위해 각서를 썼다는 소식을 듣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랬지? 라는 반응이었는데 김성근은 SK감독 이후 임호균 각서 소동을 "선수를 보호하는게 감독의 의무이자 아버지로써 할 일이다."며 스스로 미화시켰다.

2017년 박종훈 단장에 의해 최계훈이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영입되면서 당시 한화 1군 감독이었던 김성근과 다시 한지붕 아래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까지 전권을 행사했던 김성근의 2군 지휘권을 박종훈이 빼았아 최계훈에게 넘긴 것이기에 상당히 애매한 관계가 되었다. 최계훈은 2군에 대해 김성근에게 수시로 보고했으나 김성근은 이를 못마땅해 하며 몇 차례로 트러블이 발생했고 결국 시즌 중 김성근이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이상군 감독대행은 최계훈이 지도하던 2군 선수들을 대거 등용하여 남은 시즌을 치렀고 한화는 후반기에 반등을 이뤄냈다. 2017시즌 이후 한화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나 2군을 다녀온 선수들이 대체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최계훈 2군 감독의 지도력이 팀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3.4. 제자 출신 : 중립 및 기타 관계

3.4.1. 김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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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기가 90년에 데뷔할 때 태평양의 감독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이후 sk에서 다시 재회를 하게 되는데 2007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나서 마침 미국연수를 끝내고 돌아온 김경기가 1군 타격코치로 부임했고 두 사람이 동행하게 됐다. 2011시즌 전지 훈련을 다녀온 귀국 다음날, 타격코치였던 김경기를 2군 주루코치로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코칭스태프의 보직 변경이 감독의 권한이라 하지만 전훈 동안 선수들에게 내내 타격을 지도했고 선수 시절에도 빠른 주루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김경기를 2군 주루코치로 보낸 대목에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고 당시 선수들의 동요도 컸다.

4년 뒤 김경기의 인터뷰에서 그 내막이 드러나게 되는데 김경기는 김성근의 지시사항을 군말없이 이행했고, 감독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고 말하면서도 당시 1군 감독 김성근의 야구관과는 다른 자신만의 지론을 명확하게 이야기했던 태도가 화근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25]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거나 타협을 하지 못한 김경기의 과가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야구관과 소신을 밝히는 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결정적으로 인천야구나 SK에서 김경기가 가진 상징성이나 입지, 그리고 타격 코치로서의 성과 등을 생각해봤을 때 당시의 보직 변경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김경기 자신도 4년이나 지난 인터뷰에서 관련 언급을 한 걸 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9년 언론 인터뷰를 통해 김성근의 야구관을 존경한다고 전했는데 김경기는 김성근 감독 밑에서 육체적으로 힘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김성근 감독이 정말 야구를 잘하기 때문에 모두 감수할 수 있었으며 밑에서 5년 있으면서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이라든지 운영하는 거라든지, 그리고 자신의 사람을 만들 줄 아는 능력 등 좋은 점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 때 배웠던 게 지도자 시절과 해설할 때나 많은 도움이 됐다며 김성근 감독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동시에 과거 인터뷰를 통해 90년 신인시절 김성근이 오히려 김경기의 훈련량을 조절해줄 정도로 김성근이 인정하는 선수 중의 1명이 김경기였다고 한다.

3.4.2. 박진만

선수 생활 끝물인 2011년도에 SK로 오면서 다시 사제 관계로 만나게 된 관계. 박진만이 2010 시즌 종료 후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고 이를 삼성측에서 승락하면서 프리에이전트로 풀리자 김성근 감독은 SK에게 박진만의 영입을 강하게 요청했다. 결국 세 번의 조율 끝에 선수와 구단이 합의에 이르면서 박진만의 SK 행이 확정되었다. 박진만은 김성근 감독에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입장을 표했고 이에 김성근 감독도 박진만이 전성기는 지났으나 여전히 능력있는 선수이며 되도록 많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주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3.4.3. 최원호

LG 소속이었던 2001년과 2002년에 사제 관계로 만났다.

3.4.4. 허삼영

프로에 입단했던 1991년이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해였다. 김성근은 유망주 투수였던 그를 상대로 집중적인 훈련을 시켰다. 당시 삼성에서 그는 김성근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김성근으로부터 받은 훈련은 도리어 그에게 독이 되었고, 신인 시절부터 그만 허리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김성근으로부터 받은 훈련은 도리어 그에게 독이 되었고, 신인 시절부터 그만 허리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1군 통산 기록은 겨우 4경기, 2⅓이닝, 평균자책점 15.43으로 팀 내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95년 2군에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지만, 극심한 허리 부상으로 그 해를 끝으로 만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김성근의 지옥 훈련이 만든 폐해의 사례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종종 오르내린다.

다만 허삼영 본인이 직접 입을 열어 이에 대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부상은 김성근의 지옥훈련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애초에 디스크가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고 그 상태에서 몸관리를 충실하게 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말했다.

4. 감독 당시의 선수들과의 관계

4.1. 좋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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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개같이 굴린 선수들 대부분.

사실 의외라고 라기보다는 여기 선수들은 대다수가 1군에서 많은 경기를 뛰게 된 선수들이다. 실제로 장성호도 "야구선수들 기준에서 명장은 자기를 굴려주고 많이 기용해주는 감독"이라며 이야기 할 정도로 야구선수들은 감독의 지시로 본인이 1군 경기에 많이 나온다면 구단에서도 필수 전력으로써 선수생활 연장에도 도움이 되고 일단 연봉도 오르기 때문이지만, 한화에서 뛰었던 심수창스톡킹에서 몸 멀쩡하게 와서 경기 안 나가고 몸 멀쩡하게 야구 그만두면 아무 임팩트도 없지, 경기도 못나가, 결국엔 남의 탓으로 돌리고 그러니까. 김성근처럼 개같이 굴려서 1군에만 기용해준다면 그들에게는 김성근은 정말 고마운 스승이자 명감독인 셈이다.

동시에 박철순 일화나 쌍방울 시절 자기 감독 월급을 쪼개서 형편 어려운 선수들에게 용돈을 줬다는 이야기 등을 보면 인간적인 매력도 상당히 어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암고 시절 제자의 타격을 봐 주다가 배트에 맞아서 이가 부러졌는데 제자가 부담을 가질까봐 재치를 발휘하여 '내가 집중을 안해서 이렇게 부상당했으니 너희도 조심해라'라고 말하며 오히려 부상으로 가르침을 주었다는 일화도 유명한 편.

무엇보다 원체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라지만 야구에 목숨을 걸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야구에만 인생을 다 바친 인물이란 건 확실하다. 연습을 시킬 때도 나이 70이 넘은 노감독이 직접 펑고배트로 노크를 때려주며 선수들과 함께 구르고, 선수를 2군으로 보낼 때도 어디가 부족해서 2군을 보내는지 등 직접 면담을 거친 후에 보내는 등 선수를 빡세게 많이 굴리는 만큼 인간적으로도 대했던 편. 그런 장인 정신과 같은 태도에 반한 야구인들이 꽤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박철순, 양준혁, 이승엽, 라뱅, 이상훈, 박경완, 김재현, 최동수, 이진영, 정대현, 윤재국,[26] 류택현, 신윤호, 임창용, 배영수, 정근우, 정우람, 송신영, 심수창, 송창식, 김회성, 김광현, 최정, 정상호, 이대호, 박용택, 김태균 등이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 선수로 꼽힌다.

SBS 야구 프로그램 야구본색에서 나온 전 쌍방울 레이더스 외야수이자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 이연수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을 거쳐간 제자들이 한 명 한 명 무엇을 하고 사는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한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회갑연을 열어 주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제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다.[27]

4.1.1. LG 시절 선수들

4.1.1.1. 이병규
LG 트윈스 시절에는 이병규가 아주 호되게 혼나서 '넌 야구를 할 자격 없으니 집으로 가버려라!'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 이후로 김성근에게 깍듯하며 멀리서도 보고 달려와서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병규가 김성근 감독을 보고 달려와 백허그를 한다고. 2011년 당시에는 적장이었음에도 "감독님. 오늘 져 주세요. 우리 1등 해야 합니다"라고 애교를 부렸다는 일화가 공개되기도 하였다. #
4.1.1.2. 이동현
혹사 논란이 있는 이동현 또한 인터뷰에서 수술 후 가장 걱정을 많이 해준 분이라며 고마움을 밝혔다. LG 이동현 ① "김성근 감독님께 고마운 마음 뿐" 이후 2019년 이동현이 은퇴를 선언한 뒤 얼마 후 언론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에 대해 말한걸 반드시 써달라고 얘기했는데 그 내용이
“김성근 감독님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2002년 불펜 투수로 124.2이닝을 소화하고, 2004년부터 세 차례의 팔꿈치 수술을 받은 걸 김성근 감독님의 혹사 때문이라고 보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2002년 선수 이동현을 만들어준 분이 김성근 감독님이셨어요. 김성근 감독님이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2002년 8승 3패 6홀드 7세이브 평균자책점 2.67로 한국시리즈를 경험할 수 있었고요. 제 팔꿈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던졌던 부분이 누적돼 나타났을 뿐입니다.
만약 2002년에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요? 감독님 덕분에 이겨내는 법을 배웠어요. 감독님 덕분에 투수의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고요. 이번 인터뷰로 더 이상 김성근 감독님의 혹사로 이동현이 망가졌다는 이야기가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전 항상, 지금까지, 아니 영원히 감독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 겁니다. 제 은퇴식에 모셔 잠실야구장에서 감독님과 포옹 한 번 하고 싶은데, 글쎄요. 그게 가능한 일일지.”

이렇게 얘기할 정도로 팬이나 전문가들이 뭐라고 하든 이동현 본인은 김성근 감독을 존경한다는걸 드러냈다.[28] 이거 때문인지 친 김성근은 이동현을 좋아하지만, 반 김성근 측에서는 이동현에게 실망했다던가, 결국 이동현도 김성근과 똑같은 노리타 부류일 뿐이었다, 절대 코치나 감독으로 봐서는 안된다며 매우 분개했다.
4.1.1.3. 이상훈
이상훈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발과 수염을 김성근이 자를 것을 명령했으나 이상훈이 절대 못자르겠다고 버티며 불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출중한 실력의 선수였기 때문에 결국 김성근이 굽히면서 이상훈은 "태도가 바르고"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가 준다고 했다.[29]

다만 나중에 고양 원더스 코치로 들어갈 때는 장발과 수염을 정리했다. 김성근이 "선수 시절은 그럴 수 있어도 다른 제자들을 지도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 고 단호히 얘기했다고 한다. 이상훈 스스로도 납득해서 자진해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수염은 완전히 깎았다.
4.1.1.4. 김재현
김재현LG 트윈스 시절의 관계도 있고 하여 표면적인 관계는 양호한 편이었으나 2007년에는 이재원과의 플래툰 기용에 대하여 다소 불만을 품고 부진까지 겹쳐서 은퇴까지 고려했다. 이는 은퇴 이후 2012년에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성근 감독에게 직접 트레이드를 요청했을 정도로 심각한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본인이 확언한 이야기. 그러나 시즌 타율 .196을 기록할 정도로 극도로 부진했음에도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대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받고 2009년에는 주장도 맡고 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조언으로 은퇴 후 진로를 변경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회복하며 2014년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 코치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2016 시즌 종료 후 김성근의 유임에도 사임하였다.

4.1.2. 삼성&해태 2군 감독 시절 선수들

정확히는 삼성 1군 감독 시절에는 대부분 악연으로 점철되었으나, 해태 2군 감독 시절과 삼성 2군 감독 시절에는 좋은 인연을 맺은 선수들이 더러 존재한다.
4.1.2.1. 배영수
2000년 김성근 감독이 2군 감독으로 있으면서 3억 신인인 배영수의 투구폼을 교정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5시즌 중 감독의 강판지시에 불응, 불펜에서 시위를 벌이다 선발자리를 박탈당하고 후반기에는 패전처리조로서만 등판하다 본인이 원하는 30경기를 넘게 뛰고 시즌을 마무리하는 바람에 지금도 존경의사를 표할지는 미지수.

그런데 시즌이 끝나고 수술을 하기로 결심한 이야기가 실린 기사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여전히 존경하고 있는 것 같다. 2022년 롯데 코치 부임직후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제서야 김성근 감독을 이해하고 죄송한다고 언급했다.
4.1.2.2. 임창용
19세 해태 신인 시절, 2군에 있었을때 자율훈련을 하지 않고 맨날 놀러 다니자 불러 집에나 가라고 했다고 한다. 임창용이 찾아가 빌자 완고할 것만 같았던 김성근은 '나와 1년만 열심히 하자'며 자신을 만들어 줬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에이전트를 통해 칭찬을 하자 과분한 말씀이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4.1.2.3. 강동우
강동우도 의외로 김성근 감독을 은사로 꼽는데, 그 이유가 쌍방울 감독 때 언더핸드 선수를 자주 내주는 덕에 신인이었던 자신이 플래툰으로 나갈수 있었다고... 이후 강동우는 큰 부상을 당하고 재활 중 삼성 2군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과 재회하게 되며, 자신의 타구에 맞은 동료 선수를 본 체 만 체 했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에 불호령을 듣고 크게 반성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30]

4.1.3. SK 왕조 시절 선수들

SK 왕조 시절 주축 멤버였던 박정권, 김강민, 채병용, 박재상, 조동화, 최정, 김광현, 이승호, 정근우, 정우람, 정상호 등은 모두 김성근 감독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으며,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 선수들로 유명하다. 특히 정우람은 김성근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적이 있으며, 서산에서 유병민 기자에게 "근우 형은 감독님이 찾아왔지만 난 내 발로 감독님 찾아왔다" 라는 말을 전하며 감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 최정은 김성근 감독이 야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직접 손 편지를 작성해서 전달할 정도로 각별하며, 김성근 감독이 한화 감독, 이만수 감독이 소속팀 감독으로 있던 시기에 김광현과 함께 결혼식을 올리게 됐음에도 두 사람 모두 김성근 감독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둘이 하루차 간격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최정의 결혼식은 김성근 감독의 생일날짜에 맞춰서 올리게 됐다.

이 외에도 SK 시절의 대다수 멤버들은 SK를 떠난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김성근 감독과 연락하고 있으며, 비시즌 기간에는 현역 선수들을 제외한 왕조 시절 선수들이 김성근 감독을 모시고 같이 회동을 하고 있다.
4.1.3.1. 이진영
이진영은 LG 이적 이후 SK 시절 1루수로 나온것에 대한 불만으로 1루 글러브를 태워버렸다라고 당시 기용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했고, 김성근 감독에게 구타당한 이야기[31]도 직접 거론하는등 좋지 않은 사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은퇴할 때 기억에 남는 감독으로 김성근 감독을 언급했고, 김성근이 SK를 떠난지 10년이 되가는 현재에도 왕조 시절 멤버들과 같이 김성근 감독을 모시고 식사 자리를 만드는 모습 등을 볼 때 사이는 괜찮아보인다.

애초에 이진영은 데뷔를 김성근의 감독이 있던 쌍방울에서 했다. SK에서 FA신청을 하고 우선 협상을 하던 시기에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해서 FA 이적을 상담할 정도로 좋은 관계였다. 이진영의 말에 의하면 FA 우선협상 기간 내내 SK는 적은 금액을 제시하였으며 시장에 나가 평가받아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선협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근처에서 대기를 하던 LG가 접근, 훨씬 많은 돈을 제시하였고 이에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보장액부터 10억 이상 차이 났으며, 김성근 감독은 그 말을 듣자 야구선수가 FA하기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스톡킹에 출현하여 FA 당시 분위기를 설명하는 이진영을 보면 당시 환경변화에 두려움이 있었고 SK에 애착이 있었던 이진영은 내심 김성근 감독이 구단을 통하여 FA 액수를 맞춰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이나. 김성근 감독은 보장금액만 10억 이상 차이나는 것에 "프로선수가 FA 한번 하기가 얼마나 힘드냐" 하면서 인정해주는 팀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금액적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진영은 SK에 남고 싶어 했었다.
4.1.3.2. 이대수
이대수SK 와이번스 1기 시절 오버스로로 송구하지 않고 사이드암으로 송구한다는 이유로 찍혀[32]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시키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음해에 가깝고 이대수의 경우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겹친 케이스다.

일단 첫 번째로 김경문 감독이 먼저 이대수를 원한 것. 나주환을 유격수로 써 보려다가 불안한 수비에 포기하고, 대신 수비가 뛰어난 선수를 원했는데 그 때 김경문 감독의 눈에 들어온 것이 이대수였던 것. 애초에 김성근이 아니라 김경문에게 필요한 선수로 찍혀서 트레이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대수의 경우 당시 팀간 사인거래 의혹이 있었는데, 여기서 사인을 거래한 선수로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어서 트레이드 대상으로 지목된 건 그 이유도 어느정도 지분을 차지한다는 의혹이 있다. 여튼 이대수는 감독에게 찍혀서 간 트레이드가 아니었고, 김성근 감독도 두산에서 맹활약하던 이대수를 보면서 흐뭇해했다고.

후일 시간이 흐른 후 이대수는 그런 루머에 대해 기사를 통해 본인이 강하게 부정했다.한화 이대수는 정말 야신에게 밉보였나? 실제로 이대수는 이후 선수생활 은퇴할 때까지 김성근의 지도대로 오버핸드를 통해 강한 송구를 선보였다. 애초에 이대수는 포구가 안정적이지만 수비범위가 넓지 않다는 단점 역시 지녔었기에, 이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오버스로에서 나오는 강한 송구가 반드시 필요했고 김성근의 지도는 옳았던 것.
4.1.3.3. 정상호
정상호는 김성근 감독 재임 시절 2009 시즌을 제외하고는 주전 포수로 뛴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을 존경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이만수 감독이 소속팀 감독으로 있던 시기에도 김성근 감독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바 있다.

4.1.4. 한화 시절 선수들

놀랍게도 살려조 최대 피해자 송창식, 심수창[33]도 김성근을 좋아하는 걸로 나왔으며 한화의 영구결번이 된 레전드 김태균도 안도하고 있던 자신을 일깨워주신 분이자 경기 밖에서는 따뜻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하며 송창식의 등판을 혹사라하는데 혹사는 싫어하는데도 올려야 혹사가 아니냐?[34]며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4.1.5. 기타 선수들

4.1.5.1. 박철순
그분은 프로 생활뿐 아니라 내 선수 생활 통틀어 만난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이시다.

한참 부상에 시달리고 설상가상으로 이혼할때 전 부인의 빚까지 떠안았고 이걸로 빚쟁이들한테 시달리자 김성근 감독이 박철순을 은행에 데려가 직접 보증을 서면서 2천만원을 대출받게하고 자기통장에서 2천만원을 박철순 통장에 보내면서 빚을 갚게 했다. 다들 알겠지만 대출 보증은 가족도 절대 안서는게 철칙이다. 또한 대졸 초임자 월급 20만원 시대에 4천만원이면 현재 기준으로는 4억에 가까운 수준.
4.1.5.2. 박찬호
김성근 감독은 야인 시절조차도 전국 각지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인스트럭터 일을 하였고 한때는 박찬호김병현을 일대일로 한 번 지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기간을 생각해보면 제자라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할 거 같은데도, 오히려 박찬호는 본인이 김성근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사이다.

김병현은 코칭의 횟수가 적지만 박찬호는 꽤 많은 코칭을 받았다. 텍사스 시절 부진했던 때 이런저런 방도를 찾다 당시 한국에서 투수 코칭의 일인자로 여겨지던 김성근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직접 자신의 피칭 비디오를 보내며 폼을 지적해 달라는 요청을 해서 비디오를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이후로는 아예 비시즌에 직접 만나서 폼을 다듬어 주기도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년 이렇게 만나서 폼을 교정받았고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를 봐서 방어율은 높지만 샌디에이고에서 간만에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기도 했고, 불펜으로서 부활했기에 박찬호는 김성근에게 꽤 신뢰를 지닌 것으로 보이며 박찬호가 메이저를 떠나서 일본, 한화를 가서까지도 인연이 유지되었으며 현재까지 박찬호와 김성근은 상당히 우호적이다.

사실 박찬호가 도움을 구할 만한 국내 야구지도자는 당시로서는 김성근 외에는 딱히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당시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의 솜씨를 따라올 한국인 야구지도자는 비록 메이저는 아니라도 당시 마린스 코치로서 일본프로야구 지도자 경험이 있는 김성근이나 주니치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투수코치 연수 경험이 있는 선동열 정도였다. 그러나 선동열은 박찬호와 현역 생활 시기가 겹친 초보 지도자이기도 했고, 대표적인 친 김응용파 야구인이었는데 박찬호는 김응용 파벌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유명한 사실이라 거르고 거르면 김성근밖에 없기도 했다.

4.1.6. 일본에서의 인연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잠시 코치일을 해서 그런지 이쪽 선수 중에서도 몇 명이 김성근과 인맥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마츠 쇼이츠와 타케하라 나오타카[35]. 이 둘은 2006년 12월에는 아예 김성근을 만나러 한국에 온 적도 있고, 몇년 후인 2009년 12월 김성근이 스프링캠프 차 고치에 있을 때에는 고치에서 생일축하를 하러 김성근을 직접 찾아왔다.

당시 기준으로 김성근이 한국에 있을 때도 연락을 하는 사이였다고. 지금도 연락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14년 후쿠오카 페이페이돔에 야구를 보러 간 김성근이 원정팀 선수였던 오마츠를 만났다는 기사가 있고, 2019년에 오마츠가 은퇴를 할 때 한 인터뷰에서도 김성근의 코칭 얘기를 한 걸 보면 오마츠 쇼이츠의 경우는 지금까지도 김성근을 은사로 여기는 듯.

이외에도 현재 야구해설가 겸 유튜버로 유명한 당시 주전포수 사토자키 토모야와도 여전히 만나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보인다. 그러나 이쪽에서도 니시오카 츠요시의 얼굴을 때렸다는 등 좋지 못한 얘기도 있어서...[36]

4.2. 미묘한 관계

4.2.1. 박재홍

박재홍과는 별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알려져 있어왔다. 일단 박재홍이 신인이던 1996년 쌍방울 감독을 맡고 있던 김성근은 박재홍의 타격 자세를 가지고 부정 타격이라며 항의하는 등 물고 늘어졌던 바 있고, 후에 SK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첫 해인 2007년부터 지난 2년간 주전이었던 박재홍을 김강민, 조동화 등과 플래툰으로 돌려버리며 갈등을 빚었고 이에 따라 박재홍을 2군으로 내려버린 적도 있다. 경질 직전이던 2011년 8월에는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하던 박재홍이 "내가 김강민의 땜빵이냐"'라는 말을 한 바 있고, 이에 김성근은 언론에다가 박재홍을 상당히 나쁘게 말했던 바 있을 정도.

이후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박재홍이 해설 도중 은근히 김성근을 비판하는 등 둘의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sk제자들과 김성근감독과의 정기 모임에 출석하는 등의 모습도 있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는 회복한 듯.

4.2.2. 권혁

권혁은 한때 김성근을 존경했었고 혹사 논란에도 괜찮다면서 열심히 공을 던졌으나, 김성근의 무통주사 강요와 각종 폭압적 보복이 겹치자 적대적인 관계로 변했고 다시는 김성근에 대해서 전혀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해설자가 되어서도 김성근과의 불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를 하지 않았기에 둘의 관계가 험악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얼마나 험악한지는 미지수이다.

2020년 두산 베어스가 일본 미야자키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때 김성근 감독이 찾아와 해후를 하기도 했는데 권혁을 보자 잘하라고 격려를 건냈고 권혁도 웃음으로 답했다

김태균의 유튜브에 양성우와 같이 출연하여 술자리를 가지면서 선수 시절을 회상하는 영상에서 김태균이 김성근 감독님하고 다시 선수 생활을 해볼거냐는 질문에는 "안 한다. 못 할것 같다. 어깨가 앞 뒤 할 것 없이 다 나갔다. 투수가 찢어질 수 있는 포인트는 다 나갔었다." 라고 일축한 것을 보면 현재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4.2.3. 민경삼

프로에서 사제지간은 없으나 신일고등학교 감독 시절 가르쳤던 제자가 훗날 SK 와이번스 에서 감독 임기중 만난 단장 민경삼이다. 옛 제자를 상사로 만난 셈. 민경삼과는 가족끼리도 긴밀한 사이였고, 훗날 민경삼이 직접 2006년 김성근을 SK의 감독으로 선임했다. 함께 왕조를 구축하기도 했으나, 김성근 감독의 2011시즌 중 언론 플레이와 현장 및 프런트간의 내홍으로 시즌 후 퇴진을 선언하자 갈등을 우려해 민경삼이 김성근을 경질했다.

이후 사이가 험악해져 절연했으나, 2013년 민경삼 단장의 외아들 고 민선홍 군의 임종을 앞두고 민경삼의 아내가 김성근에게 연락을 했고, 김성근이 늦은 밤 그 즉시 병실로 찾아와 셋이 2년만에 병상에서 조우해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민경삼과 화해하고 이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애증이 교차하던 제자였으나 참척의 변을 앞둔 제자를 보고 인간적인 감정을 우선해 극적으로 화해한 경우. 기사

2020년 민경삼이 SK 와이번스의 대표이사로 부임하면서 팀에 복귀하였고 모기업이 바뀐 후에도 사장 자리를 유지하다가 SSG 랜더스202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자 김성근 감독이 2차전 시구를 하기 위해 인천 SSG 랜더스필드를 방문하면서 두 사람도 오랜만에 재회했다.

4.3. 나쁜 관계

좋은관계와는 별개로 좌우놀이와 무분별한 불펜운용 때문에 주전 타자 혹은 투수들과 마찰을 빚은 사례가 무척 많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이만수, 김성래, 류중일, 강기웅 등 당시 삼성의 주축 선수들과 이런 이유로 갈등관계를 형성했다. 전반적으로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 SK 와이번스에서조차도 이진영, 김재현, 박재홍 등의 선수와 포지션 변경이나 플래툰 기용 때문에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다. 다만 확실히 나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후술한 두 선수는 아예 김성근과의 사제 관계로서의 인연이 없다.

4.3.1. 마해영

마해영과는 2002년 한국시리즈 연타석 홈런으로 앙숙과도 같은 사이였다. 마해영 역시 김성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해설위원 시절 김성근이 한창 야신으로 추앙받자 분위기에 편승하여 김성근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마해영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김성근 밑에 선수들은 매우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못했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나중에 김성근이 한화에서 추락하며 여론이 질타를 받을 때 마해영도 과거 해설 위원 시절 김성근을 지지했던 발언을 철회하고 김성근을 비판했다. 다만 박재홍의 유튜브에 나와서 2008년 올스타전 당시 본인을 4번타자로 선발에 올려준거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4.3.2. 장성우

장성우는 과거 여자친구에게 김성근에 대해 "일본새끼가 노망나서 저지랄하는데 저런새끼는 뒤져야 된다. 야구 X도 모르는 병신들이나 물고빨지 그냥 노망나서 저지랄하는 거다. 뒤지는게 답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공개된 바 있다. 사실상 김성근에 대해서 가장 수위 높은 비난을 가한 야구인(...)이기도 하다. 물론 앞에서 말하거나 공석에서 말한 게 아닌, 여자친구한테 사석에서 말한 것이 들통나서 그런 거긴 하지만 김성근에게 대놓고 욕설이나 비하발언, 일본 드립을 한 야구인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으니.

4.3.3. 외국인 잔혹사

외국인 선수들과도 자주 갈등이 있었다. 개성 강한 외국인 선수와 국내 지도자가 갈등을 빚는 경우는 많지만 김성근의 경우는 지나치게 권위적인 성격으로 무난한 성격의 외인들과도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2001년 LG 트윈스댄 로마이어는 선수들에게 조언을 자주 한다고 찍혀서 내쫓겼다. 다만 로마이어의 경우 한화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조언을 자주 해주다가 수석코치인 유승안에게 제대로 밉보였다고 한다. "로마이어랑 재계약 할바에는 나를 자르라."라는 소리를 구단에 했을 정도니 좀 애매한 문제.

2007년 SK 와이번스마이크 로마노는 플래툰 불펜 대기 등 출전 방식의 갈등으로 2군에 갔다 왔고, 2007, 2008년 SK 와이번스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린 케니 레이번도 퀵후크 등에 예민한 반응으로 팀 분위기를 해친다고 평가받아 재계약에 실패했다. MLB 현지 해설위원으로 활동중인 크리스 니코스키도 훈련방식과 투구폼을 둘러싼 감독과의 갈등 끝에 일찍 퇴출됐다.

2015년 한화 이글스나이저 모건도 김성근 감독의 기량 미달보다 지나친 쇼맨쉽이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1군에서 몇 경기 뛰지 못하고 2군을 전전하다가 방출되었다. 한국 리그에 제대로 적응도 못했지만 2할 7푼대 타율에 4할 출루율을 기록했던 나이저 모건[37]에 비해 훨씬 부진했다가 중반기부터 맹활약한 넥센 히어로즈의 브래드 스나이더의 사례도 있고 나이저 모건의 빈 자리로 주전급 경기 출장을 보장 받은 송주호의 참담한 타격 성적을 고려하면 외국인 선수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감독의 조급증과 권위적인 성향이 어우러진 것이다. #

시즌 초반 다른 선발들이 부진한 가운데 수차례 4일 휴식 후 등판하며 팀을 이끌었던 미치 탈보트에겐 '실패한 선수'란 폭언을 퍼부어 구설수에 올랐고[38] 에이스인 에스밀 로저스를 건방지다고 2군에 내렸다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로저스를 두고 아들 김정준까지 엮여서 아주 제대로 소동을 일으켰다.


[1] 다만 김성근도 후배들이 선배를 존경해야 한다는 등 본인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반말을 하면 무진장 불쾌해한다. 이건 사이가 안 좋은 김경문 같은 후배가 반말을 하니 디스를 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식 호칭관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2] 김응용의 의도는 당시 상대팀 감독인 김성근을 야구의 신이라고 이야기 한 뒤 그 신을 이긴 자신은 더 높은 존재 아니냐? 라는 의도가 다분히 섞인 발언이였으나 정작 본인의 의도대로는 가지 않았고 5년 뒤 SK왕조를 구축한 김성근이라서 야구의 신이라는 이미지만 더더욱 강해졌다.[3] 이는 김응용도 마찬가지다. 해태 시절 코치들한테도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괄괄하던 김응용 감독이 수석 코치인 김인식 앞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4] 실제로 삼성 감독 제의가 김성근에게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좀 복잡한 상황이다. 정확히는 당시 삼성 노진호 단장이 밝힌 바로는 이때 김영덕, 김성근, 김진영 세 명에게 동시에 제의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걸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김성근이 이를 김영덕에게 보고하자, 김영덕이 잽싸게 먼저 계약을 성사시킨 것.[5] 김영덕은 한화 감독에서 물러나면서 한화그룹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팀 감독은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말을 지켰다.[6] 당시 김성근 감독은 경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는 쪽이었고, 이광환 감독은 경기 전에는 되도록 가볍게만 먹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이광환 감독 쪽이 맞는 의견이다. 같은 시기 김성근 못지않은 강성 지도자로 유명했고 사적으로도 김성근과 매우 친했던 김동엽은 의외로 식단에 관해서는 이광환과 궤를 같이하는 과학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7] 이광환은 훗날 감독이 되고 나서 코치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했다.[8] 이때의 김성근은 성적 부진으로 옷을 벗게 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계약 만료 상황이었기도 했고.[9] 이는 경기에서도 비슷했다. 1986년 잠실 MBC-OB전에서 부정위타자 사건이 발발했는데, 당시 김동엽 감독이 룰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을 노리고 쓴 수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친한 사이지만 승부에서는 가차없었던 모습. 또 그렇게 당하면서도 친하게 지낸 걸 보면 김동엽 감독이 대인배 인증한 것이기도 하다.[10] 다만 김응용 또한 이북 출신인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그 문제는 아니고 그냥 성향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11] 다만 당시 김성근은 마산상고 감독 시절에도 정식 감독이 아니라 기업은행 마산 지점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겸임했던 거라, 기업은행 내에서 코치로 발령된 거라면 당연히 바로 상경하는 것이 당연하다.[12] 오 사다하루가 화교이다 보니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김성근과 동질감을 느껴서 더 사이가 가까워진 것이란 말도 있다. 실제로 오 사다하루는 장훈과도 친하고.[13] 이 당시 해명으로 했던 말은 "우리 선수들은 내가 낸 싸인도 놓치던데?"(...)였다. 실제로 2008년 5월 6일SK전은 아니고 한화와의 경기 도중 1점차 뒤진 4회 1사 2 3루 상황에서 먹던 해바라기씨를 떼어내려 입가를 만진 것을 타자 이승화와 3루 주자 강민호가 스퀴즈 번트 사인으로 오해하여 무리하게 번트를 댔다가 홈에서 횡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14] 어느 정도냐면, 김성근 감독의 딸들이 조범현 감독을 '오빠' 라고 부를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15] 김성근은 신일고 시절 화랑기 우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화랑기 우승은 고교야구 4대 메이저대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16] 나머지 두 명은 김인식, 양승호를 꼽았다.[17] 실제로 김성근과 김원형은 1년에 한번씩 SK 왕조 모임(현역 선수들을 제외한 은퇴한 선수들만 참가가능)에 참가하며 여전히 교류 및 연락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18] 9월 17일 경기에서 김경문 감독은 11-3으로 이기는 시점에 필승조 김진성, 필승조 최금강을 투입하였다. 이어 셋업맨 임정호가 9회 1사까지 1이닝 퍼펙트 피칭을 했는데 아웃 2개 남기고 마무리 임창민으로 교체하였다. 그야말로 능욕교체. 정말 이 감독은 다른 대승하는 경기에선 이러지 않는다! 며칠 쉰 계투조의 경기감각 조절을 이유로 댈 수 있으니 겸사겸사의 마음으로 다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19] 9월 18일에도 15-2로 대승하면서 필승조 이민호를 투입한 데 이어 선발타자 전원 교체라는 희대의 능욕을 선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전 타자 9명 중 8명이 교체됐는데, 교체되지 않은 1명은 시즌 타율 0할대의 2군급 타자다. 정말 이 감독은 김성근 아니면 이러지 않는다. 증거로 선발 9명이 규정타석을 채워줄만큼 웬만한 상황에선 교체를 안한다.[20] 단, 이는 동종업계를 뛰는 사람이기에 본인 또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서 김성근을 지지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실제로 김경문 본인도 김성근이 경질된 다음 해인 2018년에 마찬가지로 성적 부진으로 NC 감독에서 중도 경질되었다.[21] 실제로 그렇게 팔뚝 근육을 보고 싸인을 훔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원년 우승을 자기 덕분으로 포장하고 이만수를 폄하하기 위해서 한 발언이라는 의견이 많다. 다만 이만수가 상대하기 쉽다는 건 김성근 감독만의 이야기는 아니었고,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이 하나 같이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22] 의외로 큰 사건들 중 이만수가 빈볼을 맞았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 다만 현역 시절 타자로는 격한 세리머니, 포수로는 끊임없는 트래시 토크로 유명했던 이만수인 만큼, 이만수는 당시 OB뿐 아니라 모든 팀의 공적 수준이었고 실제로 사구 기록이 화려했다.[23] 결국 동국대 시절 은사이던 김인식 당시 해태 코치의 설득으로 해태로 갔다. 이외 자세한 내용은 한대화 문서 참조[24] 당시 한화팬들은 알겠지만 한화 2군은 프런트의 무관심으로 지명 절반을 거르는 등의 자멸로 신인선수 풀이 아작나있었고 지자체의 계산기로 인해 2군 구장도 없었으며 전임 감독 김인식은 베테랑 기용만 하다보니 유망주는 적은데 성장세도 두드러지지 못해서 당시 한화 2군은 1군으로 올릴만한 전력감이 없었다.[25] 당시 SK는 전권을 받은 김성근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프런트에서 차기 감독감으로 낙점하고 키우려던 이만수도 김성근 패거리에 둘러싸여 온갖 시덥잖은 일로 시달렸는데 하물며 김경기야.[26] 김성근 감독은 2009년 윤재국이 부상 재발로 은퇴했을 때 크게 아쉬워하기도 했다. 쌍방울 시절부터 쭉 봐 온 선수였다.[27] 회갑연의 주최를 주도했던 두 제자가 바로 김기태 KIA 타이거즈 감독과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이다. 특히 이연수 감독은 선수 시절에 김성근 감독이 두 번씩이나 방출시켜서 인연이 좋지 못했지만 김성근이 이연수를 프런트로 거둬들였고 2000년대에 지도자로 전향하면서 김성근 감독과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28] 그냥 김성근에 대해 어느정도 좋게 얘기할수 있는거야 흔한거지만 아예 꼭 이걸 반드시 써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한 경우는 흔한게 아니다.[29] 김성근 감독은 장발, 수염 자르고 오라고 이상훈에게 명령했는데 이상훈은 아예 김성근 감독과 담판을 지어서 절대 못 자르겠다고 버티니까 "그럼 너 하나만 예외로 칠수는 없으니까 선수들 전원에게 두발자유를 주겠다."라고 김성근 답지않게 쿨하게 넘어갔다. 약 2년전 이광은 시절 최향남 염색파동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30] 출처 :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정철우 저, 비전코리아)' 144페이지.[31] 언론 인터뷰중이라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나중에 찾아와 귀싸대기를 때렸다고...[32] 본인에 말에 의하면 당시 부상 때문에 오버로 던지기가 힘들었다고.[33] 심수창은 한화로 이적 이전까지 억대 연봉도 못 찍은 투수였다. 그런데 김성근의 입김이 강했던 시절이라 프런트가 심수창을 영입하면서 바로 2억대연봉을 찍게 되었고 이후에도 2년간 꾸준히 기용해주니 심수창은 김성근 감독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며 유튜브에서도 살려조가 아니었다는 옹호를 하는 중이다.[34] 이는 어쩌면 김태균이 혹사의 개념을 모를 확률이 클 수 있다. 혹사는 혹독하게 일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등판한 송창식은 이미 혹사가 맞으며 본인이 좋아했으니까 혹사가 아니다는 김태균의 주장은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다.[35] 좌투우타 거포 유망주였으나 롯데, 오릭스, 세이부를 거치면서 터지지 못하고 대타 요원으로 커리어를 마쳤다.[36] 물론 일본도 감독이 선수 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다른 감독들보다 특별히 나빴다는 건 아니다. 김성근은 당장 호시노 센이치랑 비교하면 양반인 수준.[37] 리그 초반부터 잘하는 외국인 선수는 사실 거의 없다. 스트라이크 존, 변화구 대응, 현지 적응 등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38] 김성근/구설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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