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2:14:15

김응용 vs 김성근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11171> 파일:김성근투명.png김성근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11171><colcolor=#FFFFFF>
경력
경력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평가 야구 스타일 · 2015년 · 2016년
관련 인물 아들 김정준 · 김응용 vs 김성근 · 인맥
구설 김성근/구설 · 김성근의 저주
관련 밈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났는데 절이 쫓아와요 · 위기의 XX를 구할 마지막 희망 ·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 세이콘 드립
기타 별명 · 언론플레이 · 징크스 · 노리타 · 살려조 · 최강야구 · 최강 몬스터즈
}}}}}}}}} ||
파일:김응용vs김성근_전설의 시작.jpg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1. 개관2. 상세
2.1. 김응용 방식은 강압적으로 선수단을 다루는 후진 야구?2.2. 김응용은 선수빨로 경력을 쌓은 무능력한 감독?2.3. 김성근은 아웃사이더고 김응용은 성골?2.4. 둘은 라이벌인가?2.5. 2010년대 이후의 평가2.6. 야구 외적 차이2.7. 한화 감독으로서
2.7.1. 김응용 우위론2.7.2. 김성근 우위론
2.7.2.1. 김성근 우위론에 대한 반론
3. 종합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관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2_546938_1346197125716567.jpg
1992년 6월 21일 KBO 올스타전에서

KBO 리그를 대표했던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인 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을 비교하는 문서이다. 다만 이 문서가 본래 김응용 문서에 있다가 분리된 문서이고, 주로 신규 야구팬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에 대한 반박 위주로 이루어졌음은 감안하여야 한다.

김응용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 치른 현대 유니콘스와의 2004년 한국시리즈 이후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감독직을 수행하지 않아서[1] 2000년 후반 들어 불어난 신규 야구팬 층 에게는 왕년에 잘한 명 감독 수준으로 인식되며 야신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 시즌에서 김응용 감독과 3번 붙어서 이겨 본 적이 한 번도 없다.[2]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2002년 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이것이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보다 뛰어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전력의 팀에서 최고의 성적을 이끌어내고, 그 팀을 지속 가능한 강팀으로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라는 점 역시도 감안해야 한다. 또한 김응용이 감독이 당대의 강팀을 맡았기 때문에 잘 한게 아니라 김응용이 강팀을 만들었기 때문에 잘 한거라는 점은 잊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김성근이 SK라는 팀에서 4회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SK는 강팀이니 한국시리즈 진출이 당연한 것일까? 김성근의 업적은 없고 그냥 팀 빨인가? 아니면 김성근 감독이 SK를 강하게 만들어서 강팀이 된 것인가? 애초에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에 처음 부임했을 때 해태가 그렇게 강팀이 아니었다.[3] 그 팀을 최다 우승팀으로 만든 것은 엄연한 김응용의 공적이다.

선동열, 이종범이란 초대형 스타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한화는 류현진, 김태균이란 역대급 스타가 있는 상황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2012년에 오히려 하위권을 전전했다. 이만수, 김성래, 장효조, 이승엽, 김시진, 김일융, 김상엽 등 그야말로 전통의 강호이자 올스타급 선수 라인업을 가졌던 삼성 또한 2002년까지 만년 준우승 이미지가 박히며 한국시리즈 우승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4] 분명 슈퍼스타의 존재는 우승에 큰 도움이 되지만 슈퍼스타가 있다고 해서 우승하는 것은 아니다. 김응용 감독은 그냥 강팀을 받아서 다 해 먹은게 아니라, 재임 기간동안 끊임없이 리빌딩을 해가면서 팀을 강팀으로 만들고 유지했다. 심지어 해태는 2군 육성 체계가 없었음에도! 타이거즈의 1번 타자가 김일권→이순철→이종범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선수 키우고 기존 선수들도 세대 교체를 착실히 했다.

슈퍼스타가 없다고 해서 우승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종범과 선동열이 없었을 때에도 우승했다.[5] 게다가 정규시즌 1위를 못 한 상태에서도 여러번 우승했다. 역대로 정규 시즌 우승팀이 아닌 우승이 몇번 안 되는데 그 몇 번 안 되는 경우의 상당수가 김응용의 해태 시절 이루어진 것이다. 삼성이라는 당대의 최강팀, 빙그레 이글스라는 당대의 최강 팀을 상대로도 족족 우승을 일구어내었다. 절대적인 전력의 차이로만 우승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에서도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한편 2013년 한화 이글스를 맡아 보여준 운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팀을 갉아먹는 쌍팔년도식 후진 운영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러나 이 점은 2004년 이후 무려 8시즌을 현장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이 가장 크다. 또한 현장 밖의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당시에는 감독 복귀 의사 자체가 없었고 따라서 복귀를 대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도 노리타들의 망상과 달리 한화 이글스 부임후 행보를 보면 김응용과 스타일에서 차이만 있을 뿐전형적인 쌍팔년도 야구였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SK의 두꺼운 선수층과 강병철, 조범현 전임 감독들의 지속적인 리빌딩 등 벌떼야구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 뿐이었다.

팬들에 의해 자주 비교질 당하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사이는 꽤 좋은 듯하며[6] 김성근도 자서전이나 인터뷰 등에서 김응용을 인정하는 류의 발언을 자주 했다. 직언을 잘하는 김성근의 성격을 생각할 때 지어내는 말은 아니다. 거기에 2013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특별 편성 된 김성근의 돌직구에서 한화에 대한 비평이 나왔을때 김응용 감독에 대해선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만 봐도 확실히 김응용 감독을 존경하거나 혹은 높게 평가하거나 둘 중 하나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둘이 한솥밥을 먹은적도 있다. 1995년에는 김성근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이때 김성근은 김응용의 지도술을 한수 배우기 위해 직접 자청해 갔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7][8] 어쨌든 간에 1990년대만 해도 해도 김성근의 커리어는 김응용에 비해 보잘것 없었다. 물론 2000년대 들어서는 김응용이 은퇴하고 김성근이 대성하면서 이 평가는 미묘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해태의 포스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김응용의 손을 들어주지만, 2000년대 후반에 유입된 프로야구 신규 팬들은 SK의 포스가 워낙 강렬했다.

2. 상세

2.1. 김응용 방식은 강압적으로 선수단을 다루는 후진 야구?

2000년대 이후 부쩍 늘어난 김성근 감독 팬들에 의해, 김성근 감독은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배워 세밀한 투수운용, 기민한 작전 지시 등으로 당시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지 못한 다른 감독들보다 한 수 위의 야구를 선보인 반면 김응용 감독은 수틀리면 선수 패고 군대처럼 강압적으로 선수들을 굴리는 악바리 야구라는 말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근거없는 허위사실이다. 김응용은 오히려 자율야구를 한국에 도입한 인물이다.

김응용 감독은 그전까지 실업야구팀인 한일은행 야구단의 감독을 하다가 1981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갔다. 대한야구협회에서 보내준 일종의 지도자 해외연수로 거기서 자율 야구를 도입해서 김영덕, 김성근 등의 재일야구 지도자들의 대척점에 섰다. 김성근이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와있을 때에는 난 2시간이 지나면 무슨 연습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수비 위주로 오전 팀 훈련만 시키고 김성근 감독의 추가훈련을 막았다고 한다. 당시 해태는 전지훈련은 물론 평소에도 훈련 시간이 타팀의 절 반수준이라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은 벌써 끝나요?? 하면서 놀라기도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전성기 해태가 소수의 인원으로도 운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훈련으로 인한 체력 소모가 적었기에 그만큼 경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9]

거기다가 경기에선 희생번트나 작전 지시를 거의 내리지 않았고 작전을 내도 선두 타자가 나갔을 경우 치고 달리기 정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수준이었다. 기습번트나 도루 등은 대부분 선수 개개인의 판단에 맡겼다. 초지일관 강공에 1년 내내 타순도 고정이었다. 어찌 보면 1994년 이광환 감독이나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보다 훨씬 먼저 자율 야구를 시작한 감독이다.[10]

다만 투수 운영은 전형적인 구식 야구[11]로 감독 초기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는 혹사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상윤은 1983년 혹사를 당하고 그 해 우승한 뒤 2년간 개점휴업 상태였다가 1986년에나 부활하게 되고 일찍 옷을 벗는다. 다만 프로야구 초창기 대부분의 에이스급 투수들이 혹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명부의 혹사는 너무나 유명하고, 최동원, 박철순, 김시진 등의 초에이스들도 혹사로 20대 후반에 맛이 간 경우가 많았다. 최근 투수 수명이 30대 후반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수명이 10년은 단축된 셈이었다. 그리고 2013시즌 한화에서 이런 식의 운용을 했을 땐 여지없이 통렬한 지적을 받았다. 최소한 선수의 잠재력을 깨우는 과정이라며 금칠하는 사람은 감독 본인 포함 아무도 없었다.

1990년대 해태의 투수층이 두터워지자 김응용의 투수운용법이 진화하게 된다. 최고의 투수를 마무리로 돌리면서 셋업맨들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해태에선 선동열(93~95)과 임창용(97~98)을 특급 마무리로 뒀고 2000년에는 이대진도 마무리를 했다. [12] 삼성에서는 선발투수였던 노장진중무리로 무지막지하게 굴렸다.[13] 강력한 마무리를 박아두고 방수원이나 송유석을 앞서 등판시키는 등 현대 야구의 셋업맨이라 할 수 있는 투수 기용을 일찍부터 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투수 자원이 많았던 1980년대 해태 시절에 김대현, 차동철, 이광우 등의 두터운 중간계투진이 끝판왕 선동열에게 경기를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홀드 기록이 뒤늦게 시작되어 당시 해태 중간계투진의 활약이 기록상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14]

임창용이 비인간적 혹사를 당한 시기는 1997~1999년인데 1997년과 1998년은 해태 시절 김응용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기다. 임창용의 최고 혹사기는 삼성으로 이적하고 나서 서정환 감독 시절이었던 1999년으로, 김응용 때보다 훨씬 심했다.[15] 재미있는 건 서정환김응용의 제자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김응용 감독도 방침을 바꿔서 삼성에 부임한 이후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임창용을 선발로 기용했고 2004시즌 마무리로 복귀시킨 다음엔 61경기 67이닝으로 철저히 1이닝 마무리로 기용했다. 다만 이 대신 중간계투에서 노장진김현욱이 혹사당했는데[16], 2002년 노장진의 경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마지막 풀 타임 중무리 투수로 기록된다.

구타 문제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주축 선수들이 대부분 군산상고나 광주제일고, 광주동성고, 진흥고 등 학벌로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학교 야구부에 있던 악습이 그대로 프로구단으로 옮겨온 것이 한 원인이다. 해태에서 이 악습을 제일 마지막으로 이어받은게 바로 이호성. 이호성이 은퇴하고 이종범이 최고참이 되면서 최소한 선수들끼리 구타는 사라졌다. 물론 김응용 본인도 종종 폭력을 통해 선수들을 휘어잡기도 했으나,[17] 실력만 확실하다면 사생활 간섭을 하지 않았고 일부 사정이 어려운 선수들을 도와주는 등 무조건 채찍질만으로 선수를 짓누른 건 아니다. 또한 시대적인 문제로 체계적인 지도자 교육을 받지 못한 이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하와이 항명 사건 때문에 감독 인생이 끝날 뻔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자제하는 편이기도 했다.

사실 제대로 구타 문제를 파고 들어간다면 여기에서 자유로운 20세기 감독은 정말 몇 명 없다. 그나마 선수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하지 않은 김인식이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케이스. 이 문서에서 김응용과 비교되는 김성근 감독은 폭력 감독 중에서도 1순위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애당초 스포츠 폭력의 기원은 일본이며, 이는 군대와 마찬가지로 일본 집단 문화의 고질적인 문제다. 1990년대 일본 여자 농구 리그에 용병으로 왔던 한 미국 선수가 코칭스탭의 구타 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않고 미국에 돌아가 일본 체육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했을 정도로 일본 체육계는 구타문화가 만연해 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그 시절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사람이다. 이런 사정에서 김성근이 구타와 무관할리 만무하다. 자기에게 인사 안하고 갔다고 숙소까지 따라가 폭행한 적도 있을 정도다. 김성근에게 맞으면서 자란 배영수가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으며 심지어는 일본 지바 롯데 시절에도 일본 선수들을 폭행했다. 그리고 이걸 자랑스레 인터뷰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만년우승팀인 김응용이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그렇지 김성근도 똥군기의 달인이다.[18]

김응용은 1990년대 후반에는 우승도 많이 해봤고,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해서 성적에 대한 기대도 없어져 우승 강박증이 사라진 다음이라서, 구타는 자제했으며[19], 숙소가 없는 어린 선수들을 자택의 남는 방에 묵게 하거나, (한화 시절에는) 훈련 챙겨주고 밥 먹이며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감독이 되었지만 김성근 감독은 2000년대 후반인 지바 롯데 코치시절과 SK 감독 재임기간에도 구타를 했다.[20] 자기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고 싸대기를 날리거나, 이진영이 인사 안했다고 따로 불러서 때렸다거나, 태평양 시절, 정명원을 조련할때 제구가 안될때 마다 투수 옆에 서서 한 방씩 갈겼다거나, 쌍방울 시절에는 심성보가 밤에 후배한테 술 사오라고 한 죄[21]로 불러내서 싸대기를 20대 때렸다. 훗날 잘 되라는 의미에서 죄 의식 없이 때렸고 결과는 좋게 나왔지만, 요즘 이런 식으로 선수 훈련시키면 경질 이전에 폭행죄로 감옥 들어간다. 김성한21세기에 그랬다가 지도자 경력이 끊겨버렸다. 이진영의 경우 KBS 베이스볼 야!에서 직접 증언했다. "당시 선수들이 훈련 중에 김성근 감독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계시길래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불러서 그 때 왜 인사 안 했냐고 때리셨다."

다른 감독들을 돌아봐도 술 취해서 선수하고 코치 팬 김동엽이나, 자기가 싫어하는 별명을 말했다고 타팀 선수 귀 싸대기를 날린 김영덕[22]의 사례나, 투수가 지시한 공을 안 던졌다고 때리고 쓰러진 백인천과 체벌을 시도하다가 항명 사건이 터져서 사임까지 한 OB의 윤동균 등등 끝도 없이 나온다. 김응용이 이들보다 더한 '폭력 감독'으로 찍힌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잘렸다 복귀했다를 반복하는 동안 너무나 오래 재직했고[23], 해태라는 팀이 원래 주목을 받는 팀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경기 중에도 판정 문제로 심판에게 다가가 니미 시X 하면서 멱살을 잡고 수십 차례 퇴장을 당해 역대 감독 퇴장 1위를 기록하는등 강경한 인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일 뿐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상당히 시간 지난 후에도 프로 의식이 정착되질 않아서 선수들이 무책임하게 움직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선발 등판 전날 잠 안자고 술 퍼마신 일을 선동열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하지만, 요즘 그랬다가는 당장 언론과 팬들에게 탈탈 털리고 어지간히 급한게 아니면 2군행이다. 쉽게 말해 야구계가 전반적으로 미성숙했다.[24] 선수들은 프로 의식이 부족했고 감독들도 대등한 인격체라는 인식이 부족해 별 생각 없이 손찌검을 했다. 2000년대가 아니라 그 1980년대니까 그랬다는 말이다.[25]

2.2. 김응용은 선수빨로 경력을 쌓은 무능력한 감독?

일단 덕을 많이 보긴 했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는 선수층이랄 게 없었다. 장명부를 앞세워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삼미 슈퍼스타즈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약팀도 특급 선수 한둘만 있으면 성적을 낼수 있었다. 또한 1985년까지는 무제한 1차 지명이 가능했고[26] 1995년까지 연고 지역 고졸 선수들은 자유 계약으로 무제한 영입이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첫 해 6팀중 4위이긴 했지만 팀 홈런, 도루에서 1위를 차지한 잠재력 있는 팀이었고,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전라도 팜을 끼고 있었다.[27] 삼성 시절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해태가 잠재력이 있었으며 팜이 괜찮았다 한들, 1982년 리그 첫해 6팀 중 4위 찍던 인원수 채우기 급급한 팀[28]을 다음 해 우승시킨건 엄연한 사실이며, 이런 이유로 "XX는 우승할 팀"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우승 못할 팀이 없다. 극단적인 예로 2009년과 2012년의 한화 이글스는 리그 최고급의 강타자KBO 역대급의 슈퍼 에이스를 동시에 보유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한화의 당해 성적은 88 좋지가 않았으며, 6668587667 시절의 LG 트윈스에게는 전국 최고의 서울 팜이 있었다. 또한 능력 있는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도 감독 능력이고 1996, 1997년 우승 당시의 해태 전력은 선동열, 김성한, 한대화 등의 주력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거나 은퇴, 트레이드 등으로 빠졌고, 투타의 핵인 이종범, 이대진의 방위 복무도 시즌 초반까지 안 끝났었다. 심지어 96 시즌 전에는 전지훈련 중에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편을 갈라서 싸우기도 했을 정도였다. 시즌 전까지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받던 상황이었기에 무조건 선수 빨이라고 폄하할 근거는 마땅히 없다. 그리고 호남팜 타령으로 선수빨이란 비판은 말이 안되는게 1970~80년대는 호남팜도 나쁜편은 아니지만 대구경북 팜이 제일 좋았다. 특히 대구경북팜 야수들은 거의 국대 타선으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 대구경북 팜에서 KBO 전설의 선수 세 명이 나왔다. 호남팜은 대구경북팜 서울팜에 이어서 부산경남정도로 좋긴 하지만 일부 안티들이 주장하는대로 줏어먹기만해도 우승이라는건 역사왜곡이다. 초기 멤버들은 광주 출신이 오히려 적고 군산상고 출신이 많지만 군산상고 조차 1970년대 신흥 명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 선동열, 1980년대 후반 조계현이강철이 나왔으니 전국구급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투수들 배출은 상급이었지만 야수들 수준은 실제로 좋다고 보기 어렵다.[29] 1980년대 4년 연속 우승 당시에도 해태 왕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공격력은 빙그레나 삼성보다 약했다. 실제로 호남팜이 매우 좋아진 건 1990년대로 '해태 왕조가 좋은 성적을 찍자 광주지역 유망주들이 야구로 몰리며 좋아진 것 이다. 김응용이 호남 팜을 줏어 먹은 게 아니라 좋은 선수를 잘 보고 잘 뽑고 잘 아껴서 키운 것에 가깝다.

그 좋아진 호남팜 덕을 본것은 1990년대 중반 이종범,이대진, 김종국, 김상진이 마지막이고 해태의 모기업이 중견기업이라 스카웃에 인색하면서 박재홍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30] 서재응, 김병현최희섭은 각각 인하대, 성균관대와 고려대라는 아마야구팀에게 몇 천만원 스카웃 머니가 딸려서 뺏기는 처지였다.[31]

오히려 호남팜 덕을 본건 쌍방울 시절 김기태, 조규제, 김원형, 박경완으로 팀 주축을 삼고. 쌍방울 해체선수와 지명권(이진영, 이승호)를 인수한 김성근이 덕을 보았다고 봐야한다.

또한 20년간의 장기집권은 계속되는 시기에 이뤄진 적절한 선수단 교체도 한몫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해태 타이거즈의 3루수는 김종모이순철한대화홍현우로 전환되는데 이 전환 시기가 딱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적절한 세대 교체를 성공시켜 지속 가능한 강팀을 유지하는 것도 엄연히 지도자의 능력이다. 본인이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온 선수도 꽤 있는 편. 한대화의 경우 OB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김응용 감독이 거둬[32][33] KBO 골든글러브 3루수로 만들어냈고, 이순철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직접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차를 태워서 바래다줬을 정도로 애정을 쏟아 키웠고 1986년 한대화가 들어오자 이순철의 포지션을 외아수로 변경해 자연스럽게 김일권을 대체했다.[34] 또한 신고선수로 들어와 배팅볼 투수를 하고 있던 송유석을 미들맨으로 써서 대성했다.[35] 또한 2군에서 불만 지르던 이호준을 타자로 전향시킨 바가 있는데, 일류 장타자로까지 성장시킨 건 강병철 감독의 공이지만 가능성을 보고 타자로 전향시킨 것은 김응용이었다.[36] 해태 말년 덩치 좋은 좌완투수 강영식도 그 재능을 아껴 김응용 감독 본인 집으로 데려가 같이 살면서 김응용 감독이 직접 까지 구워주면서 밥먹이고 이후 2001년 삼성 감독으로 간 뒤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던 신동주를 내주면서까지 데려가서 애지중지 했다. 뭐 김응용 감독의 덩치좋은 좌완 사랑 때문일 수도 있지만 쨌든 강영식은 2016년 현재 롯데에서 김응용의 기대에 부응하듯 활약했고, 선수로 18년 동안 뛰며 750경기에 등판하며 계투요원으로 성공했다. 이외에도 강영식과 비슷한 체격을 가졌던 고교선수 채태인을 거두어들여 후견인 노릇을 자처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 있다. 정작 메이저리그에서는 실패했지만, 당시 삼성 사장으로 있던 김응용은 한국으로 돌아온 채태인을 삼성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결국은 1루수로 잘 정착해서 활약했다.

그리고, 김응용 감독이 취임하기 이전까지 한화 이글스는 2군 구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37] 모기업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1년 한대화 체제에서 6위를 기록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김응용 감독 취임 이후 구단 사장 경력을 통한 구단 프런트의 지원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고, 김인식, 한대화시절에 빛을 보지 못했던 선수들이 등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입단해 2012년까지 1군 기록이라고는 1경기 방어율 13.50[38]이태양이 터질꺼라고 공언하고 2013년부터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했고, 2014년에는 처음부터 선발로 낙점하고 칼같이 관리해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만들었다. 제구력 문제가 두드러진 유창식송창현도 인내를 갖고 선발로 키우려고 했다.[39] 개막전 포수로 언급되었던 한승택은 결국 군 입대 후 이용규의 보상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었으나 경찰청에서 3할대 고타율을 보여주어 가능성을 어필했다. 2차 드래프트로 영입한 최윤석 역시 경찰청에서 3할대 타율을 기록했으며 역시 2차 드래프트로 2014시즌에 삼성에서 영입된 이동걸은 시즌 후반기부터 추격조 역할로 그런대로 던지고있다가 김성근이 경질된 이후에 은퇴했다.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2011년에 존재만으로 한화의 암흑기라 보았던 김회성을 2014 시즌 주력선수로 꼽았을때 많은 한화팬들이 충격과 공포에 떨었으나 입대 전보다 나아진 실력으로 장타력있는 3루수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김응용 재임 후 2014년 한화 선수단을 보면 투수진이나 야수진이 2012년 한화에 비해 상당 부분 교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40], 평균연령을 보아도 신생팀인 NC 다이노스와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젊다. 투수진의 경우 노장이라곤 박정진 하나에 불과하며[41] 야수진의 경우 최선참이 30대 중반, 대부분 군필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김응용의 이런 리빌딩 시도는 후임 김성근이 그 근본을 무너트리면서 평가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으나, 최소한 노장을 이끌고 계속 가지 않고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용했다는 그 시도만큼은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계속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8시즌을 현장 밖에서 보낸 감독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2.3. 김성근은 아웃사이더고 김응용은 성골?

상당부분 김성근 본인 그 팬덤의 언플이 만들어낸 낭설
'재일교포' 여서 차별받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흔히 김성근재일동포란 이유로 갖은 모욕을 겪은 아웃사이더라고 묘사하지만, 김성근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그냥 윗사람과 융화가 안되는 독선적인 성격 탓이다. 당시 야구계에 재일교포가 김성근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영덕[42], 송재박[43], 김일융[44], 장명부[45],송일수[46]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재일교포들이 선진야구를 습득했다는 이유 하나로 국내선수들을 제치고 주전을 꿰차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될때도 재일 한국인이자 전설적인 3085안타의 장훈 선생과 그 외 일본 프로야구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 졌으며,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 한국인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야구단 구축 당시 프런트에 일본통도 많았기에 재일 한국인라 선수단 내에서 차별당했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사장이 일본통 이었으며, OB 베어스의 경우 박용곤 구단주가 일본통 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아예 일본프로야구롯데 오리온즈라는 팀까지 있었고 재일교포도 아닌 그냥 일본인인 도위창 코치[47]를 감독으로 세우려고 했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과의 친선경기에선 재일교포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현장이나 윗선이나 다 이러니 야구계는 전반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해 무척 우호적이다. 까놓고 말해 안그랬으면 2군 감독, 코치, 프런트 경험만 가졌던 사람30년 전통의 수도권 구단 감독 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는가? 그 사람이 1년만 하고 잘린 게 어디 국적 때문이었던가?

삼성의 간판 투수였던 김일융은 일본에 돌아가서 '한국에서 타국인 취급을 받아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이는 순전히 그가 한국어를 못했던 탓이 크다. 본인이 적응할 생각을 안해서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오히려 팀의 많은 배려를 받아 시즌 중에도 일본을 오갈 수 있었다. 정작 김일융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당시 5천 5백만엔(당시 한화 2억원 정도)를 받았으며 차량+ 숙소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50평대의 강남 아파트가 오천만원 하던 시절이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을 훨씬 넘는 대우를 받은 셈. 오히려 삼성에서 낸 호 성적을 토대로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받았으며, 김일융은 일본을 뜨기 전보다 훨씬 더 큰 연봉을 받고 통산 116승을 거두면서 은퇴했다.

예로부터 인맥과 지연을 중시한 한국이지만 열악해서 이런저런거 가릴 사정이 아니었던 야구계는 비교적 실력 위주로 인물을 평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지역색이나 학벌의 폐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팬들이야 연고를 따졌지만 어디 팬심 따라 구단 운영하던가? 김성근도 차별 받았다고 볼 정황이 별로 없다. 실업야구 시절 김성근이 기업은행 실업팀 창단 멤버로 들어갔던 데 반해 김응용은 농협 입단이 좌절되고 한국운수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겨우 야구를 시작했다. 또한 김성근은 실업야구선수 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으며, 1970년대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 코치로 우승을 이뤄 체육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김응용은 김영덕, 김성근 등에 밀려 1977년도까지 한 번도 국가대표 감독이나 코치를 해 본 적이 없었고, 1977년 나카라과 야구 월드컵 때 감독을 해본 게 처음이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했을 때도 김영덕, 김성근OB 베어스의 감독과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당시 미국에서 연수 중이었던 김응용은 언제든 불러만 주면 갈 생각으로 짐을 쌌으나 어떤 팀에서도 연락이 없어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출범식을 할 당시 몰래 귀국해서 보고 갔다는 설이 돌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48]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83년 해태가 불미스런 일로 김동엽 감독을 해임하기 전까지는 불러주는 팀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김응용은 실향민이다. 출신지를 가지고 성골이네 진골이네 언급할 게 없다. 게다가 위에서 보이듯이 연습생 출신으로, 지도자로나 선수로서나 그렇게 차별 많이 받았다는 재일교포 출신들보다 경력이 뒤쳐졌었다.

김성근 감독과 언론의 관계를 들어서 김성근 쪽이 상대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의견도 있으나, SK 와이번스 나온 이후의 김성근 감독은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야구계 원로 대우를 충분히 받고 있는 감독이며 섣부른 비판은 언론들도 자제하고 있다. 언론에게 피해봤다고 그의 팬덤에서 주장하는 사례의 대다수는 SK 감독시절 현역 감독으로서 받은 비판이었고 그 중 태반은 내로남불식 인터뷰로 본인이 자초한 바였다.[49] 일개 야구 감독인 김성근을 정치인들도 주목하는 오피니언 리더로 만든건 분명히 언론과 그걸 제대로 이용한 김성근의 언론 플레이 능력이었다. 노리타들은 언론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감독을 데려다 놓고 언론 플레이 할 줄 모르고 묵묵히 정진하는 구도자로 포장하고 있다. 한화를 맡은 이후에는 비판 기사도 올라오고 있으나, 현역 감독으로서의 비판은 김응용 역시 한화 시절에 똑같이 받은 부분이다.

다만 한국 야구 초창기에 영구 귀국을 선택한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이 주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야구계가 워낙 열악해서 이것저것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재일교포들을 적어도 실력적으로 차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구 귀국을 선택한 재일교포 선수들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런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실력 외적인 감정적인 면에서는 차별이 존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재일교포 출신 야구선수들의 일종의 원조 격이라고 볼 수 있는 김영덕 감독의 경우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김영덕 감독이 한국에서 야구선수나 지도자로서 직접적인 차별을 받은 정황은 없고 실제로 본인 또한 "실력적인 면에서는 차별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꾸준히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야구가 좋아 한국으로 와보니 여기선 ‘반쪽바리’라고 외면을 당했죠. (김)성근이나 나나 ‘무조건 실력으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질게 야구만 했어요." 라고 언급하는 등, 실력 외적인 면에서의 차별이 존재했다는 발언 또한 한 적이 있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김성근이든 김응용이든 누가 아웃사이더고 성골이고 논할 건 없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한쪽은 재일교포, 한쪽은 실향민 출신이므로 양쪽 모두 비주류 출신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4. 둘은 라이벌인가?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는 말. 하지만 승자는 김응용

국내 통산 승수 1위 감독 김응용과 통산 승수 2위의 김성근을 두고 언론에서는 둘에 대해 라이벌 기믹을 붙여 잘 이용했었다. 하지만 두 감독은 서로를 라이벌로 보는 것에 대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뜻이 뭐야? 뭐냐구? 서로 이기고 지는 사이 아냐? 나는 김성근 감독한테 한 번도 지지 않았어. 내가 현역으로 있을 때 김성근 감독이 우승한 적 있어? 그런데 무슨 라이벌이야. 지난번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나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편집해서 내보내지 않지 뭐야.
"내가 그 놈한테 진 적이 없는데 라이벌은 무슨 "

실제 스포츠 한국에서 김응용이 직접 한 말이었다. 실제로 김성근은 포스트시즌에서 김응용을 만나 단 1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김성근 역시 김응용의 라이벌이란 말을 탐탁찮게 여긴다. 오히려 해태 시절 김응용에게 열등감과 질투가 가득했으며, 라이벌 관계에 대한 질문에 '맨날 지기만 했는데 무슨 라이벌이냐'며 인하대 강연에서 밝힌 바 있다. 각각 원년과 이듬해에 프로야구 판에 뛰어들어 통산 1위와 2위의 경력을 올린 명장들이지만 서로에 대한 관계에 대해 라이벌이니 뭐니 하는것은 당사자가 아닌 기자와 야구팬들만의 생각인 듯하다.

2000년대 중반 야구 열기가 뜨거워진 시기(올림픽 이후)와 맞물려 SK 왕조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야신의 이미지를 얻은 김성근 감독의 평가가 높긴 하나 경력상으로는 V10을 이룬 김응용 감독과 라이벌로 놓기에 조금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제반 환경의 차이나 쌍방울의 기적 등을 고려하면 김성근 감독과 비견할 만한 감독은 김영덕 감독이지 우승횟수에서 세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김응용 감독이 아니다.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 감독보다 우승횟수가 하나 모자라지만 프리미엄으로 칠 만한 원년 우승을 이뤘으며 두 명밖에 없는 소속을 바꿔가며 팀을 우승시킨 감독 중 하나, 유일하게 한국시리즈를 없애버린 통합 우승을 달성했고, 또 유일하게 팀 승률 7할을 두 번 달성한 감독이다. 또한 쌍방울 못지 않게 최하위권에서 놀던 빙그레 이글스를 굴지의 강팀으로 환골탈태시킨 업적이 있다. 쌍방울이 2년간 반짝했다가 모기업 쌍방울의 부도 여파로 인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축 선수들을 팔아치운 끝에 순식간에 하위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해체를 하고 만 것과는 달리 김영덕 감독이 강팀으로 탈바꿈시킨 빙그레는 수 년간 최상위권의 전력을 유지하며 한국시리즈에 4번 진출했고, 이러한 성과가 축적되어[50] 1999년의 우승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현역 시절만 봐도 김성근은 일본프로야구팀에 입단하지도 못하고 한국에 와서 실업야구에서만 활약하다가 혹사로 일찍 은퇴했지만 김영덕은 5~60년대 당시 퍼시픽리그를 씹어먹던 엄청난 강팀 난카이 호크스에서 데뷔해 활약하다가 한국에 와서 실업야구에서 대활약한 바 있다.

애초에 전년도 4위 팀에다가 연고지 팜은 신흥지역일 뿐 결코 최강이 아니던 1983년의 해태가, 조범현 감독이 리빌딩을 거의 끝내 놓았고 두 해 전에 3위까지 찍었던 2007년의 SK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감독직을 맡은 이후 구단 지원을 보면 더 큰 차이가 나는데, 해태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짠돌이 프런트였다. 그러나 SK는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 잡아달라는 선수 다 잡아주고 선수단 연봉 아쉽지 않게 주었던 최고의 개념 프런트였다. 이런 상황에 무슨 비교가 성립하는가? 영 좋지 않은 팀을 맡아서 최악의 프런트를 등에 업고도 말년을 제외하곤 구단과 이렇다할 갈등 없이 20년을 재임하며 전설의 9회 우승을 일궈낸 사령탑과 리빌딩은 거의 끝난 상태고 프런트는 최고의 개념 프런트였던 팀을 맡아서 5년만에 최악의 방식으로 구단과 결별한 사령탑이 비교나 되는가? 그래도 당시 주요 커뮤니티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현 시대에 가장 앞서나가는 명장 중 하나로 꼽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으나 김응용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이었다. 역시나 우승 10회의 커리어에 범접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세였다.

그래도 주변에서 보기에 이런 소리가 나오고 이렇게 장문의 항목까지 생겼다는 시점에서, 둘은 서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정도 라이벌 관계인 것은 맞다. 애초에 프로스포츠라는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이고, 어느 정도 스토리성도 가미되기 마련인데 통산 다승 1위와 2위가 라이벌 관계로 묶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적이 차이가 나거나 본인들이 원하지 않지만 라이벌 관계로 묶이는 경우는, 굳이 이 둘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다.

좀 더 후대의 선수들이지만 류현진과 김광현도 사실 실적은 류현진이 압도적이고 사석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이지만 1인자 류현진에 그나마 비교할 만한 성적이라도 내는 것은 김광현 뿐이었기 때문에 한때 라이벌로 묶였었고, 다른 분야에서는 그 유명한 축구의 1인자 메시와, 메시에 비해 명백히 커리어가 떨어지지만 메시에 이은 시대의 2인자로서 누구나 라이벌로 인정하는 호날두 간의 메호대전, 1인자 조훈현에게 약 7:3정도로 밀렸음에도 동시대에 조훈현과 그나마 승부가 되는 기사가 그 밖에 없었기 때문에[51] 자연스레 라이벌로 묶였던 서봉수나, 다들 알 법한 스타크래프트임요환홍진호 등등 원래 1인자와 2인자는 자연스럽게 라이벌로 묶이기 마련이다. 본인들이 원하던 그렇지 않던. 프로야구는 감독과 선수들도 있지만 기자와 팬들, 호사가들도 함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은 단연코 김응용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김성근도 다승 2위의 실적이 있고 KBO의 단 둘뿐인 통산 1천승 돌파 감독[52]으로서 김응용의 명성과 실력에 그나마 비벼볼 만한 유일한 2인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은 결과가 이 라이벌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비벼볼 껀덕지도 없으면 논란도 안 생긴다.

2.5. 2010년대 이후의 평가

두 감독의 VS놀이는 2013년 4월부터 재점화된 감이 있다. 김응용이 지휘봉을 맡은 한화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과 전년도에 비해 더 하락한 수비기량, 그리고 경기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조급증을 드러내 연패를 기록하자 김응용에 대한 평가는 곤두박질쳤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야구 팬덤에서는 그 전까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던 김응용과 김성근의 비교가 시작되었고 주요한 논쟁으로 자리했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체로 김응용 감독의 우위라고 결정나 있던 평가가 이토록 순식간에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 것은 김응용 감독이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있지만, 야구를 지켜보던 팬들이 전력이 약한 팀을 끌어모으고 추스려서 우승권에 올려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해버린 것도 크다. 김성근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약체팀을 끌어올리는 기적은 감독의 엄청난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김응용은 이 상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V10은 결코 실력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이제는 'V10은 결코 실력만으로 이룰 수 없다'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양측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김응용 감독측이 "우승 10회 무시마라"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그럼 우리나라 명장 넘버 2는 우승 4회 김재박 '[53], '백골퍼도 개막 13연패는 안했음'을 들고나와 우승 = 명장론을 부정하고, 김응용 감독측이 '2팀에서 모두 우승했음. 까불지마'를 들고 나오면 김성근 감독측은 '호남팜 해태[54]나 100억 지른 삼성이면 내가 가도 우승 200억 들인 한화 가을 들고 나오며 댓글양상을 격화시켰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되고, 2015시즌 초중반까지는 5위에 자리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우위가 굳혀지나 싶었지만, 후반이 되어 어마어마한 혹사의 여파가 드러나면서 하위권으로 추락하자 평가가 다시 뒤바뀌었다. 김응용은 최소한 한화 이글스 감독이 되어 자신의 과거까지 대차게 먹칠하지는 않았지만, 김성근 감독은 한화 이글스 감독 경력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까지 상당부분 먹칠당했다. 여러 구설수 속에, 과거에 했던 발언이 발굴되면서 내로남불의 대명사가 되었고, SK 왕조의 혹사는 물론 그 전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고양 원더스의 현실까지 팬들에게 인식 시켰다.

한편 진흙탕이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으로 일단 김응용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55], 김성근에게 호의적인 대표적 팬덤이 SSG 랜더스[56]LG 트윈스다.[57] 이 넷이 얽힌 것만 해도 이미 레알 헬게이트인데 여기에 더해 한화 이글스롯데 자이언츠의 팬들도 두 감독들과 이런저런 인연 내지 악연으로 얽혀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구단의 팬들이 다들 한 가지 분야쯤에서는 시대를 풍미했던 전력이 있는 팬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다.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점에서는 LG 팬들은 관심이 떨어졌거나 등을 돌렸고 SK 팬들도 이것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이지 않으며 기존 한화의 팬들은 분열되어 김성근 지지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소위 노리타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강성팬덤이 여러 모로 김성근 감독과 원수가 된 롯데 자이언츠 팬덤, 김응룡을 강력히 지지하는 기아 타이거즈, 그리고 이 둘 다에 해당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덤을 상대로 장판파를 시전하는 수준이다. 여기에 까를 위한 까를 시전하는 악성 어그로까지 끼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꿋꿋하게 [58] 무쌍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노리타의 위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16년. 상향평준화되어 4월 말 기준 8개팀이 나름 대동소이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하다못해 최하위 후보 기아도 나름 선전하는 가운데, 한화만이 홀로 꼴찌로 처지면서 김응용에게 무게추가 확 기우는 모양새다. 김응용 감독이 그래도 '노장을 내주고 유망주를 받아오는 트레이드', '자기 사비를 털어 유망주들에게 식사 및 훈련장소 제공', '젋은 선수 위주의 라인업 구성', '안-정-진으로 이어지는 필승조구축' 등의 공이 언급되면서 무능했지만 그래도 없는 살림에 체질개선을 시도한 감독, 선수 보는 눈만은 살아있던 감독의 평가를 어렵지 않게 볼수 있는 반면[59], 김성근 감독의 경우에는 속칭 '쉴드'의 화력이 확 줄었다. 탈꼴찌, 5강싸움 등으로 '어느정도의 혹사는 어쩔 수 없다'라고 평하던 한화팬들조차 김성근에게서 돌아서는 모양새. 전반기가 마무리되고 극적으로 7위로 상승하면서 비난 여론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였으나 정우람의 부진, 지친기색을 보이기 시작하는 베테랑, 결정적으로 8월 첫째 주중 기아와의 3연전에서 1, 3경기를 모두 역전패하면서 다시 비난 여론에 불이 붙고 있다.

유망주 김민우의 부상,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나게 굴려댄 권혁송창식의 부상재활 중이던 전병두의 은퇴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언론과 팬 모두에게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중이다. 언론에선 매일같이 강도높은 저격성 기사를 마구 뿌려대고 있으며 팬들의 반응은 험악 그 자체. 흔히 볼 수 있었던 '9개구단은 종신감독을 기원합니다' 같은 조롱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2.6. 야구 외적 차이

김응용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프런트 와의 관계를 비교한 샤브샤브뉴스 기사
2015년 10월 07일 샤브샤브뉴스 '김성근 감독, "원 없이 돈 써봤다"던 강만수의 데자뷰'
이후 LG 트윈스에서도 김응용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에 맞서 6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연출한 2002년 한국시리즈를 뒤로 한 채 “이건 김성근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감독의 후임은 1980년대 후반 OB 베어스와 마찬가지로 이광환 감독이었다.

이렇듯 김 감독은 가는 팀마다 프런트와의 마찰이 있었다. 이것은 김 감독에게 독이었지만 한편으로 득이기도 했다. 야구팬들은 야구단 프런트를 기득권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김 감독의 열성팬들은 이런 경향이 욱 강하다. 김 감독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강자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원칙을 지키는 소신파로 이미지화되었고, 열성팬들은 이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프런트는 강자, 감독은 약자?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프런트의 횡포로 인한 사건이 빈번하다. 바로 지난해에는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에서 호텔 CCTV 자료를 입수해 선수 사생활을 사찰한 것이 발각됐다. 어떤 구단에서는 고관절 수술을 한 프랜차이즈 선수에게 각서를 요구하다가 그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함으로써, 팬들의 분노를 유발한 일도 있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프런트란 감독과 정치 게임을 하며 선수단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프런트의 현실도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 야구단은 재벌그룹 내 대표적인 적자 발생 집단이며, 애초부터 수익 발생을 기대할 수 없는 집단이다. 야구단 운영비용은 광고나 홍보 등을 매개로 그룹 내 계열사들의 수익 배분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야구단의 사장과 단장은 그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다. 야구단의 운영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장이 그룹 사장단 회의[60]에서 아쉬운 소리도 하고 하소연도 해야 만들어진다.

김 감독은 일본인 코치를 대거 영입하기로 유명하다. 올해 한화 이글스에서도 1군과 2군을 통틀어 총 5명의 일본인 코치를 두고 있다. 일본인 코치 영입비용도 돈이다. 전원을 대동하고 훈련을 했으니 더 많은 훈련비용이 발생한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런트와의 갈등 원인은 비시즌 훈련수당이었다.

그래서 “FA 한 명도 잡지 않았다”는 그의 항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진영은 FA로 LG 트윈스로 이적했지만, 조웅천·이호준·박경완·김재현·박재홍 등 김 감독이 재임했던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내부 FA 선수는 비교적 잘 붙잡아뒀다. 특히 이호준에게는 4년 동안 34억 원을 보장하는 큰손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김 감독이 말하는 FA는 외부 FA를 말한다. 실제로 SK 와이번스는 김 감독 재임 당시 외부 FA를 영입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FA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준척급은 대략 4년간 20억 원 내외, 특급은 30억 원에서 40억 원 사이의 비용이 발생했다. 선수 1명 영입에만 발생하는 비용이다. 여기에 영입 선수의 원소속 구단에 지급해야 하는 보상금과 보상 선수까지 출혈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그 돈은 어디서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구단 경영진이 그룹 상층부나 사장단 회의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개 프로야구팀 감독들은 구단에 내부 FA 단속은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만, 외부 FA를 영입해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기 힘들어한다.

기업이 구단에 제공하는 그 돈은 기업의 뼈대를 이루는 직원들이 곳곳에서 힘들게 생산하고 영업해서 만들어진 수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김 감독은 자신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구단이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김 감독의 해임 과정에서 오갔던 이런저런 논란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런 불만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김 감독의 시즌 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간다. 김 감독이 이런 부분은 고려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어느 ‘짠돌이 구단’의 프런트와 감독

김응용 감독이 왕조를 구축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당시에도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이었다. 김응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봉은 짜기 이를 데 없어 매년 봄이면 선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명절 보너스는 종합과자 선물세트였다.

프런트가 하는 일은 혹시 선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구단이 있으면 “왜 그런 걸 지급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느냐”는 항의전화를 거는 일이었다고 한다. 김 감독 본인부터도 연봉이 적어서 “계약금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연봉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가 선동열·이종범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시켰을 때와 본인 자신도 삼성 라이온즈 이적이 확정된 1990년대 후반 외에는 구단과 마찰을 빚은 바 없었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이적 자체도 삼성과 해태의 사전 협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김응용 감독이 구단의 허수아비에 머무른 것도 아니다. 금전적으로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응용 감독은 프런트와 비교적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어떤 차이일까?

이런 스타일 때문일지는 몰라도, 김응용 감독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으로 활약했다. 야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당시 감독이던 선동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도 없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 스스로는 사장 역할을 “단장과 감독의 방패막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삼성 왕조가 결국 완성되었으나 삼성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과 농구단을 꼴아박은 것으로 악명높은 안현호가 단장으로 오면서 거하게 말아쳐먹었다.

2.7. 한화 감독으로서

2.7.1. 김응용 우위론

두 사람 모두 말년에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 되었고 둘 다 총체적 난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래봐야 옛날 야구하는 감독들이라는 평가가 나오게 되었다.

우선 김응용 감독은 기본적으로 선수층 자체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했지만 신생팀인 NC 다이노스보다 2년 연속 순위가 더 낮았다.

심지어 일부는 2014년 이른바 삼미 슈퍼스타즈의 평균자책점 기록을 깼다는 점에서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감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타고투저라는 개념을 무시한 것이다. 조정 평균자책점과 같은 기록이 왜 생겨났는지 생각해보자.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의 리그 평균 자책점은 3.89점이었고, 2014년의 리그 평균자책점은 5.22점으로 유일한 5점대 리그 평균자책점이며 독보적인 역대 1위이다. 팀 평균 자책점 1위였던 NC 다이노스가 4.30점으로 1982년의 평균에도 못 미친다. 이런 방식으로 따진다면 2014년 시즌의 어느 팀도 6668587667, 그중에서도 8위를 찍었던 2006년도의 LG 트윈스보다 강한 팀은 없다[61] 2006년 8위를 찍었던 LG 트윈스의 팀 평균 자책점은 4.22로 2014년 1위였던 NC 다이노스 보다 0.08점 가량이 낮다. 순위만 놓고보면 2014년에도 2015년에도 한화의 팀 평균 자책점은 9위다.

거기다 2년차에 보여준 이용규 당겨쓰기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무리한 이태양 운용이라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태양이 버두치 리스트를 넘긴 것은 사실이나 김응용 감독은 이태양의 등판 간격은 확실히 지켜줬다. 이를 혹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금 무리하게 운용했다 정도가 맞다고 해야한다. 이 정도 무리한 운용은 혹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한국 야구계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김성근 감독 하에서 투구폼을 개조하기 위해 무리한 연습투구를 한 것이 비극을 키웠다. 2월부터 폼개조한다고 1000구씩 던지게 했다.기사 또한 김성근 감독의 극성팬들의 주장대로 김응용 감독의 운용이 이태양의 부상을 태동시켰다 하더라도 김성근 감독은 부상위험이 있는 선수를 무리하게 훈련시킨 감독이 되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태양의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외 김응용 감독이 투수를 지나치게 혹사하여 최악의 감독[62]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라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게다가 김응용은 선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화 선수단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던 류현진이 떠난 뒤[63] 투수진은 사실상 붕괴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2014시즌에 구단이 잡아준 FA는 이용규정근우였다. 물론 둘 다 특급으로써 제몫을 다했지만 한화 타선의 위력을 좀 더 강화시켜주는 수준에 그쳤고 정작 필요한 투수는 사 주지 않았다. 당시 FA에 선발 투수 매물이 없었다고는 하나, 적당한 중간 계투 요원이라도 사 줬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 결과가 사상 최악의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42승을 49승으로 올리고 KIA와 막판까지 9위 다툼을 한 정도였다.

게다가 김성근 감독은 SK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내상을 남기고 떠났다. 다른 팀에 비해서 선수층이 깊다 보니 그 피해가 덜했을 뿐이다. 물론 그게 바로 터진 것은 아니라 2012시즌까지는 한국시리즈도 연속으로 진출하는 등 강팀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2013시즌 6위로 추락함으로써 결국 한계가 드러났고 2014~2015시즌 연속으로 5위 다툼을 하면서(2014시즌에는 성공) 김성근 이전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김성근이 굴린 선수들 가운데 선발투수인 김광현, 역대급 내구성과 유연함의 소유자인 정우람과 어지간히 굴려도 그렇게 심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 야수들 정도를 제외하면 투수진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다. 비슷하지만 혹사가 약간은 덜한 감독으로 꼽히는 김경문 감독의 두산 시절에 대해서도 김진욱 재평가론 때문에 과도할 정도의 비난이 한때 가해졌던 것에 비하면 2015년 이전까지 김성근 감독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스탯티즈에서 SK의 연도별 투수진 스탯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김성근 마지막 해인 11시즌부터 이미 SK의 투수력은 평범해졌다. 2015년 9월 이후 이 논쟁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2.7.2. 김성근 우위론

꼴찌에서 허덕일때도 응원하던 골수팬들과 충청 대전지역의 라이트팬들의 반응은 인터넷보다 확실히 김성근에 호의적이다. 한화는 올해 홈경기 매진을 이끌면서 김성근을 비판하는 기자들까지 KBO 흥행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고 있다. 디시인사이드 한화 갤러리만 바도 김성근을 김응용과 같은 급이라 하는 글들은 베스트에 오른 글들 중에 찾아보기 힘들다. 한 마디로 한화팬의 여론에 대해 아무런 통계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사실처럼 서술하고 있다. 시즌이 끝난 이후 김성근 해임설이나 한화팬들에 이에 대한 요구조차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성근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건 사실이지만 한화팬들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은 가치판단 문제가 아니라 사실 왜곡이다.

먼저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못 받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용규, 정근우라는 FA 거물들을 데려와놓고 구단 지원이 없다면 도대체 뭐가 구단 지원일까? 투수를 사주지 않았다 그러는데 이건 당시 한화 구단이 지원을 안해서라기 보다는 마땅한 거물급 투수 매물이 2014 스토브 리그때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 영입때 김응용의 의사가 단 하나도 반영 안됐을거라는 부터가 편향적 서술. 한화는 비로소 김성근때 투수를 보강했는데 이 셋(권혁, 배영수, 송은범)은 액수로만 봐도 거물급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한물 간 투수들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권혁 정도를 제외하면 기대에 못 미쳤고 이들의 FA 총액은 윤석민 한 명의 총액, 장원준 한 명의 총액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왜곡. 물론 김성근이 더 많이 받았고 후반기 마운드가 붕괴 될때쯤 로저스라는 KBO 사상 가장 비싸고 강력한 외국인 선수를 지원받은건 사실이지만 김응용 시절에도 류현진의 이탈은 뼈아프지만 여론이나 선수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구단에서 막을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용규 정근우 두 특급 FA를 지원받았기 때문에 지원이 없었다는건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김응용이 그렇다고 리빌딩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다. 한화는 2015년에야 나온 김민우 정도를 제외하면 김응용 재임기간동안 별다른 뉴페이스가 발굴된 적은 없다. 이태양이 있긴했지만 다들 아는대로. 승률에 있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첫 해야 류현진과 박찬호가 떠난 상태라 그렇다 쳐도 두번째 부임해까지 3할대 승률을 찍은건 별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혹사에 있어서 김성근이 넘사벽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김응용이 선수 관리를 잘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이 시기 부상선수 당겨쓰기에 투수 혹사가 합쳐진 결과 2014년 시즌이 끝났을 무렵 부상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말았다.

성적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2015년 김성근은 아직 재임 1년 차이고 말 그래도 혹사 논란 때문에 내년을 지켜봐야 겠지만 4할 7푼의 승률을 찍었다. 전년도 대비 거의 1할에 가까운 성적 향상이 있었다. 2014 후반기 기아와 8위 경쟁을 했다는건 잠깐 이었고 4게임차 꼴찌라는 최종 결과를 보면 경쟁이라 하기도 민망한 압도적 꼴찌였다. 두 시즌 연속 50승도 못한 마당에 후반기 전련을 일궈놨다고 하는 것은 더욱 자의적 서술. 팀의 전후반기 성적은 여러가지 요소가 있으며 후반기에 잘했으니 무려 다음 시즌 전반기에 그 흐름을 탈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KT 때문에 그렇지 않냐고 하는데 6위라는 성적이 말해주듯 전년도 8위와 4게임 차 꼴찌였던 것에 비하면 김성근이 가을야구를 노릴 정도로 팀을 선전시킨 것은 맞다. 더군다나 KT의 승률은 전년도 한화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다. 2013년은 KT 보다도 훨씬 성적이 떨어져서 3할 초반이었다. 그 자신이 KT의 성적을 찍은 감독과 3년 연속 꼴찌한 팀을 나름 가을 야구 경쟁을 했던 감독을 성적을 가지고 비교하는건 어불성설이다.

일각에서는 피타고리안 승률을 이야기하며 김성근이 운영을 잘해서 라곤 하는데 피타고리안 승률은 총득실차이를 단순하게 승률로 계산한것이라 경기 운영이랑 별 상관이 없다. 그건 김성근, 김응용, 아니 모든 감독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논점일탈. 연봉 순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2014 김응용의 한화는 연봉 총액이 하위권이 아니었다. 타자진은 2위였고 전체 연봉을 합해도 상위권이었다. 김성근의 피타고리안 승률은 언제나 실제 승률보다 낮은 경향을 띄는데, 이걸 가지고 감독 WAR이니 뭐니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도를 벗어난 불펜 혹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김성근의 비인간적인 혹사 때문에 김성근이 머무른 팀의 불펜은 후반기에 되면 모든 불펜의 성적이 다 함께 쳐지는 경향이 있는데, 피타고리안 승률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투타 엇박자다. 정도를 벗어난 혹사로 막바지에 투수진이 단체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면서 투타간의 엇박자가 일어나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투타 엇박자는 그냥 운으로 보지만 이 인간의 경우에는 그걸 운으로 치부할 수가 없다. 또, 승리에 크게 기여한 불펜도 이러한 후반기에 집중타를 맞고 가비지 이닝을 소화하면서 WAR이 깎여 나가 피타고리안 승률이 떨어지는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2015년 그렇게 개처럼 구른 권혁의 WAR은 0.08이다. 완전히 혹사당하고 가비지 이닝을 처리하러 올라와 7실점 하는 등, 혹사 당한 후에 WAR이 엄청나게 깎여 나가서 1득점=1실점이라는 피타고리안 스케일이 잘 맞지 않게 된다.

또한 김성근은 한화팬들이 김응용 시절 치를 떨어했던 팀에대한 무관심을 적극적인 훈련으로 위로해줬다. 2군 훈련장에 코빼기도 보이지않고 드라마 드립이나 쳐대다가 은퇴하고선 타이거즈 먹칠드립을 치는데 그어떤 한화팬이 김응용에게 애정을 보이겠는가. 완벽한 김응용 옹호자의 헛소리. 하지만 김성근은 2군에서 올린 보고서조차 무시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는 기사가 뜨면서 이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 드러나며 이것도 김응용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요악하자면 적어도 2015 시즌만 놓고보면 김성근의 한화는 김응용의 한화보다는 성적면에서 분명 향상되었다. 물론 혹사 문제가 있기에 과연 투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년을 봐야겠지만 그건 김성근이 김응용 처럼 2년을 채운 이후에 평가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16 시즌 종료가 막바지에 다다른 현재. 송창식 권혁은 결국 부상으로 시즌 중 이탈했다. 5위 기아의 남은경기 전패라는 전제하에 트래직 넘버는 -2. 이 싵낱같은 가능성 때문에 장민재는 3일휴식 후 선발등판했으며 심수창은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고 있다. 이제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김성근 야구는 틀린야구 이며 김성근의 우위란건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2016년 한화는 처참히 망했고, 2017년 시즌에도 나아진 게 없자, 결국 한화는 김성근을 경질하게 됨으로서, 이 지긋지긋한 악연 조차 끝이 나면서, 김성근의 판정패가 되었다.
2.7.2.1. 김성근 우위론에 대한 반론
우선 해당 서술에서 한화팬의 여론과 위키 서술이 거리가 멀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살려조를 비롯해 김성근 감독을 비판하는 서술들은 삭제되거나 그 표현이 엄청나게 온건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은 오히려 과격해지는 추세고 여기에 심지어 종신감독 드립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건 김성근이 김응용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방증이다. 물론 김성근 해임설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이건 김응용도 마찬가지였다. 2년 임기는 지켜주자는 게 대세였다. 2016년에 들어서는 관중석에 감독나가라는 플래카드도 걸리기 시작했다.

김응용이 구단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이용규정근우가 탑클래스급 FA인 것도 사실이다. 일부 김응용 옹호자들은 투수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당시엔 괜찮은 투수매물이 없었고 가뜩이나 FA영입을 안하기로 소문난 한화입장에서 정근우 이용규영입은 구단 역사상 전례가없는 지원인것. 하지만 코치진과 프런트까지 자기사람으로 쓰고 600억을 들여 모든 구단중에 페이1위를 자랑하는 김성근의 2016년만 할까?

김응용은 살려조 등의 극심한 혹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송창식 70이닝[64][65] 등 혹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성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김응용은 퍼지면 쉬게 했고, 김성근은 누가 봐도 확연히 퍼진 선수를 마른 수건 쥐어짜듯 더 갈아댔다. 김성근 체제 하에서 살려조 5인방 중에 윤규진은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고[66] 나머지 4인방도 이전의 선례를 보면 2016시즌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67] 김응용이 이렇게 많은 투수를 한꺼번에 소진시켰던가? 물론 그렇기에 김응용이 9위를 기록했다면 할말은 없지만 미래와 맞바꾼 6위가 서정환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와 얼마나 다른가? 또한 타자 연봉 2위라는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 이용규, 정근우, 김태균 등 몇몇 특급 선수와 나머지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 명은 모두 제몫을 해줬지만 나머지가 못한다면 큰 의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일단 김성근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타자 2위라는게 악의적인 왜곡인데 실제 총연봉액수를 비교하면 2014년 김응용에 비해 2015년 김성근은 무려 팀연봉 20억원이 올랐다(용병 제외). 전체 연봉을 비교하지 않고 계약금이 연봉에 포함된 국내최고연봉 김태균이 있는 타자 연봉만 딱 떼서 2위였다고 우기는건 누가봐도 시합당 1억 단기알바 로저스 등 초고액 용병진을 빼고도 전년도 비해 총액 20억이나 상승한 선수단을 가지고 가을야구조차 가지 못한 김성근을 실드치기 위한 물타기이다.

작년 한화 타선은 KIA 타이거즈 타선 같이 아예 타선이 팀을 끌어내리는[68]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팀을 끌어가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저 중위권 수준이다. 투수진이 바닥인 상황에서 타선이 중위권이라면 점수는 내도 결국 패하게 된다. 단, 중위권인 이유는 결국 용병타자와의 불화에 있는데, 불화의 중심에 또 그분이 계신다. 또한 김응용이 받은 2013 한화는 전년도 꼴지팀에 류현진 박찬호 양훈이라는 토종선발 3명이 빠져나간 팀이었다. 당해는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고 2014년도에 정근우와 반쪽짜리 이용규를 받았는데 저 두명 합쳐도 선발 3명은 고사하고 류현진 한명 구멍 메꾸는데도 부족한 지원이다.

2014년도 한화와 포스트시즌 커트라인인 4위와의 최종 승차는 13경기였다. 2015년은 10.5경기차이다. 이중 단기알바 로저스가 올려준 6승을 제외하면 실제 작년보다 나아진게 하나도 없다. 올해 9위 LG가 4위와 14경기 차이이다. kt가 들어오고 총시합수가 늘어나 각팀별로 승률과 승수가 늘었을뿐이지 4위와 9위의 차이는 작년과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심지어 9위인 LG마저도 이런 요인으로 인해 60승을 돌파했다. 김성근이 잘나서가 아니라 9위도 60승을 돌파하는 시즌이었다는 얘기다. 로저스가 없었으면 전년도에 비해 코치진 전면교체, 원하는 선수수급, 단장 및 사장 교체 등등 프런트가 해줄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4위와의 승차를 줄이기는 커녕 LG보다도 순위가 밑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로저스가 없었더라도 그가 거둔 6승을 전패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로저스가 등판했던 경기들은 대부분 완투경기여서 불펜을 아낄수 있었기에 실제 그런 요소까지 따져보면 6승만 잡아주는건 오히려 낮게 쳐주는 꼴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더 일찍 불펜들이 퍼져서 더욱 처참할 성적을 거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2017년. 결국 한화 이글스의 구단주인 김승연이 투자를 그렇게 해줬음에도 성적이 갈수록 곤두박질 치는 것에 대해 대노했다는 썰까지 들려오고, 결국 단장을 박종훈으로 교체시켰다. 그리고,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김성근 감독은 SK 때 보다 더 안 좋게 경질되었다.

3. 종합


2023년 현 시점에서의 평가를 종합하자면 김응용은 한화 시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해태, 삼성 시절의 업적으로 여전히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지만, 김성근은 스타일이 현대야구와 맞지 않는 면이 있으나 시대상을 감안하면 감독 커리어 전체는 인정받을지언정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만큼은 역대급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김응용 다음가는 누적 승수를 쌓고 3위와도 그 차이를 크게 벌려놓는 등 압도적 누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KBO의 역대급 명장 라인업에서는 대체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편이다.[78]

김응용 감독이 비록 한화에서의 2년간은 프로야구계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단 소리를 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징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달성한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임은 현재까지 유효한 평가이다. 해태 시절 강영식, 한화 시절 이태양 등 선수들을 자기 사비로 먹이고 재우며 훈련까지 시켜 준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고, 강연 요청이 들어올 때 거절하고 대신 자신의 제자를 보냈다거나[79] 프로야구 감독직을 완전히 그만 둔 이후에는 사비를 탈탈 털어 유소년야구를 후원하는 등 파면 팔 수록 감춰져 있던 미담들이 계속 나오며 통산 커리어에 걸맞는 야구계 큰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김성근 감독의 경우 한화에서의 폭망과 함께 온갖 구설수가 쏟아지고 기존의 포장된 이미지가 허상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야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vs 놀이 자체가 김응용 감독에게 모욕과도 같은 상황. 사비를 털어 유망주를 키우려 노력하고, 유소년과 사회인 선수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비를 쏟아 야구장을 짓는 코끼리 김응용과 독재자처럼 군림하며 자서전이나 강연등에서 내 뱉었던 말을 몸소 부정하는 일구이언 김성근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선발 투수 위주 투수 기용을 깨고 벌떼야구를 시도하였으며 승리지상주의 윈나우 야구로 약팀을 맡아 자주 호성적을 낸 김성근이 능력적으로는 한국시리즈를 10회 우승시키고 매니징을 도입한 김응용과 능력적으로는 비견이 가능하나, 총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깊이는 비견이 힘들다는 것이다. 2016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가 종료되고 한화가 연 102억을 받고도 7위를 찍으며 이 VS놀이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평이 많다.

오히려 성격적인 면에서는 비슷한 연배에 똑같이 고집불통 성향이 강한 백인천 역시 비견 대상이 될 수 있다. 백인천의 경우 NPB에서 오랫동안 주전으로 뛰며 한국 최고의 NPB 전문가로 일본 야구에 김성근 이상으로 잔뼈가 굵으며 KBO 유일무이 4할을 치는 등 한국 야구 역대 최고의 원로 중 하나로 꼽히나, 그것과는 별개로 개인적 성격은 김성근과 비슷하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뚝심이 있는 불같은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 백인천이 롯데에서 8888577 비밀번호와 꼴데라는 별명을 창시하는 등 리그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남아버려서 그렇지 LG에서는 우승도 시켰고[80], 삼성에서는 김성근이 야기한 비밀번호도 끊고 선수들도 여럿 키우고 발굴하는 등 성공적인 리빌딩을 수행해냈다. 사실 백인천도 롯데 시절이 너무 악명높아서 그렇지, 제 본분을 망각하고 태업을 저질러 아예 다른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논외인 롯데 시절을 제외하면 백인천은 되려 명장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며, 현대야구적 관점에서는 되려 김성근보다 백인천 쪽이 더욱 효율적이고 유능한 운영을 했다고 평가된다.[81]

이 와중에 '야신 이야기는 승자가 패자를 감싸는 차원에서 했다'는 김응용의 인터뷰가 나왔다. 꼴지 팀을 그 정도 올려준 건 잘했다고 했지만 김응용이 보기에도 어지간히 불만족스러운 듯. 팀도 아니라느니 선수가 없다느니 핑계를 대는 김성근에게 보낸 발언을 첨부한다.
사실대로, 느낀대로 얘기한건데 뭐. 다만, 나라면 그렇게 얘기 못했을 것 같아요. 자기 팀 이야기는 될 수 있으면 외부에 노출하면 안 되지. 선수 사기 문제도 있으니 배려를 해야지. 선수들이 '그러면 우린 뭐냐'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웃음) 현역시절에 나는 팀이 약할수록 강하다고 했고, 우승 자신이 있으면 엄살을 피웠지. 우승 어렵다고. (웃음)

이후 김성근이 조범현 감독의 SK 시절 강훈련으로 선수들이 다같이 지옥훈련을 견딜 몸이 만들어졌는데 한화는 그렇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김응용을 저격하여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감독시절을 제외한 행정가로써의 평가를 보아도 격차가 있는 편. 김응용은 한국야구소프트볼협회장으로 욕을 많이 먹었으나, 김성근 역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프런트로도 그리 뚜렷한 공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거기다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써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심지어는 상술한바와 같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평가되어온 한국야구소프트볼협회장 시절의 김응용 역시 파벌 싸움 없이 협회를 이끌어 갔다는 점, 아마선수에 대한 이닝 및 투구수 제한 규정의 확대로 인한 혹사야구 타파, 실업야구리그 출범 등의 공적도 세운 바가 있다.

결론적으로 김성근과 김응용의 경우 감독으로써의 능력적인 면에서는 관점에 따라 갈릴 수 있으나, 커리어, 현대야구적 관점에서의 스타일, 현장 밖에서의 행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김응용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82] 특히나 이 둘 모두 현재 80대의 노령이며, 시대가 흐를수록 이러한 구시대적인 유산들이 많이 사라져가는 추세이기에, 이 평가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러모로 메호대전과 유사성을 보이는데, 경쟁 구도가 생길 초창기까지만 해도 메시와 김응용의 압도 우위였으나 호날두와 김성근이 치고 올라왔다는 점, 이후 잠시동안 vs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호날두와 김성근 쪽의 자폭과 개인적 논란, 누적 커리어의 차이로 인하여 경쟁 구도와 여론이 메시와 김응용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 유사하다. 마침 호날두와 김성근 역시 스포츠인으로써의 마인드와 워크 에식은 역대급을 논하는 수준이나 반대로 한 명의 인간으로써는 논란이 존재하며, 사건사고를 일으켜 대한민국에서 한때 극소수의 골수 지지층을 제외하면 모두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유사하다. 물론 2010년대 중반 메시와 어느 정도 비빌 수 있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생겼던 호날두와는 달리 김성근같은 경우 전성기였던 SK 시절에도 한국 야구 역사에 남을 명장은 맞을지언정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차지한 김응용을 더 지지하는 여론 역시 상당히 강했다.

4. 관련 문서


[1]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년 간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은 경력이 있다.[2] 1987 PO (해태 VS OB), 1989 PO(해태 VS 태평양), 2002 KS (삼성 VS LG). 공교롭게도 김경문 감독도 김성근 감독과 포스트시즌 에서 3번 붙어서 3번 모두 졌다.[3] 해태 시절이 30년전 과거이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김응용vs김성근이지 한화 시절 김응용vs김성근이 아니다.[4] 재미있는 사실은 삼성이 콩성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시기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역임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91~92년) 이 때는 타자 쪽에 이만수와 김성래가, 투수 쪽에는 김상엽과 김성길이 있었다. 더군다나 김성근 재임시기 2년 간 삼성은 한국시리즈는 아예 문턱도 밟지 못했고 오히려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다.[5] 전설의 타이거즈 채널에 1983년 한국시리즈 영상 및 1983년 시즌 전체를 정리한 영상이 올라와 있다. 김성한은 본인의 현역 시절 수 많은 해태의 우승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웠고 힘들었던 우승이었다고 밝혔다. 이 시기 해태의 타선은 우수했지만, 투수진은 우수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6] 김응용-이광환, 김성근-김영덕, 김영덕-강병철 같은 사례와 비교했을때 적어도 서로에 대해 (내심이야 어쨌든) 좋은 말도 자주 했었고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참석한 적도 많았던 김응용과 김성근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축에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애초에 롱런한 KBO 원로 감독들이 성품이 온화한 덕장 김인식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인간관계가 상당히 나쁘다.[7] 다만 김응용은 김성근 기용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2살 연하인 김성근이 반말을 하는 것이나 1991년의 이중오더 사건 등으로 인해 그리 감정이 좋을 수만 없던 사이였다.[8]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태완이 술회하길 김태완이 2군 트레이닝 코치 시절 김응용과 김성근이 각각 1,2군 감독을 맡고 있었으며 1군 경기 전날 2군 경기에서 외야수의 실책으로 삼성에 패하자 김성근 2군 감독이 2군 선수들 대상으로 빗속의 펑고 연습을 진행했고 그라운드 상태가 엉망이 됐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이 출근하기 전에 수습을 하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오후에 출근하던 김응용 감독이 오전에 하필 출근했고 그라운드를 보자마자 2군 코칭스태프와 매니저를 집합시켰다. 2군의 무등 야구장 사용 금지 및 2군 매니저에게는 반성문을 징구하여 기자들이 보는 게시판에 게시했다.[9] 대신에 해태 타이거즈는 야구 팀 중에서 군기가 가장 심했다.[10]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코시에서 이승엽이 부진할때도 내내 3번으로 기용했던 감독이 바로 김응용이며 중견수에 박한이를 고정시킨건 김응용 감독이다. 장성호도 해태시절엔 많이 밀어주었다. 양준혁이 해태 트레이드나, 삼성으로 다시 복귀할때에도 김응용 감독의 힘이 컸다. 어찌 보면 믿음의 야구를 실천한 대표적인 감독이다.[11] 다만,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투수의 분업화가 이뤄지는건 80년대 중후반이였다.[12] 다만 이대진은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일찍 복귀시켰다가 커리어를 망친 케이스다.[13] 임창용은 해태 시절에 이어 삼성 시절에도 서정환에 의해 1년간 신나게 굴려졌고 결국 김용희가 1년 동안 잘 보살피면서 잘 버텼고, 김응용은 아예 임창용을 선발투수로 전업시킨다. 외국인 투수를 마무리 투수로 데려온다던가 선발로 잘 하던 김진웅을 마무리로 보낸 것이 그 예다.[14] 사실 선동열의 마무리 기용은 선동열의 건초염 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측면이 있다. 원래 선발로 뛰던 선동열은 1992년 건초염 발병 이후 짧은 이닝만 소화할 수 있었고 1994년에는 다시 선발로 전향시키려 했으나 실패해, 다시 마무리로 돌렸다.[15] 그 해 불펜으로 무려 71경기에 등판해 138이닝을 던지며 13승 38세이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과 함께 정규 이닝도 채우고 평균자책점 1위까지 먹었다. 다만 그해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시즌에서 혹사 여파로 인해 구위가 떨어지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6] 김현욱은 김성근과 김응용에게 모두 굴려진 케이스다. 김성근이 지나치게 굴려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에도 삼성에 언더핸드 투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기용되었다. 물론 이강철이나 권오준이 있었지만, 전자는 부진 끝에 트레이드되었고, 후자는 김현욱이 은퇴할 때가 되어야 재능이 만개한다. 그래서 김현욱이 부상으로 드러눕자 박석진을 트레이드로 영입했을 정도였다.[17] 여기에 폭력이라고 해서 실제로 선수들을 구타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기물 파손등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위압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응용 감독이 덕아웃에서 의자를 때려 부쉈다는 이야기 등은 이미 유명하고, 1990년대 초반에는 라디오 중계 중에 김감독의 욕설이 전파를 탄 적도 있다. 중계 중에 갑자기 터져나온 욕설에 캐스터와 해설자가 잠시 침묵하다 "에.. 해태 김응용 감독이었습니다"라며 난감함이 담긴 웃음으로 얼버무린 적이 있는데, 덕아웃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중계석에서도 정확하게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욕설을 날리는게 일상적이었다는 점도 폭력 이미지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18] 다만 선수들 사이에서 이미지는 김성근이 더 좋은 편인데, 주전 경쟁에서 밀려 방출된 선수들이 김성근 덕분에 현역생활을 연장하거나 기회를 얻어 부활하기 때문이다. 반면 김응용은 실력 제일주의로 팀을 이끌기 때문에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면서 실력이 떨어지는 베테랑은 트레이드나 방츨로 정리하는 경향이 컸다.[19] 물론 삼성 시절이나 한화 시절 어이없는 에러를 범한 선수들을 불러 개인적으로 얼차려를 시키긴 했지만 해태 시절처럼 직접 구타한 경우는 없다.[20] 어린시절의 강영식채태인에게 직접 식사를 챙겨주었던 사람이 김응용 감독이다. 2000년 쯤 모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혀진 사실.[21] 물론 후배에게 술 셔틀이나 시키던 심성보도 잘 한 것은 없다만 그걸로 귓 방망이를 20대나 후려갈긴 김성근도 정상은 아니다.[22] 이건 당시 OB에서 삼성으로 매끄럽지 않은 이적을 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김성근이 선수들에게 일부러 시킨 거였다.[23] 우리나라 프로스포츠에서 김응용과 타이기록을 세운 감독은 프로농구의 유재학 1명 밖에 없다. 15년 이상 한 팀에서 재직한 감독은 이 둘을 제외하면 없다.[24] 물론 21세기 초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강해서 손민한이 전 날에 나이트에서 술을 퍼먹고 등판일에 그걸 다 게워낸 후 완봉승을 하는 막장스런 일화도 존재했다.[25] 사실 2010년대에도 프로농구에서 유재학 감독이 선수에게 입에 테이프 붙이라고 폭언을 했으며 선수가 본헤드 플레이를 하자 야 이 병신아! 라고 역정을 냈거나, 꿀밤을 먹이는 행위를 했었다. 대학농구에서도 정재근 감독이 심판한테 대들고 몸싸움을 하다가 징계를 먹었다. 지금은 SNS시대고 프로야구가 인기가 많은 스포츠라서 저렇게 하면 엄청난 비난을 먹을 것이다.[26] 1986년부터 10명, 1987년부터 3명, 1990년 2명, 1991년부터 1명으로 줄었다.[27] 프로야구 출범 당시만 해도 인지도가 있던 전라도 고등학교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뿐이었을 정도. 호남 야구가 꽃피기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다. 경북 쪽의 야구 명문고들이 1950년대부터 나온 것을 보면 한참 늦었던 셈.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호남야구의 침체기는 프로 출범 당시 해태 타이거즈가 연고 출신 감독을 선임하지 못하고 김동엽 감독을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굳이 찾자면 초창기 호남 야구의 스타인 김양중을 들 수 있지만 프로 출범 시점에서는 이미 현장에서 물러난 지 15년이 지난 뒤라 무리였다.[28] 투수가 겨우 6명이었고, 그 마저도 김성한은 1루수 겸 투수로 나와서 100이닝 넘게 던져야 했다. 물론 1983년부터 투수로 등판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29] 당장 호남팜 출신으로 이종범보다 먼저 프로에 데뷔한 광주일고 출신 감독인 염경엽 감독과 김기태 감독 이 두 사람의 선수시절을 보면 약간 답이 나오는데 둘 다 해태에서 뛴 경험이 없음에도 한 명은 수비 실력은 좋지만 타격 능력이 심각하게 안 좋았고 한 명은 반대로 타격 능력이 좋았지만 1루수 아니면 수비를 볼 수 없던 돌 글러브였다.[30] 훗날 현대 유니콘스 투수 최상덕과 박재홍 1차 지명권과 트레이드. 훗날 이런 약탈적인 선수 영입 방지룰로 신인지명권은 2000년부터 트레이드가 금지되었다가 20년 가까이 지나서 풀린다.[31] 임창용도 4년 써먹고 삼성에 현금 트레이드로 팔렸다. 그나마 써먹었으니 다른 선수보단 낫다. 참고로 임창용은 고졸 신인부터 1군이라 알려진 것과 달리 김성근이 붙잡고 오래 키운것도 아니다. 김성근은 임창용을 1년 남짓 밖에 안 봤다. 이 쪽은 유남호 - 이상윤으로 이어지는 투수코치들의 공이 크다.[32] 당시 한대화는 간염에 걸려 훈련을 할 수 없게 되자 강 훈련을 중시하던 김성근 감독의 눈 밖에 났고 김성근은 한대화가 게으름을 피운다고 하여 공개적으로 트레이드를 하겠다고 하였다.[33]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의 아버지와 동향 출신이라서 한대화 영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여튼 한대화는 처음에 해태의 구타 이미지만을 생각하고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칩거에 들어가며 임의탈퇴까지 몰렸지만 동국대 선배이자 당시 해태 수석코치였던 김인식의 설득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34] 이순철은 이후 자신과 유사한 수비의 달인 김창희의 등장과 말년에 스프링캠프에서 폭행 사건 등으로 인해 김응용에게 찍혀 자리를 잃게 된다. 더군다나 실력 자체도 하락세이기도 했고.[35] 애초에 기본기가 아예 없던 선수는 아니었다. 연세대 입학이 꼬이면서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 물론 그런 선수를 잘 키운 점은 인정해야 할 공이다.[36] 물론 이호준은 99 시즌의 투수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00년에 성영재와 트레이드가 되어 팀을 떠났다. 이후 강병철 감독과 함께 하면서 재능이 만개하고 34억의 FA 대박을 터뜨린다.[37] 물론 이건 한화 이글스 구단 자체도 막장이었지만, 2군 구장과 클럽 하우스 건립 문제를 질질 끌던 정용기 구청장을 위시한 대전 대덕구 측의 문제도 컸다.[38] 12년 2군 성적은 방어율 5점대[39] 그나마 송창현은 13시즌에 요긴하게 써먹기라도 했다.[40] 당장 12시즌을 보면 부상으로 골골대던 38살의 신경현이 정범모와 플래툰으로 나오고 있었고, 38살인 강동우나 36살의 장성호가 지명타자 - 좌익수로 나오고 있었다.[41] 그 마저도 어깨가 상당히 싱싱했다.[42] 삼성 라이온즈 3대 감독으로 85년 전무후무한 통합 우승을 달성하였다.[43] 선수로도 뛰었으며, 은퇴 후 지금까지도 두산 베어스의 핵심 코치진을 맡고있는 사람으로, 차별의 차 자도 매스컴에 꺼낸 적이 없는 사람이다.[44] 삼성에서 뛰던 당시 차별 당하기는커녕 거액을 투자한 삼성 구단의 배려로 좋은 성적을 냈었다.[45] 부당한 대우 혹은 사기를 당하긴 했지만 이는 재일교포와는 큰 상관 없는 삼미 사장의 치졸한 짓거리였다.[46] 모두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야구 무대에서 뛰었지만 실력만 있으면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47] 도위창이라는 등록명 때문에 재일교포로 알려져 있으나 도위창이라는 이름은 본명을 한자음으로 그대로 읽은 것이다. 이 분의 본명은 도이 쇼스케로 순수 일본인이다.[48] 당시 비행편이 좋지 않아 미국에서 비행기를 3번 갈아타고 프로야구 출범식을 보고 갔다고 한다.[49] SK 감독 시절 정말 공연히 비난받은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그건 기자들 전문성 부재나 보도 윤리 문제다. 헌데 노리타들 머리속에선 언론이 조용히 외길을 걷는 구도자를 반쪽바리, 인맥없어서 매장한다는 기적의 논리가 나온다.[50] 다만 강병철 체제는 강병철 감독이 베테랑을 홀대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고, 신인 선수 육성도 96년에 입단한 선수들을 빼면 성공 사례가 별로 없다.[51] 도전 5강이라고 해서 그 둘에 도전하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전부 조훈현이나 서봉수에게 밀렸다. 80년대에 이 중에서 우승한 사람은 86년 박카스배 우승자인 강훈 혼자였고, 그 마저도 조훈현이나 서봉수를 이겨서 우승한 케이스가 아니다. 21세기 들어서 도전 5강 중에서 가장 잘 하던 서능욱이 조훈현과 서봉수를 1번씩 꺾고 제한 기전에서 우승을 하기는 하나, 이건 이미 전성기가 끝난 이후여서 논외.[52] 특히 김응용은 전무후무한 통산 1500승 감독이다.[53] LG 감독, 국대 감독 시절에 쌓아 놓은 이미지를 다 날려먹었을 뿐, 현대 감독으로써의 김재박은 명장이 맞다. 2001년부터 현대 유니콘스가 하이닉스를 따라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이었고, 이후에는 야구단을 그리 잘 지원해 준 편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승 2번을 거두었다.[54] 다만 예로부터 호남팜은 질은 좋지만 양적인 면에서는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한다. 당장 해태 타이거즈를 언급할때면 소수정예란 말이 빠짐없이 나올 정도였다.[55] 삼성 라이온즈 팬덤의 경우 해태 시절의 김응용이 1980~1990년대 한국시리즈 제패를 막은 장본인이지만 한국시리즈 첫 우승의 숙원도 풀어준 감독이라 김응용의 능력에 매우 호의적이다. KBO 초창기 삼성을 콩라인으로 만든 장본인이라서 싫어하는 팬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삼성팬들의 뇌리속엔 '김응용=명장' 공식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거기다가 김성근은 1990년대 556 암흑기의 주범 중에 한명이며, 삼성의 올드팬들에게 선동열만도 못한 놈 취급을 받고 있다. 최소한 선동열은 우승이라도 시켰지만 김성근은 그 마저도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SK 와이번스 감독 교체 당시 이만수김성근의 대립까지 엮이면서 김응용을 지지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생각해보면 삼성 라이온즈김성근김응용을 모두 겪은 유일했던 구단이다. 그리고 2015년 부터 한 팀이 더 생기게 되었다.[56] 어쨌든 3회 우승을 시킨 소위 SK 왕조시대를 만든 감독이니 빨 수 밖에 없다.[57] 하지만 이것도 옛말인것이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에 부임한 이후 반 김성근 입장이 강한곳이 LG 트윈스 갤러리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LG팬들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4강간거 때문에 묻혀있었지 이동현, 신윤호, 장문석 혹사논란으로 말 많았던게 김성근이다. 특히, 대다수 LG팬의 아픈 손가락인 이동현의 혹사 문제의 가장 큰 원흉이라 좋게 볼 수도 없다.[58] 말이 1:4지 진짜 머릿수로 따지면 더한 상황이다.[59] 속 터지고 답답한 마음은 알겠으나 시즌 도중에 코치들에게 맡기고 포기한 듯한 언행을 하지 않고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상태로 퇴임했다면 지금보다 평가가 훨씬 좋았을것이다.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한화감독시절 김응용에 대한 글을 보면 위에 나온대로 젋은선수 영입 및 라인업구성, 사비를 털어서까지 어린선수를 키우려했던 점 등을 높이 사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몇 가지 실언들로 인해 한화팬들에게 금새 반박당하고 비공감이 쌓여버린다.[60] 애초에 야구단 대표이사는 그룹 내에서 끈 떨어진 전무 ~ 부사장들이 가는 자리이다. 사장급을 보임하는 그룹은 삼성 밖에 없고, LG와 한화는 사장~부사장을 보임하되 그 마저도 다른 팀과 겸직한다.[61] 2006년은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으로, 리그 평균 자책점이 3.59였다.[62] 여기에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를 봐도 창피해서 우리팀 경기 요약은 안본다" 같은 인터뷰도 한몫했다. 이조차 김성근의 내로남불식 인터뷰 때문에 묻혔다.[63] 거기에 클로저로 쓰려고 했던 박찬호의 갑작스런 은퇴도 있었다.[64] 마무리나 셋업의 연간 소화이닝은 대체로 50~70이닝 사이다. 보통은 60이닝 전후 던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70이닝은 좀 많이 던지긴 했지만 혹사라고 보기엔 애매한 수치다.[65] 그 일반적이지 않은 송창식을 2년 넘게 혹사시키면서 굴리면서 팔꿈치의 이상을 불러온 것은 김성근 감독이며,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 수술을 받아 관리가 필요한 김민우를 당시 송창식보다 더 빡세게 굴렸다.[66] 다만 윤규진의 수술은 웃자란 어깨뼈를 깎는 수술이므로 인대나 근육에 칼을대는 수술과는 거리가 멀다.[67] 투수 어깨는 쓰면 강해진다는 이야기나 좀 더 기다리자는 이야기도 있는데 대부분의 결과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투수 어깨는 소모품이기에 미국에서도 대박 FA를 뽑기 어려운 것이다.[68] 특히 후반기에는 진짜 답이 없었다. 막판 4연패도 타선에 그 원인이 있다.[69] 심지어 김응용은 삼성에서도 리빌딩을 성공시켜놓으면서 류중일이 통합 4연패를 이루는데 큰 발판을 마련했다.[70] 반면 김성근은 역대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SK시절을 제외하면 모든 팀에서 첫해에 우수한 성적을 낸 뒤 해가 갈수록 계속 성적이 떨어지는 공식이 있다. 잘 보면 그 긴 커리어 동안 부임중에 전년도보다 높은 성적을 낸건 2010 SK 단 한 번 뿐임을 알 수 있는데 그마저도 사실상 1위 KIA와 대등한 성적이다. 심지어 LG 시절에도 시즌 승률은 첫해인 2001년 시즌(중간에 선임된 이후 시즌 종료까지)이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하여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만든 2002년보다 더 높다.[71] 김응용 감독도 2001년에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정규시즌 1위라는 이점을 가지고도 3위로 포스트시즌에 올라왔던 두산 베어스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지며 본인 커리어 처음으로 업셋 우승을 허용하였던 적이 있긴 하다. 다만 2001년엔 중립구장 규정 논란이 있었다는걸 감안하자. 물론 포시 승률 전체를 놓고 보면 김성근은 김응용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SK왕조 4년 합쳐서야 가까스로 5할 턱걸이하는 승률에 대 김응용전에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즉 페넌트 레이스KBO 포스트시즌도 김응용 > 김성근이라는게 최종결론이다.[72] 2002년 4위였던 LG로 한국시리즈 진출, SK시절 우승 3회와 준우승 1회였다.[73] 김성근은 감독 커리어 전체적으로는 가을야구에 강한 편이 아니다. 마치 염경엽이 2023년 LG 트윈스를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시켜 그동안의 나쁜 단기전 능력을 보완했다는 호평을 받은 것과 별개로 여전히 감독 커리어 전체로 보자면 단기전은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 OB로는 1986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김영덕/김응용에게 첫 시리즈에서 바로 패배했고, 1989년 태평양으로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이긴 적이 있으나 1990년대에는 삼성 2회, 쌍방울 2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통틀어 총 4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단 한 번도 이겨 본 시리즈가 없다. 가을야구 진출하면 그냥 그게 끝으로 김성근은 단기전에 매우 약한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20세기의 김성근은 포스트시즌에 7회 진출하여 태평양때 1번 이겨본 게 끝으로 가을야구 승률이 아주 낮은 감독이었다. 되짚어 보면 페넌트레이스에서의 막대한 혹사의 결과가 포스트시즌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며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김응용의 해태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74] 타팀 팬들은 김성근 종신감독 드립을 쳤는데, 유망주를 노망주와 바꿔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준혁, 노수광 등을 받은 KIA가 있다. 하지만 2016년 후반기에 와서 부상으로 신음하는 투수들이 속출하자 타팀 팬들조차도 투수들 죽는다면서 종신감독이 아니라 경질을 외치고 있다.[75] 2013년 송창식의 등판 일지로 보았을 때 타 팀의 클로저들에 비해 혹사를 당하긴 했다. 김응용 감독은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살려조의 행보가 시즌 중반까지도 투혼이라며 포장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이마저도 송창식은 김응룡 시절인 13년엔 순수 구원으로만 등판했으나 김성근 휘하에선 선발 10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3연투 후 3일도 못 쉬고 선발 투수로 등판한 적도 있었다.[76] 다수의 기자들이 한화 선수들이 감독 뒷담화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이건 단순한 카더라로만 볼게 아니라 실제로 휴식일에도 훈련을 시키거나, 2군 외박일이라 선수들이 대부분 외출한 상황에서도 도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은 2군 선수들의 SNS와 기자 및 팬들의 증언으로 교차검증이 되었다.[77] 하지만 김성근식 야구는 퇴보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나 SK때나 고양 원더스나 한화랑 똑같고, 달라진 것이라면 SK때는 선수층이 두터웠기 때문에 잘 굴러갔고, 원더스에서는 마데이 등 외국인 용병을 신나게 굴려서 명장 소리를 들었으나, 한화에서는 그게 안되니 망했다는 반론이 강하다. 즉 김성근이야 말로 선수빨 감독이라는 것이고, SK 시절 성적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여러 무리수들이 한화에서는 극단적으로 부작용을 불렀다고 볼 수 있다.[78] 사실 김응용 이후 왕조 감독의 상징이자 KBO 대표 명장이라는 평을 듣는 류중일 등도 LG에서의 부진으로 인하여 삼성 왕조 시절의 명성을 많이 잃었지만, 김응용이 한화 시절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해태, 삼성 시절의 업적으로 역대 최고의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김응용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김응용은 김성근 이후 부임한 삼성 감독들 중 류중일 다음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 인물인데, 삼성 감독들이 평가가 거의 다 안 좋다지만 김응용이 해태 감독으로 삼성의 우승을 수없이 좌절시킨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평가인 것이다. 더불어 현대 역시 왕조 논란이 있지만 삼성과 함께 2000년대 최강팀이었으며 그 현대를 김응용처럼 이끌던 김재박 역시 LG 감독을 맡고 몰락하며 김성근처럼 역대 최고의 감독 라인업에는 이름을 잘 못 끼는 신세가 되었다.[79]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는 유행어로 당시 많은 개그맨들의 단골 성대모사 소재였다. 즉,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통산 10회 우승이라는 화려한 커리어까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김응용 감독 역시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강연 등을 다니며 김성근 감독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80] 전년도까지 LG의 전신 MBC 청룡은 6년 연속 포스트시즌 실패하고 직전 시즌 꼴찌를 겨우 면한 6위였다. 당장 1990시즌 개막 후 두 달간 꼴찌로 추락한 팀을 데리고 역전우승을 했다.[81] 그러나 이것도 야구 스타일 면에서 현대야구적 관점에서의 차이일 뿐이지, 종합적 감독 커리어는 김성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위이다. 김성근같은 경우 극단적인 윈나우로 가는 팀마다 초토화시켜서 그렇지 팀 전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성적을 내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LG 시절까지 가을야구에서 약해서 그렇지 SK 와이번스 시절 4년간 3우승도 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백인천의 롯데 시절과 김성근의 한화 시절을 비교하면 둘다 평가가 아주 안 좋지만 굳이 따지자면 백인천의 롯데 시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낮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감독 커리어상에서 밀린다는거지 백인천같은 경우에도 롯데 시절만 제외하면 청룡 시절 약팀이던 LG를 맡아서 바로 우승시키고 삼성에 가서는 김성근이 작살내놓은 팀을 리빌딩시켜 2000년대 삼성의 전성기의 초석을 다지는 등, 충분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82] 사실 물질적인 부분으로 보면 김성근이 더 성공하기는 했다. 30년 이상 살던 성수동 집 자리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집을 135억원에 팔아서 야구로 번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부동산 대박을 터뜨린 것은 물론, 강연을 다니면서 1년에 60억원을 벌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반면 김응용은 물욕이 큰 사람은 아니었고, 해태 감독 시절에 번 돈도 별로 적은데다가 딸들의 해외 유학비로 대부분 들어가서 별로 남긴 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