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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39

김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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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purple><colcolor=#fff> 작위 각간
본관 김해 김씨
이름 흠순(欽純) / 흠춘(欽春)
국적 신라
생몰년도 598~680
가족관계 김서현
만명부인
김유신
아들 김반굴
손자 김영윤
1. 개요2. 생애3. 필사본 화랑세기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신라 상대~중대의 인물로, 화랑 출신의 장군이다. 김유신의 동생이며 반굴의 아버지다. 삼국통일전쟁의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문무왕은 김유신과 김흠순, 김인문 셋을 나라의 보배로 치켜세웠다.

그 이름은 흠순(欽純) 외에 흠춘(欽春)이라는 다른 표기도 있다.[1] 자치통감 같은 중국 측 기록에는 김흠(金欽)이란 인명도 나오는데 김흠순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로 해석되고 있다.

2. 생애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김무력의 손자, 김서현만명부인의 아들이며 김유신의 동생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아직 어리던 진평왕 시대에 화랑이 되었고 주변으로부터 평가가 좋았다고 한다.

넘사벽의 공적을 쌓은 형 김유신에 가려서 인지도는 낮지만 나름대로 삼국통일전쟁기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는 계백과 네 번 싸웠으나 적진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지경이 되었는데 이 때 김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께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라는 말로 그를 자극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2] 반굴 이후 관창도 모범을 보여 닥돌해 전사하자 신라군이 이를 보고 용기백배하여 백제군은 마지막 다섯번째 교전에서 패하며 황산벌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백제는 사비성웅진성이 포위, 함락되며 멸망하게 되었다.[3]

이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김흠순은 구 백제 지역에서 이를 진압했다. 자치통감과 답설인귀서를 종합하면 661년에 주류성 전투에서 귀실복신에게 패배했다. 663년에는 천존 등과 함께 내사지성, 거열성 등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했고, 특히 663년 2월 지금의 전라북도 일대인 거열성(居列城). 거물성(居勿城). (沙平城), 덕안성(德安城) 등을 함락시키고 수천 명을 벤 전투는 삼국사기뿐 아니라 일본서기에도 나오는데, 거기 따르면 이 전투 때문에 백제부흥운동군이 수도를 피성(避城)[4]에서 주류성으로 다시 옮겨야 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로서 백제 무왕, 의자왕 때 신라가 빼앗겼던 경남 서부, 호남 동부를 전부 탈환한다.

668년 고구려 멸망전에도 참전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신라까지 먹을 태세를 취하자 외교로 해결하기 위해 김양도와 함께 당에 건너갔다오기도 했다. 물론 이는 실패하고, 당나라에서 감금되었다가 겨우 풀려났다.[5] 그리고 곧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전쟁에 돌입한다.

말년의 관등은 각간.

670년 당나라에서 귀국했고, 이후의 삶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전장을 수없이 누비던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건 얼마 못 가 사망했거나 적어도 전장에 나갈 수 없는 몸상태가 된 듯 하다. 정황상 같이 갇혔던 김양도가 당나라 감옥에서 죽었을 정도면 김흠순 역시 간신히 풀려나긴 했지만 같이 옥고를 치르면서 건강이 나빠졌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3. 필사본 화랑세기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18대 춘추공 김춘추 19대 흠순공 김흠순 20대 예원공 보예원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전해지는 화랑세기에서는 춘추공의 뒤를 이어 풍월주를 역임했다고 나온다.

이 책에서 흠순은 12대 풍월주 보리의 딸인 이단낭주의 사이에서 김원훈(金元訓)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김원훈(金元訓)은 삼국사기에서 선덕왕(宣德王)의 祖父의 이름과 동일하다. 시기상으로 동시대 인물로 보이기에 동일인이거나, 同名異人으로 보이는데, 한자까지 동일한 인물이 동시기에 존재할 확률이 높지는 않다고 봐야겠지만, 그렇다고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하면 가야계 新김씨가 즉위한 것이 되기에 많은 논란을 불러 올 수 있다.

4. 여담

후지와라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인 《등씨가전(藤氏家傳)》에 따르면 당나라의 위징, 고구려의 개금, 백제의 선중(善仲), 신라의 짐순(鴆淳)이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보통 이 '짐순'을 김유신으로 추정하지만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김유신을 짐신(鴆信)이라고 서술했기에 발음상 김흠순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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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수김용춘의 예와 같이, 비슷한 시기 신라인의 인명을 보면 비슷하게 일괄적으로 대응하는 게 보이는데 고대 신라어의 어떤 특성일 것이다.[2] 참고로 반굴이 죽기 전에 이미 아들 김영윤이 있었으니 아들 반굴이 이렇게 죽었다고 김흠순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다.[3] 각종 매체에서는 반굴관창이 '혼자서' 돌격한 것으로 묘사되나 그런 기록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4]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5] 같이 붙잡힌 양도는 옥사했다.[6]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 1부에서는 황병관 역.[7] 이 때 아들의 목을 조르면서 설득하고 있다.[8] 가만 생각하면 아들더러 차마 니가 나가 죽어줘야겠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대장군이자 형인 김유신의 말을 반대하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힘겹게 꺼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관창이 죽어서 돌아온 것을 보고 "화랑들을 계속 보내라"고 짧게 말하는 김유신에게 치가 떨리는 듯 "행님 니 미칬나?"라고 하는데 김유신이 "그래 미쳤다. 니 자식보고 죽으라고 내보낸 니는 안 미칬나?"라고 따지자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못한다.[9] 자원입대한 문디를 받은 것도 김흠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