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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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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실상
3.1. 운용3.2. 구조3.3. 문제점
3.3.1. 미흡한 품질의 무거운 잠수복3.3.2. 제약되는 시야와 행동3.3.3. 5식 격뢰3.3.4. 사람 잡는 호흡장치3.3.5. 손쉽게 제거당함3.3.6. 연쇄폭발 가능성
3.4. 실제 배치
4. 여담

1. 개요

복룡(伏龍)
파일:external/www.asahi-net.or.jp/fukuryu-ken1.jpg
완전무장한 후큐류
야스쿠니 신사의 전시품이다

일본군은 패전 시기에 즈음해서 수도 없는 자살공격병기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카미카제를 필두로, 신요 보트, 오카, 츠루기, 가이텐, 카이류 등이 나왔으나 이것들은 적어도 사람이 탑승해서 조종하는 병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막장스러운 행각은 끝을 몰랐으며, 결국 맨몸뚱이에 잠수복을 하나 입혀놓고 폭탄을 쥐어 준 후 자폭시키는 무기가 개발되어서 훈련까지 들어갔는데 이것이 바로 엎드린 용이라는 뜻인 후쿠류(伏龍)[1]. 이른바 인간 기뢰이다.

더 간단히 요약하면 일본 제국 육군의 대전차 무기인 자돌폭뢰일본 제국 해군판 대함 버전이다.

2. 상세

파일:external/www.magazine9.jp/costume.jpg
잠수복을 차려입은 후쿠류 대원

후쿠류의 탄생 계기는 매우 단순했다. 1944년, 일본 제국은 거의 패전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열세에 몰리고 있었고, 본토 주위에 적이 기뢰를 깔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B-29가 투하하기 시작한 항공 투하식 자기 기뢰들을 없애기 위해서 1945년 1월부터 부대를 만든 것이 후쿠류의 시작이었는데, 따라서 원래는 인간 기뢰가 아니라 소해 부대였던 것이다. 이것도 충분히 막장이지만, 상황은 더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질 때 즈음, 카미카제용 비행기가 부족해서 93식 중간연습기 (九三式中間練習機. K5Y)까지 카미카제에 동원할 정도로 자원이 부족하고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폭 준비를 하고도 자폭을 못 하고 있는 훈련병들을 써먹을 생각을 한 해군 사령부에서 소해 부대를 응용해서 적함을 물리치자 식의 발상을 고안해냈다.

개발된 이후에는 요코스카 방어 훈련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해군의 본토결전 전략은 먼저 카미카제가 적 기동부대에 자폭하고, 수송함이 접근하면 가이텐신요가 자폭하고, 마지막으로 상륙정과 상륙장갑차는 후쿠류로 상대한다는 자폭자폭과 자폭으로 완성되는 전략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가이텐과 신요가 자폭하고 후쿠류 부대가 상대하기 전인 수심 10 - 15m 지점에서는 계류식 기뢰가 깔리긴 했다. 본토방어용 해안포대 같은 것도 있긴 했다.

상술했듯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에서는 육해공을 막론하고 수도 없는 자폭 무기 체계를 고안했는데 이 후쿠류는 그 막장성의 정점을 찍은 물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쪽 분야에서 실제로 외국인들에게 제일 많이 목격된 사례인 카미카제랑만 비교해도 사람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들어가도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는 수중에 맨몸으로 들어가서 기뢰를 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카미카제의 막장성을 아득히 능가한다. 대전차총검술은 운이 아주 좋으면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후쿠류는 그냥 목숨을 소모하는 것이 목표다.

사실 활대 기뢰라고 해서 후쿠류와 비슷한 무기체계가 과거에 존재하기는 했다. 길다란 막대기 끝에 폭탄을 매달아서 선수에 매달아 놓고 적을 들이받아서 폭파시키는 일종의 폭발성 충각으로 볼 수 있는 무기였는데, 충각의 확장판이라는 한계상 어쩔 수 없이 도태되긴 했지만 실전 사례도 있고 일단 들이받기만 하면 어찌저찌 효과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보다 매우 튼튼한 군함에다가 달아놓은 거였지 이건 사람이 직접 들고 창처럼 찌른다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3. 실상

3.1. 운용

파일:external/cdn-ak.f.st-hatena.com/20100815174151.jpg
후쿠류의 운용도
1 잠수복을 입고 각종 장비를 착용한다.
2 일명 기뢰라고 불렸던 5식 격뢰(五式撃雷)를 든다.
3 일반적으로 10명으로 1조를 만든 후에 일본 본토 근해에 미리 잠수해서 대기한다.
4 마침 머리 위로 연합군의 상륙정이나 상륙장갑차가 지나가면 들고 있던 기뢰로 찌른다.
5 그 뒤는 알아서 상상하자.

3.2. 구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Fukuryu.png
후큐류의 잠수복 구성도

도쿄 대공습 직후인 1945년 3월부터 해군 공작학교에서 후쿠류의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재료가 부족해서 기존의 군수품이나 기성품을 유용하는 식으로 양산이 개시되었으며 일단 2개월 안에 3,000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45년 8월 15일까지 1,000개의 잠수복이 만들어졌고 8,000개의 잠수복이 추가로 주문된 상태였다. 완성된 잠수복 중 요코스카 기지는 450개, 구레 기지와 사세보 기지에 각각 60개의 잠수복이 배치되었다.

밀폐식 잠수복은 허술하게 만들어 낸 고무옷이었고, 여기에 잠수 헬멧, 3.5리터 용량의 2,200psi 압력을 가진 압축 산소통 두 개를 짊어지고, 튜브 두 개(각각 산소 흡수용과 유동식 식량 흡수용)가 가슴에 있고, 허리에는 조절용 밴드를 착용했으며, 자세 제어를 위해서 9kg 중량의 납을 집어넣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화학식 공기 정화장치를 사용했는데 이건 후술할, 매우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한계 잠수 심도는 15m 였으며, 15m 깊이에서 다시 수면으로 올라올 때는 잠수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10m 깊이에서 2분간 머무른 후 다시 올라와야 했다. 보고에 따르면 비교적 짧은 훈련 기간 이후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심도를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했으며, 해저에서 시간당 2,000m를 이동할 수 있었다.[2]

3.3. 문제점

일단 잠수복에 폭탄 하나 들고 들어간 상황이기 때문에 적을 공격하면 무조건 죽는다는 자폭병기 특유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이게 사람 하나 목숨을 확실하게 태우는 값을 해 주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3.3.1. 미흡한 품질의 무거운 잠수복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성의 고무 쫄쫄이를 활용해 급조된 잠수복은 수밀이 보장되지 않았다. 전문적인 공장도 아니고, 학교에서(=학생들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여) 2개월 만에 3,000개가 조달될 예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품질 관리 따위는 이미 고려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전 환경상 해저를 걸어야 했는데, 이것을 고려해서 무게도 65kg 가량으로 매우 무거웠다. 일반적인 잠수복도 가볍지는 않고 부력이 무게를 상쇄시켜 줄 수는 있으나, 이 잠수복은 뭍에서 걸어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무거운 편이다.[3]

그나마 조금 들어가다 물 들어온다고 보고하면 나올 수라도 있지, 깊이 잠수한 뒤부터 침수를 인지하여 복귀하다 올라오기 전에 물이 들이차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최소 5시간에 육박하는 긴 잠수시간을 버티려면 기본적인 단열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외에도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단도 갖추어져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따라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지 못해서 급하게 다시 물 위로 올라가야 하므로 실전에서 5시간씩이나 버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3.3.2. 제약되는 시야와 행동

잠수 헬멧에는 유리창이 붙어 있었는데 자기 발 밑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엉망이었다.

이게 왜 문제였냐면 무게 등의 문제도 있어서 각 대원들은 잠수복을 입고 정해진 위치까지 걸어 들어가야 했고, 개별 대원이 물속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속에 줄을 처놓고 그 줄에 있는 매듭으로 거리와 위치를 표시했다. 때문에 진지 변환은 거의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각 대원에게는 손전등나침반이, 소대장에게는 특수 잠망경이 지급되었다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헬멧의 가시성이 최악이어서 실질적으로는 눈 뜬 장님의 형상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각 소대원들의 의사소통은 2 - 5미터의 수심에서는 호흡장비를 확성기로 사용하여 소통하고, 그 이상 심도에서는 금속을 부딪치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상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서 이후에 전략 전술의 변화가 있어도 대응할 수가 없었고, 각 대원들간의 의사소통 역시 쉽지 않았다.

3.3.3. 5식 격뢰

공격 수단인 5식 격뢰(五式撃雷)의 경우는 처음에는 봉 길이 5미터에 무게 20kg이었다가 조작이 어려운데다 과스펙이라고 판단해서 봉 길이를 2미터로 줄이고 중량을 줄인 개량형도 생산되었다. 기존의 5미터 봉을 사용하면 수심 7m에서 사용하고 2미터 봉을 사용할 경우에는 수심 4m에서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수심 4m에서도 휘두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5식 격뢰의 내장용 폭약인 15kg TNT만으로는 함선 근처에서 터뜨리거나 파편비산을 통한 공격을 해서는 턱없이 위력이 부족하다. 결국 적의 상륙정을 직격해야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 대원들은 시야가 거의 막힌 상황이고, 움직이는 게 힘든 물 속에서 앞서 말한 미흡하고 무거운 잠수복을 입고 걷거나 헤엄쳐서 적함을 쫓아가는 것도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러니 우연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상륙정, 상륙장갑차 외에는 아무 것도 상대할 수 없었다. 충격파를 그대로 전달하는 매질인 물의 특성상 5식 격뢰가 기폭 시 사용자가 확정적으로 인수분해되는 것은 덤이다.

결국 일본 제국 해군은 이들을 3열로 배치해서 얻어걸릴 확률을 높여본다 정도 외에는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들은 안전거리가 60m이기 때문에 20m 간격으로 진형을 만들었는데, 참 이도저도 아닌 형상이었다.

마지막으로 5식 격뢰는 10,000개가 주문되었으나 패전시까지 프로트타입 몇개를 제외하고 완성된 5식 격뢰는 없었다. 후쿠류 대원 훈련용으로 400개의 연습용 5식 격뢰가 생산된 후 배치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봉 길이 축소와 중량 경감은 연습용 5식 격뢰로 훈련한 후에 나온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3.3.4. 사람 잡는 호흡장치

파일:attachment/후쿠류/ed.jpg
후큐류의 호흡장치 구조도

후쿠류의 최대 문제점은 호흡장치에 있었다. 후쿠류의 산소공급시스템은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잠수함의 그것을 활용한 장시간의 잠수를 목적[4]으로 하는 화학식 반순환 시스템이었다.

정확하게는 호흡을 통해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기계에 있는 가성소다를 포함한 흡수 캔을 이용해서 탄소를 걸러내고, 다시 산소는 산소탱크로 들어간다는 구조였다. 이걸 활용해서 잠수시간을 5시간 이상으로 늘렸고, 호흡 시에는 기포가 발생되지 않는 등 장점이 많았다. 심지어 해군성에서는 이걸 대형화해서 더 장기간 잠수시키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물론 카탈로그 스펙을 보면 당시 기준으로 획기적인 기술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설계상의 문제도 심각했다. 해당 장비가 기본적으로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배출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기술상 반대로 호흡하면 서너 번만 해도 이산화 탄소 중독으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교범대로 코로 흡입하고 입으로 배출하면 된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직접 실험해 보면 알겠지만, 전투 시에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호흡량을 늘리기 위해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등 사소한 실수들을 감안하면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이런 문제로 인해 후쿠류에서 사용한 개념의 잠수장비는 현대에 '리브리더'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데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사용을 위해 교육받아야 할 내용도 많다. 그리고 스쿠버용 잠수장비 교육을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입으로 흡입하고 코로 배출하게 교육받는다. 물론 리브리더를 비롯한 스쿠버용 장비도 입으로 흡입하고 코로 배출하는 방식에 맞추어서 제작한다.

물론, 호흡법 문제의 경우 숙달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호흡용 통이 깨지거나 호스가 벗겨지거나 해서 호흡회로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일은 더 심각해진다. 흡수캔 속의 가성소다, 즉 수산화 나트륨은 물과 격렬하게 반응해서 끓어오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끓어오르는 강염기는 호흡기로 들어가서 심각한 화학 화상을 입힌다. 심지어 날림으로 제작된 장비 덕분에 가만히 있더라도 바닷물이 저절로 누수가 되는 경우까지 있으니 아무리 행동을 조심하더라도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훈련 중에 적어도 10여 명이 호흡기 화학 화상으로 사망했다.

3.3.5. 손쉽게 제거당함

후쿠류 부대는 앞서 언급한 문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형을 짜서 대기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물론 한 명이 터지면 그 순간 모든 부대원들이 같이 폭발하건 충격파만 받건 간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뻔하다.

일본군이 이런 전술을 만든 것은 후쿠류 특공대 위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상륙정이 돌진해온다는 것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상륙작전에는 기본적으로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동반한 화력지원이 따르기 마련이다.

후쿠류 부대원들의 경우는 60m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 부분은 다시 언급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산개하면서 각 대원간의 거리를 유지해도 상대의 제압사격에 안전한 것은 아니다. 상륙 직전의 예비 함포 공격이나 미군 특유의 항공대가 소해를 위해서라도 뿌려댈 소형 폭탄이나 잠수함으로 착각하고 뿌린 폭뢰가 하나라도 인근에 떨어진다면 수중 폭압으로 인해서 유폭되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기본적으로는 한 방에 전멸이다. 게다가, 연합군이 상륙 직전 해안가에 침투해 장애물 등을 사전에 제거하는 UDT 대원들을 투입할 경우 호신 병기를 지참하지 못한 후쿠류 대원들은 둔한 잠수복으로 인해 도망도 못 가고 말 그대로 위치가 고정된 기뢰처럼 물리적으로 소해당하며 죽는 수밖에 없다.

이 정도는 이해하고 있던 일본 해군도 해 뜨기 전에 바닷속에 들어가기 시작해서 버티다가 해가 지고 나면 전장을 이탈해서 바다를 벗어난다는 전술을 세워두긴 했지만, 이건 항공 정찰을 피해 볼 수는 있어도 제압사격 한 방에 날아간다는 근본적인 해답은 되지 않았다.

자체적 결함, 포격, 폭격, UDT 등 모든 위협을 아주 운좋게 피하면 한 번 정도는 기습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한번 당하고 나면 반자이 돌격에 대해서 기관총 난사로 상대한 것처럼 쓸려나갈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3.3.6. 연쇄폭발 가능성

앞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안전거리는 60m다. 이건 자살공격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해당 공격에 의해 주변에 있는 다른 후쿠류들이 휩쓸려서 공격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수중이라는 환경상 충격파등이 별로 상쇄되지도 않고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당장 이런 이유로 인해 잠수함 주변에 폭뢰가 터져도 잠수함이 우그러들어서 그냥 격침당하거나 균열이 발생해서 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적진 한가운데로 부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잠수함같이 격벽과 대압력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니고, 조잡한 잠수복 하나 입은 상태에서 적어도 상륙정 하나는 직격하면 개박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드는 수준의 강력한 폭탄이 수중에서 터졌는데 주변 사람들이 멀쩡하기를 비는 것은 모순이다.

여기에 더해서 들고 있는 폭탄의 재질도 안 좋다. 조악하게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냥 들고 있어도 물속에 있으므로 침수현상이 발생해서 불발되거나 망가지는 것은 그냥 양호한 수준이고, 충격파로 인해 연쇄폭발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따라서 사실상 주변에서 한 발이라도 오발이든 공격 성공이든 폭발한다면 주변의 폭탄과 운용병이 모두 연쇄폭발하거나 충격을 받고 기절하거나 부상을 입거나 폭탄이 망가져서 공격 불가 상태가 되므로 안 그래도 미흡한 공격능력이 더 떨어진다.

3.4. 실제 배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는 방공호를 파고 있던 훈련병들을 중심으로 투입할 예정이었지만 워낙에 훈련 과정에서 사고가 다발하였기 때문에 해군 육전대의 노병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후쿠류 부대는 원래 요코스카의 5개 대대를 포함해서 사세보 등지에 총 10개 대대가 창설될 예정이었고, 요코스카에서 훈련되던 잠수부대 480명을 시작으로 해서 총 3,000명이 훈련을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6,000명이 목표였다.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1945년 9 - 10월에 혼슈간토지방에 위치한 치바현 쿠주쿠리 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5] 10월 중순까지는 후쿠류 부대를 배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몰락 작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투입된 후쿠류 중에서 성과라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기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이미 정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다행스럽게도 그 전에 종전이 이뤄져서 실전 투입은 없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 일본 특공 병기들의 결과는 죄다 이 모양이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훈련을 마친 후쿠류 대원은 1,200명이었다.

미 해군의 기록 중에도 1945년 1월과 2월에 두 차례 상륙정과 상륙지원함이 자폭 잠수부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들은 후쿠류가 아니다. 애초에 잠수부들이 함선에 폭탄을 붙이는 등 육박공격을 가하는 것은 Decima Flottiglia MAS처럼 당시의 특수전 사례에도 매우 많았다. 그리고 일본군의 경우에는 특공 부대가 아니라고 해도 전투하다가 후퇴나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스스로의 자발적 판단으로 자폭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공격이 발생한 지역도 일본 본토에서 한참 떨어지고 당시 시점으로는 미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고 고립된 팔라우 지역이므로 일본 본토에만 배치된 후쿠류용 장비를 지급 받을 수 없었고 후쿠류 훈련도 불가능했으므로 그냥 현지의 일본군 부대가 독자적으로 자폭 잠수부를 운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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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류의 예상 매복위치를 표시한 지도


[1] 한국 음으로는 복룡. 복룡봉추의 그 복룡이다.[2] 다만 이 보고라는 것이 일본군 특유의 혼자서 초월품인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한 개발 보고서라서 신뢰도가 의심스럽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통신수단 부분이나 잠망경의 시야 같이 묘하게 괜찮은 평가가 나온다 싶으면 대부분 출처가 초기 테스트 기록이다. 본문을 보면서도 이런 부분을 유념할 것.[3] 이해를 위해 65kg 짜리 강철 갑옷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냉병기는 물론 소화기도 조건에 따라 막을 수 있다.[4] 일본 해군은 제로센 때 조종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긴 체공시간 유지라는 삽질을 하고도 이때까지 정신을 못차렸다.[5] 하지만 완전히 오판하고 있었다. 미군은 올림픽 작전으로 규슈를 먼저 공략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6] 장님으로도 불리는 시각장애인은 애초에 한국에서도 전시근로역이나 군복무 면제 처분을 받을 정도로 일상생활이 곤란한 수준이기 때문에 일본군도 후쿠류로는 징집하지 않았다.[7] 창으로 찌르는 건 아니고, 그냥 폭발물을 등에 지고 헤엄쳐서 적함에 올라 탄 뒤 자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