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Michael Littlefield |
1. 개요
2001년 7월부터 2007년 9월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단장으로 재직한 인물.[1]2. 상세
단 6년만에 스몰마켓[2]이던 피츠버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93년부터 2012년까지 20년간 피츠버그가 5할 문턱을 넘지 못하는데 제일 큰 역할을 했다. 피츠버그는 2013년이 되어서야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진출에 성공하여 그의 흔적을 지웠다. 그가 사임하고 5년이나 피츠버그는 암흑기가 지속되었으며, 사실 그가 야기했던 암흑기 지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3] 행적만 보자면 빌 버베이시와 비견되는 인물이다.국내에 몇 안되는 해적 팬들과 해외의 유수의 벅스 팬 블로거들에게는 사실상 금지어나 다름없다. 말그대로 기상천외한 트레이드와 드래프트[4]까지. 동시대의 단장 중에서는 악명높은 빌 버베이시 다음가는 평가를 받으며 현시대의 찰리 몽포트 구단주나 아르테 모레노 구단주에 비해 절대 밀리지 않는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나 리틀필드가 실패한 분야는 리빌딩과 육성. 말 그대로 피츠버그 파이리츠 버전 홍준학과 다름없을 정도로 약팀임에도 불구하고 주제 파악을 못하고 팜 시스템을 경시하다가 암흑기를 의미없이 연장시켰다. 사실 파이리츠는 선술했듯 그가 부임 당시 이미 처참한 약팀이었으며 따라서 리빌딩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재직기간 동안 제대로된 팜 운영이 실종되면서 리빌딩에 계속 실패하게 만들었고, 이는 피츠버그가 2012년까지 20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의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팀을 떠난지 10년이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피츠버그 팬덤에게 최악의 인물 중 하나로 통하고 있다.
3. 트레이드
첫 트레이드 부터 범상치 않았다. 제이슨 슈미트[5] ↔ 유망주 2명을 트래이드시켰다.
거기에 재임기간동안 제이슨 켄달, 션 케이시, 아라미스 라미레즈, 크리스 영, 게리 매튜스 주니어, 케니 로프튼을 트레이드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유망주마저 얻어오지 못하면서 그의 무능함을 보여준다.
재임기간 내에 유일하게 피츠버그가 이득을 본 딜은 브라이언 자일스 관련 딜. 펫코파크를 새롭게 개장했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했는데, 당시 샌디에이고 단장이던 케빈 타워스는 툴 면에서 저평가받았지만 선구안 좋은 파워히터였던 외야수를 찾았고, 피츠버그는 때마침 샌디에이고가 필요한 외야수인 브라이언 자일스를 시장에 내놓은 상태였다. 처음 리틀필드가 요구한 것은 재비어 네이디였으나 타워스는 이를 거절했고 최종적으로는 제이슨 베이 + 올리버 페레즈 + 쩌리 유망주 1인의 패키지로 자일스를 넘기는데 합의했다. 제이슨 베이는 2004년에 ROY를 수상하고,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도 팀의 간판으로 활약했고, 올리버 페레즈는 로테이션을 그럭저럭 채워주고 메츠로 넘겼다. 흥미로운 것은 올리버 페레즈를 대가로 받은 메츠 선수가 다름 아닌 재비어 네이디였던 것. [6] 베이와 올리버 페레즈, 그리고 두 사람의 유산이 남긴 성적이 더 좋았던 것은 사실이나 세간의 인식처럼 자일스 딜은 타워스의 압도적 패배는 아니었다. 자일스의 은퇴시즌 성적(.191 .277 .271)이 너무 처참해서 평가가 나빠진 것이 크지만 자일스는 샌디에이고에서 밥값을 다 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2005년에 당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피츠버그 에이스였던 킵 웰스[7]를 얻기 위해 라이언 하워드[8]를 오퍼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리틀필드는 단언지하에 거절하고, 투수 크리스 벤슨을 상대로 라이언 하워드를 제안한 2차 오퍼도 단칼에 거절한다. 결과론적으로 라이언 하워드가 2005년 ROY, 2006년 MVP 수상을 포함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반면, 피츠버그는 페드로 알바레즈가 반짝하기 전까지 1루 슬러거를 구하지 못해 오래 고생했고 지금도 장타력 부족으로 고생한단 걸 감안하면 엄청난 미친 짓이었다.
이런 짓들을 자행하던 리틀필드는 결국 2007년 샌프란시스코가 처리하고 싶어했던 고액 연봉투수였던 말년의 맷 모리스를 연봉보조 없이, 게다가 당시 쏠쏠한 활약을 해주던 외야수 라자이 데이비스까지 조공하면서 데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줬다. 팬들의 비난에 직면한 구단은 결국 동년 9월에 그를 해임한다.
물론 제이슨 베이, 프레디 산체스, 아담 라로쉬, 호세 바티스타[9], 새비어 네이디 등 준수한 선수들도 영입하긴 했지만, 그 동안의 트레이드 성적은 형편없다 못해 재앙에 가까웠다고 평가해도 될듯 하다.
4. 드래프트
재임기간 동안, 그는 포텐셜, 재능을 중시하기보다는 사이너빌리티, 즉 계약이 얼마나 용이한가에 중점을 두고 드래프트를 시행했다. 이를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2007년 드래프트였다. 당시 피츠버그는 전체 4순위 픽을 행사할수 있었고, 당시 모든 사람들은 피츠버그가 당시 "마스크를 쓴 마크 테셰이라"라는 평가를 받던 대학 최고 유망주 포수이자 스위치타자인 맷 위터스를 픽할 것으로 예상했다. [10] 하지만 놀랍게도 전문가들에게 "메이저 가능성도 희박하며, 잘 쳐줘봐야 좌완 스페셜리스트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다니엘 모스코스(Daniel Moskos)를 픽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병신 짓을 저지르고 만다. 역시나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고, 이는 후에 리틀필드가 짤리는데 일조한 한 요인이 되었다. [11] 당시 피츠버그의 포수 뎁스가 넓지 않다는 걸[12] 감안했을 때, 이때 위터스를 픽하지 않은건 피츠버그로서는 엄청난 타격이다.또한 2002년에 얻은 전체 1픽을 리틀필드 자신조차 "향후 준수한 3선발 포텐" 정도로 평가하던 대학 출신 우완 브라이언 벌링턴[13]에 행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었다. 당시 그가 패스했던 선수[14]들이 B.J. 업튼, 프린스 필더, 잭 그레인키, 닉 스위셔, 맷 케인, 콜 해멀스, 제프 프랭코어 같은 대단한 선수들임을 감안할때 결과적으로 전체 1픽을 허공에 버린 셈이었다.[15][16]
2006년 드래프트도 골때리는데, 전체 4픽을 가지고 있던 피츠버그는 우완 브래드 링컨을 선택했다. 하지만 링컨은 드래프트된 그 해 곧바로 토미 존 수술을 받았고, 복귀 후 성장도 더뎌서 통산 bWAR은 고작 0.4에 불과하다. 그나마 불펜으로 자리잡아 2012년에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런 링컨을 트레이드해서 받아온 트래비스 스나이더[17]가 2013년까지 별볼일 없는 성적을 냈고 그나마 2014년에 쏠쏠히 활약해준 정도로 큰 이득은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링컨을 픽하면서 피츠버그가 거른 선수들이 클레이튼 커쇼, 팀 린스컴, 맥스 슈어저.[18] 여기에 이 셋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이안 케네디도 걸렀다.
그나마 성공사례라고 한다면 폴 마홀름(03), 로컬 보이였던 포수 닐 워커(04), 그리고 피츠버그의 아이콘으로 성장한 앤드류 맥커천(05)가 있다. 마홀름은 준수한 3선발로서 잘 성장했고, 워커는 포수로서 발전이 더디다가 3루로 전향, 이후 다시 2루로 전향하여 견실한 2루수로 성장했다. 맥커천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맥커천 픽도 사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리틀필드의 공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당시 리틀필드는 스카우터들이 추천한 맥커천 대신에 대학 우완 투수를 픽하려고 했는데, 스카우트진이 극구 만류해서 맥커천을 뽑았다고 한다.[19]
사실 리틀필드 시절 피츠버그의 문제는, 드래프트 실패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팜 시스템 육성 실패가 진짜 문제였다. 인건비 아낀답시고 중남미 담당 스카우트를 공석으로 둘 정도였다. 2005년 이후 하위권를 도맡아 했음에도 해마다 평가하는 파이리츠 유망주 TOP 10이 항상 1위인 앤드류 맥커천과 쩌리들이었음을 감안했을때 리틀필드의 팜 운용은 말 그대로 대재앙에 가까웠다고 할수 있겠다. 그리고 위에 말한 것처럼 그나마 얻은 선수들도 삽질 트레이드로 하나하나 날려 버리면서, 피츠버그가 20년간 리빌딩을 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5. 총평
상술했듯 피츠버그 파이리츠 팬덤에게 있어서 팀 역사상 최악의 인물 중 한 명으로 통하며 안 그래도 당시 최악의 약팀이었던 피츠버그를 답이 없는 팜 운영과 트레이드로 더욱 침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지구에 그와 비견되는 단장으로 에드 웨이드가 있었다[20][21].6. 피츠버그 해고 이후
해고장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2007년 12월,7. 여담
11월 9일에 전, 현직 스카우트들과 구단 직원들의 모임인 Mid Atlantic Scouts Association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고 한다.이곳을 통해 리틀필드가 92년에 작성한 59명의 선수들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를 확인할 수 있다. 데릭 지터, 조니 데이먼, 제이슨 지암비, 릭 헬링 등 오래된 MLB팬이라면 알만한 소싯적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과거가 궁금하다면 참고해보도록 하자.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데,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민경삼 SSG 랜더스 사장이 해외연수를 받던 시절 데이브 리틀필드는 부사장이었다. 처음에는 동양에서 온 이방인으로 여겼지만 민경삼이 일에 성실한 면과 더불어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배팅 볼을 던져주다 타구에 얼굴을 맞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구단 측에선 보험이나 치료비 등 보상을 걱정했는데 민경삼은 부주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개인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대응해 데이브 리틀필드와 그 일로 깊은 친분을 맺을 수 있었고, 2002년 SK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캠프지로 사용하는 브랜든턴에서 교육리그와 전지훈련을 소화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고 한다.
[1] 마침 동시대 최악의 KBO 단장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정재공 前 KIA 타이거즈 단장과 재임기간이 완벽히 일치한다.[2] 뭐, 야구장도 멋있고 하니 성적' 따라주면 최대의 빅마켓까지는 아니어도 준수한 미들마켓 그 이상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 피츠버그와 함께 펜실베이니아 주의 양대 대도시로 분류되는 필라델피아와 비슷한 조건으로, 실제로 성적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필라델피아는 보스턴에 필적하는 빅마켓으로 성장했다.[3] 이미 리틀필드가 부임했을 때 피츠버그는 리그 대표 약팀 중 하나였다.[4] 아무리 드래프트가 미래를 놓고 도박을 벌이는 짓이라고는 하지만 파이리츠 드랩의 역사는 해도해도 너무했다.[5] 피츠버그에서 어중간했던 슈미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에이스로 군림한다. 대표적인 토미 존 수술 후 구속증가 사례. 트레이드 파트너였던 쩌리 1 라이언 보겔송은 잉여취급 받다가 일본프로야구를 전전했었는데, 뜬금없이 2011년 SF자이언츠에서 13승 7패 평균자책 2.71로 대활약한 뒤 선발의 한 축을 차지한다. 그 후 사이영상 2위까지 차지하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군림한다. 트레이드에 엮인 모두가 결국 자이언츠에서 터진 기묘한 우연.[6] 자일스 관련 딜의 최종 패자는 다름아닌 메츠였다. 메츠는 중견수 마이크 카메론을 받고 네이디를 데려왔는데, 마이크 카메론은 샌디에이고에서 2시즌간 WAR 7.6을 기록하며 대활약했지만 네이디는 1시즌을 쓰고 피츠버그에 넘겼다. 메츠의 1패. 네이디를 주고 데려온 올리버 페레즈에게 큰 계약을 줘가며 기대했지만 5시즌 동안 그가 올린 WAR는 1. 1 WAR을 얻기 위해 메츠가 지불한 돈은 3280만 달러였다. 그 사이 네이디는 피츠버그에서 2.9 WAR을 올렸다. 메츠 2연패. 이 눈물나는 이야기는 보스턴에서 .267 .384 .537을 기록하고 시장에 나온 제이슨 베이에게 큰 계약을 다시 안겨주는 것으로 대단원을 찍었는데, 메츠에서 3시즌간 제이슨 베이는 .234 .318 .369 WAR 1.8을 기록하며 4275만 달러를 수령했다. 메츠 3연패.[7] 에이스는 에이스인데 05년 스탯이 8승 18패 5.09였다. 이런 선수를 에이스로 만든 피츠버그의 팀 운용도 운용이지만, 이런 쩌리 얻자고 라이언 하워드를 오퍼하는 당시 필리스 단장 에드 웨이드의 창의력도 놀랍다. 하여간 웨이드도 리틀필드 못지 않은…[8] 이 당시 마이너를 맹폭했지만, 1루수였던 짐 토미에 사실상 막힌 상황이었다.[9] 물론 토론토에서 터지기 전이다. 바티스타 경우는 특이한 점이 BA등에서 피츠버그 마이너 내 최고 파워 툴로 지속적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메이저에서는 어중간한 스탯을 올린 덕에 리틀필드 후임인 헌팅턴도 토론토와 마이너 포수와 바꿨을 정도로 기대치가 없었다. 그러나 바티스타가 토론토 타격 코치의 조언을 듣고 말그대로 대폭발한 이후 바티스타는 베이와 함께 헌팅턴의 트레이드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물론 터질 놈이 토론토 가서 터진거라고 변호하는 의견도 있긴 하나, 파워히터가 없는 피츠버그를 생각하면..[10] 참고로 앞순위에 픽됐던 선수들은 데이빗 프라이스, 마이크 무스타커스, 조쉬 비터스[11] 맷 위터스는 오리올스 입단 이후 준수한 공격력과 메이저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가진 포수로 성장했지만, 데이빗 모스코스는 예상대로 불펜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채 나이만 먹어가며 메이저리그 통산 31경기 출장에 그쳤고 말년에는 멕시칸리그에서 뛰었다.[12] 이후 헌팅턴 단장 시절 팀이 중흥기를 맞이했을 때도 주전 포수는 러셀 마틴, 프란시스코 서벨리 등 외부 영입으로 충당했다.[13] 마이너에서 부상 이후 어려움을 겪던 그는 여러 팀을 떠돌다 결국 2011년 일본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에이스가 되었다. 일본에서라도 에이스급를 할 정도면 아예 실력이 없는 선수였던 건 아니지만 보통 일본 최고의 선수들 중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는 선수는 몇 명 없다보니 전체 1순위로는 그야말로 망픽.[14] 2002년 드래프트는 세간에 머니볼 드래프트로도 알려져 있는데, 결과론이긴 하나 머니볼의 주인공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입장에서는 7장의 1라운드 픽을 가졌음에도 큰 재미를 보지 못한 드래프트로 남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다만 이들에게는 그래도 선구안 좋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유망주들을 뽑겠다는 의도가 확실히 있었다. 그리고 여긴 닉 스위셔랑 조 블랜튼 둘은 확실히 건졌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오클랜드에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적 후 빅리그에서 7년을 버틴 마크 티헨도 있고.[15] 전체 1픽을 그냥 버린 팀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다. 2004년 전체 1픽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에서 당시 제 2의 A-Rod라는 평가를 받던 고딩 유망주 맷 부시를 픽했는데, 마이너에서의 삽질과 함께 사생활에서의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망하던 분위기에서 강한 어깨를 살려 그는 불펜투수로 전향하여 탬파베이 팜 산하에서 재기를 꿈꿨지만 제 버릇 개 못 주는지 음주운전 등 사고를 일으키고 방출되었다. 참고로 그 이후 픽된 선수들로는 전체 2픽인 저스틴 벌랜더가 있고, 그 외에 빌리 버틀러, 제레드 위버, 스티븐 드류 등이 있다.[16] 물론 파드리스 입장에서도 이때의 드랩은 할 말이 있다. 대학 최대어 유격수와 투수가 모두 스캇 보라스 사단인데 돈 없는 파드리스 입장에선 어쩌란 말인가. J.D. 드류 사태를 다시 겪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맷 부시는 샌디에이고 출신으로 만약 성공을 했더라면 조 마우어처럼 지역출신 프렌차이즈 스타를 얻을수도 있었을 거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이다.[17] 공교롭게도 링컨과 똑같은 2006년 드래프트 1라운더로, 전체 14번으로 토론토가 지명했다. 그나마 토론토 이후 픽에서는 이안 케네디를 제외하면 스나이더보다 확연히 뛰어나다고 할 선수가 마땅치 않아 그렇게 실패한 픽이라고 하기는 뭣하다.[18] 더구나 린스컴의 경우는 원래 지명하려던 탬파베이 레이스가 에반 롱고리아 얻어보겠다고 포기했던 케이스. 물론 린스컴의 신체조건이나 딜리버리 자체가 워낙부상우려가 컸기 때문에 스카우트들의 눈에 거부감이 컸던 것은 사실이고, 실제로 짧은 전성기 이후 린스컴은 부상으로 몰락했다. 물론 탬파베이 입장에선 롱고리아가 터졌으니 다행이고, 피츠버그 입장에서는 아무리 전성기가 짧다고 해도 링컨 뽑겠다고 린스컴을 거른건 희대의 실책.[19] 당시 맥커천이 뽑힌 1R 11번 이후 1R에 드래프트된 대학 우완 가운데 MLB에서 통산 bWAR 10을 넘긴 선수는 클레이 벅홀츠(16.7)와 맷 가자(12.5) 둘 뿐이다. 그나마 이 둘 중 한명을 리틀필드가 뽑으려고 했다면 사정이 좀 낫겠지만, 누가 뽑혔던간에 통산 bWAR이 40을 넘는 맥선장과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20] 2011년 트레이드 데드라인때 행사한 마이클 본과 헌터 펜스 트레이드로, 거슬러서는 로이 오스왈트 트레이드로 대차게 욕쳐먹고 있는 그 사람이다. 그나마 헌터 펜스에 대한 트레이드 평가는 괜찮았지만, 마이클 본에 대한 트레이드 급부는 그야말로 상쩌리들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된다. 애틀란타 팜 산하에 쓸만한 유망주 투수들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할때, 본이 아무리 똑딱이라도 고작 쩌리들 얻어왔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가뜩이나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역사적으로 빌리 와그너, 브래드 릿지 트레이드 등 필리스에게 호구 노릇을 했던지라 팬들로서는…[21] 게다가 이쪽은 FA로 돌아오겠다던 랜스 버크먼을 버린 것 때문에 팬들에게 감정적으로도 욕을 신나게 먹는다. 결국 버크먼은 철천지 원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가서 애스트로스를 신나게 두들겨팼고, 휴스턴 홈팬들은 홈에서 버크먼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플리즈 컴백"을 외치며 박수를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22] 컵스 팬덤에서는 염소의 저주를 103년까지 연장시켰다는 이유로 혹평을 받지만, 의외로 현장에서는 평가가 나쁘지 않은지 2007년 포브스가 발표한 MLB 단장 랭킹에서는 양키스의 브라이언 캐시먼보다 더 높은 평점을 받았고, 컵스 단장 해임 이후에는 양키스가 단장 보좌역으로 영입해 10년 넘게 롱런 중이다. 다만 이는 2007년 컵스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컵스 말년엔 정말 무능하기는 했다. 결국 지금까지도 단장직을 맡지는 못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