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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3:32:58

마해영/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마해영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롯데 자이언츠 1기4. 삼성 라이온즈
4.1. 2001 시즌4.2. 2002 시즌4.3. 2003 시즌
5. KIA 타이거즈
5.1. 2004 시즌5.2. 2005 시즌
6. LG 트윈스7. 롯데 자이언츠 2기8. FA 평가9.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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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해영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부산 출신으로 부산고등학교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아마추어 시절 차세대 빅뱃 자원으로 촉망받으며 2년 후배 심재학과 함께 국가대표팀 쌍포로 활약했고, 일부 아마야구에 관심이 많은 롯데 팬들의 기대를 받았다.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시절, 워낙 힘이 좋아 장타가 자주 나오던 탓에 야구장 그물 너머의 과학도서관 유리창을 하도 깨서 학교 측에서 도서관 1층에 창살을 설치했다는 일화도 있다. 현재는 이공대 캠퍼스 옆에 있던 야구장은 경기 양주시 장흥면으로 옮겨갔다. 송추야구장, 축구장, 럭비장 등도 같이 갔으나, 창살은 그대로 남아 있다.[1]

4학년이던 1992년 고대의 수비 포메이션은 좌완투수 이상훈, 우완투수 조성민, 1루수 강상수, 2루수 마해영, 3루수 홍원기, 유격수 김종국, 외야수 심재학, 조경환, 조원우, 김경하, 포수는 권오성이었다.

3. 롯데 자이언츠 1기

파일: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동점 홈런을 친 후 축하를 받는 마해영.jpg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롯데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곧바로 입단하지 않고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소 늦은 26세의 나이로 199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참고로 마해영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군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해서 당시 롯데의 강병철 감독을 찾아와서 롯데의 1차 지명을 받아서 내년이면 입단할 수 있는데 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자 강병철은 마해영의 포지션부터 물어봤고 마해영이 주 포지션은 1루수고 3루수도 볼 수 있다고 하자 바로 "그럼 군대 문제부터 해결해라"라고 돌려보냈다고 박재홍의 유튜브 채널 빵카페에서 술회했다. 마해영은 강 감독의 조언을 따라 프로 입단을 미루고 상무행을 택했으며 상무는 당시 공군 소속으로 공군의 복무기간(30개월)을 적용받으나 국가대표는 육군의 복무기간(26개월)을 적용받아 26개월 2일 복무하고 1995년 3월에 전역했다고 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20대 초반 한참 체력이 넘칠 나이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은 국가대표 출신 대형 신인을 상무를 보내서 2년을 썩게 한 강병철의 실책이라고 까는데 당시 제도나 롯데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몰라야만 할 수 있는 헛소리다. 당시 롯데는 1루에 자갈치 김민호, 3루에는 공필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두 포지션에서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상무는 본래 실업리그에 등록되어 있던 팀이라 3대 구기종목 군팀 중 유일하게 프로선수의 입단이 불가능했다.[2] 마해영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군 문제부터 해결하고 오는 게 맞았다. [3][4]

비록 강병철 감독은 마해영의 롯데 입단 전에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지만 그가 마해영에게 해둔 조치 덕에 롯데는 군대 걱정 없는 중심타자를 얻을 수 있었다. 마해영이 데뷔한 1995년에 3루수 공필성의 수비력이 떨어졌으며, 만 34세였던 1루수 김민호가 1994년까지 보여주던 불꽃같은 타격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굉장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뤄졌다.[5]

입단 첫 해인 1995년 시즌 전 신인임에도 주전 3루수와 4번타자로 낙점받았다. 그러나 수비 부담으로 인해 타격에서도 슬럼프에 빠져 5월부터 김민호 대신 1루수로 이동했는데 이 때부터 타격도 상승세를 타며 그의 위대한 커리어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김용희 롯데 감독의 전폭적인 기용으로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프로무대에 적응했으며, 실제로 1995년 전 경기인 126경기에 출전하며 0.275의 타율 18홈런 87타점 16도루[6]를 기록하며 롯데 구단 창단 첫 20-20을 달성할 뻔했다[7]. 특히 95년이 당시 상당한 투고타저 시즌이라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훌륭한 기록이며, 실제로 시즌 18홈런은 리그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고, 이를 반영하듯 wRC+가 137.8로 김응국에 이은 팀내 2위의 기록이었다. 이 성적이면 신인왕도 충분히 노려볼만한 성적이었지만, 하필 그 해에 22홈런을 때리며 wRC+를 150넘게 찍은 삼성의 이동수에게 밀려 아쉽게 수상에 실패했다. 특히 마해영의 이러한 일발장타력은 남두오성시절부터 전형적인 소총부대였던 단타위주의 롯데 타선에 있어 굉장히 반가운 옵션이었으며, 게다가 중심타자였던 중장거리 타자 김민호마저 95년부터 에이징커브를 제대로 맞았던 탓에 입단 첫 해부터 18홈런을 날린 마해영은 롯데 입장에서 아주 매력적인 타자였다. 당시 팀 내 홈런 1위였으며, 15홈런을 때려내 팀 홈런 2위를 기록한 포수 임수혁[8]과 함께 '마림포'[9]로 불리며 팀의 장타력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 타격 폼으로 인해 타격의 정확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아 2년차인 1996년에는 스퀘어 스탠스 형태로 타격폼을 바꿨다. 그러나 타율은 별반 다르지 않은 0.276에 되려 홈런이 줄고 출루율이 급락하는 등 오히려 성적이 더 나빠지자 스퀘어 스탠스를 아예 포기하고 다시 오픈 스탠스 타격폼으로 회귀했다. 그리하여 1997년 타율은 0.259로 더 떨어졌으나 25홈런을 기록하며 서서히 거포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으며, 98년에도 3할에 가까운 정교한 타격에 15홈런을 기록하는 등 롯데의 중심타자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커리어하이는 1999년으로 타율 0.372에 35홈런 119타점 OPS 1.114 wRC+ 180.7의 맹활약으로 타격왕까지 차지했으며, 박정태, 펠릭스 호세와 함께 공포의 클린업타선을 구축해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었다.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호세가 퇴장된 직후에 동점홈런을 때려내고 열광하는 롯데 관중들 앞에서 헬멧을 땅바닥에 내리꽂는 장면은 아래에서 언급될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끝내기 홈런과 함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1999년의 마해영은 구단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이며 다른 해였다면 1루수 골든글러브는 물론 정규시즌 MVP까지 바라볼수 있는 성적이였지만, 하필이면 같은 해에 54홈런을 때려내며 리그를 정복한 괴물이 있어서... 어쨌든 1999 시즌 타자 중에서는 단연 2등에 빛나는 훌륭한 성적이였다. 그 이후로 타율 0.370이 넘는 타자는 10년 뒤에나 등장했다. [10]

2000년에는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구단으로부터 스프링캠프 명단에 강제로 제외되며 시즌 전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음에도 .294/.378/.487 25홈런 90타점으로 자신의 직전시즌에는 비교적 못미치나 누가봐도 뛰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역시 선수협 파동의 여파가 남아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4.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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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쫓겨나다시피하며 2001년 2월 1일 김주찬이계성[11]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트레이드되었다. [12]

마해영 선수 인생의 황금기로, 지명타자로 전업하며 롯데시절보다 훨씬 뛰어난 타격을 선보였으며[13], 특히 2002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때려내며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14]의 주역이 되었다.

4.1. 2001 시즌

삼성에서는 이승엽이 주전 1루수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지명타자로 전업하게 되었고, 3번 타자인 이승엽에 이어 4번 타자로 클린업 트리오로 맹활약했다. 2001 시즌은 커리어하이였던 1999 시즌 다음으로 좋은 152.4라는 wRC+와 4.43이라는 WAR을 기록하며 만개하는 모습을 보였고[15], 2001 한국시리즈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나 팀의 준우승을 막지는 못 했다.

4.2. 2002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2)
파일:삼성 라이온즈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마해영.jpg
파일:삼성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후 축하를 받는 마해영.jpg
삼성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마해영
파일:2002년 한국시리즈 MVP 마해영.jpg
2002년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마해영
이듬해 2002 시즌은 타격왕 경쟁을 했을만큼[16] 작년보다도 더 우수한 161.3의 wRC+와 5.61의 WAR을 보이며 팀의 2년 연속 정규시즌 1위에 큰 힘을 보탰고, 대망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말, 이승엽의 쓰리런으로 동점이 된 9:9 상황에서 이승엽의 다음 타자로 나온 그는 이상훈이 강판당한 후 구원투수로 등판한 최원호를 상대로 끝내기 백투백 홈런을 쳐서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내는 1등 공신으로 등극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MVP는 덤. 이후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선수 시절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4.3. 2003 시즌

2003 시즌에 이승엽 - 마해영 - 양준혁으로 이어지는 이마양 트리오는 무려 127홈런 356타점을 합작하며 역대 최강의 클린업을 자랑했다. 마해영은 시즌 개막 후 4월과 5월에 홈런 14개를 몰아치며 이승엽, 심정수와 함께 홈런 레이스를 펼치며 엄청난 페이스를 보여주었으나, 6월부터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도 거의 치지 못 하며 급기야는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등 슬럼프를 겪었고, 이후 7월에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 그 슬럼프는 어찌어찌 벗어났지만 시즌 막판이었던 9월 들어 다시 부진에 빠지며 급기야 8번 타순까지 내려가는 등 6월과 9월의 부진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더니 포스트시즌에서는 SK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역전 기회에 병살타, 2차전에서 주루 미스로 인해 삼중살을 기록하며 삼성의 플레이오프 광탈에 한 몫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이 해 마해영은 본인의 한 시즌 최다 홈런과 타점을 기록하며 성적 자체는 괜찮았지만 몇 차례의 부진으로 인해 전체적인 성적은 직전 시즌에 비해 떨어졌고, 그 해 지명타자로 뛰던 김동주가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시즌 중반까지는 유력해 보였던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2연패에 실패하였다.[17]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지며 하향세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3년 초에 연봉조정 신청을 했다가 삼성에 찍히기도 했기에 시즌 후 FA가 되었지만 삼성은 그를 잡지 않았고, 삼성과 협상이 결렬된 후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며 삼성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큰 임팩트를 남긴 채, 삼성과의 짧고 굵었던 시절은 좋지 못 하게 끝나게 됐다. 그럼에도 삼성에 대한 애정이 강한 편이다.

삼성 마지막 해였던 2003 시즌 전 2루수 전향시도했다고한다.[18][19]

여담으로 2014년 시즌 후 나는 남자다에 출연한 김제동의 말에 따르면, 삼성 이적 초기 페이스를 못 찾고 매번 죽쑤자, 경기를 보던 대구아재들이 "에이씨 마해영 롯데가서 껌이나 씹어라 xx야"라고 그렇게 욕을 하고 다녔다고... 실제로 2001 시즌 당시 전반기에는 두자리수 홈런도 못 치다가 후반기에 버닝해서 성적을 쌓았다.

그리고 항상 훌륭한 성적을 거두던, 거포이자 홈런타자인 마해영의 모습은 2003년이 마지막이 되었다.

5. 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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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 삼성에게 4년 31억 이라는 당시 FA 최고액을 요구했으나[20] 협상이 결렬되며 시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직전시즌 몇 차례 부진하며 3할 타율과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지만 38홈런을 기록하는 등 시즌 스탯은 괜찮았기에 진필중, 정수근과 함께 FA 최대어로 평가받았고, 4번타자감이 필요했던 KIA에서 제시한 4년 28억 제안을 수락, 당시 FA 최고액을 기록하며 KIA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진필중과 정수근이 각각 4년 30억, 6년 40억 6천만 원으로 이적하며 하루만에 최고액 기록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KIA에서의 활약은 삼성 시절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고, 데뷔 후 처음으로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후 먹튀로 까였다.[21]

5.1. 2004 시즌

계약 첫 해였던 2004 시즌, 개막전에서 4번 타자로 출장해 5회 초 2타점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KIA에서의 첫 안타와 타점을 만들어내면서 팀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그 후 1할 타율에 홈런은 단 1개에 그치는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6월 들어서 주간타율 5할을 기록하는 등 어느정도 살아나기 시작했으나, 장타력이 올라오지 않으면서 8월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2군 강등까지 당할 정도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11홈런에 3할대 장타율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한때 논란이 됐었던 빵 사건이 이 해 나왔다.

5.2. 2005 시즌

다음 해였던 2005년 시즌에는 시즌 4번째 경기였던 SK전에서 만루홈런을 기록했지만 이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4월 중순 두산과의 군산 홈경기에서 멀티홈런을 때려내는 등 살아나기 시작, 5월 들어서는 타율을 크게 끌어올린 후 5월 말 만루홈런 포함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맹활약하면서 시즌 타율 3위에 장타율 2위로 올라서는 등 지난해와는 달리 시즌 초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6월부터 시작된 부진이 끝나지 않으면서 결국 두 차례 2군으로 강등되었고, 자기의 미니홈피에 당시 임시감독이던 서정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가 서정환 감독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시즌 후반 내내 벤치에 있어야 했다.[22] 결국 시즌 종료 후 LG와의 3:3 트레이드로 KIA를 떠나게 된다.

KIA에서의 성적은 2년간 타율 0.275 23홈런 131타점으로 먹튀였지만, 후술할 LG 시절에 비해서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이름값은 못했지만 어쨌든 두 시즌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쳐내고 타점도 나름대로 많이 뽑으며 잘 안 맞지만 그래도 맞으면 위험하다는 공갈포 이미지는 지켰기 때문. 02~03 시절 이종범-장성호 모두 컨택 파워 훌륭했지만 30홈런을 못친다는 것 때문에 모셔왔지만, 그 이종범장성호보다도 홈런을 못쳤다...

6. LG 트윈스

파일:/image/143/2006/10/09/20061007_mmhy.jpg
2005 시즌 후 중심 타자를 원하던 LG 이순철 감독의 요구에 의해 최상덕, 서동욱과 묶여서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KIA와의 계약기간을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셈이었는데 그렇게 이적한 LG에서 급격한, 정말이지 급격한 추락을 보이면서 KIA에서의 그것을 넘어서고 말았다.

2006년에는 잠실 홈 개막전에서 솔로포를 기록했지만 그 외에는 계속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5월 중순 부터는 컨택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타격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고, 5월 16일 롯데전에서 4타수 4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그때부터 타율을 상당히 끌어올리며 살아나는가 싶었지만 찬스 상황에서 번번히 찬물을 끼얹고, 타격 상승세도 다시 꺾이면서 결국 최길성에게 밀리고 7월 초에 2군으로 내려간 뒤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성적은 .270 .333 .379 5홈런 28타점.

시즌 도중 마해영을 데려왔던 이순철이 사퇴했고, 본인 성적도 좋지 못했기에 시즌 종료 후 방출대기 상태로 몰렸다가 베테랑을 중용하는 김재박이 2007년 LG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방출은 모면하였다. 마해영의 재기를 확신했다기 보단 당시 LG 타선이 간판타자 이병규일본 진출 등으로 가뜩이나 약한 타선이 더욱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커리어가 화려한 마해영을 그냥 내보낼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 1군 성적은 11경기 28타수 2안타[23] 0할 7푼 1리(.071). 7푼이, 007 등으로 엄청난 조롱을 받았다. 결국 LG는 중심타선이 약해서 이로 인해 해당 시즌을 5위로, 그것도 포스트 시즌 탈락으로 마무리했다.[24]

당시 LG 2군 감독였던 김영직의 평에 의하면 이미 마해영은 배트 스피드가 느려지는 등의 노쇠화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다고 한다. 마해영은 매일 자정까지 배팅 연습을 하면서 현역 연장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2007년에는 더욱 노쇠화를 보이며 사실상 1군에서 기용할 수 있는 기량이 아닌 수준까지 되었고,[25] 결국 5월 이후로는 더 이상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7. 롯데 자이언츠 2기

파일:/image/001/2008/05/14/kp1_080514105600.jpg

결국 2007년 시즌 종료와 함께 LG에서 방출당했다. 그대로 선수 생활을 끝내나 싶었지만, 2008년 롯데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이 때 새로 부임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의 눈에 들어 우여곡절 끝에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에 연봉 5천만 원이라는 헐값으로 재입단 하게 된다. 원래 롯데 구단에서는 마해영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마해영이 원래 부산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사연을 들은 로이스터 감독이 그런 선수라면 구단에서 직접 데려와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영입했다고 한다. 로이스터 감독의 목적은 고참 선수가 부족한 롯데 선수단에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둠과 동시에, 팬을 중시하는 로이스터의 특징으로 미루어볼 때 흥행적인 차원도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개막전에서는 정보명이 맹타를 휘두르며 출장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경기에서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며 2000시즌 이후 약 8년만의 롯데 복귀전을 치렀고, 8회 초에 안영명을 상대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솔로포를 기록하며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 후로도 로이스터의 신임을 받아 시즌 초 꾸준히 출장하였고, 흥행 차원에서도 대성공을 거두며 부산에 다시 마해영 열풍을 불러왔다. 올스타전 투표에서도 엄청난 득표율로 동군 지명타자 1위를 기록하고 있었을 정도.

그러나 마해영은 이미 38살의 노장으로, 전성기 시절의 불꽃같은 타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시즌이 갈수록 1할대 중반의 타율에 허덕이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고, 롯데도 순위 싸움에 급급한 상황이 되자 2008년 6월 20일에 2군으로 강등당했다. 6월에 2군으로 내려가면서 로이스터 감독이 "이제 그만 은퇴하지 않겠나" 라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거부했다. 그러다 2군으로 강등된 상황에서도 엄청난 득표율로 올스타전 지명타자로 선발되었고, 올스타전에서 희생플라이에 이어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는 활약으로 롯데 팬들에게 기대감을 주었으나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시즌이 종료될 때 까지 1군으로 다시는 승격되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강연 100℃에 출연한 마해영

은퇴 후 2012년 11월 9일 KBS1 <TV 강연 100℃>에 출연하여 로이스터 감독이 시즌 개막 후부터 자신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벤치에만 앉혀놨다가 은퇴 권유를 했고 김성근 감독 덕분에 올스타전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전술했듯이 로이스터는 마해영이 1군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선발 출전 및 대타로 기회를 주었음에도, 자신이 1할대 중반 타율을 기록하면서 부진했다는 말은 쏙 빼고(...) 자신이 정보명에게 밀려 벤치만 달구다 대뜸 2군으로 강등되었으며 채 두 달 동안 기회도 주지 않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등,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을 늘여놓았다. 이게 진짜 거짓말+배은망덕한 게 어떤 감독이 미쳤거나 승부조작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수비도 안하면서 타격도 겨우 1할 5푼 정도나 치는 "지명타자"를 계속 기용하겠는가? 강연에서 정보명이 개막전에서 4타수 3안타 1홈런을 기록하는 바람에 자신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경기에 못 나갔다는 거짓말을 늘여놓았는데, 실제 팩트는 개막전에서 정보명이 그런 맹활약을 했음에도 다음 날 정보명을 빼고 마해영을 선발 출장시킨 게 로이스터였다. 결국 마해영이 6월 이후 1군 엔트리에서 빠지고 주전 자리를 꿰찬 정보명은 96경기 285타수에 0.277의 준수한 타율과 스몰샘플이긴 해도 wRC+ 105.4를 찍으며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당연히 마해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팀에 공헌도가 높았다. 오히려 당시 로이스터는 정보명 대신 마해영을 기용한 부분 때문에 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었다.

이렇게 강연에 나가서까지 태연작약하게 거짓말하는 작태에 몇몇 롯데 팬들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다는 반응.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해영이 로이스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확실한 듯이 보인다. 마해영이 롯데와 다시 계약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게 로이스터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개막 후 6월까지 1할 5푼 치는 타자에게 계속해서 지명타자와 대타로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기회 한 번 얻지 못 하고 벤치에만 앉아있다가 대뜸 은퇴를 권유받은 것처럼 거짓말까지 늘여놓으며 로이스터를 깐 모습에 대해 일부 롯데 팬들은 마해영이 상당히 실망스럽다는 반응. 한 때 자이언츠의 중심타자이자 롯데 마지막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주역이었던 그였지만 친정팀과의 마무리는 그닥 좋게 끝나지 못했다.

8. FA 평가

FA 당시 대졸 12년차의 베태랑의 연차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직전해에 38홈런을 기록한 리그 세 손가락에 드는 거포였기에 그가 다른 팀에서도 20홈런 이상 치는 것에 아무도 의심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처참하게 망하면서, 김응용의 선수 보는 안목을 다시 한 번 올려주는 결과가 되었다. 20홈런만 쳤어도 KIA나 LG에서 먹튀 얘기까진 안 나왔을 것이다.

에이징 커브를 맞으며 말그대로 성적이 급격히 꺾여버린 대표적인 선수라고 볼 수 있다.

9.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5 롯데 126
(1위)
476 .275 131 26 4 18 87
(2위)
76 16 54 .460 .359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6 롯데 120 428 .276 118 26 3 12 64 49 5 30 .435 .325
1997 126
(1위)
452 .259 117 22 3 25 75 61 6 39 .487 .328
1998 126
(1위)
465 .292 136 33
(2위)
2 15 64 77 2 51 .465 .375
1999 132
(1위)
503 .372
(1위)
187
(2위)
38
(2위)
4 35 119
(3위)
111
(3위)
6 59 .672
(2위)
.442
(2위)
2000 132 497 .294 146 25 1 23 90 73 2 51 .487 .37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1 삼성 133
(1위)
470 .328 154
(4위)
18 0 30
(4위)
95 86 1 68 .557 .415
2002 133
(1위)
532 .323
(2위)[26]
172
(1위)
40
(2위)
2 33
(5위)
116
(3위)
92 2 46 .592
(4위)
.386
2003 132 502 .291 146 25 0 38
(3위)
123
(3위)
90 1 56 .568 .37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4 KIA 124 437 .281 123 16 0 11 71 54 4 56 .394 .373
2005 94 338 .266 90 17 0 12 60 46 0 35 .423 .345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6 LG 80 282 .270 76 12 2 5 28 30 1 24 .379 .333
2007 11 28 .071 2 0 0 1 3 2 0 4 .179 .176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8 롯데 32 72 .153 11 0 0 2 8 3 0 14 .236 .287
KBO 리그 통산
(14시즌)
1501 5482 .294 1609 298 20 260 1003 850 46 587 .497 .370

[1] 비슷한 일화로 김봉연도 연세대 시절 운동장에서 친 볼이 백양로를 넘어가는 큰 타구를 자주 날렸다고 한다.[2] 상무가 프로선수를 받은 건 1998년 말 5명을 입단시킨 게 최초이며 프로선수들이 아무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1999년부터다.[3] 그리고 한국 남자들이면 공감하겠지만 그냥 군대영장이 나와서 막 입대하는 경우가 아닌, 본인이 원하는 보직이나 부대로 입대하기는 또 생각보다 어려워서 기회가 생겼을 때 빨리 다녀오는게 맞다. 특히 국군체육부대는 말 그대로 선택받은 자들만 가는 곳이라서 더더욱.[4] 이후 이런 유사한 케이스로는 구자욱이 있었다. 구자욱이 입단할 당시 삼성은 굳건한 왕조를 구축하던 시기로 1군에는 내/외야 포지션 모두 탄탄한 주전으로 차있었고, 2군 역시 뎁스가 제법 짜여져있어 원래는 2군 주전으로도 뛰기 힘든 판이었다. 그러다가 3루를 주로 보던 김정혁이 부상이 깊어 장기간 결장하게 됨에 따라 운좋게 2012시즌을 2군 주전 3루수 뛴 후 상무로 갈 수 있었다. 김정혁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구단에서는 아예 군 문제 해결부터 하게 했을 수도 있다.[5] 김민호는 1993 시즌까지 1루수로 주로 출전했지만 1994 시즌엔 김응국이 주로 1루수로 나오고 김민호는 주로 지명타자로 나오던 상황이었다. 1995 시즌에도 김응국이 초반에 1루수로 나오다가 마해영이 1루수로 가면서 김응국이 외야수로 옮겼다.[6]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해영은 1992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에서 무려 7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오른 바 있다. 당시 추계리그 우승팀은 건국대학교 야구부였으며 건국대 1번타자 이종범은 홈런 3개로 홈런왕에 올랐다.[7] 이후 정확히 20년 뒤인 2015년 외국인 타자 짐 아두치가 롯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0-20을 달성했고 한국인 선수로는 2016년 황재균이 최초로 달성하게 되었다.[8] 사족으로 임수혁은 마해영의 고려대 1년 선배이다. 마해영은 임수혁과 고려대 3년, 상무 1년, 롯데 6년을 함께 뛰었으며, 마해영은 2002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 당시 인터뷰에서 '전날 밤 수혁이 형이 병상에서 일어나 같이 운동하는 꿈을 꿨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9] 임수혁이 任씨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마임포'로 불러야 맞다.[10] 참고로 당시 마해영은 대구보다 상대적으로 큰 사직을 홈으로 써서 삼성으로 강제 트레이드될 당시 이승엽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어려움을 느껴 이승엽과의 실력차를 인정했다고.[11] 2005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한 후 심판 자격을 취득하여 현재는 KBO 소속의 심판으로 활동 중이다.[12] 당시 해태 타이거즈도 마해영의 트레이드를 추진했었다고 하는데, 트레이드 상대는 외야수 김창희와 투수 1명을 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롯데 쪽에서 장성호 아니면 안 바꾸겠다고 해서 결렬. 이후 팀이 KIA 타이거즈로 바뀌고 마해영을 FA로 데려오게 된다.[13] 롯데 시절의 마해영은 평균적으로 wRC+ 120~130중반을 왔다갔다 하는 팀 내의 중심타자였으나 리그에서 손꼽히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삼성 시절의 마해영은 평균적으로 150~160에서 형성되며 리그 한 손가락에 꼽히는 최고의 장거리 타자였다. 물론 99년은 변종이니 넘어가자[14] 85년의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을 제외하면[15] 7월까지 단 8홈런에 그쳤는데 8월 이후 두 달간 22홈런을 기록했다.[16] 결국 타율 2위로 끝났다. 타격왕은 장성호.[17] 당시 두 선수의 성적은 김동주는 타율 .342 23홈런 OPS 1.031, 마해영은 타율 .291 38홈런 OPS .938 로 홈런과 타점을 제외하면 김동주가 압도적이었다.[18] 마해영은 대학 시절 2루수를 본 적 있다. 삼성은 강기웅의 은퇴 이후 정경배가 연타석 만루 홈런을 치는 등 2루수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닥 수비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하고 SK로 트레이드, 이후 박정환, 고지행, 김재걸 등으로 2루수 자리를 돌려막기할 정도로 2루수가 약한 팀이었다. 결국 2004년 FA 자격을 얻은 박종호를 영입하여 2루수 자리를 급히 메꿨으나 박종호마저 부진과 노쇠화를 보이자 2006년 말 롯데에 강영식을 내주고 신명철을 데려와 주전 2루수로 기용한다. 삼성은 이후 신명철이 부진하자 역대 삼성 최고의 2루수라 평가받는 야마이코 나바로를 데려와 2루 공백을 메꾼다. 나바로가 떠나고, 백상원, 조동찬 등으로 눈물겹게 땜빵하다 이학주를 영입하고 기존 유격수였던 김상수가 2루수로 전업하고 나서야 2루가 안정화됐다.[19] 2루수 전향에 실패한 이유로 발 사이즈가 거론된 적이 있다. 실제로 마해영의 발 사이즈는 275mm로 체격에 비하여 많이 작은 편이다. 체격에 비하여 발이 작으니 안정적인 수비 자세를 갖추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한다.[20] 종전 FA 계약 최고액은 2001년 양준혁이 삼성으로 돌아오며 기록한 4년 최대 27억 2천만 원이었다.[21] 공교롭게도 마해영과 같이 FA 최대어로 평가받던 진필중과 정수근 모두 이적 후 먹튀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최대어들이 이적하고 다 죽을 쒀버린 흑역사급 FA가 바로 이 2004년 FA였다.[22] 당시 KIA는 시즌 초부터 투수진 붕괴로 최하위로 추락하며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그나마 타선은 이종범장성호, 마해영으로 어찌어찌 돌아갔지만 시즌 후반에 감독과의 불화로 마해영이 빠져나가며 이종범과 장성호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해영도 LG시절보다 나은거지 그냥 평범한 타자의 성적이었다.[23] 안타 2개 중의 1개는 솔로 홈런이었다. (4월 7일 KIA전) 당시의 영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데, 이유는 그 경기를 KIA가 9대 1로 크게 이기는 상황에서 중계 방송사였던 MBC가(주말 개막전이었기 때문에 지상파 중계가 있었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었기 때문(…). 경기는 마해영의 홈런으로 인해 9:2로 끝났다. 이 홈런은 그날 데뷔전을 치른 미래의 특급투수 양현종을 상대로 기록한거다. 참고로 이 경기는 송인득 캐스터의 마지막 지상파 중계였다.[24] 팀 내 수위타자는 0.308의 이대형(당해 골든글러브, 도루왕), 2위이자 팀 내 4번타자는 0.306, 12홈런의 최동수였다. 그 외에 그나마 쳐준 선수는 0.282 13홈런(팀 내 최다 타점)의 조인성, 0.278, 14홈런의 박용택과 0.285의 이종열이 다였다. 투고타저라고는 하지만 3할 타자는 꼴랑 두 명에, 제대로 된 홈런타자는 조인성과 최동수가 다였고 이마저도 15홈런도 못 넘겼다. 나름대로 외인이었던 페드로 발데스가 좀 쳐주긴 했는데, 장타력이 감소하고 나이가 많아서 발 느린 김재현(...) 느낌이었다. 장타력으로 기대받던 김상사는 영 좋지 않은 3루 수비와 공갈포 기질로 0.235에 7홈런만 때렸고 나머지는... 물론 이 정도면 나름 양반이었다. 이대형의 안타 → 도루 → 박용택의 적시타 후 도루(...) 후 이종열이나 최동수가 주자를 불러들인 후 나머지는 조인성과 발데스가 처리해주는 타격으로 나름의 플랜이 있었기 때문. 2007년 LG의 문제라면 투고타저 리그임에도 봉중근이 기대치 대비 부진한 걸 포함해 선발진이 꽤 약했고, 3루수와 유격수 수비가 불안정하다는 것과 2년 연속으로 이닝을 많이 먹다 체력 저하로 블론세이브를 쌓은 우규민이 좀 문제였다. 이 해 제일 심각했던 팀은 타격왕 이현곤(...)이 있는 KIA였다. 07년 KIA는 KBO 역사상 손에 꼽는 뒤에서 1위 수준의 타격을 선보인 이종범이 주전을 먹어야 할 수준으로 뎁스가 최악이었고 이현곤, 장성호, 이용규 셋만 타자였다. 이마저도 타격왕 이현곤 빼면 그냥 리그에서 그냥저냥한 수준의 타자였으니...[25] 마해영이라는 이름값을 떼고 보면 그냥저냥한 수준이긴 한데 장타율이 급감했고 마해영은 본래 볼삼비가 좋지 않았고 배트 스피드가 줄어들며 삼진이 극도로 늘어나 생산성이 최악이었기 때문. 이 해 성적을 보면 이대형보다도 장타율이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이 때 이대형은 장타율과 출루율이 3할 중후반으로 wRC+ 100을 넘겼다.) 출루율과 OPS도 크게 밀리는 걸 볼 수 있다.[26] 소수점 아래 네자리까지 0.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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