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맹꽁이 서당/에피소드
맹꽁이 서당 | |
에피소드 | |
조선편 | 1권 · 2권 · 3권 · 4권 · 5권 · 6권 · 7권 · 8권 · 9권 · 10권 |
고려편/기타 | 11권 · 12권 · 13권 · 14권 · 15권 · 기타 |
등장인물 |
1. 왕 노릇 제대로 못한 불행한 혜종
첨지어른이 홍시를 보내오자 학동들에게 한 개씩 먹으랬는데 또 난장판을 만들어 재빠른 놈들만 몇 개씩 먹었고 태반은 맛도 못 봤다. 훈장님은 남의 것을 빼앗아먹은 두 명을 혼냈는데도 여전히 뻔뻔하게 나오자 때리면서 소탐대실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서매수 이야기를 했다.그에게는 출세 못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조판서 시절 그 친구가 찾아와 내가 재주가 있는데도 여태껏 급제를 못하니 벼슬 한 자리만 달라고 한다. 하지만 서매수는 친구의 재주를 인정하면서도 벼슬은 못 준다고 하자, 그 친구는 계속 졸라대다 급기야 욕을 퍼붓고 절교마저 선언했다.[1] 그러자 서매수는 친구를 진정시키며 어릴 적 이야기를 한다.
자신과 친구, 봉호라는 다른 친구와 함께 셋이 절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날 주지스님이 홍시 3개를 가져와서 하나씩 먹으라고 주자 서매수가 먼저 하나를 집고 친구에게 건네줬는데, 친구는 봉호 몫까지 두 갤 홀딱 먹어치웠고 며칠 후 봉호는 분해하며 먼저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때 친구에게 실망했다며, 비록 재주껏 고을 원님 정도는 잘 할 수 있겠지만 혹여나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힐까 청을 거절한다고 하여 친구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서매수는 끝내 벼슬을 주지 않았지만, 친구에게 매월 식량과 땔감은 꼭 보내주었다.
훈장님은 한 순간의 일이지만 비록 감 한 개 더 먹은 일이 평생의 출셋길을 막은 거라며, 이렇듯 남의 것을 빼앗으면 장차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온다고 하여 가슴이 철렁한 두 명은 다른 학동들에게 엎드려 싹싹 빌며 내일 홍시 10개씩 갖다주겠다고 했다. 마지막엔 감 서리 하러 다녀야 하니 조퇴시켜 달라고 했다.
2. 호족들의 저승사자 광종
학동 셋이 잔뜩 취한 채 와서 훈장님이 화냈다. 그러자 자기들은 술은 안 마셨다는데, 오다가 술도가에서 거지들이 술지게미를 얻어먹는 걸 보고 자기들도 심심해서 얻어먹었다는 것. 훈장님은 심심하면 공부를 하라고 종아리를 때렸는데도 잔뜩 취한 학동들은 아픈 것도 못 느끼고 곯아떨어졌다.훈장님 말에 따르면 술지게미는 돼지나 먹는 거라고 한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웬만큼 어려운 게 아니면 술지게미를 먹을 일이 없다. 그런데 명색이 양반가 자제인 학동들이 그걸 퍼먹고 다니니 열받기 앞서 한심했을 것. 그래도 당시 술이 상당히 귀한 걸 감안하면 이런 술지게미도 아이들 간식으로 삼삼하게 어울렸다.
그러다가 대뜸 돼지 한 마리가 서당에 들이닥치자 마당쇠가 끌어내면서 이놈이 술지게미를 먹더니 취해서 이런다고 하며 돼지를 쫓았다. 학동들은 돼지도 먹으면 취한다며 마당쇠 고생 좀 하겠다고 웃었다.
나중에 마당쇠가 울면서 왔는데 잔칫날에 잡을 돼지가 산으로 도망쳤다가 호랑이가 물고 가버렸다고... 그러자 훈장님은 잔칫날 먹잘 것이 없겠다고 측은히 여겼다.
아까 혼난 3명은 나중에 술이 깨서 일어나니까 꿈에 무릉도원에 가서 놀았는데 거기는 글이 없어서 아이들이 기 펴고 산다고 하여 훈장님이 호통치고 선대왕 공부로 넘어갔고, 끝나고 나서 어린애들이 벌써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니 효자 되긴 글렀다고 하고 셋은 "술지게미 먹은 걸 퍼마셨다고 과장하다니-"라고 얘기했다.
3. 국태민안 위해 지은 관촉사
학동 한 명이 훈장님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사가 뭐가 잘못된 거 같다며, 애시당초 양반은 놀고 종놈을 공부시켜서 과거를 보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여 열받은 훈장님이 기껏 생각해낸 게 그거냐고 회초리로 때렸다.여기에 다른 학동들도 동조하자 혼냈지만, 하기사 세상사가 잘못된 건 틀림없다며 신분제로 사람을 나누고 천민은 아무리 똑똑해도 벼슬을 주지 않는다고 하며, 몸종이지만 매우 똑똑하여 상전댁 아들의 스승이 된 서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저런 멍청한 놈들보다 서기 같은 제자 한 명을 가르쳐봤으면 하니까, 학동들이 그럼 강미(수업료로 내는 쌀)도 못 받을 텐데 어떻게 살 거냐고 한다. 훈장님은 걱정해줘서 참 고맙다고 비꼬면서 한 녀석 코와 다른 녀석 귀를 잡아당겨 늘어트렸다.
그 뒤엔 관촉사에 있는 은진미륵 이야기를 하며 매우 영험하여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니까, 학동들은 그 동네는 아이들이 글이 없어지길 빌었을 테니 서당도 없을 거라며 우리도 누가 대표로 가서 빌자고 하자 훈장님이 탄식했다.
4. 과거제도 도입
설날에 학동들이 글 읽을까봐 글 안 읽는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들어와서 훈장님께 세배했다. 훈장님은 보통 새해가 되면 점을 보는데 간혹 아주 잘 들어맞는 점도 있다며, 천 냥으로 팔자를 고쳐주는 홍판수 이야기를 해줬다.양반이지만 부모를 잃고 떠돌며 남의 집 머슴 노릇을 하는 상 총각이 있었는데, 우연히 홍판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다 그동안 머슴살이 하며 모은 천 냥을 들고 가서 홍판수에게 내놓았더니 대뜸 자갈 물려 묶는 게 아닌가?
홍판수는 하인들에게 그놈을 송장처럼 거적에 싸들고 시구문을 지나 체봉터까지 가서 밤나무 동쪽 가지에 매달라고 했다. 시구문(屍口門)이란 시체가 나가는 문(門)으로 문 밖은 공동묘지고 체봉터란 시체를 임시로 가매장하는 곳.
상 총각은 꼼짝없이 매달리게 되었고 그날따라 찬 비에 광풍이 몰아치자 천 냥을 뺏기고 죽을 생각에 원통절통하여 몸부림치다 떨어져 풀려났다. 너무 어둡고 비도 오고 사방이 묘지라 도통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신을 임시로 넣어두는 굴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기겁했다. 그런데 시신인 줄 알았던 사람이 온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하게 꺼냈다.
한편 외동딸을 잃은 어느 판서댁은 슬픔에 잠겨있었는데, 날이 밝자 상 총각이 와서 이 댁 따님이 살아있다고 소리쳐서 기겁했다.
그 뒤 외동딸이 정말로 살아있음을 알고 눈물의 상봉을 하는데, 이 딸이 상 총각이 아니면 죽어도 시집 안 간다고 하여 판서는 그에게 글을 가르쳐 사위로 삼았고, 상 총각은 영특해서 금방 글을 배워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되었다는 이야기. 과연 홍판수는 족집게였던 것.
이 이야기를 들은 학동들은 팔자 고칠 생각에 2천 냥도 안 아깝다고 찾으려하니 훈장님이 꿈 깨라며 때렸다.
그날 선대왕 이야기는 광종과 쌍기, 과거 제도에 관한 이야기로, 최세원이란 선비는 낙방하고 친구가 장원급제해서 유가(과거 급제자의 시가 행진)를 한다니까 하늘에 대고 "하늘이시여 똥비를 내려 유가를 못하게 하소서"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를 이야기해주자 학동들은 다들 웃었고, 서당에 안 올 수 있으니까 만날 똥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훈장님의 속이 끓었다.
5. 복수법 만든 경종 임금
어느 날 갑자기 학동들이 때 빼고 광낸 채로 지각도 안 하고 깨끗하고 당당하게 서당에 와서는 글공부에 열심이자 훈장님은 웬일이냐며 좋아했다. 그 중 한 학동은 이순신의 시를 외운답시고 남이의 시를 외웠다.그러다가 어느 선비가 밖에서 쳐다보자 별안간 더 크게 글을 읽더니, 선비가 가자 학동들이 갑자기 글 읽는 걸 멈추고는 서로 자기 자랑을 하길래 훈장님은 대체 영문을 모르고 있는데 마당쇠가 나타나 '학동들 태도가 싹 달라졌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않았냐'고 척 맞혔다. 그러고 나서 최 진사 댁에서 셋째 사윗감을 고르려고 다녀왔는데, 그 셋째 딸은 천하미인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얘기했다.
이에 훈장님은 "어쩐지... 가증한 것들, 눈속임으로 장가들려고 해?"라면서 담뱃대로 때린 다음 순씨 8용 이야기를 해줬으며, 이에 맞먹는 조선시대 인물로 이공린[2]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하루는 이공린이 꿈을 꿨을 때 노인 8명이 우린 지금 솥에 쪄져서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엉엉 우는 꿈을 꿨다. 그 뒤 꿈에서 깬 뒤 여종이 8마리의 자라를 잡아서 요리를 하려고 하자 그 자라들을 모두 물에 방생했다.[3]
그 뒤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으며 오(鰲), 구(龜), 원, 타, 별(鼈), 벽, 경(鯨), 곤(鯤)이라고 거북 구(龜) 아니면 고기 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었으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힌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한 뒤 마당쇠가 동조하면서 "남의 집 착한 규수 데려다 평생 고생시키려는 놈들은 순씨 8용이 아니라 도척의 8거머리"라는 드립을 쳤다. 그러면서 최 진사가 자신에게도 "맹꽁이 서당 학동 중에 누가 제일 쓸 만하냐"고 묻길래, 차라리 시집을 안 보내 늙혀죽일 망정 아예 거기서 사윗감 구할 생각은 말라고 일러뒀다고 한다. 그러자 훈장님이 '잘했어, 잘했어'라고 웃자 화가 난 학동들이 그 자리에서 마당쇠를 린치했다.[4]
간신히 훈장님이 말린 다음 선대왕 이야기로 복수법 이야기를 해줬는데 마당쇠가 세상에 그렇게 좋은 법이 있었냐며 자기는 손봐줄 사람이 많으니 그때로 가서 살고 싶다고 하여 학동들을 데꿀멍시켰다.
6. 나라 기반 다진 성종 1부
한 학동이 글 너무 좋아하다 맹꽁이가 된다고 드립을 치면서 훈장님께 역으로 글 외에는 무능했던 유호인 에피소드를 들려줬다.유호인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글에 매우 뛰어났지만, 글 외에는 어찌나 무능했던지 외근직을 청해서 사또로 부임하자 감사까지 경악하여 왕에게 최하위 성적표를 제출한 건에 대해 사죄하면서도 하소연할 정도였고 왕도 "알 만 하다..."라고 한탄하였고 부임 이후로 상소장을 본체 만체 하여 뿔난 백성들 중 한 명이 상소장을 당장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그저 쩔쩔매고 있는데 보다못한 통인 소년이 "양심 좀 있어 봐욧! 고작 상소 하나 땜시 이렇게 떠들어야겠소?"라고 화를 내자 백성은 더욱 화를 내며 "이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고요!"라고 하니 통인 소년은 "이그! 고작 한 달 넘은 것 때문에 이런 거라고요? 우리 원님이 부임 첫 날 받은 상소도 그대로 있는데, 그 제출자는 그냥 입 다물고 지내고 있다고욧!"이라고 명쾌하게 답변하여 할 말 없어진 백성이 그냥 사과하고 돌아가 위기를 넘긴 일도 있었다.
이때 통인 소년에게 "너는 이 다음에 원님 노릇을 똑똑히 잘하겠다."고 해서 다들 원님은 세상 물정 모르는 맹꽁이라고 웃었다는 이야기. 훈장님도 납득했는지 그날 글은 안 읽고 고려사 이야기만 해줬다. 나중에 한 학생이 고려사가 끝나자 '자기도 죽으면 성종이라고 불러달라'고 얘기했다.
7. 나라 기반 다진 성종 2부
훈장님이 천민이라도 의리를 알고 지킨다면 어찌 양반보다 못하냐며 조태채를 충실하게 모신 하인 홍동석의 이야기를 했다.홍동석은 본래 형조의 서리[5]였다. 어느 날 죄인 누구를 유배 보낸다는 조서를 쓰라고 해 확인해보니 자신의 상전인 조태채가 아닌가. 하인된 몸으로 상전을 배신할 수 없어 붓을 집어던지고 절대 못 쓴다 강력 거부하자 열받은 소론 대신 둘에게 두들겨 맞고 반병신돼 서리직에서 내쫓겼다.
동석은 처자식까지 두고 진도까지 가는 조태채를 충실히 모셨다. 그 뒤 조태채에게 결국 사약이 내려지자, 아들인 조관빈은 부랴부랴 부친과 만나고자 출발했으나 금부도사가 먼저 도착한 뒤였다.
동석은 마지막으로 부자 상봉할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금부도사가 거절해서 결국 조태채가 사약을 마시려하자 동석은 사약을 뒤엎어버렸다. 왕이 내린 사약을 뒤엎으면 대역죄에 해당하여 당연히 금부도사 일행은 동석을 실컷 두들겨팼고, 금부도사와 수행원들도 어명을 제대로 완수 못한 죄로 극형을 면치 못해 할 수 없이 이들은 진도로 가는 바닷길이 험해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사약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으로 보고해, 새 사약이 오는 며칠 사이 부자가 상봉할 수 있었다. 동석은 자기 때문에 일이 커진 걸 알고 있었으니 술과 안주를 사서 금부도사군을 달래주었다.
조태채는 아들에게 홍동석을 형제처럼 대하라는 유언을 남긴 다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고, 조관빈은 유언대로 동석 일가족을 면천시켜주고 가족처럼 대하며 자주 왕래하고 챙겨주었으며, 조태채의 제사 때도 꼭 참석시켰다.
이때 한 녀석이 그 몸종과 다르게 우리집 종놈은 어제 줄행랑을 쳤다고 하는데 학동 셋이 너희 식구가 얼마나 구박했으면 그렇냐고, 인정머리 없는 종자라며 3대가 모두 회개하라고 패드립을 치자 열받은 그 학동이 셋을 두들겨 패버렸다.당연히 저 셋은 맞아도 싼 놈들이다. 자기 일가 어른들을 욕하니 이에 열 안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이놈들은 농담도 못하냐며 반성조차 안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훈장이 "맙소사, 물론 맞아도 싼 짓이지만 그렇게 심하게 패야겠니?"라고 황당해하자 학동은 "부모님 욕도 모자란 이것들이 매가 부족하니 더 맞아야겠습니다."라고 화를 낸다.
선대왕 이야기 후 마지막에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니까 학동들이 단체로 그럼 언제 노냐고, 공부하다 건강 해치면 죽는다고 성화를 댔다.
8. 80만 대군 물리친 혀
학동들이 또 안 나타나자 훈장님이 화내고 있는데 마당쇠가 엿보는 것을 발견했다. 또 엿값 받고 엿보러 왔냐니까 이젠 그런 일 안 한다며, 하도 조용해서 몽땅 죽은 줄 알고 봤다고 했다.훈장님이 이 녀석들을 오늘은 종아리 100대씩 때리겠다니까, 마당쇠는 공자님 같았으면 힘들었을 거라고 하는데 이 말인즉슨 제자가 3천 명이니 100대씩 때리면 30만 대라며 그러면 얼마나 힘드냐는 것. 훈장님은 3천 제자 전부 모범생이었다고 혼냈는데, 마당쇠는 그게 다 옛날 이야기를 잘 해줘서 그런 거라고 해 훈장님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침 학동들이 오는데,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를 만나 이야기를 듣느라 늦었다고 한다. 중국 과거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나라 과거는 기껏해야 5~600명이 치르지만 중국은 수만 명이 치르기에 난다 긴다 하는 선비도 우수수 떨어지고 40수, 50수씩은 재수해야 급제할 둥 말 둥해서 오십소진사(五十少進士; 쉰 살에 급제는 소년에 된 것)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과거 폐단이 매우 심한 때는 황제가 응시자와 이야기하는데, 20살 때부터 오로지 과거에만 매달렸는데 계속 낙방하고 지금 75살인데 급제를 못해 아직도 총각이라고 하자 측은히 여겨 후궁 하나를 아내로 내려줬다고 한다. 그러면서 선비는 내가 조그만 조선 땅에서 급제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냐고 하여 훈장님도 과연 기개 있다고 감탄하는데, 그 다음에 선비가 했다는 말이 같이 놀자는 것이었단다. 이유는 큰 소리 땅땅 쳤지만 급제 못할 건 뻔하니 일부러 늦게 가서 과거가 끝난 뒤에 도착하면 낙방은 아니라서 체면은 선다는 것.
훈장님은 선비가 그 따위 소릴 하냐며 학동들에게 당장 냇가에 가서 귓구멍을 씻고 오라고 한 다음 '에이 말세지, 학동을 가르칠 선비가 그런 짓이나 하고 있으니'라고 얘기했다. 그 뒤 학동들이 안 오자 훈장님이 '뭐 하고 있길에 안 오고 있지'라고 하니까 마당쇠가 '그것도 모르세요? 귀 씻는 핑계로 멱 감고 있겠죠'라고 하자 훈장님 曰 '내 속이 다 끓는다 끓어~'.
나중에 지나가던 행인이 학동들이 멱 감다가 옷을 잃어버렸으니 좀 찾아달라고 얘기하자 훈장님이 '갑자기 옷 열 벌을 어디서 구해'라고 했고 마당쇠는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죽을 맛일 겁니다'라고 하면서 고소해했다.
당연히 날벼락 맞은 학동들은 울고 있었고, 훈장님이 오자 옷을 줄 거라고 생각했더니 역사 공부하려고 온 거라고 하자 크게 실망했다.
그 뒤 선대왕 공부가 끝난 후 훈장님이 옷을 보내준다고 하자 학동들은 훈장님이 옷을 훔쳐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거지들이 학동들에게 자기들이 입던 옷이나 입으라고 던져주며 놀려서 저놈들 소행임을 알았다. 하도 오래 돼서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거지도 입다 버린 옷이라 학동들은 도저히 입지를 못했다.
9. 위기에 처한 왕실 목종 시대
무더운 날 학동 두 명이 서당에 가는데 어찌나 더운지 더위를 심하게 먹어 길을 까먹어버렸다. 우연히 담배씨(속 좁다는 뜻) 영감을 만나 서당 가는 길이라니까 담배씨 영감은 땡땡이 치면서 핑계 댄다고 때려서 훈장에게 "땡땡이범들이니 아주 엄하게 혼을 내서 땡땡이 칠 생각도 못하게 해."라고 하며 끌고 왔다.이에 학동 두 명은 억울하다고 자초지종을 말했고, 훈장님은 매일 다니는 길을 까먹냐며 한탄하다가 "하기사... 더위가 이 정도로 심하니, 건망증이 올 만하구나."라고 혀를 차며 이해하고 건망증이 심한 걸로 유명했던 백곡 이야기를 해줬다.
백곡은 워낙 건망증이 심했는데, 하루는 시모임에 가려고 견마잡이 하인을 찾는데 심부름 보낸 걸 까먹고 안 보이니까 별 수 없이 혼자 말을 타고 가는데, 대문을 나서자 마자 시모임의 시구 생각에 다른 건 다 잊어버려서 말은 밖에서 서성이며 풀만 뜯어먹는데, 마침 처조카가 이걸 보고 말을 끌고 들어오고, 아내가 "벌써 다녀오세요?"라 반기자 백곡은 내가 언제 시모임을 끝내고 돌아왔냐고 혼란해했다. 아내가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집 앞에 계신 걸 조카가 데려왔답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또 한번은 늙은 견마잡이 하인이 이제 자신은 늙었으니 땅을 주면 농사 짓고 살겠다고 했지만 백곡은 무신경하게 딴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하인은 섭섭했지만 말없이 뒤돌아나가는데 뒷모습을 본 백곡은 "앗차! 기억났다!"라고 하며 도로 불러세워 땅을 줄 테니 농사 짓고 살라고 한다. 근데 왜 아까는 그리 무신경했냐고 하니까, 하인이 늘 말고삐를 잡고 다녀서 뒷모습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작 얼굴은 까먹었던 것. 늙은 하인은 "맙소사! 하기사 뒷모습만 주로 보셨으니 앞모습은 잊을 만 하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릴적에는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소변을 보러 뒷간에 가는데, 마침 비가 와서 빗소리를 오줌소리로 착각해 오줌이 끝없이 나오는 줄 안 적도 있었고, 또 어떨 때는 멋들어진 글을 보고 감탄해 3천 번을 읽으며 외웠는데, 친구가 와서 보더니 이건 자네가 지은 글이라고 하기도 했다.
학동들은 이야기를 듣고 빵 터졌고, 선대왕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별 감흥 없이 우리도 백 번씩 듣고 싶다며 백곡 이야기나 또 해달라고 했다.
실제 주인공인 백곡 김득신은 예전에는 매우 영민한 소년이었지만 천연두로 인한 고열 끝에 머리에 이상이 생겨 멍청한 아이가 되었지만 아버지 김치와 선생의 격려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영민한 아이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10. 천운으로 왕이 된 현종
어느 탐관오리의 아들이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짓겠다고 남들은 못 짓게 하라는 걸 시작으로, 학동들을 보고 "저것들은 뭐하는 종자들인고?" 하고 묻고 하인이 이곳 향반들 자제로 서당에 가는 길이라니까 "저것들은 누가 벼슬 준다고 공부하냐? 그냥 나무꾼이나 되지. 가난뱅이도 사람 축에 드냐?"며 방자하게 굴어 학동들이 빡쳤다. 훈장님은 "세상에나.. 사또가 평판이 안 좋다는 얘기가 도는 게 진실이었구나. 아들도 아비처럼 저리 악독하니..."라고 탄식한 다음 조선 시대 인물인 류희분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류희분은 학창 시절 때 점쟁이가 준 신발에다 오줌을 눌 때 ‘차군만리행(嗟君萬里行)’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는데, 뜻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그 뒤 그는 광해군 비의 오라비가 되면서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러 정권을 좌우하는 위세를 떨쳤고 교만과 탐욕을 부르면서 살게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이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자 류희분을 찾아서 재산을 주고 살려 달라고 했지만, 그는 먹튀만 일삼다가 결국 능창군은 광해군에 의하여 사사(賜死)되었다.
그 이후 능양군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뒤 그를 참살할 것을 명했으며 류희분은 나중에 만리동으로 도망갔다가 붙잡혔을 때 '차군만리행'이라는 뜻을 떠올리면서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 뜻은 바로 '임금이 탄식할 때 만리동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며 그 뒤 권세를 누리던 그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마당쇠가 와서 지금 관아에 암행어사가 출두해서 사또가 옥에 갇혀 패가망신했다고 하자 학동들이 아들놈 꼴 좀 보자고 죄다 도망쳐버렸다. 훈장님은 왜 그런 얘길 하냐고 마당쇠를 때렸는데, 갑자기 학동들이 도망치듯 돌아왔다. 어사 출두 소식을 들은 한 선비가 번개 같이 서당 길목에 가서 지키고 있다가 학동들을 몽둥이로 막 때려서 돌려보낸 것. 그러면서 너도 서당 좀 그만 들락거리라고 하며 마당쇠를 끌고 갔다.
11. 구주대첩의 명장 강감찬
훈장님이 출타하여 자습하랬더니 다들 늘어져 자는데 지나가던 마당쇠가 이걸 보고 곯려주려고 학동들 얼굴을 몽땅 먹물로 까맣게 칠했다.학동들은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훈장님이 오자 글 읽는 척했고, 얼굴을 본 훈장님은 낮잠 잔 걸 알아채고 혼냈다. 그 다음 훈장님은 밖에 나가면 공암 산다고 웃어대겠다며 공암 이야기를 했다.
이때 공암에 대해 소개하는 말이 "공암은 한강변에 있는 검둥이 마을이지.", "넷? 세상에 검둥이도 있나요? 세수를 평생 안하고 사나보다."
공암 앞의 투금강의 이름의 유래가 된 이야기, 공암먹과 해주먹에 관한 이야기, 공암나루(지금의 한강 하류 중 행주산성 맞은편)에 있는 광주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12권과 15권에서 두 번 나오고, 윤승운 작가의 <우리겨레 위인이야기>에도 실려 있다.
학동들은 누가 자기들한테 장난 쳤는지 짐작하다 마당쇠를 유력한 용의자로 낙점하는데, 마당쇠는 혼날 생각에 꾀를 써서 첨지 심부름으로 안동 갔다가 지금 오는 척했다. 학동들은 이걸 또 믿었으나, 하필 그때 박 첨지가 나타나서 아침부터 방아 찧으라고 성화인데 여기서 뭐하냐고 혼내서 거짓말이 들통났다.
그날의 선대왕 이야기는 귀주 대첩과 강감찬 이야기로 마지막에 강감찬을 흔히 장군으로 부르지만 실은 무신이 아니라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거란이 쳐들어오자 무신 노릇을 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엔 강감찬에 대한 설화를 이야기한다고 훈장님이 예고하자 학동들이 우리도 문(文)에서 무(武)로 변신할 때가 왔다며 마당쇠를 혼내주러 갔다. 이에 훈장님 曰, '에고, 온 동네가 시끄러워지겠군.'
12. 별밤에 태어난 잘생긴 아이
무더운 여름날 붓장수 공서방이 찾아왔는데 훈장님 말고 아무도 없기에 다 어디 갔냐고 하니까 날이 무더우니 스무 날 정도 학방을 했다고 한다.학동들은 계곡에서 실컷 놀았다가, 이젠 노는 게 지겹다고 자진해서 서당에 와서 거꾸로 글 가르쳐달라고 졸라대서, 훈장님은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고 하면서 옛날 이야기나 해줬다.
어느 고을에 부임한 양 목사는 파리를 하도 싫어해 관아에서 일하는 이방, 형방, 기생까지 모아놓고 매일 파리를 한 되씩 잡아다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다들 꼼짝없이 하루종일 파리사냥을 해야 했고, 양 목사는 매일 꼼꼼히 검사해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하루 한 되씩 잡기가 너무 힘들자 나중에는 파리를 돈 주고 사다바치게 되었고, 아예 파리만 잡아서 파는 파리 장사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양 목사의 별명은 파리 목사가 되었다고. 덤으로 공서방의 말에 따르면 약삭 빠른 놈은 구더기를 길러 재미봤다고 한다.
그날 선대왕 이야기는 한양에 많던 호랑이를 강감찬이 쫓아낸 이야기로, 강감찬이 한양에서 원을 맡았을 때 호랑이가 득실거리자 바위에 있는 한 스님을 데려와서 닷새 이후로 너의 무리를 데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큰 화가 있다고 하자 그 스님이 호랑이로 변했다. 그 뒤 호랑이 떼들이 밤새도록 줄지어서 도망친 뒤 한양에는 호랑이가 없어졌다고 한다.[6] 그 외에도 낙성대 일화, 강감찬이 원래는 잘생겼는데 사람이 잘생기면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마마에 걸려 못생겨졌다는 얘기도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학동들이 "우리 고을에도 호랑이가 득실득실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서당을 아예 안 올 수 있잖아요. 목숨과 글을 바꿀 순 없거든요"라고 해 공서방이 할 말을 잃었다.
[1] 교우관계를 중요시하는 선비사회에서 절교는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2] 박팽년의 사위로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죽임을 당했다.[3] 실제 야사에서는 꿈에서 거북이 나오며, 여종이 부인으로 바뀌어 나온다.[4] 그나마 학동 한 명은 양심이 있어서 앞만 볼 뿐이었다.[5] 하급 공무원으로 글재주가 있는 천민들도 이 정도 일을 할 수 있었다.[6] 전설에서는 호랑이 두령인 승려가 임신 중인 암호랑이 몇몇을 데려와서 "이 아낙들은 지금 해산을 앞둔 터라 쉬이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소. 부탁이건데 아낙들만 출산 이후에 오게 유예기간을 주오."라고 간청하자 강감찬도 고민 끝에 "좋네. 허락하지."라고 하며 임신한 암호랑이들은 출산 후 바로 호랑이무리로 돌아갔지만 새끼 호랑이들이 남아 번식한 끝에 조선에까지 호환이 지속되었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