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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9:19:42

제2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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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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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주도 세력
2차 왕자의 난 <colbgcolor=#ffffff,#1f2023> 이방간, 박포
조사의의 난 이성계, 조사의
이징옥의 난 이징옥
단종 복위 운동 사육신
김처의의 난 김처의
이시애의 난 이시애
임꺽정의 난 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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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면 추대 사건 이하응, 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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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준용 옹립 사건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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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민란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을사의병 최익현 등 조선 의병
정미의병 이인영13도 창의군 }}}}}}}}}
※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colcolor=#f0ad73> 제2차 왕자의 난
第二次 王子之亂

박포의 난(朴包之亂)
<colbgcolor=#C00D45,#600823> 시기 1400년 1월(?) (음력)[1]
장소 조선 개성부 만월대 및 인근
원인 이방간이방원 왕위 승계 불만
박포의 이방간에 대한 반란 선동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조선 조정
(진압군)
이방간 세력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태조 (태상왕)
정종 (국왕)
정안공
지휘관

회안공
참가자

정녕옹주 민씨, 이지란
의안공, 민무구
민무질, 하륜
이숙번, 조영무, 이거이, 이애
조온, 연사종, 이종무, 마천목, 목인해
김법생†
참가자

박포[2], 의령군[3]
오용권, 민원공
이성기†, 최용소
이옥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진압 성공
- 이방간을 위시한 反이방원 세력 제거 및 축출
- 이방간 유배형, 박포 사형
영향 정종의 태종에 대한 왕세자[4] 책봉 및 양위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말5. 후일담6. 사극에서

[clearfix]

1. 개요

1400년회안공[5] 이방간이 일으킨 난. 참모였던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린다.[6]

2. 배경

이방간태조 이성계의 4남으로, 후의 태종 이방원보다 바로 위의 형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노리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특출난 능력이 없어서 주목받지 못했다. 큰 형은 전주 이씨 문중의 장손으로서 음서로 벼슬을 했고,[7], 둘째 형은 아버지 이성계가 현역 장군이었을 때 전장에서 함께 고생하며 군인수업을 받았고, 바로 아랫동생은 여말에 난이도 면에서는 오늘날의 행정고시사법시험을 능가한다는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이성계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런데 방간만 별 기록이 없는 걸 보면[8][9] 재주라고 할 수 있는 건 동북면에서 가병들 데리고 패싸움하는 재주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를 노골적으로 뒤에서 떠들다가 열받은 이방원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1등이 아니라 2등 공신이라는 점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이는 박포가 눈치가 없던 것이었다. 공신 책봉은 본래 사후수습을 위해 정치적인 안배를 어느 정도 해 줄 수밖에 없는 문제다.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이방원에게 무릎꿇은 것 말고는 딱히 한 일도 없는 조준, 김사형이 1등 공신에 올라있는 반면, 정작 이방원의 최측근이자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핵심실세들인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모두 2등 공신이었다.[10][11] 이후 조준 등은 원로로서 구색맞추기 1등 공신의 대접은 받았지만 이성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이전에 비해 실권은 거의 잃어버린 반면, 2등공신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은 (훗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웬만한 1등공신들보다 훨신 더 강한 권세를 누린다.그리고 하나씩 제거당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이방원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방원을 쓰러뜨릴 만한 세력을 물색하던 중 대권에 노골적으로 야욕을 보이는 이방간에게 접근하게 된다. 박포는 방간을 찾아가 '방원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며 꾀었다. 마침 방원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방간이 이에 솔깃하여 대책을 묻자 "첫째, 네 권력을 다 내려놓든가, 둘째, 먼 곳으로 피하든가, 셋째, 군사가 방원에 비해 약하니 기습을 해버리든가 하라"고 답했다.

3. 전개

방간이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을 마침 이래(李來)가 목격하고 이를 스승 우현보에게 알리고, 우현보는 이를 방원에게 고한다. 이에 방간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은 후 정종에게 거병 사실을 알리고 상왕전을 지나면서 태조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 반응이 상당히 안 좋았다. 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주상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敗惡)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해석]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發)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이 소식을 들은 방간은 전의를 상당히 상실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형님 모두 본인을 돕기는커녕 대놓고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쩌자고 이런 짓을 했냐며 다들 절규에 가깝게 뜯어말리려 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죄다 방간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방원을 이길 수 없으며 권력욕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다고 본 것이다. 특히 이성계는 이방원이 자신의 두 어린 아들(이방번, 이방석)을 모두 죽인 것 때문에 그를 매우 증오했고, 몇 년 뒤에는 조사의의 난을 일으킬 정도로 이방원에 대한 반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방간의 반란만큼은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방간도 엄연히 1차 왕자의 난에 적극 가세한 인물이었다. 이성계 입장에선 이방원 만큼이나 방간에 대한 증오심도 꽤 컸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방간에게 승산이 있었다면 적극 지지하여 둘이 공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정종과 태조 모두, 특히 태조는 더욱더, 이방원을 지키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방간이 방원을 이길 그릇이 절대 못 됨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방간도 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정쟁은 단순히 개개인의 실력과 자질보다는 정치적인 명분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방간도 여기에 걸어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막상 거병하니 믿었던 아버지마저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으니, 방간은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방간 역시 이방원을 도와서 아버지의 뒤통수를 쳐놓은 주제에 염치없이 아버지에게 본인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점에서 얼마나 생각없는 인물인지 파악할 수 있다.

아버지와 형 된 입장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1차 왕자의 난을 겪었는데 또 형제싸움을 일으키려 하는 방간이 마뜩치 않았을 것이고,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골육상쟁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또 이대로 방간의 군사행위를 묵과한다면 왕실의 위신 추락은 물론이고 보위의 안정성이나 국가의 안보 자체가 위험해질 공산이 컸으니 이는 매우 당연한 반응이었다. 개국하자마자 왕자들끼리 피 튀기며 싸움질하는 정권의 이미지가 어떻게 좋겠는가? 하물며 창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조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후계자 내분이 발생하고 민심까지 등을 돌리는 건 치명적인 사태였다.[13] 당장 한국사의 후백제중국사오호십육국시대의 여러 왕조들,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 등의 많은 나라들이 '건국 초기 후계자 분쟁'으로 급속도로 국가 막장 테크를 타 단명했다.[14]

또 회안공 방간이 아무리 재주가 별볼일 없다고는 해도 일단 항렬상으로는 정안공 방원의 형이었다. 상식적으로 왕이 자식이 없어 동생한테 왕위를 넘겨줘야 할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자기 바로 손아랫동생을 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종 밑으로는 익안공 방의(셋째)와 회안공 방간(넷째)이 있었고, 정안공 방원(다섯째)보다 형인 이들을 제치고 자신의 공을 내세워 왕위를 넘겨받겠다고 대놓고 나올 수도 없고, 그랬다가 좋을 게 없음을 정안공 방원은 잘 알고 있었다. 정안공 본인이 "형님들도 엄연히 계시는데 어딜 감히 동생놈에게!"라는 명분을 가지고 무인정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대놓고 나온다면 앞서서 한 쿠데타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정치적 자살행위가 된다.

따라서 야심을 숨기고 명분을 세우려면 방원으로써는 자기 손위에 있는 형들이 알아서 왕위를 사양하는 것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정안공에게는 다행스럽게 셋째형인 익안공 방의는 정치에 야심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넷째형인 회안공 방간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방원보다 형인 이상 동생인 방원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너 요새 좀 막 나가는 거 같은데? 형님 계시는데 버릇없는 거 아니니?" 정도로 눈치 주고 끝내면서 왕실 어른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처신만 했어도 그것만으로도 방원의 야심을 상당히 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15] 이런 환경적인 유리함도 내던지고 알아서 방원을 죽이겠다는 군사를 일으켜 방원에게 그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명분을 주었으니, 이성계로써는 복장이 터질 수밖에... 방원으로써는 생각지도 않게 방간이 알아서 덫에 걸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16]

이 때문에 후대의 해석 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박포가 방간을 부추기도록 이방원이 판을 짠건 아닐까?'라는 추측까지 있다. 즉, 실록상으론 박포가 먼저 방간을 부추긴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박포도 알려지지 않은 이방원의 측근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

방간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방원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아무리 왕위에 욕심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유리한 위치를 차버리고 도박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방원은 이복삼촌 의안대군 이화, 아버지의 의형제 이지란, 조영무 등 측근과 종친들과 논의하여 이방간의 움직임을 모두 꿰고 있었고 어떻게 진압할지 작전회의까지 해 놓았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볼 때, 직접적으로 형을 공격할 수 없는 방원의 유도에 방간이 말려들었다고 볼 정황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방간의 거병에 정치적 상황이 변수가 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왕실 사람들의 지지가 있기도 힘들었던 것이 태조와 정종도 딱히 방간을 지지할 이유는 없었다. 정종 본인은 그를 둘러싼 '권력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퇴위하려고 일어난 반란이 아닌 '정종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를 둘러싼 싸움이었으므로 딱히 어느 한 쪽을 지지할 이유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는 방원 뿐만 아니라 방간도 1차 왕자의 난의 가담자였기 때문에 눈엣가시 같은 이방간을 지지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둘 모두 어느 한 쪽이 승리하길 바라기보다는 이런 싸움 자체가 왕실의 체면을 깎아먹는 불필요한 행동이라고 여겼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둘이 보여준 반응도 정확히 이와 같았다.

결국 이방간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거병을 해버린 마당에 해산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단독으로 방원을 치기로 결정한다. 방원은 방원대로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했으나, 그래놓고 정작 집앞에 병사들이 집결하자 어찌 아우가 형을 칠 수 있겠냐며 집안에 처박혀서 안 나오는 쇼를 벌이다가 어찌 사사로운 정에 국가의 대사를 저버리려 하냐는 이화의 아주 그럴듯한 대응에 마지못해 나왔고, 갑옷을 입고 나와 말에 타서도 "정녕 피할 길이 없단 말인가?"라고 울면서 외쳐 수많은 병사들을 감동시켰다고 하며, 방간에게 화살을 쏘는 자는 베겠다는 명을 내려 방간을 살려줄 뜻을 확실히 보였다.

물론 이러한 '쇼'는 명분 쌓기를 위한 연기였겠지만 방간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이방원의 진심이었을 확률이 높다. 위의 태조와 정종의 반응에서 나왔듯이 동복 형제까지 살해하는 건 전주 이씨 문중 내에서도 쌍욕먹고 어른들 지지를 모조리 잃기 딱 좋은 일이고 민심에도 악영향을 끼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방원을 증오하던 태조조차도 방간의 편을 들지 않고 무시해버린 건 어찌됐건 방원도 자기 아들이었고 또 동복형제에게 칼을 겨누는 짓은 그 어떤 이유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이기 때문이었는데, 방간을 죽이면 이방원 본인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4. 결말

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의 준비가 부족했고 이방간을 편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상왕 태조, 현 임금인 정종은 물론이고 태종 형제의 삼촌인 이화 등 대부분의 왕족들과 이지란 같은 공신들이 죄다 이방원 편을 들었다. 1차 왕자의 난과는 달리 실질적인 장남인 정종이 왕위에 올라 있는 상황이라 이방간에겐 명분이 전혀 없었고, 애당초 이방원이 이방간의 행적을 포착하여 이미 계획을 다 짜고 있었던 참이라 이방간의 군대는 참패하고 만다. 실제로 죽은 사람조차 몇 없고 포위된 상황에서 양쪽에 화살 몇 번 오가더니 이내 방간의 군사가 와해되었다고 한다. 쿠데타는 아무나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난이 진압된 후 박포는 당연히 처형되었지만 이방간은 정종과 태조의 간청과 그간 형제의 정, 민심을 의식하여 죽이지 않고 귀양을 보낸다. 그리고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가 죽는다. 말만 유배지지 식읍까지 받았기 때문에 그냥 '정치에서 손 떼고 시골가서 여생을 마치라'는 명령에 가깝다. 정작 박포는 방간을 충동질해놓고서도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고 집에서 자고 있었다. 원래는 죽을 죄는 아니었지만 동복형제인 방간을 죽일 수는 없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 다만 방간의 아들 이맹종(李孟宗)은 아버지와 다르게 상당한 경계를 받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맹종은 '활을 잘 쏘았으며 간사하고 꾀가 많았다'고 한다. 즉,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간의 반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반란을 일으켰던 날 아침에 직접 방원의 저택으로 염탐을 오는 대담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방간의 아들 이맹종은 난이 실패한 후 유폐 상태로 있다가 결국 자진하라는 어명을 받았는데, 그 때의 왕이 바로 세종대왕. 그것도 아버지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도 아니라 태종 사후의 일이다. 세종 시대에 정치적 문제로 죽은 왕족은 몇 안되는데 그 중 1명. 2차 왕자의 난은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형제가 4~7살 남짓의 어린 아이였을 때 벌어진 사건이다. 맹종이 2차 왕자의 난 당일 아침부터 이방원의 집을 대놓고 염탐했다는 건, 경우에 따라 납치 및 인질극, 최악의 경우 어린 충녕대군(세종) 본인이 살해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맹종을 위험인물로 보고 후환을 방지하겠다는 구실로 죽인 걸로 보인다. 다만 방간을 부관참시하라는 청은 거부하였으며, 방간의 시집가지 않은 딸과 맹종의 유가족들에게 땅을 주어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5. 후일담

세자(世子)가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태상왕이 사연(賜宴)하고, 인하여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여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다. 또 말하기를,

"네 몸이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스스로 삼가도록 하라. 지금 방간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이 되었다. 삼한(三韓)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으니,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네가 이미 세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늙은 아비가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친다."

하였다. 세자가 헌수(獻壽)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곧 나왔다. 태상왕이 이저(李佇)에게 이르기를,

"박포(朴苞)는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돌아가 네 임금에게 말하여 반드시 법을 들어서 후래(後來)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태상왕)는 태종(당시 세자)에게 2차 왕자의 난을 두고 삼한의 귀가와 대족들이 모두 비웃을 것이라며 부끄럽게 여겼다. 이후 이저를 통해 정종에게 박포를 처벌하라고 지시한다. 박포는 공신이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해 귀양을 갔는데 이후 죽이라는 대간의 상소가 빗발쳤고, 태상왕도 박포를 베라 하였다. 결국 태종이 정종에게 아뢰어 주살하게 하였다.#

한편 회안공 이방간 본인은 계속해서 왕자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그 후손들은 꽤 오랫동안 이름만 왕족인 허름한 폐서인 신세가 되었다.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것은 먼 훗날 숙종 때.

이게 뭔 소리냐면 왕족의 명부인 종친부인 선원록에 등록이 되지 못해서 군역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흔히 양반이면 군대 안 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조선시대, 특히 초기는 신분과 상관없이 일단 무조건 다 대상이었다.[17] 다만 무과로 가거나, 아니면 과거 준비하는 학생으로 분류되거나 관직이 올라가면 병역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군대 끌려간 사람이 적을 뿐이다.[18] 물론 후기로 가면 병역의 군포화가 진행되면서 큰 의미는 없어지고 그냥 무조건 다 빠지지만...

그런데 종친들은 병역 등에 있어 면세 혜택이 있었는데, 회안공 쪽은 쥐뿔도 없었다. 특히 방간의 후손은 폐서인이 되었다고 해서 노역까지 나왔다. 결국 회안공의 후손이 반발했는데, 조정에서는 노역하는 것이 맞다라는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이름뿐인 왕족 정도가 아니고, 왕족이라고 자칭하고 다닌 수준이다.

왕족 지위를 되찾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말 피눈물 날 정도였는데, 중종 때 폐서인 취급해 군역이 확정된 이후 선조 때 "박포 그 놈이 꼬셔서 그렇지 우리 조상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셨어요. 제발 우리들을 종친부에 넣어주세요." 정도의 주장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이게 먹혔다. 문제는 이걸 말한 게 선조 38년, 이후 선조가 "어 그래, 방간이 잘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태조의 후손들이고 수백년이 흘렀는데 방간의 후손들을 족보에서 지우고 군역 시키는 건 너무한 거 같다. 회안공 후손들도 종친부에 넣어서 왕족 취급해라"라고 비로소 인정해 준 때가 선조 40년인데, 불과 1년 뒤 선조는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왕이 된 아들 광해군은 아버지와 달리 "선왕(선조)께서 우리 복권시켜주신댔어요."라는 주장을 씹고 계속 군역을 부과했다. 이후 인조 18년, 이들은 다시 같은 주장을 하는데 비록 신하들의 반대로 왕실 족보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군역은 면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그러다가 숙종 때 왕실 족보를 다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슬쩍 끼어들었고 숙종 역시 "태종과 선조 두 선왕께서 아량을 베풀었는데 아직도 왕족 인정을 받지 못한 건 좀 이상하네. 지금이라도 너네 왕족으로 인정해줄게."라며 받아들였다. [19] 중종~숙종까지 200년 가까운 투쟁 끝에 겨우 왕족으로 인정된 것.[20]

여담으로, 이때 셋째형 익안공 이방의까지 덩달아서 권력을 잃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처벌된 것은 아니고 회안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듣자 즉각 자신의 절제사 도장과 사병 명부를 삼군부에 반납해 권력욕이 없음을 증명해 그날로 대권구도에서 자신을 배제시킨 것이다. 정확히는 익안공은 회안공의 실패를 보고 포기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정치적 야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전부터 독특한 자기관리로 당시에도 매우 유명했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술자리에서라도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하면 아예 입을 닫아버렸던 것. 그 덕분에 그는 왕자로서 부귀를 누리다 죽고 나서도 좋은 예우를 받을 수있었다. 물론 병으로 45세라는 한창 나이에 비교적 일찍 죽기는 했지만...[21]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켰다가 본인도 안 좋은 꼴만 당한 것도 모자라 후손들까지 고생시킨 동생 회안공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결말이었다.

6. 사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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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제3권 정종2년 1월 28일에 실린 기사이다. 링크 다만 기록된 날짜는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한 날이지, 언제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2] 지중추부사[3] 회안공 이방간의 아들[4] 원래 대로라면 세제가 돼야하지만, 적자가 없는 정종이 아들 삼아 동생을 세자로 책봉했다.[5] 후일 회안대군으로 추증되나 당시엔 회안공으로 불렸으므로 이렇게 기술한다.[6] 물론 박포 또한 참모로서의 야심도 분명히 있었겠으나, 결국 앞장선 것은 회안공이기에 정안공이 어떻게든 형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박포에게 죄를 몽땅 뒤집어 씌웠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당장 이러한 반란의 주모자는 극형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무사치 못하는데, 박포와 그외 주모자들만 참수당하고, 수괴인 회안공만은 귀양살이로 끝난 것을 보면 더더욱. 심지어 박포는 역적 수괴라면서 바로 죽이지도 않고 일단 귀양을 보냈다 얼마 후 곧바로 처형했다. 그것도 한 번 귀양지를 옮기기까지 했다.[7] 후에 동생들처럼 문과 급제도 한다.(방원, 방연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말에 공민왕이 성균관을 진흥시키면서 당대의 최고의 유학자들을 선생들로 배치하였고, 이로 인하여 과거 급제는 어려움과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이였다. 이방원의 과거급제 문서를 받은 이성계가 궁을 향해서 절을 하였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8] 태조의 아들 중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왕자가 둘이 더 있는데 이방의이방연이다. 이 중 여섯째 아들 방연은 어린 나이에 사마시에 급제한 기록이 있으나 직후에 죽어 기록이 없는거고, 방의는 야심이 없는 인물이라 정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평탄하게 살았다. 방간도 방의처럼 적당히 왕족 대우나 받는 데 만족했으면 무난하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9]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때 우왕에게 잡혀 죽었다는 말이 있다.[10] 드라마화된 적도 있는 소설 '한명회'를 보면 홍윤성에 참가하지도 않은 문관 놈들이 1등공신은 죄다 차지했다며 투덜대자 한명회가 바보같은 말은 하지 말라며 비록 형식은 2등공신이지만 전하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이 대체 누구겠냐며 홍윤성을 꾸짖는다.[11] 이때 1등공신에 앉힌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육신의 수장으로 유명한 성삼문이었다. 한마디로 1등공신은 반대파가 될 만한 이들을 설득해서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자리였던 것.[해석] 근거 없는 말을 듣고 혹해서 형제를 해치려고 하니 네가 제정신이냐. 군대를 돌리고 홀몸으로 궁으로 오면 내가 네 목숨은 보전해주겠다.[13]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난이 진압된 뒤에 이방원이 정종과 함께 이성계를 찾아와서 형제끼리 싸워서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쳤다며 사죄하는데, "그토록 애비 걱정을 다해 주다니 참 가상하구나. 어차피 똑같은 놈들끼리 싸워서 죽든 살든 내 알 바 아니다."라며 비웃으면서도 "전에는 이복형제들끼리 죽고 죽이더니 이제는 친형제끼리 또 죽고 죽이는 꼴이라니... 이 나라의 한다하는 가문들이 우리 왕실을 얼마나 비웃겠는가?"라며 탄식하듯 말한다.[14] 다만 태조 본인은 애시당초 종법제상 서열을 개무시해서 후계자 분쟁을 알아서 초래한 인물이므로 원래라면 할 말이 없는 게 정상이다.[15]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성계가 방간의 거병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방원이를 견제할 이가 없게 되었다!"며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16] 다만 그리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 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려 했다는 점이다.(실제로 태종은 명분상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가 아니라 정종의 양자이자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즉,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방간이 방원보다 명분에서 밀리게 된다. 종법제 상에서는 친형제가 양자에게 밀리기 때문. 다만 공식적으로 양자가 된 것은 방간이 축출된 후였다.[17] 원래부터가 兩班은 文官인 東班과 武官인 西班을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그 가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빠졌는데, 이것도 그냥 兩班이라고 빠졌다기보다는 學生/儒學으로 빠졌거나, 돈 주고 팔던 명예직을 구매하여 빠진 경우가 다수이다.[18] 물론 조선 전기에도 兩班家 자제들이 대부분 일반 보병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특수병종에 징집되었는데, 이 곳에서는 장기 근무를 하면 그에 따라서 품계가 상승하여, 고위 무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이 특수병종들은 선발을 통하여서 뽑았지만, 기마 같은 것은 부유하지 않다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19] 원래 왕실 족보는 세 부류(선원록,유부록,종친록)로 나뉘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것도 있는 등 문제가 많아져서 결국 통폐합해 선원계보기략 하나로 합쳤다.[20] 사실 조선 시대에는 한 문제를 가지고 100년 넘게 끄는 경우가 몇 있긴 했다.종계변무, 병호시비를 보듯 말이다.[21] 사실 45세면 당시치고는 매우 일찍 죽은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