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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1:05:54

북한의 철도 환경/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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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일제의 병참 기지(~40년대)1.2. 파괴와 재건(50년대~80년대)1.3. 속절없는 추락(90년대~)

1. 개요

1.1. 일제의 병참 기지(~40년대)

북한에서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 시절이지만 일제강점기부터 그 건설이 본격화 되었다. 북한에 철도가 많이 건설된 이유는 경부선과 경의선 축으로 일본의 만주 침공을 위한 전초기지 및 광산 개발, 중공업지대 육성을 위한 것이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직접 건설하려던 경의선조차 이런 목적으로 일본이 일방적으로 건설하게 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최초로 건설된 철도는 1906년에 개통된 경의선이다. 이후 1910년에 평남선이, 1914년에 경원선이, 1918년에 평양탄광선이, 1928년에 함경선이 개통되었다. 다만 1910년대1920년대 초중반에 전라선, 경동선, 충북선 등이 건설된 남한 지역과 달리 북한 지역에서는 함경선 개통 이전까지 이렇다 할 철도 노선이 개통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함경선 건설이 워낙 거대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1]

1926년에 일본 정부조선철도 12년 계획선을 발표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대대적인 철도 건설 붐이 나타났다. 이는 주로 광산지대나 농업지대를 개발하고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이남보다 노선이 많았다는 것과, 대부분의 주요 노선이 표준궤이지만 산악지형이 더 굴곡이 심한 편이기 때문에 협궤 노선도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도 과거의 서울이나 부산처럼 노면전차가 있었으며, 일본이 점령한 만주와 소련의 연해주와 직결되는 철도 노선이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서울에서 최소 봉천(선양) 직결 열차가 운행하고 있었고, 베이징이나 모스크바로 환승할 수 있는 열차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2] 한편으로는 중일전쟁 시기 군사 물자 이동 수단이 되기도 한다.

1.2. 파괴와 재건(50년대~80년대)

1945년 광복 이후 남북이 분단된 뒤에도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서 북한은 남한보다 철도 시설 및 장비 측면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 때문에 상당수의 철도가 파괴되었다. 특히 북한 철도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함경선[3]은 함경남·북도 해안가를 따라가기 때문에 미 해군은 함포 사격으로 철저히 두들겼다. 이 때문에 현재의 평라선은 노반만 일제강점기 시절의 것일 뿐 대부분 1950년대에 일제보다 미숙한 북한 기술로 복구한 것들인지라, 현재는 더욱 노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북한은 6.25 이후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지원을 받아 파괴된 철도망을 복구했다. 산업시설은 대부분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공산주의 국가들이 지원도 팍팍 해 주고, 자원(석탄, 철광석 등)도 풍부하고 노동력도 넘쳐났는지라 1950년대에 이미 철도와 산업 시설 대부분을 복구해서 산업 기반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 동독등 사회주의권의 지원을 발판삼아 한동안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심지어 1973년에 평양 지하철을 만들어서 남한(1974년)보다 1년 더 먼저 지하철을 완공시키기도 했다. 평양지하철은 명목상 당시 평양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건설된 것라고 하지만, 실상은 6.25때 폭격으로 인해 평양이 대동문 하나 남겨두고 멀쩡한 건물이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방공용으로도 크게 신경썼다.

당연히 북한의 철도 투자도 이 시기에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이 당시 북한 철도시설 투자가 주로 전철화에 집중된 탓에 토목 등 다른 시설 인프라 쪽은 상당히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냥 일제강점기 때 깔아놓은 철로와 차량을 수십 년간 대대적 유지보수 없이 우려먹다가 노후화로 인한 인프라(차량, 시설 등) 부족과 이를 땜질할 기술의 부족, 철강 생산량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문제점에 부딪히게 된다.

북한은 동구권에 토산물과 조잡한 공산품을 수출하고 해당 국가에서 차량과 철로 보수용 레일등을 들여왔는데[4]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 차량의 부족으로 예비용으로 스크랩한 과거 남만주철도의 증기기관차를 현역으로 복귀시킬 정도로 허덕였다.

1.3. 속절없는 추락(90년대~)

동구권 민주화, 소련 붕괴 이후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물자, 연료, 정비 모두 파탄나 지금의 상황으로 추락했다. 햇볕정책 시기 남북 철도 연결과 2007년 남북열차 시험운행 정도는 했으나, 남한의 정권 교체와 북한 도발로 남북관계가 파탄나 진전이 없고 이후로 다시 정권교체도 하나 북한의 핵에 대한 고집과 그로 인한 대북제재로 아무것도 못하고 막을 내렸다. 중국과 함께 경의고속철도를 깐다는 계획도 아무것도 진전이 없고 유실된 금강산청년선은 수년째 복구도 못하고 방치중. 앞으로도 북한의 고집이 지속되고 남한 내 반북 정서가 커지는 한, 더욱이 남한의 재차 정권교체 후 북한이 유례없는 통일 포기 선언도 하여 북한 붕괴 전까지는 아무런 진전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 함경선(평라선)은 남한의 경부선중앙선을 합친 것만큼 길다.[2] 다만 일본 본토에서 당시 유럽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본토에서 배를 타고 다롄에서 남만주철도 노선을 타고 하얼빈에서 환승해서 몽골과 러시아를 거쳐 가는 루트였다. 즉 일본인들이 중국이나 유럽을 가려고 한반도 철도를 건설한 것은 아니다.[3] 후일 북한측에서 평라선으로 흡수, 노선 재 지정.[4] 동구권에서 북한산 토산물과 심이 빠진 연필이나 종이가 안잘리는 가위 따위를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터무니 없는 가격에 수입해서 자국의 멀쩡한 중고품을 대거 사간다고 실무진에서 불평이 많았고, 조잡한 북한산은 그대로 아프리카 등에 무상원조로 짬처리하는지라 되도록이면 북한산을 수입 안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공산권의 소위 "사회주의 형제 교역"은 상품의 가치를 노동력 투입량으로 계상해서 자국 통화로 환산하면, 그 가치대로 요청한 물품을 퍼 주는 구조라서 별도로 외화가 필요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