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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6:01:27

크리스티안 비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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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라리가 심볼(2016~2023).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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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FIFA 월드컵 실버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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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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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8 · 2002-03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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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비에리의 기타 정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1998
데니우손
(3,150만 유로)
1999
크리스티안 비에리
(4,648만 유로)
2000
루이스 피구
(6,000만 유로)
파일:internazionale_hof.png[br]FC INTERNAZIONALE MILANO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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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905a,#a5915a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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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DEF MID ST
2018 [ruby(쳉가, ruby=발테르)] [ruby(사네티, ruby=하비에르)] [ruby(마테우스, ruby=로타어)] ㅤㅤㅤㅤ
호나우두
[ruby(ㅤㅤㅤㅤ, ruby=루이스 나자리우 지리마)]
2019 [ruby(톨도, ruby=프란체스코)] [ruby(파케티, ruby=자친토)] [ruby(스탄코비치, ruby=데얀)] [ruby(메아차, ruby=주세페)]
2020 [ruby(세자르, ruby=줄리우)] [ruby(베르고미, ruby=주세페)] [ruby(캄비아소, ruby=에스테반)] [ruby(밀리토, ruby=디에고)]
2021 [ruby(팔리우카, ruby=잔루카)] [ruby(마테라치, ruby=마르코)] [ruby(스네이더, ruby=웨슬리)] [ruby(에투, ruby=사무엘)]
2022 [ruby(보르돈, ruby=이바노)] ㅤㅤㅤ
마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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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마촐라, ruby=산드로)] [ruby(비에리, ruby=크리스티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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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파일:Christian Vieri.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크리스티안 비에리
Christian Vieri
출생 1973년 7월 12일 ([age(1973-07-12)]세)
이탈리아 볼로냐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
[[호주|]][[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 체중 82kg
주발 왼발
포지션 스트라이커
소속 선수 토리노 FC (1991~1992)
AC 피사 (1992~1993)
라벤나 FC (1993~1994)
베네치아 FC (1994~1995)
아탈란타 BC (1995~1996)
유벤투스 FC (1996~1997)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7~1998)
SS 라치오 (1998~1999)
인테르나치오날레 (1999~2005)
AC 밀란 (2005~2006)
AS 모나코 FC (2006)
UC 삼프도리아 (2006)
아탈란타 BC (2006~2007)
ACF 피오렌티나 (2007~2008)
아탈란타 BC (2008~2009)
국가대표 49경기 23골[2] (이탈리아 / 1997~2005)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트위치 아이콘.svg
종교 가톨릭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출전 기록
6. 여담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스트라이커.

현역 시절 라치오에서 인테르로 이적하면서 당시 역대 최고 이적료(4,648만 유로)를 기록하였고, 라리가세리에 A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했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 통산 9경기 9골을 기록하며 대표팀 월드컵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1991년 토리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데, 실력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때부터 터프하다 못해 불같은 성질 때문에 매년 팀을 갈아 치웠다. 처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1993년 세리에 B 소속 라베나에서 32경기 12골로 주목받으면서였다. 이때부터 세리에 빅클럽에 관심을 받은 비에리는 1996년 유벤투스에 입단해 알란 복시치와 투톱을 짜면서 주목을 받았고 AC 밀란의 주장 프랑코 바레시를 박살내는 등 23경기 8골을 넣어 유벤투스가 스쿠데토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4골을 터뜨리며 유벤투스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는데, 특히 아약스와의 4강전에서 2골을 넣어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3]

하지만 비에리는 낮은 주급에 불만을 터뜨렸고,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1997-98 시즌에 비에리는 대폭발하여 24경기 24골을 기록하여 한시즌만에 트로페오 피치치를 수상했다.[4] 1998-99 시즌에 라치오 이적을 통해 세리에 A에 돌아온 비에리는 마르셀로 살라스와 투톱을 짜면서 세리에 A에서 12골을 터뜨렸고,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에서 마요르카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99년, 4648만 유로[5]라는 역대 최고 이적료를 라치오에게 안겨주고 인테르로 이적한다.[6]

파일:external/www.sempreinter.com/Christian-Vieri-Inter.jpg

인테르에서의 데뷔전이었던 베로나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화려한 출발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시즌 후반기에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1999-00 시즌은 20경기 출장(13골)에 그쳤다. UEFA 유로 2000에도 참가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기나긴 부상 끝에 2000-01 시즌 초반에 그라운드로 복귀해 시즌 중반에 또 한번 경미한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별탈없이 27경기에 출장해 18골을 성공시켜 자신의 세리에 A 한시즌 최다출장과 최다골 기록을 세우며 부활의 시위를 당겼다.

아니나다를까, 다가온 2001-02 시즌. 부상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은 아니지만 어느때보다도 완벽한 컨디션으로 돌아온 비에리는 25경기에 무려 22골을 퍼부어 세리에 A 득점 3위에 올랐다. 적어도 5경기만 더 뛰었더라면 득점왕에 올랐을 수 있는 놀라운 활약이었다. 이 시기 팀동료인 호나우두와 함께 지구를 정복할 투톱으로 평가 받았으나 동시에 부상을 당했다.

2002-03 시즌에는 23경기에서 24골을 득점하며 카포칸노니에레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인테르를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에 당한 큰부상때문에 커리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2005-06 시즌 아드리아누에게 밀려 AC 밀란으로 이적했으나, 역시 알베르토 질라르디노에게 밀려, 반년만에 AS 모나코 행, 모나코에서 부상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2006-07 시즌 아탈란타와 계약하면서 주급 100만원에 옵션으로 1골당 1억 보너스 지급이라는 해괴망측한 계약을 체결하지만, 역시나 부진하였다.

2007-08 시즌에 또다시 피오렌티나로 이적하여, 부활의 날개짓을 펴는듯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콰밥만훈의 수장인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없었다면 2009년 황금 쓰레기통 상을 수상할 뻔한 실패한 시즌[7]이었다. 리그에서 6골을 득점하는데 그쳤고, UEFA컵 레인저스와의 준결승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여 탈락의 원흉이 되었다. 결국 재계약에 실패했다.

2008-09 시즌 또다시 아탈란타로 이적한지 몇개월 후 방출되어 겨울 이적시장때, 여러 브라질 클럽과 토트넘 홋스퍼의 제의를 모두 물리치고 은퇴한다. 그런데 2016년 7월 30일 갑자기 중국 슈퍼리그를 통해 현역 복귀를 선언했다! 네티즌들은 뎀바 바를 생각하며 만류 중이다. 복귀를 선언한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얘기가 되고 있던 구단에서 아무래도 무산시킨 듯 하다.

2.2. 국가대표

비에리는 UEFA U-21 챔피언십에서 2회나 우승을 이끌며 유소년 레벨을 평정,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한 비에리는 칠레와의 B조 첫 경기에서 전반 11분에 로베르토 바조의 패스를 받아 논스톱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마르셀로 살라스에게 멀티골을 허용하였고, 로베르토 바조페널티 킥 동점골을 넣어 2:2 무승부에 그쳤다. 하지만 카메룬에서 멀티골을 넣어 3:0 승리를 이끌었고[8], 오스트리아에서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프리킥을 헤더 골로 넣어 1:2 승리를 이끌며 16강에 진출한다.

노르웨이와의 16강전에서도 디 비아조의 멋진 쓰루 패스를 받아 상대 수비수와의 스피드 경합을 이기고 골을 넣어 1:0 승리를 이끌었다.[9]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부차기까지 갔고, 비에리는 4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지만 루이지 디 비아조가 실축하는 바람에 결국 패해 탈락하고 만다.

유로 2000에는 부상으로 불참했고, 2년 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참가한다.

에콰도르에서 멀티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었고, 크로아티아전에서는 선제 헤더 골을 넣었지만, 결국 1:2로 역전패하고 만다. 이후 멕시코전에서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동점골로 1:1로 간신히 비기고 16강에 진출한다.
파일:external/worldcup.kbs.co.kr/hae0618-06.jpg
파일:비에리 김태영 얼굴 가격.gif
비에리하면 떠오르는 가장 악명높은 장면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격돌, 어마어마한 포스를 선보였는데, 전반 10분에 김태영의 코뼈를 부러뜨리기도 했다.[10]
파일:external/www.donga.com/36.jpg
전반 18분 한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는 비에리[11]

이후 전반 18분에 그야말로 황소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최진철, 홍명보, 김태영이란 대한민국 역대 최강급 3백이 쌓은 수비벽을 뚫고 헤더로 선제골을 성공시켰다.[12] 그 이후에도 한국 수비진을 엄청난 피지컬로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몇 번이나 한국 골문을 가를 뻔했고, 김태영은 부상을 이기지 못해서 교체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비에리를 막은 최진철은 경기 종료 후 완전히 탈진해서 링거를 맞아야 했을 정도였다.[13] 홍명보는 차두리와 교체되었기에 마지막까지 비에리를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판에 골문 바로 앞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서 승리의 기회도 같이 날아갔고, 결국 한국팀이 승리로 탈락하며, 운동장에 뻗는다.

이때 골문과의 거리가 5m도 안 되는데 공을 하늘로 날렸다는 이유로 오른발이 의족이라는 편견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사실 오른발도 잘 쓴다. 다만 앞서 언급한 16강전처럼 워낙 결정적인 순간에 없느니만 못한 물건이 되어버려서 의족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정말로 그 찬스가 왼발에 걸렸다면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14]

어쨌든 이 경기에서 비에리는 한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한동안 인터넷에서 최고 일진 축구선수로 비에리를 꼽는 한국인이 많았다.[15][16][17] 사실 비에리에 대해 매우 안 좋은 감정이 있을 법한데도, 세계에서 비에리를 유일하게 제대로 평가해주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게 아이러니.

유로 2004에서는 1골도 넣지 못하고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불참했다.[18] 대신 조국의 월드컵 우승을 지켜보는 것에라도 만족해야만 했을 듯 하다.

참여한 메이저 대회의 숫자는 적었으나, 그가 참여한 두 번의 월드컵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준 최전방 공격수. 그가 월드컵에서 넣은 9골은 파올로 로시, 로베르토 바조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월드컵 최다 득점 공동 1위의 기록이며 비에리 이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이만한 임팩트를 보여준 공격수는 거의 20년이 지나가는 동안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필리포 인자기, 루카 토니,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안토니오 디 나탈레, 마리오 발로텔리, 치로 임모빌레[19], 안드레아 벨로티 등등 준수한 공격수들은 많았으나 어느 누구도 비에리만 한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이 전성기에서 멀어진 2006년 이후에는 더더욱 비에리만한 공격수를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도 걸출한 스타 공격수보다는 조직력과 팀워크 위주로 승부를 보고 있으며, 이탈리아 국대의 특성상 2선의 크랙들이 공격의 중추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20] 앞으로 비에리같은 특급 공격수를 볼 일은 한동안 요원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꾸준히 지속되자 미로슬라프 클로제, 다비드 비야가 은퇴한 이후 그의 대체자를 전혀 찾지 못해 지역예선 같은 대회에서는 팀 전력차 우위를 앞세워 승승장구해도 정작 월드컵에서는 실망스런 성적을 기록하며 헤매고 있는 독일,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점유율은 높아도 최전방에서 골을 확실하게 넣어줄 주전 원톱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어 2006년 이후로 2연속 조별 탈락을 하더니,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역사기어코 다시 한번 반복되면서 팬들은 하염없이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있는 상황이며,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던 비에리가 더욱 그리워질 수 밖에 없다.

3. 플레이 스타일


당시의 이탈리아 공격수 중에서는 185cm/82kg의 아주 좋은 체격을 갖췄으며, 그 우수한 체격을 활용한 파워풀한 플레이와 제공권 장악에 능했다. 특히 골대를 찢어버릴 듯한 강한 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컴필레이션 영상을 보면 볼을 그냥 인정사정없이 찬다. 다만 기본적으로 박스 안에서 극강인 플레이 스타일상 강력한 슛팅력에 비해 박스 밖 중거리 슛팅 시도나 골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역시 공이 주어지면 여러번 터치 없이 속전속결로 강력한 슛팅을 구사한다는 측면에서 비에리와 비슷한 스타일이었던 슛팅 본좌 바티스투타[21]와 비교되는 부분. 비에리 같은 경우는 종 방향보다는 상대적으로 횡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에 가까웠는데 그래서 위에 링크된 영상처럼 상황에 따라선 뛰어난 크로스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 조건 때문에 단순히 미드필더의 지원을 받아 골만 잘넣는 타깃맨으로 오인되지만, 사실 상당히 다재다능한 스트라이커였다. 1998 월드컵 당시 노르웨이 전에서 루이지 디 비아조의 멋진 쓰루 패스를 받아 상대 수비수와의 스피드 경합을 이기고 골을 성공시킨 것이 대표적으로, 순간 가속력이 탁월해 발빠른 스트라이커의 전매특허인 수비 뒷공간 침투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서 미드필더의 지원이 없으면 버로우할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 장신 포워드들과는 달리 온더볼 상황에서도 단독으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다. 화려한 드리블링을 구사하는 건 아니지만 퍼스트 터치나 치달 같은 기본기는 훌륭해서 절친인 필리포 인자기다비드 트레제게, 마리오 고메스 등 온더볼 상황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인 포워드들과 달리 단독 대시도 잘 했다.
전성기 끝물의 퍼포먼스가 대략 이 정도다.[22][23]

전성기 때의 퍼포먼스는 디디에 드록바도 한 수 접고 물러날 정도. 전성기 때의 기록으로 보면 경기당 약 0.8골로 호나우두를 능가하는 득점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드록바는 비에리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뛰어난 스트라이커이기에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압도적인 피지컬을 앞세워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스트라이커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비교 가능하다.

단점으로 꼽힌건 불같은 성질과 떡대에 맞지 않는 유리몸이다.[24]

또한 기본적으로 득점에 특화된 선수이기 때문에 2010년대 접어들면서 포워드의 역할로 특히 강조되고 있는 2선 미드필더들과의 피드백 같은 연계 플레이가 부족하다는 측면에 있어서 다소 아쉬울 수도 있다. 신체 조건만 보면 포스트 플레이+연계를 잘할 것 같지만 비에리는 공을 전달받으면 본인이 속전속결로 슛팅으로 처리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에리는 드록바 같은 현대형 '센터 포워드'라기 보다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앨런 시어러처럼 고전적인 의미의 '스트라이커'에 가까웠다. 하지만 의외로 크로스 실력도 출중하다.#

그러나 비에리의 주된 활동 시기였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같은 경우는 오늘날처럼 포워드라는 포지션에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시대가 아니었으니 굳이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다. 게다가 당시 세리에 A나 이태리의 전술 스타일도 감안해야 한다. 포워드와의 콤비네이션 플레이를 통해 2선 미드필더들의 득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격 전술보다는 수비를 굳건히 하다 상대방에게 볼 탈취 후 카운터 상황에서 미드필더 플레이를 최소화하고 결졍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에 한번에 찔러주는 스타일이 그 당시 비에리의 활동무대를 지배하던 전술적 패러다임이기에 굳이 비에리만 탓할 일은 아니다. 사실 비에리는 미드필더들과의 유기적 관계성을 전제로 하는 원톱보다는 투톱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4. 평가

비에리는 국제대회에서도 그 존재감이 탁월했다. 1990년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파올로 로시 이후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존재감이 취약해서 항상 로베르토 바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등의 판타지스타들이 주목 받았으며 살바토레 스킬라치[25], 잔루카 비알리 정도를 제외하면 피에르루이지 카시라기, 주세페 시뇨리, 엔리코 키에사 등의 스트라이커들은 국제 무대 기준으로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스트라이커들이 당시 세계 최고의 무대였던 세리에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으므로 단순히 존재감이 없다고 함부로 폄훼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가장 결정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는 동시기에 활약했던 필리포 인자기와 비에리였다. 인자기는 57경기 25골, 비에리는 49경기 23골이다.[26]

다만, 성질이 좋지 않아서 구단 프런트와 갈등이 자주 불거져 인테르 시절만 빼고 매년 팀을 갈아치운 저니맨이고, 거기다 몸관리도 열심히 하지 않아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전성기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인테르 시절 연습도 열심히 안하고 호나우두와 클럽만 찾아 다녔다고 한다.

이색 기록으로는 월드컵에서 9경기 9골을 기록한 것을 들 수 있다. 경기당 1골씩 넣은 것인데, 1998 월드컵 카메룬전 2골, 2002 월드컵 에콰도르전 2골 빼면 멀티골도 없다. 특히나 2002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기록한 득점은 총 5골인데 한골 빼고 전부 비에리가 기록한 골이다.[27][28] 반면 또다른 큰 대회인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에는 2000년엔 부상으로 불참했고, 2004년엔 한골도 넣지 못하고 이탈리아가 조별 리그 탈락하는 수모를 지켜봐야 했다. 또한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7공주 클럽들 중 AS 로마파르마 칼초 1913을 제외한 모든 팀에서 뛴 진기록을 갖고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 컵 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1/92 토리노 FC 세리에 A 6 1 1 1 0 0
1992/93 토리노 FC 세리에 A 1 0 1 0 0 0
1992/93 AC 피사 세리에 B 18 2 0 0 - -
1993/94 라벤나 세리에 B 32 11 0 0 - -
1994/95 베네치아 세리에 B 28 11 0 0 - -
1995/96 아탈란타 BC 세리에 A 19 7 2 2 0 0
1996/97 유벤투스 FC 세리에 A 23 8 5 1 8 4
1997/98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라리가 24 24 1 0 7 5
1998/99 SS 라치오 세리에 A 22 12 2 1 4 1
1999/00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0 13 5 5 - -
2000/01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7 18 0 0 5 1
2001/02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5 22 1 0 2 3
2002/03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3 24 0 0 14 3
2003/04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2 13 1 0 9 4
2004/05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7 13 3 3 6 1
2005/06 AC 밀란 세리에 A 8 1 1 1 5 0
2005/06 AS 모나코 리그 1 7 3 0 0 2 1
2006/07 아탈란타 BC 세리에 A 7 2 0 0 - -
2007/08 AFC 피오렌티나 세리에 A 26 6 1 0 12 3
2008/09 아탈란타 BC 세리에 A 9 2 0 0 - -

6. 여담

파일:비에리_가족.jpg파일:김하종_이탈리아축구.jpg

7. 같이 보기

1 톨도 · 2 베르고미 · 3 말디니 ⓒ · 4 칸나바로 · 5 코스타쿠르타 · 6 네스타 · 7 페소토 · 8 토리첼리 · 9 알베르티니
10 델 피에로 · 11 바조 D. · 12 팔리우카 · 13 코이스 · 14 디 비아조 · 15 디 리비오 · 16 디 마테오 · 17 모리에로
18 바조 R. · 19 인자기 · 20 키에사 · 21 비에리 · 22 부폰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체사레 말디니


[1]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공동 수상.[2]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9위.[3] 후반전에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득점을 기록했지만, 그전에 발생한 비에리의 핸드볼 반칙으로 득점이 취소되었다.[4] 여담으로 이 때 비에리에게 밀려 조커에 머물렀던 선수가 K리그1 MVP 출신 라데 보그다노비치. 조커임에도 14경기에서 6골을 넣었는데, 이 때 비에리는 워낙 미친 스탯을 찍던 시절이라 결국 주전으로 못 올라서고 네덜란드로 떠난다.[5] 한화 약 629억 8200만원[6] 이 기록은 후에 에르난 크레스포, 잔루이지 부폰,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등에 의해 깨졌다.[7] 1위가 콰레스마, 3위가 이전 2년 연속 수상의 아드리아누. 그 사이에 끼어있는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보는 느낌이란 그야말로 세월무상.[8] 첫번째 골은 고난도 오른발 칩샷으로 넣었고 두번째 골은 상대 수비진이 페널티 지역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몸싸움으로 제치고 골을 넣었다.[9] 상대 수비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막아내려했지만 엄청난 몸싸움과 스피드로 버티며 골을 넣었다.[10] 정작 가해자인 비에리는 꼬꾸라진 김태영을 신경쓰지도 않고 공을 쫓아 달려갔다. 이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심판이 호각을 불자 그제서야 김태영 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안하다는 의미로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긴 했다. 다만 운 좋게 심판이 팔꿈치 가격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무 경고 없이 넘어갔다.마우로 타소티의 잣대로 심판이 판단했으면 퇴장과 동시에 8경기 정지다.[11] 유니폼을 잡아당겨 체격이 대강 드러났는데 떡대가 장난이 아니다. 드록바가 한수 밀릴거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것이 아니다. 왼쪽부터 최진철,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비에리, 김태영, 김남일. 이 골은 기술의 도움도 받았는데 한국 유니폼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 오버핏 유니폼 밖에 없을 시절 이탈리아는 유일하게 쭉 늘어나는 스판덱스 재질을 도입해 유니폼이 잡아당겼을때도 중심을 잃지않게 도움을 줬다. 만약 비에리가 당시 한국처럼 평범한 오버핏 유니폼을 입었다면 최진철의 유니폼 잡아끌기에 중심을 잃고 헤딩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물론 잡아끌기로 비에리가 넘어진다면 패널티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12] 사실 홍명보는 비에리처럼 대놓고 폭력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에게 상성상 불리하다. 분데스리가에도 알아주는 피지컬 보유자인 차두리로 교체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13] 최진철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비에리가 힘이 장사라며 소감을 밝혔다. 근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부분이냐면, 최진철은 김민재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올타임 베스트로 꼽힐만한 피지컬을 갖춘 파이터이자 에이스 킬러 수비수였다. 언제나 상대팀의 골게터들을 전담마크했고 육탄방어를 불사하며 막아선 선수는 최진철이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 땐 은퇴했다 다시 복귀한 몸으로 아데바요르를 지워놓고 쉬운 상대였다고 평했다. 그런 그가 현역 때 비에리를 이렇게 평가했다.[14] 그랬다면 비에리는 남행열차를 타고 광주에서 스페인과 8강전을 치렀을 것이다.[15] # #[16] 이때 한국인들에게 제법 미운털이 박혀서, 당시 인기를 끌던 연예인 지옥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에선 정지혁 병장이 군대축구 도중 자살골을 넣은 무뇌중이라는 관심사병을 두들겨 패며 '비에리 같은 놈', '또띠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붓는 장면이 나왔을 정도.[17] 비에리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단 자체가 과장좀 보태서 조폭수준으로 거칠고 다혈질인 편이다. 축구계 한 축을 차지하는 세계적인 강호임에도 하위권 팀이나 앞뒤 안가리고 할 법한 와일드한 플레이와 비신사적 반칙을 남발했었다.[18] 마르첼로 리피가 비에리를 매우 아껴서 폼이 월드컵 엔트리에 무조건 넣으려 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일화다.[19] 이쪽은 자국 리그 한정 깡패며, 국가대표만 오면 유독 버로우를 타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유로 2020을 우승했을 때에도 찬스를 족족 말아먹고 버로우를 타며 그냥 버스를 탔다.[20] 로베르토 바조, 프란체스코 토티, 페데리코 키에사 등.[21] 최전방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활동량, 종으로 많이 내려오는 동선 때문에 미드필더처럼 중거리 골이 많다.[22] 축구에서 보통 수비수들은 공격수들과의 경합에서 밀리면 유니폼을 잡아 제지하는 변칙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보다시피 비에리는 유니폼을 잡아도 압도적인 힘과 순간 가속력으로 옷을 잡아채는 수비수를 그대로 끌고 가버리는 장면을 수차례나 보여줬다.[23] 해당 장면은 5분 40초부터.[24] 근육이 과도하게 붙으면 하체에 무리가 가서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긴 하다. 비에리를 능가하는 근육떡대 마이카 리차즈오구치 오니우가 그런 유형. 비에리는 이 둘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나, 이쪽은 근육 이전에 자기관리를 전혀 안 했던 탓이 크다. 비에리의 뛰어난 피지컬은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했던 측면이 컸지, 자기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몸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25] 다만 1990 월드컵을 제외하면 국대 활약 자체가 전무하다.[26] 하지만 메이저 대회에서 비에리와 인자기의 활약상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27] 나머지 한골을 기록한 선수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28] 이 대회 득점왕은 8골을 넣은 호나우두였지만 차점자인 클로제와 히바우두는 5골을 넣었다. 16강에서 탈락하지 않았으면 이들과 겨뤄볼만한 기록을 남겼을지도 모른다.[29] 근래에 많은 축구선수가 취미나 피지컬 훈련용으로 배운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제라드, 해리 케인, 폴 포그바, 에덴 아자르 등이 있다.[30] 그래서 이탈리아인임에도 이탈리아어 특유의 악센트 없이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한다. 참고로 동생인 막스 비에리는 아예 호주에서 태어났고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뽑히기까지 했다.[31] 다만, 이렇게 나태하고 자기관리가 안 되고, 비프로페셔널한 태도 때문에 비에리의 전성기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축구팬들이 많은데, 그건 오늘날의 시각에서 판단이다. 비에리의 전성기는 6~7년 정도이고 에이징 커브가 찾아온 나이는 31살 쯤인데, 이 정도는 당대 기준으로는 그냥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이는 동시대에 뛰었던 슈퍼스타들의 에이징 커브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프로의식에 있어서 별 말이 없었던 셰브첸코만 봐도 30대에 막 접어든 첼시 시절부터 에이징 커브가 왔으며, 더 일찍 잡으면 밀란 시절 01/02 시즌 당한 부상과 컨디션 저하 때문에 그 이후론 20대 초반만큼의 압도적인 운동능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물론 비에리의 문제점은 이러한 불성실한 태도와 자세 때문에 전성기 때도 잔부상이 잦아 결장하는 경기가 많았고, 에이징 커브 이후 기량이 너무 가파르게 하락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비에리의 몰락은 비에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당시 축구 시스템의 한계인 셈. 그래서 비에리는 오늘날의 선진 축구 시스템 하에서 운동했음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자극하는 선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