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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22:18:39

사코와 반제티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external/www.english.illinois.edu/sacvan.jpg
사건의 주인공 니콜라 사코바르톨로메오 반제티
Here's to you, Nicola and Bart.
(당신들을 위해, 니콜라, 그리고 바트)
Rest forever here in our hearts.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쉬기를)
The last and final moment is yours.
(마지막 순간은 당신들의 것이니)
That agony is your triumph.
(그 고통은 당신들의 승리입니다)

'Joan Baez - Here's to you'

1. 개요2. 전개
2.1. 재판과정2.2. 재판 이후
3. 후대의 평가
3.1. 엔하위키의 역사학계 날조

1. 개요

Sacco and Vanzetti Case

192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벌어진 사법살인 사건.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프랑스와 달리 이 사건의 누명을 쓴 사람들은 결국 재판 후 전기의자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2. 전개

2.1. 재판과정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브레인트리 구두공장에서 두 명의 남자가 침입하여 경리직원과 경비를 살해하고 16,000달러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용의자로 구두수선공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년 4월 22일 ~ 1927년 8월 23일)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년 6월 11일 ~ 1927년 8월 23일)를 체포했다. 이들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시민 불복종 운동 차원에서 참전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였다.
파일:external/law2.umkc.edu/Katzmann.jpg파일:external/www.law.umkc.edu/THAYER.jpg
프레드릭 G. 캐츠먼 검사 웹스터 세이어 판사
검사 프레더릭 G. 캐츠먼은 이들을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에게서 현금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발견되었고 여권을 소지한 점으로 보아 범행 후 해외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벌어지는 내내 자신들은 그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갔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또한 검찰 측이 증거로 제시한 사코의 모자는 정작 사코에게 맞지 않는 크기였으며,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총기 역시 조작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증인들의 진술 역시 모호하거나 번복되기 일쑤였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사코와 반제티는 당연히 무죄 석방되었겠지만 판사 웹스터 세이어[1]는 노골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애국주의와 이념을 호소하였고 유도신문을 자행해 일부러 피고인에게 불리한 재판을 진행했다.
파일:external/www.newbedfordguide.com/Celestino.jpg파일:external/law2.umkc.edu/Moore.jpg
셀레스티노 메데이로스 프레드 H. 무어 변호사
이와중에 1925년 11월 셀레스티노 메데이로스라는 죄수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의 진짜 범인이 로드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조 모렐리 갱단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시 두목인 조 모렐리와 또 다른 범인이 강도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변호인 프레드 H. 무어는 메데이로스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앨번 터프츠 풀러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 애벗 로런스 로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학장[2] 새뮤얼 웨슬리 스트래턴, 전직판사 로버트 그랜트로 구성된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풀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독립조사위원회는 주지사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1927년 4월 9일, 대법원은 사코와 반제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같은 해 8월 23일에 형이 집행되면서 사코와 반제티는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2.2. 재판 이후

파일:external/voiceofdetroit.net/Save_Sacco_and_Vanzetti2-300x197.jpg

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사형이 임박하자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파리의 미국 대사관에 몰려든 시위군중들 때문에 전차가 동원되었으며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미국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공격받았으며 남아프리카 연방(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성조기가 불타 버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시드니, 도쿄, 부쿠레슈티, 로마,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의 거리에는 성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만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이념이었고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 노조였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만 하더라도 십만의 정회원을 자랑하는 당대 최강의 노동자 조직일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기에 사코와 반제티 사형에 대한 반응은 처음으로 국제적이고 의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미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캘빈 쿨리지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며 아나톨 프랑스는 '유럽 노인의 호소'를 발표하였고 작가 존 더스 패서스[3]는 '두 개의 미국'을 선언하였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정부주의 조직인 '그루포 아우토노모(Gruppo Autonomo)' 소속이었으며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라는 무정부 신문을 구독하고 글을 투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영어 위키백과 문서)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들었다. 사코는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책을 쓰며 자신들의 무죄를 항변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사코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야."

반제티는 '뉴욕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4]

그리고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제공된 식사인 스프고기, 토스트, 차 등으로 마지막 만찬을 즐긴#[5] 그들은 당당하게 죽었다. 처형 당시 니콜라 사코는 33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36세였다.

3. 후대의 평가

그리고 50년이 지난 후 1970년대가 돼서야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두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를 신원(伸冤)[6] 및 복권(復權)하였다.[7] 그리고 마이클 두카키스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도전하나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에게 패배하였다.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줄곧 앞서가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생방송 TV토론에서 사형제도에 관한 답변이 치명타가 되어서 낙선하였다.[8] 이 사건은 유가족의 분노, 사회적 인식, 범죄자의 교정 가능성, 오판 가능성 등 최대한 예측 가능한 변수 모두를 분석하여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형벌 집행 문제와 관련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의 좋은 사례로도 언급되고 있다.

시인 임화는 이 사건을 토대로 <曇―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라는 프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

소련에서는 일부 지명을 '사꼬 이 반쩨띠(Сакко и Ванцетти, 예시)', '사꼬 이 반쩨띠 거리(Улица Сакко и Ванцетти)'로 개칭하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무정부주의 혁명가 네스토르 마흐노의 친구였던 무정부주의자 니콜라이 로그다예프Николай Рогдаев는 소련에서 무정부주의 활동 중 OGPU에 체포되었고,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로 추방되어 뇌출혈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그가 사망한 거리가 바로 사코와 반제티 거리였다.

3.1. 엔하위키의 역사학계 날조

엔하위키(리그베다 위키)는 이 문서와 동명의 문서를 통해 미국의 역사학자인 폴 애브리치를 2014년부터 근거 없는 허위사실로 모함했다.
현재 몇몇 역사가들은 사코와 반제티의 테러 가담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으며, 사코가 살인의 주범일 가능성이 높고 반제티는 종범이거나 미미한 역할만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 Avrich, Paul,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AK Press, ISBN 1-904859-27-5, ISBN 978-1-904859-27-7 (2005), Interview of Charles Poggi, pp. 132-133 2) Francis Russell, "Clinching the Case," in New York Review of Books, March 13, 1986] 하지만 이것도 저자들의 성향을 가려봐야 하는 게 하필 저자들이 미국의 병크에 대해 역사의 재해석을 명분 삼아 궤변에 가까운 저술을 자주 내세우는 사람들이고 게다가 근거로 주장하는 바는 주로 이들의 출신성분과 과거 전력이다. 하지마 현대의 수사기법 상으로 보면 이 두명을 체포하게 된 계기 자체가 거의 심증에 근거한 엉망진창의 수사기법이라서 큰 설득력은 얻지 못하는 저술서들이다.
엔하위키 사코와 반제티 사건 문서에서 폴 애브리치를 대상으로 작성된 허위사실 (2014-12-23 17:49:33)

폴 애브리치에 대한 허위 자료가 엔하위키를 통해 유포됐다. 위에 있는 뉴욕 타임즈더 가디언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한 왜곡글로 역사학계나 아나키스트 운동 기준에서 매우 황당한 날조글이다.

Nadine Brozan, "Paul Avrich, 74, a Historian of Anarchism, Is Dead," New York Times」, Feb. 24, 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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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vrich, a historian of the anarchist movement that played a role in the Russian Revolution and flourished in America in th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died on Feb. 16 at Mount Sinai Hospital. He was 74 and lived in Manhattan.

The cause was complications from Alzheimer's disease, said his wife, Ina Avrich.

Named distinguished professor of history at Queens College in 1982, Dr. Avrich, whose field was Russian history, wrote 10 books, mainly about anarchism, the belief that society is better off without the constraints of government.

Dr. Avrich became the confidant of well-known figures in the anarchist movement.

"He considered himself a scholar, teacher and chronicler of the movement and had great sympathy and affection for them," his wife said. Dr. Avrich took issue with the prevalent image of the anarchist as violent and amoral.

"Every good person deep down is an anarchist," he was quoted as saying in the announcement by Queens College of his elevation to distinguished professor. Three of the 20th century's literary giants, James Joyce, George Bernard Shaw and Eugene O'Neill, were anarchists in their youth, Dr. Avrich said, and he had hoped to write a book about O'Neill.

In an interview with The New York Times in 1972, he said that the Vietnam War and the women's movement had reignited interest in the concept of personal freedom over government control. He added: "In America, such individuals and groups were in a sense pioneers of social justice. Many of the anarchists in this country and in the world have either been neglected or scorned, and I would like to play a role in resurrecting them."

The subjects of his books included the Kronstadt naval base rebellion of 1921, an uprising of sailors against the Bolshevik regime that left more than 10,000 dead or wounded; the Haymarket Riot of 1886, in which seven Chicago police officers were killed by a bomb thrown at a workers' gathering; and the Sacco and Vanzetti case. He interviewed hundreds of adherents of the movement for one book,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Born in Brooklyn to Rose Zapol Avrich, an actress in the Yiddish theater, and Murray Avrich, a dress manufacturer, he graduated from Cornell and earned his master's and doctoral degrees at Columbia. His dissertation was on the labor movement in the Russian Revolution, and after Khrushchev opened the country to exchange students, he went to the Soviet Union to do research.

In New York, his interest intensified when he met a number of anarchist thinkers at a meeting called by Freie Arbeiter Stimme (Free Voice of Labor), an anarchist Yiddish newspaper.

Mrs. Avrich said her husband collected letters, papers, books and photos of leading anarchists and donated a collection of 20,000 items to the Library of Congress. He even named his cats for the anarchists Piotr Kropotkin and Mikhail Bakunin.

Dr. Avrich spent his entire academic career at Queens College, where he began as a Russian history instructor in 1961 and retired in 1999. He was also on the faculty of the City University Graduate Center.

In addition to his wife, he is survived by two daughters, Jane and Karen Avrich of Manhattan, and a sister, Dorothy Avrich of Miami.

Stuart Christie, "Paul Avrich" 「The Guardian」, Mon 10 Apr 2006 00.45 BS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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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n of anarchism in the US and the Soviet Union

The common fate of anarchists, suggested Paul Avrich, who has died aged 74, was to be neglected or scorned. But what he wanted to do was to play a role in resurrecting them. So, as professor of history at Queens College and the graduate school at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he passed on to students an "affection and sense of solidarity with anarchists as people, rather than as militants". He also challenged the prevalent image of anarchists as violent and amoral.

Russian Anarchists (1967) was followed by Kronstadt 1921 (1970) and in 1972, Russian Rebels: 1600-1800. He then moved into American anarchism with The Haymarket Tragedy (1984). This focused on the campaign for the eight-hour day in Chicago in 1886 during which seven policemen were killed by a bomb, and for which four innocent anarchists were executed - one cheated the gallows by killing himself, and another three served sentences until pardoned by the state governor. Sacco and Vanzetti: The Anarchist Background (1991) established that the two men, executed in 1927 in Massachusetts, were serious revolutionaries rather than "philosophical anarchists".

Avrich was born in Brooklyn, New York, into a Jewish family originally from Odessa. He graduated from Cornell University in New York State in 1952 and took his PhD from Columbia University in New York City in 1961.

In the early 1960s Avrich had taken advantage of liberalisation in the Soviet Union to research his dissertation on 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factory committees there. The material he uncovered on the 1921 insurrection at the Russian naval base of Kronstadt - which was suppressed by the Bolsheviks and left more than 10,000 dead or wounded on both sides - was the basis for Kronstadt 1921 and much of his work on anarchists in the Russian revolution.

Back in New York he researched amongst surviving Soviet exiles, many of whom he met at the anarchist Yiddish Freie Arbeiter Stimme (Free Voice of Labour) meetings and established lifelong friendships with many of them.

Avrich's other work included The Modern School Movement: Anarchism and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 (1980) which dealt with the radical schools inspired by the ideas of the Spanish anarchist educationalist Francisco Ferrer i Guardia, which survived from 1910 to 1960.

His last important work was the extraordinary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1995) based on interviews gathered over 30 years. Avrich was nominated several times for the Pulitzer prize, and in 1984 he won won the Philip Taft Labor History award.

He is survived by his wife Ina and his daughters Jane and Karen.

Paul Avrich, historian, born August 4 1931; died February 17 2006


폴 애브리치는 1952년 뉴욕 주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 애브리치의 학술적 업적은 미국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모습을 학술적으로 연구해 "부활"시켰다는 점이다.

폴 애브리치 이전에는 미국에서 아나키스트는 무시당하거나 경멸당하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폴 애브리치는 그런 아나키스트의 인식과 다른 모습을 "부활"시켰다. 대학원에서 폴 애브리치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투쟁자가 아닌 사람으로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애정과 감정"을 교육하였으며, 교육 당시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아나키스트'라는 이미지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역사학자였다. 에브리치 박사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의 저명한 친구가 되었다. 다른 기사에서도 에브리치는 '아나키스트의 보편적인 이미지가 폭력적이고 부도덕적인 점'이 문제라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였다. 애브리치의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폴 애브리치는 자신을 '운동(아나키즘 운동)의 학자, 교사, 연대자로 여겼고 거대한 공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모든 선량한 사람은 마음 속에선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애브리치의 사망 당시 스튜어트 크리스티폴 애브리치에 대한 긍정적인 글을 더 가디언에 게재했는데 크리스티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폭사미수 사건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내 정치범 수감자들에 대한 석방운동으로 유명한 영국아나키스트였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대한 애브리치의 평가는 한국어로 어느정도 확인 가능하다. 바로 한국의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하승우가 번역한 아나키스트의 초상[11]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책을 읽어 보면 사코와 반제티가 과격 폭력운동에 가담했다는 건 두 사람의 동지들이 진술한 구술에 근거한 내용이며 폴 애브리치는 사코와 반제티에 대해 지극히 옹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예 비판하려는 내용조차 아니다.

폴 애브리치는 미국에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고 부도덕한 이미지였던 아나키스트에 대한 편견에 도전했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인간적이고 긍정적인 면을 재조명해 주도했던 학자였다. 그러나 엔하위키에선 없는 사실을 날조해 황당하게 왜곡하였다.


[1] 반제티는 사형 판결이 나기 전 "나는 웹스터 세이어가 우리의 판결을 내리기 전에 그의 죽음을 볼 수 있도록 해볼 것이다."라며 무정부주의자 친구들에게 "복수, 우리의 생사와 이름을 건 복수"라는 말을 남겼다. 웹스터 세이어는 은퇴한 후 복수가 두려워 경찰과 개인 경호원의 보호를 받았다. 곧 그를 노린 폭탄 테러가 있었으나 그는 다치지 않았고 애꿎게도 그의 아내와 하녀가 부상당했다. 웹스터는 천수를 누린 후 75세로 사망했는데 이때 그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는 "그의 영혼이 변기에 떠내려갔군"이라고 논평했다.[2] 당시는 단과대였다.[3] 소설가, 정치평론가. 한국에선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과 함께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주요 저서로, 세 명의 병사, 맨해튼 트랜스퍼 등이 있다. 특히 맨해튼 트랜스퍼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기도 했다.[4] 이 말은 위에 있는 Here's to you의 가사에서 인용된다(마지막 2행).[5] 미국에는 사형수들에게 처형 직전에 일정 금액 이내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마지막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전통이 있다.[6]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보통 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해결해 준다는 의미로 쓰인다. '신원시키다', '신원하다'라고 활용하며, '변사자 신원을 확인하다' 등에 쓰이는 신원(身元)과는 다른 말이다.[7] 진범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듀카키스가 사코와 반제티를 재심하여 무죄라고 선고하지도 않았다. 듀카키스는 이 재판에서 일어난 여러 인종차별적인 문제점을 들어 이 재판이 잘못 치루어졌다는 점을 인정해(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되돌릴 수도 없다) 둘을 복권한 것이다.[8] 당시 한 탈옥범이 강간,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듀카키스에게 "당신 부인이 그렇게 당한 후 살해되어도 범인에게 사형을 내려선 안된다고 주장할거냐?" 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그렇다고 답한 것. 이에 상대 토론자인 부시가 감정도 없는 냉혈한, 어떻게 그런 일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가정도 모르는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 토론회 이후 듀카키스의 지지도는 7%나 하락했다. "평소부터 저는 사형제를 반대했습니다." 라는 발언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형제가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그의 소신에서 나온 합리적인 답변이지만, 유권자들이 원하던 가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9] https://www.nytimes.com/2006/02/24/nyregion/paul-avrich-74-a-historian-of-anarchism-is-dead.html[10] https://www.theguardian.com/news/2006/apr/10/guardianobituaries.obituaries[11] 폴 애브리치 지음 ; 하승우 옮김, 아나키스트의 초상, 서울 : 갈무리, 2004, 287~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