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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3 16:39:06

삼국지톡/오류/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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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목록 | 등장인물 (기타 세력 · 미분류) | 평가 | 비판 (조조/비판) | 오류 (시즌 1 · 시즌 2)


1. 개요2. 41화 ~50화
2.1. 41화2.2. 42화2.3. 43화2.4. 44화2.5. 45화2.6. 46화2.7. 47화2.8. 48화2.9. 49화2.10. 50화
3. 51화 ~ 60화
3.1. 51화3.2. 52화3.3. 53화3.4. 54화3.5. 55화3.6. 56화3.7. 57화3.8. 58화3.9. 59화3.10. 60화

1. 개요

항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

☆ 표시 - 삼국지톡이 아닌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난 오류를 나타낸다.

2. 41화 ~50화

2.1. 41화

파일:광무제 초상화.jpg

위의 사진은 후한의 광무제의 초상화인데 그 옆에 선 인물들의 복식을 통해 당시의 관복의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아무리 작가의 창작의 영역이라지만 조조와 원소가 현재 황제의 즉위식에 참여하러 궁에 들어왔다는 상황 및 공간적인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6] 위의 자료 조사 부족과 같은 오류로 보인다. 황당하게도 북중랑장 노식에게는 꾸준히 투구가 아니라 관모를 씌웠다(...).
群臣請立太子, 帝以辯輕佻無威儀, 不可為人主...
군신들이 태자를 세우자고 청을 올리자 황제(영제)께서 "변은 가볍고 경박하며 위의가 없어, 사람을 다스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셨고... (후략)
즉, 황자 유변에 대한 영제의 평가는 나약하다기보다는 '행동거지가 가벼워서 남에게 귀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윗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 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의에서도 유변은 어머니 하태후가 섭정을 했을 뿐이지, 본인 자신이 특별히 나약하다는 묘사는 없다. 게다가 늑대 무리가 죽고나니 이 나타나는 상황이 터졌다 흔히 소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어리석고 약하다'는 말은 동탁이 실제로 황제의 폐위를 논하면서 한 말이다.[8]

2.2. 42화

환관의 세력이 너무 커서 뿌리깊은 나무의 밀본이나 육룡이 나르샤의 무명처럼 조정 안에 자기 사람 채워놓고 맘에 안들면 황제나 외척들까지 제거할 수 있어서[9] '살아남기 위해' 하태후가 그들을 용서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무적핑크는 후한 이전에 전근대 전제왕조 국가 권력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전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하태후가 환관들을 옹호한 건 본질적으로 이 둘이 같은 뿌리기 때문이다. 환관과 외척 모두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 권력을 쥔 집단이고,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황제가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의 흥망도 황제의 의중이 좌우했다. 외척은 전한의 왕망이나 북주의 양견처럼 스스로가 세력을 키워 황위를 찬탈한 사례가 있지만 생식능력이 없는 환관은 황권에 기생해야만 했다. 외척 양기나 두무가 환관과 권력다툼 끝에 밀려난 건 단순히 환관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의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태후는 황제의 모후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통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보는 태후에게 잘 보이는 길과 협박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을 택할지는 뻔하다.
정치가인 하진은 균형감각을 발휘해 탁류와 청류 모두에 줄을 댔지만[10] 환관을 통해 누이를 바쳐 출세한 백정이 단숨에 청류에 넓은 지지기반을 만들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하진이나 그렇지 구중궁궐 한가운데 들어앉은 하태후는 자신을 모시는 환관과 척을 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환관들도 하태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바치고 하태후의 의붓동생 하묘와 하태후의 생모인 무양군에게도 열심히 줄을 댔다. 환관에 매수된 이들은 태후에게 항상 환관들을 두둔하는 말을 했고 때문에 하태후는 환관들을 계속 두둔했다. 누이를 통해 권력을 얻은 보정대신 하진이 이를 거스르는건 정치적 자살이었다.
군주가 마음에 안들면 암살한다독살덕후 이덕일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나 비밀결사덕후 김영현 같이 고증같은 거 할 생각 없는 드라마 작가나 할 발상이고 태후마마께 어떻게든 잘 보여서 처벌을 피하자였다. 불성실한 작가일수록 암살을 좋아한다.

심지어 이건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다.

2.3. 43화

并州刺史段熲薦卓公府, 司徒袁隗辟為掾.
병주자사 단경이 동탁을 공부(公府)에 천거했고 사도 원외가 불러들여[12] 속관으로 세웠다.
그 이전에 양주자사인 성취(成就)가 동탁을 종사(從事=보좌관)로 삼았는데 동탁이 성취의 명으로 도적떼를 1천여명이나 참획한 일이 있었다. 때문에 병주자사 단경이 삼공의 관청인 공부에 천거한 것이고 원외는 그것을 수락한 것이다. 즉, 동탁이 공을 세워 상관에게 천거를 받았고 원외는 승인했을 뿐이다. 이걸 마치 원외가 동탁을 직속부하로 둔거마냥 설명했다.

2.4. 44화

原子建陽, 本出自寒家, 為人麤略, 有武勇, 善騎射. 為南縣吏, 受使不辭難, 有警急, 追寇虜, 輒在其前. 裁知書, 少有吏用.
원의 자(字)는 건양이며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됨됨이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용을 가졌고 기사[14]를 잘했다. 남현(南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명을 받으면 꺼리거나 사양하지 않았고 급박한 경보가 있으면 늘 앞장서서 도적들을 쫓아가 사로잡았다. 글을 알고 헤아려서 어릴 때부터 관리로 일했다.

즉, 정원은 거친 군벌들 중 하나였으나 적어도 수하장수가 휘하의 졸병들을 죽이는 걸 보고 웃으며 즐거워 할 정도로 잔혹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나 연의에 등장하는 정원은 말 그대로 <동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인물이나 양아들에 손에 의해 죽은 비참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되려 연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삼국지톡에서의 묘사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즌3에서 황제 유협을 동탁에게서 구해내고 새차 뽑겠다는 여포에게 국민 세금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며 충고하는 개념인으로 묘사된다.

2.5. 45화

아주 오랜만에 정사 인용문이 등장했다.
공손찬, 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다.<정사>

일단 삼국지톡 시기와 맞추어보면 공손찬이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하기 전, 혹은 그 이후로 보이는데 딱히 공손찬 측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정사인 후한서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 每聞有警, 瓚輒厲色憤怒, 如赴讎敵...
(전략) 늘 (이민족들이) 경계하도록 알렸으며 찬은 번번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기를 원수나 적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후략)
瓚志埽滅烏桓, 而劉虞欲以恩信招降, 由是與虞相忤.
찬은 오환을 쓸어서 없애려는 뜻을 세웠지만 유우는 은혜와 신뢰로서 항복을 받고자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전자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이민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손찬이 사용한 방법에 가깝고 후자는 이민족을 대하는 노선이 유우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공손찬이 강경책이면 유우는 유화책이었던 셈. 때문에 공손찬이 이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내용과는 무관해지는 셈이다. 또한 정사 삼국지에는 장거-장순의 난 이전에 수십기의 기병을 이끌고 순찰중이던 공손찬이 선비족 기병 수백명과 맞닥들여서 그들을 대거 살상했다는 기록도 있긴 하나, 그 다음 문장을 보면 공손찬은 선비족 기병들을 뚫으며 당시 이끌던 기병의 절반을 잃고 나서야 겨우 탈출했다고 되어 있다. 즉, 이 경우는 공손찬과 기병대가 적을 만나 분전(奮戰)을 한 셈이지 일방적으로 학살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히 정사를 인용했다고는 하는데 어느 부분에서 인용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대략 추정이 되는 부분이 있긴 한데 아래를 참조. 출처는 '후한서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이다.
初平二年, 青, 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 欲與黑山合. 瓚率步騎二萬人, 逆擊於東光南, 大破之, 斬首三萬餘級. 賊棄其車重數萬兩, 奔走度河. 瓚因其半濟薄之, 賊復大破, 死者數萬, 流血丹水, 收得生口七萬餘人, 車甲財物不可勝筭, 威名大震.

초평 2년(191년), 청주 서주의 황건적 삼십만의 군세가 발해군 경계에 침입하여, 흑산적과 합류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보군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동광 남쪽에서 영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삼 만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였다. 적군은 수레 수만 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적도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손찬이 육박하여 이를 다시 대파하여 전사자 수만에 달하고, 흐른 피가 강을 붉게 만들었다. 포로 칠만 여명을 획득하고, 수레와 갑주, 재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취하였다.

근데 저런 전투에서의 공적이나 적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은 후한서나 정사 등에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학살을 나타낸다고는 보기 어렵다. 동일한 후한서의 열전을 보면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자 오환사마였던 염유(閻柔)가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인 추단을 포함한 「4천여명의 목을 쳤다(斬丹等四千餘級)」는 기록이 있고 흥평 2년(195년)에 이들이 원소의 장수인 국의와 함께 공손찬을 어양현 포구에서 격파하고 「2만여명의 목을 쳤다(斬首二萬餘級)」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즉, 무적핑크의 논리처럼 (전쟁에서) '적의 목을 자른 행위 = 잔혹함'의 잣대라면 나라의 명으로 청주의 도적떼를 토벌하며 3만 여명의 목을 친 공손찬이나 유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소와 손잡고 공손찬을 치면서 2만 4천명의 목을 친 염유, 선우보 등이나 하등 다를 게 없으며 따라서 공손찬에게만 '학살자' 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주는 것은 맞지 않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초평(初平)이라는 연호는 다름 아닌 헌제가 황제가 되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저 기록은 현재 삼국지톡 내의 시기인 소제(유변) 시기가 아닌 그 다음 황제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유협)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15]에 일어난 일이라는 셈이다. 만약 작가 무적핑크가 이야기하는 '공손찬의 학살행위'라는 게 저 기록을 인용한 거라면 맞지도 않은 시기의 이야기를 들고 온데다 한 사람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판단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오류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어렵다.[16]

2.6. 46화

紹等又為畫策, 多召四方猛將及諸豪傑, 使並引兵向京城, 以脅太后.
소(원소) 둥은 또 계책을 꾀하며 사방의 맹장과 모든 호걸들을 많이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경성(낙양)으로 향하게 해 태후를 위협하고자 했다.
즉 하진이 모은 것은 병력을 통솔할 인재들을 모은거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구한 게 절대 아니다. 유비가 독우를 때리고 달아난 죄를 이 시기에 씻었다는 점 때문에 저렇게 묘사한 거 같은데 유비는 하진이 단양(丹楊)[17] 도위(都尉)였던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모병했을 때 참여했고 공을 세워 죄를 씻고 청주 북해국 하밀(下密)의 승이 되었다가 스스로 벼슬을 버린 뒤 다시 청주 평원국의 고당(高唐)의 현위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격했다. 하진은 유능한 인물을 모으면서 그들이 지은 죄의 경중을 보아 죄의 일부를 탕감한 것이지, 범죄자들을 모집한 게 아니다. 묘사 자체가 잘못된 셈.
丙辰, 帝崩于南宮嘉德殿, 年三十四. 戊午, 皇子辯即皇帝位, 年十七. 尊皇后曰皇太后, 太后臨朝. 大赦天下, 改元為光喜.
병진일, 황제(영제)께서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34세였다. 무오일, 황자 변(소제)이 곧 황제에 오르니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라 불렀고 태후가 (임시로) 조정을 다스렸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황당한 점은 그 이전에도 대사면은 당연히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시작된 중평 원년(184년) 3월 임자일부터 12월 기사일 중평 3년(186년) 2월 경술일, 중평 4년(187년) 정월 기묘일, 영제가 죽기 1년 전인 중평 5년(188년) 봄 정유일까지 대사면령이 있었다. 유비가 독우를 두들겨 패고 달아난 게 저 사이의 일이니 당연히 사면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즉, 유비는 황건적의 난 이후 소제가 즉위하기까지 내려진 5번의 대사면령으로 인해 사실상 사면을 받은 상태고[18], 때문에 만화 속 묘사처럼 굳이 죄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5번의 대사면령 이후에도 유비가 여전히 죄인인 상황이라면 유비가 그 사면령 기간 동안에 꾸준히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사면 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라는 황당한 전개가 된다. 연의에서도 유비가 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는 유우를 따라 도위로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죄를 씻으려고 애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2.7. 47화

하진은 맹장과 호걸을 모으면서 '죄에 대한 사면'을 공약한 적이 없다. 유비의 경우도 하진이 파견한 도위인 관구의(毌丘毅) 밑에서 종사하며 세운 공이 이전에 지은 죄를 덮고 새로 공직생활을 할 만 했기 때문에 하밀의 승으로 임명된 것에 가깝다.

2.8. 48화

2.9. 49화

상황 자체는 십상시가 정권농단을 한 게 사실인데, 중요한 건 매관매직을 적극적으로 한 이는 당시 황제인 영제였고 십상시들은 영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부패를 재생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황제가 자신의 착복과 향락을 위해 환관들을 기용한 것이지, 환관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제의 매관매직에 의한 축재에 대한 기록[19]은 아래와 같다.
是歲, 鮮卑寇酒泉. 京師馬生人. 初開西邸賣官, 自關內侯, 虎賁, 羽林, 入錢各有差. 私令左右賣公卿, 公千萬, 卿五百萬.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20]을 약탈했다. 경사(수도)에서는 말이 사람을 낳았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는데 관내후부터 호분, 우림이 각각 들어가는 돈에 차이가 있었다. 사사로이 좌우로 하여금 공경(公卿)직도 팔았는데 공은 천만전, 경은 오백만전이었다. - 후한서 효영제기
時賣官, 二千石二千萬, 四百石四百萬, 其以德次應選半之, 或三分之一, 於西園立庫以貯之.
관직을 팔 때, (녹봉이) 이천석이면 이천만전, 사백석이면 사백만전이었고, 만일 덕으로서 도달한 이는 응당 골라서 그 반을 받거나 혹은 삼분의 일만 받았다. 서원 곳곳에 곳간을 세워 (돈을) 비축하였다. - 산양공재기
물론 효영제기 기록에 좌우로 하여금 공경직을 팔았다는 기록을 십상시에 의한 매관매직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영제의 윤허가 없으면 불가했고 이들이 벼슬을 판 돈 일부도 대부분은 매관매직의 주체인 영제가 받아갔다.

2.10. 50화

동탁을 하동 군벌이라고 적어놨는데 어디 삼국지 드라마만 봐도 동탁은 양주 군벌이다. 동탁이 사예교위부 소속 하동(河東) 태수직을 역임한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동탁은 황건적의 난에서 노식의 후임으로 진압하려다가 패배해 죄를 받았고 이후 한수 등이 농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해 전장군(前將軍) 겸 태향후(斄鄕侯)가 되었고 진창 승전으로 반란이 수그러들자 군을 사병화 했다. 군벌화하는 그를 경계한 조정에서 그를 소부로 삼아 중앙으로 부르고 군권을 박탈하도록 시도했지만 군심을 핑계로 거절, 같은해 다시 병주목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넘기도록 했으나 이번에는 자기 군대를 병주로 데려가겠다며 거부해 버텼다.

3. 51화 ~ 60화

3.1. 51화

進使人迎董卓于澠池, 卓按兵不動.
사람을 보내 동탁을 민지(澠池)[22]에서 맞이하려 했으나 탁은 병사들을 누른 채 움직이질 않았다.

정사인 후한서에서는 '탁이 이르질 못했는데 하진이 패하였고(卓未至而何進敗)' 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정사인 삼국지에서도 같은 표현(卓未至, 進敗 - 동탁이 이르지 못했는데 하진이 패망했다)을 썼다. 연의에 따르자면 낙양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때를 기다린 것 이고, 정사에 따르자면 하진에게 십상시를 일망타진 하겠다고 상소를 보내 큰소리 쳤는데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먼저 제거된 탓에 낭패를 봤다. 아무튼 이때까지는 본격적으로 마각이 드러나기 전이라 큰 행패는 없었다. 동탁의 사위인 우보가 섬현(陝縣)에 주둔하고 이각, 곽사, 장제를 보내 영천과 진류 등을 공략한 적이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동탁이 정권을 잡은 이후였다.
이전 황제라고 한다면 영제 시기를 말하는데 후한서의 효영제기를 참고하자면, 영제 시기에 대사면령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나오며[25] 주로 2월 정월이나 역병이 돌거나 홍수가 났을 때, 그리고 연호를 바꿀 때 주로 있었으며 당고의 금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사면을 내렸으며 죄인들의 경우는 아직 형을 살고 있거나 집행되지 않은 이들을 사면하기도 했다.[26] 즉, 위기의 순간이 올 때나 불만이 높아지거나 정국을 안정시킬 요량으로 대사면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도적떼에 대한 사면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도적에게 벼슬을 줬다는 부분은 장연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자신과 함께 하던 장우각(張牛角)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리가 장연을 따르도록 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장연이 도적떼를 백만에 가깝게 규합해 흑산(黑山)이라 이름짓고 북방에서 난리를 쳐도 영제가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먼저 장연이 낙양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따라 영제가 명목상이지만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장연의 세력이 워낙 감당이 안 되게 컸기에 생긴 특별한 경우이지, 삼국지톡에서의 내용처럼 도적들이 생길 때마다 벼슬을 줘서 무마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기사가 훨씬 많다.

3.2. 52화

3.3. 53화

3.4. 54화

3.5. 55화

3.6. 56화

3.7. 57화


실제 이 시는 조조가 지은 해로행(薤露行)이라는 시로서 16행의 긴 시임에도 딱 4줄만 인용했다.[40] 삼국지톡에서 인용한 실제 호리행의 부분은 아래와 같다.
惟漢二十世
생각해보니 한 왕조도 20대[41]가 지났는데

所任誠不良
소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沐猴而冠帶
원숭이가 관복(관과 띠)을 입었으며

知小而謨强
아는 것은 적으면서 꾀하기에만 힘쓴다.

문제는 해로행은 조조가 동탁의 강제 천도로 인해 폐허가 된 낙양을 보고 쓴 시라는 점이다. 즉, 해로행의 문구가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인 셈이다.

3.8. 58화

瑾少游京師, 治毛詩, 尚書, 左氏春秋.
(제갈)근은 어릴적 경사(수도)에서 유학을 했고 모시(毛詩), 상서(尚書),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즉, 십상시의 난이 터지는 현장에 제갈근이 있는 셈인데, 마치 딴 지역에서 소식을 접하는 양 묘사가 된 것이다. 정사를 자주 인용하면서 이런데서는 안한다 다만 모친상을 치뤘다는 언급도 있으므로 십상시의 난 시점에 꼭 낙양에 있었다는 보장은 없다.

3.9. 59화

결국 이전 화에서 예상되었던 것처럼 노식이 하태후를 구출한 뒤 십상시를 추적해 단규와 장양 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몰아붙였던 민공의 등장이 누락되었다.

3.10. 60화

유협을 계속해서 '황자(皇子)'라고 부르는데 황자는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유협은 전황제인 영제의 아들이지, 현 황제인 유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형제를 의미하는 황제(皇弟) 내지는 유협의 당시 공식 직함인 '진류왕(陳留王)' 이라고 칭하는 게 맞다. 이제는 하다못해 형제를 부자지간으로 만드네


[1] 사진 출저는 무적핑크가 애용하는 포토리아로 보인다. 해당 사진의 출처.[2] 해외에서는 여름 궁전(Summer Palace)으로 불린다.[3] 특히 장안에 있는 전한 시대의 궁인 미앙궁(未央宮)의 경우는 완전한 복원도까지 제작이 된 상태다.[4] 이러한 문제점은 '세트 돌려쓰기'라는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해당 문제를 비판한 오마이뉴스 기사[5] 이게 심해지면 분명 특정 시대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대한 고증이고 뭐고 옛 자료라면 무조건 사용하는 행태가 일어날 수 있다.[6] 군인에 비유하자면 대통령 취임식 같은 큰 행사에 참여한 영관급 내지는 장성급 군인들이 전투모도 없이 나타난 것과 똑같다.[7] 삼국지톡에서는 이 암살 모의 사건이 누락되었다.[8] "황제는 어리석고 약해서 종묘를 받들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소!(皇帝闇弱, 不可以奉宗廟, 為天下主!)" - 후한서 동탁열전[9] 다만 이는 당나라 중후반기엔 어느정도 맞다.[10] 탁류는 지방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유학을 내세워 성장한 청류와는 뿌리부터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반목하면서도 한편으론 협력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후한도 200여년간 지속된 왕조다. 나쁜 점만 있었다면 광무제 사후 150년이 아니라 15년만에 망했겠지만 100년 이상 이어지다 환관과 외척이 모두 무너졌을 때 등장한 동탁에 의해 멸망을 길로 들어섰다.[11] 관청의 문서나 기록을 담당하는 직분이다.[12] 벽소(辟召)라는 말은 '임금이나 상관 등이 불러 벼슬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13] 그냥 심하게 제압한 걸로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병사들이 "한대만 때리면 우리 다 살아!" 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보아 여포를 막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혹독한 방식으로 보인다.[14] 말타고 활쏘기를 말한다.[15] 즉위한 해인 189년의 연호는 소제 시절의 연호인 광희(光熹), 소녕(昭寧)과 헌제 시절 첫 연호인 영한(永漢)이었는데 다음해인 190년에 모두 폐지했다.[16] 위 오류를 조조에게 적용하면, 조조가 세운 많은 업적, 특히 군사, 문학적인 면에서 기여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인물들이 서주대학살 만을 가지고 조조를 단순히 '인간말종' 이라고 까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말종이 아니라는건 아니고[17] 단양군은 후한의 양주(揚州) 지역에 있었다.[18] 단 184년의 사면에서 당고의 금으로 인해 갇힌 자들은 제외되었고 이후 사면에서 황건적의 난의 주모자인 장각만은 유일하게 제외되었다.[19] 후한의 광화 원년, 즉 178년의 일이다.[20] 양주(凉州)의 주천군을 말한다. 치소는 복록(福祿)에 있었다.[21] 크고 높음이라고 쓰잘데없는 설명까지 붙였다(...).[22] 오늘날의 하남성의 몐츠 현. 낙양과 상당히 가까운 홍농(弘農)에 속한 곳이었다.[23] 태위를 보좌하는 속관.[24] 이전에 가후는 효렴으로 낭(郎) 직을 담당했으나 병이 나서 물러나 있었다.[25] 대사면령이라는 용어만 해도 18번이나 등장한다.[26] 다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은 사면되지 않았다.[27] 정원이 하진의 명을 받아 맹진을 불태운 일 자체가 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28] 동태후와 영제의 고향이다.[29] 동태후의 공식적인 명칭이다.[30] 영제의 아버지 유장(劉萇)은 해독정후(解瀆亭侯)였다. 전 황제인 환제가 아들이 없이 죽어 유장의 아들 유굉이 환제와 그의 정실 두태후의 양자 자격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영제의 생모인 동태후는 번비의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들이 황제인 덕에 두태후 일족이 몰락한 이후, 장락궁에서 살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하진 역시 동태후를 지칭할 때 장락태후(長樂太后)라는 표현을 사용했다.[31] 위서에는, 조조가 하진과 원소의 계획을 듣고 '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군주의 과도한 총애와 내려준 권력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들을 벌하려면 옥리를 시켜 원흉만 주살해도 되는데 어째서 바깥의 장수들을 부르는가? 환관을 모두 주살하려고 든다면 계획이 드러날테니 실패할 게 뻔하다' 면서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32] 시랑은 공경들의 사무를 돕는 상시조(常侍曹) 소속되어 있는데 문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인물이다. 물론 이들이 작성하는 문서의 초안은 기자들이 정부로부터 제공 받는 보도자료와는 전혀 다르지만 삼톡식으로 대충 끼워맞추면 얼추 들어맞게 된다.[33] 둘 다 진림의 관직을 주부라고 제대로 기록하고 있다.[34]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면서 신야를 불태우고 달아나던 시기. 장판파에서 조운과 장비가 활약하기도 했다.[35] 조조 묘사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조조는 삼국지톡에서 묘사한 냉철한 인텔리가 아니라 조씨네 날건달, 파락호에 가까웠다.[36]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를 북부도위로 기용한 사람은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이다.[37] 조등열전에 따르면 1억전을 들여 태위직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남의 자리를 돈으로 강탈한 것.[38] 공교롭게도 최열 역시, 전 태위였던 장온(張溫)이 파직된 이후 태위직을 맡았다는 점이 동일하다.[39] 살이 다 다져질 정도였으면 사람 하나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40] 삼국지톡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서 늘 자료의 일부만을 가져와 자신이 묘사한 장면에 끼워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41] 세(世)는 대(代)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42] 어사중승, 상서령, 사예교위를 일컫는 말.[43] 권한을 나타내는 신표 등을 의미한다.[44] 후한서 하진열전에 하묘의 발언에서 등장하는 부분이다.[45] 물론 주목제가 부활하면서 사예교위 또한 행정과 군사 모두를 통솔하는 게 가능했다.[46] 황당하게도 황실 인원들을 헬기로 태우는 장면은 없는데 정작 수색에 헬기를 사용하는 황당한 장면이 등장한다.[47] 이렇게 될 경우 황제와 진류왕을 구출해 보호하고 있던 하남중부연(河南中部掾)인 민공(閔貢)의 등장이 누락되거나 노식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민공은 연의와 정사 모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며 노식과 함께 십상시의 난에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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