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동요. 1950년 4월에 만들어졌다. 다만 시 자체는 1946년 이전에 쓰여졌다.
작곡: 이흥렬
작사: 한인현
편곡: 안형수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여
다 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여
다 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2. 특징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곡으로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기도 한다. 반짝반짝 작은 별, 모차르트의 자장가와 함께 부모가 아이를 재울 때 가장 많이 불러주는 노래다.이 노래의 유래는 작사가 한인현(韓寅鉉, 1921~1969, 한국글짓기 지도회 회장 등 역임[1] 링크)이 어린 시절을 보낸 함흥 혹은 교사로 근무했던 경기도의 어느 해변 마을에서 본 광경을 토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가 해변가의 어느 집에 들어가니 아기만 곤히 자고 있었는데, 아이 어머니가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걸 보고 놀라서 굴 바구니를 던져두고 모래톱을 뛰어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말은 도시전설이다. 이 시는 6.25 전쟁 훨씬 전인 1946년 발표된 동시집에 있고, 6.25 직전인 1950년 4월 나온 잡지에 재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느리고 서정적인 가락[2]이 구슬픈 느낌을 주므로 감성이 풍부한 어린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다 엄마 생각이 북받쳐 울 수도 있다.
2001년과 2002년 사이에 제주도에 섬집 아기 노래비를 건립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됐다. 곡이 전반적으로 굴을 따는 해안가를 연상시키는 건 모두가 동의하지만 하필 그 위치가 제주도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곡가 이흥렬의 친일 행적도 제기됐고, 저작권 기증자 역시 '(제주)도민이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2003년 1월 기준으로 취소되었다.
3. 도시전설
그런데 이 곡은 이상하게 도시전설이나 괴담에 엮여서 소재거리가 되는 일이 많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TV 예능 프로그램의 납량특집의 '공포 체험' 때 나오는 일이 잦아져서 본의 아니게 이런 성향의 노래로 이미지가 고정화된 탓도 있다.조용한 장소에서 이 노래를 낮고 느리게 부르면 매우 오싹한 느낌이 든다.[3]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귀신이 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귀신에 홀린 친구 또는 가족이 이 노래를 부른다는 괴담도 알게 모르게 널리 퍼졌다.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에서도 이에 관한 투고글들이 몇 개 올라와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때 '섬집 아기의 가사 해석'이라는 의미불명의 게시글이 나돌아다닌 적이 있다.
가사를 달리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기가 집을 본다는 가사는 어머니가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뜻이고, 아기가 어떻게 혼자 집을 보는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든다는 부분은 아기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뜻, 갈매기 울음소리는 아기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온다는 소절은 어머니가 뒤늦게 아기의 죽음을 알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는 이야기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뿐인 아이가 죽어서 슬피 오열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애초에 이건 2절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아예 2절은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으로 시작한다. 아이가 집문을 열고 자고 있는 상태에서 파도에 휩쓸려서 죽었다거나 아이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지 않다는 얘기다. 버전에 따라서는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 소절이 세상을 떠난 엄마가 죽은 아이를 데리러 왔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또 다른 바리에이션도 있다. 매우 암울하게 위의 가사를 읊은 뒤 "애기가 혼자 어떻게 팔베개를 베고 자...?"라고 말하는 것인데 사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아이가 혼자 팔베개를 하는 것이 가능한 지 모르지만 서로 소름 돋으며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아이가 벤 것은 귀신의 팔이라고 생각하며 사실 혼자 집을 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라면 팔을 혼자 베고 자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신경쓰지 말자.[4]
팔을 베고(伐, cut) 잔다는[5]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여담으로 엄마는 있는데 가사에 아빠를 언급하는 부분은 없어서 아빠는 배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배가 뒤집혀 죽었다는 괴담도 있다. 사실 죽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해안가 마을이라면 아이의 아빠는 출항 나가서 일러도 저녁때, 늦으면 몇날 며칠은 돼야 돌아올 뱃사람일 가능성이 꽤 높긴 하다.
어찌됐건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본의 아니게 슬픈 가사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3.1. 이런 해석이 탄생한 이유
노래 자체는 생계 때문에 아이를 돌보지 못해서 고생하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묘사한 것이니 쓸데없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대부분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으므로 부모는 돈 벌러 나가고 아이가 홀로 집을 지키다 지쳐서 잠드는 장면은 드물지 않게 연상될 수 있는 장면이다.[6][7] 현대에도 맞벌이로 인해 할머니·외할머니에게 맡겨지거나 방치 상태에 있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즉, 섬집 아기의 가사는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의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괴담으로 각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과잉해석. 특히 2절을 모르고 1절만 가지고 괴담을 만든 경우도 있는 걸로 보인다.이 평범한 동요가 괴담까지 나온 이유로는 아마 가락이 적막하고 청승맞은 분위기기도 하고, 유명하기 때문에 더욱 뇌리에 남아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된다. 사실 노래 자체가 상당히 음이 낮고 우울하기 때문에 밤중에 들으면 스산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영화 올가미에서 죽은 아들의 시신을 침대에 누이고 이 노래를 불러주는 씬이 인상에 깊이 남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아마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비슷한 도시전설로는 동요인 꼬까신[8]이 한 정신병자가 읊조리던 말을 옮겨왔다는 썰이 있으며아기가 극단적 선택하러 가는 내용을 담은 노래라거나, 부모가 보지 못하는 새에 아기가 다른 사람에게 유괴되는 내용을 담았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1970년에 타계한 최계락 시인이 지은 동시다. 동명의 동시집도 있다. 순수한 느낌의 시에서 어떻게 그런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아마 '신발만 벗어놓고 놀러나갔다.' 라는 여러 가지를 상상하기 쉬운 내용 때문에 어린이들 사이에서 퍼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비슷한 취급을 받는 동요로 토랸세와 카고메카고메가 있다.
애기들한테 이 노래를 들려주면 운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걸 스펀지에서 실험한 적이 있다. 실제로 대다수의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고,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무의식적으로 아기들이 엄마가 어디 갔다는 가사를 느끼고, 우울한 음이 울음을 유발한 것이라 한다.
2010년대에는 한인현이 어촌의 소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때 일어난 일이라느니 1969년 한인현 사망 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실화라는 괴담이 돌았지만 모두 도시전설에 불과하다. 한인현의 경력을 보면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경기도 여주군 가남초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내서 어촌에서 교사를 한 적이 없으며 1950년 4월 소학생에서 시가 발표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서울에서 교사를 재직하였다. 언급되는 한인현 사망 후 출간된 회고록은 존재 여부가 불분명하며 당시 韓寅鉉(한인현) 기념사업회 등 다른 공식 기록에서 언급되지 않는다.[9]
여담으로 조용한 장소에서 들으면 공포가 느껴지는 이유도 음악의 선율과 분위기가 만나서 나오는 우연의 일치로 설명이 가능한데 어둡고 컴컴한 방에서 고양이 소리 혹은 착신아리의 음악소리를 낼 때의 공포감과 비슷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커버
체리필터가 부른 버전이 Rewind에 수록되었다.샤이니가 부른 적이 있다.
주현미도 해금 반주에 맞춰 부른 적이 있다.
리처드 용재 오닐도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심재윤이라는 유튜버의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편곡 버전도 있다.
오연준 - 정규 1집 앨범 '12' 수록곡 섬집 아기.
계피 동요집 '빛과 바람의 유영' 9번 트랙.
부활의 9대 보컬 출신의 가수 정동하가 경연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 2에서 이 노래를 편곡해서 우승한 바 있다.
5. 매체
- 개그콘서트 코너 풀하우스: 정승환이 가족들한테 봉변을 당한 후 "제~발 그만들 좀 하세요!! 이놈의 집구석 지긋지긋 하다구요."라는 명대사를 외칠 때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 다오 배찌 붐힐 대소동: 에띠, 케피, 모스가 이 노래를 부르는데 후반부에 다오가 끼어든다.
- 닥터앤닥터 육아일기: 85화
- 덴마 - <콴의 냉장고>: 마빈이 술에 취한 상태로 시타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 후, 나중에 시타가 반대로 마빈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다.
- 무한도전: 명수는 12살, 무한도전 릴레이툰 1화
- 변신자동차 또봇 12기: 폐건물에서 귀신 분장을 한 옥디룩이 주딩요의 소리를 귀신 소리로 착각하여 겁먹자 섬집 아기를 부른다.
- 손 the guest - 김륜희: 살인을 저지를 때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이 곡을 휘파람으로 분다.
- 쇼미더럭키짱! - 풍호
- 올가미: 선술했듯이 어머니가 죽은 아들의 시신을 침대에 누이고 이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나온다.
- 이런 영웅은 싫어 - 스텔은 목소리로 충격파를 만드는 특기 때문에 큰소리로 노래를 못 하는데, 설정상 잔잔한 노래는 그나마 부를 수 있고 이 노래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 쟁반노래방: 2003년 3월 6일 방영분(69회)의 도전곡으로도 쓰였다.
- 트라이건: 한국 더빙판에서 원본의 극중 삽입곡인 Sound life-Rem 대신 이 노래로 치환되어 등장하기도 했다.
6. 패러디
마광수의 '엄마가 섬그늘에'라는 시도 있다.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여러 날 여러 날 집을 보다가 굶어 죽었다 |
동명의 패러디 시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은유한 시로, 작가는 최현우. 참사 100일(2014년 7월 24일)을 기해 나온 시집인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 실려 있다.
《섬집 아기》 혼자 집을 지키며 울지 마라 까치발 들어 밖을 보다가, 맨발에 물을 묻힌 아이야 낮달에 손가락 걸고 밤아 오지 말라고 약속한 아이야 깜빡 꿈을 꾸다 먼 지평선이 옮겨 붙어 두 눈을 가늘게 감아버린 아이야 웅크려 발톱을 만지는 사이 어깨 위로 갈매기 앉았다 가고 입김 가득 불어놓은 창문에 언 뺨을 부비며 몸 녹이는 아이야 그래서 얼굴 가득 황혼을 묻혀버린 잠든 아이의 영원한 저녁아 바다야, 바다야 잘 시간 오지 않은 아이에게 자장가를 부르지 마라 그늘에서 굴 따던 엄마 모랫길을 뛰어가다 넘어진다 |
7. 기타
-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갈 때(When mother raids ghoul on the darker side of the island). SNS를 통해 구글 번역에서 엄마가 섬 그늘에 구울(굴)을 퇴치하러(따러) 간다는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 패러디에선 어째선지 아기도 덩달아 전투력이 상승하여 엄마가 구울 목 따는 동안 집을 지키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구울의) 팔을 베고 잠이 든다는 전개로 흘러간다.
- 문웅주의 섬그늘이라는 노래도 있다.
8. 관련 문서
[1] 평생 교직에 몸담았고, 동요와 우리말 연구에 힘쓰다가 과로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디자이너 한혜연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2] 이 때문에 단조 곡이라 오해할 수 있는데, 바장조(F Major) 곡이다.[3] 다만 이건 거의 대부분의 자장가나 동요가 마찬가지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호러 게임 데드 스페이스의 메인 테마곡은 반짝반짝 작은 별이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내용의 가사가 있는 자장가가 있다. 마더 구스 문서 참조.[4] 아기라는 점 때문에 불가능하다라고 하기 쉬운데 노래가 나온 시기를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 연장자들은 작은 아이나 심지어 어느 정도 자란 아이들 역시 '아기'라는 명칭으로 많이 부르곤 했다. 그러므로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갓난아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란 아이라고 볼 수도 있다. 2010년대에도 노인들이 많은 집안에서는 막내자식을 애기라고 부르는 집안이 꽤 많다. 그 막내의 나이가 40~50대인 경우도 있다.[5] 스스로 자기 팔을 자르고 과다출혈로 숨졌다는 뜻.[6] 게다가 이 노래가 나온 시기는 광복 직후다. 시대상 고아 혹은 편부·편모 슬하의 아이들은 쉽게 연상된다.[7] 한국에는 '안일은 여자의 것'이라는 유교적 가족관의 영향으로 교육이나 매체에서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현모양처'와 같은 어머니를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풍조가 20세기 후반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사람들조차 '옛날 어머니는 다 집안일만 했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라고 순전히 가사노동만 하는 것도 상류층에서나 가능한 것이었고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흔히 농어촌에서도 '밭일' 등으로 일컬어지는 생계 활동을 어떻게든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이가 크면 도시 지역에서도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했다. 전통적으로도 제주도나 이북 지역 같은 유교적 영향이 적은 곳이 이런 풍조가 특히 심했다.[8] 가사: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 가지런히 놓여 있는 꼬까신 하나 / 아가는 살짝 신 벗어 놓고 / 맨발로 한들한들 나들이갔나 / 가지런히 놓여 있는 꼬까신 하나[9] 말년에 은석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사망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초등학교 내부에 섬집 아기 동상과 한인현의 얼굴과 약력이 새겨 있다. 이 동상 역시 섬집 아기 괴담의 마수를 피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