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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6:25:48

성경/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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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독교의 시각
2.1.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는 신학자들의 입장
3. 주된 논란 소개와 목록
3.1. 성경 내부의 불일치 및 충돌사례3.2. 역사 기록과의 모순3.3. 과학과의 모순3.4.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3.5. 현대 사회에서는 지키기 힘든 부분3.6. 기타3.7. 잘못된 논란
3.7.1. 표절 논란3.7.2. 니케아 공의회 정경 논란
4. 논란에 관한 논란
4.1. 윤리적 문제: 구약 대신 신약을 보자?4.2. 4중적 해석법4.3.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성경 속 논란에 대한 문제
5. 성경 내 몇몇 오류의 원인 분석
5.1. 논란의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
6. 학술적인 탐구
6.1.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6.2. 신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
7. 기타
7.1. 음모론과의 관련성
8. 같이 보기

1. 개요

경전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성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집필 및 내용을 둘러싸고 관련된 논란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르네상스와 금속 활자 탄생 이전의 필사본 시대에는 사소한 자구 차이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에 들어가면 사실 끝이 없다. 필사본 시대에 생긴 자잘한 사본들 간의 차이를 전문 용어로 '이문'이라고 한다. 성서학계에서 나온 이 이문에 대한 유명한 말이 바로 성경 전체에 있는 단어의 수보다 이문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1]

문제는 이 이문들이 자잘한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성경 구절 간의 충돌로 인해 모순을 불러일으키거나, 과학적 사실과 충돌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하고, 비도덕적인 일들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기도 하므로 이런 성경의 문제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것은 비단 과학계나 철학계 등의 비종교적인 단체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중대한 일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이런 경전의 비판적 해석이 배제된 근본주의적 종교 집단 혹은 국가들이 어떠한 병크를 일으켜 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쉬울 것이다.

이런 성경의 문제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성경은 한 사람이 작성한 서적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저자들이 쓴 경전들을 엮은 서적이며 작성 시기의 시대적 한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성경의 개별적 내용들이 그 안에서 묘사된 시대 이후에 쓰였다는 추정과 학설이 많고 기독교 내의 성서비평학계에선 이를 사실상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만큼 성경의 역사적 서술의 신빙성도 100% 신용할 수 없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2][3]

참고로 Project Reason이라는 기관에서 성경의 내용들을 분석하여 성경에 적혀있는 내용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모순을 찾아본 결과 439가지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건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끼리 충돌한 모순'이 439가지라는 거지, 과학적이나 역사적으로 모순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당연히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앞서 설명할 내용들은 성경 내의 과학, 윤리, 역사 등 실제로 있었던 논리적인 요소들을 성경이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 기독교의 시각

기독교 내에서 논란의 핵심 중 하나는, 성경이란 야훼가 불러준 대로 기록한 경전인가, 아니면 인간의 창작물인가이다. 이는 결국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로 고대 문헌에 대한 해석학의 발전, 중근동에 대한 고고학, 종교학, 역사학적인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제가 많다. 결국 성경은 절대 틀린 게 없으며 그러므로 천동설 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후자라고 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다.

성서비평학적 관점에서는 성경성령의 영감에서 발생한 문학 작품으로 보며 '구원에 필요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경전'으로 규정하면서 성경이 야훼의 말씀일지언정 이 말씀들이 객관적으로 혹은 과학적, 역사적으로 옳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경은 엄연히 종교 경전에 불과하고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책이지 자연과학 같은 걸 가르치려고 쓰여진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경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신정통주의 신학처럼 성서비평학을 적극 수용하되,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는 인정하는 교단들도 세계적으로 상당하다는 걸 알아두자.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에 대한 분석과 연구 자체가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하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 밑의 주된 논란들에 대해서도 근본주의자들은 나름대로의 반박 주장을 펴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신비적, 고대적 요소로 가득한 경전을 신이 불러준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 현대 사회의 과학적, 합리주의적 사고와 충돌하고 논란에 휘말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미국근본주의 기독교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계에서는 진화론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비평적 해석학)이 사탄이라고 규정했다. 오늘날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이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논란과 비평적 해석은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며, 목회자들은 성경에 대한 비평적 해석과 논란점을 대학에서 배우긴 하지만 이를 설교하거나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다. 물론 진보적인 기독교 학자들은 모든 내용들을 인정하고 관련 서적 등을 펴내며 설명을 하려 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워낙 작은 상황이다.

사실 요즘엔 보수적인 신학교들도 성서비평학을 가르치는 추세이긴 하지만, 문제는 한국 그 어떤 주류 개신교 교단이라도 교회 내에서 교인들에게 성서 비평을 통해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 대한민국 개신교 교단 중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조차도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4] 학계와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 447회(2007. 10. 13) 방영분을 참고할 것. 한신대 신학과[5] 교수이자, 한신대 총장을 역임한 채수일 교수는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과 나눈 인터뷰에서,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기장 계열 목사들조차 설교 시간에 한신대에서 배운 대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현실을 성토했다.

이에 대해서, "성서비평학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저 신앙을 위해 모인 것일 뿐 성경의 오류에 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검증하려고 교회나 성당으로 모인 게 아닌 일반 신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성서비평학에 입각해서 성경을 설교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애초에 성서비평학을 설교하느냐 마느냐는 개신교의 경우 목회자와 각 개교회의 자유라는 의견인 것.

그러나 현대 사회의 교회에 성서비평학에 입각해 성경 내부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고 이를 현대 사회에 맞는 돈독한 신앙으로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자세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만큼 성서비평학을 일반 신자들에게서 아예 도외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할 것이다. 상술했듯이 성서비평학을 수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성경을 오류투성이로 폄하한다거나 하는 의미는 아니며 십일조와 관련한 논쟁만 보더라도 성서비평학을 통해 교회가 기존의 기득권 중심의 성경 해석을 탈피해 변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단,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혁적이라는 기독교장로회도 십일조는 열심히 걷어댄다. 현시창

2.1.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는 신학자들의 입장

성서비평학적 입장의 신학자, 성서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성령의 영감'이 담겨 있으나, 성경 저자가 야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무슨 프린트하듯, 신으로부터 그대로 받아적은 것도 아니고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도 있는 등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상호 모순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6] 때문에 신앙적인 측면과 구원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성경이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다고 보지는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를 연구할 때와 같은 시각으로 분석하면서 보아야 한다. 이는 어찌 보면 성서를 연구할 때 당연히 요구되는 자세인 것은,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구약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은 신화적 모티브를 여기저기서 따왔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는 바빌론 신화의 성경, 에누마 엘리시에서 따왔다는 논문이 있다. 실제로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의 대홍수 이야기와 거의 똑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파헤친다고 해서 종교계 입장에선 이미 정립된 신학에 충격이 가는 것도 아니고, 성경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떤 모티브(motive)로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은 하루 종일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연구를 할 사람은 신학자와 성서학자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목적은 성경과 기독교를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함이지 반기독교인들처럼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종교인이었든지, 무신론자든지 간에 날카롭게 성경을 비판하는 것도 그만큼 성경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이지, 성경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고 해서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란 거다.

이들의 주장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현대인과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것이 고대인의 지능이나 이해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고대인의 뮈토스적 세계관으로 체험한 하느님이 현대인의 이해와 다른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성서는 애초에 단일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의 그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며 그 개별 저자들 역시 여러 다양한 시대적 배경의 산물이므로 모순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주장한다.

3. 주된 논란 소개와 목록

성경에는 내부의 내용 불일치나 모순 및 보편적 윤리에 어긋나거나, 실제 역사 기록 및 과학적 지식과 상충 되어 갑론을박이 오가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데, 본 항목의 상당 수 내용은 '바트 어만'의 관련 저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특히 모순이나 현대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내용의 경우, 구약이 신약보다 더욱 많이 지적되고 있다. 이런 구약의 문제점은 이미 기독교 초창기 당시부터 지적되던 내용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다르다고 주장하여 아예 구약은 버리고 신약만을 정경으로 채택한 이단 분파도 있었다. 마르키온파 참고.

성경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에 의해 고대 헬레니즘 시대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왔으며[7] 이미 밝혀진 지 오래인 논란들의 경우엔 신학적인, 교리적인 반박이나 해석이 나와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다만 그 반박이나 해명도 전부 온전히 수용되지는 못하고 아직도 논란에 오르내리고 있는 내용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현실.

또한 신학은 그 특성상 자연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학문 탐구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일반 과학 이론의 경우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여 그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나오면 이론으로 자리 잡지만, 그 가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거나, 반대되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가설을 폐기하게 되어 있다. 즉, 이론 자체가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반면 신학의 경우, 어떠한 경우에도 '신은 실존한다'는 명제를 절대 깨질 수 없는 절대적 진리로 상정하고 시작한다. 비종교적 시각에서 볼 때 위에서 이야기하는 신학의 차원에서 시도되는 교리적 반박이나 해석은, 야훼가 실존한다는 기본 명제를 절대적 명제로 설정한 상태에서 성경 내부의 상호 모순이나 비윤리적/비과학적/전근대적인 부분들을 합리화하고 최대한 말이 되게끔 만든 것에 불과한 것이 상당수다. 이렇다 보니 신학이 2000년 동안 교리 논박과 정립을 거듭해도 비종교인을 비롯한 외부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지적에 대해서 일부 기독교와 신학계에서는, 기독교의 근간인 성경의 논란 점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교리나 신학을 제외하고 성경 서술 그대로를 가지고 비판하거나 논란을 제기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여기서 종교 학자들의 주장을 넣지 않은 이유는, 종교 학자들은 성경이 그들 나름대로의 신적 체험이 담겨 있으나 시대적 한계가 상호 모순이 많기 때문에 성경을 절대적 진리라 보지 않으며,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신화와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비종교인들의 입장에서 성경 자체의 신성성(神聖性)에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는 점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저작인 성경은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가 고대인들이기에 시대적 한계 때문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시대를 넘어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로 남아야 절대적 교범으로서의 성경의 가치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되지 않는다.

이렇듯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인간들이 썼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전능한 신이 올바른 지식들을 전해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당시의 인간들이 후대에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을 모른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신이 그 수준에 맞춰서 책을 쓰도록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8]

또한 성경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게 되면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 신화, 북유럽 신화와 다를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대해 열린 시각으로 그 가치와 한계를 모두 인정하는 신학은 당연히 다른 고대 신화도 인간의 신적 체험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종교 다원주의). 일단 한국 내의 어떤 신학교도 이렇게까지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는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부정할 위험이 있기 때문. 보수적인 교단 계열의 신학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내에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계열 한신대학교 신학과에서조차 다른 종교 및 신화의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적지 않은 수의 모순이나 내용 불일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시대상 한계의 연장선상으로 필사자의 실수, 즉 오기[9]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상당수의 오류에 대해 설명이 된다. 근데 문제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주장, 즉 전지전능한 야훼가 성경 필사에 직접 관여했다는 주장은 여기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필사에 직접 관여했는데 오기가 생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기가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음 4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3.1. 성경 내부의 불일치 및 충돌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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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역사 기록과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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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과학과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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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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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현대 사회에서는 지키기 힘든 부분


현대 윤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문제가 되지 않아도, 현대 사회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반면, 이러한 점의 대부분이 현대 기독교에는 해당되지 않으며(심지어 일부 조항은 유대교에도) 해석하는 사람과 교단에 따라 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1][12] 아래의 모든 구절은 구약 성경의 법에서 나온 것인데, 현재는 신약 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유대교 중에서 근본주의적인 종파는 투석형 등을 제외하면 아직도 위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야삽으로 똥을 파묻는구나! 하지만 유대교의 경우에도 구약의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슈나, 탈무드 등의 신학 해설을 통해 유화적으로 부드럽게 현대 사회에 적용시키는 편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십자가 희생과 아후 사도들의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율법에서 신자들을 해방[17]시켰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이며 십계명을 제외한 구약의 자잘하고 삶의 제약이 심한 율법들은 강제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식 교리이다. 특히 제사(구약 종교 의식)에 관한 내용, 식생활에 관한 내용은 더욱 그러하다. 다만 십일조 같이 돈과 관련된 율법의 경우는 아직도 고집하는 기독교 종파들이 많아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돈 되는 것만 인정[18]

여기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도록 해석되는 대목은 그 자체로 현재도 비판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으며[19][20] 사실상 사문화되거나 의미만이 남은 구절은 구절 자체일 뿐,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린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3.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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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잘못된 논란

3.7.1. 표절 논란

과거 이 항목에는 성경에 나온 예수의 이야기들이 타 신화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담겨있었으나, 시대정신에 나온 내용들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무신론 서적들[21]에도 예수의 이야기가 다른 종교의 것을 표절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무신론 서적들이 성경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의 몇몇 예화들의 중복[22]을 두고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라고 까기도 했고,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예수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서술[23]이 전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고 까기도 했다. 애초에 데이비드 밀스 같은 경우도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의 신자였지만 성경을 공부하면서 모순을 깨닫고 무신론자로 전향한 예다. 특히나 노아의 방주는 원래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던 설화의 살이 붙어 성경에 기록됐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또 다른 예시를 들자면,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러셀 서양철학사>에서, '에페소스의 디아나'숭배가 성모 마리아 공경으로 변화하였다는 것, 이사야서가 실은 여러 명의 저술이 혼합된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미트라 종교라는 당시에 그런 종교가 있었으며, 초기 기독교와 경쟁적인 관계였는데 종국에는 기독교 설화와 흡수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얘기를 토대로 성경이 신화들을 표절한 종교 서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당대의 종교들이 원래 민간 신앙들을 토속 종교들을 흡수하며 성장한 걸 생각하면 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다. 쉽게 말해 내용이 잘못되었다기보단, 그 표절이라는 언어 자체가 잘못 선택했다는 것. 그냥 당시 종교상이라고 보면 될 듯. 따지고 보면 불교도 인도의 설화, 토테미즘과 결합하여 각종 만담이 생겼고, 이슬람 종교도 사막 지역의 신앙과 결합하였다. 이와 관련된 연구도 많이 진척해 있다.[24] 애초에 다른 종교와의 교류 없이 혼자서 발전하는 고등종교는 없다.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신화가 성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기독교적 교리의 근본적 스탠스가 오직 기독교만이 옳고 이교도는 다 헛소리라는 점에서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 내 설정에 대한 현실 역사적 요소의 모순이 생긴다. 실제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서 이것저것 많은 요소들을 따와 교세를 확장해놓고는 정작 원본들은 묻어버린 내로남불의 극치라는 것.

진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게 아닌 이상 예수의 탄생과 신의 존재를 제외하면 성경의 각종 설화들은 당대의 지혜가 전수되었다고 보는 게 편할 것이다. 이미 지구 나이만 따지고 봐도 성경에 4000년과 10만 배 차이나기도 하고. 아니면 본래 성서 원본에는 없다가 후일 추가되었다고 믿는 것도 논리적으로 틀리진 않다.

이와 별개로 예수의 실존 여부는 사실인 게 정설이다. 물론 그 예수라는 사람이 신의 자식이었을지, 아니면 한낱 인간이지만 성인이었을지 받아들이는 건 본인의 몫.

3.7.2. 니케아 공의회 정경 논란

다빈치 코드의 영향으로 인해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을 정했다는 음모론이 퍼졌는데, 정경 목록은 397년과 419년에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정해졌다.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에서 모두 인정하는 보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경 정경 목록을 결정했다면, 아무리 마르틴 루터라고 해도 구약의 얌니아 목록을 받아들였을 리 없고, 교회사에 대한 오류 중 반기독교로 인해 은근히 널리 퍼진 소문이다.

정경이 인간의 손에 정해졌다거나, 삼위일체 교리 등이 인간들의 결정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 어느 것을 경전으로 인정할 것인가는 현대까지도 교파마다 다르다. 신약은 모든 기독교 교파가 정경으로 인정하나, 구약은 교파마다 정경으로 분류한 책 목록이 조금씩 다르다(https://en.wikipedia.org/wiki/Biblical_canon).

특히 천주교를 기준으로 할 때,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까지 성경 정경 목록은 성문법적으로 정한 게 아닌, 관습법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과연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건지, 아니면 하느님이자 인간인지를 결정한 공의회이므로 그리스도교 사상에는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긴 했지만, 성경 목록을 정한 적은 전혀 없다. 다빈치 코드는 어디까지나 소설이지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다.

4. 논란에 관한 논란

4.1. 윤리적 문제: 구약 대신 신약을 보자?

기독교 성경의 내용 중 논란이 되는 것에는, 본 문서에도 나와 있듯 '윤리적인 명제'에 대한 논란 또한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구절에 대한 지적을 받으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변론하는 것이, 그것은 구약의 내용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을 주셨기 때문에 대체되었다이다. 당신이 가져온 구절은 구약의 내용인데, 신약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내용이니까, 헛다리를 짚었다는 것.

하지만, 그러한 변론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었다'고 흔히 기독교인들이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을 전면 폐기하고, 신약만 경전으로 삼자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25] 당장, 그 어떤 기독교인들도 구약의 창세기 1장 1절(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를 부정하지 않고 십계명이나 모세의 이야기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26] 구약은, 여전히 대다수의 기독교 종파로부터 유효한 경전이다.[27] 또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은 신약이 구약을 '완성'한다고 묘사하길 좋아하지만 '완성'은 부족한 설명이나 맥락을 더해주는 것의 의미이고 신약 같은 경우는 구약의 규칙들을 바꾸거나 폐기하는 수준인데 이것은 결국 구약과 신약이 보여주는 관계성이 '완성'보다는 '수정' 혹은 '대립'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게다가 애초에 처음에 내놓은 구약이 불완전해 신이 재림하여 그 성경을 신약으로 보충하고 몇몇 구절들은 완전히 폐기해 버린다? 결국 일반인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신이 전지전능은커녕 인간과 다를 바 없이 결함투성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 현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구약의 일부 구절은 신약으로 대체되었지만, 일부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이고, 이렇게 하면 '어떤 구절은 무효화/신약으로 대체'되었고 '어떤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냐'라는 웃긴 문제를 안게 된다.

이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동성애에 대한 진중권vs윤정훈 논쟁일 것인데, 윤정훈 목사는 '구약 성서에는 동성애를 죽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서 호모포비아 발언을 하지만, 그에 대해서 진중권은 '그럼 그 말대로 동성애자를 죽이지 그래?'라고 조롱한다. 윤정훈과 진중권 모두 기독교(개신교)인이라는 점을 보면, 같은 구절(레위기 20장 13절)에 대해서 윤정훈은 그 구절이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다고 보는 반면, 진중권은 그 구절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구절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절대적 가치를 가르쳐야 할 성경이, 시대에 따라 유효하지 않는 구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이라는 문서가 굉장히 설정 오류가 가득한 인간이 만든 소설로 비춰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말대로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구절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과거에는 유효했다는 것인데, 그럼 신약 이전에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여성과 장애인이 핍박받고 노예를 소유하고 영아를 살해하는 것이 괜찮았다는 것인가? 당연히 남에게 태생이나 장애를 이유로 부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 과거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괜찮을 리가 없고 그럼으로서 성경에서 묘사되는 신의 "전지전능함"이 인간의 변화하는 시대상은 초월하지 못하는 웃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이 구약과 신약의 자가당착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시대를 초월하는 도덕적 가치마저 무시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시대에 따라 용인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구절은 무효화/신약으로 대체' 되었고 '어떤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냐'라는 웃긴 문제에서, 기독교도들은 '무효한 구절과 유효한 구절'에 대해서, 보편적인 합의따위는 몇천 년째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위의 진중권 대 윤정훈 논쟁도 그렇고, 동성애/종교적 관점동성결혼/종교적 관점만 보더라도 당장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교회가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교단마다 옹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하는 등 기독교 내에서 일관성이 없으며(게다가, 그 일관성 없음마저도 제각기 '신학적'인 근거를 내놓고 있으니), 여자를 목사 또는 사제로 안수함에 있어서도 옹호, 반대가 제각기 서로 대립하는 것이 현실이다.[28] 심지어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종파에서는 성서를 근거로 채식주의를 취함이 옳다고 하는데, 다른 기독교 종파에서는 부정하는 등, 합의가 되지 않는 사안이 널려 있는데, 대체 어느 기독교도의 성서 해석을 취하라는 말인가?

4.2. 4중적 해석법

4중적 의미의 해석은 중세까지 유행하던 해석 방법으로 성경해석을 4가지 의미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필로의 영향을 받은 오리게네스에 의해 3중적 의미의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4중적 의미의 해석으로 정립되었다.

4중적 의미의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해석해 본다면 문자적(literal)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문자적 도시이며, 풍유적(allegorical) 의미로는 교회를 의미하며, 도덕적(tropological) 의미로는 인간의 영혼을 언급하며, 영적(anagogical)인 의미로는 하늘의 도성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하와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는 십자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4중적 해석법을 도입할 경우, 이 문서에서 지적되는 성경에 관한 논란을 둘러싼 상당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비기독교 입장에서는 기독교 입맛에 맞춘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냐는 합당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밑의 비판 단락 참고.

일단 문제는 이러한 사중적 해석법을 성경에 체계적이고 주체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기독교 교계에 정립되어 있냐는 것인데, 대체 성경의 어느 부분까지를 역사적으로 보며, 어느 부분까지를 교훈적 의미로, 또 어느 부분까지를 풍유적 의미 및 영적 의미로 보아야 할까? 그 기준이 사실상 정립되지 못한 점이 큰 문제다.

세계 기독교의 50~60%를 차지하는 가톨릭, 정교회등의 주교제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sancta ecclesia catholica)의 해석이 그 기준이라 성경 해석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으므로 해석에 있어서 일관된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 보편교회에서는 성경의 해석에 관해서는 공교회가 독점적으로 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 일개 사제, 신학자, 평신도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톨릭에는 교황청이나 각국 주교회의[29]가 아닌 개인 및 사조직이 편찬한 주석 성경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검열을 통과한 것이거나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가 아울러서 편찬한 에큐메니컬 주석 성경[30]일 뿐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는 현재 지구상에 개신교 종파의 수는 대략 무려 2만여 개에 달하는(...) 교파들이 있는데, 또한 각 종파마다 저마다 옳다고 내세우는 성경 해석법은 당연하게도 한둘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거룩한 공교회'의 해석은 대체 이 2만여 개의 종파의 교회 중 어느 공교회의 해석을 말하는 것인가? 기독교 연합체인 WCC나 WEA에서는 각 기독교 종파를 아우르는 성경의 4중적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국내외 어떤 기독교 연합체나 어떤 공의회라도 각 종파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는 성경 해석의 4중적 해석법의 기준을 제시한 적은 없다.

가까운 예로, 국내 기독교 메이저 교단 중 가장 보수적인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31]와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사이에는 성경 해석에 있어 차이가 많은 편인데, 특히 예장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문자적 해석을 주로 하며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반면, 기장에서는 성서 비평을 통한 해석을 위주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지양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장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 상당수를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반면, 기장은 사회 구원과 연결지어 해석하며 여러 사회 운동과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보수적인 예장에서는 기장의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해 좌파적이라는 평가를 하며, 심하면 이단이라는 언급도 심심찮게 하며 대단히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이러한 개신교 교파 간의 차이를 기독교 연합체에서 통합하여 공통된 성경 해석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가 교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에 가깝다. 애초에 개신교는 통제받지 않는 성서 자유 해석이 원칙이기 때문.

개신교 내 종파들 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경에 대한 해석도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구약 인물들의 영혼이 지하로 내려갔다는 구절에 대하여 가톨릭에서는 이를 고성소로 간 것으로 해석하지만, 개신교계에서는 이런 해석들을 전면 부정하며 고성소, 연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또한 복음서의 내용 중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는 구절에서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베드로에 대한 교황권과 로마 교회의 수위권의 부여로 해석하지만 이 해석 역시 개신교에서는 전면 부정하고 있다. 물론 교회일치운동 등이 현대에 활발히 일어나는 점도 무시해선 안되지만, 교계의 교리적인 소통은 지지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설사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계의 모든 종파들을 아우르는 초교파적인 성경의 4중적 해석법에 대한 기준안이 적용되어 성경의 상당수 논란이 해결되었다고 봐도 여전히 역법/숫자 상의 상충 및 상호 모순, 이문 현상이 일어나는 부분이 많다. 애당초 야훼의 뜻과 개입으로 쓰여졌다는 성경이 집필되고 필사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러한 오류들이 산재했던 것이 현실인데, 몇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야, 기준을 세운다고 세워서 해석해 봐야 해석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게다가 성경은 다 다른 사람이 적었는 데다가 소실된 부분도 약간씩 있기 때문에 더 특정한 해석을 하기가 애매해진다.

간단한 예로, 신약 성경에 산재하는 모순과 사본들 사이의 이문들의 문제는 4중적 해석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만 해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내용을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기 때문이며, 이외에도 교파 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필경사의 부주의[32]나, 오탈자 등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오류와 모순들과 이문들[33] 문제들은 4중적 해석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 글에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라 그런지 논의의 대상이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정교회성공회, 각종 오리엔트 정교회의 분파들 같은 기독교계 종파들[34]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경 해석을 발전시킨 이런 종파들까지 초교파적인 4중적 해석안의 주체여야 할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만 합의를 보는 것도 이 문단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다.

4.3.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 성경 속 논란에 대한 문제

결론적으로 보면,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애초부터 모든 기독교 종파를 해석하는 통일되고 권위 있는 해석이란 전무하며, 성경의 어느 구절이 비유인지 어느 구절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기준 역시 없고 여기에 대해선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개신교 내부의 2만여 개의 종파들마다 저마다의 성경 해석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은 시궁창에 가깝다.

또한 해석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유아 학살이나, 곤충이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부분 내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불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풍유적/영적 해석 으로 땜빵하는 게 아니냐는 비기독교인들의 지적도 나온다.

다시 말해 하필 성경 내에서 발견되는 여러 상호 모순이나, 타 민족 학살, 여성 차별, 동성애 증오, 유아 살해 및 대량 학살 등의 전근대적/비윤리적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때만, 즉, 야훼와 기독교에 불리한 부분을 질문하게 되면 바로 위와 같은, '전지전능한 야훼의 뜻이라 미천한 인간을 알 수가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사실 다 똑같은 야훼의 뜻인데, '야훼가 인간을 사랑한다'와 같이 듣기에 좋고 긍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모르는 것 없이 술술 이야기하다가, 왜 유독 '야훼가 아말렉의 젖먹이 아기들을 죽였다'같은, 비윤리적이고 전근대적인 구절에만 이르면 '인간은 알 수 없다'고 나오는 것인가?라는 지적이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흔히 일부 종교인들이 생각 없이 써먹는 레퍼토리가 된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이라 인간은 모른다'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이 사실일 경우, 야훼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듣기에 좋은 부분은 인간이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았으면서, 유독 자신의 비윤리적이고 잔악하고 야만적인 부분만 인간이 알 수 없도록 해놓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위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계를 보면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해당 구절에 반영된 구절이 종파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야훼의 뜻을 이야기하는 데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독교도의 교리 논박도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해석의 근거를 물어보면 대부분 성령의 힘이라느니, 영적 눈으로 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며, 성령이 영적 눈을 터 주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35]에서 답답하다는 말이 많다.

또 기독교계의 성서 해석은 주로 성경이 진리라는 교계의 입장을 먼저 내세우고 나서 성경의 논란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론에도 언급했듯 종교적 가치관을 차치하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점들이 존재하여 지금까지 무수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도 뭔지 모르는 대상을 그저 숭배해야 한다는 뜻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의 정신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를 지닌 초월자라면 크툴루나 야훼나 다를 게 무엇인가?

또한 '인간을 초월하는 야훼의 뜻이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정말로 인간의 이해 수준을 뛰어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변명할 말이 없어서 우기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고로 비신자들의 의견은 후자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손님을 타박할지언정, 이성과 동성을 가리지 않는 집단 성행위, 근친상간, 수간이 난무했다고 주장하는데, 확실하게 묘사한 확실하게 묘사를 하면 어떻게 될까 부분이 없다. 그저 창세기 19장에 계간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는데, 도시 전반적인 설명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후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부정한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하리라' 혹은 너무 타락했다고 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아래 구절들에서 확인 가능하듯, 소돔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이 단 10명도 없었고, 롯의 집을 방문한 두 천사를 상관(해당 구절의 흐름상 강간, 또는 관계를 하겠다는 표현으로 주로 해석됨)하겠다고 온 소돔 사람이 몰려올 정도로 성에 대한 집착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롯은 아직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자신의 두 딸을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내어주는 충격적인 장면도 나온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소돔이 멸망할 당시 의인으로서 구원받은 롯 자신도 자신의 딸을 내어줄 만큼 타락한 소돔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소돔에) 열 사람(의인 10인)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창세기 18장 32절(공동번역)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소돔 시민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온통 몰려와 롯의 집을 둘러싸고 롯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늘 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자들하고 재미[36]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
창세기 19장 4~5절(공동번역)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내가 모신 분들에게만은 아무 짓도 말아주시오.
창세기 19장 8절(공동번역)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도시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음란에 흐르고 비정상적인 육욕에 빠졌으므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서 후세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유다서 1장 7절(공동번역)

5. 성경 내 몇몇 오류의 원인 분석

사울 이외에도 나이나 집권 햇수, 대수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호적역법과 같은 기록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사회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제도가 없으면 지방 풍습에 따라서 해(年)를 세는 관습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고, 출생일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다 보니 자기 나이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도 매우 많아진다. 성경 기록을 내부적으로 참조하자면,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이전 까지는 아예 호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이것이 문제다.
숫자 계산과 역법 문제로 명확하게 나이를 기록하는 것이 어렵던 시절, 어느 마을에 자기 나이가 100살이라고 주장하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아들이나 손자, 그외 아래 세대의 사람들은 100살을 살았다고 믿어줄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70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해도.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아들은 자신의 나이와 어머니의 나이를 계산하다가 실수를 하여 20 정도를 잘못 더해 버렸고, 자신의 어머니가 120살에 돌아가셨다고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이 마을은 오래되고 오류가 많은 역법으로 해를 세고 있었기 때문에, 1년의 길이가 다른 지방보다 더 짧았다. 나중에 기록가들은 구전 기록을 바탕으로 역법 보정을 한 결과, '200년을 살다가 죽은 할머니의 전설'이 버젓하게 기록되어 버린다(…).

이렇게 전승 기록들은 후대에 문자 문화가 도입된 다음 증언을 채록하면서 과장과 왜곡을 거치면서 수년에서 수십 년, 수백 년까지 차이가 날 수 있다. 문자 기록이 있는 사회라도 기억의 오차 등의 이유로 인해 출생 기록이나 집권 시기가 문헌에 따라서 몇 년씩 차이 나는 경우는 흔히 비교적 있으며, 이런 사회에서도 하층민들은 아예 구체적인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도 매우 많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도 고작 몇십 년 전만 해도 본인이 말하는 나이, 주변인이 증언하는 나이, 족보호적 등에 기록된 나이가 1~2년에서 많게는 수년 정도 차이나는 일은 흔히 있었다. 행정 기록의 도움 없이 민간에서 기억하는 연대기적 기술은 이처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다.[37][38]
이 문제도 간단한데, 고대인들에게는 수학(이라기보다는 산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 의무교육이 활발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사칙연산을 셈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지식이며 심지어 초등학생마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유대교 하레디 집단의 사례를 보면, 더하기빼기는 둘째 쳐도 한국에서라면 미적분벡터에 고통 받는 18살에 곱하기나누기를 배우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기초적인 사칙연산마저도 '성경에 포함된 지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우리가 현재 쓰는 아라비아 숫자사칙연산은 간단하게 되어 있어서 몇만 자리 셈도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0과 자릿수의 개념이 없는 그 이전의 숫자들은 간단한 사칙연산도 상당히 어렵다. 히브리어 문자를 그대로 숫자로 활용하는 히브리 숫자 역시 마찬가지로, 이 문자를 사용한 계산이 그리 쉽지는 않다.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문제는 원주율. 성서 이전의 시기에 아르키메데스가 원주율의 근삿값을 제시한 바 있었는데, 아르키메데스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3보다는 오묘하게 큰 값이라고 서술했더라면 두고두고 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대 박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지식인이라 해도 생물에 대한 이해는 변변치 못한 수준이었다. 지식인들은 동물이나 곤충, 식물을 그리 자세하게 관찰하지 않았고, 이런 현실에 존재하는 생물을 관찰하는 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이런 분야에 몰두할 경제적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제사나 일만 해도 하루를 전부 날리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현실과 동떨어졌거나 왜곡된 것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이러한 왜곡된 선입견들은 근현대까지만 해도 꽤 많이 남아 있었으며, 실증적인 연구에 따라서 하나씩 제거되고 없어지게 된다. 파브르곤충기 같은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생물 기록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일반인들도 동식물, 곤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데, 유대교에서는 특히나 '더러움'을 경계하여 유대교의 신학자, 사제 등은 동물을 더욱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곤충의 다리는 몇 개인가?"같은 질문은 전혀 중요한 지식이 아니었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즉, 진지하게 생물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물에 대한 지식이 엉망이 되었던 것이니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5.1. 논란의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

신실한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성경과 성경 저자가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지녔다 하더라도, 성서무오설 신봉자가 아닌 이상 그것이 적어도 하느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되지 않으며, 신의 실존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입장이 주요 종교계의 해석이다. 교황청에서도 본 항목에 나온 것 같은 성경의 상호 텍스트 간의 모순이나 현대 윤리에 반하는 내용들의 경우, 해당 내용을 부정하지 않고 당시 성경 저자의 시대적 한계로 분명히 인정하나 그러한 사실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는 직접적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성경 내의 모순이나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거나 핵심 자체가 모순이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세속적/비종교적 관점[39]으로 보면 성경이 다른 종교와 경전, 그리고 다른 신화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서술상의 한계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종교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믿지 않아도 되는 이유만 만들어주는 꼴이다. 물론 서술상의 한계점 자체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고유한 특징이 없다는 얘기는 아닌데다, 지적된 여러 모순이나 논란 등을 기독교의 특별함은 지키면서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사실 무신론자들이 야금야금 증가해서 기독교 변증가들이 팔을 걷고 열심히 기독교 변증학을 연구 중이다.[40] 게다가 성경에 모든 항목을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며 변론하는 게 기독교 변증론이다 보니[41], 실제로 이 변증논을 통해서 유입이 되는 경우는 낮다. 정신승리라는 비판도 있다.

6. 학술적인 탐구

6.1.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

구약을 이루는 24(가톨릭 46, 개신교 39)권의 책은, 유대인이 '토라'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을 제외하고는 통일된 체계도 없이 각각 읽혀 왔다. 사실 Bible을 '성경'이라고 표현하는 발상이 '사서오경'에서 나온 것인데, 유교의 수많은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많은 책들이 기원전 1400년(최근엔 기원전 600년경이 되어서야 토라가 쓰여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부터 400년 사이에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토라를 살펴보자. 유대인은 처음부터 하나의 집단으로서 존재해 오지 않았다. 탈출기에 묘사된 출애굽 사건을 계기로 하여, 기존에는 별개의 집단이었던 것이 하나로 규합된 것이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역사적으로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 성립 이후에야 민족의식(Nationalism)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설상의 시조인 아브라함, 민족의 시조 모세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 토라인 것이다. 창세기는 토라의 가장 앞장을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40년경 취합된 것으로 인정된다.

기독교인 중에서 기존의 성서무오설과, 성경은 비과학적이라는 양쪽 논리를 모두 비판하는 시각에서는 창세기는 세상이 창조된 과정이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은 하느님이 만드셨다"라는 지식을 전달하고,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범신론, 다신론과 그들의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며, 기원전 1400년경의 사람들을 위해 당대에 불필요한 이야기는 최대한 빼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6.2. 신약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

우선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복음서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특정한 저자가 없었던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후대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들이다. 복음서 안의 모든 내용은 중세기 대부분의 문서와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대문자로 쓰여 있고, 제목이 없으며, 장이나 절의 구분도 없고, 낱말들 사이에 구두점이 없다. 이 복음서들은 유대인의 아람어로 쓰여지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어로만 쓰여졌다.

복음서는 예수를 일일이 쫓아다니며 작성한 게 아니기 때문에다. 사도행전 8장 4절, 25절 등에 나오듯 처음 예수의 행적과 말씀은 성문화되어 전해진 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42]

이런 구전 복음(Oral Gospel)이 처음으로 문서화된 것이 대체로 기원후 50년 정도라고 보고, 이런 원시적인 문서 자료들과 구전 자료, 그리고 복음 사가가 자신의 기억들을 취합하여 작성한 복음서로서, 4복음서 중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이 작성된 것이 기원후 70년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시작, 끝부분을 기반으로 좀 더 이른 시대(기원후 50년~60년)를 말하기도 한다.[43]

이렇기 때문에 복음사가들이 각자 사용한 자료, 그리고 그 자료들을 어떤 의미에서 배열했는가에 따라 복음서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복원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예수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금의 복음서들은 역사적 고증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는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44]

또한 복음 사가들은 복음서를 쓸 때 각자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을 위한 것이고, 마르코 복음서로마 이방인, 루카 복음서그리스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 사가들이 자신이 수집한 기록들을 나열하고 정리할 때 그들의 의도가 개입되었다.[45] 복음서 간의 차이가 나오는 것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주된 논란 목록'의 복음서 간의 차이에 관한 내용들도 상당 부분 이에 관련된다. 또한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일관된 '예수전'을 만드는 것이 위험한 일인 이유이기도 하다. 각 복음 사가들이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배치해 놓은 사건들을 뒤섞어 버려서 성경의 해당 책이 주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고 덧붙여졌다.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내용을 비판하는 주장을 무마할 목적으로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교파 간의 갈등이나, 개인의 신학적 고찰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내용에 변경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저술에서, 변해 가는 신학적 풍토의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원고가 계속 편집되고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오늘날 수많은 판본의 원고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필경사의 부주의나. 일부 사람들이 주제 넘게 원문을 고쳤기 때문이거나, 더러 교정자로 자처하여 제멋대로 첨가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입증하기 위해, 바트 어만은 완전히 무작위로 복음서 일부를 선택했다. 이때 선택된 것은 마르코 복음서 10장과 11장이었다. 그는 여러 초기 원고들 간에 다른 점이 얼마나 많은지 점검했다. 결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48곳 이상이 달랐다. 상호 비교하면 2곳만 다른 것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 3곳 이상이 달랐고 어느 경우는 6곳 이상이 달랐다.

학자들은 복음서 내용 가운데 후대에 추가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예컨대 원래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에서 끝난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고 여자들이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끝난 것이다. 소위 긴 결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초기 원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오늘날엔 거의 모든 신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코 복음서 참고.

참고 자료: 《성경 왜곡의 역사》(바트 어만[46] 저, 민경식 역, 청림출판)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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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구약 내에서의 상호 모순을 나타낸 시각화 자료다. 큰 이미지로 보기.막대기 하나하나가 장(chapter)를 의미하며, 하얀 건 신약, 회색은 구약을 나타낸다. 막대기의 길이는 각각의 장들의 절(verse) 분량을 의미하고, 빨간 원은 모순되는 부분을 연결해 놓은 것이다. 이 시각화 자료는 소설로 치자면 '세계관 내에서의 모순' 즉 서술상의 오류와 모순들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이나 학술적, 역사적인 모순까지 따져보면 이런 모순의 수는 훨씬 늘어난다.

이러한 자료들이 있기에,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100%의 과학적, 실제적 진실이라고 여기는 극단적 성서무오설은 대개 개드립 취급받는다. 다만 종교계에서도 성경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둘러싼 해석과 교리적인 절충을 적용하고 시도해 왔다는 점, 그럼에도 성경에는 논란이나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을 모두 숙지하고 도를 넘는 극단적인 성경 비난이나 성서무오설 등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자세가 성경을 탐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7.1. 음모론과의 관련성

이러한 성경 논란의 2/3이상이 구약에 연관된 관계로, 구약이 유태인 중심의 서사라는점을 악용해 일부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유대인 배후자본설시오니즘의 근거로 보고 더 나아가 구약 유대인들의 후예가 미국의 정재계에 영향을 행사하는 유대인 자본이라는 식의 비약을 펼치며, 이러한 설이 외계인 음모론 및 반미주의옥시덴탈리즘과 결부 지어지면 "야훼는 사실 인류에게 적대적인 외계인이 유대인을 인류 지배 도구로 쓰기 위해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나왔고, 이들의 후예가 미국 정부의 배후다"까지 나오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음모론 결부는 에리히 폰 데니켄외계 문명에 의한 기원설・개입설 해석론의 영향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종교(증산 계열 등) 성향을 보이는 이들에 의해 재확산되기도 하였다.[47] 1997년 경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출간되었던 <한반도 UFO 프로젝트> 박찬호라는 자가 지은(당연히 야구선수와는 관련 없으며, 필명일 가능성도 있음) 괴서적에서 위 문단으로 요약한 내용이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기재되어 있다. 특히 이는 불교, 힌두교, 각종 신비주의 등과 비교해서 기독교를 깎아내리려는 [48] 논거로도 쓰고 있다. 저자가 민족주의 환빠성향이라[49] 온갖 한국기원설을 말하고 거기에 북두칠성 출신의 착한 외계인이 우리 민족 기원이라는 주장은 덤.

8. 같이 보기


[1] 그중에 중세 라틴어 성경이 된 불가타 판 성경과 그에 바탕을 둔 킹 제임스 성경 등에 대한 논란이 많은 편이다.[2]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오늘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렇다' 등의 구절이 많이 나타나는 <사무엘기>, <여호수아기>, <창세기>, <롯기>, <판관기>, <열왕기> 등이 그 시대에서 몇십 년 후에 쓰여졌다고 저술하였다.[3] 예를 들어 가톨릭에선 창세기는 바빌론 유수 시대에 그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창세기 관련 전승을 문서화, 경전화한 책이라는 점을 공식적인 학설로 받아들이고 있다.[4]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S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Y 교회를 20년 이상 다닌 사람도, "주일 대 예배 때 목사가 성서 비평적으로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5]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 장로회 계열 신학대이다.[6] 단적으로 말하면 야훼 자신이 직접 쓰신 것이 아닌데 당연히 완벽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성경의 불완전성이 결코 야훼의 말씀을 훼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7] 마찬가지로 중세 때는 이교도들에게, 근대 때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8] 다만 성경상에서는 모든 이들이 쉽게 해석할 수 없게 비밀스레 봉했다는 식의 구절이 나와있긴 하다.[9] 잘못 서술됨[10]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 자체에 부여되는 의미가 진짜 문제다. 어떠한 의도로 오류를 남겼는지, 오류를 수정할 필요가 없었는지를 예로 들 수 있다.[11] 성경은 매우 매우 오래전에 만들어졌고, 챕터마다 최소 수십년이나 천년 단위로 떨어져있기에 현대의 관점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이해하는것도 불가능하다.[12] 따라서 그때의 관점으로 이해하려 해야하며, 굳이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13] 하지만 여증은 고기를 잘만 먹는다. 성경에 고기 먹어도 된다는 내용이 있어서 피를 안 먹으려는 노오력만 보이면 된다더라(...).[14] 구약의 율법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써 그 효력이 정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 기독교의 입장. 다만 개신교 중 안식교회는 이 규정을 빡빡하게 지키며 돼지고기 등 레위기에서 금한 음식들을 먹지 않는다.[15] 2종류 이상의 화학 물질로 구성[16] Adventures of God이라는 서양 웹코믹(#)에서는 신이 성경 개정판을 내면서 사실 이 구절은 사탄이 몰래 썼는데 그냥 놔뒀다고 한다. 이런 거나 써놓고 자기가 되게 사악한 줄 안다고.[17]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강제적 율법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시켰다고 표현한다.[18] 십일조의 경우 신약에 연보에 관한 대목이 있으며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라는 구절을 통해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돈 때문에 구약의 율법을 인정하고 지키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19]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은 나쁘게 해석할 여지가 없지만 "간음한 자를 돌로 쳐죽이라"는 구절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좋게 읽히지 않는 점이 다르듯이 명백히 문제가 있는 구절은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관점이다.[20] 물론 이와같은 경우를 설명하자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주된 주제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전부 끔찍한 죄로 취급한다.[21]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22] 아브라함이 왕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이야기 등[23] 이 문서에도 나오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와 헤롯왕 등의 서술에 대한 불일치[24] 가령 잠언의 문학적 형식이나 일부 내용은 이집트의 교육 방식에서 따온 것인데, 잠언서 자체가 솔로몬이 보고듣거나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주석이 없다는 것을 제하면 교과서에도 사용되는 방식이다.[25] 역사적으로, '마르키온파'라는 세력은 구약을 전면 부정하고 신약만을 인정한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마르키온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26] 유신론적 진화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창조설을 부정하고 진화론을 인정한다지만, 그런 기독교인들이라 해서 창세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에 쓰여진 글자 그대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그렇기 때문에 진화론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야훼의 창세 자체는 어떤 형태로든 일어났다는 것이다.[27] 다만 기독교에서는 구약 시대의 율법 세 가지(의식법, 시민법, 도덕법) 중 '의식법'과 '시민법'이 신약에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시민법이란 출애굽부터 구약 시대, 예수의 탄생 이전의 민족으로써의 율법들을 의미하고, 의식법은 구약 때 제사와 의식에 대한 규례, 도덕법은 야훼의 본성과 뜻을 담은 법이다. 보통 윤리적인 문제는 대부분 의식법과 시민법에서 불거져 나오게 되는데, 예수의 재림 이후로 더 이상 의식법과 시민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도덕법은 본성을 다루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직도 유효하다.[28] 대체적으로 진보적 개신교와 성공회는 여성 성직자/목회자를 긍정하며, 보수 개신교와 가톨릭은 반대한다.[29] 한국 가톨릭의 경우, 한국천주교주교회의[30] 대표적으로 New Oxford Annotated Bible. 영어 번역본으로는 NRSVRSV(1977년판)을 쓴다.[31] 대한예수교장로회도 여러 교파로 갈라져 있다.[32] 당시 신약 성경은 띄어쓰기가 없이 필사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오류가 상당했다.[33] 신약 성경의 이러한 이문 문제는 매우 심각해서, 바트 어만은 "신약 성경의 전체 단어 숫자보다 이문의 수가 더 많다"고 이야기 한다.[34] 우리나라에서야 정교회성공회가 듣보잡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교회의 신자 수인 약 4억 명은 가톨릭 신자 수인 약 13억 명에 비하면 약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어떤 개신교 단일 종파보다도 큰 규모이며, 성공회도 전 세계적으로는 약 1억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 (성공회의 경우에는, 넓게 보면 개신교의 범주에 들어가지만.)[35] 성령이 감화 감동을 일으켜 영적 눈으로 풀이를 하는데, 그럼에도 왜 교파마다 해석이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도 교파별로 여러 종류가 있는가? 라는 의문. 또 성경을 해석하고 영적 눈을 터 주는 전지전능한 성령이 있는데, 왜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가? 성령이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과 알 수 있는 부분을 골라서 해석을 해주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36] 개신교 성경에서는 '상관한다'로 번역.[37] 다만 이 경우는 족보나 호적 쪽이 오히려 틀린 경우가 많다. 특히 시골에서 심한데,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후 1년 정도 지나야 출생신고를 하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38] 그럼 신고할 때 원래 출생일로 하면 되지 않겠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도 정해진 기한 안에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당시는 모두가 가난했던 지라 아까운 벌금을 내느니 그냥 아이의 생일을 늦춰 버리는(...) 선택을 한 것. 그래서 당장 70년대 태생만 해도 실제 생일과 주민 등록상 생일이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다. 오죽 그런 사람이 많으면 개인정보 수집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생일을 수집하기 전 시절의 인터넷 사이트 대부분은 본인의 진짜 생일과 주민증 생일, 두 가지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따로 넣기 귀찮고 어린 게 좋아서 주민증 생일 하나로 퉁친다.[39] 나무위키는 규정상 비종교 위키이며,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상충될 때는 세속적 관점을 우선시하여 집필하도록 되어 있다.[40] 농담이 아니라 진짠데, 궁금한 사람들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옥스포드대 분자생물학 및 신학 박사, 성공회 사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탈봇대학교 철학 교수 및 기독교 변증가), 존 레녹스(옥스포드대 수학과 교수)의 저서나 유튜브 강의를 들어보자.[41] 이렇게 따지자면 변론이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것.[42] 가톨릭은 구전되어 전해진 것들 중에 일부가 성경으로 문자화되었다고 보고 있다.[43] 해당 주장은 사도행전의 마무리가 사도 파울로스가 로마에 도착하는 식의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잡으면 1차 투옥 이전(기원후 58~60년), 늦게 잡아도 파울로스 생전(기원후 65~68년)에 초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이미 루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말하였고 루카 복음서가 공관 복음 중 가장 늦게 작성되었다 여겨지므로 해당 주장에 따른다면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 혹은 Q 사본은 기원후 50년경에 정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44] 가장 처음 마르코 복음서가 작성되었고,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 복음서을 참고하는 한편 마르코 복음서 이외 예수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어록집을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Q 자료'라고 한다. 이 Q 자료 외에 마태오와 루카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자료들은 마태오 특수 자료(M), 루카의 특수 자료(L)라고 한다. 요한 복음서는 4복음서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집필된 것으로 기원후 100년경에 작성되었는데, Q 자료는 물론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상당히 많은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45] 좀 값이 나가는 성경에는 각 복음서가 시작하기 전에 "저작 목적" 및 "저작 배경" 등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46] 이 사람은 미국 기독교 내에서 대표적인 보수적 신약학자의 수제자였지만,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서 연구에 따른 회의 때문에 불가지론자가 되었다고 잘못 알려졌는데, 바트 어만의 또 다른 저서 "예수 왜곡의 역사" 후기를 보면 성경 연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온갖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신은 절대선이라는 것이 맞는 것인가(악의 문제)라는 신앙적인 회의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47] 다르게 말하면 이들이 데니켄식의 해석을 체리피킹했다고 볼수도 있다.[48] 희한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 않다. UFO 괴서적이라 예수도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구약 야훼 신앙에 찌들은 유대인 사이에서 진리를 설파하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비운의 착한 외계인 성자로 치부한다.[49] 당시 유통기한이 남아있던 노스트라다무스예언을 비롯한 세계의 예언들을 설명할 때 위서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격암유록에 대해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거 케이시와 비슷한 비중의 지면을 할애하였으며, 이외에도 김일부와 강증산에 대해 긍정적으로 다룬 적도 있기 때문에 강증산 계열의 종교(실제로 증산도에서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을 내놨고 상권에서 증산도 내용만 걸러낸 <충격대예언>이라는 서적을 내놨는데, 이후 이 서적과 동명의 증산도 유관 단체였던 충격대예언 다음 카페가 존재했었다) 내지는 천부교일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