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6:39

야훼/논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야훼
1. 개요2.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3. 기타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논란4.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
4.1. 기독교의 주장
5.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견해
5.1. 기독교의 주장
6.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일부 진보 신학의 교리적 견해
6.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주장
7.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또 다른 진보 신학자들의 견해
7.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주장
8.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
8.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주장
9. 구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비종교적/학문적 인식
9.1. 비기독교적 입장9.2.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10. 관련 문서

1. 개요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신 야훼에 대한 논란을 다루는 문서.

2.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

다음은 성경에서 묘사되는 야훼의 모습들 중 몇 가지 구절들이다.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1] 살려두어라. (민수기 31:17~18절, 공동번역성서)
그러나 너희 하느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이 민족들의 성읍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신명기 20:16~17, 공동번역성서)
그러니 너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야 한다. (사무엘기 상 15:1-3, 공동번역성서)
백성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팔 소리는 울려 퍼졌다. 나팔 소리가 울리자 백성은 "와!"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은 일제히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여호수아 6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그러나 나는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여,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베풀어 내가 얼마나 강한지 그 증거를 이집트 땅에서 드러내리라. 파라오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들어 이집트를 호되게 쳐서 나의 군대,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집트인들은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2] (탈출기 7:3~5)
어떤 성에 접근하여 치고자 할 때에는 먼저 화평하자고 외쳐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하기로 하고 성문을 열거든 너희는 안에 있는 백성을 모두 노무자[3]로 삼아 부려라.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할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붙이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원수들에게서 빼앗아 주시는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4] (신명기 20장 10절~14절)
야훼께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레위기 27장)
자기 남종이나 여종을 때려 당장에 숨지게 한 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종이 하루나 이틀만 더 살아 있어도 벌을 면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5] (출애굽기 21장 20~21절, 공동번역성서)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레위기 20:13, 공동번역성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아멘.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들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로마서 1장 24~32절, 공동번역성서)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고린토1서 6장 9~10절, 공동번역성서)

위 구절들에서 야훼는 남녀노소 및 동물을 살해하라고 직접적으로 권유하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슬리는 척 성으로 진입하여 노예로 삼거나, 진입에 실패하는 경우엔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전리품으로 가지라 명하며, 노예를 때려죽여도 노예가 하루 이상 생존하다가 죽는 경우는 죄가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현대를 넘어 당대의 기준으로도 당연히 범죄로 여겨지는 것들로, 야훼 신앙에서 야훼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전선(全善)성에 대한 강력한 반박 요소이다. 다른 기록도 아닌 성경에서 묘사된 것이므로 더더욱 그렇다.

3. 기타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논란

구약성경만 뒤져봐도 뭔가 불합리한 부분이 여럿 보인다. 그냥 단순히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만 놓고 봐도 문제가 많다.
...이런 식으로 야훼의 상벌의 기준은 알 수 없다. 사울의 죄가 북이스라엘에 비해서는 크다고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이들보다 가볍다고만 할 수 없고 다윗은 십계명을 어겼음에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을 해먹었다. 이방신을 들이거나 섬겼다고 하는 왕들도 그 최후가 너무나 다른 건 덤. 즉 상벌에 일관성이 없다.

4.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

리처드 도킨스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이런 모습들에 대해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략) 구약성서의 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이다. (후략)
(리처드 도킨스의 원문)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is arguably the most unpleasant character in all fiction: jealous and proud of it; a petty, unjust, unforgiving control-freak; a vindictive, bloodthirsty ethnic cleanser; a misogynistic, homophobic, racist, infanticidal, genocidal, filicidal, pestilential, megalomaniacal, sadomasochistic, capriciously malevolent bully.
사실 도킨스가 지적한 이같은 문제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구약을 폐기하고 신약만을 정경으로 쓰자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다.[10] 물론 이런 소리는 신성모독 취급 받는다.사실 신약에선 야훼로서의 모습은 공기가 되고 예수로서만 출현한다.

4.1. 기독교의 주장

이같은 문제는 구약성경이 당시 고대인들의 야훼를 바라보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식의 학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신성한 계약'에 대한 후대 유대인들의 '이론적 설명'이다. 즉 '계약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고고학적으로 보면 역사적 신빙성도 의심되는 것[11]에 너무 충격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단, 이 반박은 야훼의 성향에 대한 해명은 될 지 몰라도 야훼의 존재 여부에 대한 신빙성은 오히려 떨어뜨린다. 쉽게 말해 구약이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보고 신으로 숭배하기 쉬운 고대인들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예리코의 전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훼는 성경 곳곳에서 자신이 고대 근동 신화의 신들과 다른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며 일개 자연현상을 뛰어넘어 자연의 존재의 근거, 인생의 주관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게 숨을 불어넣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적어놓았다. 즉 일개 자연현상의 신격화에 그치지 않는 존재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의 개입과 역사와 그리고 그 야훼가 창조한 자연현상과 인간사의 흐름을 야훼의 지혜없이는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을 자각해야한다.

5.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견해

야훼에 대한 정통주의자들의 설명은 보편적인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인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와 신약성경이 말끝마다 사랑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탓에 비종교인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 조차도 야훼를 '인간에게 매우 인자하신 할아버지' 또는 '인간을 조용히 바라보는 자연' 정도로 인식하지만 유대인들과 성경이 일관적으로 서술하는 야훼는 극도로 공포스러운 절대신이다.[12]

야훼는 인간과 달리 완전히 공의롭기 때문에 자신의 질서를 벗어나는 털끝만큼의 죄악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악이란 야훼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난 추악하고 어그러진 모습 그 자체이므로, 창조주인 야훼 입장에서는 이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에 대한 야훼의 심판은 정확하고 철저하며 무자비하다. 그야말로 잘못 구워진 도자기를 가차없이 깨버리는 고집불통인 완벽주의편집증적 도공이라 볼 수 있다.

즉 스스로의 완전성을 위하여 무조건 심판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 가장 죄에 대한 경각심을 많이 기를 수 있도록, 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직접 또는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사람들을 심판한 것이다. 한글 성경으로는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지만, 킹 제임스 성경은 신약의 고린도후서를 번역하면서 이 야훼의 심판에 대한 묘사장면에 테러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야훼가 집행하는 공의의 심판은 원래 그 속성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테러로 표현 할 수 밖에 없을 정로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며 비인간적이고 끔찍하다. 말 그대로 대재앙인 것이다.

어린아이나 약자라고 봐주는 것이 없으며, 선행으로 죄악을 덮거나 용서도 없다. 야훼의 저울추는 인간 기준에서 인식하는 죄의 경중과 전혀 다르다. 모든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본질은 야훼에 대한 반역이므로 죄인은 반드시 그의 생명으로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 속에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을 품은 것까지도 실제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과 동일하게 간주하게 된다. 결국 털어서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는 사람은 영원한 불지옥을 면할 수 없다.[13][14]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무자비한 야훼의 행동들은 모두 이러한 야훼의 속성에서 나오는 심판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따라나오게 된다.

1. 이런 야훼의 무자비한 심판의 칼날 앞에서 어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온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예수 외에는 없다.

2. 그렇게나 완벽하게 공의로운 야훼가 존재한다면 왜 죄를 짓고 멀쩡하게 사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이 세상에 어떻게 죄나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 그것은 야훼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심판을 시작하면 인간의 눈에는 야만스럽게 보일정도로 무자비한 야훼이지만, 그 심판을 웬만하면 참는다. 완벽하게 공의로운 존재인 야훼가 인간의 죄악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하지만 야훼는 인간들은 발휘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끓어오르는 의분을 거의 무한하게 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훼의 인내와 성품은 인류를 물로 심판했는데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살려둔 것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결국 고레스왕의 자비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게 바로 느헤미야서와 에스라서이다)까지 성경에 셀 수 없이 묘사된다.[15]

3. 아무리 공의롭다지만 이렇게 무자비한 야훼라면 예수가 야훼를 사랑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 바로 야훼의 이 무시무시한 공의 위에서 기독교의 빛나는 대속 교리가 탄생한다.

지금까지 보였던 야훼의 공의의 속성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야훼는 인간을 사랑한다. 어느 정도냐면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수양아들로 입양하여 인간으로써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자신의 신적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하나 없는 공의를 원하는 야훼의 완전함과 매 순간 쉴새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적 부패성 때문에 공의와 사랑이라는 야훼의 의지는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야훼는 공의와 사랑을 완벽히 충족시킬 방법을 창세 이전부터 계획해 놓았다.

그것은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자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저질렀던, 또 앞으로 저지를 모든 죄악에 대한 야훼의 진노의 심판을 대신해서 받는 방법'이다. 그래서 성자가 야훼의 심판을 받기 이전에 태어난 인간들은 성자가 대신 받게될 심판을 상징하는 '순전한 동물을 처형하는 모형'(희생제사)을 통해 성자의 대속을 받았으며 성자가 야훼의 심판을 받은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성자의 대속 사건(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대속을 받는다. 처형모형은 육체적 혈통에 의하여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 속에서만 계승었지만 성자의 대속 이후에는 믿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민족적 혈통(유대인)의 제약을 벗어나게 된다. 칼빈주의로 대표되는 정통주의자들은 성자의 대속에 대한 믿음의 발생 자체가 야훼의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당신이 이 대속사건이 믿어진다면 그 이유는 야훼가 당신에게 믿어지는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고 이는 야훼가 당신을 구원하기로 선택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야훼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16][17]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야훼로부터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받은 야훼로 부터 받은 사랑을 똑같이(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에 참예시키기 원하여 그들의 죄를 성자에게 전가하고 처형을 집행한 야훼처럼 이웃의 허물로 인한 대가를 자신이 대신 치르어 주는 사랑을 베푸는 것) 실천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 야훼의 무차별적인 공의는 영원불변의 속성이다. 신약은 현존하는 지구를 포함한 이 모든 세상이 마지막 날에 "남김없이 모두 불살라버리기 위하여 예비되었다"고 진술한다. 구약의 야훼가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대학살은 피학살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야훼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할 때 어린아이나 노약자라는 이유로 유황불의 재앙을 전혀 피할 수 없었듯이 어린이나 노약자라고 칼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심판의 개념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현대의 정통주의 기독교에서는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야훼 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이는 것은 신약시대 이후로는 야훼가 심판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나타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적 진술도 야훼의 죄악에 대한 일관적인 심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신자들이 동성애자를 탄압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야훼가 이미 죄에 대한 심판의 연기를 선언했는데 인간이 감히 상대방의 죄를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대단한 월권행위이기 때문이다.[18][19] 다만 소아성애, 간통, 수간, 근친상간, 의미없는 학살, 우상숭배, 동성애, 고아와 과부, 이방 나그네, 거지, 장애인에 대한 차별, 불의를 행하는 것을 죄라고 보는 야훼의 시각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훼의 공의를 근거로 타 종교인들과 마치 원수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이 결코 근본주의 전체의 입장은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당장 본 항목에서 서술한 근본주의 신학의 교리인 사랑의 의무에도 어긋난다. 칼빈의 5대 교리에서조차 <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며 야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천명하지만 이들 역시 전술한 사랑의 의무의 실천 대상이다. 하지만 교리와 다르게 마치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취급하던 구약의 유대인처럼 타 종교를 무조건 비방하고 적대시하는 근본주의 성직자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행태는 주로 북미 네오콘 계열의 Kingdom Now 신학 쪽에서 나타난다. 주로 말세에 유대인들이 다시 부흥하고 무너진 성전이 예루살렘에 재건되면 종말이 온다는 시오니즘적 종말론을 믿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에서 이원론은 이미 교부시대에 배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세계관은 마치 야훼와 사탄이 현 세상을 두고 권력싸움을 하고있다는 조로아스터교식 이원론에 가깝다. 그리고 호전적 성향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이들은 신앙의 목적이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신국[20]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국내 유수 근본주의 교단들에서는 Kingdom Now 신학을 신사도 운동이라며 이단시하지만, 정작 그 신학교의 교수들은 대부분 신사도운동과 동일하게 신앙의 목적이 현세에 신국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왜 이들의 지향점이 동일하냐 하면, Kingdom Now의 뿌리는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하나님나라 신학과 동일하게 카이퍼의 영역주권 이론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신학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Kingdom Now 계열처럼 될 수 밖에 없다. 이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야훼의 주권과 통치를 온 땅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야훼의 영광만을 논할 뿐, 야훼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이 세상을 굳이 수고롭게 창조하고 또 비할 수 없이 고귀한 독생자를 희생해 가면서 까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전해준 <내 생명과 맞바꿔야만 하는 이웃사랑의 의무에 대한 의미와 그 깊이>에 대해서는 어떤 신학자도 고민하지 않는다.[21]

5.1. 기독교의 주장

근본주의적 관점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신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이를 위해 타 종교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는 결코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이는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의 광신적 믿음에 입각한 행위는 같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인 것은 물론이고, 비기독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무엇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교리와 규율은 시대에 따라서 달려져왔고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라 신약 이후의 시대다. 즉, 예수의 죽음이 있었던 기원후이며 지금의 기독교에게 있어서 그 핵심적인 교리는 무한한 사랑과 포용, 용서, 자비인 것이다. 2015년 기준,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하느님을 찾는데 내가 어찌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입장을 대변했다. 하물며 다른 종교를 박해하고 그들의 신전을 밟아 부순다? 예수의 죽음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원죄가 용서받은 지금(연좌제인 문제를 배제하더라도), 종교인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그저 예수의 뜻대로 사랑을 받기보단 베풀고 배척하기보단 포용하는 것 뿐이다. 이때 그 성스럽다는 성서의 일부인 구약을 부정해버린다는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구약의 그러한 것들은 그 당시에 죄를 짓지 않고 짓더라도 그 죄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지시된 조항들이며,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이미 사함을 받은 신약 이후에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기에 구약의 그 부분들을 부정해도 괜찮은 것이 맞다.

6.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일부 진보 신학의 교리적 견해[22][23]

1. 고난받던 히브리인의 개념을 특정한 민족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떠돌이 유목민이던 가난하고 힘없고 박해받던 사회계층이다.[24] 즉, 야훼는 이런 가난하고 힘없고 박해받던 사회 계층의 구원자, 해방자이다.[25]

야훼의 이러한 면모에 대해 반감을 가진 비종교인들은 예리코 성의 젖먹이 아기까지 다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에 대하여 젖먹이 아기도 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을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하고 힘 없다는 뜻은 일종의 계급적 개념으로써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을 뜻하는 것이다.[26]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에 대하여 잔인하고 살벌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복 전쟁을 수행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기 위한 사회 운동이다.[27]

구약 율법서를 보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경제적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와 있다. 그냥 자발적으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제도화하여 말이다. 십일조를 거둬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라든지, 농산물을 수확할 때 조금씩 남겨 두어서 누구든지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라든지 하라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예 50년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토지 가치의 공유와 생산 수단의 공평한 분배를 도모하고자 한 희년법과 같이 급진적인 제도까지 언급되어 있다. 또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회가 본격 국가 막장 테크를 탈 때 권력자와 부자들의 핍박과 착취 행위를 비판하면서 특별히 이러한 사회적 약자 보호, 경제적 정의 실현과 관련된 율법을 제대로 지키라고, 그러지 않으면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부르짖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모스, 이사야, 미카, 예레미야, 에제키엘.

2. 오직 야훼뿐(Mono Yawhism)이란 그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다른 종교(우상)과 대결이라는 시각보다는 신격화된 인간의 지배에 대한 절대 부정이다.[28]

또한 가나안의 사회는 윗동네 막장 왕국주체교를 생각하면 되며, 당시 가나안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은 신격화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장치였다. 가나안의 신들은 지배 계급의 옹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사회 구조, 체제를 '신의 뜻이다!' 라고 선포함으로써 민중들이 찍소리 못 하고 이런 핍박과 착취 체제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를 뒤집어 엎고, 모든 사람이 야훼 앞에서 평등하며, 소중하고 존엄하게 대접받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에게 내린 야훼의 명령이다.

3.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평화를 싸움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곧 정의를 무너뜨리는 세력과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찾는 역동적인 상태다. 여기서 '평화' 라는 것은 단순히 무력 충돌과 살육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정의가 구현되어 모든 사람이 야훼 앞에서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히브리의 평화 개념은 반드시 정의를 동반한다. 정의의 기초 위에 평화가 설 수 있다는 이러한 사상은 현대 가톨릭에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즉 민중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체제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무력 충돌이 없고 평온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평화로운 것이 아니며, 그런 불의한 체제가 뒤집어지고 정의로운 체제가 들어서야 그것이 진정한 평화다.

가령 출애굽 사건의 경우 단순히 야훼를 믿는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던 이집트인들을 물리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이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히브리인들을 압제자인 이집트인들에게서 정의의 힘으로 해방시키는 역사인 것이다. 즉 민족과 민족의 대결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서 서는 신의 역사인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런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고 공평과 정의(사무엘기 하권 8장 15절)의 기초 위에 생명과 평화(로마서 8장 6절)가 구현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기에 잔인하고 살벌해 보이는 정복 전쟁은 사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변혁 운동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신들은 민족 신의 개념이어서, (모압인이었지만 야훼 신앙을 받아들이고 보아즈와 결혼한) 룻과 같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민족들이 야훼를 믿게 된 경우는 많지 않았으므로 히브리 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어야 할 야훼의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생명과 평화의 대안적 세계질서"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아예 아무도 살려 두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는 다소 극단적이고 살벌한 명령을 야훼가 내리는 것이다.

6.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29]의 주장

물론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진보주의적 개신교인들의 주장이다. 애초에 야훼는 자신이 선택한 히브리 민족만을 차별적으로 우대했다.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십계명조차, 사실은 다른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집단 내의 도덕일 뿐이다.[30] 살인하지 말라. 다만 유대인들끼리에 한한다.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가나안이 불의한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역사적 사료는 전무하므로, 이러한 아전인수격 주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역사적 사료가 전무하다는 것은, 성경을 제외하고 당대 가나안의 사회체제를 기록한 역사서가 없다는 뜻이며, 성경은 종교적 경전이지 역사서가 아니므로[31], 가나안의 사회체제가 불의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말이다.

진보측 개신교인들이나 김회권 교수의 주장대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타민족 학살 및 유아 학살이, 체제를 완전히 뒤집어 엎고 새로운 세상, 곧 대안적 세계질서를 세우라는 명령으로 해석을 한다고 해도 유아를 학살하는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포장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더군다나 모세오경에 나오는, 유아는 학살하고 죽이면서 처녀들은 전리품으로 살려서 끌고 가는 행위는 도무지 합리화할 길이 없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했으므로 더더욱 옹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개신교인들이 예로 드는 구약 율법서의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경제적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라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내 집단 도덕으로서, 히브리 사회 내에서 같은 히브리인들을 배려하는 것에 불과했다. 구약 경전에서 히브리 족이 가나안의 타민족과 온건하게 공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이 히브리의 침략 이후 도륙되고 진멸되었다.[32]

또한 구약 성경에서 흔히 보이는, 히브리의 타민족의 신앙을 모독하는 부분은 설명이 불가하다. 이를테면 바알 신전을 화장실로 만든다거나… 또한 이후 집필된 열왕기에는 엘리야바알예언자들의 제사를 조롱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바알의 신관들이 불을 내려달라고 제사를 지내며 춤을 추고 노래 부르다가 급기야 자해 행위까지 해도 '아무 일도 없다'면서 조롱하는 장면이다.[33][34]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나안의 토착 종교가 인신공양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불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앞서도 서술했지만 가나안의 토착 종교가 그 모양이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으므로, 해당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35] 오히려 구약성경을 들여다 보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입다의 예를 제외하더라도, 야훼가 인신공양을 받았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그 예들 중에 하나로 다음을 보자.
그들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는 모조리 죽였다. 이렇게 군사만 무찔러 죽였을 뿐 아니라 미디안의 왕들도 죽였는데 에위, 레켐, 수르, 후르, 레바 등 다섯 미디안 왕을 죽였고, 브올의 아들 발람도 칼로 쳐죽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여인들과 아이들을 사로잡고 가축떼 등 재산을 모두 약탈하고는, 그들이 살던 촌락들과 천막촌들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들은 사람이고 짐승이고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여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들은 포로와 노략질한 전리품을 예리고 근처 요르단강가 모압 평야에 있는 모세와 엘르아잘 사제이스라엘 백성 회중의 진지로 가져왔다. (민수기 31장 7~12절, 공동번역성서)

민수기를 보면 야훼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갚으라고[36] 모세에게 명령하여 미디안을 쳐서 학살을 하고 약탈품과 포로들을 끌고 오는 대목이다.

계속 살펴보자.
모세와 엘르아잘 사제와 회중의 대표들은 그들을 맞으러 진지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모세는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군대 지휘관들, 천인대장, 백인대장들을 보고 화가 나서 야단쳤다. "어찌하여 이렇게 여자들을 모두 살려주었느냐?? 브올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것들이 바로 발람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꾀지 않았느냐?? 야훼를 배신하게 한 것들이 바로 이것들이 아니냐?? 야훼의 회중에 염병이 내린 것도 이것들 때문이 아니냐??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를 안 일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 (민수기 31장 13~18절, 공동번역성서)

전투가 끝나서 히브리가 승리하여 포로들과 전리품을 끌고 개선하는데, 모세어째서 여자들을 살려주었느냐면서 아이들 중에서 남자와 비처녀를 다 죽이고 처녀들만 살려주라고 화를 내는 장면이다. 그런데 처녀인지 아닌지는 대체 어떻게 구별한 거냐여성할례를 참조하라.

그리고 전리품을 분배하는 장면인 다음을 보면,
모세와 사제 엘르아잘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군대가 약탈해 온 전리품 가운데 살아 남은 것은 이 67,5000마리, 가 72,000마리, 나귀가 61,000마리요, 사람은 32,000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들이었다. 그 절반은 싸우러 나갔던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 337,500마리였다. 그 떼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675마리였다. 는 36,000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72마리였다. 나귀는 30,500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드린 헌납품은 61마리였다. 사람은 16,000명인데, 그 가운데서 야훼께 헌납된 사람은 32명이었다. 모세는 야훼께서 지시하신 대로 야훼께 예물로 드리는 헌납품을 엘르아잘 사제에게 주었다.(민수기 31장 31~41절, 공동번역성서)

보다시피 야훼에게 헌납된 사람이 32명이었다고 나온다. 31절을 보면 이것이 야훼가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행한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야훼가 원하지 않는데 모세가 독단적으로 행했다고 볼 수 없으며, 타 민족의 여자들과 아이들마저도 비처녀는 싹 잡아죽이는 전황으로 미루어 보아 저 32명을 살려서 성전에서 노역을 시켰다는 변명[37]도 불가능하다. 만약 저 32명의 미디안 사람들이 인신공양된 것이 아니라면 다르게 처리되었다는 구절이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그런 구절은 전혀 없고 바로 앞에는 똑같이 야훼에게 공물로 바쳐진 짐승들의 목록이 나와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야훼의 뜻으로 자행된 인신공양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흐트러뜨려 여러 나라에 쫓아보내겠다고 광야에서 또 한 번 손을 들어 맹세한 것은, 그들이 조상들이 위하던 우상들에 눈이 홀려 내가 세워준 법대로 살지 않았고, 내가 정해 준 규정을 거절하였으며 내가 정해 준 안식일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좋지 못한 규정도 정해 주었다. 그대로 하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법도 세워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예물을 우상에게 바쳤다. 제 속에서 나온 첫 새끼까지 바쳤다. 내가 그들을 이런 것으로 부정하게 만들어 벌을 내린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야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에제키엘 20장 23~26절, 공동번역성서)

그 이전까지 인신공양을 명한 야훼가 이제는 그 명령이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자기의 인신공양 명령이 옳지 않은 율법이었음을 자폭고백하면서도 그 이유가 너무나 처참하다. 히브리족이 자기의 규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율례를 멸시하며 자기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신이 야훼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러한 인신공양이란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38] 야훼가 스스로 인신공양을 명령했다고 자백 하는 구절까지 있으니 도저히 변명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서술방식의 특징 탓인데, 당시 모든 히브리인들은 모든것이 다 야훼의 뜻이라는 의미로 서술하는 방식을 보였다. 예를 들면 길가다 넘어졌을때도 '야훼가 나로 하여금 돌뿌리를 예비해 넘어뜨리셨다.' 약속에 지각했을때 변명할때도 '야훼께서 나에게 단잠을 자는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든지. 이러한 서술방식을 이해하고 해당 구절을 보아야 한다. ~알게하다는 원어로 ידע 인데 이는 체험적으로 알게하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야훼의 선언적인 구절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회고적인 의미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변론 역시 결국 야훼 또한 당시 근동의 다른 신들과 다를 바 없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관념에소 탄생한 만들어진 신임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다.

참고로 개신교 목회자들이 주로 참고하는 주석 중 하나인 존 위클리프의 주석을 보면, 해당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족들이 몰렉을 숭배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 우상 숭배 의식은 아이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이미 가나안 땅에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율법으로 이 의식을 금지하셨다(레위기 18:21;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족들은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 광야 40년 동안에도 이 우상을 숭배했고(행 7:43), 후에 솔로몬 왕 시대(열왕기상 11:5, 7), 아하스 왕(역대기하 28:3) 및 므낫세 왕(열왕기하 21:6) 시대에도 섬겼다.

분명히 에제키엘서의 해당 구절을 보면 야훼 자신이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인신공양을 드리게끔 명령했다고 나오는데, 개신교인들의 성경 주석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엉뚱하게도 몰렉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런 해석은 야훼가 악행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는 구절로 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9] 그러나 이렇게 한다해도, 야훼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은 없이 그냥 몰렉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넘어간 것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하며, 앞에서 설명한 사탄의 악행도 결국 전지전능한 신의 책임일 수 밖에 없는 문제에 다시 봉착할 뿐이다. 또 다른 주석에도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의 구절에 대해서도 언급을 회피하며, 위에도 언급한, 민수기 이후 성경 집필 과정에서 인신공양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인식이 변화한 이후 기술된 인신공양에 대한 부정적인 구절들만을 언급하고 다시 우상 숭배 이야기로 넘어가 버린다.

해당 구절에 대해서 존 위클리프뿐 아니라 메튜 헨리, 오리게네스, 페트릭, 다이어, 헹스턴버그 등의 개신교인들이 참조하는 다른 주석들도 모두 이 모양이다. 야훼 스스로가 인신공양을 드리게끔 명령했다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모두 회피할 뿐이다. 초등학교 수준의 문장 이해력만 겸비하고 해당 구절을 읽어 보더라도 이 구절은 야훼가 인신공양을 명령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이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또한 진보진영 개신교인들은 히브리가 사회적 약자였고, 야훼는 사회적 약자인 히브리를 도왔다고 주장하는데, 히브리가 가나안을 침공하여 예리코를 비롯하여 여러 타 민족을 진멸시킨 것을 볼 때, 히브리가 과연 사회적 약자였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40]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야훼의 명령 아래 벌인 타 민족 학살과 유아 살해에 대해, 우리 한국독립군이나 아일랜드IRA를 생각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독립군이나 IRA는 힘없는 젖먹이 유아와 노약자를 학살하고 처녀들을 전리품으로 취하지 않았다(…).[41]

또한 야훼가 세계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려고 타 민족의 젖먹이 아기까지 살해했다는 주장도 동의하기 어렵다. 처녀들은 살려서 전리품으로 끌고가는 마당에 젖먹이 갓난아기들을 굳이나 칼로 쑤셔 죽이는 방법으로 '생명과 평화의 세계 질서'를 수립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다시 말하지만, 어떠한 포장으로도 유아 학살과 처녀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간 행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합리화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그 부모의 죄와는 상관없다. 이는 야훼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식의 잘못 때문에 아비를 죽일 수 없고, 아비의 잘못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다. 죽을 사람은 죄 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신명기 24장 16절, 공동번역성서)

앞서도 서술했으나 가나안과 예리코인들이 그 정도로 타락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것을 상기할 때, 개신교인들의 아전인수격 억지 주장에 가깝다. 백번 양보해서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하다는 야훼가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42]인간들마저 교육이나 제도 정비를 통해 교화하는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냈을 법한데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어떤 변명을 덧붙이더라도 이러한 학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학살자들도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온갖 변명과 핑계, 명분을 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것.

젖먹이 아기를 죽임으로써 불의한 사회 체제를 개혁한다는 말도 동의하기 어렵다. 죄 없는 젖먹이 아기를 죽이는 불의한 짓을 통해 불의한 체제를 개혁한다니? 어떻게 보면 우생학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전지전능하니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터, 갓난아이를 죽이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의 가능성마저 미리 끊어버릴 정도라면 처음부터 가나안과 예리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으면 되었을 게 아닌가? 시간이라는 4번째 차원의 축에서 조율까지 가능하다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타락 때문에 아이들을 미리미리 죽이면서, 세상에 넘쳐나는 온갖 범죄자들은 미리미리 처단하지 않는 이유가 참으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젖도 못 뗀 젖먹이 아기들은 죽이면서 처녀들은 살려서 전리품으로 끌고 간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제대로 된 답변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저 민족은 악의 민족이니까 씨를 뿌리뽑아 멸절해야한다"라는 논리가 어떤 종자들에 의한 인종청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주장이며, 그 대상누구였는지 상기해보면 금방 성경의 논리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야훼가 아얘 존재하지 않는 신이고 가나안 정복 후 먼 훗날에 유대교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학살행위를 납득시키기 위해 야훼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그럴듯해보이지만 어떤 기독교인이 그런 주장을 하겠는가?

7.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또 다른 진보 신학자들의 견해

문익환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과 여타의 다른 진보 교단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여기에 따르면 야훼 신은 이집트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조건에서 일하던 떠돌이 이주노동자들이 믿던 신이었다. 그리고 야훼 신과는 별개로 존재했던 엘 신은 가나안 도시국가 영주들에게 착취당하던 농노들이 믿던 신이었다. 그런데 이 떠돌이 이주노동자들이 출애굽 사건[43]을 통해서 가나안 도시국가 영주들의 억압에 맞서 저항하던 농노들과 결합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야훼 신과 엘 신은 하나로 통합되어 히브리어 성경에 자주 나오는 '엘-야훼'가 된 것이다. 야훼 신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민족,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 계급적 개념이다. 폭력과 착취에 시달리는 피억압 대중이라는.

이렇게 철저하게 계급적 대립 구도 속에서 피억압 계층을 갖다가 일방적으로 편 들고 옹호하는 신이 야훼 신이고 엘 신이었기에 이런 피억압 계층이 억압자들에 맞서서 폭력을 사용해 계급 투쟁을 벌이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했고, 그렇기에 구약의 야훼 신이 현대적 관점에서 보기엔 비인도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야훼 신을 믿는 피억압 대중이 폭력을 사용해서 억압자들을 갖다가 때려 부수는 것은 정당하기에, 야훼 신이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안 내리는 게 이상하다는 것이지.

야훼 신은 결코 비폭력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억압에 맞서서 투쟁하는 피억압 대중들의 신, 쉽게 말하자면 볼셰비키들의 신이고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신이었기에 굉장히 호전적인 존재이다. '만군(萬軍)의 야훼'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즉 야훼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대량 학살과 폭력은, 그보다 더한 억압과 폭력에 맞선 계급투쟁의 일부였기에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앞서서 가나안의 사회 체제가 그 정도로 불의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했는데, 정말 도덕주의적 입장에서 봐도 이건 아니다 소리가 나올 만큼 끔찍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연대를 보통 종교계에서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후대로 내려 잡으면 당시 가나안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가 존재했고 농노 제도가 존재했다는 건 사실이다. 당연히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맞서서 투쟁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 투쟁의 정황은 수메르 점토판에 쐐기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기도 하다. 하비루들이 어느 지역에서 왕을 갖다가 쳐죽였다는 내용의 점토판이 상당수 발굴되었다. 따라서 신화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성경만으로 가나안의 사회 체제가 진짜 막장이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가나안 사회에 계급이 있었고, 착취가 존재했고, 거기에 맞선 계급 투쟁이 존재했다는 건 고고학적 근거가 있는 내용이다.

7.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주장

먼저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좌파 가운데서도 폭력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레닌주의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극좌파적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겠지만, 나머지 사람들, 심지어 같은 좌파라 해도 비폭력주의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에게는 과연 계급투쟁을 한다면서 총칼로 무장을 하고는 사람을 갖다 대규모로 죽이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당장 한국 좌파만 해도 노동당이나 정의당 같은 비폭력적 개혁주의자들이 주류인 마당에... 물론 본인이 극좌파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폭력 혁명을 추구하는 레닌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가 아닌 이상은 저런 무차별 대량 학살을 통해 사회주의를 성취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건 아니다. 폭력은 필요하고 폭력으로 기존 체제를 분쇄하고 노동자 국가를 건설할 필요는 인정하지만 피를 보는 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쪽의 혁명 전략은 정말 기존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해서 피억압자들도 버틸 수가 없고 지배자들도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지배할 수 없는 시점이 왔을 때, 그 자신이 노동자 계급의 일부인 사병과 하급 간부들이 군 내부에서 총칼 들고 하극상을 일으켜서 진짜 인명 살상은 최소화하는 가운데 국가 체제를 갖다 무너뜨리고 노동자 권력을 아래로부터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44] 물론 그 이후에 노동자 국가를 방어하고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쫓겨난 억압자들이 도발을 가해 올 때 추가로 무력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찌되었든 닥치고 피부터 흘리는 방식의 혁명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상의 이야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한 것이므로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하고 넘어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설령 본인이 레닌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다 쳐죽이고 여성들은 포로로 끌고 가는 건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좀 큰 아이들을 쳐죽이지 않으면 걔네들이 새로운 억압자가 되어서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데까지 양보를 할 수는 있겠다.[45]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완전 갓난아기까지 숨통을 끊어 놓는 행위는 극좌파적 입장에서도 인도주의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여성들을 갖다가 포로로 끌고 가서 골라잡아 마누라 삼는 것은 여성해방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레닌 본인과 그 혁명동지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보면 결코 환영할 수만은 없을 일이다.

거기에다가 그리하여 세운 것이 무려 '왕국'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다.

8. 성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의견을 피력했다.
하느님의 분노는 우리가 하느님 자신이신 사랑에 대해 어긋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 사는 사람, 선을 벗어나 사는 사람은 그럼으로써 그 분노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은 부정적인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분노는 지배욕에 찬 독재자가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내적인 논리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 곧 우리를 지탱해주는 사랑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공허와 어둠 속으로 빠져 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는 이른바 사랑의 영역에 존재하지 못하고, 분노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하느님의 형벌은 하느님께서 벌금을 부과하시고 사람에게 무엇인가 제재를 가하시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는 의미의 형벌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의 형벌은 우리가 실제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그릇된 노선으로 들어서고 올바른 삶을 벗어날 경우에 느끼게 되는 당연한 결과들의 표현입니다.

다만 오해해선 안 되는 게, 교황의 이 발언은 구약에 묘사된 야훼의 행위 그 자체가 옳다기보다는, '성경이 유기적 영감에 의해 쓰였다는 전제하에' 과연 구약에서 나타난 이런 묘사들이 궁극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전달하는 메세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즉 구약에 나타나는 그런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이것이 고대인들이 적은 신학적인 설명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러한 서술의 목적을 설명한 것이다.[46] 이렇게 될 경우, '야훼는 악한 신인가?'라는 논란에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다만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논리라는 한계점이 있다.

8.1. 이에 대한 비종교인들의 주장

교황의 답변은, 그리스도교 측의 답변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많은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답변이 된다. 허나 이 경우 '해당 행위'에 대해서는 답변할 수 있지만,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종파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어차피 그 종파들이 교황의 말을 듣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유기적 영감설'을 근거로 '고대인의 신학적 해석'이라고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자칫 '설정 뒤집기'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기적 영감설' 자체는 결코 최근에 등장한 개념은 아니며, 초기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같은 이들에게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는 학설이다.

이걸 가지고 일부 종교인들은 그러나 이 유기적 영감설을 부정하면 비종교인들은 성서무오설에 대한 반박의 근거를 잃게 된다느니[47], 성서무오설을 반박할 때는 성서가 모순과 오류가 없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야훼의 모습을 비판할 때는 성경의 구절 하나 하나를 들고 와 반박한다면서 자가당착이라느니 하며 반발하지만, 이는 억지에 가깝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보수적 입장의 사람들과, 성서무오설은 부정하지만 성서에 여전히 가치가 있고, 야훼는 실존한다고 보는 다소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으며, 각기 다른 두 입장을 가진 두 부류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해야 할 때 각기 다른 두 개의 비판을 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1. 성서무오설을 반박할 때에는 성서 그 자체가 현대의 보편적 윤리와 동떨어진 전근대적 윤리관을 지향하며, 비과학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내용들이 즐비한 시대적 한계가 분명한 경전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며, 2. 성서무오설을 부정하지만 여전히 성서가 가치가 있으며 야훼는 실존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할 때에는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가진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과 비교하여 다를 바가 없으며, 따라서 비슈누, 시바, 오딘, 토르, 제우스, 옥황상제, 아마테라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과 같은 온갖 형이상학적 존재 가운데 야훼만이 실존한다는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48]

또한 유기적 영감설은 단순히 성서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결국 야훼가 실존하여 성서 필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신학적 견해이다.[49] 애초에 유기적 영감설이니, 축자 영감설이니 하는 기독교 신학에서의 영감(靈感)라는 말 자체가 영(靈)에 의한 감응(感)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 비신자들은 야훼 같은 건 실존하지도 않았고, 야훼이건 성경이건 그 시절 유대인들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전혀 유기적 영감설이 아니다. 따라서 유기적 영감설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 근거를 잃는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고로 위에서 서술한 종교인들의 반발들은 억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 면으로 해석적인 영역에 있어서 가톨릭 측에서 말하는 궁극적 메시지라는 것이 사실 종단 측의 견강부회가 아닌가 하는 부분은 여전히 쟁점으로 남는다. 본 항목의 종교적 견해는 비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형적인 Ad Hoc 논리에 불과하다. 예컨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면서 쇠의 산화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에 '플로지스톤은 음의 질량을 가진다'고 주장했던 과거의 학자들, 어느 날 외계인이 나타나 자신들을 세계멸망에서 구해줄 것이라 믿었으나 정해진 날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우리의 신앙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고 태도를 바꾼 한 종교단체를 생각해보자. 절대선신을 무조건 존재한다고 확정해놓고 그에 반대되는 사례를 지적받으면 '그건 ~하고 ~해서 결국엔 다 선한 일이다'라는 식으로 반론하는 것이 앞의 경우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설득력을 가지고 일리 있는 논증으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견해는 가톨릭 안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더 공고히 하는데는 쓰일 수 있는 논리이고 성경 역시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없는 사람들, 즉 비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수메르 신화, 이집트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단군 신화와 동일선에서 보일 뿐이다.

물론 대전제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어차피 종교라는 것은 믿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과학)이 아니므로, 궁극적인 영역(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한 대전제)에서는 논쟁이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9. 구약에 나오는 야훼의 모습에 대한 비종교적/학문적 인식[50]

9.1. 비기독교적 입장

그나마 이걸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고 현대인에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있으나, 이러한 서술을 한 인간 저자의 시대적 한계들 때문에 비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효과가 있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저자와 편집자의 개성이 풍부하게 반영된 책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비신자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애초에 사실상 이것은 개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저자의 인간적/시대적 한계에 가깝다. 이는 해당 구절들의 문제가 성경 저자 개인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 아니라,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전근대적인 가치관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서 근원하기 때문이다.

사실 유아를 학살하고 처녀를 전리품으로 삼아 끌고 가는 구절이 구약성경에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런 행위가 그 시대에는 어느 문명이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당시 중동 히브리 족들에게는 타 민족의 유아와 노약자를 학살하고 처녀를 전리품으로 끌고 가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며 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21세기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에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저러한 기록은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의 한계일 뿐이다.

후술되어 있듯이, 바빌론 유수 및 페르시아의 영향 등, 히브리인들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변동에 따라 야훼의 성향도 달라지는 것은, 야훼가 히브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실존할 확률이 0%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존재할 확률이라는 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제우스, 비슈누, , 미트라, 아후라 마즈다, 아마테라스, 대일여래, 미륵, 여와, 오딘이 존재할 확률과 동일하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이 지극히 희박한 확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갈림길인데, 확률은 낮지만 참이라고 확신하고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실존할 확률이 동일하다면 저 존재들 중에 야훼만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적 관점을 배제하고 바라본다면, 야훼는 히브리인들이 상상해 낸 존재이며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보인다. 21세기 현대의 전 인류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구약 성경의 내용들은, 실존할 확률이 제우스나 오딘과 동일한 야훼의 탓이 아니라, 그냥 청동기 시절 히브리인들의 수준이 그 수준이었기 때문인 것[51][52]이며, 야훼를 실존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내용이 어떻든 옳다고 합리화 하려고 하니 위와 같은 복잡한 답변들이 나오는 것 뿐이다.

물론 현대 기독교의 진보적 종파들은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데, 이들의 의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유기적으로 받은 저자가 개성[53]을 넣어서 집필한 것이므로 성경이 비신자가 보기엔 다른 신화책과 다를 바가 없어도 적어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내면에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의 논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영감'을 믿는 기독교 안에서만 통용되는 논리이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논리이다.[54] 어차피 유기 영감으로 가지 않고, 축자 영감으로 가더라도 비신자에게는 성경이 다른 신화와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당장 기독교 종파 내부에서도 교파 별로 유기적 영감설에 대한 교리 및 주장이 다르다. 완전 축자 영감설부터, 부분 축자 영감설, 그리고 받아쓰기설 및, 기계적 영감설, 성령 자동 축자 영감설, 성령 감동설 및 유기적 영감설, 문학적 영감설까지 해당 문제와 관련된 주장과 교리가 한 둘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내부적으로 자기들끼리도 말이 통일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신자들[55]에게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는 현대에는 모조리 유기적 영감을 지지하고, 성서무오설을 부정[56]하긴 하지만, 상술한 4개의 기독교 종파는 한국에서 세력이 약하며, 한국에선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종파들이 대세라는 것이다. 그나마 가톨릭의 경우는 한국인의 10% 정도를 신자로 가지기는 했지만,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한국인 개신교인들을 긁어모으면 가톨릭보다 훨씬 숫자가 많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봐도 전세계 3.5억명의 개신교 신자 중에서 보수적 종파의 신자는 1억 9천 6백만으로, 개신교 내부의 진보적 종파의 신자 수보다 많은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저러한 말들은 성령, 즉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대는 합리적이고 보편 타당한 것이 주를 이루는 사회이다. 당연히 '믿는' 것보다는, 합리적이고 증명된 것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종교인이고 비종교인이고 간에 이건 엄연한 21세기의 현실이다.

물론 어차피 성경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구약은 유대교 포함)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논리로 읽으라고 적힌 경전이고[57] 그렇기에 비신자들이 성경을 소설책 읽듯이 읽고 비판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 적힌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여기에 서술된 유일신의 행적이 현대인들에게는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성경이 종교 안에서 종교의 눈으로 보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저자들의 시대적 한계는 오늘날 비신자들에게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극단적이고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비신자들은 단지 소설책[58]을 소설책 읽는 방식으로 읽어서, 등장 인물인 야훼의 행적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다. 다만 이렇게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라고 하면서 어째서 야훼의 유아 학살 등의 행위를 문제시 삼느냐는 종교인들의 반론이 있을 수도 있으나, 허구라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합리화/옹호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라도 유아 학살을 자행했다면 그 인물을 미화/합리화 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윌허프 타킨도 학살자라고 비판 받고 이들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사람들도 비판 받는데, 있지도 않은 캐릭터를 왜 비판하냐 내지는 어차피 실존하지도 않는 캐릭터가 저지른 짓을 왜 비판하냐는 논제가 합당하게 보이는가?

결국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읽고 비신자들은 소설책 읽듯이 읽게 되는데, 양측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각자의 의견이 맞는 것이 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종교인이 비종교인을 종교적 패러다임 안의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종교인이 종교인을 무신론적 패러다임 안의 논리로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류사에서 종교인이 사라지거나 비종교인이 사라지지도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 서로간에 말이 안 통하고 각자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자기들 말이 맞아서 논쟁이 무한히 평행선을 달린다.

많은 종교인들이 논리적으로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데,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59] 물론 그 반대 역시도 불가능하다.[60] 그것이 가능했으면 '학문적 성향'을 지지하는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는 진작에 종교 위키 혹은 반종교위키로 바뀌었을 것이다. 허나 전술했듯이 나무위키는 공식적으로 비(非)종교 위키이며, 규정상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충돌할 경우, 세속적 관점을 위주로 쓰여지게 되어 있다.

9.2.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위의 진보적 신학자들의 입장 가운데 2번째를 전제한다면, 마르크스주의적 종교관에 따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원래 마르크스주의적 종교관은 인민의 아편이기 때문에 해로운 존재이므로 인위적으로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하나의 사회 현상일 뿐이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에 대한 원래 입장이다.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마치 아편을 빨듯이 종교에 의지한다는 것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의 본래 뜻이다.

이집트의 사회나 가나안의 사회 모두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이다. 그리고 이 계급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무기를 사용한다. 이집트의 지배자들과 가나안의 지배자들은 자기네들의 사회 구조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신들을 발명해 내고 자신들이 누리는 온갖 특권들은 그러한 신들의 뜻이니 찍소리 말고 너네 찌끄레기들은 순종해야 한다는 관념, 리처드 도킨스의 말로는 밈(meme)들을 갖다가 유포를 시킨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사회에서 억압당하던 이주노동자들(하비루)들과 가나안 사회에서 억압당하던 농노들은 그런 억압과 폭력에 맞서 계급 투쟁을 벌이면서 우리의 이 투쟁에는 야훼 신/엘 신이 함께하신다고 믿었고 그런 밈들을 갖다가 유포를 시킨다. 그리고 이 두 사회 속에 존재하는 양 계급은 결코 화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다.

그러니 야훼 신을 믿는 하비루 이주노동자들과 엘 신을 믿는 농노들이 그 억압자들의 신을 갖다가 증오하고 경멸하는 건 과학적으로 당연한 결과이고, 그런 신을 갖다가 믿으면서 악과 억압과 폭력에 맞서서 무장 투쟁까지 벌이던 강성 전투 종족들이니 억압자들을 갖다가 철저하게 쳐죽이고 뿌리를 뽑는 걸 그들의 신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즉, 피억압 계급 가운데 가장 선진적으로 억압에 맞서 싸우는 부분이 자신들의 그러한 계급적 이해관계와 거기에 따른 일련의 정치적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엘 신, 야훼 신이라는 존재를 발명해 냈기 때문에, 엘 신과 야훼 신은 그렇게 폭력적인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61]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엘 신과 야훼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100% 옳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억압과 폭력에 맞서 싸우던 고대인들의 정치적 운동은 의미가 있고 어떻게 보면 볼셰비키의 원조이기에 본받아야 할 일이지만, 앞서서 언급했듯 죽일 필요가 없는 아주 어린 아기들을 갖다가 숨통을 끊어 놓고, 여자들을 갖다가 포로로 끌고 가서 범하는 행위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도 쉴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사회변혁노동자당, 노동자연대,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 투쟁 위원회[62], 볼셰비키 그룹, 노동자 정치 협의회[63], 노동사회과학연구소[64] 등에서 활동하는 극좌파라도 영아 살해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옹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65]

근데 그런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당시 사회에서 그런 행위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시대상과 사람들의 의식이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나머지는 다 봐 준다 해도 그것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신공양 논란에 대해 덧붙이자면 야훼가 인신공양을 바치라고 명령을 내리고 또 실제로 인신공양을 받은 것도 앞서서 말했듯 사실이다. 그런데 당시에 엘 신과 야훼 신을 섬기며 억압과 폭력에 맞서 투쟁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행위는 당한 만큼 똑같이 갚아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신공양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못 느끼던 시대이니, 저놈들이 인신공양을 벌이니 우리도 똑같이 인신공양을 벌여서 보복을 하자는 논리가 통했을 것이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야훼 신도 인신공양을 받는 것이고 또 바치라 하는 것이다. 물론, 인신공양이 현대적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인 것은 명백하다.

10. 관련 문서



[1] 일단 기독교측에선 강간의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율법에는 남편 없는 여자를 아내로 취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신명기 21장 10~14절 참조. 물론 아는 사람들을 살해당한 처녀들이 기꺼이 아내로 들어갈지, 이미 살인과 약탈을 저지른 자들이 강간을 빼놓을지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기독교측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일 뿐, 명백히 강간에 충분히 가깝다. 설사 강간이 아니더라도 정황상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자 가족들을 다 죽인 사람이 "너와 결혼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현대에도 지하드 알 니카라는 예시가 있다.[2] 간단히 말해, 파라오의 마음을 조종해 반항하게 만들 거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려서 꺾겠다는 소리다. 이집트인들이 믿던 신들보다 자기가 더 대단하다는 걸 이집트인들에게 이해시키려면 그 정도는 해야 된다는 것. 파라오가 10가지 재앙을 당하도록 고집을 부리고, 보내준 이후에도 마음을 돌려 추격해 오긴 했지만, 야훼가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여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면 파라오는 조종당했을 뿐이다.[3] 공동번역 성서에서 의도적으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개역개정판에는 노비로, 가톨릭 성경에서는 노역자로, 영문 성경에는 slaves로 나와 있다.[4] 타민족이 화평을 맺겠다고 하면 노예로 만들고, 안 맺겠다고 하면 쳐죽인다. 고자되기 vs 고자되기[5] 종을 때려 죽이면 형벌을 받지만, 하루나 이틀 연명하면 형벌을 면한다. 다시 말해, 죽지 않을 만큼만 패면 괜찮다는 이야기. 그리고 명백하게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한다.[6] 나봇까지 돌에 맞아 죽게 하긴 했다.[7] 여로보암식으로 망한다는 뜻[8] 현실적 관점으로 보면 백성들의 고난을 살펴주지 않은 죄가 있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죄라고 보기 어렵다.[9] 이는 모든 유다의 왕들 중 악하다고 평가받는 왕들 전원 일치[10] 마르키온파 등.[11]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성경의 기록을 포함하는 지칭이 된다. 즉, 성경에 대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2] 구약에서 끝없이 등장하는 바로 이 공포스러운 야훼의 모습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릴적에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교육받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마니교에 투신했다.[13] 교리적으로 미숙한 신자들의 경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 때문에 모든 인간이 지옥에 가게 되었으며 예수를 믿으면 이 원죄가 사해져서 천국에 가게되고 그 이후에 자기 의지로 짓는 자범죄는 개별적인 회개로 용서받으며 이것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학에서 말하는 '원죄'란 '본래적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여기서 설명하는 야훼에게 반역하는 성질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내면에 본성으로써 자리잡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의인 -야훼에 대한 반역을 단 한 번도, 전혀, 절대로 하지 않는 피조물- 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14] 유전자에 죄성이 심겼다고 보는 것은 사무르 학파의 간접전가설로써 정통주의 입장인 언약적 대표설과는 다르다. 아담이 모든 인간의 대표이기 때문에 아담의 선택이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15] 이 외에도 성경에선 그런 자들을 쓸어버렸다간 심판의 대상이 아닌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도치 않게 같이 쓸어버릴 수도 있기에 종말까지 미룬다는 내용의 비유도 있다.[16] 때문에 안 믿긴다면 슬프지만 선택 못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예수가 바라면 주고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는다고 했으니까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도 있다. 이를 알미니안 주의라고도 한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개신교계 떡밥인데, 장 칼뱅 문서 참고.[17] 웨슬리안과 칼빈주의 모두 성경에 부합한다. 성자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면서 보여준 첫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는 전혀 다른 원소로 구성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야훼의 씨인 알곡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상징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표한다.[18] 기독교에서는 위에 설명한 대로 예수를 제외한 단 한 명의 인간도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즉 죄를 계속 지었고 짓고 있고 앞으로도 지을 인간으로서는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때문에 동성애자라도 자신의 동성애가 죄라고 인식하고, 기독교인으로서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예수가 그런 동성애적 죄에 대한 대가까지도 다 지불하고 대신 죽었다는것을 믿는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0은 아니다.[19] 근본주의 교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면 동성애자, 자살한 사람 등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말도 안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구원의 행위-믿음 논쟁은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와 같이 해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0] 또는 천국, 하나님나라[21] LEE AMOS JOHN, 세일즈맨으로 오신 예수님 :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복음,반석위에서 완성된 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 창조와지식, 2023, p.77[22] '일부' 라고 한 까닭은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는 근본주의에서는 무조건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 신학은 민중신학 및 해방신학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컬 신학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학도 포함된다. '하느님 나라 신학'을 설파하는 숭실대학교 교목실장 김회권 교수의 관점이 대표적이다.[23] 이러한 관점은 노선이 다양하여 하나로 묶기가 곤란하다.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과 같이 아주 급진적으로 나가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는 경우도 많아서 개신교계에서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관점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주의 신학 입장을 취하고 있는 김회권 교수가 신자유주의=사탄이라는 등식을 세워 놓고 저서나 설교, 채플, 심지어 수업시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리에서 신자유주의를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이나, 역시 보수적인 편인 프란치스코 교황신자유주의 체제와 IMF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표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4] 히브리의 어원을 하비르(혹은 아비르)와 동일시 하는데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하비르와 히브리와 동일 개념이라고 말해도 부인 못할 정도로 많이 닮아있음을 인정한다[25] 여기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에큐메니컬 진영의 들꽃향린교회 김경호 목사는 그의 저서 '야훼 신앙의 맥' 에서 다른 신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박해받는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지배 계층의 온갖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 신이지만 야훼는 그렇게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편에 선 신이라 주장했다. 한편 에반젤리컬 진영의 김회권 교수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런 불의한 체제 질서를 뒤집어 엎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세상, 곧 하느님(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는 신이라는 뜻에서 야훼를 '체제 전복적인 창조의 하느님' 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6] 특히 예리코 성과 같은 가나안의 체제는 김회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낡은 가죽부대'로써, 민중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체제이다.[27] 2012년 3월 27일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김회권 교수는 판관기(사사기) 제 4장을 주제로 설교하면서 '철병거' 로 대표되는 가나안 체제는 곡식, 곧 재물을 독점하는 불의한 체제였고, 그런 가나안 체제에 맞서 싸우는 히브리인들의 투쟁은 그런 체제를 때려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28] 그 당시 이집트의 신의 개념과 신격화된 왕의 개념을 보면 된다.[29] 비(非) 그리스도교인들 중, 야훼의 이러한 면모에 비판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무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등등을 포함할 수 있다.[30] 물론 성경에서 나오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이민족의 침공에서 맞서 싸우려면 적을 죽일 수 밖에 없기 때문. 허나 그렇게 말한다면 애초에 야훼가 이민족들에게 물러나라고 명령하면 될 일이다.[31] 바빌론 유수페르시아에 지배를 받은 것, 이집트에 대한 기록 등은 개략적으로 성경에도 나와 있긴 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이집트 총리 대신을 역임했다는 요셉부터, 모세, 아론여호수아 등등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 왕조의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집트인들은 그 자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해가는 과정까지 기술한 사람들로서, 그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기록을 누락시켰다는 개신교인들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 밖에도 다니엘서에서 짐승으로 변했다고 묘사하는 느부갓네살은 해당 시기에 멀쩡하게 옆 나라 왕과 영토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으며, 성경과 비슷한 내용은 보이지도 않는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짐승으로 변해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혹은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왕이 낭광증(자신이 동물(특히 늑대)이 되었거나 동물로 변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정신병.)에 걸린 것을 의미한다면, 왕이 짐승으로 변했다는, 혹은 스스로를 짐승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디테일한 기록은 무리이더라도 최소한 대리 통치인이나 섭정이 바빌론을 통치했다는 기록이라도 있어야 정상이다. 아니, 그 이전에 느부갓네살이 총애했다던 다니엘에 대한 기록도 바빌론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히브리 여인으로서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의 둘째 왕비가 되었다던 에스더의 기록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내용과 상충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는 왕비가 교체된 적이 없으며, 그 왕비는 페르시아 장군의 딸인 아메스트리스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32] 물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시대가 그러니까. 괜히 키루스 2세가 관대함으로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은 게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가 아니다.[33] 그러나 이전에(아니, 사실은 그 당시에도 공식적으로는), 성경에 의하면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명령으로 바알의 신관들과 아세라의 신관들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야훼의 예언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렇게 너희들이 등에 업고 있는 신이 이거 하나 안해주느냐'는 의미의 조롱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당했으니 니들도 당해봐라 하는건 좀...[34] 물론 현대 관점에서 보면 야훼 신앙은 타민족 신앙에 비하면 나아보일 면도 존재한다. 야훼 신앙에서는 지켜야 할 계율이 많고 제물을 바치는 과정도 꽤나 까다롭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야훼는 어쨌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로 묘사하며(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기분 좀 상하게 했다고 가혹한 벌을 내리는걸 생각해보자)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준 일화나 요나기를 보듯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야훼를 믿고 그 보답을 받을 수 있고 아브라함이나 입다 같은 예외사항을 빼고 보면(그나마도 전자는 시험이고 후자는 논란이 있다.) 그 당시 인신공양이 만연한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인신공양을 대체적으론 거부한다.(아래에서 보이듯 진짜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물론 바알 신앙처럼 자해도 없다. 그리고 제물도 소를 바치는걸 최고로 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보다 낮은걸 바쳐도 상관없다.[35] 거증 책임은 있다고 주장하는 자에게 있으므로, 가나안의 사회 체제가 불의했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덮어놓고 우길 것이 아니라, 증거로서 역사적 사료를 가져오면 된다.[36] 고스비를 비롯한 미디안 여자들이 히브리족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고 우상을 숭배하게 했다는 것인데, 민수기 31장 시점에서 당사자인 미디안 여자들과 고스비는 이미 야훼에 의해 고인이 된 지 오래다. 해서 미디안 족 일부 여자들의 잘못으로 해당 사건의 당사자도 아닌 수많은 미디안족들을 학살하며 아이들마저도 처녀를 제외하면 다 죽이라고 하는 것은, 합리화가 불가능한 부분이다.[37] 애시당초 성전에서의 일은 아론 혈통의 신체적 장애/병환이 없는 제사장만 가능하다.[38] 사실 야훼가 이러한 변명을 하는 것은 성경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성경/논란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탈출기에 야훼 스스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야훼의 말을 듣지 않게 해 놓고, 파라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도 야훼는 이집트 사람들이 나를 야훼임을 알게끔 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한다.(…)[39] 강병도 등.[40] 구약에서는 이것이 야훼의 명령이라 했지만 생각해보면 어색하다. 이민족들을 가나안에서 없앨 방법이 몰살뿐인가? 그들을 다른 땅으로 추방시킬 수는 없는가? 전지전능하신 야훼께서 어째서 그런 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으신건가?[41] 그리고 당연하지만 뭐가 되었든 이런 민간인을 향한 범죄는 용납되기 힘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 힘도 연관도 없는 민간인을 향한 범죄는 지탄을 받아왔다.[42] 야훼는 전능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으므로, 그가 '가나안의 인간들을 교화시켜야겠다' 내지는 '최소한 젖먹이 아기들이라도 교화시켜야겠다'라고 마음만 먹었어도 그대로 되었을 것이다. (근데 이는 웃기게도 그 자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 넣은 창조이념 즉 자유 의지를 제한하게 된다. 만일 앞 문장대로라면 야훼는 전능하기 때문에 이 글이 써지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또는 모든 악을 교화시켜버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야훼를 찬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로봇과 다를 바 없다.)[43] 앞서 말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그냥 실제 역사를 신화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44] 예외적인 경우로 파시스트가 정권 잡았을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농민을 갖다가 무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45] 실제로 볼셰비키도 니콜라이 2세의 열몇 살 난 아들을 갖다 쏴 죽였으니까...[46] 즉 교황의 이 발언을 두고, '그렇다고해서 그 행위가 정당화되는건 아니다'라고 반론하는 것은 살짝 핀트가 어긋난 것이다.[47] 후술하겠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헛소리에 불과하다.[48] 각기 다른 두 주장에 대해 각기 다른 두 반박을 존재한다고 해서 자가당착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서로 다른 두 입장이 같이 존재하는 기독교 자체부터가 자가당착 아니냐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49]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하는 한국내 가장 큰 교파인 한국 기독교 장로회(이하 기장)와 성공회조차 야훼는 분명히 실존한다는 것이 교단의 공식 입장이다. 애초에 그걸 부정하면 더이상 기독교가 아니고.[50] 종교적 입장은 여기에 기술하지 말 것. 하더라도 '종교인은 이렇게 주장하는데, 여기에 대한 비판은 이렇다' 정도로만 언급하자. 종교적 견해는 다른 문단에 적고, 이 문단에는 비종교적 견해를 적을 것.[51] 마찬가지 맥락으로 구약 성경에서 야훼는 박쥐를 새라고 하고 곤충의 다리를 4개라고 하는데, 전능자인 야훼가 실존하고 성서무오설까지 옳다면 해당 구절들은 나올 수가 없다. 온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박쥐가 포유류인 사실을 몰라서 새라고 하거나 자신이 창조한 곤충의 다리가 몇 개인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은 그냥 당시 히브리인들의 지식 수준이 그 모양이었기 때문이다.[52] 물론 이 야훼가 실존한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서 별개의 문제다. 단군 신화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단군 신화를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듯이.[53] 앞서도 서술했지만 개성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에 가깝다.[54] 같은 원리로, 종교인들 역시도 '성령의 영감'이 비신자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논리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55] 본 나무위키 포함[56] 정확히 말하면 '나무위키에서 정의된 의미로서 성서무오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서무오설 자체가 굉장히 스펙트럼이 넓은 말이기 때문. 자세한 것은 성서무오설 항목을 참고하자.[57] 다만 신약의 공관복음서는 어느 정도 '선교용'으로 쓰였다.[58] 종교적 시각을 제거하고 보면 이렇다.[59]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득한다는 것부터가 뻘짓이다.[60] 사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통약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패러다임 하나가 붕괴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의 붕괴는 그것을 지지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의 '전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논란이 많다. 사실 이 이상으로 들어가면 종교-비종교의 대화가 아니라 현대 철학이 되어 버린다.[61] 현재 한국에서도 대부분의 보수 교단에 해당되는 기독교 우익과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한 진보 개신교가 완전히 다른 종교인 것처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전자는 억압자들의 이해관계를, 후자는 피억압 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62] 이렇게 써 놓고 보면 공사판 분위기가 나는 이름이지만, 혁명적 / 노동자당 건설 / 현장 투쟁/ 위원회로 끊어 읽어야 한다. 운동판에서는 그냥 노건투라 부른다. 노동자연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하지만, 얘네는 스스로를 트로츠키주의로 정체화하고, 트로츠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다. 발행하는 신문은 '노동자 세상'.[63] 여기는 다른 단위들과 달리 스탈린주의다. 북조선 체제도 옹호한다. 발행하는 신문은 '노동자 정치 신문'.[64] 여기도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다. 스탈린을 갖다가 거의 숭배하다시피 한다.[65] 실제로 여기서 열거한 6개 조직 가운데 하나에서 활동하는 여성 활동가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더니, 야훼 신을 믿는 민족과 엘 신을 믿는 민족이 연합해서 억압자들에 맞서 투쟁한 것은 정말 감동적인 일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만국의 억압자들이 단결한 행동이므로... 그러나 이러한 활동가들이라도 영아 살해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827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827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