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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3:16:23

성심수녀회

1. 개요2. 창설자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2.1. 시대적 배경2.2. 성심수녀회 창립
3. 사복 수도회4. 성심학교5. 성심학교 출신 인물6. 이야깃거리

1. 개요

한국어: 성심수녀회(聖心修女會)
일본어: 聖心会(성심회)
영어: Society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프랑스어: Religieuses du Sacré-Coeur de Jésus

성심수녀회 한화(韓華) 관구 홈페이지(한국, 대만 지역 관할)[1]

가톨릭의 여자 수도회로, 교육사도직을 주로 하는 수도회다. 전 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 41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회원(수녀)은 약 2,200여명이고, 총 본원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성심(聖心)은 ‘거룩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라틴어로는 Cor Sanctissimum, 영어로는 Sacred Heart, 일본어로는 ‘세이신’이라고 읽는다. 성심은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을 지칭한다. 예수성심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강생성체성사,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 예수의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모성심은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이바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는다. 성모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성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2]

2. 창설자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축일 5월 25일)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라 집안은 시골의 소시민이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만했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소피이 바라는 10살 무렵부터 11살 위의 오빠 루이 바라로부터 엄격하면서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역사, 수학, 물리학, 성경,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등을 두루 학습했으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함과 동시에 첫 영성체도 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1. 시대적 배경

소피이 바라가 10대 초반이던 1789~1793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은 세속주의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전면적 충돌을 불러왔는데, 제2신분(귀족)과 더불어 제1신분(성직자)으로써 부패한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상징으로 ‘개혁’의 대상이 된 가톨릭교회에 대해, 프랑스 혁명정부는 대대적인 규제에 들어갔다. 봉건적인 십일조[3]와 가톨릭 사제에 대한 기존의 면세 특권을 폐지한 것은 물론, 1790년 9월에 이른바 성직자 민사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e)[4]이라는 법령을 통과시켜 프랑스 국내의 교구를 150개→83개로 감축했다. 또한 프랑스의 모든 사제들은 주교로부터의 서품이 아니라 선거위원회의 설치 규정에 따라 선출되도록 했고, 일반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도록 했으며, 나아가 기존의 왕정이 아닌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서약 의무를 부과했다.

사제서품은 교구장 주교의 권한이고, 교구를 설정하고 교구장 주교를 임명하는 것은 교황의 권한이다. 따라서 당시 프랑스의 사제들 대부분은 이 헌장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거부했고, 선서한 주교는 7명밖에 되지 않았다.[5] 그러자 국민의회는 1790년 11월 27일, 그리고 12월 25일자 법령으로, 혁명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한 사제들이 미사성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해버렸다. 교황 비오 6세1791년 3월 10일 회칙으로 성직자민사기본법을 비판했다.

말해 둘 것은, 프랑스 교회가 무고한 피해자였고 혁명정부가 가해자였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앙시앵 레짐을 구성하던 제1신분의 성직자 역시 제2신분과 마찬가지로 권리만 누리면서 의무는 “어디, 하느님도 세금 내시냐?”며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들의 부정부패 역시도 프랑스 대혁명을 불러온 요인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한 사제라고 마냥 구체제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혁명정부가 내건 교회 개혁[6]을 찬성하며 “이번 참에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답게 청빈하게 거듭납시다”라고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반면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 대혁명의 가장 큰 성과이자 업적이라고 할 인권선언[7]에 대해서도 ‘하느님에 대한 배반’이라며 불쾌해하고 기존 신분제 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혁명정부에 반발하는 사제, 수도자, 신자들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는데[8], 이러한 충돌이 폭발한 것이 바로 방데 전쟁이다. 루이 바라도 선서를 거부하고 처형당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1795년 루이 바라는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2.2. 성심수녀회 창립

루이 바라 신부는 (새 정부의 눈을 피해) 조용히 미사성사를 집전했으며, 여동생의 학업과 신앙을 지도하는 일도 계속했다. 소피이 바라는 지역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어려서부터 생각해 온 수도 성소(聖召)[9]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봉쇄 수도생활을 생각했지만, 곧 새로운 형태의 사도직에 투신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녀는 교육, 특히 여성교육에 힘쓰는 수도자가 되기로 했다.

1800년 11월 21일 소피이 바라는 3명의 동료와 함께 첫 서원[10]을 하였다. 이로써 성심수녀회가 창립되었다. 수녀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사도직에 힘썼다. 1865년 5월 25일에 소피이 바라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성심수녀회는 발전했고,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성심수녀회 분원(分院)들과 성심학교들이 세워졌다.

소피이 바라는 1905년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08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25년 5월 24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는 수도회 설립자 39명의 성상이 있는데, 소피이 바라의 성상도 1934년 성당 내부 벽감에 안치되었다.

3. 사복 수도회

성심수녀회는 수도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는 수도회이다. 본래 성심수녀회도 수도복을 입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복으로 바꾸었는데,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수도복사복 모두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비싸고 사치스러운 옷이나 노출 심한 옷은 안 되고 검소한 차림새를 한다. 머리도 길게 기르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단정하게 커트머리를 한다. 아무튼 사복 차림이기 때문에 성심수녀회 수녀들은 얼핏 봐서는 일반 여성과 잘 구분되지 않지만, 성심학교 학생이나 졸업생 등은 “무언가 일반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고 평한다.

2024년 3월 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현직 수녀와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수도복과 사복 중에서 선택해서 입을 수 있다고 한다.

4. 성심학교

성심수녀회는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심학교도 수없이 많다. 학교 이름에 성심, 聖心, Sacred Heart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일 가능성이 높다. 성심학교들 중에는 명문학교들이 많다.

전 세계의 성심학교 목록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성심여자중학교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는 성심수녀회와 관련이 없다. 이 학교들도 가톨릭 미션스쿨이긴 하지만, 성심수녀회가 아닌 천주교 전주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다.

4.1. 한국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20px 10px; background-image: #3594D3
'''[[틀:성심학원|{{{#a91d4a {{{+1 학교법인 성심학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고등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중학교 성심여자중학교
폐교 성심국민학교(여학교)
흡수합병 성심여자대학교
}}}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ae1932><bgcolor=#ae193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사립초등학교 ||
{{{#!folding [ 펼치기 · 접기 ]강북구영훈초등학교
강서구유석초등학교
광진구경복초등학교, 성동초등학교, 세종초등학교
금천구동광초등학교
노원구상명초등학교, 청원초등학교, 태강삼육초등학교, 화랑초등학교
도봉구동북초등학교, 한신초등학교
동대문구경희초등학교, 서울삼육초등학교, 은석초등학교
동작구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마포구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서대문구경기초등학교, 명지초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추계초등학교
서초구계성초등학교
성동구한양초등학교
성북구광운초등학교, 대광초등학교, 매원초등학교, 성신초등학교, 우촌초등학교
용산구신광초등학교
은평구선일초등학교, 예일초등학교, 충암초등학교
종로구상명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운현초등학교
중구동산초등학교, 리라초등학교, 숭의초등학교
중랑구금성초등학교
}}} ||

1955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0대 교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주교는 성심수녀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했다. 성심수녀회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듬해인 1956년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신학교가 있던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본원과 성심학교들이 세워졌다. 성심국민학교(여학교),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성심여자대학교는 1964년 강원도 춘천시에 세워졌다.

설립 초기의 성심학교는 소수정예의 명문 사립학교였으며 유복한 집안의 딸들이 많이 다녔다. 인성교육을 중요시했고 영어교육도 우수했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에 성심여중고를 졸업한 기업인 조안 리의 회고록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에 의하면, 원어민인 외국인 수녀님이 직접 영어를 가르쳤으며, 철자나 문법보다 발음과 회화를 먼저 가르쳤고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할 기회도 많아, 영어 실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성심여자대학교도 소규모의 학생들만을 선발해 학생 전원을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교육받게 했다.

성심여대는 1974년 경기도 부천시에 분교 캠퍼스를 지었고, 1982년 춘천 캠퍼스를 매각하고 부천으로 완전히 옮겼다.[11] 1995년에 가톨릭대학교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학대학의과대학만을 둔 작은 학교였던 가톨릭대는 대규모의 종합대학으로 발전했고, 부천의 성심여대는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이 되었다. 성심여대가 가톨릭대와 통합되어 학교 운영권이 천주교 서울대교구로 넘어간 후에도, 성심수녀회 수녀들은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교수 및 교목으로 일하고 있다.

성심국민학교는 여학생만 한 학년당 60명씩 선발하여 교육하는 소규모의 사립학교였는데, 당시 한 학급당 수십 명씩, 수십 개의 학급으로도 모자라 2부제 수업까지 했던 공립학교에 비하면 놀랍도록 작은 규모였다. 당시에도 사립국민학교(초등학교)는 몇 군데 있었지만 여학교는 성심국민학교가 유일했다. 성심국민학교에서는 문교부에서 지정한 교과목 외에도 영어가톨릭 교리도 가르쳤고, 졸업생들은 대개 같은 재단의 성심여중과 성심여고를 거쳐 성심여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9년부터 서울에서 중학교 무시험 입학이 시행되면서 성심학원의 이러한 교육방침을 지키기 어려워졌고, 학교 운영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성심국민학교는 1977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설립 20년 만인 1982년에 완전히 폐교되었다. 14번의 졸업식을 치르며 성심국민학교는 약 1천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성심여자중학교도 1975년 폐교되고 성심여자고등학교만 홀로 운영되다가, 2002년부터 성심여중이 재개교되어 다시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 성심수녀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학교는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2개교이다.

4.2. 일본

성심수녀회 일본관구 홈페이지

일본에는 한국보다 훨씬 빠른 1908년에 성심수녀회가 진출해 왔고, 1916년부터 세이신 여학원을 운영해 왔다. 덕분에 한국관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한국인 수녀 지원자들이 일본에 가서 양성 교육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성심수녀회 일본관구는 도쿄 및 여러 지방에 세이신 여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도쿄의 세이신 여학원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 과정을 갖추고 있는 일관제 학교[12]이며, [age(1916-01-01)]년 전통의 상류층 오죠사마[13] 학교로 여겨져 많은 화족 및 재벌가의 영애들이 거쳐갔다. 지방의 세이신 여학원들도 일관제 학교로서 한 번 입학하면 별도의 수험 없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5. 성심학교 출신 인물

6. 이야깃거리



[1] 2011년에 한국관구와 대만관구가 통합되어 한화관구가 되었다.[2] 가톨릭대사전 참조[3] 오늘날 한국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부르며, 반드시 10분의 1을 내는 것이 아니고 형편에 따라 성의껏 낸다.[4] ‘성직자 공민 헌장’으로도 번역된다.[5] 교구신부는 그 절반도 안 되었다.[6] 십일조 및 교회의 면세 특권 폐지[7] ‘사람은 신분, 성별 그 어떤 것에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써 존엄을 가진다.’[8] 훗날 이들은 순교자로 인정되어 시복되었다.[9] 하느님의 부르심. 넓은 의미에서의 성소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모든 직업, 직분, 삶의 방식을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성소는 사제수도자의 길로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10]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서원함. 자세한 것은 수도자 항목 참조.[11] 강원도 춘천시성심여자대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한림대학교가 개교되었다.[12] 본래 유치원도 있었으나 폐원되었다.[13] 유복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귀하고 곱게 자라난 여자[14] 2011년 1월 30일 83세의 나이로 선종.[15] 2020년 1월 1일 89세의 나이로 선종.[16] 예수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