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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1:21:20

마더 테레사

마더 데레사에서 넘어옴
마더 테레사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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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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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영웅들 & 아이콘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90614_400.jpg
에멀린 팽크허스트 헬렌 켈러 로자 파크스 서굿 마셜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가이
무하마드 알리 마릴린 먼로 마더 테레사 빌리 그레이엄 이소룡
찰스 린드버그 재키 로빈슨 미군 펠레 안네 프랑크
빌 윌슨[1] 안드레이 사하로프 체 게바라 다이애나 스펜서 하비 밀크
같이 보기: 지도자 & 혁명가 부문,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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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00px-Encyclopædia_Britannica.svg.png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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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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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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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2012년 아웃룩 잡지에서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인도인’ 명단이다. 단,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그의 큰 영향력 때문에 선정인물에서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압둘 칼람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자와할랄 네루 마더 테레사
6위 7위 8위 9위
10위
J. R. D. 타타 인디라 간디 사친 텐둘카르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라타 망게쉬카르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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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rowcolor=#cd9f51> 1901 1902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1906
파일:영국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윌리엄 랜들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rowcolor=#cd9f51> 1907 1908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rowcolor=#cd9f51> 1909 1910 191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알프레트 프리트
<rowcolor=#cd9f51> 1911 1912 1913 1917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토비아스 아서르 엘리후 루트 앙리 라퐁텐 국제적십자위원회
<rowcolor=#cd9f51> 1919 1920 1921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rowcolor=#cd9f51> 1922 1925 1926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리드쇼프 난센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G. 도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rowcolor=#cd9f51> 1926 1927 1929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프랭크 켈로그
<rowcolor=#cd9f51> 1930 1931 1933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나탄 셰데르블롬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버틀러 노먼 에인절
<rowcolor=#cd9f51> 1934 1935 1936 1937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카를로스 라마스 로버트 세실
<rowcolor=#cd9f51> 1938 1944 1945 1946
파일:국제연맹기(1939).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svg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코델 헐 에밀리 그린 볼치
<rowcolor=#cd9f51> 1946 1947 1949 1950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Quaker_star-T.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존 모트 퀘이커 봉사협회 존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rowcolor=#cd9f51> 1951 1952 1953 195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UN기.svg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마셜 유엔난민기구
<rowcolor=#cd9f51> 1957 1958 1959 1960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레스터 피어슨 도미니크 피르 필립 노엘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rowcolor=#cd9f51> 1961 1962 1963 1964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위원회 마틴 루터 킹
<rowcolor=#cd9f51> 1965 1968 1969 1970
파일:유니세프 로고.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세프 르네 카생 국제노동기구 노먼 볼로그
<rowcolor=#cd9f51> 1971 1973 1974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베트남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사토 에이사쿠
<rowcolor=#cd9f51> 1974 1975 1976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숀 맥브라이드 안드레이 사하로프 베티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rowcolor=#cd9f51> 1977 1978 1979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아돌포 에스키벨 유엔난민기구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rowcolor=#cd9f51> 1983 1984 1985 1986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 파일:미국 국기.svg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엘리 비젤
<rowcolor=#cd9f51> 1987 1988 1989 1990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티베트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오스카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달라이 라마 14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rowcolor=#cd9f51> 1991 1992 1993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아웅 산 수 치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rowcolor=#cd9f51> 1994 1995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svg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rowcolor=#cd9f51> 1995 1996 1997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퍼그워시 회의 카를로스 벨로 조제 하무스오르타 조디 윌리엄스
<rowcolor=#cd9f51> 1997 1998 1999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
지뢰금지국제운동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rowcolor=#cd9f51> 200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대중
}}}
}}}}}}}}}
[ 21세기 ]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1 || 2002 || 20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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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턴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 0 -10px"
{{{#black,#white {{{#!folding [ 20세기 수상자 ]
{{{#!wiki style="margin: -5px -4 -15px 0"
<rowcolor=white>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rowcolor=white> 제1회 제2회 제3회 제4회 제5회 제6회 제7회
마더 테레사 프레레 로저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레오 요제프
수에넨스
치아라 루비치 토마스 토렌스 니코 니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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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마더 테레사[1]
Mother Teresa
파일:Dmy7V1dX0AAuSk_.jfif.jpg
본명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
Anjezë Gonxhe Bojaxhiu
성인명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Saint Teresa of Calcutta
출생 1910년 8월 26일[2]
오스만 제국 코소바 빌라예트 위스퀴프
(現 북마케도니아 스코페)
사망 1997년 9월 5일 (향년 87세)
인도 서벵골주 콜카타
신체 152cm
가족 아버지 니콜러 보야지우
어머니 드라나필레 보야지우[3]
자매 아게 보야지우
형제 라저르 보야지우
수상 템플턴상 (1973)[4]
노벨 평화상 (1979)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Signature_of_Mother_Teresa.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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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시복 2003년 10월 19일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2016년 9월 4일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광장
교황 프란치스코
축일 9월 5일 }}}}}}}}}

1. 개요2. 생애3. 사망4. 국적 논쟁5. 시복시성6. 비판
6.1. 의료 기관 운영, 고급 병원 입원6.2. 강간 피해 여성들의 출산 권장6.3. 탄압받는 이들에 인내 요구6.4. 독재자, 금융 사기자 옹호
7. 이모저모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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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2.hdnux.com/960x540.jpg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5]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헐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1979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남긴 말. 영상[6]
어떻게 텔레비전 같은 매스 미디어를 그리스도교적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논쟁이 일어났다. 양식 있는 무신론자 및 인문주의자의 대화에서부터 대중음악 버전 시편과 사이키델릭한 회합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다 시도해 봤다.

여기에 대답이 있다. 단지 그리스도적 애덕으로 넘치는 환한 얼굴을 보라. 그녀에게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려고 자신과 육신의 속박을 벗어버렸다. 잔뜩 긴장하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게 화면에 비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카메라 앞에 선 알바니아 국적의 낯선 수녀가 어느 일요일 저녁 영국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것은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도 주교도 대주교도 소위 시대를 앞서가는 성직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둔다."[7]는 영의 힘을 드러낸 증거였다.[8]
먈컴 머거리지(Malcom Muggeridge)[9], 《Something Beautiful for God》
가톨릭수녀원장이자 성녀, 인도사회운동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2. 생애

본명은 알바니아어로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위스퀴프(اسکوب / Üsküb, 현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이었던 니콜러 보야지우(Nikollë Bojaxhiu)와 드라나필레 보야지우(Dranafile Bojaxhiu)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가족 관계로는 큰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10] 특히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11] 정치인이던 아버지 니콜러는 1919년 시 의원으로 정치 행사에 참석한 후 독살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직후 191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비극적 단면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더욱 서로를 아끼게 되었으며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9d68d2d79dc9a3eb87a129ab83e316ac.jpg
젊은 시절의 마더 테레사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우등생이었고, 가톨릭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한 후 성장한 후에는 가톨릭 청년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 가서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고, 인도 제국으로 떠나 인도의 로게토 성모 수녀회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12] 1937년 로게토 성모 수녀회의 수녀로서 종신 서원을 한다. 이때부터 '테레사'라는 수녀로서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는데, 19세기 말 활동했던 프랑스의 수녀이자 성인인 리지외의 테레사를 본받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13]

직후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한다. 1946년, 대피소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약자들을 도우며 살라는 소명을 받는다. 직후 수도회 밖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의 세월이 지나간다. 1948년에 수도복을 벗고 흰 사리[14]를 입고 수녀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을 속성 과정으로 수료한 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와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 주는 일을 시작한다.

마더 테레사의 봉사 방향성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해에 테레사 수녀는 인도 시민권을 요청하는데, 곧 평생 인도 시민권자로서 살 수 있게 된다. 1949년부터 성 마리아 학교의 제자들이 테레사 수녀를 따라 모여들어, '사랑의 선교회'라는 수도회가 자연히 형성되었다. 1952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15]을 연다. 이 집은 가톨릭 신자인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이었다.

사랑의 선교회는 점점 더 커져갔고, 모인 기부금으로 선교회 지부로 쓸 집을 살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은 사랑의 선교회 본원으로 쓰이게 되고, 같은 거리에 임종의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아이들을 포함하는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설립한다. 이들의 활동은 나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나, 전염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동 병실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시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설립한다. 15년간 활동한 이후 인도에서 활동하는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300명이 넘었다. 주교들이 청원을 올리자,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한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의 선교회'의 새로운 분원들이 문을 열어 활동하게 된다.

인도로 떠난 이후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며 평생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16] 어머니 드라나필레가 임종할 때는 알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부에서 입국 허가를 거절했다.[17] 1981년 5월 3일, 1982년 4월 28일, 1985년 1월 26일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어 2번의 심장 마비를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받을 의료적 행위를 자신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2번째 발작 이후에는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와 교황의 요청으로 수술을 받게 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 중지를 호소했고, 실제로 조지 H. W. 부시사담 후세인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테레사 수녀의 요청만으로 전쟁이 멈춘 것은 아니겠지만 세계 평화를 위한 한 노력이 빛을 발한 예라고 할 수 있다.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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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운구 행렬
1991년에서 1993년 사이 2번의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계속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와 나눔을 호소했다.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랑의 선교회의 회원을 실제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한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이 폐까지 침범하였다. 선교회에서 죽고 싶다고 말해 선교회로 되돌아왔고, 1997년 9월 5일에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장례식은 9월 13일국장으로 거행되었는데 시신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시신을 운구했던 포가(砲架)로 운구되어 인도 정부가 나타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도를 표했다. 유해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테레사 수녀의 집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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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5장 12절)
마더 테레사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
우리의 사랑하는 수녀원장
사랑의 선교회 설립자

평생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일해왔기 때문에 고령이 된 후에는 허리가 펴지지 않았고, 세계를 돌아다닐 때는 한쪽 귀가 멀고 심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인도의 콜카타에서 헌신적인 빈민 구제 활동을 하여 살아있을 때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79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 축하연에 사용될 돈을 빈민 구제 기금으로 써달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었으며 자선가에게 주어지는 각종 상과 선량한 종교인이 받는 각종 상들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80년에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4. 국적 논쟁

국적 논쟁이 상당히 심한 인물이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마더 테레사의 출생지인 스코페의 주권국이 그녀의 일생 동안 발칸 전쟁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거치며 많이 바뀐 데다가 혈통은 스코페를 영토로 둔 적이 없었던 알바니아계라는 점, 그리고 활동지가 출생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인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18][19]

태생을 따져보면 알바니아계로 오스만 제국 국적을 지닌 채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영토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혈통인 알바니아와 주로 활동했던 지역인 인도를 포함하여, 이제는 멸망한 국가인 오스만 제국과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생전에 스코페 지역을 잠시나마 다스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국적 또한 가지고 있으며, 테레사 수녀의 생애 말년에 건국된 북마케도니아 또한 출생지인 스코페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북마케도니아의 국적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더 테레사가 가지고 있었던 국적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결국 이런 국적 논쟁 때문에 테레사 수녀의 임종 이후, 알바니아인도는 테레사 수녀의 시신을 어디에 안치할 것인지, 나아가서 그 국적은 어디에 있는지를 놓고 다투었다. 참고로 노벨상 수상 당시에는 인도 국적으로 수상했다.[32] 현재는 혈통을 근간으로 한 알바니아, 활동 지역을 근간으로한 인도, 그리고 출생지인 스코페의 현 주인인 북마케도니아 이 세 국가를 테레사 수녀의 주요 국적으로 보고 있으며, 이 세 나라 모두 테레사 수녀가 자기 나라의 인물이라 주장하며 삼파전을 벌이고 있다.

5. 시복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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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9일 시복식 2016년 9월 4일 시성식
성 베드로 대성당 강복의 발코니에 걸린 마더 테레사의 상본(像本)



사망 6년 뒤인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복자로서의 명칭은 "콜카타의 복녀 테레사"이며 라틴어로는 "Beata Teresia Calcuttensis"라고 쓴다.[33] 축일은 9월 5일이다.

2015년 12월 18일, 교황청 시성성이 2008년 뇌종양을 앓던 브라질 남성이 치유된 것을 마더 테레사에게 청한 전구로 인한 기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시성에 필요한 기적 사례 2건이 충족되어 2016년 시성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마더 테레사의 축일인 9월 5일에 시성 미사가 봉헌되는 게 원칙이지만, 주일인 9월 4일로 앞당겨 열린다. 시복식 때 3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운집한 것을 고려하면 마더 테레사의 시성식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포한 '자비의 희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는 게 언론의 분석이다.

2016년 3월 15일 (한국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성을 승인했고, 동년 9월 4일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성인으로서의 명칭은 "Sancta Teresia de Calcutta", 즉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이다.

당초 인도 가톨릭 주교 회의는 교황이 인도를 방문해 시성식을 거행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황청의 희년 행사 일정상 로마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4일 시성식과 그다음 날로 예정된 자비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희년 행사를 묶으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실천 메시지를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편 교황은 시성식에서 가장 좋은 자리(제대 앞)를 가난한 이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들 1,500명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환대의 집에 머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시성식 뒤에는 바오로 6세 강당에서 이들에게 나폴리식 피자를 곁들인 점심을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과 함께 직접 나눠 줬다. 또한 교황은 이날 1928년 멕시코에서 14살 어린 나이에 순교한 호세 산체스 델 리오(1913~1928), 루터교회에서 개종한 후 브리짓다 수도회를 설립한 스웨덴마리아 엘리자벳타 헤셀블랏(1870~1957), 아르헨티나에서 '가우초 (남미의 카우보이) 신부'로 공경받는 가브리엘 브로케로(1840~1914) 신부, 1600년 무염 시태 마리아회를 설립한 폴란드의 예수 마리아 스타니슬라오도 같이 시성하였다.

6. 비판

마더 테레사의 결점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녀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시복 절차가 시작되면 교황청은 조사자들을 두 무리로 나눈다. 이들은 현대 재판검사변호사의 역할을 맡는데, 각자 자신들의 주장[34]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한쪽은 비난만 하고 한쪽은 칭찬만 해야 하는 것인데, 이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은 현지 조사의 기간은 기본적으로 3~4년이며, 서류상의 검토는 대개 11~13년 정도의 기간을 들인다. 양쪽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교황청이 "해당 인물은 생전의 부정적인 면모보다 긍정적인 면모가 뛰어나기에 성인으로 시성할 가치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성인으로 시성할 수 있다.

사망 후 시복 절차를 밟으면서 대두된 문제이나, 생전에도 몇 가지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는 그녀의 문제라기보단 수도자 혹은 가톨릭 신자로서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입장, 또는 반종교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던져주는 몇몇 사건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반그리스도교 성향 진보 언론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가 활동하고 있던 1980년대에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 가차 없는 공격을 펼친 히친스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테레사 수녀의 시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악마의 대변인 중 하나로 히친스를 초청해 테레사 수녀에 대한 히친스의 의문과 비판을 경청했다. 아래에 있는 비판도 봉사 시설 운영 논란을 제외하면 단순히 테레사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비판에 가까운 입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히친스의 말에 따르면 이 악마의 대변인으로 활동할 때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하고 기탄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위기였다고 하며 그는 이 검증 체계에 대해 호평했다.

밑에 비판에 쓰인 예시 내용의 많은 부분이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자비를 팔다>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은 무신론적 회의주의 입장에서 테레사 수녀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이 책만을 보고 그녀의 행적 전부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 가톨릭 신자라면 일반적으로 위인들에게 갖는 존경심 이상으로 성녀인 마더 테레사에 대해 신앙적 경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톨릭 신자들의 관점과 무신론자가 보는 세속 가치관과 충돌하는 '종교인'의 이미지는 차이가 확연할 수밖에 없다.

6.1. 의료 기관 운영, 고급 병원 입원

'자비의 집' 봉사 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는 자비의 집을 현대적인 의료 시설로 바꾸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하는 수준의 원시적인 시설 관리만을 했다고 한다.[35]

현대의 노인 요양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대도 시대이거니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즉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수용소 수준. 일부 증언에 따르면 주삿바늘 여러 개를 끓는 물도 아니고 찬물 아래 비벼 씻는 것으로 소독을 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36] 진통제 같은 기본적인 약들도 구비가 어려워 꼭 필요할 때에만 주곤 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처방만 하면 살 수 있을 어린아이 등을 똑같이 빈약한 치료만으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녀가 받았을 기부금의 액수를 생각해 보면, 빈민 모두를 최상의 시설과 인력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쳐도, 기자재가 충분히 갖춰진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사망율은 다른 병원보다 아주 높았다고 한다. 그에 반하여 병원에 근무하는 가톨릭 신자이던 직원들의 업무량과 지급되던 급여는 아주 두둑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막대한 지원금 내역은 공개되지 않는 데 반해, 실제로 현지에 지어지는 의료 기관이 극도로 빈약하다는 사실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시설을 그냥 이곳저곳 늘리는 데에만 집중한 면모도 선교에만 치중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에 비해 본인이 병에 걸렸을 때는 인도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요양 시설에서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에 걸리자마자 입원한 것은 아니며, 첫 번째 심장 마비가 왔을 때는 치료를 거부했다가 2번째 심장 마비 이후, 저명 인사의 죽음으로 인한 비난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의 반강제적인 요청과 교황의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비슷한 일화로는 투옥 중인 간디가 주사제를 처방받은 일이 있다. 입원한 상황에서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다'고 말한 바가 있다.

6.2. 강간 피해 여성들의 출산 권장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에게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마더 테레사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가톨릭의 엄격한 생명 윤리에 따른 것임은 알아야 한다. 가톨릭낙태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톨릭은 인간 생명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 훼손 행위에 반대한다. 사실 생명 존중은 모든 종교에서 인정하는 바인데, 임신 중절 문제에서 가톨릭은 가장 엄격한 입장을 취한다.[37]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는 것조차 가톨릭의 입장에 어긋난다. 수정란 때부터 인간 생명으로 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생명 복제를 비롯한 모든 생명에 관여되는 인간 자의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며, 부부간의 생리 주기법을 제외한 일체의 인공 피임도 죄악으로 금지한다. 다만 산모가 죽게 된다거나 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서 태아가 유산될 '가능성'이 있지만 산모를 확실히 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태아의 사망을 의도하지 않는 치료 방식 정도만 용인한다.[38] 애초에 성(性)을 부부 사랑 & 생명의 잉태가 아닌 쾌락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행위(수음이라든가)는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가톨릭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따라서 이러한 가톨릭 생명 윤리에서 낙태살인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평생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온 테레사 수녀원장에게는 출산 권장이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사실 강간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피해자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입었는 데다 대다수가 경제적 지위도 낮아서 출산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아이를 돌보기가 힘들다.[39] 그런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시설이 발달한 곳이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후진국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힘드므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원장은 무책임하게 출산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끄는 사랑의 선교회는 말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의료 기관과 고아원 등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녀는 "키우지 못할 아이가 있으면 낙태하지 말고 나에게 보내 달라. 내가 키우겠다"고 했다. 하지만 육아를 배제하고 출산만 놓고 생각하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에, 반대자들을 완전히 납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강간당해 임신한 여성이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임신으로 인한 신체적 부담과 출산의 고통 및 후유증, 경제적 부담 등의 피해를 당해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도 문제라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일차적으로 가톨릭 신자이며 수도자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테레사 수녀원장을 탓하기 이전에 그녀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따라 행동하기로 서약한 수도자라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가톨릭에서 낙태는 중죄 중의 중죄이다. 어느 정도냐면 가톨릭 신자는 낙태를 해서도 안 되고,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낙태 행위를 종용하거나 심지어 단순히 얽히기만 해도 자동 파문이 내려질 정도. 또한 낙태 허용 법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낙태 허용 시위에 참가하거나, 낙태 허용 법안에 찬성표를 던져도 안 된다. 평신도가 속으로 남몰래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개인의 양심 영역이니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낙태 허용 법안을 지지하거나 하는 경우 영성체를 금지당하기도 한다. 미국의 정치인 낸시 펠로시가 이 케이스에 속하는 경우. 신성 모독이나 현실에서도 범죄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이르기만 하고 잣대를 잘 들이대지 않는 일반 신자에게도 저 정도로 엄격하게 나가는데 평생 교리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로 서약한 수도자라면.... 일례를 들자면, 브라질의 수녀이자 해방 신학자인 이본 게바라가 낙태의 합법화를 지지했다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장관으로 있던 신앙 교리성[40]에서 2년 침묵(강연/저술 등의 금지, 즉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낙태를 위와 같은 수준의 심각한 중범죄이자 신생아보다도 어린 태아를 살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만큼, 가톨릭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명하고 그를 실천하였기에 빈민들에 대한 그 정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마더 테레사로서는, 낙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이다.

6.3. 탄압받는 이들에 인내 요구

거대 권력의 힘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참으세요"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인내를 권했다.

이 역시 가톨릭 신앙과 관계있는데, 가난한 자들을 적극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규모를 확대하는 데에 신경 쓴 수도회의 방향성 또한 맥락을 같이한다. 이 부분이 기부금을 쌓아두고 가난한 이를 돕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가난한 이들의 재활을 돕기보다는 많은 피난처를 만드는 쪽에 무게를 둔 것뿐이지 테레사가 돈을 횡령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테레사 수녀는 때로 지나친 특수 사적 목적성을 띤 정부 보조금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는 가톨릭 신앙에서 권위와 전통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테레사 수녀가 활동한 시기는 1940년대부터이니 지금보다 훨씬 바티칸이 사상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시기였으며, 각국의 보수 세력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시기이다. [41]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가톨릭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정교분리와 정치적 중립성을 과거보다 더 강조하거나, 혹은 민주화 운동 등에 참여하는 등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리스도교계에서 모두가 그런 식으로 순종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교파나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나 혁명을 주장하거나 참여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있었다.

6.4. 독재자, 금융 사기자 옹호

아이티를 철권통치하다가 쫓겨난 독재자 장 클로드 뒤발리에의 영부인을 포함해서 아이티독재자들과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은 일이나, 탐욕스러운 영부인을 향해 '빈민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분'이라는 찬사를 하는 등, 윤리적으로 매우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범죄자 찰스 키팅(Charles Keating)[42]이 법정에 서자, 그녀는 찰스 키팅이 빈자들에게 사랑을 보여줬다면서 예수처럼 키팅의 잘못을 용서하길 청하는 편지를 보내 탄원했다. 담당 검사는 이에 대해서 “키팅은 가난한 서민들의 돈 또한 가리지 않고 빼앗았으며, 수녀에게 보낸 기부금에는 그런 서민들의 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돈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게 연락주신다면 키팅에게가 아니라 사기당한 이들에게 돈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주선을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냉소적으로 답신했다. 이 편지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7. 이모저모



[1] 여기서 마더Mother는 그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 규칙에서 수녀원장을 일컫는 호칭이다. 곧 '마더 테레사'는 '테레사 수녀원장님'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랑의 선교회만의 특징이 아니라 많은 수녀회에서 택하고 있는 호칭이며, 가령 본 문서의 주인공(콜카타의 성녀 테레사)의 동명이인이자 일명 大테레사로 불리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경우, 에스파냐어로 Madre Teresa(Mother Teresa) 내지는 La Madre(The Mother)라 불리어오고 있다. 그 외에 비슷한 호칭으로 고대에 사막의 여성 은수자들을 일컫던 암마Amma가 있으며, 남성 호칭으로는 아빠스(수도원장), 아빠(사막 은수자)가 있다. 물론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단어 자체만 보더라도, 어머니Mother라는 표현에서 비롯되는 느낌을 보면 알듯이 매우 존엄한 호칭임은 분명하다.[2] 태어나고 바로 다음 날 세례를 받았다.[3] 혼전성은 '베르나이(Bernai)'.[4] 초대 수상자.[5] 정결, 순명과 함께, 가톨릭수도자가 서약하는 덕목. 이 3가지를 '복음 삼덕'이라 한다. 다만 정결과 순명은 성직자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적 음행을 해서는 안 되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해야 한다.[6] 그리고 이 직후 세계 평화의 적은 바로 낙태라고 선언하는데, 사실 연설 전문은 낙태는 살인으로써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낙태에 대해 비판적인 요지였다. 그리고 낙태에 대해 적어도 그리스도교 관점에선 아주 큰 죄악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테레사 수녀의 이런 연설은 지극히 당연했다.[7] 발췌자 주석: 코린토 1서 2장 4-5절 암시.[8] 우아한 신학적 담화나 호교론, 대중음악으로 개작한 시편보다 알바니아 출신의 한 가난한 수녀의 환한 얼굴이 오히려 영국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는 증언이다.[9] BBC에서 마더 테레사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했었다.[10] 영국은 이미 오래전에 성공회, 장로회개신교가 주류 종교가 된 후였지만, 옆나라 프랑스부터 가톨릭 국가이며 프랑스보다도 가톨릭이 강세인 아일랜드는 20세기 초까지 영국령이었던 와중에 가톨릭이 아예 밀려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특히나 아일랜드계를 비롯한 소수민족이 가톨릭을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영국 가톨릭은 19세기까지 수 세기에 걸쳐 탄압받았음에도 일정 세력을 유지했다. 오히려 성공회가 전통과 교리 해석을 놓고 고교회파와 저교회파로 갈리면서 일부 고교회파 성직자 및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이탈하는 등 여러 내홍을 겪으면서 교세가 약간 줄었다. 비비안 리, 숀 코너리 등 영국 연예계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적지 않으며, 전직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전 보수당 원내 대표인 제이콥 리스모그도 가톨릭 신자이다.[11] 테레사 수녀의 고향인 스코페는 당시나 지금이나 정교회 우세 지역이라 가톨릭은 소수 종교에 속했으며 2002년 통계상으로 스코페의 종교 비율은 정교회 68.5%, 이슬람교 28.6%, 가톨릭 0.5%이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유대인도 도시 인구의 3%를 차지했으나, 유대인은 나치 점령기에 홀로코스트에 의해 희생되거나 이스라엘로 떠나면서 거의 사라졌다.[12] 가톨릭에서 정식 수도자가 되기까지는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지원기(1년) - 청원기(1년) - 수련기(2년) - 유기 서원기(4~5년)의 단계를 거쳐 종신서원을 한다. 수련을 받고 사도직을 수행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청빈, 정결, 순명의 3가지 덕목을 지키겠다는 유기 서원을 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일정 기간을 보내고서야,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인 종신 서원을 하고 정식 수녀가 될 수 있다. 기한은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한 10년 정도다.[13] 흔히 '소화' 테레사라고 불린다.[14]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이 입는 복장이다.[15] 일종의 호스피스 개념 현재도 콜카타에서 테레사 수녀의 뒤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16] 가톨릭에서 사제수도자는 인간으로서 죽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임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사제/수도자가 되고나면 부모 자식으로 대하는 일이 드물다. 가령 도미니코라는 세례명을 가진 아들이 신부가 되었을 경우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미니코 신부+존칭을 쓰는 것이었으며 사제가 부모님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지 않는다.[17] 당시 알바니아는 공산 국가 중에서도 종교 탄압이 가장 극심한 국가였기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강했다. 나중엔 입국은 허가하되 출국은 불허한다는 방침이 되어서 결국 포기했다. 소련이나 다른 동유럽 국가, 중국, 쿠바나 베트남, 심지어 북한조차도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함에도 알바니아는 그런 것 없이 무신론 아니면 다 때려잡고 종교인의 입출국조차 이런 식으로 규제했다.[18] 활동지로 인한 국적 문제는 마더 테레사 말고도 해외 선교 성직자라면 흔히 겪는 문제다.[19]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국적도 인도였다.[20] 테레사 수녀의 일생 동안 스코페를 통치했던 국가들을 표기했다.[멸망] [멸망] [23] 발칸 전쟁 도중 스코페가 세르비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멸망.[멸망] [25]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스코페는 불가리아 왕국에 점령되었고, 이는 1918년 프랑스군이 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불가리아는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가 멸망하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남부 지역을 영토로 편입했다.[멸망] [멸망] [멸망] [해체] [30] 유고슬라비아는 테레사 수녀의 국적을 박탈하지 않았다.[31] 가톨릭 성직자라는 이유로 공산 정권 내내 시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가 1991년 공산 정권이 붕괴하자 국적이 회복되었다.[32] 단, 이는 노벨상 수상 당시 노벨위원회에서 그녀의 국적을 인도로 인정해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말그대로 수상 당시의 그녀의 국적을 말한다. 노벨상은 수상자의 국적을 기재하지 말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받들어, 공식적으로 수상자의 국적을 적지 않는다. 수상자의 출생지와 사망지 정도만을 기재할 뿐이다. 마더 테레사의 경우 워낙 논란이 심했다보니 대신 '수상 당시 거주지'라는 명목으로 인도를 기재해준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노벨상 각국 수상 현황 문서 참조.[33] Beata Teresia a(혹은 de) Calcutta라고 쓸 수도 있다. 영어로는 Blessed Teresa of Calcutta라고 쓴다.[34] 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 인정해선 안 된다는 쪽의 별칭은 '악마의 변호사'이다. 그리고 당시 악마의 변호사 일을 맡았던 사람은 이전에도 마더 테레사를 비판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였다.[35] 이건 가톨릭교회 외부에서만 나온 비판이 아니었다. 자비의 집에서 봉사했던 의사 출신의 어느 수도 사제는 공중 보건학 전문가로서 자비의 집 운영에 대해 테레사 수녀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나, '그건 우리의 방식이 아니다'라고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36] 주삿바늘은 1회 사용 후 폐기가 원칙으로, 세계 대전기 이후 정립되었다. 자세한 이유는 주사기 항목 참조.[37]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은 보편 윤리이므로, '생명의 범위'에 대한 문제가 임신 중절 문제의 핵심적인 논란 중 하나다. 가령 수정란이 생명이 아니라면 착상을 방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런 관점을 종교에 종사하는 마더 테레사에게 적용하려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테레사 수녀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수정체도 인간 생명이라는 가톨릭의 원칙을 철저히 따를 수밖에 없다.[38] 한마디로 산모가 죽거나 태아가 죽거나 둘 중 하나인 상황에서나 봐준다는 뜻이다. 하나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둘 다 죽으라고 내버려두는 건 더 큰 죄라는 명분이 있다.[39] 여자든 남자든 강간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인해 생긴 아이를 과연 책임져야 하는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와 같이 '아이는 죄가 없다'는 인도적인 결론이라면 제3자가 책임질 수 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강간, 낙태, 원하지 않는 임신 등 관련 문서 참조.[40] 중근세에 악명 높던 이단 심문소의 실질적 후신이다. 가톨릭에서 낙태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수 있는 부분.[41] 이러한 역사들은 중근세의 일들과 달리 현재도 크게 다루어지거나 반성이 이루어진 역사들은 아니다.[42] 미국의 금융인. 1989년 링컨 저축·대부 은행 파산 사건을 일으킨 경제 사범으로, 2014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3] 인도내에서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고아 지방은 포르투갈식 이름이 널리 사용된다.[44] 참고로 남편은 처음에는 기적 여부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이후 기적이라는 점을 납득했다고 한다.[45] 일례로, 현 가톨릭 교황프란치스코만 해도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성직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그리스어, 라틴어 말고도 영어이탈리아어가 모두 유창하다.[46] 이 동영상 마지막에서 2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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