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dbdbd><colcolor=#000> 소프트뱅크 그룹 초대 회장 손 마사요시[1] [ruby(孫, ruby=そん)] [ruby(正, ruby=まさ)][ruby(義, ruby=よし)]|Son Masayoshi | |
한국명 | 손정의 (孫正義, Son Jung-eui[2]) |
출생 | 1957년 8월 11일 ([age(1957-08-11)]세) |
일본 사가현 토스시 | |
본관 | 일직 손씨 (一直 孫氏)[3] |
국적 | [[틀:깃발| | ]][[틀:깃발| ]][[대한민국| ]](1957~1990)
[[일본| ]][[틀:국기| ]][[틀:국기| ]](1990~ ) | |
학력 | UC 버클리 (경제학 / 학사)[4] |
직업 | 기업인 |
가족 | 아버지 손삼헌, 어머니 이옥자 형 손정명, 남동생 손정헌, 남동생 손 타이조(손태장)[5] 배우자 오노 마사미[6], 슬하 2녀 |
링크 | | |
재산 | 291억 달러 (약 38조 9,794억 원)[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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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기업인. 한국계 일본인이며 소프트뱅크의 창립자 겸 소프트뱅크 그룹 대표이사 사장, 소프트뱅크 대표 집행역 사장 겸 CEO,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너 등을 맡고 있다.[8] 2022년까지 일본 내 1위 자산가였다. 따지고 보면 일본 내 재일 한국인 집안에서 지금의 소프트뱅크를 일군 신화적인 기업가다.이름인 정의(正義)는 일본에서는 훈독하여 마사요시라고 읽는데, 한국에서는 한국식으로 ‘손정의’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2. 신조
인생 50년 계획
*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 30대에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 30대에 최소한 1천억 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 마사요시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인생 50년 계획'은 그가 19세가 되던 해에 세운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50대까지 그의 인생이 그가 세운 인생 계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6년 7월 현역 은퇴를 철회하고 10년은 더 하고 싶다고[9] 소프트뱅크 주주총회 직전 날에 밝혔고 후임을 퇴임시켰다.# 원래는 60세 생일에 깜짝 은퇴 발표를 계획했었다고 한다. 아마 젊었을 때는 일본 평균 수명이 70살 정도였으니 본인도 70대쯤 죽을 줄 알았다가 수십 년을 사는 동안 남성 평균 수명이 80살을 넘어갈 정도로 많이 늘어나니까 마음이 바뀐 듯하다.
3. 생애
한국계 일본인 사업가로 재일교포 3세이다. 손 마사요시 회장의 아버지 손삼헌(孫三憲)은 1936년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128번지[10]에서 태어났다. 당시 손정의의 할아버지 손종경(孫鍾慶)[11]은 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1930년대 일본 육군이 항공대 비행장을 만들면서 농사 지을 토지를 잃었다고 한다.그래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돈벌이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는데, 광복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어려워 1년 가량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가 규슈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고, 할머니는 리어카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 가축사료로 쓰곤 했는데,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밖에 나가 일하느라 잘 볼 수 없었고, 할머니가 끄는 리어카를 타고 놀면서 자랐다고 한다. 손 마사요시는 그러한 할머니의 고생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고, 공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손 마사요시 일가가 재산을 불린 것은 그의 부모 대에서였다. 손 마사요시의 부친인 손삼헌은 소액 대출업을 했고, 파칭코 사업으로 재산을 불렸다. 부친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한 예로 파칭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터를 만들어 '붉은 잉어를 낚으면 보너스 만엔'이라며 호객을 했는데, 파칭코로 잃은 손님은 낚시에서 돈을 따려 했고 보너스를 딴 손님은 다시 파칭코로 갔다고. 같은 시기 손정의 본인은 1964년 기타큐슈시 야하타니시구로 이사한 후 시립 히키노소학교를 다닌 뒤 1970년 히키노중학교 재학 도중 후쿠오카시 사와라구로 이사해서 죠난중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그가 10대일 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병원에 입원하자, 그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 꿈은 교사, 화가, 정치인이었지만 외국인으로서는 어려운 직업이기에 상대적으로 국적과 관련이 덜한 사업가를 선택했다고. 여담으로 그는 훗날 방송에서 어린 시절 재일교포라고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은 적이 있다는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어머니 이옥자[12]는 한국에서 이주했으며, 근래엔 저명한 나전칠기작가인 길정본의 전문 통역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손정의 회장의 어머니는 롯폰기에서 가정부와 둘이서 생활 중이고 손정의와는 왕래가 적다고 한다. 때문에 손정의와 모친의 사이가 현재는 별로 안 좋은 것 같다는 말도 있다.
진심으로 천재적인 자질이 있다고 믿었는지, 차별에 위축된 아들에게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손정의에게 '너는 천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며 자라온 손정의는 '정말 내가 천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훗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고자 하는 상대방에게 '저는 천재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도 그러니까 상대방 역시 손정의에게 천재 같은 면이 있어보이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13]
이후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자 주변인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생각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미국에서 홀리 네임즈 칼리지의 ESL 과정에 다니고, 후에 2년제 대학교인 홀리 네임즈 칼리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며 1980년 경제학 학사를 취득했다. 동시에 경제적 독립을 위해 마이크로칩을 활용한 번역기를 만들어 1980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 유니손월드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특허를 SHARP에게 팔아 사업 밑천을 마련했다고 한다.
3.1. 1980년대
그는 높은 성적 덕에 모교인 UC 버클리는 물론 하버드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비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장학금을 받으며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받았지만 졸업만 마치면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19세 때 세웠던 인생 50년 계획의 첫 단추를 꿰기 위해 1980년 3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미국에서 운영하던 사업 '유니슨 월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홍 루[14]에게 넘겼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걸 40여개의 사업 아이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역시나 소프트웨어 사업. 그는 경제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물론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소프트웨어 시장은 미국의 거대 개발업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에 인프라(유통)를 택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1981년 9월, 그의 고향과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 시에 위치한 허름한 2층 건물에서 직원 2명과 함께 소프트뱅크를 창업, 소프트웨어 유통, 컴퓨터 서적 출판 등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관련 제품 전시회인 ‘컴덱스(COMDEX)’에 출품한 소프트웨어가 ‘대박’을 치는데, 이때부터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승승장구하며 파소나의 남부 야스유키, H·I·S의 사와다 히데오와 함께 벤처 삼총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1983년 봄에 그는 몸에 이상을 느끼자 회사 건강검진에서 직원들과 같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만성간염 판정을 받아 5년의 생존기간 판정을 받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병상에서 10대 시절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의 삶을 각색한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를 다시 읽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메이지 시대가 오기 불과 2개월 전 암살을 당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꽃 같은 생을 마친 사카모토 료마를 보며 자신도 "남은 생존기간 동안 무엇인가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려,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아[15] 1986년 5월, 회사로 복귀했다. 그 기간동안 회사는 고객들과 거래처 등에게 신뢰를 잃었고, 1984년에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 실패로 인해 은행 융자 10억엔의 빚과 더불어 신뢰해 오던 직원 20명이 동시에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가서 따로 회사를 차렸을 만큼 사원들의 배신과 불신도 있었기에[16] 소프트뱅크는 망해가기 일보 직전에 상태였지만, 그는 회사를 정상화시킨다. 이때 손정의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1980년대 초반 일본 게임계의 아이콘이였던 허드슨 소프트의 독점유통권을 따내기 위해 고생하다가 성공했는데 이것이 초기 소프트뱅크 성장의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두 회사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이후 손정의는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를 주목했는데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 통신 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로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도 다 달라서 싼 회선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고 마음먹고 IT기업 '포벌(Forval)'사의 오쿠보 히데오 창업자와 함께 'NCC BOX'를 개발하였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으며 우수했다. 이 기기로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고, 소프트뱅크는 빚을 갚고도 남을 20억엔의 로열티를 받았다. 미국의 거대 소프트웨어 업체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는 당시 벤처기업에 머물렀던 마이크로소프트와 노벨, 시스코 시스템즈 등을 발굴했다. 「PC계의 천재」라고 불린 아스키의 니시 카즈히코와[17] 대비되어 「PC계의 신동」이라고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또 1980년대에는 니시 카즈히코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고 불렸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이 호칭이 손 마사요시에게 넘어갔다.
3.2. 1990년대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기존 사업에서 더 나아가 공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M&A를 통해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 1994년 7월에 주식 공개에 성공하여 2000억 엔이라는 거금을 쥐게 된 소프트뱅크는, 이 돈으로 당시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컴덱스와 당시 세계 최대 IT 미디어 그룹인 지프데이비스[18]의 출판 부문과 컴덱스에 이은, 미국 내 2위 규모의 IT 전시회 부문인 인터롭을 인수하여 주식공개 1년 6개월 만에 3100억 엔 규모의 국제적인 M&A를 성사시켰다. 부족한 돈은 모건 스탠리가 제안한 신용 담보 융자인 LBO(leveraged buyout)[19] 방식을 통하여 해결했다.덕분에 소프트뱅크는 당시 세계 최대 IT 전시 및 출판 그룹을 소유한 기업이 되었다. 그는 막 인수한 지프데이비스의 출판 부문 사장에게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면 없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다"고 밝히자 그를 통해 야후!라는 벤처기업을 소개받는다. 전업 투자가는 아니었지만[20] 일본의 워렌 버핏[21][22]이라 불릴 정도로 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투자한 기업들은 다음과 같다.
- 야후!: 초창기 투자 중 하나. 야후는 당시 직원 15명, 매출액 200만달러에 적자 100만달러인 작은 회사였으나 당시 야후의 CEO였던 27세 청년 제리 양과의 식사 자리[23]에서 1억 5,000만 달러 투자를 결정한 걸로 유명하다. 야후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야만 종족의 이름이다. 신기한 빛이 나는 돌을 둘러싸고 싸우는 야만인들은 그 돌이 아무런 가치없는 물건임을 알지 못했다. 이제 막 생겨난 인터넷 세계에서 가치없는 돌과 같은 정보들이 널려있는 와중에 이용자에게 가치있는 정보가 발견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마음에서 야후란 이름을 따온 것.
- 알리바바: 초창기 투자. 당시 20명 규모의 작은 회사의 CEO였던 마윈의 프리젠테이션을 듣다가 6분만에 2,000만 달러(한화로 약 200억원) 투자 결정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추가로 몇 차례 더 투자하여 현재 알리바바 지분의 20%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대략 15년 전 투자한 2,000만 달러가 현재는 수백억달러로 불어났다. 약 200억을 투자해서 현재는 약 150조원의 지분가치를 가진다.
- 슈퍼셀: 2013년 15억 달러에 지분 51% 그리고 2015년 22% 추가 지분 인수 후 2016년 텐센트에 약 73억 달러에 판매했다.[24]
이 외에도 한국에 기반한 미국계 기업인 쿠팡 등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 기업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는 중이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꼭 필요한 기업은 조금 무리를 하고서라도 인수하는 편이다. 그 중 성공적 인수는 바로 2006년 이뤄진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전신인 보다폰 재팬이며, 현재는 더 큰 미국 모바일 시장 석권을 위해 업계 3위인 스프린트 코퍼레이션을 인수하여 열심히 달리는 중이다. 다만 T-모바일과의 인수합병이 틀어지고 실적이 나빠지는 등 2010년대 기준으론 고전 중이다(...).
1990년대 후반~2000대 초반 전세계적인 닷컴 버블 시절에는 자산이 100억 달러를 훌쩍 넘으며 일본 최고부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허나 버블 붕괴 후 11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후에 19억 달러로 다시 늘어났다.) 붕괴 당시엔 시가총액의 90% 이상이 증발한 셈인데(...)[25] 이때 언론에선 그를 손가락질하며 경영능력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이러한 언론의 혹평을 이겨내고 과감한 투자와 사업센스로 다시 기업을 일으켜세운다. 당시 손정의는 몸을 피하기보단 주주를 회사로 불러 설득 작업에 나섰는데, 한 거물 투자가가 설명을 듣고 "내 돈을 되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당신은 믿을 수 있겠다"[26]라며 돌아간 일화는 나름 유명하다.
3.3. 2010년대 이후
2010년 6월 15일, 소프트뱅크 30주년을 맞는 주주총회에서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회'가 있었다. 손정의의 철학과 소프트뱅크의 역사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손 마사요시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발표다. 소프트뱅크 향후 30주년 비전 발표 영상 이후 책으로도 나왔다.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터지며 연쇄적으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에서 원전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탈 원전 구상을 내놓고 태양광 발전 등 자연에너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공익과 부합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손 마사요시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간 나오토 총리가 탈원전 선언을 하면서 손 마사요시의 탈원전 구상도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19년 현재 일본은 에너지생산에 있어 자연에너지(수력, 풍력, 파력, 조력, 태양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소 대비 효율이 상당히 떨어져 다시 원자력 발전소로 회귀 중이다.
2011년 5월 31일 KT 이석채와 함께 일본기업 전산 데이터들을 부산 근교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정확히는 김해시 구산동의 KT 연수원. 김해국제공항 등 교통시설에 주목한 듯하다.
2011년 9월 15일부터 중앙일보에서 창간 46주년을 기념하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손 마사요시의 삶과 소프트뱅크의 성장기에 대하여 일정기간 연재하였다.
2014년 기준으로 소프트뱅크의 주식 19.26%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일본내에서도 손꼽히는 자산가로 알려져있다. 포브스에서 조사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따르면 2014년에는 일본 2위, 전 세계 45위. 그리고 2014년 9월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19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돌풍을 일으키며 데뷔하면서 일본 최고 갑부의 자리(약 17조 2,000억원)에 다시 오르기도 했다. 2000년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과 만난 후 소프트뱅크가 2,000만 달러(약 207억원)를 알리바바에 투자하도록 결정했는데 14년만에 엄청난 수익을 올린 셈이다.
2014년에 34억 달러를 들여 드림웍스를 매입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고, 대신 레전더리 픽처스에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참고로 여긴 영화 인터스텔라,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등을 만든 곳이다.
2019년 기준으로 사실상 손정의는 우버를 중심으로 하는 차량공유 시장의 지배자가 되었다. 2017년 우버에 92억 달러를 투자해서 최대주주가 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권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는 차량공유 업체들에 356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이들 기업들의 최대주주가 된 것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차량공유 기업들에서 최대주주 또는 2대주주가 된 손정의는 최근 이들 업체들의 해외사업 진출에 영향력을 행사해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각 기업들이 모국에서 독점시장을 구축하도록 지휘했다.[27]
이러한 행보는 이전부터 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명한 손정의가 본격적으로 향후 자율주행차 시장의 근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차량공유 업체들을 손에 쥠으로써, 이후 발전할 시장에 대한 선점효과를 누리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는게 아니냐는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라는 100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여 일종의 손정의 월드를 구상하고 있다. 모든 일상이 손정의 월드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고, 자율주행차, 공유차 시장에 대한 투자도 이에 대한 일부이다.
2019년 7월 4일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2016년 9월 방한 이후 약 3년 만의 일이다. 청와대를 방문해서 문재인 대통령과 공식 면담을 진행하고 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할 산업은 인공지능이라고 당부하였으며, 이재용, 구광모, 정의선 등 주요 재벌 총수들과 회동하였다. 다만 방한 직전에 일본의 경제 보복 사태가 터져서 빛이 좀 바랜 감은 있었다. 청와대의 공식 면담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이후 재벌 총수들과의 회동에선 이 규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이 회동에는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도 참석했다.
3.4. 2020년대 이후
2020년 1분기에는 소프트뱅크가 창사 이래 최대 적자를 기록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1~3월의 적자는 무려 1조 4,381억엔(약 16조 5,545억원)이다. 이전까지 일본 기업 최악의 분기 적자액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쿄전력 홀딩스가 기록했던 1조 3,782억엔이었는데, 이것을 갈아치웠다. 소프트뱅크의 적자는 손 회장이 주도하는 10조엔 규모의 ‘비전 펀드’를 통한 투자 사업이 실패한 결과로, 손 회장의 비전 펀드는 위워크(WeWork)ㆍ우버 등 스타트업 기업 투자 실패로 약 1조 9,000억엔의 손실을 냈다. 코로나19로 인한 소비 위축도 실적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손 회장은 결산 발표에서 직접 밝혔다. 이탓에 손 회장 스스로 “인생관을 되돌아보고 있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16조 日기업 사상 최악 적자에···무너진 손정의 '평생 소원'. 그래도 7월달에는 11조나 흑자를 내면서 어찌저찌 수습이 되어가는 중이다.2021년에는 수습되는 수준을 넘어서 뉴욕증시에서 비전펀드가 투자한 쿠팡이 상장가 40,000원을 넘기면서 평가이익이 20조원이 되는 잭팟를 터트리는 등 투자귀재의 귀환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쿠팡, NYSE 공모가 35달러 책정…"손정의, 20조 '잭팟'". 이로써 일본 제1의 부호 타이틀을 탈환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쿠팡의 주가는 상장 초기가 지나자 끊임없는 하락을 거듭하여 2022년에는 상장 초반 최고가의 25퍼센트 이하[28]까지 떨어졌고, 평가이익은커녕 손실만 커져서 다시 완전히 망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약반등하여 상장 초기 가격의 30퍼센트까지는 회복하였으나, 큰 상승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2022년부터 그동안 소프트뱅크 비전펀드가 손댔던 회사들이 대체로 망해가면서 손실만 거듭되는 마이너스의 손이 되자, 8월에는 실적 발표회를 열고 그동안의 경영 실책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반성하기 위해 그린 우거지상 초상화를 배경으로 등장시켜 화제가 되었다.#
4. 기타
- 소프트뱅크를 창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3년에 간염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적도 있다. 이때 그는 가족과 함께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병마를 이겨냈는데, 때문에 병을 완치한 이후 그는 사업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의 미소를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사업의 1순위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 상술된 투병 도중 읽은 손자병법에서 엄선한 14개 문자에 본인이 직접 더한 11개 문자를 조합한 25개 문자로 구성된 일종의 사업 전략인 '제곱법칙'이란 게 있다. 어록이 흔히 그렇듯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가 2010년 다음 세대 경영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개교식 특별 강의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그에겐 나름 가치가 있는 문장인 것으로 보인다.#
- 한 트위터리안이 그의 대머리를 두고 '머리카락의 후퇴가 심각하다'는 개그 드립을 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머리카락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원본)라는 비범한 트윗을 올려 약 4만건의 리트윗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29] 탈모로 고민이 많았던 사람들 중 한 명인 만화가 주호민은 자신의 가족을 소재로 한 만화 '셋이서 쑥'에서 탈모로 인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자 아예 시원하게 밀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 손정의 회장의 명언을 기억하면서 결심했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손 마사요시는 자신의 트위터 어카운트에 자사에 대한 소식들, 소프트뱅크와 관련된 여러 트윗들에 대한 리트윗들, 그리고 명대사급이거나 상당히 비범한 트윗들을 자주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올린다. 트윗이 올라갈 때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건 물론,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어서 무려 250만이 넘는 팔로워들이 있으니 한 번 방문해보자. 손 마사요시의 트위터.
- 2021년 6월 26일에는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대머리 남성 톱 10명"이라는 기사를 리트윗하며 '으으윽...'하면서 질투를 표시했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다같이 손을 위로하는 반응들.
- 만화 "정의는 나의 것"의 등장인물 스미코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스미코 曰 "내가 존경할만한 사람은 손 마사요시 뿐이야".
- 취미는 특별히 없으나 막부 말기 지사들이 쓴 책이나 서간을 모으는 것을 유난히 좋아한다. 그 중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발표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심취해 있다. 사장실이 있는 소프트뱅크 26층에는 료마의 전신 사진이 걸려 있으며 한 쪽 옆으로는 목검과 죽도가 있다.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을 집필한 스키모토 다카시에게도 보여준 것이 1867년 음력 10월 13일에 도사 번(지금의 시쿠코 고치현)의 참정대신 고토 쇼지로에게 사카모토 료마가 쓴 편지라고 한다. 이날 에도 막부 제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사 번이 제시한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주라'라고 권고하는 타협안을 수락했다.
-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의 피해복구를 위해 일본 적십자사에 100억엔을 기부했다. 일본 적십자사가 모은 지진구호기금이 700억엔 정도라고 하는데 손 마사요시 혼자서 1/7을 책임진 셈. 그리고 상술했듯 이후 탈원전을 기치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 2011년 일본의 모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일본 연예인, 유명인 중 총리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 조사에서 15.8%의 지지를 받아 2위로 뽑히기도 했다. 1위는 18%를 받은 코미디언 겸 영화감독 기타노 타케시. 사실 한국계라는 출신 성분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등수이다.
- 2016년 블룸버그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Most Influential) 50인’ 명단에서 25위에 오르기도 했다.
- 중국 웹사이트에서는 손정의의 동생인 손태장이 화교라는 소문도 돌았던 모양이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손자병법에서 나오는 손씨가 아닌 일직 손씨다. 다만 강연이나 책에서는 중국과 관련된 발언을 하기도 했다.[30]
- 손정의가 19세 때 세운 인생 50개년 계획은 1.20대에 사업에 이름을 내건다 2.30대에 사업 자금을 모은다 3.40대에 사업에 큰 승부를 건다 4.50대에 사업을 완성시킨다 5.60대에 사업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였다. 그래서인지 손정의는 60세가 넘은 이후 다음 세대에 바통을 넘겨주는 '소프트뱅크2.0'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고 있다.
4.1. 한국과의 관계
- 어릴 땐 한동안 재일교포로서 받은 차별 때문에[31] 이름도 일본식으로 쓰며 꽁꽁 숨어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콤플렉스를 더더욱 키울 뿐이었단걸 깨닫고, 아버지가 입원하시고 본격적으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미국 유학을 가기 전 할머니에게 부모 고향에 한번 데려가달라고 부탁했고, 10대였던 1972년 가을 할머니와 함께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 손정의는 자신이 사업가가 된 계기와 시골이었던 당시 부친 고향의 기억을 2010년 6월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 발표회'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 이후 손 회장은 1974년 통칭 '야스모토'(安本)라고 창씨하여 사용하던 자신의 성씨를 본래의 한국 성인 '손'(孫)[32]으로 바꿨다. 미국 유학 시절 어학원과 UC버클리를 같이 다닌 2살 연상의 오노 마사미[33]와 결혼하였으며 이후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역시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사업을 하긴 여러 애로 사항이 많았고, 결국 1990년엔 일본으로 귀화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손씨가 없다는 이유[34]로 귀화를 받아주지 않자,[35] 아내를 손씨로 바꾸는 편법을 써서 손씨 성을 지키며 귀화했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론 일본도 결혼 후 부인이 남편 씨를 따르는[36] 부부동씨가 일반적[37]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한국어는 거의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 외의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 왔을 때에도 영어를 쓴다. 그래도 상대방이 말하면 어느 정도 알아는 듣는다고. 어릴 적엔 재일교포로서 당한 차별 때문인지 본인 스스로도 출신에 대한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을 미워하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며, 그가 성씨를 한국의 성인 "손"으로 한건 할아버지,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밝히기도 했다.#
- 확실히 손 회장은 어릴 적 자신처럼 일본에서 차별당하고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동질감과 애정이 커보인다. 자신이 성을 다시 한국 성씨인 손으로 바꾼 이유도 한국 자체에 대한 애정도 일부는 있겠지만 더 크게 보면 재일교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 사업가가 된 이후에도 한국에 종종 내한했는데,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여 빌 게이츠 회장과 함께[38] 방문해 초고속 브로드밴드 인터넷의 중요성을 얘기했고, 이것이[39] 오늘날 한국 인터넷 망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물론 당시 초고속 인터넷망의 필요성은 손정의만 얘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옛 고향의 발전에 신경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상술했듯 2019년에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AI 산업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줬고, 2010년대 초중반에도 자신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관련 구상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 본인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관련해서 한국에 내한해 이재용 등 여러 기업가,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쿠팡 등 한국 신생 기업에 대한 투자와 대기업들과의 제휴도 활발한 편이다.
-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대구 동구청장과 공무원들이 무료로 손정의의 조상묘를 벌초해주기도 했다. 당시 구청은 손정의의 고향이 대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벌초해준 것이라 했는데,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 연장선상인지 2010년에는 초청장도 보내보고, 2012년에는 벌초 장면을 촬영한 DVD까지 선물로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인지 결국 2016년을 전후하여 벌초를 중단하였다.#
- 한때 한국 모 언론에서 iPhone은 원래 손정의의 아이디어였다는 기사를 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해당 기사는 단순한 대화 내용을 전한 것인데다가 출처가 불분명하고, 기사의 대화 내용을 보면 스티브 잡스도 "외부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은 마사(손 마사요시)가 처음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지금 여러 방면으로 생각 중이다."라고 했다고 하니 이미 애플도 내부에선 그런 식의 아이디어가 나와 있었다는게 된다. 게다가 iPhone 발표에선 iPhone OS 개발에만 수년을 투자했다고 하니 사실 손정의가 iPhone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낚이지 말자.[40][41] 다만, 손정의가 'iPhone for everybody'라는 정책을 펼쳐, 갈라파고스화가 심한 일본 휴대폰 시장의 iPhone 보급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맞다.
- 2024년 일본 정부와 소프트뱅크가 네이버에 라인야후 지분 매각을 압박하면서 한국에서는 손정의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2019년 라인과 Z홀딩스의 대등 합병을 네이버 측에 제안하고 성사시킨 것이 다름아닌 손정의였기 때문이다. 마이니치신문은 매각 논란이 불거지기 전이었던 24년 3월 아마리 아키라 자민당 의원이 손정의를 불러 '일본의 인프라는 일본에서 개발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자 손이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비화를 공개하였다.
日 라인야후 사태..손정의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 日 신문 보도
4.2.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주
진성 야구광이였던 인물답게 슈퍼마켓 체인 다이에가 운영하던 다이에 호크스를 인수하면서 2005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재탄생시켰고 팀은 일본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투자 능력을 자랑한다.[42]과거엔 2003년 월드 시리즈에서 플로리다 말린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다승왕 1회와 올스타 경력까지 가졌던 브래드 페니를 영입하여 야구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있다.
비싼 돈을 주고 외국인 선수를 데려왔는데 성적이 시원찮으면 계약기간 연봉 보장을 하더라도 방출크리를 시전하는 건 기본이다. 이범호의 경우에도 3년 계약이었는데 1년 부진하자 방출시켰는데 잔여 연봉은 모두 챙겨줬다고 한다.
이런 그의 기대에 보답하듯 2011년 11월 20일 2011년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우승했다.[43] 그리고 2014년 일본시리즈와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도 2번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공교롭게도, 2015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자 MVP는 바로 한국의 4번타자 이대호였다. 심지어, 트로이 닐 이후 19년만에 등장한 외국인 출신 MVP이기도 하다.
해 건너 2017년 일본시리즈에서도 상대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이기면서 우승하며 규슈의 왕자팀으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2018년 일본시리즈에서 일본시리즈에서 처음 만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승리를 거두며 2번째 일본시리즈 2연패를 완수했다. 다음해 2019년 일본시리즈에 다시 진출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스윕을 거두고 3-peat을 성공하며 팀을 2010년대 일본 최강팀으로 각인시켜버렸다.
한때 현대 유니콘스의 매각 당시 카더라 통신으로 현대 유니콘스가 농협-STX-KT에게 모두 매각을 거절당한 이후 손정의와 접촉한 적도 있으나, 당시 기업 매각건으로 정신이 없었던지라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혹시나 사실이었다면 롯데에 이어 한일 양국 프로야구 스포츠구단을 가진 기업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2018년 1월 13일 김성근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고문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재일 한국인 출신이라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 손 회장의 의향이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나 근거는 없다.
구단 인수 당시 오 사다하루 당시 감독에게 팀의 세계제일을 목표로 내걸었다. 일본제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 말을 들은 왕감독은 자신들이 지향해 온 목표가 상당히 작은 것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야구에 관한 것은 모두 맡긴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며 현장에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큰 돈을 투자하고 참견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세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규슈로 벌어 들인 돈은 규슈에서 사용하십시오"라고 언급한 적 있는데 돈을 위해 야구를 한다는 발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구단주다.
경기 직관 시 열정적으로 팀을 응원한다. 직접 깃발을 흔들거나 억울해 하거나 고함치기도 하며 아주 정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구단주다. 우승 축하 파티에서 선수들 사이에 껴서 샴페인 세례를 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승 기념 후쿠오카 카퍼레이드,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에도 항상 참석한다. 원로 야구인 노무라 카츠야는 "소프트뱅크의 MVP는 감독이 아니라 손정의 구단주입니다"라고 극찬하였다.
4.3. 코로나19 유행 당시 방역 물품 기부 시도와 철회
100만인이 쓸 수 있는 유전자 증폭 간이 검사(PCR)도구와 마스크 100만 개 기부 시도가 당시 일본 상당수 여론의 비난에 철회가 된 적이 있었다. 물론 후술되어있듯 일본의 병크.- 손정의 "100만명 무료 검사"…日 여론 황당한 비난에 철회
- 손정의 “코로나19 검사 100만명분 무료 제공” 비난 여론에 철회
- 손정의 “코로나19 검사 도구 일본에 기증” 정작 일본인은 “그만 둬”
- 뽐뿌루리웹
2020년 3월 2일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신종 코로나 상황이 걱정된다고 글을 올린 이후 11일 "신종 코로나에 불안을 갖는 사람들에게 간이 유전자 검사(PCR)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싶다"며 "일단 100만명에게 지원하는 방안 등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훈훈한 일화로 보이지만 황당하게도 일본사회에서는 손정의를 거세게 비난했다.
비판자들은 코로나 검사를 확대했다가 확진자 급증으로 공포감을 조성하고, 환자가 폭증하여 병원의 기능이 마비될 것이며 무료로 제공하게 되면 경증환자까지 의료기관에 몰려오는 등 의료 현장에 혼란을 초래한다(?). 코로나 검사로 수천명이 드러나면 당신이 다 돌봐줄 수 있겠느냐, 당신의 행동은 테러라는 황당한 주장들을 트위터에 써갈기며 손정의에 대해 비방을 일삼고 있다. 심지어 손정의에 대해 한국계임을 문제삼는 인종차별적인 혐한 발언을 하는 정신나간 모습까지 모였다.[44]
일본에서 이러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현지 여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후생노동성이 '왜 검사수를 늘리지 않느냐.'는 질의에 '검사자 수가 늘어나면 병원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의료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핑계를 댄 것이, 마침 가장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많이 한 한국 모델에 대한 반감과 맞아 떨어져 '한국처럼 검사자 수 많아지면 의료 붕괴가 올 수 있다!'는 식의 여론으로 변질된 것이다.[45][46]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반박의 내용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국가별 대응/아시아/일본 문서에 있다.
일본 사회의 움직임과 검사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일본의 여러 전문가들이 코로나 확진자 숫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코로나 검사에 소극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거센 비판에 결국 손정의는 기부 의사를 철회하겠다고 밝히면서 100만명분 간이검사 지원은 끝내 무산되었다.
이후 마스크 100만개 기부를 다시 제안했으나, 이마저도 사재기로 인한 국내외 혼란이 우려된다는 비판을 받으며 역시 취소되었다. 이와 비슷한 논리로 일본의 한 벤처기업이 만든 1,500엔짜리 염가판 검사 키트도 보급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0 도쿄 올림픽 개최가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해 검사 최소화 정책을 펴고 있으며 이때문에 수많은 감염자들이 서로 감염시키고 있는 상황으로 생각되지만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국민들이 동조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이후 손정의는 미국 뉴욕 주에 마스크 150만개를 기부했는데#, 이번에는 '왜 일본에 마스크를 기부하지 않았냐'며 일부 일본 안티들에게 비난받기도 했다.
4월 11일 중국 기업인 BYD와 협력하여 1개월에 마스크 3억개를 생산하여 원가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올림픽 연기 이후 급속도로 코로나 확진자 수가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해서인지 일본인들의 트위터 반응도 한달전과 비교하면 사뭇 달라진 상황. 중국 기업과 협업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댓글도 적지 않지만 확실히 진단 키트 제공을 발표했을 때보단 긍정적인 반응이 늘어났다. 심지어 극우들이 난리치는 일본 야후에서도 호의적인 댓글이 많아졌다.[B]이후 상황이 180도 바뀌어 의료 물품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 지자체들이 오히려 손정의에게 물품 지원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등 그야말로 코미디를 찍기도 했다.#
이후에도 유전자 증폭(PCR) 검사 결과를 팩스로 전달해 논란이 된 것 등을 거론하며 "부끄러워서 얘기가 안 된다"고 전하며, NTT가 총무성 고위 관료를 반복적으로 접대한 사실에 비판적으로 인터뷰 하였다.#
[1] 재일교포로서 쓰던 통명은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였으나 1974년부터는 본래의 한국 성인 손(孫)씨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2] [3] 25세 기(基) 항렬. 족보명은 손기의(孫基義). [4] 경제학/컴퓨터과학 복수 전공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경제학만 전공하고 컴퓨터과학은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이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아니다.[5] 孫泰藏. 겅호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회장이다. 2017년 현재는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사업을 하고 있다.[6] 大野優美.[7] 2024년 9월 포브스 기준.[8] 참고로 겅호 온라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 겸 아시안 그루브 주식회사 대표이사이자 사장인 손태장이 손정의의 막내동생이다.[9] 인공지능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오기 때문이다.[10] 동구 지역엔 손정의의 친인척들이 살고 있으며 인근의 도동에는 일직 손씨 집성촌도 형성되어 있다.[11] 1899년~1968년. 족보명 손종형(孫鍾亨).[12] 일본명 国本玉子(쿠니모토 타마코)[13] 출처: 손정의-인터넷 제국의 지배자.[14] 후에 그는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스타컴을 창업한다.[15] 그는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 요법'(만성간염을 급성간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내며 치료를 도모하는 방법)을 통해 바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간신히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16] 손정의는 굴욕감을 누르며 그들을 말렸지만, 결국에는 나갔다. 그리고 이 사원들이 차렸던 회사는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17] 아스키 출판사의 설립자로 빌 게이츠와 제휴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일본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였다. MS가 MS-DOS 이전 BASIC이 주력 상품일때 일본 시장을 개척하였는데, 당시 MS 매출의 60% 정도가 일본 시장에서 나왔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자서전에서도 그를 K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각별하게 대했지만, 이후 손정의에게 사업에서 밀리고 개인의 사치스러운 생활 등이 겹쳐 몰락하고 만다. 참고로 빌 게이츠는 손정의와도 친구다. 이후 니시 카즈히코는 사업을 접고 현재는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18] 지프데이비스는 당시 수많은 IT 관련 미디어를 생산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지프데이비스가 발간하는 잡지인 'PC위크'는 세계 IT 관련 종사자들의 필독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당시 광고 수익이 플레이보이나 포춘보다 많았을 정도였다. 빌게이츠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애독하는 책이라면서 지프데이비스가 출간하는 <PC WEEK>를 손정의에게 권유했다 한다. 이런 계기로 손정의는 이미 1990년에 'PC위크'의 일본 판권을 확보하기도 했었다.[19] 자기 자본이 없는 경우 차입금을 동원해 기업을 인수하는 M&A 방식으로, 차입금 상환은 인수한 자산을 일부 매각하거나 이를 담보로 충당한다. 1995년 당시 소프트뱅크의 연매출은 600억 엔이 조금 넘었는데, 일본의 주요 거래처 은행을 비롯한 그 어떤 은행들도 이 공격적인 M&A 계획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융자를 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모건 스탠리로 간 것이었다. 다만 손정의가 단순히 M&A를 하고 싶다고 해서 즉흥적으로 M&A를 하는 것이 아니라 M&A를 할 때마다 소프트뱅크 내에서 온갖 데이터를 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계산한 뒤에 M&A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20] 근데 막상 소프트뱅크가 큰걸 보면 직접 뭔가 사업을 벌인 것도 있지만, 그냥 투자로 돈을 번 경우도 제법 많았다. 차별받는 출신으로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투자가적 능력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 경제학과이기도 하고, 과거 차별받던 유대인들도 투자가적 재능을 살려 거부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21] 정확히 말하자면 피터 틸에 가까운 사람이다. 스스로 이해 가능하며 소프트뱅크의 자산을 통해 투자하는 것은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를 통해 투자하는 것과 똑같지만 미래에 정말 이익이 날지 모르는 IT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은 피터 틸이랑 같다.[22] 사실 워런 버핏, 피터 틸, 손정의와 여러 투자고수들의 특징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이해할 수 있으며 향후 몇 년간 안정적인 이익과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느냐’’’이다.[23] 정확히는 야후 사무실에서 피자와 콜라를 먹었다고.[24] 사실 슈퍼셀 지분은 더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손정의가 현재 미국 모바일 시장을 목표로 인수한 스프린트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판매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현재로는 ARM Holdings 인수를 위한 자금 확보라는 것이 정설.[25] 참고로 전세계 역사상 손정의보다 심한 자산 증발폭을 경험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은 일년만에 세계 갑부 7위에서 100위권으로 떨어진 브라질의 에이케 바티스타 EBX 그룹 회장. 이쪽은 자산 감소폭이 무려 99.5%다. 다만 손정의와 달리 바티스타는 정수기만한 유전을 한강만하다고 사기치다가 자기 회사까지 공중분해당하고 망한 케이스라 재기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 참고로 이전 서술에서는 바티스타가 손정의와 더불어 닷컴 버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케이스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바티스타의 몰락은 2014년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에 터진 닷컴 버블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26] 사실 당시 버블 시기에 손정의의 소프트뱅크 회사 주식에 투자했다면 2020년대인 지금도 본전을 회복하지 못한다.[27] 실제로 우버는 동남아시아 1위 업체인 그랩에 점유율을 매각하고 해당 지역에서 철수했는데, 이는 손정의가 뒤에서 주도한 것이다.[28] 2022년 6월에는 무려 11달러까지 떨어졌었다. 초기에 50달러 근처까지 놀던 시절을 생각하면 엄청난 손해다.[29] 다만 이 말을 손정의가 처음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손정의가 해당 트윗을 하기 약 1년 전쯤인 2012년 3월에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차례 유행했었다고. '1' '2'[30] https://www.yna.co.kr/view/AKR20110530142800017 http://www.koreatimes.co.kr/www/news/tech/2017/11/133_228978.html[31] 어릴 적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동네 아이들에게 돌을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32] 한국 한자음 뿐만 아니라 일본 한자음 음독인 한음과 오음으로도 '손'이라고 읽는다.[33] 오노 유미, 마유미라는 이야기도 있다.[34] 정확히는 '손씨는 일본인의 씨로써 걸맞지 않다(相応しくない)'라는 이유.[35] 다만 현재는 법률이 바뀌어서 일본식 씨로 바꾸지 않고도 귀화가 가능하다.[36] 과거에는 무조건 아내가 남편의 씨를 따라야 했으나, 현재는 남편이나 아내의 씨 둘 중 아무거나 원하는 성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물론 현재도 사회 분위기상 아내가 남편 씨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긴 하지만. 데릴사위와 같이 아내 집안의 자손을 이어야 하는 경우는 아내의 씨를 따른다. 아내가 남편의 씨를 따라야 했던 과거에는 이 경우 장인이 사위를 입양해서 자신의 씨를 물려주는 서양자 제도가 존재하기도 했다. 일본은 의붓남매간의 혼인이 가능하기 때문. 물론 일본인끼리의 결혼은 씨를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는 것이 법률로 정해져 있지만, 일본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경우는 성씨를 바꾸는 건 강제가 아닌 자유다. 단, 한번 바꾸면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간단히 되돌릴 수는 없다. 대신 소정의 절차를 거쳐서 신분증을 비롯한 각종 공식적인 서류에 결혼 전의 씨를 표기할 수 있다.[37] 일본인끼리의 결혼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라 법률로 정해져 있는 강제사항이다.[38] 손정의와 빌 게이츠는 친구이며 함께 논의하기 위해 데려갔다고 한다.[39] 6분부터.[40] 그 이전에도 세계 최초의 스마트폰은 삼성 MITS이고, 앱스토어 모델의 수익 구조도 삼성의 모 부회장이 먼저 생각해두었던 것인데 구글과 애플에게 뺏겼다는 식의 기사가 올라와 삼성빠들을 감동먹인 적이 있었다. 저걸 지금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41] 보통 대중적인 스마트폰의 시작이라 하면 노키아의 심비안과 RIM의 블랙베리 둘로 뽑는다. 이후 블랙베리 등 기존 스마트폰의 부적절한 UI를 개선하여 현대적인 스마트폰을 완성한것이 아이폰. 스티브잡스는 아이폰의 첫 프레젠테이션에서 '아이팟', '전화기', '인터넷'을 하나의 기기로 합친 상품이라고 주장했는데, 피처폰을 사용하던 시기에도 휴대전화의 작은 용량에 음악 파일을 넣어서 재생은 가능했기에 이미 순수 MP3 플레이어에서 통합기기로 세대교체가 되는 중이었다. 즉 잡스가 말한 '아이팟'과 '전화기' 의 결합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아이폰의 진정한 혁신은 '터치스크린' 을 통한 멀티터치 UI를 통해 사용하기 정말 편리한 IT기기를 인류에게 소개하고 성공적으로 보급한 것이며,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애플이나 특히 손정의가 착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42] 후쿠오카 돔을 통째로 꿀꺽하면서 한때 구단 수익 자체가 흑자로 변했었는데 그 수익으로 투자하던 규모가 돈지랄 전성기 시절 거인군을 능가할 정도였다.[43] 하지만 2011년 아시아시리즈 결승전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상대팀이 그의 본적 연고팀인 대구 삼성 라이온즈였다는 것도 개그 포인트.[44] 그냥 한국계도 아니고 가뜩이나 손정의 본적지가 신천지 집단 감염 사건이 터진 대구광역시라서 더더욱 씹혔다. 또 손 회장이 주장한건 당시 먼저 코로나 유행 사태가 번진 한국에서 시행하던 적극적인 검사 조치와 유사한 행보였기 때문에 이에 반감을 가지고 디스하는 혐한도 있었다.[45] 이는 방송에서 부추긴 탓도 크다. 일본에는 시사 프로그램과 예능의 중간 형태인 '와이도나쇼'라는 프로그램이 많은데, 이 와이도나쇼에 몇몇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출연하여 '검사를 많이 하면 의료붕괴를 초래한다'라고 주장하였고, 소위 전문가(대표적으로 무라나카 리코)가 TV에서 그런 말을 하니 많은 일본인들은 정말 그렇다고 믿게 된 것이었다.[46] 사실 유튜브에 자막을 달아 올라오는 와이도나쇼를 보면 진짜 전문가들은 정론을 말하는 경우가 많고(물론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헛소리하는 사람도 있다) 비전문가인 연예인 패널들이 자기들 생각을 말하는데, 연예인이다 보니 언변이 좋고 사회자도 전문가의 의견을 소개하기보다는 말빨이 좋은 패널들에게 힘을 실어주다보니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비전문가들이 더 떠들어대는 꼴이 된 것이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젊은 층들은 TV 시청보다는 유튜브나 일본 국민 SNS인 트위터를 더 많이 하는데, 보면 이런 와이도나쇼 행태를 욕하는 댓글도 많다.[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