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손석희
1. 어릴 때부터 학창시절까지
1956년, 서울토박이 집안의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하나 있으며,[1] 밑으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6.25 전쟁 참전으로 인해 무공훈장을 2개나 받은 경력이 있다. 손석희가 6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전역하여 여러 사업을 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했고, 때문에 손석희 가족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손석희는 취직하기 전까지 30차례나 이사를 다녔고, 집이 없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손석희 아버지가 양수기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집안에 있던 돈을 다 털고 사들여 놓은 것을 경기도 연천군 전곡 어딘가에 풀어놓았다가 큰물이 져 몽땅 떠내려가고 말았다. 손석희는 "이후 우리 식구들의 사건은 그 사건처럼 극적인 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서울 중구 필동의 양철담장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상당히 고집이 세고 터프했다고 한다. 국민학교 2학년의 성적표에 '이 학생은 고집이 똥고집'이라고 적혔다고 한다. 어릴 때는 근처 퇴계로 고아원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는데 딱히 비슷하게 어려운 처지여서가 아닌 누구 하나 특별히 잘 살거나 못 사는 거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러다 3학년 때 부임한 담임교사가 도시락 반찬을 싸오지 않고 아이들의 반찬을 빼앗아 먹더니 한술 더 떠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둘러보고 "같이 먹자"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곧 학급은 선생님 책상에 늘 불려가는 아이들, 가끔 불려 나가는 아이들, 전혀 불려 나가지 못하는 아이들로 나뉘었고, 당연히 손석희는 마지막이었다.[2] 본인은 그때 비로소 가난을 알았다고 한다.
국민학생 시절 심한 도벽이 있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것이 도벽의 대상이었고, 무엇이든 훔치지 않고는 못 배겼다고 한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시작해서 이웃집의 물건들을 훔쳤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수차례 회초리를 맞아도 소용없었고, 어머니가 울면서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급기야는 아버지에게 피멍이 들도록 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손석희의 자전격 수필집 풀종다리의 노래에 나와있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 성북구로 이사를 갔고, 조용했던 아이들 분위기에 맞춰서 덩달아 조용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6학년 때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천장에서 작은 흙덩이가 떨어졌다. 대충 지은 집에서 빗물 새는 것은 흔한 일이어서 식구 모두 신경 쓰지 않다가 떨어지는 흙이 점점 많아지자 살림을 마루로 옮기고 옷을 챙겨 급히 집을 나오니 곧 천장이 무너졌다고 한다.[3]
국민학교 졸업 후에 서라벌중학교에 입학했다. 손석희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그해(1969년)부터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어 중학교 평준화 1세대가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전교생이 시험을 쳐서 우열반을 나눴는데, 우반 C반에도 떨어져 열반에 속하게 되어 저녁 보충수업을 받지 않고 노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대충 포기하는 학생이 된 셈이었다"고 손석희 본인 스스로 말한 바 있다. 특히 물상을 못했는데, 관성의 법칙이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한때 아버지의 사업이 잘 돼서 제법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파트가 드물던 당시 서울에서 제법 좋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당시 그 아파트에는 유명 배우들도 여럿 살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 MBC의 인기 여배우였던 김영애도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종종 마주쳤다고 한다. 또 고교 시절에는 같은 동네에 살던 여배우 여운계와 탁구 복식조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 걷는 것을 좋아해 6~7정거장 거리를 꼬박꼬박 걸어다녔다고 한다.
고등학교 입시에 전기에 낙방하고 후기 지망으로 당시 종로구 계동에 있던 휘문고등학교(67회)에 들어갔다. 참고로 당시 휘문고는 서울 종로권 고등학교 중에서는 하위권이었다.[4] 휘문고 입학식 직후 선배들의 눈에 띄어서 방송반원이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방송실에 들어갔는데, 방송실 뒤쪽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학생이 송승환이었다고 한다.[5]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이때 경험은 아나운서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식구들한테 "넌 조울증 기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휘문고 1학년 때 아버지가 부도를 내 중학교 때 여유로워졌던 집은 다시 어려워졌고, 산비탈에 있는 방 2칸에 부엌 딸린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학교까지 걸어다니며 차비를 모아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축과 레코드 2장을 샀고[6] 결혼하고 새 전축을 살 때까지 15년을 내리 그 전축과 보냈다고 한다.
수험생 시절 특히 수학을 못했는지 2015년 3월 16일 JTBC 뉴스룸 2부 팩트 체크 시간에 자신이 사실 수포자였다고 말했다.[7] 그 이전에도 수학을 못했다고 몇 차례 말한 적이 있었다.
재수를 해서 1976년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국민대에 합격만 해놓고 다음해와 다다음해 사수까지 하며 2번 더 입시를 봤지만 모두 실패해 그냥 국민대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8] 손석희는 자신의 20대 시절을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시기로 규정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이 주 이유였다고 밝혔다. # 손석희는 자신이 20대 시절 빠졌던 허무주의에 대해 나이답지 않았다고 스스로 자평했다. 손석희는 노조 활동을 하게 된 이유를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허무주의를 끝장내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1979년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좀 편해보겠다고' 타자까지 배워 입대했다고 한다. 입대 후 훈련소에서 본인이 원하던 대로 타자 주특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타자 주특기 후반기교육을 받던 시절 여군 피우진[9]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손석희가 타자 주특기 교육을 받던 훈련소는 여군 부사관 후보생들을 훈련하는 곳이었는데, 이 훈련부대 중대장 중 한 명이 피우진이었다고 한다. 피우진 본인도 군 시절 이야기를 쓴 저서인 <여군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훈련병 시절의 손석희에 대해 짧게 회고하였다.
후반기교육 후 부산에 있던[10] 육군군수사령부 본부근무대 행정병으로 자대배치되었다.
군 복무 중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2015년 3월 12일 서강대학교 개강 미사 특강에서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군 복무 시절 성당에 가면 좀 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가보니 미사 시간에 가슴도 치고, 무릎도 꿇고, 계속 서 있고 해서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국민대학교 시절에는 디자이너 장광효[11]와 동문이었는데, 장광효의 말에 따르면 위 아래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별명이 교복이었다고 한다.
2015년 국민대학교에서 모교의 명예를 드높인 공로로 '자랑스런 국민인상'을 수여했다.
취업준비생 시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야구연습장을 많이 다녔고, 오락실에서 갤러그 150만 점까지 기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호황기에 진입하고 있던 당시에는 그리고 대학생의 수가 적었던 당시에는 대학교 4학년 때 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취준생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다.
2. MBC 입사
1984년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MBC에 입사하기 전에는 KBS와 조선일보 판매국에서 일한 적이 있었지만 금방 그만뒀다. 조선일보 판매국에서 일하면서 아나운서 시험 준비를 했던 듯하다. 친구들이 방송반 경력도 있고 어울리니 시험 보라고 권유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어쨌거나 아나운서가 된 이후로 MBC에서 빠른 속도로 아나운서로 입지를 다져서 입사 2년 만에 마감뉴스와 아침 뉴스의 진행을 맡을 정도였지만 손석희 본인은 기자를 하고 싶어해 회사에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1986년 보도국으로 발령나 기자가 되었다.[12] 기자 시절 서울시청 출입 기자로 활동했다.[13] 그러나 기자 생활 동안 특종을 전혀 잡지 못해 기자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데 실패했고, 결국 1년 만에 아나운서로 재발령되었다고 한다.[14] 당시 높으신 사모님들께서 손석희를 뉴스에 복귀시키라는 전화와 압력이 하도 방송사에 빗발쳐서 결국 윗선에서 손석희를 다시 아나운서로 발령냈다고 한다.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하여 1987년 2월에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가 되었다.[15][16]
다만, 아나운서 방송 초기 당시에는 MBC가 명목상으로 공영방송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관영방송이었던 관계로 당연히[17] 땡전뉴스를 진행했다.[18] 주말 뉴스를 맡았기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보도를 할 일은 많지 않았지만 주말에 대통령이 불시에 전방부대를 시찰한 것이나 국경일 경축사 등의 뉴스를 땡전뉴스 형식으로 보도했다.[19] 평화의 댐 모금방송도 손석희가 MC를 맡아 진행했다. 손석희 본인은 "어용방송을 진행했을 때 자괴감이 들었다"고 하며, 훗날 방송민주화 운동 및 파업에 뛰어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거나 손석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6.10 항쟁,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13대 대선, 13대 총선, 1988 서울올림픽, 5공 청문회가 펼쳐지는 격동의 시기 동안 1989년 10월까지 주말 MBC 뉴스데스크와 MBC 뉴스센터[20] 앵커직을 맡는다. 이때가 1988 서울올림픽과도 겹쳤던 시기이기 때문에 20년 뉴스 보기를 통해 당시 올림픽이 진행되었을 때 날짜를 잘 검색해 보면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손석희 앵커가 올림픽 특집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하간 1989년까지 뉴스데스크 앵커직을 맡았다가 1990년에는 저녁 뉴스 앵커를 맡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는 아침 뉴스 진행을 맡게 된다.(MBC 뉴스와이드, MBC 뉴스투데이, MBC뉴스 굿모닝코리아, MBC 아침뉴스 2000)
아나운서 생활 때 만난 6살 연하의 아나운서 신현숙[21]과 1년 7개월 열애 끝에 1987년에 결혼했다. 참고로 손석희-신현숙 이후 MBC 아나운서국에서는 문지애-전종환 전까지 2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내 커플이 나오지 않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 바람으로 사회 분위기가 급변하던 1988년 8월, MBC 노동조합이 정부의 방송 관련 법에 맞서 쟁위 발생 신고를 하고 조합원 모두가 가슴에 공정방송 리본을 달기로 하지만 패용자가 모두 빼앗긴다. 주말 뉴스데스크 진행자였던 그는 갈등하다가 리본을 재킷 겉옷이 아닌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에 달았다. 손석희는 이것을 '기억하는 한, 가장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자괴심에 시달리다가 다음 날인 8월 21일엔 제대로 달고 나갔다. 해당 날짜의 뉴스데스크로, 그의 양복에 '공정방송'이라고 쓰인 리본이 달린 건을 볼 수 있다.
아나운서 아니면 투사 이미지였던 손석희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 계기가 90년대 초 퀴즈 아카데미의 진행자를 맡게되면서 부터인데, 이때 연출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매형인 주철환 PD이다.
2.1. 기자 시절 주요 보도 뉴스
-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 지강헌 탈주사건 진압 뉴스
- 내귀에 도청장치 방송사고 당시 보도내용[22]
그 외에도 앵커 시절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공판을 모두 중계한 기록을 갖고 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 방송 때 브리지트 바르도와 인터뷰한 전력이 있으나, 시선집중 7주년 기념행사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인터뷰 대상을 다그친 사례로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3. MBC 노동조합 활동
이후 1992년 가을에는 MBC 노동조합 활동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게 된다.
MBC 노동조합 파업 당시의 사진이다. 사실, 손석희의 사진을 찾아보면 웃는 사진이 별로 없긴 하다. 포승줄에 묶여서 웃고 있는 사진은 네이버에서 '해맑은 손석희' 로 검색하면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기도 하다. 얼굴이 워낙에 젊어보여서 실감하기가 힘들지만, 그 당시 손석희의 나이는 만 36세였다. 그리고, 파업 당시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손석희는 노동조합 파업 당시를 회상하며, "시청자가, 시민이 모두 우리를 지지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는 "상식적 판단에서 옳은 일이라면 바꾸지 말자.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원칙에서 흔들리지 말고 나가자." 라는 말을 남겨서 눈길을 끌었다.#
당시 12월 대선을 앞두고 봄부터 여당에게 비판적인 PD수첩과 뉴스 보도를 금지하고 노조간부들을 지방 한직으로 발령내는 등의 조치가 잇따르자, 즉시 노조가 반발을 하면서 파업이 일어났다. 결국 9월부터 52일 간 진행된 파업은 전투경찰의 투입으로 끝났다. 그는 이때 주동자로 몰려 구속, 동료 몇 명과 함께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손석희는 노조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동자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파업 참가자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본보기로 찍혔던 사례이다.
여담으로, 이때 이미 미남으로 유명해서 관련 보도 중에는 "누가 이처럼 선하게 생긴 미청년을 파업 현장으로 내몰았냐?" 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당시 여성 앵커의 상징이었던 백지연도 다른 노조 간부들과 비슷한 수준의 중징계를 받았다.
훗날, 김주하 앵커는 2011년 출간한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에서 손석희 앵커와 일화를 공개했는데 "존경해 마지않던 손석희 앵커와 파트너가 된다니… 공정방송을 위해 저항하다 수갑을 찬 채 차에 오르고,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흑백사진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분과 뉴스를 한다니!"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여기서 수갑을 찼던 것은 역시 노동조합 파업 사건 때문이었다.
4. 이후
그러다가 1997년, 불혹을 넘긴 나이에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국제 민간단체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사측에서 1년 갔다 오라는 것을 "쉴 바에야 확실히 쉬자"고 2년을 고집했는데, 공부만 하다 왔다고 한다. 유학을 위해 쳐야 하는 토플 공부부터 시작해,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에서 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미국 유학 때 찍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손석희의 미국탐험' 으로, 그는 이 프로그램을 언급하며 '방송 역사에 길이 남을'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만큼 고생하기도 했고, 애착이 간다고 한다.귀국하여 1999년 아침뉴스 2000(現 뉴스투데이)를 통해 방송에 복귀했고[23], 2000년 MBC 라디오의 아침 시사 프로그램인 시선집중의 진행자가 된다. 시선집중은 지상파와 인터넷에 밀리던 라디오의 시사보도와 의제설정 역할을 되살린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아침 6시 15분부터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서 초창기에는 섭외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언젠가부터는 정치인이나 유력인사들이 먼저 연락해 온다고 한다. 참고로 동명이인 프로게이머도 준프로 시절에 여기에 출연했던 적이 있다.
여담으로 시선집중을 진행하던 2001년에는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을 비난하여 논란이 된 브리지트 바르도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바르도의 환상적인 궤변은 손석희에게 강한 여운을 남겼고(...), 훗날 시선집중 7주년 기념 행사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인터뷰 대상을 다그친 사례로 바르도와의 인터뷰를 꼽으면서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만나본 적이 없다." 라고 술회했다. 자세한 내용은 브리지트 바르도 개고기 발언 논란 문서 참고. 이 일화는 어린이용 만화 손석희 위인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2002년 유시민의 뒤를 이어서 100분 토론의 3대 진행자[24]가 되었다. 2009년 11월 19일 10주년 방송 때까지 진행한 역대 최장수 진행자였으나 결국 10주년 방송이후로 하차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MBC 측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명했으나 MBC가 그리 돈에 쪼들리는 방송국도 아니고 7년이나 하던 100분 토론의 간판이나 다름없던 인물을 갑자기 치운다는 건 의아할 수밖에 없고,[25] 이에 대해 MBC의 후배인 최승호 PD[26]는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서 "방송문화진흥회가 극우인사들로 점령된 뒤 손석희 아나운서가 100분 토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라고 소회하였다.[27]
목요일이면 밤에 100분 토론을 진행하고 숙직실에서 쪽잠을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시선집중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생활을 몇 년 동안 했다고 한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MBC 아나운서 국장으로 재직했으며, 2006년 MBC를 퇴사하여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로 옮겼다.[28] 석사 학위 소지자인 데다가 논문 실적이 사실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4년제 대학교 전임 교수로 임용된 것에 대해서 명백한 특혜라는 논란이 있었다. 논문 실적 없이 실무와 사회 활동 경력만으로 뽑는 겸임 교수직이 있고 손석희도 겸임교수직으로 연세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했다. 하지만 시간강사나 다를 바 없는 겸임교수와 달리 전임교원인 정년트랙 교수 채용은 전적으로 연구실적으로 평가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채용 비리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손석희의 성신여대 임용과 관련하여 일반인들은 교수 채용 프로세스를 모르기 때문에 실무 경력이 풍부하기에 교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박사 학위도 논문 실적도 없는 무자격자를 전임 교수로 임용한 것은 채용 비리이며, 당시 교수 임용을 목표로 공부하던 박사 과정 대학원생들과 지방대의 젊은 교수들 사이에서 상당한 분노와 박탈감을 가져다 주었던 일이다. 인서울 대학교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하다. 몇십명 정도 밖에 안되는 자리인데다가 누군가 정년 퇴임을 해야 공석이 생긴다.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남들보다 뛰어난 연구논문실적을 내기 위해 수년간 밤잠도 제대로 못자며 노력하는 젊은 학자들이 무척 많다. 그럼에도 대학교 전임교수의 문은 무척 좁아서 결국 교수에 임용되지 못하고 낭인이 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2011년 8월 24일에 치러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물러나고 보궐선거가 예정된 상황에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시장후보 출마를 묻는 질문에 '다 나가면 소는 누가 키우겠나'라고 소 드립을 날렸다.[29]
이 선거를 앞두고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나경원 의원과 토론을 하던 도중, 손석희가 나경원 의원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한 검증성 질문을 계속 하자, 나경원 의원이 "정책이나 공약이나 이런 건 안 물어보시나요? 저는 사실 손석희 선생님의 인터뷰를 거의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야권 후보는 많이 하셨더라고요. 저희가 예전에 보니까 그래서…"라고 불만을 토로해 설전을 벌인 일이 있다. 다만, 그때 당시 손석희는 아직 박원순 후보와 토론을 하지 않았고 그 당시에 <시선집중> 인터뷰는 가능하면 정책 위주로 가려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네거티브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후보 검증이라고 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조금 더 질문이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나경원 의원이 "보통 언론에서 형평을 기한다는 이유로 좀 수준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자꾸 꺼낸다"고 말하자 손석희는 "일반적인 언론이 그렇게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을 말씀하신 건가요?"라는 대답을 했고, 곧 주제가 바뀌면서 토론은 다시 좋게 진행되었다.
2012년 2월, 진중권에게 시선집중 제작진이 출연을 요청하자 진중권 측이 거부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새누리당 영입설이 나왔던 적이 있었지만 본인은 거절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손석희가 가지고 있는 MBC라는 조직, 라디오 방송에서의 존재감은 당시에 엄청났다. 그렇기에 MBC 내부에서 김재철 MBC 사장이 부임한 이후 자르고 싶은 라디오 진행자 리스트에 배철수와 함께 높은 순위에 랭크되어 있었지만 건드리기에는 너무 타격이 커서 인사 칼바람이 피해갔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손석희가 떠난 이후 공석이 된 시선집중은 이재용 아나운서가 후임으로 들어갔지만 그때 임시인지 전담인지 확실히 나오지 않아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는 와중에 이전 손석희의 땜빵을 모두 이재용 아나운서가 매웠던 만큼 전담일 거라는 의견이 높았다. 그러나 결국 얼마 안 가 김창옥 아나운서로 바뀌었고, 김창옥 아나운서가 이를 이어받았지만 하필 그 당시 대전 MBC에서 일이 제대로 터지면서[30] 그 수습으로 김창옥 아나운서가 사장직을 맡기로 하면서 다시 공석이 되자 다시 이재용이 맡았지만 이것도 임시였다. 결국 신동호 아나운서가 정식 2대 진행자로 들어왔지만 4년이 지난 2017년에 하차했고, 이후 몇 명의 후임들이 1년을 못 넘기고 계속 자리를 바꾸다가 2019년 7월 1일부터 시사평론가 김종배가 마이크를 잡아 정식 3대 진행자가 되었다.
5. JTBC행
손석희 취임 이전의 JTBC.[31]손석희 취임 이후.
언론사 신뢰도 1위
미디어워드 10대 미디어
한국기자상 대상
채널평가 1위
방송채널 평가 1위
손석희 사장이 거기 처음 지휘봉을 잡았을 때 특히 MBC에 있던 고참 간부 기자들이 뒤에서 ‘아나운서만 해보고 토론 사회자와 라디오 진행자만 해 봐서 조직을 지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기자들처럼 보도국에서 상하 위계를 배운 것도 아닌데 저런 사람이 무슨 리더십이 있겠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봤고[32], ‘취재를 안 해봤는데[33] 뭘 알겠냐’라는 식의 퇴행적인 자존심을 내세우는 선배들 얘기도 꽤 접했는데.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나타난 거죠.
-박성호 MBC 기자 #
-박성호 MBC 기자 #
2013년 5월 9일, 종합편성채널 JTBC로 옮긴다는 보도가 나왔다. JTBC에서 보도 담당사장직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5월 10일 시선집중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하차했다. 마지막 인사말을 전하면서 목소리가 좀 잠기고 억양도 살짝 떨리는 등, 심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팬들은 손석희의 말처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도 지금처럼 정론의 길을 걷기를 바란다면서 성원을 보냈지만, 친노 지지자들은 그가 중앙일보 계열사 종편의 간부로 간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높았다. 손석희의 매형이 JTBC의 대 PD인 주철환인지라 매형의 영향력으로 낙하산 인사로 들어간게 아닌가하는 기사도 나왔었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이후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선 중앙일보와는 논조가 다를 것이라고 말했으며[34]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봐도 원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의사표명을 드러내는데, JTBC 자체도 원래 삼성만 빼면 은근히 정치적 중립에 가까웠던 만큼 손석희 또한 삼성을 비판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었으나 들어가고 얼마 되지도 않아 대놓고 비판했다.
이때 첫 출근에 관한 웃긴 일화가 있는데, JTBC에서 지정한 손석희의 출근시간은 10시였던 만큼 기자들도 10시에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손석희는 이전 MBC시절처럼 이미 1시간 전인 9시에 출근한 뒤였기 때문에 뒤늦게 다시 내려와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기자들을 위해 두번의 출근을 한뒤, 사내 홍보팀의 요청으로 한 번 더 찍었다. 첫 출근만 3번 한 셈.
손석희의 JTBC 직책은 보도담당 사장(2013년 5월~2018년 11월)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초기에는 인사권은 없었고 다만 인사 담당자에게 의견을 내는 수준이었다 한다. 이따금씩 뉴스룸 대신 진행되는 특집토론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는 보도 부문의 편성에 대해서도 별도의 권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5]
2013년 9월 16일부터 본인이 직접 'JTBC 뉴스 9' 진행을 담당했다.
JTBC 뉴스 9에서의 첫 오프닝.
5.1. 국정원 댓글 사건과 편파보도 논란
2013년,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거의 실시간 중계 수준이었는데, 이 사건에 대해 JTBC 뉴스는 지상파 3사보다 압도적인 보도 횟수를 나타냈다. 이 사건은 손석희와 JTBC 뉴스 9가 친노 지지자들의 엄청난 환호와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편파보도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친노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비호에 힘입어 넘어가게 되었다.2013년말 통진당 해산 사건과 관련하여 김재연 통진당 대변인을 직접 뉴스9 스튜디오에 초청하여 장시간에 걸쳐 보도하는 등 통진당 해산 반대측 인사들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해산 반대 쪽 인사들만 인터뷰하고 해산 찬성 측 의견에 대한 인터뷰는 전무했다. 이에 편파보도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이런 문제는 손석희가 jtbc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주요 이슈마다 수없이 반복되었으나 그럴수록 좌파 성향 지지자들이 결집하면서 jtbc의 시청률을 계속 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2013년 12월 19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는 손석희가 진행하는 'JTBC 뉴스 9'에 편파보도로 제재조치를 내렸다. 방통위는 사건과 관련하여 해산 반대 측 의견을 가진 인사들의 인터뷰만 집중보도하여 방송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훼손했다고 징계 사유를 밝혔다. #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당, 통진당 지지자들은 오히려 편파보도 판정을 받은 jtbc를 두둔했다. 그들은 지방자치단체장을 종북이라고 발언을 했던 정미홍 전 아나운서가 출연한 TV조선 뉴스쇼 '판'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징계로 넘어갔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손석희를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야권 지지자들은 손석희와 JTBC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며 'JTBC를 보자'는 운동을 벌였다. # 이후 대부분의 야권-진보-좌파 성향 지지자들이 JTBC를 적극적으로 시청하면서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5.2. 세월호 참사 보도
2014년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참사를 집중 보도하며 언론인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36]2014년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세월호 참사 보도를 위해 전라남도 진도군 팽목항에서 JTBC 뉴스 9을 현지진행했다. 따로 마련한 세트나 특별한 의상, 메이크업도 없이 현장으로 나와서 직접 보도를 하며[37] 실종자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뉴스[38]로 호평을 받았다. 이를 통해 국민적인 관심과 신뢰를 이끌어내 어지간한 지상파 방송에 근접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39]
2014년 9월 22일 JTBC 뉴스 9이 JTBC 뉴스룸으로 개편되었다.
훗날 알려진 바에 따르면 2013년 손석희가 jtbc에 영입될 당시 그룹 수뇌부에 뉴스룸(당시 뉴스 9) 시청률 3% 달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손석희 영입 후 뉴스 9 시청률이 1~2%대에서 2%대로 올라섰으나 3%선을 넘기지 못해 그룹 수뇌부도 손석희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 보도를 계기로 뉴스 9 시청률이 4%를 돌파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룹 수뇌부도 손석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5.3. 박근혜-최순실 사태
2016년 10월 24일,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폭로하는 보도를 진행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JTBC 뉴스룸/주요 보도 참조.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치면서 JTBC 뉴스룸 시청률은 가파르게 상승해 10%를 돌파하게 되었다.
2018년 11월 20일부로 JTBC 보도담당 사장에서 대표이사로 승진 임명되었다.[40] 이와 더불어 손 사장의 종전 직책인 '보도담당 사장'직은 폐지되었다.
5.4. 뉴스룸 하차
하지만 2019년 1월 김웅 기자 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게다가 김웅 기자를 회유하기 위해 손석희가 JTBC 입사를 제안한 사실까지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이후 2017년 광명에서 견인차와 접촉교통사고 후 도주 행각[41] 등이 추가로 밝혀지고 이에 대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손석희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크게 크게 실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손석희는 기나긴 전쟁이 될 것이라 표현한 소송전에 돌입하면서 이전에 비해 뉴스 진행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예전처럼 심도 깊은 탐사 뉴스가 현격하게 줄어드는 등 방송의 퀄리티가 떨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조국 사태 때 조국 측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특히 손석희가 정경심이 페북에 올린 글을 두고 "피의자 신분인 법무부 장관의 부인이 직접 여론전에 뛰어드는 것은, 이것이 적절하느냐 하는 지적도 물론 나오고는 있다"고 멘트한 것을 두고 특히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커다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최순실 사태 이후 한때 10%를 넘어섰던 JTBC 뉴스룸의 시청률은 크게 떨어져 조국 사태 이후 2%대까지 떨어졌으며, 최순실 사태 때 44%에 달했던 JTBC 뉴스룸 선호도 역시 급락하여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2019년 9월, 16%로 크게 떨어졌다.
결국 2019년 12월 23일, 2020년 1월부로 뉴스룸 메인앵커에서 전면 하차한다고 공식 발표되었다. # 이후 jtbc 보도국 기자회 등 일각에서 손석희 본인과의 협의 없는 그룹측의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손석희 본인이 이를 부인했다. 다만 손석희 본인의 언급을 보면 그룹 측이 하차를 요구했고 손석희가 이에 동의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뉴스룸에서 하차한 후에도 대표이사 직함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도되었다. 뉴스룸 앵커 후임은 서복현 JTBC 정치팀 기자로 정해졌다.
5.5. 뉴스룸 하차 이후
2020년 3월 조주빈의 협박에 응해 수천만원의 돈을 건넨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에서는 피해자였지만, 또다시 충격을 주었다.2020년 11월 중앙그룹 인사에서 JTBC · JTBC스튜디오 총괄사장에 임명되었다.
2021년 3월, JTBC는 손석희 사장을 JTBC 등기이사 및 대표이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JTBC · JTBC스튜디오 총괄사장직은 계속 수행한다. # #
2021년 10월, 중앙그룹은 손석희 JTBC · JTBC스튜디오 총괄사장을 JTBC 순회특파원(사장급)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
2021년 11월 18일, 출국하기 전 친정인 MBC 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서 최근 출간한 책인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6. JTBC 퇴사
2023년 9월 순회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JTBC를 10년만에 떠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0월 13일 사표가 공식적으로 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퇴사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고민중이라고 밝혔다. # #2024년 일본 리츠메이칸대학 산업사회학부 미디어 전공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다시 강단으로 나섰다. # 이후 손석희의 질문와 라디오 특별 DJ를 진행하면서 잠시 MBC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1] 누나는 손석희의 주선으로 손석희의 직장동료인 주철환 MBC PD와 결혼했다. 강릉원주대학교 교직과정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2] 가끔 독신 남교사들이 이런 짓을 했다. 이 시대의 대부분 성인 남성은 라면 말고는 달걀 프라이도 제대로 못하는 시기였다(라면도 못 끓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며 남자가 집안일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안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굉장히 이상하게 보고 천시하는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즉, 자기 손으로 반찬 만들기는 싫으니까, 애들이랑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이런 짓을 했던 것이다. 뭐 이런 인간 쓰레기가 교사를 할까 싶겠지만 이 시기에는 교사들의 권위주의가 극에 달했던 때라 학생들을 멋대로 다루어도 그럭저럭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촌지나 편애, 차별 심지어 비리도 당연했던 시절이였다. 그리고 훗날 교사들의 이런 행태를 보며 자란 아이들이 교사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채 성인이 되고 학부모가 되면서 교권은 급격히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대를 겪고 자라 성인이 된 학부모들도 불과 2000년대만해도 과반수가 자기 자녀가 선생한테 심하게 맞거나 촌지 등으로 차별대우를 받아도 오히려 선생을 두둔하며 자녀를 야단쳤다. 이상하게 보여도 이 시기의 교권의 문제점을 겪은 86세대까지 교권을 지나치게 남발하는것을 묵인하는 분위기였으니. 잘못된 교권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만큼 당시의 교권의 폐해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교권의 추락은 이러한 권위적인 교사들이 오랜기간 만든 자업자득+학생인권에 대한 재평가가 기인했다 볼 수 있다.[3] 나중에 본인이 진행하는 JTBC 뉴스룸 2016년 9월 13일자 앵커브리핑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던, 9월의 밤 건넌방의 공포'에서 이 집에서의 기억이 회상된다. 해당방영분의 내용은 2016년 경주 지진에서 보여준 국민안전처의 미적거리는 대응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영상[4] 당시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가 3대 명문고로 꼽혔다. 당시 경기고는 서울대 300명 이상, 서울고는 200명 이상, 경복고는 150명 이상의 합격자를 냈다. 그다음으로는 남고 중에서는 용산고, 서울사대부고(공학)가 80명 이상, 중동고, 경동고, 보성고, 중앙고 등이 30 ~ 50명 정도의 합격자를 냈다. 이 밑으로 양정고, 동성고, 휘문고, 대광고, 배재고가 하위권을 형성하며 20명 이하의 서울대 합격자수를 냈다.[5] 연기자 출신이자 무언극인 난타의 기획자로 유명한 그 송승환 사장이 맞다.[6] 이때 구입한 앨범이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만토바니의 영화 OST 모음집이었다고 한다.[7] 수학 교육에 계산기 사용을 넣냐 마냐를 다루었다. 그런데 미국 생활 때 가게에서 뭘 사는데 계산기를 안 가져온 점원이 2자릿수 계산을 못해 버벅이는 것을 자신이 암산해서 답을 알려주자 점원이 존경하는 눈으로 봤다며 '근데 전 수포자였습니다.'라고 마무리. 그리고 이 수포자 언급은 비교적 덜 진지해지는 코너에서 수학 관련 꼭지를 다루면 가끔 나온다.[8] 공교롭게도 고등학교와 대학 모두 후기 모집 학교에 합격했다.[9] 전 국가보훈처장이다.[10] 2007년 2월 대전광역시로 이전했다.[11] 차승원을 모델 데뷔를 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자기 아들로 위장하여 키웠다는 점에, 말종과 결혼하여 정신적 타격을 입은 김주하와의 반대적 상황에 희한하다는 말도 있었다.[12] 여담으로 이때 자신이 맡고 있던 라디오 음악프로그램도 그만두어야 했다고 한다. 본인이 회상하기론 "이때 점차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는데, 만약 기자로 전직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한다"고. 그 프로그램은 <젊음의 음악캠프>로 보이며 강석, 손석희 등이 진행을 맡았었다고 배철수가 언급한 바 있다.[13] 실제로도 이 당시 서울시 정책에 관한 뉴스를 많이 리포트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대한민국 방송 사상 최악의 생방송 사고로 꼽히는 귓속에 도청장치 사건인데, 이 당시 강성구 앵커가 소개하려 했던 기사가 바로 손석희가 취재한 서울 지하철 관련 기사였다. 어쨌든 본인은 자기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불만이었다고 한다.[14] 김재철 전 보도제작국장 증언이다. 다만, 이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면 그다지 신뢰는 가지 않는다[15] 한편으로 1989년 1월까지 손석희의 기자 리포트 영상이 MBC 뉴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한동안 아나운서와 기자를 병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89년 4월 23일, 새로 신설된 일요일 MBC 뉴스센터 앵커를 맡게 된다.[16] 후일 전종환 아나운서도 똑같은 코스를 밟는다. 그리고 더 전까지 올라가 보면 MBC 아침뉴스를 10년 넘게 진행하고 나중에 한 번 더 한아침뉴스의 엄기영 최우철 앵커도 이 코스를 거쳤다.[17] 물론 당대에 땡전뉴스가 원성의 대상이 되어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시청료 징수율이 매년 큰 폭으로 떨어질 지경이었기에 일선 앵커나 기자들 사이에서 자괴감이 들지 않을리가 없다. 하지만 1980년 언론통폐합을 앞두고 저항적이다 싶은 직원들을 본보기 삼아 찍어냈던 데다가 고문이나 의문사가 횡행하던 시절인지라 권력에 순응했던 것이 현실이었다.[18] 군부대 시찰내용1, 군 부대 시찰내용2, 1987년 개천절 경축사, 직선제 개헌안 국민투표일 공고 등[19] 다만, 이런 뉴스는 세계 어디를 가도 당연히 보도해야 하는 뉴스들이긴 하다. 땡전뉴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시각이다. 굳이 이거 아니어도 깔 건 많다[20] 1989년 주말 뉴스데스크 자리에 1981년부터 1984년까지 편성된 이전의 뉴스센터가 잠깐 부활했다. 그러나 6개월 만인 1989년 10월에 다시 폐지되었고, 이후로 1991년 4월에 다시 부활해서 1993년 10월까지 방송되었다.[21] 4대 뽀미 언니로도 유명하다. 그 덕인지 1995년 뽀뽀뽀 4000회 특집에 가족과 나오기도 했다. 참조[22] 수도권 전철의 요금 인상 검토 관련한 내용이었다.[23] 이 뉴스는 손석희가 MBC에서 마지막으로 진행한 뉴스다.[24] 1대 진행자는 정운영(99. 10~00. 6), 2대 진행자는 유시민(00. 7~02. 1).[25] 손석희는 2006년에 MBC를 퇴사했는데, 이렇게 되면 외부인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니만큼 당연히 출연료를 높게 부를 수밖에 없다. 즉 출연료가 비싸진다는 거 자체는 손석희 본인이 굳이 적게 받지 않는 이상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손석희가 나간 게 2006년인데 하차한 건 2009년으로 3년이나 지난 뒤라는 것. 이미 나간 인물을 상대로 방송국이 3년이라는 장기계약을 했을 가능성은 낮고, 바로 하차시키지는 않았던 시점에서 손석희가 MBC를 떠난 이후에도 손석희를 운영자로 부를 정도로 프로그램이나 제작비엔 별 문제가 없단 것이 스스로 입증된 것이다.[26] 이후 2018년 MBC 사장 취임.[27] 당시 정권 비판적인 클로징멘트를 자주 쏟아내던 신경민 앵커가 1년 만에 뉴스데스크 앵커에서 하차하고 엄기영 사장이 정권의 압박에 못 이겨 사장에서 물러나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28] 다만 퇴사 이후에도 100분 토론과 시선집중은 프리랜서 자격으로 진행했다.[29] 이 소 드립은 후술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TV 토론회에서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가 다시 언급했다. #1[30] 그 당시 사장이던 김재철은 노조탄압으로 악명이 높고 이래저래 일이 터지면서 결국 퇴직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사장직 해임의결을 앞두고 직접 사표를 내고 빠져버렸는데, 이 갑작스런 도주탓에 사장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결국 대전지부 사장이던 김종국이 급하게 본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공석을 매꿨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당연히 대전지부 사장직이 공석이 되는 탓에(...) 그 자리를 메꿀 인물이 필요해 김창옥 아나운서를 대전지부 사장으로 발령낸 것이다.[31] 우측의 여자 앵커는 차예린 아나운서로 2013년에 MBC로 이직한다.[32] 하지만 손석희는 아나운서 국장을 지낸 이력이 있다. 조직지휘를 하긴 했다.[33] 사실이 아니다. 1986~1988년에 기자로 활동했다.[34] 손석희 본인에 생각에 따르면 JTBC는 합리적 진보, 중앙일보는 열린 보수.[35] 물론 2018년 말 대표이사로 승진한 이후에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대표이사이기 때문이다.[36] 2014년 4월 16일 JTBC 뉴스 9에서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면서 이야깃거리가 나왔다. 우선, JTBC 기자의 망언에 가까운 표현으로 분위기가 안 좋던 상황에서 가장 먼저 사과했다.# 의례적인 사과와는 달리 댓글 등을 통해서도 진심을 담은 사과였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평소의 언행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듯 하다. 또한, 내부 보도에서도 순간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손석희는 안전설계 전문가와 전화 인터뷰를 하던 도중 구조대가 침몰한 배에 공기를 주입해 생존 확률을 높이는 작업에 관해 얘기했으나, 전문가는 "여객선 운행 특성상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답했다. 이어 전문가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손석희는, 혀를 차다가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질문을 기다리던 상대방이 '전화가 끊겼나??' 하고 당황했을 정도. 손석희는 바로 질문을 이어갔지만 목이 멘 소리를 내는 등 냉정을 찾기 힘든 듯했다.7분 20초부터. 또한 4월 21일 방송에서는 실종자 가족이 전화 인터뷰 직전 딸의 시신 발견으로 급히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보였다. 관련 영상.[37] 그것도 앉아서 진행하는 게 아니라 방송 끝날 때까지 서서 진행한다. 세트라고 해도 천막 하나 뿐이다. 서서 진행하는 게 뭐가 대수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요즘에는 1시간 30분간 방송한다. 장장 90분간 서서 생방송으로 진행한다고 생각을 해 보자.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것도 와닿지 않는다면, 지상파 진행자들의 진행 방식과 비교해 보시길.[38] "누가 믿고 뉴스를 보냐. 이제 알았어. 뉴스는 다 거짓말이야. 빨리 (중계차) 차 빼"라는 실종자 가족의 발언과 20일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할 때 여러 방송국들의 카메라가 파손당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팽목항에서는 기성 한국 언론에 대한 불신의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손석희 앵커가 현지 진행을 시작한 첫 날, 실종자 가족이 직접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실종자 이모 군의 아버지인 이호진 씨가 찾아와 하소연한 것을, 합의한 후 방송에 내보냈다.[39] 2014년 4월 28일 JTBC 뉴스 9의 시청률은 5.061%. 같은 날 SBS 8 뉴스는 6.0%, MBC 뉴스데스크는 5.6%를 기록했다. 지상파와 케이블 TV간의 시청률 표본집단이 달라서 정확히 비교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여타 종편 채널 뉴스의 시청률이 1%대에 불과함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결국 2014년 4월 29일 JTBC 뉴스 9의 시청률이 처음으로 5.401%를 기록하며 MBC(5.4%)를 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터넷 시청까지 고려한다면 사실상 JTBC 뉴스 9이 뉴스데스크를 앞질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같은 날 SBS 8 뉴스의 시청률은 6.4%.[40] 이전에도 보도담당 사장이긴 했으나 당시에는 편성권이나 보도부문 산하 직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다.[41] 단, 이부분에 대해서 손석희는 인정하지 않았다. 도주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작은 접촉 사고였기에 몰랐다는 내용이다. 기사 측의 말과 일치하는 건, 이후 견인차 기사가 그 견인차로 계속 운전하며 따라와서 손석희의 차를 멈춰 세운 뒤, 경찰에 신고를 하여 경찰이 와서 사건을 접수하고 갔고, 다음날 낮에 다시 경찰서에서 만나 상호 합의하여 손석희가 합의금 150만원을 줘서 끝났다는 부분이다. 기사는 긁은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지만, 손석희는 후일 이 사건에 대해 "실제 그가 내 차를 세운 뒤 내가 긁었다고 주장하길래, 견인차를 봤는데 견인차 기사가 긁혔다고 주장한 부분에 긁힌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전까지 견인차 기사가 나를 적지않은 거리 동안 따라와서 계속 내가 긁었다고 주장했기에, 정말 긁혔으니 그랬을 것이란 생각에 합의하기로 결정한 것이고, 그래서 합의금을 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본인은 못 느낄 정도의 매우 작은 접촉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